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지스 그리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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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카지스 그리뉴스는 리투아니아의 독립 운동가이자 정치인으로, 1866년에 태어나 1950년에 사망했다. 그는 모스크바 대학교에서 의학을 전공한 후 의사로 활동하며, 리투아니아 민족 부흥 운동에 참여했다. 1918년 리투아니아 독립 후에는 정치 활동을 시작하여, 1920년부터 1922년까지 총리를 역임했고, 1926년에는 대통령에 선출되었으나, 같은 해 발생한 쿠데타로 인해 실각했다. 이후 미국으로 망명하여 생을 마감했으며, 그의 유해는 1994년 리투아니아로 이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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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지스 그리뉴스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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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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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일 | 1866년 12월 17일 |
출생지 | 셀레마, 아우구스토프 현, 러시아 제국 |
사망일 | 1950년 6월 4일 |
사망지 | 미국 일리노이주 시카고 |
배우자 | 요아나 파발키테-그리니우비에네 크리스티나 아르사이테-그리니에네 |
자녀 | 류타스 그리뉴스 (1989년 사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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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책 | |
제3대 리투아니아 대통령 | 임기 시작: 1926년 6월 7일 임기 종료: 1926년 12월 17일 이전: 알렉산드라스 스툴긴스키스 이후: 요나스 스타우가이티스 (대행) |
제6대 리투아니아 총리 | 대통령: 알렉산드라스 스툴긴스키스 임기 시작: 1920년 6월 19일 임기 종료: 1922년 1월 18일 이전: 에르네스타스 갈바나우스카스 이후: 에르네스타스 갈바나우스카스 |
정치 | |
정당 | 리투아니아 농민인민연합 |
학력 | |
모교 | 모스크바 제국대학교 (1893년 졸업) |
기타 정보 | |
민족의 의인 | 홀로코스트 시기 유대인을 구출한 공로로 인정됨 |
2. 초기 생애 및 교육 (1866-1893)
카지스 그리뉴스는 1866년 12월 17일 당시 러시아 제국의 지배를 받던 콩그레스 폴란드의 아우구스토프 현, 셀레마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1560년 볼로크 개혁 당시 수발키야 지역으로 이주한 귀족(''szlachta'') 출신이었다. 그리뉴스는 11명의 자녀 중 셋째였으며, 그의 아버지 빈차스 그리뉴스(1837–1915)는 15헥타르의 토지를 소유한 농부였다. 빈차스는 1월 봉기의 작가이자 지도자였던 미칼로유스 아켈라이티스의 조카로, 러시아어와 폴란드어를 구사했으며, 기도서와 라우리나스 이빈스키스, 모테유스 발란추스, 페트라스 빌레이시스의 작품을 소장한 작은 도서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뉴스의 어머니 오나 그리뉴비에네(1839–1919)는 독실한 가톨릭교회 신자였다. 그의 형제자매 중 요나스 그리뉴스(1877–1954)와 오나 그리뉴테-바체비치엔(1884–1972)은 리투아니아 출판 금지령 기간 동안 리투아니아 책 밀수업자로 활동했다. 오나의 조카 비타우타스 바체비치우스-비건다스는 리투아니아 자유군, 포빌라스 플레차비치우스의 리투아니아 영토 방위군의 장교였으며, 리투아니아 파르티잔의 타우라스 군구 본부장이기도 했다.
그는 어머니에게 글을, 아버지에게 셈과 글쓰기를 배웠다. 1876년, 9세의 나이로 오슈키니에의 러시아 초등학교에 입학했으며, 3개월 후 구델리아이의 학교로 옮겨 다녔다. 또한 마리얌폴레의 학교에 다니다가 1879년 12세의 나이로 마리얌폴레 김나지움에 입학했다. 이 지역에서 리투아니아어는 금지된 언어가 아니었고 선택 과목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그리뉴스는 3학년부터 리투아니아어 수업을 듣기 전까지는 주로 급우들과 폴란드어를 사용했다. 그의 가정교사는 페트라스 아르미나스-트루피넬리스와 페트라스 크리아우치우나스였다. 1883년 첫 리투아니아 신문 ''아우슈라''의 발간에 영감을 받아, 그리뉴스는 미래의 시인 요나스 마치스-케크슈타스와 함께 자신들의 신문인 ''프리에샤우슈리스''를 발간했다. 그리뉴스는 또한 기도문이 폴란드어가 아닌 리투아니아어로 진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후 그리뉴스는 ''아우슈라''와 다른 불법 출판물들을 밀수하기 시작했는데, 때로는 프로이센에서 직접 가져오기도 했다.
모스크바 대학교에서 의학을 전공한 카지스 그리뉴스는 내과의사가 되었다.[22] 1887년에 모스크바 대학교에서 의학 공부를 시작했고, 리투아니아 학생들의 비밀 단체의 회원이 되었다. 그는 졸업할 때까지 1889년부터 이 단체의 회장을 맡았다. 이 단체는 학생들의 자율 교육과 자급자족을 조직하고, 라트비아 및 폴란드 학생 단체와 협력하여 리투아니아 언론을 배포했다. 그리뉴스는 단체가 복권으로 얻은 300 루블을 리투아니아 서적 출판에 사용해야 한다고 제안했고, 학생들은 이후 리투아니아 서적 출판 기금(''Fondas lietuvių knygoms leisti'')을 설립했다. 빈차스 쿠디르카와 함께 마리얌폴레에서 리투아니아 민주주의자들의 첫 번째 회의에 참석하여, ''Varpas'' 신문을 발행하기로 결정했다. 1893년에는 Varpininkai 조직 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리뉴스는 ''Ūkininkas''의 출판을 조직했다. 다른 학생들과 함께 그는 1892년 틸시트(현재의 소베츠크)에서 출판된 ''고대 리투아니아의 간략한 역사''(''Trumpa senovės Lietuvių istorija'')를 저술했다. 방학 동안 그리뉴스는 리투아니아를 여행하며 리투아니아 신문을 배포하고, "반국가 선전"을 주도하며, 민속 자료를 수집했다. 1899년 러시아 학생 파업의 일원으로서, 그리뉴스는 9일 동안 체포되어 부티르카 감옥에 수감되었다. 1892년, 그는 민스크에서 콜레라 환자를 치료한 의사였다. 학창 시절 그리니우스는 가난하고 금욕적인 삶을 살았다. 졸업 후 그리니우스는 리투아니아에 정착할 돈이 충분하지 않아 약 9개월 동안 카스피해에서 선박 의사가 되었다.
1896년 요아나 그리뉴비에네와 결혼하여 비르발리스에서 살았으며, 슬하에 아들 카지스와 딸 그라지나를 두었다.[22]
2. 1. 가족 배경 및 어린 시절
카지스 그리뉴스는 1866년 12월 17일 당시 러시아 제국의 지배를 받던 콩그레스 폴란드의 아우구스토프 현, 셀레마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1560년 볼로크 개혁 당시 수발키야 지역으로 이주한 귀족(''szlachta'') 출신이었다.그리뉴스는 11명의 자녀 중 셋째였으며, 그의 아버지 빈차스 그리뉴스(1837–1915)는 15헥타르의 토지를 소유한 농부였다. 빈차스는 1월 봉기의 작가이자 지도자였던 미칼로유스 아켈라이티스의 조카로, 러시아어와 폴란드어를 구사했으며, 기도서와 라우리나스 이빈스키스, 모테유스 발란추스, 페트라스 빌레이시스의 작품을 소장한 작은 도서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뉴스의 어머니 오나 그리뉴비에네(1839–1919)는 독실한 가톨릭교회 신자였다.
그의 형제자매 중 요나스 그리뉴스(1877–1954)와 오나 그리뉴테-바체비치엔(1884–1972)은 리투아니아 출판 금지령 기간 동안 리투아니아 책 밀수업자로 활동했다. 오나의 조카 비타우타스 바체비치우스-비건다스는 리투아니아 자유군, 포빌라스 플레차비치우스의 리투아니아 영토 방위군의 장교였으며, 리투아니아 파르티잔의 타우라스 군구 본부장이기도 했다.
그리뉴스는 모스크바 대학교에서 의학을 전공하고 내과의사가 되었으나, 어린 시절부터 리투아니아의 정치에 관심을 가져 러시아 당국의 박해를 받았다. 1896년 요아나 그리뉴비에네와 결혼하여 비르발리스에서 살았으며, 슬하에 아들 카지스와 딸 그라지나를 두었다.[22]
2. 2. 학창 시절
카지스 그리뉴스는 리투아니아가 러시아의 지배를 받던 시기에 태어났다. 그는 어머니에게 글을, 아버지에게 셈과 글쓰기를 배웠다. 1876년, 9세의 나이로 오슈키니에의 러시아 초등학교에 입학했으며, 3개월 후 구델리아이의 학교로 옮겨 다녔다. 또한 마리얌폴레의 학교에 다니다가 1879년 12세의 나이로 마리얌폴레 김나지움에 입학했다. 이 지역에서 리투아니아어는 금지된 언어가 아니었고 선택 과목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그리뉴스는 3학년부터 리투아니아어 수업을 듣기 전까지는 주로 급우들과 폴란드어를 사용했다. 그의 가정교사는 페트라스 아르미나스-트루피넬리스와 페트라스 크리아우치우나스였다.1883년 첫 리투아니아 신문 ''아우슈라''의 발간에 영감을 받아, 그리뉴스는 미래의 시인 요나스 마치스-케크슈타스와 함께 자신들의 신문인 ''프리에샤우슈리스''를 발간했다. 그리뉴스는 또한 기도문이 폴란드어가 아닌 리투아니아어로 진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후 그리뉴스는 ''아우슈라''와 다른 불법 출판물들을 밀수하기 시작했는데, 때로는 프로이센에서 직접 가져오기도 했다.
그는 모스크바 대학교에서 의학을 전공하였고, 후에 내과의사가 되었다. 어린 나이에 리투아니아의 정치에 관심을 갖게 되었지만, 이로 인해 러시아 당국으로부터 박해를 받았다.
2. 3. 모스크바 대학교 의학 전공
모스크바 대학교에서 의학을 전공한 카지스 그리뉴스는 내과의사가 되었다.[22] 1887년에 모스크바 대학교에서 의학 공부를 시작했고, 리투아니아 학생들의 비밀 단체의 회원이 되었다. 그는 졸업할 때까지 1889년부터 이 단체의 회장을 맡았다. 이 단체는 학생들의 자율 교육과 자급자족을 조직하고, 라트비아 및 폴란드 학생 단체와 협력하여 리투아니아 언론을 배포했다. 그리뉴스는 단체가 복권으로 얻은 300 루블을 리투아니아 서적 출판에 사용해야 한다고 제안했고, 학생들은 이후 리투아니아 서적 출판 기금(''Fondas lietuvių knygoms leisti'')을 설립했다. 빈차스 쿠디르카와 함께 마리얌폴레에서 리투아니아 민주주의자들의 첫 번째 회의에 참석하여, ''Varpas'' 신문을 발행하기로 결정했다. 1893년에는 Varpininkai 조직 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리뉴스는 ''Ūkininkas''의 출판을 조직했다. 다른 학생들과 함께 그는 1892년 틸시트(현재의 소베츠크)에서 출판된 ''고대 리투아니아의 간략한 역사''(''Trumpa senovės Lietuvių istorija'')를 저술했다. 방학 동안 그리뉴스는 리투아니아를 여행하며 리투아니아 신문을 배포하고, "반국가 선전"을 주도하며, 민속 자료를 수집했다. 1899년 러시아 학생 파업의 일원으로서, 그리뉴스는 9일 동안 체포되어 부티르카 감옥에 수감되었다. 1892년, 그는 민스크에서 콜레라 환자를 치료한 의사였다. 학창 시절 그리니우스는 가난하고 금욕적인 삶을 살았다. 졸업 후 그리니우스는 리투아니아에 정착할 돈이 충분하지 않아 약 9개월 동안 카스피해에서 선박 의사가 되었다.3. 의사 및 민족 운동가 활동 (1894-1918)
모스크바 대학교에서 의학을 전공한 후 내과의사가 되었다.[22] 어린 나이에 리투아니아의 정치에 관심을 갖게 되었지만, 이로 인해 러시아 당국으로부터 박해를 받았다. 1896년, 요아나 그리뉴비에네와 결혼하였다.[22] 결혼 후 비르발리스에서 살았으며, 3년 후 아들인 카지스를, 또 3년 후에는 딸인 그라지나를 낳았다. 1차 세계 대전 당시 그는 키슬로보츠크에서 살게 되었으나, 1918년 붉은 군대가 아내와 딸을 살해하여 현재 그들은 키슬로보츠크에 위치한 공동묘지에 묻혀있다.
카지스 그리뉴스는 리투아니아가 러시아 제국의 지배를 받던 시기에 리투아니아 민족 부흥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는 모스크바 대학교에서 의학을 공부하면서 리투아니아 학생들의 비밀 단체를 조직하고, 리투아니아 언론을 배포하는 등 민족 운동에 앞장섰다.[8] 1889년에는 리투아니아 학생 단체의 회장을 맡아 리투아니아 서적 출판 기금을 설립하는 데 기여했다. 빈차스 쿠디르카와 함께 Varpas 신문 발행을 결정하고, Varpininkai 조직 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는 등 리투아니아 민족 운동의 핵심 인물로 활동했다.[8]
그는 리투아니아 사회 민주당과 리투아니아 민주당 창립에 참여하고, 당 강령을 작성하는 등 정치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또한, ''Ūkininkas''를 편집하고, ''고대 리투아니아의 간략한 역사''를 저술하는 등 언론 및 출판 활동을 통해 리투아니아 민족의식을 고취했다.[8] 책 밀수업자로 활동하고, 리투아니아 문화 운동의 중심지 역할을 한 그의 집은 우즈네문에 지역(네무나스 강 서쪽)에서 리투아니아 민족 운동의 중요한 거점이었다.[8]
1905년 빌뉴스 대 세이마스에서 그는 리투아니아인들에게 러시아 제국으로 부터의 완전한 독립을 요구하며, 자치권을 주장하는데 앞장섰다.
그리뉴스는 Šviesa 단체의 창립 멤버로서 학교 설립, 교육 강좌, 서점 설립 등 리투아니아 교육 및 문화 발전을 위해 노력했다. 차르 정부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Lietuvos žinios와 Lietuvos ūkininkas를 편집하며 언론 활동을 이어갔다.[9][10] 그는 비밀 책 밀수 조직 Sietynas의 일원이었으며, 다양한 주제의 출판물을 통해 리투아니아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지식을 보급하는 데 힘썼다.[11][12]
1918년 리투아니아 독립 후, 리투아니아 농부 인민 연합의 당원이 되었다. 1947년 미국으로 이주하였고,[21] 1950년 시카고에서 사망하였다.[21]
3. 1. 의사 활동
모스크바 대학교에서 의학을 전공한 후 내과의사가 되었다.[22] 어린 나이에 리투아니아의 정치에 관심을 갖게 되었지만, 이로 인해 러시아 당국으로부터 박해를 받았다. 1896년, 요아나 그리뉴비에네와 결혼하였다.[22] 결혼 후 비르발리스에서 살았으며, 3년 후 아들인 카지스를, 또 3년 후에는 딸인 그라지나를 낳았다. 1차 세계 대전 당시 그는 키슬로보츠크에서 살게 되었으나, 1918년 붉은 군대가 아내와 딸을 살해하여 현재 그들은 키슬로보츠크에 위치한 공동묘지에 묻혀있다.3. 2. 리투아니아 민족 부흥 운동 참여
카지스 그리뉴스는 모스크바 대학교에서 의학을 전공한 후 내과의사가 되었다. 그는 리투아니아의 정치에 관심을 가지면서 러시아 당국으로부터 박해를 받았다.[22] 1887년 모스크바 대학교에서 의학을 공부하기 시작했고, 리투아니아 학생들의 비밀 단체의 회원이자 회장(1889년)을 맡았다. 이 단체는 학생들의 자율 교육, 자급자족을 조직하고, 라트비아 및 폴란드 학생 단체와 협력하여 리투아니아 언론을 배포했다. 단체가 복권으로 얻은 300 루블을 리투아니아 서적 출판에 사용하자고 제안하여, 학생들은 리투아니아 서적 출판 기금(''Fondas lietuvių knygoms leisti'')을 설립했다. 미국에서 발간되는 신문 ''Lietuviškasis balsas''에 첫 기사를 게재했다. 1888년, 빈차스 쿠디르카와 함께 마리얌폴레에서 열린 리투아니아 민주주의자들의 첫 번째 회의에 참석하여, ''Varpas'' 신문을 발행하기로 결정했다. 1893년에는 Varpininkai 조직 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Ūkininkas''의 출판을 조직했으며, 다른 학생들과 함께 1892년 틸시트(현재의 소베츠크)에서 출판된 ''고대 리투아니아의 간략한 역사''(''Trumpa senovės Lietuvių istorija'')를 저술했다. 방학 동안 리투아니아를 여행하며 리투아니아 신문을 배포하고, "반국가 선전"을 주도하며, 민속 자료를 수집했다.[8] 1899년 러시아 학생 파업에 참여하여 9일 동안 부티르카 감옥에 수감되었다. 1892년, 민스크에서 콜레라 환자를 치료했다. 졸업 후 약 9개월 동안 카스피해에서 선박 의사로 일했다.1894년 리투아니아로 돌아와 마리얌폴레에서 의사로 일했다. 1896년 비르발리스로 이주했고, 이후 쿠디르코스 나우미에스티스로 이주했다. 리투아니아 사회 민주당 창립을 도왔고, 첫 신문 ''Lietuvos darbininkas''를 준비하고, 당 강령을 폴란드어에서 리투아니아어로 번역했다. 1902년 리투아니아 민주당 창립에 참여했고, 1906년 당 강령 및 농민 연합 강령을 작성했다. 리투아니아 민중 사회 민주당의 활동적인 멤버로서 ''Varpas''의 마지막 판을 편집했다. 1898년부터 1902년까지 필비슈키아이에서 살았으며, 지역 책 밀수업자로 활동했다. 1897년부터 1899년까지 ''Ūkininkas''를 편집했다. 마리얌폴레로 돌아온 후, 리투아니아 문화 활동으로 잠시 투옥되었다. 그의 가족 집은 우즈네문에 지역(네무나스 강 서쪽)에서 리투아니아 문화 운동의 중심지가 되었다.[8] 그리뉴스는 지역 농민들이 수와우키 현의 주지사에게 보내는 청원서를 작성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1905년 빌뉴스에서 살았고, 1906년 마리얌폴레로 돌아와 아내와 함께 2주 동안 투옥되었다.
그리뉴스는 1905년 Šviesa의 창립 멤버 중 한 명이었다. 이 단체는 학교 설립, 교육 야간 강좌, 서점 설립, 리투아니아 출판물 배포, 젊은 학생 지원에 전념했다. 1907년 합법화되어 수와우키 현에서 23개 지부로 확장되었으나, 1908년 차르 정부의 수색으로 그리뉴스 등이 칼바리아 감옥에 수감되었다. 그 후 빌뉴스로 이사했고, 1911년 단체가 해산되었다.[9] 1906년, "리투아니아의 올바른 토지 관리"(''Teisingas žemės valdymas Lietuvoje'')라는 책을 출판했다. 1908년부터 1910년까지 빌뉴스에서 살았다. 1909년 가브리엘레 페트케비차이테-비테와 함께 ''Lietuvos žinios''를 편집했고, 1910년 알비나스 림카와 함께 ''Lietuvos ūkininkas''를 편집했다.[10] 마리얌폴레에서 한 달 반 동안 투옥되었다. 비밀 책 밀수 Sietynas 조직의 일원이었으며,[11] 식물학, 의학, 역사 등 다양한 주제로 출판했다.[12]
1918년 리투아니아 독립 후, 리투아니아 농부 인민 연합의 당원이 되었다. 1947년 미국으로 이주하였고,[21] 1950년 시카고에서 사망하였다.[21]
4. 제1차 세계 대전과 망명 (1914-1918)
제1차 세계 대전 동안 그리니우스와 그의 가족은 전선에서 벗어나 러시아 깊숙한 곳으로 이동했다. 그는 1915년 북부 캅카스에 도착하여, 처음에는 날치크에서, 그 다음에는 그로즈니 근처의 전쟁 병원에서 주치의로 1918년까지 그곳에서 일했다.[13] 캅카스에 있는 동안 그리니우스는 리투아니아 난민들을 돌보았다.[13] 1917년 그리니우스, 요나스 야블론스키스, 그리고 프라나스 마쇼타스는 보로네시에서 새로운 권위 아래 모든 정당을 통합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러시아 리투아니아인 최고 위원회를 설립했다.[13]
러시아 내전이 시작되는 동안 그리니우스와 그의 가족은 키슬로보츠크에 살았는데, 그곳에서 볼셰비키 군대가 1918년 10월 8일 그의 아내를 총살하고 그의 딸에게 치명상을 입혔다.[13] 그들은 인근 정교회 묘지에 묻혔다.[13] 그리니우스와 그의 두 아들, 카지스, 유르기스는 노보로시스크로 도망쳐 그곳에서 지중해로 가는 배를 타고 프랑스로 간 다음 11월에 리투아니아로 돌아왔다.[13] 이 시점에서 유르기스는 병들어 리투아니아에 도착하지 못하고 사망했다. 그는 프랑스 남부에 묻혔다.[13]
5. 정치 경력 (1919-1926)
1918년 리투아니아가 독립하자, 그리뉴스는 리투아니아 농부 인민 연합의 당원이 되었다. 1919년, 파리에 본부를 둔 리투아니아 귀환 위원회의 의장을 맡아 독일의 리투아니아 전쟁 포로들의 귀국을 도왔다. 같은 해에 리투아니아로 돌아와 리투아니아 인민 사회 민주당과 농민 연합 간의 블록의 지도자로서 리투아니아 제헌 의회 선거를 준비했다.[22]
그리뉴스는 리투아니아 독립법에 언급된 의회 소집을 적극적으로 옹호하며, 1919년에 의회를 선출한 에스토니아를 예시로 들며, 이를 소집하는 데 지체한 우익 정당들을 비판했다. 1920년에는 마리얌폴레 시의회에 선출되어 의장이 되었다. 카우나스 수비대 반란 이후 그는 안타나스 스메토나 대통령에게 가능한 한 빨리 선거를 치를 것을 촉구했다. 1920년 4월 14~15일에 치러진 선거에서 그리뉴스의 블록은 기독 민주당에 이어 2위를 차지했다. 그리뉴스는 의회 의장 알렉산드라스 스툴긴스키스에게 자신의 정당을 떠나 신중하게 법을 준비할 것을 촉구했다. 그는 소수 민족의 이익을 옹호하여, 폴란드 대표들을 위원회 작업에 포함시키고, 유대인들이 원하는 언어로 발언할 수 있도록 허용할 것을 제안했다. 또한 사면이 선언될 때까지 사형을 집행하지 않도록 규정하는 결의안을 만들었다.[22]
1920년 6월 19일, 그리뉴스는 기독 민주당과 농민 연합이 이끄는 정부 연합의 총리가 되었고, 1922년 2월 2일까지 그 직위를 유지했다. 그의 재임 기간 동안 그리뉴스 정부는 소비에트 연방과의 협상을 마무리하는 평화 조약을 체결하고, 폴란드와의 국경을 확정했으며, 폴 하이만스가 제안한 이 국가와의 연합을 거부했다. 국제 연맹에 가입 또한 성사시켰다. 세금 제도가 개혁되었고, 병원과 학교가 설립 및 확장되었으며, 대중교통이 개발되었다. 리투아니아 드라마 극장 설립과 미칼로유스 콘스탄티나스 칠리오니스의 그림 보존, 그리고 비타우타스 마그누스 대학교 (당시 리투아니아 대학교) 설립을 위한 자금이 할당되었다. 부패와 싸웠고 토지 개혁을 위한 준비 작업이 완료되었다. 그러나 러시아 제국에서 압수되어 정교회에 넘어간 가톨릭 교회를 위해 토지를 회수하려 했던 기독교 민주당이 농민 연합과 의견 차이를 보이면서 정부 연합이 해체되었다. 1922년 1월 13일, 농민 연합의 일부가 그리니우스를 총리직에서 해임했고, 그리니우스는 1월 18일 공식적으로 사임했다. 정부는 에르네스타스 갈바나우스카스의 내각에 의해 계승되었다.[22]
그리뉴스는 리투아니아 농부 인민 연합의 대표로서 제1, 제2, 제3 리투아니아 국회에 선출되었다. 그는 1922년 8월 1일에 시작된 리투아니아 헌법 초안을 준비하는 데 기여했다. 그는 언론의 자유와 소수 민족의 권리를 옹호하고, 의료 및 교육에 대한 더 많은 관심을 촉구했다. 빈차스 크레베-미체비치우스, 아우구스티나스 볼데마라스, 안타나스 스메토나, 유오자스 푸리키스와 같은 사람들이 외교적 노력을 소련에 집중하여 리투아니아가 빌뉴스 지역을 되찾고 폴란드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할 수 있기를 바랐던 것을 비판했다. 1924년, 그리니우스는 "Mūsų rusofilai"(우리의 친러파)라는 제목의 기사를 발표했는데, 그 기사에서 그는 "차르 러시아 제국주의를 포기하지 않은 소련이 빌뉴스를 리투아니아에 넘겨주리라고 믿는 것은 순진한 생각"이라고 적으며, 정부가 오히려 영국 및 다른 발트 국가들과 동맹을 맺을 것을 장려했다.
1926년 리투아니아의 대통령이 되었다.[22] 재임 기간 동안 그리뉴스는 빌뉴스 지역에 대한 리투아니아의 권리를 인정한 소련과의 불가침 조약을 체결하였다.[14] 또한 도로 건설, 산업, 교육 및 문화 사업에 예산을 할당하고, 계엄령과 검열 제한을 폐지하였다.[14] 독일 및 소련과의 무역 협상도 시작되었다.[14] 그리니우스 대통령은 관용차 대신 자가용을 이용하여 마을을 방문하는 것을 선호했다.[15]
그러나 그리뉴스의 민주적 개혁은 보수주의자들의 반대에 직면했다.[14] 카지스 스키르파의 군 개혁 역시 장교들의 반감을 샀다. 1926년 12월 17일, 그리뉴스의 생일 저녁, 리투아니아 민족주의자 연합이 주도하는 쿠데타가 발생하여 권위주의 정부가 들어섰다.[14] 그리뉴스는 이 쿠데타를 사회에 대한 범죄라고 비난하며 민족주의자, 기독교 민주당, 그리고 군의 일부를 비난했다.[14] 그는 쿠데타의 원인이 독립 초창기, 군주제를 열망했던 민족주의자들에게 있다고 밝혔다. 아우구스티나스 볼데마라스는 독일 특사에게 쿠데타에 대한 구상이 1922년부터 있었다고 언급했다.
민족주의자들은 군부대 지휘관들이 모두 그리니우스의 생일에 초대되었다는 사실을 이용하여 군 및 민간 기관을 장악하고 미콜라스 슐레제비치우스와 그리니우스를 체포했다. 그리뉴스는 "리투아니아를 가능한 불행으로부터 구하기 위해" 즉시 사임했다. 안타나스 스메토나와 그의 정당은 공산주의자들의 정권 장악이 임박했다는 거짓 주장을 내세워 쿠데타를 정당화했다.[14]
5. 1. 리투아니아 귀환 위원회 활동
1918년 리투아니아가 독립하자, 그리뉴스는 리투아니아 농부 인민 연합의 당원이 되었다. 1920년부터 1922년까지 최고장관직을 맡았고, 1926년 쿠데타로 안타나스 스메토나가 집권하기 전까지 리투아니아의 대통령이었다.5. 2. 제헌 의회 의원 및 총리 (1920-1922)
리투아니아가 러시아의 지배를 받던 시절 태어난 그리뉴스는 모스크바 대학교에서 의학을 전공한 후 내과의사가 되었다. 어린 시절부터 리투아니아의 정치에 관심을 가졌으나, 러시아 당국의 박해를 받았다.[22] 1918년 리투아니아가 독립하자, 리투아니아 농부 인민 연합의 당원이 되었다. 1919년, 파리에 본부를 둔 리투아니아 귀환 위원회의 의장을 맡아 독일의 리투아니아 전쟁 포로들의 귀국을 도왔다. 같은 해에 리투아니아로 돌아와 리투아니아 인민 사회 민주당과 농민 연합 간의 블록의 지도자로서 리투아니아 제헌 의회 선거를 준비했다.[22]그리뉴스는 리투아니아 독립법에 언급된 의회 소집을 적극적으로 옹호하며, 1919년에 의회를 선출한 에스토니아를 예시로 들며, 이를 소집하는 데 지체한 우익 정당들을 비판했다. 1920년에는 마리얌폴레 시의회에 선출되어 의장이 되었다. 카우나스 수비대 반란 이후 그는 안타나스 스메토나 대통령에게 가능한 한 빨리 선거를 치를 것을 촉구했다. 1920년 4월 14~15일에 치러진 선거에서 그리뉴스의 블록은 기독 민주당에 이어 2위를 차지했다. 그리뉴스는 의회 의장 알렉산드라스 스툴긴스키스에게 자신의 정당을 떠나 신중하게 법을 준비할 것을 촉구했다. 그는 소수 민족의 이익을 옹호하여, 폴란드 대표들을 위원회 작업에 포함시키고, 유대인들이 원하는 언어로 발언할 수 있도록 허용할 것을 제안했다. 또한 사면이 선언될 때까지 사형을 집행하지 않도록 규정하는 결의안을 만들었다.[22]
1920년 6월 19일, 그리뉴스는 기독 민주당과 농민 연합이 이끄는 정부 연합의 총리가 되었고, 1922년 2월 2일까지 그 직위를 유지했다. 그의 재임 기간 동안 그리뉴스 정부는 소비에트 연방과의 협상을 마무리하는 평화 조약을 체결하고, 폴란드와의 국경을 확정했으며, 폴 하이만스가 제안한 이 국가와의 연합을 거부했다. 국제 연맹에 가입 또한 성사시켰다. 세금 제도가 개혁되었고, 병원과 학교가 설립 및 확장되었으며, 대중교통이 개발되었다. 리투아니아 드라마 극장 설립과 미칼로유스 콘스탄티나스 칠리오니스의 그림 보존, 그리고 비타우타스 마그누스 대학교 (당시 리투아니아 대학교) 설립을 위한 자금이 할당되었다. 부패와 싸웠고 토지 개혁을 위한 준비 작업이 완료되었다. 그러나 러시아 제국에서 압수되어 정교회에 넘어간 가톨릭 교회를 위해 토지를 회수하려 했던 기독교 민주당이 농민 연합과 의견 차이를 보이면서 정부 연합이 해체되었다. 1922년 1월 13일, 농민 연합의 일부가 그리니우스를 총리직에서 해임했고, 그리니우스는 1월 18일 공식적으로 사임했다. 정부는 에르네스타스 갈바나우스카스의 내각에 의해 계승되었다.[22] 1920년부터 1922년까지 최고장관직을 맡았고, 1926년 리투아니아의 대통령이 되었으나, 안타나스 스메토나 장군의 쿠데타로 실각했다.[22]
5. 3. 국회 의원 (1922-1926)
그리뉴스는 리투아니아 농부 인민 연합의 대표로서 제1, 제2, 제3 리투아니아 국회에 선출되었다. 그는 1922년 8월 1일에 시작된 리투아니아 헌법 초안을 준비하는 데 기여했다. 그는 언론의 자유와 소수 민족의 권리를 옹호하고, 의료 및 교육에 대한 더 많은 관심을 촉구했다. 빈차스 크레베-미체비치우스, 아우구스티나스 볼데마라스, 안타나스 스메토나, 유오자스 푸리키스와 같은 사람들이 외교적 노력을 소련에 집중하여 리투아니아가 빌뉴스 지역을 되찾고 폴란드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할 수 있기를 바랐던 것을 비판했다. 1924년, 그리니우스는 "Mūsų rusofilai"(우리의 친러파)라는 제목의 기사를 발표했는데, 그 기사에서 그는 "차르 러시아 제국주의를 포기하지 않은 소련이 빌뉴스를 리투아니아에 넘겨주리라고 믿는 것은 순진한 생각"이라고 적으며, 정부가 오히려 영국 및 다른 발트 국가들과 동맹을 맺을 것을 장려했다.5. 4. 대통령 선출과 1926년 쿠데타 (1926)
1918년 리투아니아가 독립한 후, 그리뉴스는 리투아니아 농부 인민 연합의 당원이 되었다.[22] 1920년부터 1922년까지 최고장관직을 맡았고, 1926년 리투아니아의 대통령이 되었다.[22] 재임 기간 동안 그리뉴스는 빌뉴스 지역에 대한 리투아니아의 권리를 인정한 소련과의 불가침 조약을 체결하였다.[14] 또한 도로 건설, 산업, 교육 및 문화 사업에 예산을 할당하고, 계엄령과 검열 제한을 폐지하였다.[14] 독일 및 소련과의 무역 협상도 시작되었다.[14] 그리니우스 대통령은 관용차 대신 자가용을 이용하여 마을을 방문하는 것을 선호했다.[15]그러나 그리뉴스의 민주적 개혁은 보수주의자들의 반대에 직면했다.[14] 카지스 스키르파의 군 개혁 역시 장교들의 반감을 샀다. 1926년 12월 17일, 그리뉴스의 생일 저녁, 리투아니아 민족주의자 연합이 주도하는 쿠데타가 발생하여 권위주의 정부가 들어섰다.[14] 그리뉴스는 이 쿠데타를 사회에 대한 범죄라고 비난하며 민족주의자, 기독교 민주당, 그리고 군의 일부를 비난했다.[14] 그는 쿠데타의 원인이 독립 초창기, 군주제를 열망했던 민족주의자들에게 있다고 밝혔다. 아우구스티나스 볼데마라스는 독일 특사에게 쿠데타에 대한 구상이 1922년부터 있었다고 언급했다.
민족주의자들은 군부대 지휘관들이 모두 그리니우스의 생일에 초대되었다는 사실을 이용하여 군 및 민간 기관을 장악하고 미콜라스 슐레제비치우스와 그리니우스를 체포했다. 그리니우스는 "리투아니아를 가능한 불행으로부터 구하기 위해" 즉시 사임했다. 안타나스 스메토나와 그의 정당은 공산주의자들의 정권 장악이 임박했다는 거짓 주장을 내세워 쿠데타를 정당화했다.[14]
6. 쿠데타 이후의 삶 (1926-1950)
쿠데타 이후, 그리뉴스는 카우나스 시립 자치구에서 계속 일하며 의료 시스템의 토대를 구축했다. 1928년 12월 6일, 그는 1,200 리타스의 영구 연금을 받았다. 그는 몇몇 건강 단체를 이끌고, "결핵과의 싸움"(''Kova su džiova'')과 "우유 한 방울"(''Pieno lašas'') 신문을 편집하고, 소설 및 과학 문헌을 번역하면서 의사 경력을 이어갔다. 1939년 ''Varpininkų kelias''라는 저널에 실린 기사에서 그는 미래의 리투아니아가 민주주의 국가가 될 것이며 국민이 의회 대신 직접 대통령을 선출해야 한다는 등 민주 사회의 이점을 설명했다. 다른 저널에서는 리투아니아 유대인에 대한 비폭력을 옹호했다.
1941년 나치 독일이 리투아니아를 침공했을 때, 그리뉴스는 독일군에 협력하라는 명령을 거부했다.[21] 소련 점령 기간 동안 그는 신문 ''Liaudies sveikata''의 편집자로 활동했으며 카우나스 위생 박물관을 이끌었다.[16] 1942년, 나치 독일 점령 기간 동안 그리뉴스는 콘라다스 알렉사, 미콜라스 크루파비츄스와 함께 유대인 학살과 리투아니아 식민지화에 대한 내용의 메모를 카우나스에 있는 독일 총독에게 서명했다.[16] 메모 작성자들은 즉시 체포되었다. 알렉사와 크루파비츄스는 독일로 이송되었고, 그리니우스는 그의 고향인 셀레마로 추방되었다.[16][21]
리투아니아가 러시아의 지배를 받던 시절 태어난 그리뉴스는 모스크바 대학교에서 의학을 전공하고 내과의사가 되었다.[22] 어린 시절부터 리투아니아의 정치에 관심을 가졌으나, 이로 인해 러시아 당국의 박해를 받았다.[22]
1918년 리투아니아 독립 후, 리투아니아 농부 인민 연합의 당원이 되었다.[22] 1920년부터 1922년까지 최고장관직을, 1926년에는 리투아니아 대통령이 되었으나, 안타나스 스메토나 장군의 쿠데타로 실각했다.[22] 스메토나 독재 정권 하에서는 공산주의자라는 음모를 뒤집어쓰기도 했다.[22]
1941년 독일 침공 당시 독일군에 협력하라는 명령을 거부했다.[21] 이후 소련의 침공으로 서방으로 도피하였고, 1944년 가족의 도움을 받아 서방으로 이주하는 과정에서 그의 사진, 편지 등 기록 보관소가 파괴되었다.[21] 독일 난민 수용소에서 회고록을 다시 쓰기 시작, 1947년 튀빙겐에서 회고록 1권을 출판하였다.[21] 같은 해 미국으로 이주하여 리투아니아 망명자 언론과 협력하였다.[21] 그리니우스는 16개국 지도자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편지를 쓰기도 했다.
1950년 6월 4일 시카고에서 사망했고,[17] 유골과 유해는 1994년 10월 8일 리투아니아로 옮겨져 몬지기레의 셀레마 근처에 묻혔다.[18]
6. 1. 나치 독일 점령기 저항 활동
1941년 나치 독일이 리투아니아를 침공했을 때, 그리뉴스는 독일군에 협력하라는 명령을 거부했다.[21] 소련 점령 기간 동안 그는 신문 ''Liaudies sveikata''의 편집자로 활동했으며 카우나스 위생 박물관을 이끌었다.[16] 1942년, 나치 독일 점령 기간 동안 그리뉴스는 콘라다스 알렉사, 미콜라스 크루파비츄스와 함께 유대인 학살과 리투아니아 식민지화에 대한 내용의 메모를 카우나스에 있는 독일 총독에게 서명했다.[16] 메모 작성자들은 즉시 체포되었다. 알렉사와 크루파비츄스는 독일로 이송되었고, 그리니우스는 그의 고향인 셀레마로 추방되었다.[16][21]6. 2. 미국 망명과 죽음
리투아니아가 러시아의 지배를 받던 시절 태어난 그리뉴스는 모스크바 대학교에서 의학을 전공하고 내과의사가 되었다.[22] 어린 시절부터 리투아니아의 정치에 관심을 가졌으나, 이로 인해 러시아 당국의 박해를 받았다.[22]1918년 리투아니아 독립 후, 리투아니아 농부 인민 연합의 당원이 되었다.[22] 1920년부터 1922년까지 최고장관직을, 1926년에는 리투아니아 대통령이 되었으나, 안타나스 스메토나 장군의 쿠데타로 실각했다.[22] 스메토나 독재 정권 하에서는 공산주의자라는 음모를 뒤집어쓰기도 했다.[22]
1941년 독일 침공 당시 독일군에 협력하라는 명령을 거부했다.[21] 이후 소련의 침공으로 서방으로 도피하였고, 1944년 가족의 도움을 받아 서방으로 이주하는 과정에서 그의 사진, 편지 등 기록 보관소가 파괴되었다.[21] 독일 난민 수용소에서 회고록을 다시 쓰기 시작, 1947년 튀빙겐에서 회고록 1권을 출판하였다.[21] 같은 해 미국으로 이주하여 리투아니아 망명자 언론과 협력하였다.[21] 그리니우스는 16개국 지도자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편지를 쓰기도 했다.
1950년 6월 4일 시카고에서 사망했고,[17] 유골과 유해는 1994년 10월 8일 리투아니아로 옮겨져 몬지기레의 셀레마 근처에 묻혔다.[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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没後の2009年3月、リトアニア国会が「リトアニア共和国大統領」の称号を授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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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리타니아 백과사전 - 카지스 그리니우스
http://www.britann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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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본명은 요아나 카발피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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