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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티키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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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타티키오스는 비잔틴 제국의 군인이자 정치가로, 11세기 후반부터 12세기 초까지 활동했다. 그는 투르크인 노예 출신으로 알렉시우스 1세와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며 군사적, 정치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1078년에는 알렉시우스의 반란을 도왔고, 1081년 알렉시우스가 황제가 된 후에는 메가스 프리미케리오스 직책을 받았다. 셀주크, 페체네그, 쿠만족과의 전투에서 활약했으며, 제1차 십자군에도 참여했으나 십자군과의 갈등으로 인해 안티오키아 공방전을 떠났다. 타티키오스는 십자군 역사에서는 배신자로 묘사되기도 하지만, 현대 역사학자들은 다른 시각으로 평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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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티키오스

2. 출신과 초기 생애

"사라센"인[7], 아마 투르크인[7]이었던 그의 아버지는 알렉시우스의 아버지인 요한 코므네노스에게 붙잡혀 콤네누스 집안의 노예가 되었다. 타티키오스와 알렉시우스는 함께 자랐고, 마치 한 식구처럼 지냈다. 타티키오스는 알렉시오스의 ''oikogenes''(즉, "같은 집안 출신")으로 묘사된다.

1078년, 알렉시우스가 황제가 되기 전에 타티키오스는 그의 라이벌인 니케포로스 바실라키오스와의 전투에서 그를 따라다녔다. 이 전투 중에 타티키오스는 바실라키오스의 매복 계획을 발견했다. 1081년 알렉시우스가 황제가 되었을 때 타티키오스는 황실에서 ''메가스 프리미케리오스''[8] 직책을 맡았다. 그해 후반에 그는 아마도 헝가리인[2]이었을 오흐리드 주변에 거주하는 "투르크인"들을 지휘하여 디라키움 전투에서 로베르 기스카르와 싸웠다.[9]

3. 군사 및 정치 활동

타티키오스는 비잔티움 제국의 군사 지도자로, 셀주크 제국, 페체네그족, 쿠만족 등과의 전투에서 활약했다.

1086년 니케아 탈환 작전에 참여했으나 셀주크 증원군에 밀려 후퇴했고, 이후 페체네그족과 쿠만족과의 전투에서 공을 세웠다. 1090년에는 ''아르콘토폴로이[11] 타그마''를 이끌고 페체네그족 300여 명을 격파하기도 했다.

1094년 니케포로스 디오게네스의 황제 암살 음모를 적발하여 진압했으며, 같은 해 블라헤르네 종교 회의에 참석하여 칼케돈의 레오 주교를 비난하는 데 참여했다. 이 회의에서 ''Protoproedros''(선임 원로원 의장) 칭호를 받았다.[12]

3. 1. 셀주크 제국과의 전쟁

1086년 타티키오스는 셀주크로부터 니케아를 되찾기 위해 그곳으로 보내졌으나, 셀주크의 증원 병력이 파악되자 후퇴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알렉시오스 1세는 마누일 부투미티스의 해군 지원을 보냈지만, 타티키오스는 비티니아의 통치자 아불 카심을 이길 수 있었음에도 니케아를 얻지 못했다.[10] 1086년 말, 타티키오스는 필리포폴리스 근처에서 알렉시우스에 대항하는 보고밀파 봉기를 지원하고 있었던 페체네그인과 싸우기 위해 다시 불려졌다. 1087년 그는 페체네그인과 싸운 드리스타 전투에서 비잔틴 군대의 우익을 맡았고, 1090년엔 ''아르콘토폴로이[11] 타그마''를 이끌고 300여 명의 페체네그족 군대를 물리쳤다.

1094년 초, 그는 펜테고스티스에 있는 알렉시우스의 야영지를 지키고 있었다. 그곳에서 그는 전 황제였던 로마누스 4세 디오게네스의 아들인 니케포루스 디오게네스가 황제를 죽이려 한다는 음모를 알아차렸다. 니케포루스는 알렉시우스의 오랜 친구였지만 왕위에 욕심이 있었다는 사실은 분명했기에 타티키오스와 알렉시우스는 마지못해 그를 처벌했다. 니케포루스는 추방당했고, 끝내는 두 눈마저 멀고 말았다. 1094년 말, 타티키오스는 칼케돈의 레오 주교를 비난하는 블라헤르네 종교 회의에 참석했다. 블라헤르네 종교 회의 기록에 따르면 타티키오스에겐 ''Protoproedros'' (선임 원로원 의장)[12]라는 호칭이 주어졌다고 한다.

1095년엔 타티키오스는 쿠만족에 대항한 군사 작전에서 알렉시우스와 동행했다.

3. 2. 페체네그족 및 쿠만족과의 전투

1086년 타티키오스는 셀주크로부터 니케아를 되찾기 위해 파견되었으나, 셀주크 증원군이 온다는 소식에 후퇴해야 했다. 알렉시오스 1세는 마누일 부투미티스의 해군 지원을 보냈지만, 타티키오스는 비티니아의 통치자 아불 카심을 이길 수 있었음에도 니케아를 얻지 못했다.[10] 그해 말, 타티키오스는 필리포폴리스 근처에서 알렉시우스에 대항하는 보고밀파 봉기를 지원하던 페체네그족과 싸우기 위해 다시 불려왔다. 1087년 드리스타 전투에서 비잔틴 군대의 우익을 맡았고, 1090년엔 ''아르콘토폴로이[11] 타그마''를 이끌고 300여 명의 페체네그족 소규모 부대를 물리쳤다.

1095년에는 쿠만족에 대항한 군사 작전에 알렉시우스와 동행했다.

3. 3. 니케포로스 디오게네스 암살 음모 진압

1094년 초, 타티키오스는 펜테고스티스(Pentegostis)에서 알렉시오스 1세의 야영지를 지키고 있었다. 그곳에서 그는 전 황제였던 로마누스 4세 디오게네스의 아들인 니케포로스 디오게네스가 황제를 암살하려 한다는 음모를 알아차렸다.[10] 니케포로스는 알렉시오스의 오랜 친구였지만 왕위에 욕심이 있었다는 사실은 분명했기에 타티키오스와 알렉시우스는 마지못해 그를 처벌했다. 니케포루스는 추방당했고, 끝내는 두 눈마저 멀게 되었다.[10] 그해 말, 타티키오스는 칼케돈(Chalcedon)의 레오 주교를 비난하는 블라헤르네(Blachernae) 종교 회의에 참석했다. 블라헤르네 종교 회의 기록에 따르면 타티키오스에게는 ''Protoproedros''(선임 원로원 의장)이라는 칭호가 주어졌다고 한다.[12]

3. 4. 블라헤르네 종교 회의 참석

1094년 말, 타티키오스는 칼케돈의 레오 주교를 비난하는 블라헤르네 종교 회의에 참석했다. 이 회의 기록에 따르면 타티키오스는 ''Protoproedros''(선임 원로원 의장)이라는 칭호를 받았다.[12]

4. 제1차 십자군에서의 역할

타티키오스는 제1차 십자군 원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비잔티움 제국 황제 알렉시오스 1세의 명령에 따라 십자군을 지원하고, 제국의 이익을 보호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는 십자군을 막아내고, 니케아 공방전에서 십자군과 협력하여 니케아를 함락시키는 데 기여했다. 또한 안티오크 공성전에서는 십자군에게 전략적인 조언을 하기도 했지만, 보에몽과의 갈등으로 인해 십자군을 떠나게 되었다.

4. 1. 니케아 공방전과 십자군과의 협력

1096년 타티키오스는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하여 도시를 공격하기 시작한 난폭한 십자군들을 막아냈다. 1097년, 타티키오스는 알렉시우스에 의해 니케아를 공격하고 있는 십자군들을 지원하기 위해 트지타스 장군과 2000명의 펠타스트(peltasts)와 함께 니케아로 보내졌다. 십자군 역사가인 아익스의 알베르는 투르크와 십자군 사이에서 사절 역할을 했다고 하는데, 안나 콤네나의 믿을 수 있는 기록에 의하면 그는 십자군들이 모르게 니케아의 항복을 받아내기 위해 부투미티스와 함께 비밀 협상에 나섰다. 이 사건은 라틴 인과 그리스 인들 사이의 깊은 분열을 초래했다.

하지만 타티키오스는 아나톨리아를 건너는 십자군들과 동행하도록 지시 받았다. 이는 안내자 역할을 하기 위함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점령지를 비잔티움 제국에 반환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니케아를 떠나면서 십자군들은 두 그룹으로 나뉘었다. 타티키오스는 노르만 인 (타란토의 보에몽과 그의 조카인 탕크레드, 그리고 노르망디의 로버트)과 플랑드르 인 (플랑드르의 로베르) 들의 그룹을 따라가게 되었다. ''프랑크의 업적''에 따르면 타티키오스는 빈번히 투르크 인들의 포악함을 경고했다고 한다.

안티오크 공성전 때, 아귀예르의 레이몽은 타티키오스가 십자군에게 흩어져서 교외를 둘러싼 뒤 도시를 공격할 것을 제안했다고 적었다. 이는 식량 부족을 피하기 위한 충고였지만 이내 묵살당했다. 1098년 2월 타티키오스는 전장을 떠났는데, 안나 콤네나에 따르면 타티키오스는 보에몽으로부터 다른 십자군들이 그를 불신하여 그의 생명을 위협하고 있다고 전해 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반면 보에몽은 타티키오스가 비겁자에 배신자이며, 콘스탄티노플로부터 증원 병력을 데려오겠다고 한 약속에도 불구하고 군대를 도망쳐 전혀 돌아오지 않으려 한다는 루머를 퍼뜨렸다.

타티키오스에 대한 배신 혐의는 정당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비잔티움 장군은 그의 개인 소지품을 십자군 진영에 남겨두고 몰수당했다. 더 결정적으로, 타티키오스가 출발한 지 몇 주 후인 1098년 3월 4일, 안티오크 외곽 십자군에게 식량과 공성 장비를 실은 함대가 성 시메온 항구에 도착했다.[4] 현대 사학자 피터 프랑코판은 알렉시오스가 이제 비잔티움과 십자군 지도자들 사이의 확립된 유대감에 충분히 자신감을 가지고 다른 임무를 위해 그의 연락 장교를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남겨두었을 것이라고 제안한다.[5]

4. 2. 안티오키아 공방전과 십자군과의 갈등

1096년 타티키오스는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격하기 시작한 난폭한 십자군들을 막아냈다. 1097년, 타티키오스는 알렉시우스에 의해 니케아를 공격하고 있는 십자군들을 지원하기 위해 트지타스 장군과 2000명의 펠타스트(peltasts)와 함께 니케아로 보내졌다. 십자군 역사가인 아익스의 알베르는 투르크와 십자군 사이에서 사절 역할을 했다고 하는데, 안나 콤네나의 믿을 수 있는 기록에 의하면 그는 십자군들이 모르게 니케아의 항복을 받아내기 위해 부투미티스와 함께 비밀 협상에 나섰다. 이 사건은 라틴 인과 그리스 인들 사이의 깊은 분열을 초래했다.[4]

하지만 타티키오스는 아나톨리아를 건너는 십자군들과 동행하도록 지시 받았다. 이는 안내자의 역할을 하기 위함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점령지를 비잔티움 제국에 반환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니케아를 떠나면서 십자군들은 두 그룹으로 나뉘었다. 타티키오스는 노르만 인 (타란토의 보에몽과 그의 조카인 탕크레드, 그리고 노르망디의 로버트) 과 플랑드르 인 (플랑드르의 로베르) 들의 그룹을 따라가게 되었다. ''프랑크의 업적''에 따르면 타티키오스는 빈번히 투르크 인들의 포악함을 경고했다고 한다.

안티오크 공성전 때, 아귀예르의 레이몽은 타티키오스가 십자군에게 흩어져서 교외를 둘러싼 뒤 도시를 공격할 것을 제안했다고 적었다. 이는 식량 부족을 피하기 위한 충고였지만 이내 묵살당했다. 1098년 2월 타티키오스는 전장을 떠났는데, 안나 콤네나에 따르면 타티키오스는 보에몽으로부터 다른 십자군들이 그를 불신하여 그의 생명을 위협하고 있다고 전해 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반면 보에몽은 타티키오스가 비겁자에 배신자이며, 콘스탄티노폴리스로부터 증원 병력을 데려오겠다고 한 약속에도 불구하고 군대를 도망쳐 전혀 돌아오지 않으려 한다는 루머를 퍼뜨렸다. 이는 그를 위대한 적이자 거짓말쟁이로 언급하는 당시 십자군 연대기에 보존된 기록이다(『프랑크의 업적』에 따르면 "''periurio manet et manebit''").[4] 현대 사학자 피터 프랑코판은 알렉시오스가 이제 비잔티움과 십자군 지도자들 사이의 확립된 유대감에 충분히 자신감을 가지고 다른 임무를 위해 그의 연락 장교를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남겨두었을 것이라고 제안한다.[5]

5. 외모 및 후손

십자군 역사가들은 타티키오스가 코가 잘린 상태였다고 기록했다. 얼굴의 이목구비를 자르는 것은 배반자들에게 행해지는 비잔티움 제국의 처벌 방식이었지만, 타티키오스가 어째서 그런 형벌을 받았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13] 노장의 기베르에 따르면 타티키오스는 황금으로 만들어진 인공 코를 차고 다녔다고 한다. 십자군들의 평가와는 다르게 안나 콤네나는 그를 "용맹한 전사이며 전장에 자신의 목을 맡긴 자", "기발한 웅변가이자 강인한 남자"라고 묘사했다. 안나는 또한 타티키오스와 알렉시오스 1세가 폴로 게임을 하던 중 타티키오스가 말에서 떨어져 알렉시오스 1세에게 부딪혔고, 이 사고로 무릎을 다친 알렉시오스 1세는 그 후부터 통풍으로 고생하게 되었다고 기록했다.

타티키오스의 탄생과 죽음에 대한 기록은 없다. 메가스 프리미케리오스라는 직위는 일반적으로 환관에게 주어졌지만, 타티키오스의 후손들이 12세기에 힘 있는 귀족 가문의 구성원이었다는 점으로 보아 그가 환관 출신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유명한 후손으로는 콘스탄티누스 타티키오스가 있는데, 그는 마누엘 1세 콤네누스 휘하에서 시르미움 전투에서 뛰어난 활약을 보였지만, 이사키우스 2세에게 반항하다 실패하여 시력을 잃었다.[13]

참조

[1] 서적 undefined
[2] 서적 undefined
[3] 서적 undefined
[4] 서적 The First Crusade. The Call From the East Vintage
[5] 서적 The First Crusade. The Call From the East Vintage
[6] 서적 undefined
[7] 서적 undefined
[8] 문서 undefined
[9] 서적 undefined
[10] 문서 undefined
[11] 문서 undefined
[12] 서적 undefined
[13] 서적 undefin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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