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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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칸무리는 일본의 전통적인 관모로, 머리 장식을 의미하는 고부리(kōburi)에서 유래되었다. 야요이 시대에는 하치마키와 유사한 형태가 존재했으며, 고분 시대에는 금동관과 관모가 발굴되었다. 603년 십이 계위 제도를 통해 지위와 연관성을 갖게 되었고, 요로 율령의 의복 규정에 따라 조정 의복 착용 시 토킨(頭巾)을 사용하며 칸무리의 기원이 되었다. 헤이안 시대에는 칸무리와 소쿠타이(束帯)로 대체되었으며, 몬라(文羅)라는 무늬를 직조한 칸무리가 사용되기도 했다. 에도 시대에는 에이가 똑바로 선 고-류에이(御立纓)가 도입되었고, 메이지 유신 이후 서양식 복장으로 바뀌면서 사용이 감소했지만, 현재 황족과 신도 신관들이 의식에 사용하고 있다. 칸무리는 크게 머리 부분, 코지(巾子), 에이(纓)로 구성되며, 벤칸(冕冠), 라이칸(礼冠), 스이에이(垂纓) 등 다양한 종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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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 - 왕관
왕관은 군주나 고위 성직자의 권위와 위엄을 상징하는 머리 장식으로, 고대부터 현대까지 다양한 형태, 재료, 의미를 지니며 각국의 역사와 문화를 반영하는 중요한 유물이다. - 관 - 제관
제관은 황제의 지위를 상징하는 관으로, 다양한 문화권과 시대에 걸쳐 독특한 형태로 제작되었으며, 중세 유럽의 왕관, 비잔티움 제국의 스테마, 잉글랜드의 폐쇄형 왕관 등이 각 제국의 역사와 문화를 반영한다. - 일본의 문화 - 친일
친일은 일본에 대한 긍정적 감정이나 일본 관련 동향에 대한 긍정적 해석을 의미하며, 일제강점기 친일반민족행위자를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되며, 국가 간 관계, 문화적 교류, 경제적 영향 등 다양한 요소가 친일 감정 형성에 복합적으로 작용한다. - 일본의 문화 - 오타쿠
오타쿠는 특정 대상에 집착적인 관심을 보이는 사람을 뜻하는 일본어로, 과거 부정적 의미로 사용되기도 했으나 현재는 중립적이거나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되며, 아키하바라를 중심으로 발전하여 전 세계적으로 확산된 문화를 지칭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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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역사
삼국지의 위지 왜인전에는 야요이 시대 일본 남성들이 머리에 닥나무 천만 두르고 다녔다는 묘사가 있는데, 이는 당시에는 아직 관이 없었고 하치마키(머리띠)와 비슷한 것이 있었음을 보여준다.[3]
하위 섹션에서 고대, 중세, 근세 시대의 칸무리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다루고 있으므로, 여기서는 칸무리의 역사를 간략하게 요약하고, 근대 이후의 변화를 중심으로 작성한다.
- 고대: 고분 시대부터 관위십이계 제도를 거쳐 나라 시대에 이르기까지 칸무리는 신분을 나타내는 중요한 상징이었다. 초기에는 비단 모자 형태였으나 점차 검은 옻칠을 한 형태로 변화했다.
- 중세: 헤이안 시대에 들어서면서 칸무리는 일본 고유의 국풍문화의 영향을 받아 소쿠타이와 함께 착용하는 형태로 변화했다. 옻칠 기술이 발전하고, 오닌의 난 이후에는 무늬를 넣는 방식이 변화하는 등 다양한 변화를 겪었다.
- 근세: 에도 시대에는 황제 전용의 御立纓|고류에이|어립영일본어 칸무리가 등장했고, 형태와 제작 방식에서 여러 변화가 있었다.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 귀족의 정식 복장이 서양식으로 바뀌면서 칸무리의 사용은 급격히 감소했다. 현재 황족 구성원은 즉위, 결혼 및 의식에 칸무리를 사용한다. 신도 신관들도 오늘날에도 여전히 칸무리를 사용한다.
메이지 천황의 즉위식에서는 그 당시까지 사용되었던 벤칸이 중국풍이 너무 강하다는 이유로 거부되었고, 대신 御立纓|고류에이일본어가 사용되었다. 御立纓|고류에이일본어는 이후 다이쇼 천황, 쇼와 천황, 아키히토, 나루히토의 즉위식에서도 사용되었다.[10]
메이지 이후, 단발의 영향으로 인해 관은 머리에 쓸 수 있는 대형의 것이 되었다. 또한 머리를 덮기 위해 더위를 빼기 위해, 천황의 관에는 두 번 당겨진 투각을, 황족 및 신하는 쳇바퀴 모양의 투각을 넣게 되었다.
2. 1. 어원
'''칸무리'''(かんむり|Kanmuri일본어)는 원래 "머리 장식"을 의미하는 こうぶり|kōburi일본어가 변형된 단어이다. 칸무리의 주요 재료는 금, 은, 도금, 천 또는 옻칠로 굳힌 천이었다. 그러나 점차적으로 귀족이 예복(''속타이'')과 함께 착용하는 옻칠로 고정된 천 머리 장식을 주로 지칭하게 되었다.칸무리는 한자로 冠으로 표기하며, 음독(중국어식 발음)으로는 ''칸''으로도 발음된다. 또한, 다양한 종류의 칸무리를 나타내기 위해 다른 단어에 접미사로 추가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벤칸''(冕冠|벤칸일본어), ''라이칸''(礼冠|라이칸일본어), 垂纓冠|스이에이칸일본어, 巻纓冠|켄에이칸일본어 등이 있다.
2. 2. 고대
고분 시대에는 에타 후나야마 고분, 후지노키 고분 등 각지의 고분에서 금동제 관과 관모가 출토되었다.[3]공식적으로 신분과 칸무리가 연결된 것은 603년에 제정된 관위십이계 제도부터이다. 쇼토쿠 태자의 비(妃)의 지도하에 제작되었다고 전해지는 덴쥬코쿠 슈초 만다라에 따르면, 이 시점의 칸무리는 비단으로 만든 모자와 같은 것으로, 색깔은 관위에 대응하여 빨강, 파랑, 검정, 보라 등 6가지 색의 농담이 있었다.
일본서기 덴무 천황 14년 (685년) 7월 조에는 위계에 대응하는 색깔별 조복이 도입되었고, 관은 검은색 칠사관으로 통일되었다는 기록이 있다.[13]
일본 칸무리의 직접적인 기원은 요로 율령의 의복령(이부쿠료)에 나오는 조복에 쓰이는 '두건(토킨)'으로 여겨진다. 이는 당나라의 상복에 사용된 푸터우와 유사하다.
두건은 검은 비단으로 만든 봉투 모양에 앞뒤로 총 4개의 끈이 달린 쓰개였다. '''건자'''(코지)라고 하는 검은 옻칠을 한 오동나무로 만든 통으로 땋은 머리를 덮은 후 머리에 썼다. 일본에서 출토되는 건자는 삼베로 보이는 틈새가 있는 평직 천에 옻칠을 하여 메쉬 상태로 만든 것이다.
머리 위에서 묶는 앞 끈은 '''상초'''(아게오), 뒷머리에서 묶는 뒤 끈은 '''영'''(에이)이라고 불렀다. 당나라에서는 양쪽을 "각(脚)"이라고 불렀고, 영은 정식 관의 턱끈을 의미했다. 이 시점에서는 건자와 본체가 별개였으며, 영은 본체를 고정하는 끈이었다.
이후 상초는 형해화되고 '''영'''은 점차 길어졌다. '''건자'''와 본체는 일체화되었지만, 관착이라는 원복 의식 때만 "'''방건자'''(하나치코지)"라는 본체와 건자를 따로 만들어 장착 후 끈으로 묶어 고정했다.
2. 3. 중세
고분 시대에는 에타 후나야마 고분과 후지노키 고분 등 일본 전역의 고분에서 금동관과 관모가 발굴되었다.일본에서 지위와 칸무리(''冠'')의 공식적인 연관성은 603년 십이 계위 제도가 시작되면서 나타났다. 수서 (636)에 실린 일본에 대한 설명에는 "수나라 시대에 그 (일본) 왕이 처음으로 관의 제도를 만들었다. 관은 비단이나 무늬가 있는 천으로 만들어졌고, 금이나 은 꽃 장식으로 더 장식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4]
덴주코쿠 슈초 만다라 (622)는 쇼토쿠 태자의 아내의 지시에 따라 제작되었다고 전해지며, 당시 칸무리가 관위에 따라 빨강, 파랑, 검정, 보라 등과 같은 색상의 비단 모자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일본 칸무리의 직접적인 기원은 요로 율령의 의복 규정에 따라 조정 의복(朝服|조복일본어)을 착용할 때 착용했던 토킨(頭巾|두건일본어)으로 여겨진다.[5] 이것은 당나라의 평상복에 사용된 푸터우(幞頭중국어)와 유사하다.

귀족의 첫 번째 정식 복장은 라이후쿠(礼服|예복일본어)였으며, 이 복장에는 라이칸이라고 불리는 금속 및 천 관을 착용했고, 조정 의복이 두 번째 정식 복장이었다.
토킨은 모자의 앞면과 뒷면에 4개의 끈(길고 좁은 천)이 부착된 검은색 비단으로 만들어진 모자였다. 앞쪽 두 끈은 머리 꼭대기에 묶는 것을 아게오라고 불렀고, 뒤쪽 두 끈은 머리 뒤쪽에 묶는 것을 엔비(燕尾|연미일본어)라고 불렀다.[6]
라이칸과 라이후쿠는 비쌌고 처음에는 조가(새해 인사) 및 즉위식에만 착용되었으며, 나중에는 즉위식에만 착용되었다. 따라서 토킨과 조정 의복이 사실상 첫 번째 정식 복장이 되었다.
헤이안 시대 (794-1185)에는 중국 문화의 영향이 사라지고 고쿠후 분카(일본식 문화)라고 불리는 독특한 일본 문화가 번성했다. 이러한 영향으로 토킨은 칸무리로, 조정 의복은 소쿠타이로 대체되었다.

쇼토쿠 태자 (547-622)에 대한 그림이지만, "쇼토쿠 태자 그림 전기"(1069)에 묘사된 의상은 헤이안 시대의 것이다. 당시의 칸무리와 소쿠타이는 남아 있지 않으므로 당시 의상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된다.
칸무리 뒤쪽의 끈인 엔비는 에이로 알려지게 되었고, 끈에서 장식으로 바뀌었다. 모자 부분은 검은 옻칠로 굳혔지만, 초창기에는 옻칠이 얇게 입혀져 비가 오면 형태가 망가졌다. 이후에는 옻칠을 더 두껍게 입혀서 굳혔다.
칸무리에 사용되는 얇은 비단은 라(羅)라고 불린다. 라는 라사 직조 기술을 사용한 직물로, 중국에서 발명되어 7세기까지 일본에서 생산되었다.[7] 5품 이상의 귀족을 위한 칸무리는 특수 기술을 사용하여 라에 무늬를 직조했다. 이 무늬가 있는 라는 몬라(文羅|문라일본어)라고 불렸다. 그러나 오닌의 난으로 인해 교토의 대부분이 불타 버리면서 이러한 몬라를 만드는 기술이 사라졌다. 이후 몬라는 라에 직접 무늬를 수놓는 기술로 대체되었다.
가장 오래된 칸무리 중 하나는 도쿠가와 이에야스 (1543-1616), 즉 도쿠가와 막부의 초대 쇼군의 것이다. 그것은 무늬가 없는 라로 만든 칸무리이다.[8]

1687년, 히가시야마 천황의 즉위식을 기념하는 다이조사이 의식에서 수놓은 무늬가 있는 칸무리가 부활했다. 5품 이상의 귀족의 칸무리에는 총 31개 또는 33개의 무늬가 수놓아졌다. 이것을 시게몬(繁文|번문일본어)의 칸무리라고 불렀다. 무늬가 적은 칸무리는 토몬(遠文|원문일본어)의 칸무리라고 불렸으며 귀족의 하위 계급이 착용했다.[9]
에도 시대 (1603-1867)에는 황제 전용으로 에이가 똑바로 서 있는 고류에이(御立纓|어립영일본어)라는 새로운 칸무리가 도입되었다. 처음에는 완벽하게 똑바로 서 있지 않고 부드럽게 구부러져 있었다. 그러나 메이지 천황의 칸무리 이후부터 똑바로 서기 시작했다.[10]
2. 4. 근세
고분 시대에는 에다후네야마 고분, 후지노키 고분 등 각지의 고분에서 금동제 관과 관모가 출토되었다.[3]603년 관위십이계 제정으로 공식적으로 신분과 관이 연결되었는데, 이 시점의 관은 쇼토쿠 태자의 비(妃)가 제작한 덴쥬코쿠 수장에서 보이듯 비단 모자에 관위에 따른 빨강, 파랑, 검정, 보라 등 6가지 색 농담을 사용했다.
일본서기 덴무 천황 14년(685년) 7월 조에는 위계별 조복이 도입되며 관은 검은색 칠사관으로 통일되었다.[13]
일본 관의 직접적 조상은 요로 율령 의복령의 조복에 쓰이는 '두건(토킨)'으로, 당나라 상복의 부두와 유사하다. 두건은 검은 비단 봉투 모양에 앞뒤 4개 끈이 달렸고, '''건자'''(코지)라는 검은 옻칠 오동나무 통으로 땋은 머리를 덮은 후 씌웠다. 일본 출토 건자는 삼베 평직 천에 옻칠한 메쉬 형태다.
머리 위 앞 끈은 '''상초'''(아게오), 뒤 끈은 '''영'''(에이)이라 불렀다. 당나라에서는 양쪽을 "각(脚)"이라 했고, 영은 정식 관의 턱끈을 의미했다. 이 시점에서는 건자와 본체가 별개였고, 영은 본체 고정용 끈이었다.
이후 상초는 형해화되고 '''영'''은 길어져, '''건자'''와 본체가 일체화되었다. 원복 의식인 관착 때만 "'''방건자'''(하나치코지)"라는 별도 본체와 건자를 만들어 끈으로 묶어 고정했다.
헤이안 시대 중기 섭관기 무렵 관은 현대 형태에 가까워졌으나, 옻칠이 얇아 비에 형태가 무너졌다는 기록이 마쿠라노소시 등에 있다.
'''상초'''는 '''건자''' 뿌리 장식이 되고, '''사사지'''(사사가미)라는 화지를 붙여 흔적만 남겼다. '''영'''은 나를 연미 모양으로 늘어뜨린 장식이 되어, '''잠'''이라는 핀으로 땋은 머리를 관통시켜 고정했다.
헤이안 시대 말기 인세이 시대에는 옻칠을 두껍게 해 형태가 무너지지 않는 관이 되었고, 영이 본체에서 분리되어 영병에 꽂아 고정했다.
오닌의 난으로 교토가 전란에 휩싸이며 오위 이상 귀족 관에 쓰던 유문라(무늬를 짜낸 라) 기법이 사라져, 무지 라에 자수를 더해 대용했다.
관은 본래 부드러워 영으로 땋은 머리에 고정했으나, 굳어지며 헤이안 중기부터 잠으로 고정했다. 가마쿠라 시대에는 건자가 높아졌다는 기록이 『쓰레즈레구사』에 있지만, 무로마치 시대에는 "아시카가 요시모치상"(진호지 소장), "전아시카가 요시마사상"(도쿄 국립 박물관 소장)에서 보이듯 소형화되었다. 이때 현서라는 끈으로 고정하기 시작했다.
'''영''' 뿌리가 올라가는 경향이 헤이안 말기부터 있었고, '''영''' 끝이 늘어지지 않고 위로 올라간, 현재 천황이 쓰는 어립영(고류에이) 관이 등장했다. 에도 전기 레이겐 천황 관은 중기보다 크고 부드러웠다. 에도 중기 사쿠라마치 천황 관은 극도로 작아지고 이마 솟아오름도 예각이 되었다. 이 형식이 막말까지 이어졌다.
메이지 이후 단발 때문에 관은 머리에 쓸 수 있게 대형화되었다. 더위를 빼기 위해 천황 관에는 두 번 당겨진 투각을, 황족 및 신하는 쳇바퀴 모양 투각을 넣었다.
2. 5. 근대 이후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 귀족의 정식 복장이 서양식으로 바뀌면서 ''칸무리''의 사용은 급격히 감소했다. 현재 황족 구성원은 즉위, 결혼 및 의식에 ''칸무리''를 사용한다. 신도 신관들도 오늘날에도 여전히 ''칸무리''를 사용한다.메이지 천황의 즉위식에서는 그 당시까지 사용되었던 ''벤칸''이 중국풍이 너무 강하다는 이유로 거부되었고, 대신 ''고-류에이''가 사용되었다. ''고-류에이''는 이후 다이쇼 천황, 쇼와 천황, 아키히토, 나루히토의 즉위식에서도 사용되었다.[10]
메이지 이후, 단발의 영향으로 인해 관은 머리에 쓸 수 있는 대형의 것이 되었다. 또한 머리를 덮기 위해 더위를 빼기 위해, 천황의 관에는 두 번 당겨진 투각을, 황족 및 신하는 쳇바퀴 모양의 투각을 넣게 되었다.
3. 구조
칸무리는 크게 머리에 쓰는 부분, 곤지(こじ)라고 하는 상투를 넣는 부분, 에이(纓)라고 하여 등 뒤로 늘어뜨리는 길고 얇은 천의 세 부분으로 나뉜다.[14]
세부적으로는 머리에 쓰는 부분의 윗부분을 이마(히타이), 가장자리를 옥연(타마베리, 앞면에서 측면을 기, 뒷면을 해라고 부름), 곤지, 에이를 넣는 영호(에츠보), 에이의 뿌리에 있는 영호에 꽂는 영수(에소데), 에이로 구분한다.
부속품으로는 곤지 뿌리에 걸치는 상서(아게오)라는 끈, 상투를 꿰어 고정하는 비녀(칸자시), 무관이 관에 붙이는 수이(緌, 오이카케・코유루기/로켄이라고도 함)라고 하는 말의 털을 부채꼴 모양으로 묶은 끈 달린 귀마개 같은 것 등이 있다. 의식에 따라 꽂은 머리 장식(카자시)이라고 부르는 생화나 조화를 상서에 끼워 넣는 경우도 있다.[14]
가마쿠라 시대에는 축구를 할 때에만 현(懸緒)을 사용했다. 현에는 말의 털로 만든 끈이나 악기 현 등을 사용했지만, 그 중에서도 보라색 꼰 끈인 "자색 꼰 현"(紫組懸緒)이 중시되었다. 무로마치 후기에는 축구가 아님에도 참내에 꼰 현을 사용하는 사례가 보이며, 이때부터 비녀는 단순한 장식의 관이 되었고, 일반적으로 꼰 현을 사용하는 것이 일반화되었다. 현대에는 상투를 틀지 않기 때문에 비녀가 기능을 하지 못하므로, 칸무리가 머리에서 떨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카케오(懸緒)라고 불리는 흰 종이 끈을 턱 아래로 묶어 사용한다.
신직의 현은 흰색의 종이 꼬임을 사용하지만, 이즈모 대사의 국조와 관장은 자색을 사용한다.[14]
3. 1. 종류
칸무리의 종류는 다음과 같다.- 벤칸(冕冠): 천황만이 착용하는 금속 및 천으로 만든 관이다.
- 라이칸(礼冠): 5위 이상의 귀족이 착용하는 금속 및 천으로 만든 관이다.
- 고류에이(御立纓): 천황만이 착용하는 칸무리이다.
- 오킨 코지(御金巾子): 금박 종이로 ''에이''를 고정한 칸무리로, 천황이 일상에서 사용한다.
- 오사쿠(御幘): 신토 의식에서 천황이 사용하는 칸무리이다.
- 스이에이(垂纓): 뒤쪽으로 ''에이''가 늘어진 칸무리이다.
- 켄에이(巻纓): ''에이''가 감겨있는 군 장교용 칸무리이다.
헤이안 시대 중기 이후, 일본의 칸무리(冠) 형태는 신분이나 연령에 따른 큰 차이가 없었다. 그러나 재질(5위 이상은 사릉문(四菱紋))이나 이마와 끈(纓)의 처리를 통해 착용자의 신분과 연령을 나타냈다.
참조
[1]
웹사이트
Dress - Japan
https://www.britanni[...]
2021-05-16
[2]
간행물
2007 Honda Accord vs. Nissan Altima, Kia Optima, Saturn Aura, Toyota Camry, Chrysler Sebring
http://www.caranddri[...]
2007-02
[3]
간행물
魏志倭人伝の史料批判
https://dl.ndl.go.jp[...]
Kojiki Academy
1996-01
[4]
wikisource
隋書
[5]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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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kushi Taisei Shuppan-kai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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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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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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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cyclopedia
https://dl.ndl.go.jp[...]
Shogakukan
1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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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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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서적
https://dl.ndl.go.jp[...]
Bunshinsha
1962
[10]
서적
日本の装束解剖図鑑
X-Knowledge
2021-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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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出雲大社教教規』出雲大社教教務本庁昭和58年6月9日発行全31頁中18頁
[12]
간행물
魏志倭人伝の史料批判
https://dl.ndl.go.jp[...]
古事記学会
1996-01
[13]
간행물
冠位十二階から大化以降の位階制への移行――虎尾達哉氏の批判に答えて
https://dl.ndl.go.jp[...]
服飾美学会
1995-03
[14]
문서
『出雲大社教布教師養成講習会』発行出雲大社教教務本庁平成元年9月1日全428頁中84頁
[15]
문서
神社本庁『神社有職故実』1951年7月15日発行全129頁中72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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