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니스 코트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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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테니스 코트 전투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1944년 인도 코히마에서 벌어진 전투이다. 일본군의 인도 침공 작전의 일환으로 시작되었으며, 코히마 능선과 특히 지방 행정관의 방갈로 부근 테니스 코트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영국군, 인도군, 네팔군 등으로 구성된 연합군은 일본군에 맞서 격렬하게 저항했으며, 이 전투는 버마 전역의 전략적 전환점이 되었다. 연합군의 승리로 일본군의 버마 침공 계획은 좌절되었고, 연합군은 버마 탈환을 위한 공세를 시작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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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니스 코트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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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개요 | |
분쟁 | 코히마 전투, 버마 전역 |
날짜 | 1944년 4월 4일 – 6월 22일 |
장소 | 인도 나갈랜드 주 코히마 |
결과 | 연합군의 승리 |
교전 세력 | |
지휘관 | |
지휘관 1 | 몬타구 스톱포드 |
지휘관 2 | 사토 코토쿠 |
병력 규모 | |
병력 1 | 제33군단 시작 시: 약 1개 보병 여단, 전투 종료 시: 2개 보병 사단, 1개 "친디트" 여단, 1개 기계화 여단 |
병력 2 | 제31사단 1개 보병 사단 |
사상자 규모 | |
사상자 1 | 4,604명 |
사상자 2 | 5,764명 |
이미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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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배경
2. 1. 제2차 세계 대전과 태평양 전쟁
1939년 유럽에서 시작된 제2차 세계 대전은 1941년 일본의 진주만 공격으로 태평양 전쟁으로 확대되었다. 일본은 동남아시아와 태평양 지역을 장악하려는 야욕을 드러냈고, 이에 맞서 연합군은 저항했다.2. 2. 일본군의 인도 침공 작전 (우호 작전)
1944년 3월, 일본군은 대규모 인도 침공 작전인 우호 작전을 시작했다. 6일까지 코히마 주둔지의 영국, 네팔, 인도 병사들은 코히마 능선에서 포위되었다. 코히마 능선은 임팔에서 디마푸르로 이어지는 도로 옆으로 언덕과 골짜기가 이어져 있었으며, 길이는 약 1.6km, 폭은 약 365m였다. 도로를 따라 가파른 경사면은 능선을 공격하기 어렵게 만들었지만, 강력한 적을 격퇴하기에는 좁은 공간이었다.포위가 시작되면서 코히마 능선은 남쪽(임팔 방향)의 감옥 언덕에서 제1 아삼 연대가, 능선의 중앙 지역은 주로 제4대대, 퀸스 오운 로열 웨스트 켄트 연대가 방어했다. 병원 스퍼로 알려진 능선의 북서쪽은 디마푸르로 가는 도로를 마주한 제3 아삼 소총대가 방어했다. 도로의 날카로운 모퉁이에 있는 능선의 북동쪽에는 부 지방장관(DC) 찰스 포시의 방갈로와 테니스 코트가 있었으며, 이곳은 처음에 현지 보충 부대에서 온 영국군과 구르카 병사들로 구성된 혼성 부대가 지켰다고 한다.
2. 3. 코히마의 전략적 중요성
코히마 능선은 임팔에서 디마푸르로 이어지는 도로 옆으로 언덕과 골짜기가 이어져 있었으며, 길이는 약 1.6km, 폭은 약 365m였다. 1944년 3월, 일본군은 대규모 인도 침공 작전인 우호 작전을 시작했다. 일본군이 코히마를 점령하면 연합군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인도 침공을 위한 교두보를 확보할 수 있었다. 코히마 주둔지의 영국, 네팔, 인도 병사들은 코히마 능선에서 포위되었다.3. 코히마 전투의 전개
1944년 4월 초, 일본군은 코히마를 포위하고 공격을 시작했다. 영국군, 인도군, 네팔군 등으로 구성된 연합군은 코히마 능선에서 방어선을 구축하고 저항했다.
4월 8일, 일본군은 방어선 북동부, 특히 DC의 방갈로 지역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다. 일본군은 큰 피해를 입었지만, 증원군을 투입하여 추가 공격을 준비했다. 연합군 병사들은 DC의 방갈로에서 아스팔트 테니스 코트 반대편으로 철수하면서 마지막 탄약까지 저항했지만, 결국 일본군에게 제압당했다. 이후 퀸스 오운 로열 웨스트 켄트 연대 4대대 A중대의 신속한 증원으로 이 지역이 강화되면서 테니스 코트 전투가 시작되었다.
4월 9일과 10일 새벽 사이, 일본군 제58연대는 거의 30분마다 테니스 코트 지역의 연합군 방어선을 공격했다. 로열 웨스트 켄트 연대 4대대 A중대의 토머스 켄욘 소령은 테니스 코트 서쪽 가장자리에 참호를 파고 방어하는 영국군, 인도군, 구르카족 병력을 지휘했다. 4월 10일, 최전선 참호의 탄약이 떨어졌지만, 윌리엄스 상사가 용감하게 탄약을 보급하여 군사 훈장을 받았다.
4월 12일, 테니스 코트 방어 임무는 존 윈스탄리 소령이 지휘하는 4대대 B중대로 교체되었다. B중대가 방어를 맡은 첫날 밤, 일본군은 고무 밑창 신발을 신고 조용히 공격하여 영국군 최전선 진지를 거의 점령했다. 중대 지휘관 중 한 명인 토머스 호그 중위는 총검 공격에서 살아남아 브렌 경기관총으로 공격자를 사살했다.
4월 13일, 일본군은 중포와 박격포 사격을 DC의 방갈로와 테니스 코트 주변에 집중시켰다. 일본 보병의 여러 차례 공격이 있었지만, 영국 국방부는 "테니스 코트를 가로질러 백병전 거리에서 수류탄을 던지는 상황"이었다고 묘사하며 이를 격퇴했다. 4월 14일에는 일본군의 공격이 없었고, 4월 15일, 코히마 능선의 영국군과 인도군은 영국 제2보병사단이 디마푸르-코히마 도로를 따라 공격하여 일본군의 검문소를 돌파하고 조츠마 주변의 제161인도보병여단 병력을 구출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4월 17일, 일본군은 능선을 점령하기 위해 마지막으로 시도하여 야전 보급 창고(FSD) 언덕과 쿠키 초소를 점령했다. 4월 18일 아침, 영국 포병이 일본군 진지에 서쪽에서 공격을 시작하여 일본군의 공격을 중단시켰다. 제2영국 사단, 제161인도 여단 및 제33군단의 전력이 주둔지 언덕 북서쪽 지역으로 진격하여 일본군을 몰아냈다. 디마푸르와 코히마 사이의 도로가 개통되었고, 포위는 풀렸다.
포위 해제에 투입된 연합군 병력 중에는 제161인도 여단의 1/제1펀자브 연대가 있었다. 4월 18일 저녁, 1/1 펀자브 연대 D중대는 테니스 코트 지역에서 일본군과 대치했다. 그들은 58 보병 연대의 공격을 받았는데, 이 전투에서 동남아시아 사령부 공보 담당관은 "수류탄 경기가 방갈로의 테니스 코트에서 벌어졌다"고 보고했다. 1/1 펀자브 연대는 22명의 사상자를 냈고, 다음 날(4월 19일) 영토를 다시 탈환했다. 이 과정에서 제마이다르 무하마드 라피크는 일본군 벙커에 맞서 중대를 이끈 공로로 군사 십자 훈장을 받았다. 1/1 펀자브 연대는 120명의 사상자를 낸 후 4월 21일 후방으로 이동했으며, 제6여단 소속 로열 버크셔 연대 1대대 C중대로 교체되었고, 4월 23일에는 같은 대대의 D중대로 교체되었다.
제6여단의 전투는 2사단 제6보병여단에서 제1로열 버크셔 연대의 'B' 중대를 지휘했던 보셸 소령에 의해 기록되었다. 그는 "테니스 코트가 내려다보이는 지역을 인수"했으며, "지형 때문에 낮에는 일본군 저격수 때문에 이동이 불가능"했고, "3주 동안 코히마에" 있으면서 "매일 밤 공격을 받"았다고 기록했다. 또한 "물은 부족했고, 하루에 한 사람당 약 한 파인트로 제한"되어 "면도를 중단"했으며, "공중 보급이 핵심이었지만, 가파른 지형과 좁은 능선으로 인해 일부 물건이 일본군에게 넘어갔"다고 덧붙였다. 마지막으로 그는 "우리 중대는 100명 이상으로 코히마에 들어갔고 약 60명으로 나왔"다고 회고했다.
코히마 전투에서 가장 치열했던 전투는 지방 행정관(DC) 찰스 포시의 방갈로 근처 테니스 코트에서 벌어졌다. 양측은 테니스 코트를 사이에 두고 근접전과 백병전을 벌이며 막대한 사상자를 냈다.
4월 8일 일본군은 방어선 북동부 지역, 특히 DC 방갈로 지역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다. 일본군은 큰 피해를 입었지만 증원군을 투입하여 공격을 이어갔다. 연합군 병사들은 테니스 코트 반대편으로 철수하면서 브렌 기관총을 사용하며 저항했지만, 탄약이 떨어지자 총검에 찔리고 총에 맞아 쓰러졌다. 이 시점에 퀸스 오운 로열 웨스트 켄트 연대 4대대 A중대가 증원되면서 테니스 코트 전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4월 9일부터 10일 새벽까지 일본군 제58연대는 거의 30분 간격으로 테니스 코트 지역의 연합군 방어선을 공격했다. 켄욘 소령이 지휘하는 영국군, 인도군, 구르카족 방어군은 테니스 코트 서쪽 가장자리에 참호를 파고 방어했다. 4월 10일, 포탄이 떨어지는 상황에서도 방어 시설과 엄폐물 덕분에 많은 병사들이 목숨을 건졌다. 최전선 참호의 탄약이 떨어졌을 때 윌리엄스 상사가 용감하게 보급하여 군사 훈장을 받았다.
4월 12일, 테니스 코트 방어 임무는 존 윈스탄리 소령이 지휘하는 4대대 B중대로 교체되었다. B중대가 방어하던 첫날 밤, 일본군은 고무 밑창 신발을 신고 조용히 공격해 영국군 최전선 진지를 거의 점령했다. 토머스 호그 중위는 총검 공격에서 살아남아 브렌 경기관총으로 공격자를 사살했다.
4월 13일, 일본군의 중포와 박격포 사격이 DC 방갈로와 테니스 코트 주변에 집중되었다. 일본 보병의 공격이 여러 차례 있었지만, 영국군은 "테니스 코트를 가로질러 수류탄을 던지는" 백병전을 벌이며 격퇴했다. 4월 14일에는 일본군의 공격이 없었고, 4월 15일에는 영국 제2보병사단이 디마푸르-코히마 도로를 따라 공격하여 일본군의 검문소를 돌파하고 조츠마 주변의 제161인도보병여단 병력을 구출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4월 17일, 일본군은 능선을 점령하기 위해 마지막 시도를 감행하여 야전 보급 창고(FSD) 언덕과 쿠키 초소를 점령했다. 4월 18일 아침, 영국 포병이 서쪽에서 일본군 진지를 공격하여 일본군의 공격을 저지했다. 영국 제2사단, 제161인도 여단 및 제33군단의 병력이 주둔지 언덕 북서쪽으로 진격하여 일본군을 몰아냈다. 디마푸르와 코히마 사이의 도로가 개통되면서 포위는 풀렸다.
포위망을 풀기 위해 투입된 연합군 병력 중에는 제161인도 여단의 1/제1펀자브 연대가 있었다. 4월 18일 저녁, 1/1 펀자브 연대 D중대는 테니스 코트 지역에서 일본군과 대치했다. 이들은 일본군 제58 보병 연대의 공격을 받았고, "방갈로의 테니스 코트에서 수류탄 경기가 벌어졌다"고 보고되었다. 1/1 펀자브 연대는 22명의 사상자를 냈고, 다음 날(4월 19일) 영토를 탈환했다. 이 과정에서 제마이다르 무하마드 라피크는 일본군 벙커에 맞서 중대를 이끈 공로로 군사 십자 훈장을 받았다. 1/1 펀자브 연대는 120명의 사상자를 낸 후 4월 21일 후방으로 이동했고, 제6여단의 로열 버크셔 연대 1대대 C중대로 교체되었으며, 4월 23일에는 같은 대대의 D중대로 교체되었다.
코히마를 점령하기 위한 전투에서 일본군은 즉시 후퇴하지 않고 점령한 진지에서 몇 주 동안 완강하게 저항했다. 5월 10일, 도로에서 작전 중이던 전차들이 테니스 코트 지역을 점령한 보병 공격을 지원했다. 5월 13일 아침, 코히마 능선의 대부분 진지가 영국군과 인도군에 의해 탈환되었다. 같은 날, DC 방갈로는 그랜트 전차의 지원을 받아 테니스 코트에서 사격한 도르셋 연대 2대대에 의해 탈환되었다. 선두 전차는 제149왕립기갑군단의 워터하우스 상사가 운전했으며, 일본군 벙커에 18m 이내 거리에서 75mm 포를 발사했다. 이 전차는 기븐과 쿡 상사가 지휘하는 도르셋 연대 2개 소대의 지원을 받았다. 테니스 코트 전투를 종식시킨 연합군의 돌파는 1982년 테렌스 쿠네오의 그림에 묘사되어 있으며, 이 그림은 임팔 병영, 요크에 있는 코히마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제6여단의 전투는 2사단 제6보병여단에서 제1로열 버크셔 연대의 'B' 중대를 지휘했던 보셸 소령에 의해 기록되었다. 그는 "우리는 3주 동안 코히마에 있었고, 매일 밤 공격을 받았다... 물은 부족했고, 하루에 한 사람당 약 한 파인트로 제한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면도를 중단했다. 공중 보급이 핵심이었지만, 가파른 지형과 좁은 능선으로 인해 일부 물건이 일본군에게 넘어갔다. 우리 중대는 100명 이상으로 코히마에 들어갔고 약 60명으로 나왔다."라고 회상했다.
3. 1. 포위와 초기 전투 (1944년 4월)
1944년 4월 초, 일본군은 코히마를 포위하고 공격을 시작했다. 영국군, 인도군, 네팔군 등으로 구성된 연합군은 코히마 능선에서 방어선을 구축하고 저항했다.4월 8일, 일본군은 방어선 북동부, 특히 DC의 방갈로 지역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다. 일본군은 큰 피해를 입었지만, 증원군을 투입하여 추가 공격을 준비했다. 연합군 병사들은 DC의 방갈로에서 아스팔트 테니스 코트 반대편으로 철수하면서 마지막 탄약까지 저항했지만, 결국 일본군에게 제압당했다. 이후 퀸스 오운 로열 웨스트 켄트 연대 4대대 A중대의 신속한 증원으로 이 지역이 강화되면서 테니스 코트 전투가 시작되었다.
4월 9일과 10일 새벽 사이, 일본군 제58연대는 거의 30분마다 테니스 코트 지역의 연합군 방어선을 공격했다. 로열 웨스트 켄트 연대 4대대 A중대의 토머스 켄욘 소령은 테니스 코트 서쪽 가장자리에 참호를 파고 방어하는 영국군, 인도군, 구르카족 병력을 지휘했다. 4월 10일, 최전선 참호의 탄약이 떨어졌지만, 윌리엄스 상사가 용감하게 탄약을 보급하여 군사 훈장을 받았다.
4월 12일, 테니스 코트 방어 임무는 존 윈스탄리 소령이 지휘하는 4대대 B중대로 교체되었다. B중대가 방어를 맡은 첫날 밤, 일본군은 고무 밑창 신발을 신고 조용히 공격하여 영국군 최전선 진지를 거의 점령했다. 중대 지휘관 중 한 명인 토머스 호그 중위는 총검 공격에서 살아남아 브렌 경기관총으로 공격자를 사살했다.
4월 13일, 일본군은 중포와 박격포 사격을 DC의 방갈로와 테니스 코트 주변에 집중시켰다. 일본 보병의 여러 차례 공격이 있었지만, 영국 국방부는 "테니스 코트를 가로질러 백병전 거리에서 수류탄을 던지는 상황"이었다고 묘사하며 이를 격퇴했다. 4월 14일에는 일본군의 공격이 없었고, 4월 15일, 코히마 능선의 영국군과 인도군은 영국 제2보병사단이 디마푸르-코히마 도로를 따라 공격하여 일본군의 검문소를 돌파하고 조츠마 주변의 제161인도보병여단 병력을 구출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4월 17일, 일본군은 능선을 점령하기 위해 마지막으로 시도하여 야전 보급 창고(FSD) 언덕과 쿠키 초소를 점령했다. 4월 18일 아침, 영국 포병이 일본군 진지에 서쪽에서 공격을 시작하여 일본군의 공격을 중단시켰다. 제2영국 사단, 제161인도 여단 및 제33군단의 전력이 주둔지 언덕 북서쪽 지역으로 진격하여 일본군을 몰아냈다. 디마푸르와 코히마 사이의 도로가 개통되었고, 포위는 풀렸다.
포위 해제에 투입된 연합군 병력 중에는 제161인도 여단의 1/제1펀자브 연대가 있었다. 4월 18일 저녁, 1/1 펀자브 연대 D중대는 테니스 코트 지역에서 일본군과 대치했다. 그들은 58 보병 연대의 공격을 받았는데, 이 전투에서 동남아시아 사령부 공보 담당관은 "수류탄 경기가 방갈로의 테니스 코트에서 벌어졌다"고 보고했다. 1/1 펀자브 연대는 22명의 사상자를 냈고, 다음 날(4월 19일) 영토를 다시 탈환했다. 이 과정에서 제마이다르 무하마드 라피크는 일본군 벙커에 맞서 중대를 이끈 공로로 군사 십자 훈장을 받았다. 1/1 펀자브 연대는 120명의 사상자를 낸 후 4월 21일 후방으로 이동했으며, 제6여단 소속 로열 버크셔 연대 1대대 C중대로 교체되었고, 4월 23일에는 같은 대대의 D중대로 교체되었다.
제6여단의 전투는 2사단 제6보병여단에서 제1로열 버크셔 연대의 'B' 중대를 지휘했던 보셸 소령에 의해 기록되었다. 그는 "테니스 코트가 내려다보이는 지역을 인수"했으며, "지형 때문에 낮에는 일본군 저격수 때문에 이동이 불가능"했고, "3주 동안 코히마에" 있으면서 "매일 밤 공격을 받"았다고 기록했다. 또한 "물은 부족했고, 하루에 한 사람당 약 한 파인트로 제한"되어 "면도를 중단"했으며, "공중 보급이 핵심이었지만, 가파른 지형과 좁은 능선으로 인해 일부 물건이 일본군에게 넘어갔"다고 덧붙였다. 마지막으로 그는 "우리 중대는 100명 이상으로 코히마에 들어갔고 약 60명으로 나왔"다고 회고했다.
3. 2. 테니스 코트 전투 (1944년 4월-5월)
코히마 전투에서 가장 치열했던 전투는 지방 행정관(DC) 찰스 포시의 방갈로 근처 테니스 코트에서 벌어졌다. 양측은 테니스 코트를 사이에 두고 근접전과 백병전을 벌이며 막대한 사상자를 냈다.4월 8일 일본군은 방어선 북동부 지역, 특히 DC 방갈로 지역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다. 일본군은 큰 피해를 입었지만 증원군을 투입하여 공격을 이어갔다. 연합군 병사들은 테니스 코트 반대편으로 철수하면서 브렌 기관총을 사용하며 저항했지만, 탄약이 떨어지자 총검에 찔리고 총에 맞아 쓰러졌다. 이 시점에 퀸스 오운 로열 웨스트 켄트 연대 4대대 A중대가 증원되면서 테니스 코트 전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4월 9일부터 10일 새벽까지 일본군 제58연대는 거의 30분 간격으로 테니스 코트 지역의 연합군 방어선을 공격했다. 켄욘 소령이 지휘하는 영국군, 인도군, 구르카족 방어군은 테니스 코트 서쪽 가장자리에 참호를 파고 방어했다. 4월 10일, 포탄이 떨어지는 상황에서도 방어 시설과 엄폐물 덕분에 많은 병사들이 목숨을 건졌다. 최전선 참호의 탄약이 떨어졌을 때 윌리엄스 상사가 용감하게 보급하여 군사 훈장을 받았다.
4월 12일, 테니스 코트 방어 임무는 존 윈스탄리 소령이 지휘하는 4대대 B중대로 교체되었다. B중대가 방어하던 첫날 밤, 일본군은 고무 밑창 신발을 신고 조용히 공격해 영국군 최전선 진지를 거의 점령했다. 토머스 호그 중위는 총검 공격에서 살아남아 브렌 경기관총으로 공격자를 사살했다.
4월 13일, 일본군의 중포와 박격포 사격이 DC 방갈로와 테니스 코트 주변에 집중되었다. 일본 보병의 공격이 여러 차례 있었지만, 영국군은 "테니스 코트를 가로질러 수류탄을 던지는" 백병전을 벌이며 격퇴했다. 4월 14일에는 일본군의 공격이 없었고, 4월 15일에는 영국 제2보병사단이 디마푸르-코히마 도로를 따라 공격하여 일본군의 검문소를 돌파하고 조츠마 주변의 제161인도보병여단 병력을 구출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4월 17일, 일본군은 능선을 점령하기 위해 마지막 시도를 감행하여 야전 보급 창고(FSD) 언덕과 쿠키 초소를 점령했다. 4월 18일 아침, 영국 포병이 서쪽에서 일본군 진지를 공격하여 일본군의 공격을 저지했다. 영국 제2사단, 제161인도 여단 및 제33군단의 병력이 주둔지 언덕 북서쪽으로 진격하여 일본군을 몰아냈다. 디마푸르와 코히마 사이의 도로가 개통되면서 포위는 풀렸다.
포위망을 풀기 위해 투입된 연합군 병력 중에는 제161인도 여단의 1/제1펀자브 연대가 있었다. 4월 18일 저녁, 1/1 펀자브 연대 D중대는 테니스 코트 지역에서 일본군과 대치했다. 이들은 일본군 제58 보병 연대의 공격을 받았고, "방갈로의 테니스 코트에서 수류탄 경기가 벌어졌다"고 보고되었다. 1/1 펀자브 연대는 22명의 사상자를 냈고, 다음 날(4월 19일) 영토를 탈환했다. 이 과정에서 제마이다르 무하마드 라피크는 일본군 벙커에 맞서 중대를 이끈 공로로 군사 십자 훈장을 받았다. 1/1 펀자브 연대는 120명의 사상자를 낸 후 4월 21일 후방으로 이동했고, 제6여단의 로열 버크셔 연대 1대대 C중대로 교체되었으며, 4월 23일에는 같은 대대의 D중대로 교체되었다.
코히마를 점령하기 위한 전투에서 일본군은 즉시 후퇴하지 않고 점령한 진지에서 몇 주 동안 완강하게 저항했다. 5월 10일, 도로에서 작전 중이던 전차들이 테니스 코트 지역을 점령한 보병 공격을 지원했다. 5월 13일 아침, 코히마 능선의 대부분 진지가 영국군과 인도군에 의해 탈환되었다. 같은 날, DC 방갈로는 그랜트 전차의 지원을 받아 테니스 코트에서 사격한 도르셋 연대 2대대에 의해 탈환되었다. 선두 전차는 제149왕립기갑군단의 워터하우스 상사가 운전했으며, 일본군 벙커에 18m 이내 거리에서 75mm 포를 발사했다. 이 전차는 기븐과 쿡 상사가 지휘하는 도르셋 연대 2개 소대의 지원을 받았다. 테니스 코트 전투를 종식시킨 연합군의 돌파는 1982년 테렌스 쿠네오의 그림에 묘사되어 있으며, 이 그림은 임팔 병영, 요크에 있는 코히마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제6여단의 전투는 2사단 제6보병여단에서 제1로열 버크셔 연대의 'B' 중대를 지휘했던 보셸 소령에 의해 기록되었다. 그는 "우리는 3주 동안 코히마에 있었고, 매일 밤 공격을 받았다... 물은 부족했고, 하루에 한 사람당 약 한 파인트로 제한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면도를 중단했다. 공중 보급이 핵심이었지만, 가파른 지형과 좁은 능선으로 인해 일부 물건이 일본군에게 넘어갔다. 우리 중대는 100명 이상으로 코히마에 들어갔고 약 60명으로 나왔다."라고 회상했다.
3. 3. 연합군의 반격과 포위망 돌파 (1944년 5월-6월)
4월 18일 아침, 영국 포병이 일본군 진지에 서쪽에서 공격을 시작하여 일본군의 공격을 중단시켰다. 영국 제2보병사단, 제161인도 여단 및 제33군단의 전력이 주둔지 언덕 북서쪽 지역으로 진격하여 일본군을 그들의 진지에서 몰아냈다. 디마푸르와 코히마 사이의 도로가 개통되었고, 포위는 풀렸다.4월 18일 저녁, 1/1 펀자브 연대 D중대는 테니스 코트 지역에서 일본군과 대치하고 있었다. 그들은 58 보병 연대의 공격을 받았는데, 이 전투에서 동남아시아 사령부 공보 담당관은 "수류탄 경기가 방갈로의 테니스 코트에서 벌어졌다"고 보고했다. 1/1 펀자브 연대는 22명의 사상자를 냈고, 다음 날(4월 19일)에 다시 탈환할 때까지 영토를 잃었는데, 이 과정에서 제마이다르 무하마드 라피크는 일본군 벙커에 맞서 중대를 이끈 공로로 군사 십자 훈장을 받았다. 1/1 펀자브 연대는 120명의 사상자를 낸 후 4월 21일 후방으로 이동한 것으로 보이며, 제6여단의 일부인 로열 버크셔 연대 1대대 C중대로 교체되었으며, 그들은 4월 23일 같은 대대의 D중대에 의해 교체되었다.
코히마를 점령하기 위해 싸웠던 일본군은 즉시 후퇴하지 않았다. 그들 중 많은 수가 점령한 진지에 머물면서 몇 주 더 완강하게 싸웠다. 1944년 5월 10일, 도로에서 작전을 수행하는 전차들이 테니스 코트 지역을 점령한 보병 공격을 지원했다. 5월 13일 아침, 코히마 능선의 대부분의 진지는 영국군과 인도군에 의해 탈환되었다. 그날, DC의 방갈로는 그랜트 전차의 지원을 받아 테니스 코트에서 사격한 도르셋 연대 2대대에 의해 마침내 탈환되었다.
4. 전투의 주요 특징
4. 1. 치열한 백병전
코히마 전투, 특히 테니스 코트 전투는 매우 가까운 거리에서 벌어진 치열한 백병전으로 유명하다. 양측은 수류탄을 던지고 총검을 사용하는 등 격렬한 전투를 벌였다.4. 2. 연합군의 다양한 구성
코히마 전투에 참여한 연합군은 다양한 부대로 구성되었다. 영국군, 인도군, 네팔군(구르카족)이 참전하였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한국 광복군도 이 전투에 참여했다.4. 3. 전략적 전환점
코히마 전투는 버마 전역의 전략적 전환점으로 평가된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이 패배하면서 연합군은 버마 탈환을 위한 공세를 시작할 수 있었다.5. 한국 광복군과 코히마 전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규군이었던 한국 광복군은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여 연합군의 일원으로 일본군과 싸웠다. 일부 자료에 따르면, 한국 광복군은 코히마 전투에도 참여하여 일본군에 맞서 싸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분류:제2차 세계 대전의 저항운동
분류:태평양 전쟁
분류:제2차 세계 대전 참전국
6. 전투의 결과 및 영향
5월 15일경, 코히마 전투에서 패배한 일본 제31사단이 철수하기 시작했고, 제33, 제161 인도 여단을 지원하고 교대하기 위해 영국 및 인도군이 신규 투입되었다. 이 전투는 버마 전역의 분수령이 된 코히마 전투의 전환점이었다. 코히마 전투의 여파로 제14군의 병력은 임팔 구원을 시작으로 진격을 시작했으며, 이는 버마를 탈환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이 지역의 연합군 최고 사령관인 얼 루이스 마운트배튼은 코히마를 "아마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전투 중 하나일 것이다... 사실상 버마 전투... 발가벗은 비할 데 없는 영웅주의... 영국/인도 테르모필레다."라고 묘사했다. 제국 전쟁 박물관 덕스포드는 다른 것들과 함께 이 전투의 디라마를 가지고 있다.[1]
6. 1. 일본군의 패배와 후퇴
5월 15일경, 코히마 전투에서 패배한 일본 제31사단이 철수하기 시작했고, 제33, 제161 인도 여단을 지원하고 교대하기 위해 영국 및 인도군이 신규 투입되었다. 이 전투는 버마 전역의 분수령이 된 코히마 전투의 전환점이었다. 코히마 전투의 여파로 제14군의 병력은 임팔 구원을 시작으로 진격을 시작했으며, 이는 버마를 탈환할 때까지 계속되었다.이 지역의 연합군 최고 사령관인 얼 루이스 마운트배튼은 코히마를 "아마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전투 중 하나일 것이다... 사실상 버마 전투... 발가벗은 비할 데 없는 영웅주의... 영국/인도 테르모필레다."라고 묘사했다. 제국 전쟁 박물관 덕스포드는 다른 것들과 함께 이 전투의 디라마를 가지고 있다.[1]
6. 2. 연합군의 버마 탈환 작전 개시
5월 15일경, 일본 제31사단이 철수하기 시작했고, 제33군단의 신규 투입된 영국 및 인도군은 영국 제2사단과 제33, 제161 인도 여단을 지원하고 교대하기 시작했다.[1] 코히마 전투의 여파로 제14군의 병력은 임팔 구원을 시작으로 진격을 시작했으며, 이는 버마를 탈환할 때까지 계속되었다.[1] 이 전투는 버마 전역의 분수령이 된 코히마 전투의 전환점이었다. 이 지역의 연합군 최고 사령관인 얼 루이스 마운트배튼은 코히마를 "아마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전투 중 하나일 것이다... 사실상 버마 전투... 발가벗은 비할 데 없는 영웅주의... 영국/인도 테르모필레다."라고 묘사했다.[1]6. 3. 인도 독립 운동에 미친 영향
7. 평가 및 의의
7. 1. "영국/인도 테르모필레"
루이스 마운트배튼은 코히마 전투를 "영국/인도 테르모필레"라고 칭했다. 이 전투에서 연합군은 큰 피해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에 맞서 용감하게 싸웠다.7. 2. 버마 전역의 전환점
코히마 전투는 버마 전역의 분수령이 된 전투였다.[1] 이 전투의 여파로 제14군은 임팔 구원을 시작으로 진격을 계속하여 버마 탈환을 이끌었다. 5월 15일경, 일본 제31사단이 철수하면서 영국 및 인도군이 투입되어 영국 제2사단과 제33, 제161 인도 여단을 지원하고 교대했다.이 지역 연합군 최고 사령관이었던 루이스 마운트배튼은 코히마 전투를 "아마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전투 중 하나... 사실상 버마 전투... 영국/인도 테르모필레"라고 묘사했다.
제국 전쟁 박물관 덕스포드에는 이 전투를 재현한 디오라마가 전시되어 있다.[1]
7. 3.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
코히마 전투는 제2차 세계 대전의 버마 전역에서 중요한 전투 중 하나였다. 이 전투는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 싸운 연합군과 아시아 민족들의 저항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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