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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예보 포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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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키예보 포위전은 1991년 8월, 크로아티아 독립 전쟁 중 유고슬라비아 인민군(JNA)이 세르비아계 반군을 공개적으로 지원하며 키예보 마을을 공격한 사건이다. 이 공격은 밀란 마르티치의 최후통첩에 따라 시작되었으며, 유고 인민군은 마을을 점령한 후 약탈과 방화를 저질렀다. 이 사건은 유고슬라비아 전쟁 중 인종 청소 전략이 처음 사용된 사례로 기록되었으며, 구유고슬라비아 국제형사법원(ICTY)은 밀란 마르티치에게 전쟁 범죄 혐의로 유죄를 선고하고 키예보에서 인종 청소가 자행되었음을 결론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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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예보 포위전 - [전쟁]에 관한 문서
개요
크로아티아 내 키예보의 위치. 1991년 12월 말 유고슬라비아 인민군이 통제한 지역은 빨간색으로 강조 표시됨.
크로아티아 내 키예보의 위치. 1991년 12월 말 유고슬라비아 인민군이 통제한 지역은 빨간색으로 강조 표시됨.
위치달마티아 고원, 크로아티아
기간1991년 8월 17일–26일
결과유고슬라비아 인민군의 승리
교전 세력
교전국 1유고슬라비아 인민군
SAO 크라이나
지휘관
지휘관 1라트코 믈라디치
보리슬라브 주키치
밀란 마르티치
지휘관 2마르틴 치친 샤인
병력 규모
병력 1미상
병력 2경찰관 58명
부대
부대 1유고슬라비아 인민군 제221 차량화 여단, 크라이나 영토방위군, 크라이나 민병대
부대 2크로아티아 경찰
피해 규모
사상자 1미상
사상자 220명 포로, 2명 부상
전쟁의 일부
관련 전쟁크로아티아 독립 전쟁

2. 배경

1990년 크로아티아 사회주의 공화국에서 열린 1990년 크로아티아 총선거에서 크로아티아 민주연합이 압승하면서 세르브인크로아트인 사이 민족 갈등이 악화되었다.[1] 유고슬라비아 인민군은 크로아티아 영토방위군의 무기를 압수하여 저항을 최소화하고자 했다.[1]

이후 전개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 민족 갈등의 심화
  • 유고슬라비아 연방의 위기
  • 크로아티아의 군사력 증강

2. 1. 민족 갈등의 심화

1990년 크로아티아 사회주의 공화국에서 열린 1990년 크로아티아 총선거에서 크로아티아 민주연합이 승리하면서 세르브인크로아트인 사이의 민족 갈등은 더욱 심해졌다.[1] 유고슬라비아 인민군은 크로아티아 영토방위군의 무기를 압수하여 저항을 최소화하고자 했다.[1]

이러한 민족 갈등은 1990년 8월 17일 세르비아계 크로아티아인들이 일으킨 로그 혁명으로 표면화되기 시작했다.[2] 이 반란은 스플리트에서 북동쪽으로 약 60km 떨어진 크닌 인근 달마티아 고원의 세르브계 다수 거주 지역을 중심으로 일어났으며, 리카, 코르둔, 바노비나, 동슬라보니아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2. 2. 유고슬라비아 연방의 위기

1990년 크로아티아 총선거에서 크로아티아 민주연합이 압승하면서 크로아트인세르브인 사이 민족 갈등이 심화되었다. 유고슬라비아 인민군은 저항을 최소화하기 위해 크로아티아 영토방위군의 무기를 압수하였다.[1] 1990년 8월 17일, 세르비아계 크로아티아인이 대대적인 반란을 일으키면서 민족 갈등이 표면화되었다.[2] 반란은 스플리트에서 동북쪽으로 약 60 km 떨어진 크닌 인근 달마티아 고원의 세르브계 다수 거주 지역을 중심으로 일어났으며, 리카, 코르둔, 바노비나, 동슬라보니아에서도 발생했다.

몬테네그로 및 세르비아 내 자치주인 보이보디나, 코소보의 지원을 받은 세르비아는 1991년 1월 크로아티아 보안군의 무장 해제를 위한 유고 인민군 작전을 승인받기 위해 유고 대통령직에 요청하였으나 실패하였다. 1991년 3월, 세르비아계 저항 세력과 크로아티아 특수경찰 사이 무혈 충돌이 발생하자, 유고 인민군은 연방 대통령직에 전시 권한을 부여하고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할 것을 건의했으나, 세르비아 및 기타 3개 공화국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3월 15일 거부되었다.

세르비아 대통령 슬로보단 밀로셰비치는 크로아티아를 유고슬라비아 연방 내에 유지하는 것보다 세르비아 확장을 우선시하며 공개적으로 유고 인민군을 사실상 세르비아군으로 바꾸겠다고 위협하고, 더 이상 연방 대통령직의 권한을 인정하지 않겠다고 선포하였다. 이러한 위협으로 유고 인민군은 점차 밀로셰비치의 통제 하에 들어가면서, 유고슬라비아 연방 자체를 존속시키기보다 세르비아 확장을 위한 방향으로 선회하였다. 3월 말에는 최초로 사망자가 나온 충돌이 발생하였다. 4월 초, 크로아티아 내 세르브인 반군 지도자들은 세르비아 및 세르브인 통제 지역을 통합하겠다고 선언하였으며, 크로아티아 정부는 이 지역들을 분리주의 지역으로 간주하였다.

2. 3. 크로아티아의 군사력 증강

1991년 초, 크로아티아는 정규군이 없어 국방력을 강화하기 위해 경찰 인력을 약 2만 명으로 증강했다. 이 부대에서 가장 효과적인 병력은 12개 대대에 배치되어 군사 조직을 갖춘 3,000명 규모의 특수 경찰이었다. 또한 16개 대대와 10개 중대로 구성된 9,000~10,000명의 지역 예비 경찰도 있었지만, 이들은 무기가 부족했다.[1]

크로아티아 정부는 이러한 상황에 대응하여 5월에 특수 경찰 대대를 4개의 전문 경비여단으로 통합하여 크로아티아 국가방위군(ZNG)을 창설하고, 마르틴 슈페겔리 퇴역 장군이 이끄는 국방부에 배속시켰다. 병력은 약 8,000명이었다. 당시 4만 명으로 확대된 지역 경찰도 ZNG에 배속되어 19개 여단과 14개 독립 대대로 재편되었다. 경비여단은 ZNG 내에서 소형 무기로 완전 무장한 유일한 부대였으며, ZNG 전체에는 중화기가 부족했고 지휘 통제 구조도 없었다.[1] 중화기 부족은 매우 심각하여 ZNG는 박물관과 영화 스튜디오에서 가져온 제2차 세계 대전 무기를 사용해야 했다.[2] 당시 크로아티아의 무기 비축량은 해외에서 구입한 30,000정의 소형 무기와 이전에 경찰이 소유했던 15,000정의 소형 무기로 구성되었다. 경비여단으로 인력이 유출된 것을 대체하기 위해 새로운 10,000명의 특수 경찰이 창설되었다.[1]

3. 전개

1991년 키예보는 크로아트인이 다수 거주하는 마을이었으나, 로그 혁명 이후 세르브인 다수 거주 지역에 둘러싸여 고립되었다.[1][2] 이에 키예보 주민들은 임시 민병대를 조직하였다.

1991년 4월 1일, 플리트비체 호수 사건 이후 SAO 크라이나 군은 크로아티아 경찰을 인질로 잡았고, 키예보 민병대는 이에 대응하여 세르브인 민간인을 인질로 잡았다. 4월 2일, 유고 인민군(JNA)은 무력 충돌 위험을 경고했다. 4월 27-28일 밤, 크로아티아 내무부 경찰 병력이 키예보에 도착했고, 4월 28일, 키예보에 크로아티아 경찰서가 설치되었다. 다음 날, 라트코 믈라디치 대령이 지휘하는 유고 인민군 병력이 진입하여 키예보로의 물자 공급을 차단했다. 5월 2일에는 SAO 크라이나 군의 총격으로 크로아티아 경찰 헬리콥터가 키예보에 비상 착륙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1991년 5월 6일 유고 인민군에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고, 수 일간의 협상 끝에 키예보 봉쇄는 일시적으로 해제되었다.

그러나 8월 17일, 믈라디치가 이끄는 유고 인민군 부대가 다시 바리케이드를 설치하면서 협정은 깨졌다. 밀란 마르티치는 키예보 주민과 경찰에게 마을을 떠나라는 최후통첩을 보냈다.[2] 8월 25일, 크로아티아군은 마을의 유고 인민군 막사를 공격했으나 실패했다.[2]

8월 26일, 유고 인민군은 키예보를 공격하였고, 소화기로만 무장한 크로아티아 경찰 58명이 이에 맞섰다. 유고 인민군은 대규모 포격과 유고슬라비아 공군의 근접항공지원을 동원하여 공격을 가했으며, 같은 날 오후 지상 공격을 시작했다. 유고 인민군과 세르브계 크로아티아인 민병대로 구성된 공격 부대는 전차 30대의 지원을 받으며 키예보를 점령했다. 크로아티아 경찰은 3개 조로 나누어 키예보를 탈출했고, 남은 크로아티아인들도 마을을 떠났다.

3. 1. 초기 봉쇄 (1991년 4월-5월)

1991년 키예보는 인구 1,261명의 마을이었고, 주민의 99.6%가 크로아트인이었다. 키예보는 세르브인 다수 거주 마을인 폴라차, 치블랴네, 체티나에 둘러싸여 고립된 상태였다.[1] 로그 혁명 이후 이 세르브인 마을들은 모두 SAO 크라이나에 속하게 되었고, 키예보에서 치블랴네, 체티나로 가는 도로가 바리케이드로 막히면서 키예보로 통하는 길이 제한되었다.[2] 이에 키예보 주민들은 임시 민병대를 조직하였다.

1991년 4월 1일, 플리트비체 호수 사건 이후 SAO 크라이나 군은 드르니시에서 크로아티아 경찰 3명을 인질로 잡았다. 이들은 플리트비체 호수에서 크로아티아군에 포로로 잡힌 세르비아계 크로아티아인 병사들과 교환을 위한 목적이었다. 이에 대응하여 키예보 민병대는 세르브인 민간인 여러 명을 인질로 잡고, 크로아티아 경찰 석방을 요구했다. 4월 2일, 유고 인민군(JNA) 정보 장교는 키예보와 치블랴네의 지역 민병대 간 무력 충돌 위험을 경고했다. 키예보는 SAO 크라이나의 도로망을 차단하는 전략적 요충지였다.[1]

4월 27일에서 28일 밤, 크로아티아 내무부 경찰 병력이 키예보에 도착했고, 4월 28일, 키예보에 크로아티아 경찰서가 설치되었다. 다음 날, 유고슬라비아 인민군(JNA) 제9(크닌) 군단 참모장 라트코 믈라디치 대령이 지휘하는 병력이 진입하여 키예보로의 모든 물자 공급을 차단했다. 5월 2일, 크로아티아 경찰 헬리콥터가 SAO 크라이나 군의 총격을 받고 키예보에 비상 착륙했다. 이 헬기에는 루카 베비치 국방부 장관과 블라디미르 셰크스 크로아티아 의회 부의장이 탑승하고 있었다. 같은 날, 코자크 산에서 SAO 크라이나 민병대원 1명이 사망했다.

크로아티아 대통령 프라뇨 투지만의 호소로, 1991년 5월 6일 브로도스플리트 조선소에서 크로아티아 노동조합 연합이 조직한 유고 인민군에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다. 5월 7일, 유고 인민군 제10 차량화 연대 병력이 모스타르를 출발했으나, 시로키브리예그에서 민간인들이 저지했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대통령 알리야 이제트베고비치의 설득과 투지만, 프라뇨 쿠하리치 추기경의 지지로 시위는 종료되었다. 이후 수 일간의 협상 끝에 키예보 봉쇄는 해제되었다.

3. 2. 8월 봉쇄와 키예보 함락

1991년 8월 17일, 라트코 믈라디치가 이끄는 유고 인민군(JNA) 부대가 키예보 마을 진입을 막기 위해 바리케이드를 설치하면서 5월 협정은 3개월도 되지 않아 깨졌다. 다음 날, 세르비아계 크로아티아인 지도자인 밀란 마르티치는 키예보 주민들과 경찰들에게 이틀 안에 마을을 떠나지 않으면 무장 공격을 받게 될 것이라는 최후통첩을 보냈다.[2]

8월 2일부터 25일 사이 크로아티아군은 마을 내 거의 모든 민간인을 대피시켰다. 8월 25일, 크로아티아군은 키예보에서 동남쪽으로 38km 떨어진 마을의 유고 인민군 막사를 공격했으나 실패했다. 이 공격의 목적은 키예보 인근에서 크로아트인의 입지가 약화됨에 따라 필요한 무기를 확보하기 위해서였다.[2]

8월 26일, 유고 인민군은 키예보를 공격하였으며, 이에 맞선 크로아티아 세력은 키예보 경찰서장 마르틴 치친 샤인이 지휘하는 소화기로만 무장한 경찰 병력 58명뿐이었다. 오전 5시 18분부터 오후 1시 정각 사이 유고 인민군은 마을에 1,500발의 포격을 가했으며 유고슬라비아 공군은 34소티의 근접항공지원을 가하며 공격하였다. 같은 날 오후 유고 인민군은 키예보를 향한 지상공격을 시작했다. 마르티치는 키예보 안에 있던 모든 집에서 발포를 가했다고 말했다. 키예보 공격부대는 유고 인민군 보병의 지원을 받은 전차 30대와 세르브계 크로아티아인 민병대로 구성되었다.

16시 30분경 유고 인민군이 마을에 진입하였다. 중령 보리슬라브 주키치가 지휘하는 제1전술그룹이 키예보 점령작전을 맡았으며, 유고 인민군 제221 차량화 보병여단 사령관은 22시 30분까지 마을을 모두 장악했다고 보고하였다. 크로아티아 경찰은 3개 조로 나누어 키예보를 떠나 코쟈크산을 통해 드르니시 쪽으로 빠져나왔다. 포격으로 집과 경작지 대부분이 파괴되면서 남은 크로아티아인들도 마을을 떠났다. 후퇴하는 무리들은 코쟈크산을 건널 때 유고슬라비아 공군 제트기의 추격을 받았다. 라디오 텔레비전 베오그라드의 기자 베스나 데 빈차가 이 사건을 녹화하였다. 마르티치가 이끄는 SAO 크라이나군은 키예보 지역에서 유고 인민군과 협력하여 지휘를 하였다.

4. 결과

키예보 포위전은 유고 인민군이 세르비아 편을 들어 크로아티아에 대한 군사 행동을 개시한 최초의 사례 중 하나이며, 크로아티아 독립 전쟁의 확전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크로아티아군 수비대는 2명만 부상을 입었으나, 퇴각하는 과정에서 20명이 포로로 붙잡혔다가 전쟁포로 교환을 통해 석방되었다. 유고 인민군은 사상자가 없었다.

4. 1. 인종 청소와 전쟁 범죄

유고 인민군이 키예보를 점령한 후 마을은 약탈당하고 불태워졌다. 키예보 파괴는 전쟁 초기 세르비아가 저지른 여러 전쟁 범죄 중 하나로 기록되었다.

구유고슬라비아 국제형사법원(ICTY)에서 열린 밀란 마르티치 재판에서 마르티치는 키예보 포위전 도중 전쟁 범죄를 저지른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2007년 재판소의 키예보 관련 조사 결과, 증언을 토대로 키예보에서 인종 청소가 자행되었다는 결론을 내렸으며 2008년 항소심에서 키예보 포위전을 인종 청소로 규정한 평결을 받아들였다. 키예보 포위전은 유고슬라비아 전쟁 중 처음으로 인종 청소 전략이 사용된 사례이다. 키예보에서의 사건은 라트코 믈라디치 재판의 공소장에는 포함되지 않았으나, 크로아티아 사법부는 라트코 믈라디치를 키예보에서 저질러진 전쟁 범죄에 대해 궐석재판을 열고 유죄로 판결하였다. 믈라디치는 20년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4. 2. 이후의 영향

키예보에서 크로아티아군과 유고 인민군 간의 충돌은 크로아티아 독립 전쟁에서 유고 인민군이 처음으로 공개적으로 세르비아계 반군을 지원한 사례이다. 수비군은 2명만 부상을 입었고, 퇴각하던 중 20명으로 구성된 1개 무리가 포로로 붙잡혔으나 전쟁 포로 교환을 통해 석방되었다. 유고 인민군은 사상자가 없었다. 유고 인민군 점령 이후 마을은 약탈당하고 불탔다. 키예보 파괴는 세르비아가 전쟁 초기에 저지른 여러 전쟁 범죄 중 하나로 기록되었다. 키예보 전투에 참여했던 유고 인민군 부대는 며칠 후 으로 진격하여 브를리카를 점령하고, 9월 중순 시베니크 전투에 참가하기 위해 재편성되었다.

구유고슬라비아 국제형사법원(ICTY)의 밀란 마르티치 재판에서 마르티치는 키예보 포위전 중 전쟁 범죄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2007년 재판소 조사 결과, 증언을 토대로 키예보에서 인종 청소가 자행되었다는 결론이 내려졌고, 2008년 항소심에서도 키예보 포위전을 인종 청소로 규정했다. 키예보 포위전은 유고슬라비아 전쟁 중 최초로 인종 청소 전략이 사용된 사례이다. 라트코 믈라디치는 크로아티아 사법부의 궐석재판을 통해 키예보에서 벌어진 전쟁 범죄에 대해 유죄 판결을 받고 20년 징역형을 선고받았으나, 키예보 사건은 믈라디치 재판의 공소장에는 포함되지 않았다.

참조

[1] 간행물 Slobodna Dalmacija 2010-08-25
[2] 간행물 Slobodna Dalmacija 2010-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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