카지미에시 바르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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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카지미에시 바르텔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렘베르크(현재 우크라이나 리비우)에서 태어난 폴란드의 수학자, 정치인, 외교관이다. 르부프 공과대학교에서 기계학을 전공하고 기술 과학 박사 학위를 취득한 후, 1917년 르부프 공과대학교 수학 교수가 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중 오스트리아-헝가리군에 징집되었다가 제2 폴란드 공화국에서 철도부 장관, 총리 등을 역임했다. 1920년 폴란드-소비에트 전쟁에서 무공 십자 훈장을 받았으며, 1922년 세임 의원으로 선출되어 활동했다. 1926년부터 1930년까지 여러 차례 총리를 역임했으나, 건강 악화와 의회와의 갈등으로 사임했다. 이후 레오폴리탄 공과대학교 총장으로 복귀했으나, 제2차 세계 대전 중 나치에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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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지미에시 바르텔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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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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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카지미에시 브와디스와프 바르텔 |
출생 | 1882년 3월 3일 |
출생지 | 렘베르크, 갈리치아-로도메리아 왕국, 오스트리아-헝가리 |
사망 | 1941년 7월 26일 (59세) |
사망지 | 렘베르크, 총통관구 |
국적 | 폴란드인 |
배우자 | 마리아 바르톨로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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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 | |
직업 | 국회의원 정치인 수학자 학자 외교관 프리메이슨 |
정치 경력 | |
소속 정당 | BBWR |
폴란드 총리 | 재임 시작: 1929년 12월 29일 재임 종료: 1930년 3월 17일 |
대통령 | 이그나치 모시치츠키 |
이전 | 카지미에시 시비탈스키 |
이후 | 발레리 스와베크 |
폴란드 총리 | 재임 시작: 1928년 6월 27일 재임 종료: 1929년 4월 14일 |
대통령 | 이그나치 모시치츠키 |
이전 | 유제프 피우수트스키 |
이후 | 카지미에시 시비탈스키 |
폴란드 총리 | 재임 시작: 1926년 5월 15일 재임 종료: 1926년 9월 30일 |
대통령 | 마치에이 라타이(권한대행) 이그나치 모시치츠키 |
이전 | 빈첸티 비토스 |
이후 | 유제프 피우수트스키 |
2. 초기 생애와 학업
카지미에시 바르텔은 오스트리아-헝가리 렘베르크(현재 우크라이나 리비우)에서 태어나 노동자 계급 가정에서 성장했다. 스트리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아버지의 주선으로 공예 학교 정비공 견습생으로 일하면서 정규 교육을 계속 받았다.[6]
1901년 중학교를 졸업하고 르부프 공과대학교 기계학과에서 공부해 1907년 최우등으로 졸업했다. 이후 모교에서 사생 기하학 조교로 일했으며, 르부프 프란체스코 대학교와 루트비히 막시밀리안 뮌헨 대학교에서 수학과 철학을 공부했다.[6] 1909년 기술 과학 박사 학위를 받았고, 1912년 하빌리타치온 논문을 발표해 부교수가 되었다.[8] 1917년 르부프 공과대학교 수학 교수가 되었다.[10][11]
제1차 세계 대전 중에는 군에 징집되었다가, 전쟁 후 르부프로 돌아와 폴란드-소비에트 전쟁에 참여했다. 이후 철도부 장관으로 임명되었고, 무공 십자 훈장을 받았다.[6][11] 1921년 미술 연구를 위해 여러 나라를 여행했다.[6]
2. 1. 출생과 가정 환경
카지미에시 브와디스와프 바르텔은 1882년 3월 3일 오스트리아-헝가리의 렘베르크(현재 우크라이나의 리비우)에서 미하우 바르텔과 아말리아 차다체크의 아들로 태어났다.[6] 그는 노동자 계급 가정에서 성장했으며, 스트리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했다.[6] 그의 아버지인 철도원은 바르텔이 공예 학교에서 가르치는 정비공의 견습생이 되도록 주선했는데, 이를 통해 바르텔은 견습생으로 일하면서 정규 교육을 계속 받을 수 있었다.[6]1901년 중학교를 졸업한 바르텔은 르부프 공과대학교 기계 공학과에서 기계학을 공부했다.[6] 1907년에 최우등으로 졸업한 후, 그는 모교에서 플라치드 즈디스라프 지빈스키의 사생 기하학 조교로 일하기 시작했다.[7] 1908년부터 1909년까지 그는 르부프의 프란체스코 대학교와 루트비히 막시밀리안 뮌헨 대학교에서 수학과 철학을 공부했다.[6] 뮌헨에서는 카를 도클레만 교수의 미술사 강의와 아우렐 보스, 알프레트 프린츠하임 교수의 수학 강의를 들었다.[6]
1909년, 그는 기술 과학 박사 학위를 받았는데, 이는 오스트리아-헝가리 내에서 최초의 박사 학위 중 하나였다.[8] 1912년에 하빌리타치온 논문을 발표한 후 부교수 직함을 받았다.[8] 1917년, 르부프 공과대학교의 수학 교수가 되었다.[10][11]
제1차 세계 대전 중 오스트리아-헝가리군에 징집되었다가, 1918년 오스트리아-헝가리 붕괴 후 르부프로 돌아왔다.[11] 1919년 철도 부대 사령관으로서 우크라이나의 포위로부터 도시를 방어하는 데 참여했다.[11] 이후 레오폴드 스쿨스키 총리에 의해 철도부 장관으로 임명되었으며, 폴란드-소비에트 전쟁 이후 중령으로 임명되어 무공 십자 훈장을 받았다.[6][11]
1921년, 바르텔은 미술 연구를 위해 프랑스, 이탈리아, 스위스, 오스트리아의 박물관과 갤러리를 방문했다.[6]
2. 2. 학문적 경력
카지미에시 바르텔은 1901년 르부프 공과대학교 기계 공학과에서 기계학을 공부하기 시작하여 1907년에 최우등으로 졸업했다. 졸업 후에는 모교에서 플라치드 즈디스라프 지빈스키의 사생 기하학 조교로 일했다.[7] 1908년부터 1909년까지는 르부프의 프란체스코 대학교와 루트비히 막시밀리안 뮌헨 대학교에서 수학과 철학을 공부했다. 뮌헨에서는 카를 도클레만 교수의 미술사 강의와 아우렐 보스, 알프레트 프린츠하임 교수의 수학 강의를 들었다.[6]1909년에는 기술 과학 박사 학위를 받았는데, 이는 오스트리아-헝가리 내에서 최초의 박사 학위 중 하나였다. 1912년에는 하빌리타치온 논문을 발표한 후 부교수 직함을 받았다.[8] 이후 미에치스와프 워자르스키를 대신하여 사생 기하학 교수가 되었고,[9] 1917년에는 르부프 공과대학교의 수학 교수가 되었다.[10][11]
제1차 세계 대전 중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군에 징집되었다가, 1918년 오스트리아-헝가리가 붕괴된 후 르부프로 돌아왔다. 1919년에는 철도 부대의 사령관으로서 우크라이나의 포위로부터 도시를 방어하는 데 참여했다. 한편, 사생 기하학에 관한 첫 번째 교과서를 썼다.[6]
1921년에는 미술 연구를 위해 프랑스, 이탈리아, 스위스, 오스트리아의 박물관과 갤러리를 여행하며 6개월을 보냈다. 그는 이 시기에 개인적인 메모와 사진 자료를 수집했다.[6]
3. 정치 및 외교 경력
카지미에시 바르텔은 1922년 폴란드 세임 의원으로 선출되어 1929년까지 의원직을 역임했다.[12] 그는 PSL "해방"당 소속이었으나, 당의 급진화에 만족하지 못하고 1925년 마리안 짐드람-코시치알코프스키, 볼레스와프 비슬루흐와 함께 탈당하여 의회 "노동 클럽"을 창설했다.[12] 이 조직은 유제프 피우수트스키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다.[12] 1926년 5월 쿠데타 직전, 피우수트스키는 바르텔에게 총리직을 맡을 준비를 하라고 지시했다.[12]
3. 1. 정계 입문
1922년 바르텔은 폴란드 세임 의원으로 선출되어 1929년까지 의원직을 유지했다.[12] 처음에는 PSL "해방"당의 일원이었지만, 당의 급진화에 만족하지 못했다. 1925년 3월 폴란드 인민당 의회에서 보상 없는 개혁 등을 채택하기로 결정하자, 바르텔은 마리안 짐드람-코시치알코프스키, 볼레스와프 비슬루흐와 함께 1925년 4월에 당과 조직을 떠나 의회 "노동 클럽"을 창설했다.[12] 이 조직은 곧 최고 사령관 유제프 피우수트스키의 직접적인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되었다.[12] 1926년 5월 쿠데타 직전에 바르텔은 원수 피우수트스키로부터 대통령 스타니스와프 보이체호프스키와 그의 정부가 붕괴될 것으로 예상됨에 따라 총리직을 인수할 준비를 하라는 명령을 받았다.[12]3. 2. 총리 재임 (1926-1930)
카지미에시 바르텔은 1926년부터 1930년까지 총 다섯 차례에 걸쳐 폴란드 제2공화국의 총리직을 역임했다. 잦은 정권 교체와 의회와의 갈등 속에서도 행정 개혁, 소수 민족 권리 증진, 경제 발전을 위해 노력했다.1928년 3월, 유제프 피우수트스키는 바르텔을 세임 의장으로 임명하려 했다. 정부 협력을 위한 초당파 블록(BBWR)은 바르텔의 후보 지명을 선언했지만, 폴란드 사회당의 이그나치 다신스키가 세임 원수로 선출되면서 실패했다. 이에 BBWR 의원들은 항의하며 회의장을 떠났다.
같은 해, 바르텔의 저서 "Perspektywa Malarska"가 출판되었다. 이 책은 원근법의 기본 이론과 건축 및 예술로의 확장에 대해 다루었으며, 1934년 독일어로 번역 출판되었다.[6]
3. 2. 1. 1차 임기 (1926)

1926년 5월 15일, 빈센티 비토스가 이끄는 정부와 5월 쿠데타 이후 보이치에흐 보이치에호프스키 대통령이 사임한 후, 바르텔은 폴란드 Sejm 원수이자 국가 원수 대행인 마체이 라타이에 의해 제2 폴란드 공화국의 총리로 임명되었다.[13] 그러나 바르텔은 나중에 취임 연설에서 새 대통령 선거가 있을 때까지만 정부 수반을 맡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결정은 신장과 위장 문제로 고통받고 끊임없이 고통스러웠다는 사실에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 한 국회의원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는 쾌활하고 야심 찬 사람이었지만 항상 고통스러워했다. 심지어 Sejm의 반대자들도 바르텔과 같은 사람에게 호의를 갖지 않기가 매우 어렵다는 것을 개인적인 관계에서 인정했다. 총리로서 그는 자신의 정책과 정부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포함하여 가능한 모든 사람을 도우려고 노력했지만, 자신을 도울 수 없었고, 이는 폴란드 공화국의 정치 및 외교에서 그의 조기 쇠퇴로 이어졌다. 그는 체격이 약하고 건강이 좋지 않아 특히 동부의 사회주의자나 공산주의자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지 못할 것이고, 따라서 그는 영향력 있는 총리나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외교관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pl
바르텔의 새로운 정부는 주로 어떤 정당과도 관련이 없는 사람들로 구성되었으며(이 정치인 4명은 이미 장관직을 맡고 있었다), 이념적으로 중도주의자로 묘사되었다. 총리의 새로 설립된 사무실은 우익과 좌익 지도자 모두가 점령했다. 바르텔은 차례로 장관직을 맡았고, 유제프 피우수트스키는 전쟁부 장관을 맡았다. 이러한 시스템은 주로 5월 쿠데타를 지지했던 폴란드 사회당을 뒤흔들었다. 1926년 5월 16일, 바르텔 총리는 자신의 정책 원칙을 강조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바르텔은 내각이 헌법 질서에 대한 어떠한 선입견 없이 법에 따라 권력을 잡았다고 밝혔다. 그는 또한 평화, 근면, 폴란드 국민에 대한 헌신을 촉구했다. 동시에 그는 제2 폴란드 공화국의 미래 경제 성장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무능하고 부패한 정치인들을 모든 고위직에서 즉시 제거하겠다고 약속했다. 바르텔의 정치 및 외교 분야의 가장 가까운 개인 고문은 새로운 장관을 지지했던 유제프 피우수트스키 원수였다.[13]
바르텔은 이그나치 모시치츠키가 국가 원수(대통령) 후보가 되어야 한다고 제안했는데, 그는 또한 르부프 공과대학의 교수이기도 했다. 바르텔의 첫 번째 정부는 폴란드 역사상 가장 활발한 정부 중 하나였다. 정치인과 국회의원들은 정치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이틀에 한 번, 때로는 매일 모였다. 1926년 6월 4일, 이그나치 모시치츠키가 제2 폴란드 공화국의 대통령으로 선출되었고, 바르텔은 전체 내각과 함께 사임했지만, 곧 임명된 후 모시치츠키 대통령은 그를 다시 총리로 지명했다.
3. 2. 2. 2차 및 3차 임기 (1926)
1926년 8월, 이그나치 모시치츠키 대통령의 지명으로 카지미에시 바르텔은 다시 총리직을 맡아 두 번째 내각을 구성했다.[12][14] 바르텔은 최고 군사 당국 조직에 기반한 법령을 복원하여 국방부가 의회 표결 없이 자유롭게 운영될 수 있도록 했다.[12] 이는 1926년 6월 9일에 공식적으로 복원되었지만, 총리나 국가 원수의 권한을 부처에 부여하는 또 다른 법령이 채택되었다.[12]바르텔은 의회 제도에 대한 헌신을 강조하면서도, 국가 경제 발전에 대한 우려를 표명했다.[12] 그는 관료주의에 맞서 싸우고, 비정치적인 군대를 도입하며, 공공사업부를 폐지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12] 그는 5월 쿠데타 이전에는 민주주의가 없었고, 폴란드가 과두 정치, 귀족, 부유한 사립 클럽과 정당의 영향력 있는 지도자들에 의해 통치되었다고 주장했다.[12]
바르텔 정부는 행정 개선에 기여했으며, 효율적인 정부 행동 시스템을 만들었다.[14] 그는 각 부처의 효율성을 검증하고, 장관들이 정치 활동에 관여하지 못하도록 했다.[14] 또한, 폴란드 유대인과 전국 유대인 소수 민족의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했다.[14] 그는 차르 시대의 규정 잔재를 제거하고, 유대인 공동체를 공식적으로 인정하며, 경제 제재를 완화하는 법률을 추진했다.[14]

1926년 8월 2일, 의회는 헌법 수정안을 채택하여 대통령의 권한을 강화했다. 그러나 1926년 9월 20일, 기독교 민주당은 바르텔 정부의 두 장관에 대한 불신임 투표를 제기했고, 이는 바르텔 내각의 사임으로 이어졌다.[14] 그러나 유제프 피우수트스키 원수는 모시치키 대통령에게 바르텔을 다시 총리로 임명하도록 명령했다. 잦은 정부 변화에 대한 반발과 의회와의 갈등 속에서 바르텔의 세 번째 내각은 단 4일 만에 끝나게 되었다.[14]
1926년 9월 30일, 바르샤바의 벨베데르궁에서 열린 회의에서 세 번째 정부 해산이 결정되었다. 바르텔은 모시치키 대통령에게 해산 문서에 서명할 것을 요청했지만, 모시치키는 서명을 거부하고 바르텔에게 해고를 명령했다.[14] 결국 바르텔은 다시 사임해야 했고, 폴란드 원수인 피우수트스키가 총리직을 맡게 되었다.[14]
3. 2. 3. 4차 및 5차 임기 (1928-1930)
1928년 총선 이후, 유제프 피우수트스키는 카지미에시 바르텔을 다시 총리로 임명했다. 그러나 의회와의 갈등은 심화되었다. 일부 정치인들은 장관들에게 썩은 음식을 던지기도 했고, 장관들은 경호원이나 경찰과 함께 이동해야 했다.[15]1929년, 반(反)사나치아 운동 세력은 재무 장관 가브리엘 체호비치가 BBWR 캠페인을 위해 국가 예산을 사용했다는 "체호비치 사건"을 폭로했다. 이들은 체호비치와 바르텔을 국가 재판소에 회부할 것을 요청했고, 바르텔은 이에 항의하며 사임 의사를 밝혔다. 1929년 4월 13일, 바르텔은 사임했고, 카지미에시 시비탈스키가 총리직을 이어받았다. 그러나 시비탈스키 내각에 대한 불신임 결의안이 채택되면서, 바르텔은 다시 총리가 되었다.

1929년 12월 29일, 바르텔은 다시 총리로 선출되었지만, 건강 악화로 업무 수행에 어려움을 겪었다. 그는 신장 질환과 우울증, 불안에 시달렸다.[15]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르텔은 의회와의 협력을 위해 노력했지만, 관계는 다시 악화되었다. 알렉산데르 프리스토르 노동 및 사회 복지부 장관에 대한 불신임 결의안 채택 요구는 이러한 갈등의 절정을 보여주었다.
1930년 3월 12일, 바르텔은 상원에서 의원들을 비판하며 사임을 결정했고, 3월 15일에 사임했다. 발레리 스와베크가 새로운 총리로 임명되었다.[13]
3. 3. 피우수트스키와의 관계
사임 이후 바르텔은 유제프 피우수트스키의 개인 위원회에서 부총리 겸 종교 및 공공 계몽부 장관을 맡았다. 피우수트스키는 국방 및 외교 정책에 주력하여 내각에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고, 바르텔은 부재 시 피우수트스키를 대신하여 임무를 수행하고 세임 의장이 될 예정이었다. 그는 정부 대표로서 예산 및 재정과 관련된 문제에 대해 자주 발언했는데, 이는 "피우수트스키 지지자"와 의회 야당 사이의 주요 논쟁 주제였을 가능성이 있다.1928년 3월 선거 이후 피우수트스키는 바르텔을 세임 의장으로 임명하기로 결정했다. 3월 27일, 피우수트스키와 그의 사나치아 운동과 밀접하게 연관된 정부 협력을 위한 초당파 블록(BBWR)은 바르텔의 후보 지명을 선언했다. 그러나 바르텔을 세임 의장으로 앉히려는 피우수트스키의 계획은 실패했는데, 상원 의원과 국회의원들이 대신 폴란드 사회당의 이그나치 다신스키를 세임 원수로 선택했기 때문이다. 항의의 표시로 투표 결과에 따라 의회 BBWR당의 의원들과 지지자들은 회의장을 떠났다.[6]
4. 은퇴 이후의 삶과 죽음
카지미에시 바르텔은 1939년 폴란드 침공 당시 르비우 방어전에서 시민 위원회 수장으로 활동했다. 르비우가 소련에 점령된 후에도 대학교에서 강의를 계속했으며, 1940년에는 모스크바로 소환되어 소련 학교를 위한 교과서를 집필하는 계약을 맺었다.[16] 모스크바 체류 중 소련이 그에게 정치적 협력을 제안했는지에 대해서는 상반된 주장이 존재한다. 그의 측근은 요시프 스탈린이 새로운 폴란드 정부 구성을 제안했지만 바르텔이 거절했다고 주장하는 반면, 독일 측 자료에는 바르텔이 소련과 협력하여 나치 독일에 대항하는 국가를 세우려 했다는 내용이 있다. 그러나 후자의 주장은 사실로 확인되지 않았다.[16]
블라디슬라프 시코르스키 런던 망명 정부 총리는 바르텔을 대사로 임명하려 했으나, 소련에서 그를 찾지 못해 스타니스와프 코트를 대신 임명했다. 1941년 독일의 소련 침공 직후 바르텔은 게슈타포에 체포되어 Łąckiego 거리의 감옥으로 이송되었다.[6] 나치 관리들은 그에게 폴란드 괴뢰 정부 수립을 제안했지만, 바르텔은 이를 거절하고 1941년 7월 26일 르비우 교수 학살과 관련하여 처형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17] 1943년, 존더코만도는 살해 흔적을 없애기 위해 시신을 불태웠다.[17][14] 1966년, 그의 죽음을 기리는 기념비가 크라쿠프에 설치되었다.
4. 1. 학계 복귀
정계 은퇴 후, 바르텔은 레오프(르비우) 공과대학교로 돌아갔다. 같은 해 그는 대학교 총장으로 선출되어 1930/1931 학년도에 그 직책을 역임했다. 그는 또한 명예 박사 학위와 폴란드 과학 아카데미 회원 자격을 받았다. 1930년부터 1932년까지 그는 폴란드 수학회의 회장이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유럽 회화의 원근법에 관한 일련의 강의를 포함하여 가장 중요한 작품들을 출판했는데, 이는 세계 최초의 출판물이었다. 레오프 공과대학교에서 일하는 동안 그는 유대인 학생들을 폴란드 및 기독교 동료들과 분리하기 위해 이른바 "게토 벤치"를 도입하려는 계획에 강력히 반대했다. 그의 의견과 반유대주의 학생들에 대한 다른 행동들은 바르텔을 수많은 공격의 대상으로 만들었다. 예를 들어, 그에게 달걀과 썩은 음식을 던지거나, 국수주의를 가진 폴란드 민족주의자들이 "바르텔"이라는 표지판이 달린 돼지를 대학교 부지로 데려오는 등의 공격을 받았다.[2]1932년, 그는 브레스트 재판의 증인으로 증언했다. 이 재판은 1931년 10월 26일부터 1932년 1월 13일까지 바르샤바 지방 법원에서 열렸으며, "중앙 좌파" 반사나치아 정치 반대 운동인 센트로레프의 지도자들이 재판을 받았다. 1937년, 바르텔은 사망한 에밀 보브로프스키를 대신하여 대통령에 의해 폴란드 상원의원으로 임명되었으며, 제2차 세계 대전 발발까지 그 직을 수행했다. 1938년 가을, 그는 국가의 독립 위협과 관련하여 야당 대표들을 정부에 참여시킬 것을 요구하는 문서에 서명했다. 그 문서는 또한 브레스트 재판 이후 망명하거나 투옥된 야당 정치인들에 대한 사면을 요구했다. 바르텔은 모시치키 대통령에게 메모를 전달했지만, 모시치키는 그 제안에 응답하지 않았다. 1939년 2월, 바르텔은 상원에서 연설을 했는데, 이는 국내에서 널리 알려졌다. 그는 이 연설에서 폴란드 전역의 대학교 상황을 날카롭게 비판했고, 그곳에서 만연한 반유대주의와 실패한 학업, 과목, 강좌 구성을 언급했다.[2]
4. 2. 제2차 세계 대전과 죽음
1939년 9월 폴란드 침공 당시, 카지미에시 바르텔은 독일군의 공격 직전 르비우 방어전에서 시민 위원회의 수장으로 활동했다. 르비우가 소련에 점령된 후에도 기술 대학교에서 강의를 계속할 수 있었다. 1940년 7월, 그는 다른 정치인 및 교수들과 함께 모스크바로 소환되어 전 소련 대학교 위원회 회의에 참여했고, 소련 학교를 위한 과학 및 기하학 교과서를 집필하기로 계약을 맺었다.[16]모스크바 체류 중 소련이 그에게 정치적 협력을 제안했는지에 대해서는 상반된 보고가 있다. 그의 측근에 따르면 요시프 스탈린은 새로운 폴란드 정부 창설을 제안했지만 바르텔은 이를 거절했다고 한다. 반면, 독일 외무부에 보낸 편지에서는 바르텔이 1941년 초 소련과 협상하여 나치 독일에 대항하는 새로운 국가를 설립하려 했다는 내용이 있었다. 그러나 이 정보는 사실로 입증되지 않았다.[16]
런던 망명 정부 총리 블라디슬라프 시코르스키는 바르텔과 협력하여 그를 대사로 임명할 계획을 세웠고, 1941년 6월 19일 바르텔의 임명을 공식적으로 보고했다. 그러나 시코르스키는 소련에서 바르텔을 찾지 못했고, 대신 스타니스와프 코트가 대사로 임명되었다.
1941년 6월 30일, 독일의 소련 침공 직후 독일 국방군이 르비우에 진입했다. 바르텔은 7월 2일 체포되어 처음에는 펠친스카 거리의 게슈타포 감옥으로 이송되었다가, 7월 21일 Łąckiego 거리의 감옥으로 이송되었다.[6]
일부 자료에 따르면, 나치 관리들은 독일 제국에 의존하는 폴란드 괴뢰 정부 수립을 제안했다. 블라디슬라프 시코르스키는 1941년 11월 카이로에서 열린 기자 회견에서 바르텔이 이를 거절했고, 하인리히 힘러의 명령에 따라 1941년 7월 26일 새벽에 처형되었다고 밝혔다. 그는 르비우 교수 학살과 관련하여 ''Piaski Janowskie'' 근처에서 총살당한 것으로 추정된다.[17] 바르텔의 아내는 7월 26일 남편의 죽음을 통보받았다.[6]
1943년 10월, 존더코만도가 집단 무덤에 묻힌 폴란드 교수들의 시신을 파냈다. 이는 다가오는 소련군과 관련하여 살해 흔적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었다. 시신 더미는 불태워졌고, 재는 주변 밭에 흩뿌려졌다.[17][14]
1966년, 크라쿠프의 성 프란치스코 아시시 교회에 나치즘 희생자들의 이름이 새겨진 현판이 설치되었으며, 바르텔을 기리는 별도의 묘비도 있다.
5. 유산
바르텔이 원근법 연구에 중요한 가치를 두었기 때문에, 그의 아내는 나치 관리들에게 간청하여 그가 죽은 후 그의 원고를 보존했다. 바르텔의 장서들은 가구 일부와 함께 독일로 옮겨지거나, 그의 개인적인 서류들과 함께 불태워졌다.[6] 그의 두 번째 책은 폴란드어판 네거티브 필름을 Ksiaznica-Atlas에 제공할 B. G. Teubner에 의해 독일어로 먼저 출판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전쟁으로 인해 인쇄가 지연되었고, 결국 모든 자료가 파괴되었다.[6] 1950년대에, 두 번째 책은 생존한 원고와 Teubner가 바르텔의 승인을 위해 보낸 교정본을 사용하여 그단스크 대학교의 F. 오토 교수에 의해 재구성되었다.[6] 이 책은 그림을 기하학적으로 분석하고, 그림에 나타난 기하학의 예술적 재구성을 다루었으며, 그의 원근법 이론의 원리를 사용하여 미술사를 추적했다. Polskie Wydawnictwo Naukowe에 의해 균일한 시리즈가 발간되었으며, 두 번째 책은 1958년에, 첫 번째 책은 1960년에 출간되었다.[6]
6. 서훈
백독수리 훈장(1932년), 프랑스 레지옹 도뇌르 훈장 (1등급), 무공 십자훈장, 독립 십자훈장, 비르투티 밀리타리 훈장 은십자장(1922년)을 수여받았다.[1]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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