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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바 미치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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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칸바 미치코는 1937년 도쿄에서 태어나 1960년 사망한 일본의 학생 운동가이다. 도쿄 대학 문과에 입학하여 일본 공산당에 입당했으며, 1960년 미일안전보장조약 개정에 반대하는 안보 투쟁에 참여했다. 같은 해 6월 15일 국회 시위 중 사망했으며, 그녀의 죽음은 당시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칸바의 죽음은 경찰의 폭력에 의한 것이라는 주장과, 압사라는 주장이 엇갈렸으며, 이후 그녀는 1960년대 대규모 시위의 상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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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바 미치코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칸바 미치코
칸바 미치코
본명칸바 미치코 (樺 美智子)
로마자 표기Kanba Michiko
출생1937년 11월 8일
출생지도쿄도
사망1960년 6월 15일 (향년 22세)
사망 장소국회의사당 남문
사망 원인경찰과의 충돌
학력
출신 학교도쿄 대학 문과2류 (재학 중 사망)
경력
직업대학생
소속 정당일본 공산당 → 공산주의자 동맹
활동정치 운동
알려진 작품아무도 모르는 미소
가족
아버지칸바 도시오(사회학자)

2. 생애

칸바 미치코는 1960년 안보 투쟁에 참여하여 시위 도중 사망했다. 그녀의 죽음은 경찰의 과잉 진압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칸바는 1960년 1월 26일 하네다 공항에서 벌어진 연좌 시위에서 체포된 76명의 학생 운동가 중 한 명이었다.[4] 그녀는 국회의사당 주변에서 벌어진 시위에도 참여했으며, 학생 단체가 정문으로 돌입하여 기동대와 충돌한 후 국회의사당 남문 안쪽에서 사망했다. 부검 결과 사인은 흉부 압박과 두개내 출혈로 밝혀졌다. 경찰은 칸바가 넘어지면서 밟혀 사망했다고 주장했지만, 학생들은 경찰의 물리적 폭행으로 인해 사망했다고 주장했다.

칸바의 사망 후, 그녀의 개인적인 글과 정치적 에세이는 "아무도 모르는 미소" (人しれず微笑もん일본어)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5] 그녀는 글에서 자신의 삶과 활동에 대해 이야기했다.

2. 1. 출생과 성장

1937년 도쿄도기타타마군 무사시노정(현 무사시노시)에서 학자 집안의 딸로 태어났다. 두 오빠가 있었다. 중학교 때 아버지의 고베 대학 부임에 따라 효고현아시야시로 이사했다.[16]

아시야 시립 야마테 중학교, 효고 현립 고베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재수를 거쳐 도쿄의 겐스 수학관(오차노미즈교)에 다녔다. 그러나 수업에 만족하지 못하고 6월에 코로 외국어 예비교로 옮겼지만 오전 수업만으로는 부족하여 2학기부터 순다이 예비학교로 옮겼다.[17] 1957년 도쿄 대학 문과 2류(현재의 문과 3류)에 입학했다. 동급생으로는 역사학자 나가사키 노부코와 경제 기획 심의관 가토 마사시 등이 있다.

2. 2. 학창 시절

칸바 미치코는 1937년 도쿄도기타타마군 무사시노정(현 무사시노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간바 도시오로, 사회학자이자 추오 대학 교수였다.[2] 중학교 때 아버지의 고베 대학 부임에 따라 효고현아시야시로 이사했다.[16]

아시야 시립 야마테 중학교, 효고 현립 고베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재수를 거쳐 1957년 도쿄 대학 문과 2류(현재의 문과 3류)에 입학했다. 동급생으로는 역사학자 나가사키 노부코와 경제 기획 심의관 가토 마사시 등이 있었다.

1957년 11월 생일에 일본 공산당에 입당했다.[18] 그 후 신좌파 조직인 분트의 활동가(서기국원)로서 1960년 안보 투쟁에 참가했다.[3] 다카기 마사유키는 칸바가 분트 창설 이래의 활동가였다고 자신의 저서에서 소개하고 있다.[19]

시위 행진에 참가한 칸바


칸바의 죽음을 애도하는 시위 행진(1960년 6월 18일)

2. 3. 학생 운동 참여

1957년 도쿄 대학 문과 2류(현재의 문과 3류)에 입학하여 그해 11월 일본 공산당에 입당했다.[18] 이후 신좌파 조직인 붕트의 지도자가 되었고,[3] 공산주의자 동맹(분트) 활동가(서기국원)로서 1960년 안보 투쟁에 참여했다.[18] 다카기 마사유키는 저서에서 칸바가 분트 창설 이래의 활동가였다고 소개한다.[19]

1960년 1월 26일 하네다 공항에서 벌어진 연좌 시위에서 체포된 76명의 학생 운동가 중 한 명이었다.[4] 같은 해 1월 26일 전학련의 하네다 공항 점거 사건 때 도쿄 대학 문학부 자치회 부위원장으로 참가하여[20] 검거되어 구치소에 수감되었지만, 불기소 처분되었다. 그 후에도 주류파인 공산동 계열의 전학련은 "국회 청원 데모(국회 난입 미수) 사건"(4월 26일), "수상 관저 난입 사건"(5월 20일, 6월 3일) 등 과격한 행동을 반복했다.

2. 4. 사망

칸바 미치코는 1960년 6월 15일 미일안전보장조약 개정 반대 시위(안보 투쟁) 도중 사망했다. 전학련 주류파가 "안보 결전의 날"이라고 외치며 중의원 남쪽 통용문에서 국회 구내로 난입하여 경찰과 충돌했을 때 사망했다.[21] 사망 당일 칸바는 옅은 크림색 카디건에 흰색 블라우스, 짙은 남색 슬랙스 차림이었다.[16]

부검 결과, 사인은 흉부 압박과 두개내 출혈로 밝혀졌다. 경찰은 칸바가 넘어지면서 밟혀 사망했다고 주장했지만, 학생들은 경찰의 물리적 폭행으로 인해 사망했다고 주장했다. 묘소는 다마 영원 (21구 2종 32측 14번)에 있다.

3. 사망 원인 논란과 사회적 파장

1960년 6월 15일, 미일안전보장조약 개정 비준과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 방일을 앞두고 전일본 학생 자치회 총연합(전학련) 주류파가 주도한 시위에서 도쿄 대학 학생 칸바 미치코가 사망했다.[21] 이 사건은 국회의사당 구내에서 경찰과 시위대의 충돌 과정에서 발생했으며, 라디오로 생중계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경찰 병원의 검시 결과, 칸바의 사인은 흉부 압박 및 뇌 내 출혈로 밝혀졌다.[16] 경찰은 시위대가 넘어지면서 발생한 압사를 주장한 반면, 학생들은 기동대의 폭행으로 사망했다고 주장했다.[26] 1960년 6월 17일, 주요 언론사들은 공동 선언을 통해 학생들의 시위를 "폭력"으로 규정하고, "폭력을 배제하고 의회주의를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다.[26]

칸바의 죽음은 1960년 안보 투쟁의 상징으로 여겨진다.[6] 역사학자 닉 카푸어는 칸바의 죽음에 대한 전국적인 충격이 기시 노부스케 총리의 사임과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방일 계획 취소에 영향을 주었다고 평가했다.[7]

3. 1. 사망 원인 논란

1960년 6월 15일, 미일안전보장조약 개정 비준 승인과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 방일을 앞두고 전일본 학생 자치회 총연합(전학련) 주류파가 주도한 시위에서 칸바 미치코가 사망했다.[21] 전학련은 "안보 결전의 날"을 외치며 국회 구내로 난입했고, 이 과정에서 경찰과 충돌이 발생했다.

경찰 병원의 검시 결과, 칸바의 사인은 흉부 압박 및 뇌 내 출혈로 밝혀졌다.[16] 경찰은 시위대가 넘어지면서 발생한 압사를 주장한 반면, 학생들은 기동대의 폭행으로 사망했다고 주장했다.[26] 이 사건은 라디오로 생중계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야마모토 나츠히코는 칼럼에서 야당이 증거 없이 경찰의 책임을 주장했다고 비판했다.[27] 그는 논리보다 증거가 중요하지만, 떼를 지어 노력하면 증거가 흐지부지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당시 전학련 주류파와 대립하던 일본 공산당은 칸바의 죽음이 정부, 경찰, 전학련 모두의 책임이라고 비판했다.[28] 일중우호협회 간부 하시즈메 토시지는 칸바를 민족 영웅으로 볼 수 없다고 중국 측에 항의했다.[29]

호사카 마사야스에 따르면, 중국에서 모금된 칸바의 조의금 대부분을 일본 공산당이 가져갔다고 한다.[30] 일본 공산당은 이를 부인했다.[31]

우익 활동가 카게야마 마사하루는 칸바를 애국자로 평가했다.[32] 나카소네 야스히로는 칸바의 죽음이 일본 사회에 큰 충격을 줄 것이라고 말했다.[33] 이시하라 신타로는 칸바를 "스스로 자신을 밟아 죽인 여대생"이라고 표현했다.[34]

몇몇 문헌에서는 칸바가 일본 공산당 당원이자 공산주의자동맹(분트)의 운동권 학생이었다는 사실을 밝히지 않고, 단순히 "여대생" 또는 "여자 도쿄 대학생"으로만 기록하고 있다.[35]

3. 2. 언론의 보도와 사회적 파장

칸바 미치코의 죽음은 당시 널리 보도되었으며, 개정된 미일안보조약에 반대하는 1960년대 대규모 시위의 상징으로 여겨진다.[6] 칸바의 죽음 한 달 후, 인기 잡지 ''세카이''에 실린 정치 만화는 야쿠자 갱스터가 국회의사당 앞에서 칸바의 시신 위에 서 있는 경찰에게 담배에 불을 붙여주는 모습을 묘사했다.[6]

경찰 병원의 검시 결과, 사인은 흉부 압박 및 뇌 내 출혈로 밝혀졌다. 이에 대해 경찰 측은 전도에 의한 압사를 주장했고, 학생 측은 기동대의 폭행에 의한 사망이라고 주장했다.[26] 이 사건은 라디오로도 실황 중계되어 칸바 미치코의 죽음은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지만, 1960년 6월 17일에 재경 매스 미디어 7개사는 공동 선언을 발표하여, 그 안에서 학생들의 데모를 "폭력"이라고 규정하며 "폭력을 배제하고 의회주의를 지켜야 한다"고 말했다.[26]

역사학자 닉 카푸어는 칸바의 죽음에 대한 전국적인 충격이 기시 노부스케 총리의 사임을 강요하고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의 일본 방문 계획을 취소하는 데 일조했다고 주장한다.[7] 카푸어는 칸바의 죽음을 "세 겹의 비극"으로 보았는데, 첫째는 그녀가 너무 어렸기 때문이고, 둘째는 일본 최고 엘리트 대학의 학생이었기 때문이며, 셋째는 여성이 거리 시위의 최전선에 참여하는 것이 여전히 드물었던 시대에 여성이었기 때문이다.[8] 오구마 에이지는 칸바의 죽음이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목숨을 잃은 많은 젊은이들의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고 주장했다.[9] 히라카와 히로코는 칸바의 사후 지위를 중산층 여성성과 어머니에 대한 당시의 기대를 반영하는 "처녀 순교자"로 규정했다.[10] 첼시 센디 시더는 1960년대 세계는 칸바의 죽음과 함께 일본에서 시작되었다고 주장한다.[11]

칸바의 사인에 대해 야마모토 나츠히코는 칼럼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27]

당시 전학련 주류파와 대립하고 있던 일본 공산당은 칸바의 죽음에 대해 "칸바 미치코 씨(공산주의자 동맹의 지도 분자)의 죽음은, 관헌의 학살이라는 측면과 트로츠키주의자 칸바 씨에 대한 비판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칸바 씨의 죽음에는 전학련 주류파의 모험주의에도 책임이 있다"[28]라고 언급하며, 정부・경찰과 전학련 측의 행동 모두를 비난했다.

마츠모토 켄이치에 따르면, 우익 활동가이자 가인이기도 한 카게야마 마사하루는 미일 안보에 반대하는 입장에서 칸바의 죽음에 대해, "칸바 미치코 씨의 죽음에 대해서는, 마음으로부터 애도의 말씀을 전하고 싶다. 나는 그녀야말로 일본을 위해 죽어간 애국자라고 생각한다. 이런 사람이 우리 우익 진영에서 나오지 않은 것을 유감스럽게 생각한다"고 평가했다.[32] 당시 과학기술청 장관이었던 나카소네 야스히로는 각의에서 "오늘 이후, 사회 정세는 일변할 것이다. 죽음이나 피를 보는 것은 일본인에게는 매우 큰 충격을 준다. 죽은 여대생과 동갑인 딸을 가진 부모들도 이상하게 영향을 받을 것이다"라고 연설했다.[33]

이시하라 신타로는 칸바의 죽음에 대해 잡지 『전망』에 기고했을 때, "스스로 자신을 밟아 죽인 여대생"이라고 표현했는데, 그 논지에 매우 공감했다고 말한 편집자가, 이 표현만은 도저히 거부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이시하라는 양보하지 않고 통과시켰지만, 완성된 잡지에는 이 부분이 삭제되어 있었다고 회상하고 있다.[34]

몇몇 문헌에서는, 칸바가 활동가였다는 것을 기술하지 않고, 단순히 "여대생", "여자 동대생"이라고만 기록하고 있다.[35]

3. 3. 각계의 반응

칸바 미치코의 죽음은 당시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고, 언론에 널리 보도되며 1960년 안보 투쟁의 상징으로 여겨진다.[6] 그녀의 죽음 한 달 후, 잡지 ''세카이''에는 야쿠자가 국회의사당 앞에서 칸바의 시신 위에 서 있는 경찰에게 담배에 불을 붙여주는 모습을 묘사한 정치 만화가 실리기도 했다.[6]

역사학자 닉 카푸어는 칸바의 죽음이 기시 노부스케 총리의 사임과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의 일본 방문 계획 취소에 영향을 주었다고 평가한다.[7] 그는 칸바의 죽음을 "세 겹의 비극"으로 보았는데, 그녀가 너무 어렸고, 일본 최고 명문대 학생이었으며, 여성이 시위 전면에 나서는 것이 드물었던 시대에 여성이었다는 점을 그 이유로 들었다.[8] 오구마 에이지는 칸바의 죽음이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희생된 많은 젊은이들을 떠올리게 했다고 주장한다.[9] 히라카와 히로코는 칸바를 "처녀 순교자"로 규정하며, 이는 당시 중산층 여성성과 어머니에 대한 기대를 반영한다고 설명한다.[10] 첼시 센디 시더는 1960년대 세계가 칸바의 죽음과 함께 일본에서 시작되었다고 주장한다.[11]

하마야 히로시는 칸바가 사망한 밤의 사건들을 사진으로 기록했다.[12] 에사시 아키코는 2010년 칸바에 대한 일본어 전기 ''칸바 미치코: 성스러운 소녀의 전설''(樺美智子ー聖少女伝説일본어)을 출간했다.[13]

당시 전학련 주류파와 대립하던 일본 공산당은 칸바의 죽음에 대해 정부와 경찰, 전학련 양측 모두를 비판했다.[28] 일중우호협회 간부였던 하시즈메 토시지는 중국 측에 칸바를 민족 영웅으로 볼 수 없다고 항의했다.[29]

호사카 마사야스에 따르면, 중국에서 칸바의 죽음에 대한 모금액이 답지했지만, 일본 공산당이 이를 독차지하려 했다는 주장이 있다. 일본 공산당은 이러한 주장을 부인했다.[30][31]

우익 활동가 카게야마 마사하루는 칸바를 일본을 위해 죽어간 애국자로 평가했다.[32] 당시 과학기술청 장관이었던 나카소네 야스히로는 칸바의 죽음이 일본 사회에 큰 충격을 줄 것이라고 언급했다.[33]

이시하라 신타로는 칸바의 죽음에 대해 "스스로 자신을 밟아 죽인 여대생"이라고 표현했지만, 잡지 게재 시에는 이 표현이 삭제되었다.[34] 몇몇 문헌에서는 칸바가 활동가였다는 사실을 명시하지 않고, 단순히 "여대생", "여자 도쿄 대학생"으로만 기록하기도 한다.[35]

4. 사후 평가 및 유산

칸바 미치코의 죽음은 당시 일본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개정된 미일안보조약에 반대하는 1960년대 대규모 시위의 상징으로 여겨진다.[6] 그녀의 죽음은 널리 보도되었고, 한 달 후 인기 잡지 ''세카이''에 실린 정치 만화는 야쿠자 갱스터가 국회의사당 앞에서 칸바의 시신 위에 서 있는 경찰에게 담배에 불을 붙여주는 모습을 묘사하기도 했다.[6]

역사학자 닉 카푸어는 칸바의 죽음이 전국적인 충격을 주어 기시 노부스케 총리의 사임을 강요하고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의 일본 방문 계획을 취소하는 데 영향을 주었다고 주장한다.[7] 카푸어는 칸바의 죽음을 "세 겹의 비극"으로 보았는데, 너무 어린 나이, 일본 최고 엘리트 대학 학생, 여성이 거리 시위 최전선에 참여하는 것이 드물었던 시대의 여성이었다는 점을 들었다.[8] 오구마 에이지는 칸바의 죽음이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목숨을 잃은 많은 젊은이들의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고 주장했다.[9] 히라카와 히로코는 칸바를 "처녀 순교자"로 규정하며, 그녀의 죽음이 당시 중산층 여성성과 어머니에 대한 기대를 반영한다고 보았다.[10] 첼시 센디 시더는 1960년대 세계는 칸바의 죽음과 함께 일본에서 시작되었다고 주장한다.[11]

사진작가 하마야 히로시는 칸바가 살해된 밤의 사건들을 사진으로 남겼다.[12] 에사시 아키코는 2010년 칸바에 대한 일본어 전기 《칸바 미치코: 성스러운 소녀의 전설》(일본어: 樺美智子ー聖少女伝説)을 저술했다.[13]

4. 1. 유고집 및 관련 작품

칸바 미치코의 사후, 그녀의 개인적인 글과 정치적 에세이는 《아무도 모르는 미소》(일본어: 人しれず微笑もん)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5] 이 책에는 그녀의 삶과 활동에 대한 내용이 담겨 있다. 어머니 미츠코가 엮은 유고집 《남몰래 미소짓다》(1960년[24])와 서간집 《친구에게 - 칸바 미치코의 편지》가 있다. 잡지 《마드모아젤》은 생전의 칸바 미치코와 마지막 인터뷰를 진행했다.

2021년 12월 4일부터 12월 18일까지 세타가야 퍼블릭 시어터에서 세토야마 미사키 각본, 쿠리야마 타미야 연출로 안보 투쟁 중 목숨을 잃은 여성의 죽음을 둘러싼 사건을 그린 연극 《그녀를 비웃는 사람이 있어도》가 상연되었다.[39] 세토야마는 이 작품으로 제66회 키시다 쿠니오 희곡상 최종 후보에 올랐다.[40]

에사시 아키코는 2010년 칸바 미치코에 대한 일본어 전기 《칸바 미치코: 성스러운 소녀의 전설》(일본어: 樺美智子ー聖少女伝説)을 저술했다.[13]

4. 2. 칸바 미치코에 대한 다양한 시각

칸바 미치코의 죽음은 당시 일본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고, 다양한 시각에서 논의되었다.

  • 사망 원인 논란: 경찰은 칸바가 시위 도중 넘어지면서 밟혀 사망했다고 주장했지만, 학생들은 경찰의 폭행으로 인해 사망했다고 주장했다. 부검 결과 흉부 압박과 뇌 내 출혈이 사인으로 밝혀졌지만, 진실은 명확히 규명되지 않았다.[4]
  • 언론의 보도 태도: 1960년 6월 17일, 재경 매스 미디어 7개사는 공동 선언을 통해 학생들의 시위를 "폭력"으로 규정하고 "폭력을 배제하고 의회주의를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다.[26] 이는 언론이 시위대의 주장에 귀 기울이지 않고, 정부의 입장을 옹호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 정치적 입장:
  • 당시 야당은 칸바의 죽음을 경찰의 책임으로 돌리며 정부를 비판했다.[27]
  • 일본 공산당은 칸바의 죽음에 대해 정부와 경찰, 그리고 전학련 주류파 모두를 비난했다.[28]
  • 일중우호협회 간부였던 하시즈메 토시지는 칸바를 "운동 파괴가 될 과격 분자"라고 평가하며, 그녀를 민족 영웅으로 칭송하는 것에 반대했다.[29]
  • 우익 활동가 카게야마 마사하루는 칸바를 "일본을 위해 죽어간 애국자"라고 평가했다.[32]
  • 사회적 영향:
  • 역사학자 닉 카푸어는 칸바의 죽음이 기시 노부스케 총리의 사임과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의 방일 취소에 영향을 주었다고 주장했다.[7]
  • 오구마 에이지는 칸바의 죽음이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목숨을 잃은 많은 젊은이들을 떠올리게 했다고 주장했다.[9]
  • 히라카와 히로코는 칸바를 "처녀 순교자"로 규정하며, 그녀의 죽음이 당시 중산층 여성성과 어머니에 대한 기대를 반영한다고 보았다.[10]
  • 이시하라 신타로는 칸바를 "스스로 자신을 밟아 죽인 여대생"이라고 표현하며, 그녀의 죽음을 둘러싼 논쟁에 대해 언급했다.[34]
  • 기타:
  • 칸바의 죽음은 미일안전보장조약 개정에 반대하는 1960년대 대규모 시위의 상징으로 여겨진다.[6]
  • 하마야 히로시는 칸바가 사망한 밤의 사건들을 사진으로 기록했다.[12]
  • 에사시 아키코는 2010년 칸바에 대한 전기 樺美智子ー聖少女伝説일본어를 저술했다.[13]

5. 가족 관계

관계이름출생사망비고
증조부마사타다1863년 6월1925년 12월수학자
조부[36]1884년 11월도쿄부 평민[37], 회사 중역[37]. 오사카부 평민 가바 마사타다의 장남[37], 동아무역, 일본소다, 누마타 상점 각 (주) 취체역[37]
조모미츠[37]오모리 토요스케의 장녀[37], 오사카부 출신
토시오[38]1904년 3월1980년 12월사회학
미츠코[38]한다 헤이베에의 장녀[38], 토치기현 출신
2명



증조부・'''가바 세이토'''

참조

[1] 서적 Japan at the Crossroads: Conflict and Compromise after Anpo https://books.google[...] Harvard University Press
[2] 웹사이트 樺俊雄の墓 http://www6.plala.or[...]
[3] 서적 "Sensô taiken" no sengoshi sedai, kyôyô, ideorogii「戦争体験」の戦後史 世代・教養・イデオロギー Chûkô shinsho
[4] 서적 Gekidô Showashi genba kenshô: sengo jiken fairu 22 「激動昭和史現場検証 戦後事件ファイル22」 Shinpûsha
[5] 서적 Hito shirezu hohoemon 「人しれず微笑もん」 San'ichi shinsho
[6] 간행물 Befitting Bedfellows Berghahn Books
[7] 서적 Japan at the Crossroads: Conflict and Compromise after Anpo https://books.google[...] Harvard University Press
[8] Youtube Japan's 1960 Protests and the Contemporary World https://soundcloud.c[...] Program on U.S.-Japan Relations, Harvard University 2018-09-25
[9] 서적 Minshu to aikoku: sengo Nihon no nashonarizumu to kōkyōsei (Democracy and Patriotism: Nationalism and Community in Postwar Japan) Shinyōsha
[10] 간행물 Maiden Martyr for "New Japan": The 1960 Ampo and the Rhetoric of the Other Michiko
[11] 웹사이트 Two, Three, Many 1960s https://mronline.org[...] 2010
[12] 웹사이트 Tokyo 1960: Days of Rage and Grief https://ocw.mit.edu/[...] 2018-03-08
[13] 뉴스 Legacy of 1960 protest movement lives on https://www.japantim[...] The Japan Times 2010-06-11
[14] 문서 『鳥取県百傑伝』274頁に「彼は、いまでは県人から忘れ去られようとしている。ただ、八年前の三十五年六月の安保闘争のとき、圧死した東大女子学生だった樺美智子さんを知らぬ者は少ないであろう。正董は美智子さんの[[曽祖父]]にあたるのである。」とある
[15] 웹사이트 樺俊雄の墓 http://www6.plala.or[...]
[16] 뉴스 『[[週刊新潮]]』(2010年6月17日号)46頁
[17] 서적 江刺昭子『樺美智子聖少女伝説』江刺昭子2010年文芸春秋より
[18] 서적 [[福間良明]] 『「戦争体験」の戦後史 世代・教養・イデオロギー』 [[中公新書]] 1990 ISBN 978-4121019905、117p
[19] 서적 高木正幸 『全学連と全共闘』 [[講談社現代新書]] 771 ISBN 4061457713、52p
[20] 서적 [[合田一道]] 『激動昭和史現場検証 戦後事件ファイル22』 [[新風舎|新風舎文庫]] こ-118 ISBN 978-4797498523、238p
[21] 문서 警官隊、デモ隊あわせて約1000人が重軽傷を負った。
[22] 웹사이트 【安保改定の真実(7)】先鋭化する社会党「米帝は日中の敵!」 5・19強行採決で事態一転…牧歌的デモじわり過激化 そして犠牲者が https://www.sankei.c[...] 2019-01-17
[23] 서적 [[伊藤隆 (歴史学者)|伊藤隆]] 『歴史と私 史料と歩んだ歴史家の回想』 中公新書 2317 ISBN 978-4121023179、16p
[24] 서적 [[三一書房]] ISBN 4380600025
[25] 서적 村上義雄 『「朝日ジャーナル」現代を撃つ』 [[朝日新書]] 208 ISBN 978-4022733085、18-19p
[26] 간행물 1960年代という『偏向報道』攻撃の時代 : 『マスコミ月評』に見る言論圧力(上) http://r-cube.ritsum[...] [[立命館大学]]産業社会学会 2018-12-12
[27] 서적 [[山本夏彦]] 『毒言独語』 [[中公文庫]] [や-19-4] ISBN 4122007321、80-81p/『毒言独語』 中公文庫 [や-19-16] ISBN 4122042623、80-81p
[28] 뉴스 『[[しんぶん赤旗|アカハタ]]』1960年[[6月23日]]号
[29] 서적 橋爪利次『体験的日中友好裏面史』P240-242
[30] 서적 [[保阪正康]] 『昭和戦後史の死角』 [[朝日文庫]] [ほ-4-6] ISBN 4022614633、143p
[31] 문서 『安保闘争: 60年の教訓』204ページ
[32] 서적 [[松本健一]]著『思想としての右翼』P57
[33] 웹사이트 戦地で友を焼いた中曽根氏の悔恨 https://mainichi.jp/[...] 2019-12-08
[34] 서적 石原慎太郎『国家なる幻影〈上〉 わが政治への反回想』 文春文庫 [い-24-3] ISBN 4167128047、35p
[35] 서적 |
[36] 뉴스 因伯時報 1926-04-11
[37] 서적 人事興信録. 6版 大正10年
[38] 서적 第二十一版 人事興信録 上 昭和36年
[39] 웹사이트 『彼女を笑う人がいても』 https://setagaya-pt.[...] 2022-02-19
[40] 웹사이트 第66回岸田國士戯曲賞最終候補作品決定 - 白水社 https://www.hakusuis[...] 2022-02-19
[41] 서적 鳥取県百傑伝
[42] 웹사이트 樺俊雄の墓 http://www6.plala.or[...]
[43] 뉴스 週刊新潮 2010-06-17
[44] 서적 樺美智子聖少女伝説 文芸春秋 2010
[45] 서적 「戦争体験」の戦後史 世代・教養・イデオロギー 中公新書 1990
[46] 서적 激動昭和史現場検証 戦後事件ファイル22 신풍사|신풍사문고
[47]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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