톰페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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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톰페아성은 에스토니아의 수도 탈린에 위치한 역사적인 성이다. 9세기부터 요새로 사용되었으며, 1219년 덴마크에 점령된 후 덴마크 국기 전설과 함께 '덴마크인의 성'으로 불렸다. 1227년 검의 형제 기사단, 1346년 튜튼 기사단으로 소유주가 바뀌며 중세 시대 동안 수도원과 유사한 형태로 발전했다. 16세기 이후 스웨덴, 러시아 제국 등 열강의 지배를 거치며 정치적 중심지로 기능했으며, 1710년 러시아 제국 지배 하에 궁전으로 개조되었다. 1918년 에스토니아 독립 후 국회의사당으로 사용되었으며, 현재까지 에스토니아 국회의사당으로 사용되고 있다. 톰페아성은 48m 높이의 피크 헤르만 탑을 포함하며, 에스토니아 국기가 매일 게양된다.
톰페아 성은 최소 서기 9세기부터 고대 에스토니아의 요새로 사용되었다. 1219년, 덴마크의 발데마르 2세가 이끄는 북방 십자군이 이 성을 점령했다.[1] 린다니스 전투에서 덴마크군이 승리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덴마크 국기 ('단네브로')가 하늘에서 떨어졌다는 전설이 있다. 톰페아 성은 라틴어로 ''카스트룸 다노룸''(castrum danorum), 에스토니아어로는 ''타니 린나''(taani linna)로 불렸는데, 이는 "덴마크인의 성"을 의미한다. 여기서 탈린시의 이름이 유래했을 가능성이 있다.[2]
2. 역사
1227년 검의 형제 기사단이 성을 점령하고 재건을 시작하여 현재 볼 수 있는 성의 모습 대부분이 만들어졌다. 1237년 덴마크에 다시 넘어갔지만, 1346년 튜튼 기사단에 팔려 중세 시대 동안 그들의 소유였다.[1] 튜튼 기사단은 종교 기사단이었기 때문에 성은 예배당, 수도원 회의실, 기사들을 위한 기숙사 등을 갖춘 수도원과 비슷해졌다. 또한 "필스스티커", "슈르 덴 케를", "란스크로네", "랑거 헤르만" (에스토니아어 피크 헤르만 또는 "키 큰 헤르만") 등의 탑들이 건설되었다.[1] 피크 헤르만 탑은 48m 높이이며, 매일 일출 시 에스토니아 국기가 게양되고 일몰 시 내려진다.[1]
16세기 종교 개혁 이후, 튜튼 기사단은 에스토니아에서 소유지를 잃었고, 이 지역은 스웨덴 왕국, 폴란드-리투아니아, 러시아 제국의 경쟁 대상이 되었다. 1561년 스웨덴령 에스토니아가 되면서 톰페아 성은 중세 요새에서 에스토니아 정치 권력의 행정 중심지로 변모했다.[1]
1710년 대북방 전쟁 과정에서 스웨덴은 에스토니아 영토를 러시아 제국에 잃었다. 이후 톰페아 성은 대규모 재건 계획을 통해 궁전으로 바뀌었다. 요한 슐츠가 설계한 바로크 및 신고전주의 건축 양식의 새로운 건물이 동쪽에 추가되었다. 이곳에는 에스토니아 현의 지방 행정부와 제국 총독의 거주지가 있었다. 19세기에는 공원이 조성되고 근처에 기록 보관소가 건설되었다.[1][3]
1918년 에스토니아가 독립한 후, 톰페아 성은 국회의사당으로 사용되고 있다. 현재 의사당 건물은 1922년에 건설된 것으로, 외관은 고전주의 건축 양식이지만 내부는 표현주의 양식이다. 소련 8월 쿠데타 실패 후, 톰페아 성의 레닌상은 철거되었다.[6] 남쪽의 '''헤르만 탑'''에는 매일 아침 국기가 게양된다.[7][8]
2. 1. 중세
에스토니아 신화에 따르면 톰페아성이 위치한 톰페아 언덕은 린다가 직접 쌓아 만들었다고 한다.[10]
1219년 덴마크의 발데마르 2세 국왕이 북방십자군을 이끌고 에스토니아 원정을 떠나 톰페아성을 점령했다.[9] 린다니세 전투에서 덴마크군이 고전할 당시 하늘에서 덴마크의 국기가 떨어졌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톰페아성은 '덴마크인의 성'으로 알려졌는데, 라틴어로는 '카스트룸 다노룸'(Castrum Danorum), 에스토니아어로는 '타니 린'(Taani Linn)이라 불렸다. 이 '타니 린'이라는 이름에서 탈린이라는 도시 이름이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1227년 검의 형제기사단이 톰페아성을 점령하고 성을 재건하기 시작했다. 오늘날 볼 수 있는 톰페아성의 모습은 이때 만들어진 것이다. 10년 뒤 덴마크에 다시 점령되었으나, 1346년 튜튼 기사단에 매각되어 중세 시대 내내 튜튼 기사단의 소유로 남았다.[9]
튜튼 기사단은 수도회였기 때문에 톰페아성은 수도원처럼 변모했다. 회당, 사제회당, 기사단 숙소가 들어섰고, 성 외곽에는 탑들이 추가되었다. '필슈티커'(Pilsticker, Pilsticker|활 깎는 사람de), '슈튀어 덴 케를'(Stür den Kerl, Stür den Kerl|적을 무찔러라de), '란트스크로네'(Landskrone, Landskrone|대지의 왕관de), 피크 헤르만(Pikk Hermann, Pikk Hermann|키 큰 헤르만de) 등의 탑이 이때 건설되었다.[9] 피크 헤르만 탑은 48m 높이로, 톰페아성의 주요 상징이자 탈린의 랜드마크이다. 매일 아침 에스토니아의 국가 연주와 함께 에스토니아의 국기가 게양되고 저녁에는 하강한다.[9]
2. 2. 근대
16세기 리보니아 전쟁을 거치면서 오늘날 발트 국가에 위치한 기사단은 모두 해체되었으며, 스웨덴 왕국, 폴란드-리투아니아, 러시아 제국이 차례대로 에스토니아 일대를 점령하였다.[9] 1561년 스웨덴이 에스토니아 북부를 점령하고 스웨덴 왕국령 에스토니아 공국이 되자, 톰페아 성은 기사단만 사용하는 요새에서 에스토니아의 국가 행사와 정치적 중심지로 변모하였으며, 이는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다.[9]
1710년 러시아 제국이 스웨덴 왕국을 물리치고 에스토니아를 점령한 뒤, 톰페아 성을 궁전으로 바꾸기 위한 대대적인 내부 개조 계획을 수립하였다. 이 과정에서 요한 슐츠가 설계한 바로크와 신고전주의 양식의 본관이 기존 성 건물의 동쪽 방면에 증축되었다. 이곳에는 예스틀랸디야현 관리의 집무실과 거주 공간이 자리하게 되었다. 제정 시기에는 성 남동쪽에 공원이 조성되었으며, 그 인근에 기록 보관소가 들어섰다.[9][11]
2. 3. 현대
본회의장
에스토니아가 1918년 독립한 후, 정부는 튜턴 기사단의 옛 수도원 건물 부지에 국회(''리기코구'')를 위한 새 건물을 짓기로 결정했다. 오이겐 하버만과 헤르베르트 요한손이 설계한 의회 건물은 2년 만에 완공되어 1922년에 완공되었다.[3] 외관은 전통주의적이지만, 내부는 세계 유일의 표현주의 의회 건물로 표현주의 건축 양식이다.[1]
1940년 6월 이후, 외국 점령 기간 동안 — 1941년까지 소련, 1941년부터 1944년까지 나치 독일, 그리고 1944년 이후 다시 소련에 의해 — 에스토니아의 민주적으로 선출된 의회는 해산되었다. 그러나 리기코구의 성과 건물은 1947년부터 1990년까지 형식적인 거수기 역할을 한, 실질적인 의미가 없는 소련 점령 하의 에스토니아의 입법 기관인 현지 최고 소비에트에서 사용되었다.
소련 8월 쿠데타가 실패로 끝나자 같은 달 22일에는 톰페아 성의 레닌상이 받침대에서 철거되었다.[6]
3. 건축
톰페아 성은 오랜 역사를 거치며 다양한 건축 양식의 변화를 겪었다. 9세기경 고대 에스토니아의 요새로 시작된 톰페아 성은 1219년 덴마크의 발데마르 2세가 이끄는 북방 십자군에 의해 점령되었다.[1] 덴마크의 전설에 따르면, 린다니스 전투에서 덴마크 국기가 하늘에서 떨어졌다고 하며, 이 성은 라틴어로 '카스트룸 다노룸'(castrum danorum), 에스토니아어로는 '타니 린나'(taani linna) 즉 "덴마크인의 성"으로 불렸다. 여기서 탈린이라는 도시 이름이 유래되었다.[2]
이후 톰페아 성은 검의 형제 기사단과 튜튼 기사단 시대를 거치며 중세 시대의 모습을 갖추었고, 종교 개혁 이후 스웨덴 왕국 시기에는 행정 중심지로 변모했다.[1] 러시아 제국 시기에는 대규모 재건축을 통해 궁전으로 바뀌었으며, 바로크 및 신고전주의 건축 양식의 건물이 추가되었다.[1][3]
3. 1. 중세 건축
1227년 검의 형제기사단이 톰페아성을 점령하고 크게 재건축하면서 오늘날 톰페아성의 모습이 갖춰지기 시작했다. 10년 뒤 덴마크군에게 다시 점령되었으나, 1346년 튜튼 기사단에게 매각되어 중세 시대 내내 튜튼 기사단의 점령지로 남았다.[9]
튜튼 기사단은 수도회였기 때문에 톰페아성은 수도원처럼 변모해 갔다. 성당에 필수적인 회당과 사제회당, 기사단용 숙박시설이 내부에 들어섰다. 또한 성 외곽에 여러 탑을 추가했는데, '필슈티커' (Pilsticker, Pilsticker|활깎이de), '슈튀어 덴 케를' (Stür den Kerl, Stür den Kerl|적을 무찔러라de), '란트스크로네' (Landskrone, Landskrone|대지의 왕관de), '피크 헤르만' (Pikk Hermann, Pikk Hermann|키 큰 헤르만de) 등이 현재까지 남아있다.[9]
이 중 피크 헤르만은 높이 48m의 거대한 탑으로, 톰페아성의 주요 볼거리이자 탈린시의 랜드마크이다. 피크 헤르만에서는 매일 아침 에스토니아의 국가 연주와 함께 에스토니아의 국기가 게양되며, 저녁에 하강한다.[9]
3. 2. 근대 건축
1710년 러시아 제국이 스웨덴 왕국을 물리치고 에스토니아를 점령한 뒤, 톰페아 성은 대대적인 내부 개조를 통해 궁전으로 바뀌었다. 이 과정에서 요한 슐츠가 설계한 바로크 및 신고전주의 양식의 본관이 성의 동쪽에 증축되어 예스틀랸디야현 관리의 집무실과 거주 공간으로 사용되었다. 제정 시기에는 성 남동쪽에 공원이 조성되고 인근에 기록 보관소가 들어섰다.[9][11]
3. 3. 현대 건축
에스토니아가 1918년 독립한 후, 정부는 튜턴 기사단의 옛 수도원 건물 부지에 국회(''리기고구'')를 위한 새 건물을 짓기로 결정했다. 오이겐 하버만과 헤르베르트 요한손이 설계한 의회 건물은 2년 만에 완공되어 1922년에 완공되었다.[3] 외관은 전통주의적이지만, 내부는 세계 유일의 표현주의 건축 양식의 의회 건물이다.[1]
4. 대중문화
에스토니아 신화 속 여주인공 린다가 톰페아 언덕을 직접 바위를 쌓아 만들었다고 전해진다.[1]
참조
[1]
웹사이트
Toompea Castle
http://www.riigikogu[...]
Riigikogu (Parliament of Estonia)
2013-09-10
[2]
웹사이트
Dictionary of the Estonian language
https://www.eki.ee/d[...]
2022-04-01
[3]
서적
Estonia. Cultural Tourism
Kunst Publishers
[4]
웹사이트
Toompea Castle
http://www.tallinn.i[...]
Tallinn info
2012-03-15
[5]
웹사이트
Toompea Castle
http://www.riigikogu[...]
Riigikogu (Parliament of Estonia)
2022-10-13
[6]
간행물
"[[ニューズウィーク]]日本版(1991年9月5日号)"
TBSブリタニカ
1991-09-05
[7]
서적
地球の歩き方 2017〜18 バルトの国々
ダイヤモンド・ビッグ社
[8]
웹사이트
タリン
http://www.dtac.jp/b[...]
DTACエストニア観光情報局
2018-04-13
[9]
웹인용
Toompea Castle
http://www.riigikogu[...]
Riigikogu (Parliament of Estonia)
2013-09-10
[10]
웹인용
Toompea Castle
http://www.tallinn.i[...]
Tallinn info
2012-03-15
[11]
서적
Estonia. Cultural Tourism
Kunst Publis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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