툴롱 해전 (174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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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툴롱 해전 (1744년)은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중 1744년 2월 22일, 토머스 매튜스 제독이 이끄는 영국 함대와 프랑스-스페인 연합 함대 간에 벌어진 해전이다. 영국 해군은 수적으로 우세했음에도 불구하고, 지휘관 간의 불화와 전술적 실패로 인해 뚜렷한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 이 전투는 영국 해군 지휘관들의 군법 회의로 이어졌으며, 특히 리처드 레스톡의 무죄 판결과 토머스 매튜스의 해임은 대중의 비판을 받았다. 툴롱 해전의 결과는 영국 해군의 교전 지침 개정을 가져왔고, 스페인과 프랑스 간의 협력 관계를 약화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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툴롱 해전 (1744년)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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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개요 | |
전투 이름 | 툴롱 해전 |
다른 이름 | 케이프 시시에 해전 |
일부 |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
날짜 | 1744년 2월 21일 ~ 2월 22일 (신식), 1744년 2월 11일 ~ 2월 12일 (구식) |
장소 | 툴롱 앞바다, 지중해 |
결과 | 프랑스-스페인 연합군 승리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스페인, 프랑스 |
교전국 2 | 영국 |
지휘관 및 지도자 | |
교전국 1 지휘관 | 후안 호세 나바로, 클로드 브뤼에르 |
교전국 2 지휘관 | 토마스 매튜, 리처드 레스토크, 윌리엄 롤리 |
병력 규모 | |
교전국 1 병력 | 전열함 27척, 프리깃함 3척, 소형 군함 3척 |
교전국 2 병력 | 전열함 30척, 프리깃함 3척, 소형 군함 6척 |
피해 규모 | |
교전국 1 피해 | 전사 149명, 부상 467명, 함선 3척 손상, 1척 자침 |
교전국 2 피해 | 전사 133명, 부상 223명, 포로 17명, 함선 5척 손상, 화공선 1척 침몰 |
시각 자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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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배경
2월 21일, 27척의 전열함과 3척의 프리깃으로 구성된 프랑스-스페인 연합 함대가 출항했고, 매튜스 제독이 이끄는 영국 함대가 이를 뒤쫓았다. 영국 함선은 일반적으로 프랑스-스페인 함선보다 크고 무장이 강력하여 전체적으로 25% 이상 더 많은 대포를 탑재하고 있었다. 양측 함대는 전통적인 전열 대형(전위, 중앙, 후위)을 갖추려 했다. 스페인 함대가 선두에, 프랑스 함대가 뒤를 이었으며, 영국 측에서는 매튜스가 전위를, 윌리엄 로울리가 중앙을, 레스톡 부제독이 후위를 맡았다.
툴롱 해전은 양측 모두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한 채 끝났다. 영국 함대는 토마스 매튜 제독의 지휘 하에 메노르카로 철수했는데, 이로 인해 북부 이탈리아의 프랑스-스페인 연합군에 대한 해상 봉쇄가 일시적으로 풀려 이들이 공세를 펼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었다.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은 1740년 합스부르크 가문의 마지막 남성 군주인 카를 6세 신성 로마 황제가 사망하면서 시작되었다. 그의 죽음으로 장녀인 마리아 테레지아가 합스부르크 군주국(흔히 '오스트리아'로 불리며, 오스트리아 대공국, 헝가리 왕국, 크로아티아 왕국, 보헤미아 왕관령,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 파르마 포함)의 상속자가 되었다. 그러나 살리카법은 여성의 상속을 금지하고 있었고, 1713년 국사 조칙으로 마리아 테레지아의 상속이 인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가장 가까운 남성 친척인 바이에른의 카를 알베르트가 이에 반발했다.
당시 합스부르크 가문은 신성 로마 제국 내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이었지만, 바이에른 선제후국, 작센 선제후국, 프로이센 왕국과 같은 경쟁자들의 도전을 받고 있었다. 이들 국가는 프랑스의 지원을 받아 왕위 계승 문제를 유럽 전체의 분쟁으로 확대시켰고, 1742년 1월 바이에른의 카를 알베르트는 거의 300년 만에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이 아닌 신성 로마 황제로 선출되었다. 이에 맞서 마리아 테레지아와 오스트리아는 영국, 하노버 선제후국, 네덜란드 공화국과 함께 소위 '실용 동맹'(Pragmatic Allies)을 결성했다.
1743년 6월 데팅겐 전투에서 프랑스군과 영국군이 직접 충돌했지만, 양국은 아직 공식적으로 전쟁 상태는 아니었다. 한편, 스페인과 영국은 1739년부터 주로 스페인령 아메리카와 지중해에서 젠킨스의 귀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1742년, 후안 호세 나바로가 이끄는 스페인 함대는 프랑스 해군 기지인 툴롱으로 피신했고, 토머스 매튜스 제독이 지휘하는 영국 지중해 함대에 의해 항구가 봉쇄되어 탈출하지 못하고 있었다. 1743년, 프랑스의 루이 15세와 그의 삼촌인 스페인의 펠리페 5세는 퐁텐블로 조약을 맺고 영국 침공을 공동으로 계획했다. 1744년 1월 말, 12,000명 이상의 프랑스 병력과 수송선이 됭케르크에 집결했다.
영국 해군의 주의를 침공 경로에서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나바로 제독은 툴롱을 탈출하여 대서양으로 향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 작전에는 Claude-Élisée de Court de La Bruyère|클로드-엘리제 드 코르 드 라 브뤼에르fra가 지휘하는 프랑스 레반트 함대가 지원하기로 했다.
나바로의 상대인 토머스 매튜스는 1690년 영국 해군에 입대하여 평범하지만 꾸준히 경력을 쌓아 1742년 지중해 함대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부사령관인 리처드 레스톡과 사이가 매우 좋지 않았으며, 두 사람 모두 각자 레스톡의 전출을 요청했지만 해군본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러한 갈등 때문에 매튜스는 전투를 앞두고 부하들과 전술에 대해 충분히 논의하지 못했고, 이는 이후 전투 중 명령 전달에 혼란을 야기하는 한 원인이 되었다.
3. 교전
약한 바람으로 인해 기동이 어려워 두 함대는 흩어졌지만, 21일 저녁 11시 30분경 서로 접근하여 전투 준비를 시작했고, 매튜스는 함선에 전투 대형을 갖추라는 신호를 보냈다.[1] 밤사이 대열이 제대로 형성되지 않자 매튜스는 바람을 향해 뱃머리를 돌려 정지하라는 신호를 추가로 보냈는데, 이는 함선들이 먼저 대열을 완성하도록 의도한 것이었다.[1] 전위와 중앙 함대는 이 지시를 따랐지만, 레스톡 휘하의 후위 함대는 대열을 형성하지 않은 채 즉시 정지 명령을 따랐고, 이로 인해 전위 및 중앙 함대와 상당한 거리가 벌어졌다.[1]
다음 날인 2월 22일 새벽, 매튜스는 레스톡에게 뒤처진 간격을 좁히라는 신호를 보냈지만, 레스톡의 반응은 늦었고 그 사이 프랑스-스페인 함대는 남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1] 연합 함대가 지브롤터 해협을 통과하여 브레스트의 프랑스 함대와 합류하는 것을 막기 위해[1], 매튜스는 이 교전이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의 일환임을 분명히 하고 오후 1시경 기함 HMS 나뮤르를 이끌고 전열에서 벗어나 직접 나바로 제독 휘하의 스페인 후위 함대 12척을 공격했다. 제임스 콘월 선장이 지휘하는 HMS 말보로가 그 뒤를 따랐다.[1] 하지만 매튜스가 이전에 내린 '전열 유지' 신호가 계속 게양되어 있었기 때문에 영국 함대 내부에 혼란이 발생했다. 일부 함선은 매튜스를 따라 돌격했지만, 다른 함선들은 상반되는 명령 속에서 교전을 주저하거나 레스톡처럼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수적으로 열세하고 후위 함대의 적절한 지원을 받지 못한 ''나뮤르''와 ''말보로''는 스페인 함선들과 격렬하게 교전하며 큰 피해를 입었다.[1] 특히 ''말보로''는 스페인 전열을 돌파하려다 심각한 손상을 입어 침몰 직전 상태가 되었다. 나바로의 기함 ''레알 펠리페'' 주변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으며, 스페인 함선 ''헤라클레스''와 ''콘스탄테'' 등은 여러 영국 함선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막아냈다.[2] 스페인 후방의 다른 함선들(''브릴란테, 산 페르난도, 할콘, 소베르비오, 산타 이사벨'')도 영국 후위 함대의 일부와 교전을 벌였으나, 레스톡 휘하의 함선 대부분은 전투에 거의 참여하지 않았다.[2]
오후 5시경, 프랑스 함대가 스페인 함대를 지원하기 위해 접근해오자, 일부 영국 지휘관들은 포위될 것을 우려했다.[1] 스페인 함대는 방어적인 위치를 고수하면서도 영국군에게 나포되었던 ''포데르''함을 되찾았다.[1] 결국 영국 함대는 상당한 피해를 입고 프랑스 함대의 압박 속에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다음 날인 2월 23일, 영국 함대는 함대를 재정비하고 남서쪽으로 이동하는 프랑스-스페인 연합 함대를 추격했다. 손상된 함선을 예인하느라 속도가 느려진 연합 함대를 따라잡았고, 기동 불능 상태가 된 ''포데르''는 프랑스군에 의해 자침 처리되었다. 영국 함대가 다시 연합 함대에 근접했지만, 매튜스는 또다시 함대에 정지 신호를 내렸다. 2월 24일, 연합 함대가 시야에서 벗어나자 매튜스는 추격을 포기하고 이에르를 거쳐 포트 마혼으로 철수하여 3월 초에 도착했다.[1]
4. 전투의 결과 및 영향
그러나 해전의 결과는 동맹국 사이의 갈등을 심화시켰다. 특히 스페인 측은 프랑스 함대의 소극적인 태도 때문에 승리를 놓쳤다고 강하게 비난했다. 스페인 함대를 이끈 나바로 제독은 스페인 국왕으로부터 '승리의 후작'(Marqués de la Victoria|마르케스 데 라 빅토리아es) 칭호를 받았으나, 이 사건으로 인한 양국 간의 불신은 이후 전쟁 수행 과정에서 협력을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 되었다.
영국 내부에서는 함대의 성과를 둘러싸고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부사령관 리처드 레스토크는 사령관 매튜스를 비롯한 여러 장교들의 전투 수행 방식에 문제를 제기하며 군법 회의 소집을 요구했다. 이어진 군법 회의는 큰 사회적 관심을 끌었으며, 지휘관의 명령 해석과 해군의 엄격한 '교전 지침' 준수 여부를 둘러싼 논란 끝에 매튜스 제독은 해임되고 레스토크는 무죄 판결을 받는 등 예상 밖의 결과로 이어졌다. 이는 영국 해군의 규율과 전투 지침에 대한 중요한 재검토를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툴롱 해전 이후 프랑스는 1744년 3월 영국과 하노버 선제후국에 공식적으로 전쟁을 선포했으며, 5월에는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를 침공함으로써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에 대한 개입을 본격화했다. 비록 현대 역사가들은 프랑스의 이러한 결정이 해전 이전부터 계획된 것이라고 보기도 하지만, 툴롱 해전은 전쟁이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드는 중요한 시점에 발생한 사건이었다.
4. 1. 군법 회의
함대 부사령관이었던 리처드 레스토크 중장은 전투 후, 토마스 매튜 제독을 포함한 다수의 영국 함대 장교들을 군법 회의에 소환할 것을 조지 2세에게 청원하였다. 레스토크는 전투 당시 매튜스가 내린 신호가 "전열을 구성하여 교전하라"는 것이었으므로, 아직 전열에 가담하지 않은 자신의 후위 함대는 교전 의무가 없었다고 주장했다. 오히려 그는 매튜스가 완성되지 않은 전열을 스스로 무너뜨리고 적 함대를 공격한 것이 군기 위반이라고 반박했다.
이러한 레스토크의 주장이 받아들여져 초기 군법 회의에서 그는 무죄 판결을 받았고, 반대로 매튜스와 몇몇 장교들은 영국 해군에서 해고되었다. 이 결정은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고, 대영 제국 의회는 공개 조사를 요구했다. 이후 열린 군법 회의에서는 7명의 함장이 면직되었고, 2명은 무죄 판결을 받았으며, 1명은 재판 전에 사망했다. 면직된 함장들은 다음과 같다.
선장 이름 | 함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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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버리쉬 | HMS 도르셋셔 |
존 앰브로즈 | HMS 루퍼트 |
에드먼드 윌리엄스 | HMS 로열 오크 |
리처드 노리스 | HMS 에섹스 |
토머스 쿠퍼 | HMS 스털링 캐슬 (후에 복권) |
제임스 로이드 | HMS 나소 |
윌리엄 딜크스 | HMS 치체스터 |
매튜스 제독 또한 함대를 무질서하게 교전에 투입하고 유리한 상황에서도 적극적으로 적을 공격하지 않았다는 혐의로 군법 회의에 회부되었다. 그의 개인적인 용기는 의심받지 않았으나, 공식적인 "교전 지침"에서 요구하는 전열 구성을 준수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유죄 판결을 받고 1747년 6월 해군에서 해임되었다.
반면, 레스토크는 상관의 명령(적극적인 교전 의지)을 사실상 무시했음에도 불구하고, "교전 지침"의 문구를 엄격하게 따랐다는 이유로 무죄를 선고받았다. 그는 이후 청색 제독으로 진급했지만, 1746년 12월에 사망했다.
이러한 군법 회의 결과는 대중에게 큰 불만을 샀다. 당시 한 인물은 "국민들은... 레스토크가 싸우지 않은 것에 대해 용서받고 매튜스가 싸운 것에 대해 해임되어야 한다는 것을 납득할 수 없었다"고 기록했다. 레스토크의 무죄 판결에는 그의 정치적 연줄이 작용했다는 비판이 제기되기도 했다.
이 사건의 여파로 대영 제국 의회는 1749년 해군 법원의 자율성을 강화하는 조치를 취했다. 또한 "교전 지침" 제XII조를 개정하여, 비겁함, 부주의 또는 반역으로 인해 교전을 회피하는 행위에 대한 처벌을 사형으로 명확히 규정했다.[3] 이 개정된 조항은 훗날 존 빙 제독의 처형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 일련의 사건들은 해군 내에서 규칙의 엄격한 준수와 상황에 따른 임기응변 사이의 오랜 논쟁에 큰 영향을 끼쳤다.
4. 2. 정치적, 사회적 파장
툴롱 해전은 승패를 가리지 못했지만, 매튜스 제독이 메노르카에서 철수하면서 북부 이탈리아에 주둔한 갈리스판 군(프랑스-스페인 연합군)에 대한 해상 봉쇄가 일시적으로 풀려 이들이 공세를 펼칠 기회를 얻게 되었다. 그러나 이 전투는 동맹이었던 프랑스와 스페인 사이에 격렬한 비난을 불러일으켰다. 스페인 측은 프랑스 함대의 소극적인 태도 때문에 거의 손에 넣을 뻔했던 승리를 놓쳤다고 여겼다. 스페인 후위 함대를 지휘했던 나바로 제독은 스페인 국왕 펠리페 5세로부터 "승리의 후작"(Marqués de la Victoria|마르케스 데 라 빅토리아es)이라는 칭호를 받았고, 프랑스 함대 사령관 드 라 브뤼에르의 해임을 요구했다. 이 사건으로 생긴 양국 간의 적대감은 이후 전쟁 기간 동안 협력을 크게 저해했으며, 나바로와 그의 함대는 매튜스의 후임 지중해 사령관 롤리 제독에 의해 전쟁이 끝날 때까지 카르타헤나에 묶이게 되었다.프랑스는 1744년 3월 영국과 하노버 선제후국에 전쟁을 선포하고, 5월에는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를 침공했다. 당시 영국에서는 해전에서 우세한 전력으로 적을 격파하지 못한 실패에 대한 비난이 일었지만, 현대 역사가들은 프랑스의 이러한 결정이 1743년 10월에 이미 합의된 것이며 툴롱 해전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지는 않았다고 본다.
영국 내에서는 해전 결과에 대한 불만이 커져 대영 제국 의회는 공개 조사를 요구했다. 이어 열린 군법 회의에서는 여러 함장들이 재판에 회부되었다. 7명의 함장이 "최선을 다해" 적과 교전하지 않았다는 전쟁 조항 위반 혐의로 면직되었고, 2명은 무죄 판결을 받았으며, 1명은 재판 전에 사망했다.
함대 사령관이었던 매튜스 제독 역시 함대를 무질서하게 전투에 투입하고 유리한 상황에서 적을 적극적으로 공격하지 않았다는 등의 혐의로 군법 회의에 넘겨졌다. 그의 개인적인 용기는 의심받지 않았으나, 공식적인 "교전 지침"에 명시된 전열 유지 의무를 위반했다는 이유로 유죄 판결을 받아 1747년 6월 해군에서 해임되었다.
반면, 전투 당시 후위 함대를 이끌었던 부사령관 리처드 레스토크 중장은 매튜스의 신호가 "전열을 형성하면서 교전하라"는 것이었으므로, 아직 전열에 완전히 합류하지 못한 자신의 함대는 교전 의무가 없었다고 주장했다. 오히려 매튜스가 불완전한 전열 상태에서 공격을 감행하여 군기를 위반했다고 반박했다. 레스토크는 지침의 문구를 엄격하게 따랐다는 이유로 무죄 판결을 받고 청색 제독으로 진급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1746년 12월에 사망했다.
이러한 군법 회의 결과는 대중에게 큰 불만을 샀다. 당시 한 인물은 "대중은 레스토크가 싸우지 않은 것에 대해 용서받고 매튜스가 싸운 것에 대해 해임되어야 한다는 것을 납득하지 못했다"고 기록했다. 레스토크의 무죄 판결에는 그의 정치적 연줄이 작용했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이에 의회는 1749년 해군 법원의 자율성을 강화하는 한편, "교전 지침" 제XII조를 개정하여 전투 중 소극적인 태도에 대한 처벌을 사형으로 명확히 규정했다.[3] 이 개정된 조항은 훗날 존 빙 제독의 처형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툴롱 해전과 그 이후의 논란은 해군 규율의 엄격한 준수와 실제 전투 상황에서의 유연한 판단 사이의 중요한 문제를 제기하는 계기가 되었다.
4. 3. 교전 지침 개정
함대 부사령관 리처드 레스톡은 이 전투에 대한 항의의 의미로 매튜를 포함한 대다수의 영국함대 장교들을 군법 회의에 소환할 것을 조지 2세에게 청원하였다. 레스토크의 전투 불참가에 대해 항의한 매튜와 장교들에게 레스토크는 매튜의 신호가 "전열을 구성하여 교전하라"라고 한 것을 지적하고, 전열에 아직 가담하지 않은 후위함대에게 교전의 의무는 없다고 주장했다. 오히려 매튜가 완성되지 않은 전열을 무너뜨리고 적 함대를 공격한 것이 군기를 위반했다고 주장한 것이다.대영 제국 의회는 공개 조사를 요구했고, 이어진 군법 회의에서 7명의 선장은 면직되었고, 전쟁 조항에 따라 "최선을 다해" 적과 교전하지 못한 혐의로 2명이 무죄를 선고받았으며, 1명은 재판 전에 사망했다.[3]
매튜스 또한 함대를 무질서하게 교전에 투입하고 유리한 조건에서도 적을 공격하지 않은 혐의로 군법 회의에 회부되었다. 그의 개인적인 용기는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그는 "전열"에 참여해야 하는 공식적인 "교전 지침"을 준수하지 않은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으며 1747년 6월에 해군에서 해임되었다. 지휘관의 명령을 무시했음에도 불구하고, 레스톡은 지침의 정확한 문구를 따랐다는 이유로 무죄를 선고받고 청색 제독으로 진급했으나, 1746년 12월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3]
이러한 판결은 대중에게 인기가 없었고, 당시 한 사람은 "국민들은... 레스톡이 싸우지 않은 것에 대해 용서받고 매튜스가 싸운 것에 대해 해임되어야 한다는 것을 설득할 수 없었다"라고 평가했다.[3] 레스톡의 무죄는 그의 정치적 연줄에 기인한 것이라는 비판이 많았다.[3] 이 사건은 규칙의 엄격한 준수와 상황에 따른 임기응변 사이의 문제에 큰 영향을 끼쳤다.
결국 의회는 1749년에 해군 법원의 자율성을 강화하는 한편, "교전 지침"의 제XII조를 개정하여 적과 교전하지 않은 것에 대한 처벌을 훨씬 더 구체적이고 엄격하게 만들었다. 개정된 조항은 비겁함, 부주의, 반역 등으로 전투에 참여하지 않거나 최선을 다하지 않은 경우 사형에 처하도록 규정했다.[3] 이 개정된 지침은 이후 존 빙 제독의 처형으로 이어지는 배경이 되었다.[3]
4. 4. 스페인과 프랑스의 관계
툴롱 해전은 승패를 가리지 못했지만, 영국의 매튜스 제독이 메노르카에서 철수하면서 북부 이탈리아에 주둔한 프랑스-스페인 연합 군대의 해상 봉쇄가 일시적으로 풀리는 결과를 낳았다. 이로 인해 연합군은 공세를 펼칠 기회를 얻었다. 그러나 해전 이후 양국 관계는 악화되었다. 스페인 측은 이 해전을 거의 승리할 뻔했으나 프랑스 해군의 소극적인 움직임 때문에 기회를 놓쳤다고 비난했다. 스페인 함대를 지휘한 나바로 제독은 스페인 국왕 펠리페 5세로부터 '승리의 후작'(Marqués de la Victoria|마르케스 데 라 빅토리아es)이라는 칭호를 받았고, 프랑스 제독 드 라 브뤼에르의 지휘 해임을 요구했다. 이러한 갈등은 양국 간의 적대감을 키웠고, 이후 전쟁에서 스페인과 프랑스 간의 협력을 크게 저해하는 요인이 되었다. 결국 나바로 제독과 그의 함대는 지중해 사령관으로 매튜스의 뒤를 이은 롤리 제독에 의해 전쟁이 끝날 때까지 카르타헤나 항구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4. 5. 전쟁의 확대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은 1740년 합스부르크 가문의 마지막 남성 군주인 카를 6세 신성 로마 황제가 사망하면서 시작되었다. 그의 딸 마리아 테레지아가 합스부르크 군주국(흔히 '오스트리아'라고 불리며, 여기에는 오스트리아 대공국, 헝가리 왕국, 크로아티아 왕국 (합스부르크), 보헤미아 왕관령,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 파르마가 포함되었다)의 상속자가 되었지만, 여성의 상속을 금지하는 살리카법으로 인해 논란이 되었다. 1713년 국사 조칙으로 마리아 테레지아의 상속이 인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가장 가까운 남성 친척인 바이에른의 카를 알베르트가 상속권을 주장하며 이의를 제기했다.
합스부르크 가문은 신성 로마 제국 내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이었지만, 바이에른 선제후국, 작센 선제후국, 프로이센 왕국과 같은 경쟁자들의 도전을 받았다. 이들 국가는 프랑스의 지원을 받아 왕위 계승 분쟁을 유럽 전체의 전쟁으로 확대시켰다. 1742년 1월, 바이에른의 카를 알베르트는 거의 300년 만에 처음으로 합스부르크 가문이 아닌 인물로서 신성 로마 황제 자리에 올랐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영국, 하노버 선제후국, 네덜란드 공화국과 함께 이른바 '실용 동맹'(Pragmatic Alliance)을 결성하여 맞섰다.
1743년 6월 데팅겐 전투에서 프랑스군과 영국군이 직접 충돌했지만, 두 나라는 아직 공식적으로 전쟁을 선포하지는 않은 상태였다. 한편, 영국과 스페인은 1739년부터 아메리카 식민지(뉴 스페인)와 지중해를 중심으로 젠킨스의 귀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1742년, 후안 호세 나바로가 이끄는 스페인 함대는 프랑스 해군 기지인 툴롱으로 피신했고, 토머스 매튜스 제독이 지휘하는 영국 지중해 함대에 의해 항구가 봉쇄되어 탈출하지 못하고 있었다.
프랑스는 개입을 본격화했다. 1743년 퐁텐블로 조약을 통해 프랑스의 루이 15세와 그의 삼촌인 스페인의 펠리페 5세는 영국 본토를 침공하기로 합의했다(프랑스의 영국 침공 계획 (1744)). 1744년 1월 말, 됭케르크에는 12,000명이 넘는 프랑스 병력과 수송선이 집결했다. 영국 해군의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한 전략의 일환으로, 툴롱에 갇혀 있던 나바로 제독에게 대서양으로 탈출하라는 명령이 내려졌고, 클로드-엘리제 드 코르 드 라 브뤼에르가 지휘하는 프랑스 레반트 함대가 이를 지원하기로 했다.
툴롱 해전 자체는 명확한 승패 없이 끝났지만, 이를 계기로 전쟁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프랑스는 1744년 3월 영국과 하노버 선제후국에 공식적으로 선전포고를 했고, 이어 5월에는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를 침공했다. 이로써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은 영국과 프랑스 사이의 전면전으로 확대되었다. 당시 영국 내에서는 함대가 우세한 전력에도 적을 격파하지 못했다는 비판이 있었지만, 현대 역사가들은 프랑스의 선전포고와 네덜란드 침공이 이미 1743년 10월에 계획되었으며 툴롱 해전의 직접적인 영향은 아니라고 보기도 한다.
5. 전투 서열
프랑스-스페인 연합 함대는 총 28척의 전열함(프랑스 16척, 스페인 12척)과 프리깃 3척, 화선 2척, 병원선 1척으로 구성되었다.[5] 프랑스 함대는 드 쿠르 제독(기함 테리블, 74문)이 총지휘했으며, 전위는 드 가바레 소장(기함 에스푸아르, 74문)이 이끌었다. 스페인 함대는 후안 호세 나바로 제독(기함 레알 펠리페, 114문)이 지휘했다.
영국 함대는 총 33척의 전열함 및 50문 함선과 프리깃 3척, 화선 3척, 바간틴 3척으로 구성되었다.[5] 총사령관은 토머스 매튜스 제독(기함 네이머, 90문)이었으며, 전위는 윌리엄 로울리 후방 제독(기함 바플러, 90문), 후위는 리처드 레스톡 중장(기함 넵튠, 90문)이 지휘했다.
각 함대의 자세한 함선 목록과 지휘관 정보는 아래 하위 섹션에서 확인할 수 있다.
5. 1. 프랑스-스페인 연합 함대
프랑스-스페인 함대[5] | ||||
---|---|---|---|---|
함선 | 등급 | 포 | 지휘관 | 비고 |
선두 (프랑스 함대) | ||||
보레 | 3급 전열함 | 64 | 함장 마르크 | align="left" | |
툴루즈 | 4급 전열함 | 60 | 함장 다르통 | align="left" | |
티그르 | 4급 전열함 | 50 | 함장 소린 | align="left" | |
에올 | 3급 전열함 | 64 | 함장 샤를 달베르 뒤 셰느 | align="left" | |
알시옹 | 4급 전열함 | 56 | 함장 랑셀 | align="left" | |
듀크 도를레앙 | 3급 전열함 | 68 | 함장 도르네 | align="left" | |
에스푸아 | 3급 전열함 | 74 | 함장 데리쿠르 (가바레의 기함) | align="left" | |
중앙 (프랑스 함대) | ||||
트리덩 | 3급 전열함 | 64 | 함장 카이뤼스 | align="left" | |
외뢰 | 4급 전열함 | 60 | 함장 그라미에 | align="left" | |
아킬롱 | 4급 전열함 | 60 | 함장 루이-필리프 드 리고, 보드뢰유 후작 | align="left" | |
솔리드 | 3급 전열함 | 64 | 함장 샤토뇌프 | align="left" | |
디아망 | 4급 전열함 | 50 | 함장 클로드 루이 데스팽샬, 마시악 후작 | align="left" | |
페르메 | 3급 전열함 | 70 | 함장 고르그 | align="left" | |
터리블 | 3급 전열함 | 74 | 부제독 클로드-엘리제 드 코르 드 라 브뤼예르 함장 자크-피에르 드 타파넬 드 라 죵키에르, 라 죵키에르 후작 | 총사령관 기함 |
생 에스프리 | 3급 전열함 | 68 | 함장 푸아송 | align="left" | |
세리외 | 3급 전열함 | 64 | 함장 알렉상드르 드 셰일리 | align="left" | |
후미 (스페인 함대) | ||||
오리엔테 | 4급 전열함 | 60 | 함장 호아킨 마누엘 데 비예나 이 과달파하라 | align="left" | |
아메리카 | 4급 전열함 | 60 | 함장 아니발 페트루치 | align="left" | |
넵투노 | 4급 전열함 | 60 | 함장 엔리케 올리바레스 (전사) | align="left" | |
포데르 | 4급 전열함 | 60 | 함장 로드리고 데 우르티아 이 데 라 로사 (포로) | 영국군에 의해 나포됨, 프랑스군에 의해 탈환되어 자침됨 |
콘스탄테 | 3급 전열함 | 70 | 함장 아구스틴 데 이투리아가 (전사) | 심하게 손상되어 예인됨 |
레알 펠리페 | 1급 전열함 | 110 | 제독 후안 호세 나바로 함장 니콜라스 제랄디노 (전사) | 스페인 함대 기함, 심하게 손상되어 예인됨 |
에르쿨레스 | 3급 전열함 | 64 | 함장 코스메 알바레스 | align="left" | |
브리얀테 | 4급 전열함 | 60 | 함장 블라스 클레멘테 데 바레다 이 캄푸사노 | align="left" | |
할콘 | 4급 전열함 | 60 | 함장 호세 렌테리아 | align="left" | |
산 페르난도 | 3급 전열함 | 64 | 함장 니콜라스 데 라 로사, 베가 플로리다 백작 | align="left" | |
소베르비오 | 4급 전열함 | 50 | 함장 후안 발데스 | align="left" | |
산타 이사벨 | 3급 전열함 | 80 | 함장 이그나시오 다우테빌 | align="left" | |
기타 함선:
- 프리깃 4척[4]
- 화공선 4척[4]
5. 2. 영국 함대 (토머스 매튜스)
wikitext영국 함대[5] | ||||
---|---|---|---|---|
함선 | 등급 | 포 | 지휘관 | 비고 |
선두 | ||||
나사우(Nassau) | 3등 전열함 | 70 | 제임스 로이드 선장 | align= left | |
치체스터(Chichester) | 3등 전열함 | 80 | 윌리엄 딜크스 선장 | 딜크스는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해임되었으나, 나중에 복직되었다. |
보인(Boyne) | 3등 전열함 | 80 | 롤런드 프로그모어 선장 | 프로그모어는 군법회의 전에 사망했다. |
바르플뢰르(Barfleur) | 2등 전열함 | 90 | 윌리엄 로울리 후방 제독 메릭 드 랑글 선장 | 손상됨; 25명 사망, 20명 부상. |
라넬라(Ranelagh) | 3등 전열함 | 80 | 헨리 오스본 선장 | align= left | |
베릭(Berwick) | 3등 전열함 | 70 | 에드워드 호크 선장 | 프랑스군이 포데르(Poder)를 탈환했을 때 포획된 선원 17명이 포로로 잡혔다. |
스털링 캐슬(Stirling Castle) | 3등 전열함 | 70 | 토마스 쿠퍼 선장 | align= left | |
베드포드(Bedford) | 3등 전열함 | 70 | 조지 타운젠드 경 선장 | align= left | |
페버샴(Feversham) | 5등함 | 40 | 존 왓킨스 선장 | align= left | |
윈첼시(Winchelsea) | 6등함 | 20 | 윌리엄 마쉬 선장 | align= left | |
중앙 | ||||
드래곤(Dragon) | 4등함 | 60 | 찰스 왓슨 선장 | align= left | |
로열 오크(Royal Oak) | 3등 전열함 | 70 | 에드먼드 윌리엄스 선장 | 윌리엄스는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해임되었다. |
프린세스(Princess) | 3등 전열함 | 70 | 로버트 페트 선장 | 손상됨; 8명 사망, 20명 부상. |
서머셋(Somerset) | 3등 전열함 | 80 | 조지 슬레이터 선장 | align= left | |
노포크(Norfolk) | 3등 전열함 | 80 | 존 포브스 경 선장 | 손상됨; 12명 사망, 25명 부상. |
말버러(Marlborough) | 2등 전열함 | 90 | 제임스 콘월 선장 (전사) | 심하게 손상됨; 53명 사망, 138명 부상. |
도싯셔(Dorsetshire) | 3등 전열함 | 80 | 조지 버리쉬 선장 | 버리쉬는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해임되었다. |
에식스(Essex) | 3등 전열함 | 70 | 리처드 노리스 선장 | 노리스는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해임되었다. |
루퍼트(Rupert) | 3등 전열함 | 60 | 존 앰브로스 선장 | 앰브로스는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1년 정직 처분을 받았다. |
나뮈르(Namur) (기함) | 2등 전열함 | 90 | 토머스 매튜스 제독 존 러셀 선장 (전사) | 손상됨; 8명 사망, 20명 부상. |
더슬리 갤리(Dursley Galley) | 6등함 | 20 | 자일스 반브러 선장 | align= left | |
앤 갤리(Anne Galley)[6] | 화공선 | 8 | 제임스 매키 사령관 (전사) | 폭발, 25명 사망. |
서덜랜드(Sutherland) | 병원선 | 18 | 알렉산더 콜빌 소령 | align= left | |
후방 | ||||
솔즈베리(Salisbury) | 4등함 | 50 | 피터 오스본 선장 | align= left | |
롬니(Romney) | 4등함 | 50 | 헨리 갓세이브 선장 | align= left | |
됭케르크(Dunkirk) | 3등 전열함 | 60 | 찰스 웨이거 퍼비스 선장 | align= left | |
스위프트슈어(Swiftsure) | 3등 전열함 | 70 | 조지 버클리 선장 | align= left | |
케임브리지(Cambridge) | 3등 전열함 | 80 | 찰스 드럼몬드 선장 | align= left | |
넵튠(Neptune) | 2등 전열함 | 90 | 리처드 레스톡 중장 조지 스테프니 선장 | align= left | |
토베이(Torbay) | 3등 전열함 | 80 | 존 가스코인 선장 | align= left | |
러셀(Russell) | 3등 전열함 | 80 | 로버트 롱 선장 | align= left | |
버킹엄(Buckingham) | 3등 전열함 | 70 | 존 토리 선장 | align= left | |
엘리자베스(Elizabeth) | 3등 전열함 | 70 | 조슈아 린겐 선장 | align= left | |
킹스톤(Kingston) | 3등 전열함 | 60 | 존 로바트 선장 | align= left | |
옥스포드(Oxford) | 4등함 | 50 | 해리 폴렛 선장 | align= left | |
워릭(Warwick) | 3등 전열함 | 60 | 템플 웨스트 선장 | align= left | |
머큐리(Mercury) | 화공선 | 8 | 모세스 피들 사령관 | align= left | |
참조
[1]
서적
Dictionary of National Biography
[2]
웹사이트
La batalla de Cabo Sicié (Tolón), 1744
https://www.todoabab[...]
2005-10-06
[3]
문서
Admiral Byng's defence, as presented by him, and read in the Court January 18, 1757, ... Containing a very particular account of the action on the 20th of May, 1756, off Cape Mola,...
1757
[4]
간행물
Naval Chronology
1802
[5]
서적
Battles of the British Navy
[6]
서적
Ships of the Royal Navy:The Complete Record of All Fighting Ships of the Royal Nav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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