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괴자 모랜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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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괴자 모랜트는 1864년 영국에서 태어나 호주로 이주하여 다양한 직업을 전전하며 부시 발라드 시인으로 활동한 에드윈 헨리 모런트의 별칭이다. 그는 제2차 보어 전쟁에 참전하여 부시벨트 카빈니어스(BVC)의 장교로 복무했으나, 전쟁 중 전쟁 범죄 혐의로 군사 재판에 회부되어 사형을 선고받고 1902년 처형되었다. 모런트의 삶은 이후 여러 책, 영화, 연극 등으로 다루어지며 논란의 대상이 되었고, 그가 희생양이었는지, 전쟁 범죄자였는지에 대한 논쟁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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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괴자 모랜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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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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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에드윈 헨리 머랜트 |
별칭 | 파괴자 |
출생일 | 1864년 12월 9일 |
사망일 | 1902년 2월 27일 |
출생지 | 영국, 서머싯 주, 브리지워터 |
사망지 | 남아프리카 공화국 공화국, 프레토리아 |
안장 장소 | 프레토리아 교회 거리 공동묘지, 남아프리카 공화국 |
군 복무 정보 | |
충성 | 영국 제국 |
계급 | 중위 |
소속 부대 | 사우스오스트레일리아 기마 소총 연대 부시벨트 카빈총병대 |
복무 기간 | 1899년–1902년 |
참전 전투 | 제2차 보어 전쟁 |
범죄 정보 | |
죄목 | 살인 (12건) |
유죄 판결 상태 | 사형 집행됨 |
형벌 | 사형 |
사망 원인 | 총살형 |
피해자 수 | 12명 |
표적 | 전쟁 포로 및 민간인 |
국가 | 남아프리카 공화국 공화국 |
범죄 시작 | 1901년 8월 |
범죄 종료 | 1901년 9월 7일 |
재판 | 파괴자 모랜트 군사 재판 |
가족 정보 | |
배우자 | 데이지 메이 오드와이어 (1884년 결혼; 곧 별거) |
2. 초기 생애
에드윈 헨리 모런트는 1864년 12월 9일 영국 서머싯주 브리지워터에서 태어났다. 퀸즐랜드의 혼인 기록에 따르면, 그의 부모는 에드윈 머런트와 캐서린 머런트(혼전 성씨: 오레일리)였다. 그의 부모는 브리지워터 구빈원의 원장과 여원장이었다. 모런트의 아버지는 그가 태어나기 4개월 전인 1864년 8월에 사망했다. 어려운 환경에도 불구하고 그의 어머니는 지인들의 도움을 받아 아들을 왕립 메이슨 소년 학교에 보냈다. 그는 프랑스어, 독일어, 고전, 받아쓰기, 웅변술에서 상을 받았지만, 비행을 저지르고 다른 소년들에게도 비행을 부추기는 문제아였다. 그의 어머니는 1882년 초 은퇴할 때까지 21년간 구빈원의 여원장으로 재직했다. 그녀는 1899년 7월에 사망했다.
모런트(여전히 에드윈 머런트라는 이름 사용)는 1883년 6월 5일 타운스빌에 정박한 SS ''와룽가'' 호를 타고 퀸즐랜드에 도착했다. 당시 영국과 해외에서 태어난 영국 시민 사이에는 법적 지위의 차이가 없었다. 이는 오스트레일리아 식민지에서 태어난 대다수의 사람들을 포함하는 범주였다. 이러한 상황은 1948년 호주 국적법이 제정될 때까지 바뀌지 않았다. 모런트는 자신을 오스트레일리아인으로 여기지 않았다. 그의 전 변호 변호사인 제임스 프란시스 토마스 소령은 훗날 자신의 전 의뢰인을 그렇게 묘사할 때마다 "강하게 반응"했다. 1923년 6월 16일 ''시드니 모닝 헤럴드''에 보낸 편지에서 토마스는 "모런트는 오스트레일리아인이 아니라 '식민지 경험'을 위해 이 나라에 온 영국인이었다"라고 썼다.
머런트는 퀸즐랜드 북부에 도착한 직후 서커스/로데오단을 따라 타운스빌에서 남서쪽으로 약 136km 떨어진 차터스 타워스 광산 마을로 향했고, 그곳에서 술, 농담, 발라드, 승마, 여성 편력으로 지역 주민들에게 즉각적인 인상을 남겼다. 그는 차터스 타워스에서 동쪽으로 약 20km 떨어진 버데킨 강에 있는 패닝 다운스 역에서 목축업자로 고용되었고, 그곳에서 데이지 메이 오드와이어를 만났다. 짧은 구애 끝에 1884년 3월 13일 차터스 타워스에서 결혼했고 결혼 등록에는 그의 이름이 에드윈 헨리 머런트로 기재되어 있지만 이는 오래가지 못했다. 그는 주례 목사에게 5파운드 스털링의 수수료를 지불하지 못했고, 그의 새 아내는 그를 내쫓았다. 머런트는 목사에게 영국에 있는 그의 귀족 가문으로부터 곧 필요한 자금이 도착할 것이라고 약속했지만, 돈은 결코 오지 않았다.
결혼 4주 후, 머런트는 안장과 돼지 32마리를 훔친 혐의로 기소되었다. 체포되었을 때 그는 위조 수표를 썼다는 사실을 부인하기 시작했지만, 곧 훔친 혐의로 체포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두 개의 수표를 사용했는데 곧 부도수표가 되었고 두 마리의 말을 샀다. 그는 남서쪽으로 약 465km 더 떨어진 윈턴 마을로 갔지만 절도 혐의는 무죄로 풀려났다. 훗날 인류학자가 된 그의 아내 데이지 베이츠는 머런트/모런트와의 초기 관계를 결코 공개하지 않았다.
이후 머런트는 해리 하버드 모런트라는 이름을 사용했지만, 채권자를 피하기 위해 가명인 하버드라는 성을 사용하기도 했다. 그는 종종 1865년 데번에서 태어났으며, 해군의 조지 딕비 모런트 제독의 아들이라고 주장했는데, 이는 그의 처형 직후 출판된 책에서 사실로 반복되었다. 모런트 제독은 1902년에 처형된 사람이 자신의 아들이 아니며 자신과 어떤 관계도 없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저자 닉 블레진스키는 주변 증거를 사용하여 조지 모런트 제독이 에드윈 머런트의 생물학적 아버지였을 수 있다는 가설을 세웠지만, 피터 피츠시몬스가 쓴 2020년 모런트 전기와 같은 다른 최근 책들은 모런트가 모런트 제독의 아들이라는 주장을 허구로 일축한다. 모런트는 또한 그리니치 해군대학에서 공부했다고 주장했지만 그의 이름은 해군 기록에 나타나지 않는다.
이후 15년 동안 모런트는 퀸즐랜드 남부, 뉴사우스웨일스, 사우스오스트레일리아를 여행하며 말 훈련, 드라이버, 노동자, 거친 기수, 말 거래자, 부시 신문 기자, 장부 기입자, 점원으로 다양한 직업에 종사했다. 그는 승마 기술로 명성을 얻었고, 장애물 경주 선수이자 폴로 선수로, 또한 술꾼이자 여성 편력자로도 명성을 얻었다. 한 동시대인은 그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키가 작은 남자, 큰 특징, 작고 (너무 가까운) 눈, 면도한 얼굴, 술로 붉어진 피부, 복장에 말을 타는 듯한 모습, 신사의 매너와 말, 놀라운 신체적 용기(특히 말 위에서), 도덕적 용기나 도덕적 원칙이 전혀 없으며, 스포츠 방식으로 운동을 좋아하며, 누구에게든 돈을 빌릴 수 있다면 기꺼이 정직한 돈을 벌기 위해 스스로를 훈련하지 않을 것이다."모런트는 뻔뻔하게 다른 사람들의 관대함에 의존했으며 종종 강도를 당했다고 주장하고 정기적으로 대출을 갚거나 빚진 청구서를 지불하지 않고, 빚이 그를 따라잡기 전에 이사했다. 1889년 퀸즐랜드 중서부 블랙홀에서 모런트는 무고한 주장으로 뮤타부라의 한 남자로부터 돈을 받은 혐의로 체포되어 유죄 판결을 받고 록햄프턴 감옥에서 3개월 중노동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같은 말을 두 남자에게 팔았다. 그의 체포 영장에는 키가 약 1.52m, 다부진 체격, 갈색 머리와 콧수염, 약간의 말더듬 증세, "영국에 있는 귀족 친구를 자랑한다"고 묘사되어 있다.
대출을 상환하고 빚을 지불하는 것을 피하는 성향과 함께 모런트는 동물 학대와 호주 원주민 목축업자들을 맨손 주먹 싸움으로 몰아넣는 것으로 명성이 높았다. 모런트는 처음에 자신의 진정한 복싱 실력을 숨김으로써 호주 원주민 목축업자가 자신과 몇 라운드를 싸우도록 유도한 다음, 그를 심하게 때리는 방식으로 실력을 드러냈다. 그는 부시 발라드 작가로 능력을 키웠고 1891년부터 그의 발라드나 시 중 다수가 ''더 불레틴''에 게재되었으며, "브레이커", "B", "B", 해리 모런트, HM, "아폴로 벨레데레"라는 예명을 사용했다. 술을 마시는 데 자금을 지원한 이 작품을 통해 그는 유명한 호주 부시 시인 헨리 로슨, 반조 패터슨, 윌리엄 헨리 오길비와 알게 되었다. 모런트와 오길비의 유대는 매우 강했고, 오길비는 그의 사후에도 모런트에 대한 여러 작품을 썼다.
모런트의 승마술에 대한 가장 잘 알려진 시위 중 하나는 1897년 뉴사우스웨일스주 시드니 북서쪽의 호크스베리 강 쇼에서 열렸다. 한 거친 기수가 "다긴의 그레이"라고 불리는 악명 높은 야생 브럼비를 쇼에 데려왔는데, 8살이었지만 매우 근육질이었고 그것을 타려고 시도하는 모든 사람을 던져 버리는 것으로 알려진 말이었다. 1분 넘게 모런트는 격렬하게 발광하는 말을 굴복시켰고, 그의 별명 "브레이커"를 대중화했다. 1898년, 모런트는 여전히 호크스베리 지역에서 일하면서 시드니 사냥 클럽 일원과 교제했는데, 이를 통해 그는 저명한 시드니 변호사이자 마흐디 전쟁 및 버마 참전 용사인 헨리 파크 에이리 중령, 그리고 훗날 남아프리카에서 군사 재판을 받을 때 모런트의 변호사가 된 토마스를 알게 되었다. 토마스는 텐터필드에서 사냥에 참여하기 위해 여행했다. 1898년 11월 5일 모런트의 다른 지인 중 한 명이 인근 블루 마운틴스의 스프링우드에서 공공 취중 혐의로 페니스 경찰 법원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다. 같은 혐의로 모런트를 소환하는 소환장이 발부되었지만, 그가 뉴사우스웨일스 북동부의 군네다로 도망쳤기 때문에 송달되지 않았다.
이 무렵 모런트의 개인적인 상황은 점점 더 궁핍해졌고, 30대 중반이 되면서 1900년 초까지 계속되었다. 많은 채권자에게 쫓기던 그는 더 이상 젊지 않았고, 그의 옷은 초라했고, 그는 걱정스러운 모습이었고, 술에 취한 그의 얼굴 특징은 여성들에게 덜 매력적이었다. 그는 한 달 만에 빅토리아의 멜버른에서 도망쳐야 했고, 애들레이드로 가서 그곳에서도 빠르게 환영받지 못했다. 그는 머레이 강에서 애들레이드에서 북동쪽으로 250km 떨어진 렌마크 외곽의 가축 사육지로 물러났고, 그곳에서 모런트 가문의 지역 구성원에게 자신이 친척이라고 설득하여 무료 음식과 숙소를 얻었다. 오스트레일리아에 남아 있으면 전망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모런트는 곧 지역 사격 클럽의 몇몇 회원을 모아 제2차 보어 전쟁에 참전하기 위해 애들레이드로 돌아갔다.
2. 1. 잉글랜드에서의 삶 (1864-1883)
에드윈 헨리 모런트는 1864년 12월 9일, 영국 서머싯주 브리지워터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브리지워터 구빈원의 원장과 여원장이었다. 모런트의 아버지는 그가 태어나기 4개월 전인 1864년 8월에 사망했다. 남편이 사망한 후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그의 어머니는 지인들의 도움을 받아 아들을 왕립 메이슨 소년 학교에 보낼 수 있었다. 그는 프랑스어, 독일어, 고전, 받아쓰기, 웅변술에서 상을 받았지만, 비행을 일삼는 문제아였다.3. 호주에서의 삶 (1883-1899)
이전 출력 결과는 주어진 원본 소스에 해당 섹션("호주에서의 삶 (1883-1899)")에 대한 내용이 없으므로 빈 문자열을 반환해야 합니다. 따라서 이전 출력 결과는 올바르며 수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3. 1. 퀸즐랜드 정착과 결혼
1883년, 모런트는 퀸즐랜드에 도착하여 목동, 말 조련사, 기자 등 다양한 직업을 전전했다. 1884년, 데이지 메이 오드와이어(훗날 데이지 베이츠로 알려짐)와 결혼했으나, 결혼 생활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3. 2. 방랑 생활과 범죄
모런트는 호주 각지를 떠돌며 여러 직업에 종사하면서 뛰어난 승마술과 문학적 재능으로 명성을 얻었다. 그러나 동시에 절도, 사기, 폭력 등의 범죄 행위로 여러 차례 체포되기도 했다. 특히, 원주민 목축업자들을 상대로 한 폭력 행위는 그의 잔혹한 면모를 보여준다.[1]3. 3. 문학 활동
제시된 소스 자료에는 모런트의 문학 활동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이 없습니다. 따라서 주어진 요약문의 내용은 소스 자료에서 확인할 수 없는 내용이므로, 섹션 내용을 작성할 수 없습니다. 빈 문자열을 반환합니다.4. 제2차 보어 전쟁 참전 (1900-1902)
모란트는 1900년 제2차 보어 전쟁에 참전하기 위해 사우스오스트레일리아 마운티드 라이플스에 입대하여 하사로 임명되었고, 이후 부시벨트 카빈니어스(BVC)에 중위로 임관하여 보어인 게릴라 진압 임무를 수행했다.[1]
1901년 8월, 헌트가 이끄는 BVC 부대는 빌요엔의 코만도를 찾기 위한 정찰 중 빌요엔의 농가를 공격했다. 헌트는 보어인들에게 항복을 요구했지만, 총격전이 벌어졌다. 이 과정에서 헌트 대위와 프랭크 일랜드 하사가 사망했다. 헌트 대위의 시신은 심하게 훼손된 채 발견되었는데, 목이 부러지고 얼굴은 징 박힌 부츠에 짓밟혔으며 다리는 칼로 베여 있었다. 하지만, 헌트 대위의 부러진 목은 부상 후 콘크리트 계단에서 떨어진 것과 일치한다는 주장도 있다.
4. 1. 남아프리카 파견
모란트는 1900년 제2차 보어 전쟁에 참전하기 위해 사우스오스트레일리아 마운티드 라이플스에 입대하여 하사로 임명되었다. 그는 뛰어난 기마술과 전투 능력을 인정받았다.[1]4. 2. 종군 기자 활동
프리토리아 점령 후, 모런트는 데일리 텔레그래프의 종군 기자 베넷 벌리의 급보 기수로 활동하며 전쟁의 참상을 기록했다.[1]4. 3. 부시벨트 카빈니어스 복무
1901년, 모런트는 불규칙 영국군 부대인 부시벨트 카빈니어스(BVC)에 중위로 임관했다.[1] BVC는 트란스발 북부 지역에서 게릴라전을 수행하는 보어인들을 진압하는 임무를 맡았다.[1]BVC는 1901년 8월 20일에 8명의 보어인 포로를 학살한 사건에 연루되었다.[2] 이들은 스위스 운영 병원 근처에서 항복한 후, BVC에 의해 살해되었다.[2] 희생자 중에는 네덜란드인 교사들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들은 포트지터러스의 임마누엘 학교 전 교장이었던 W.D. 바흐메이어를 포함하여 북부 트란스발에서 교사 계약을 맺고 있었다.[3]
목격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모런트 중위는 포로들을 처형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총격 사건은 보어인의 공격을 가장하기 위해 조작되었다.[4] 피해자들의 시신은 집단 매장지에 묻혔다.[5]
5. 전쟁 범죄와 군사재판 (1901-1902)
모랜트와 그의 일당의 활동을 영국 당국에 보고하기 위해 피터스버그로 가던 독일 선교사 헤세 목사가 포트에서 약 약 24.14km 떨어진 피터스버그 도로에서 총에 맞아 사망한 채로 발견되었다는 보고가 있었다.[1]
데 베르토다노 대위는 헤세 목사가 몇 주 동안 구금된 이유에 대해 포트 에드워드에 설명을 요구했지만, 변명뿐인 답신을 받았고 헤세 목사가 8월 26일 또는 27일에 떠날 것이라고 말했다. 8월 29일쯤 헤세 목사가 반돌리어 쿱스 근처에서 보어인들에게 총격을 받았다는 전보가 왔지만, 데 베르토다노 대위는 보어인들이 선교사에게 총을 쐈다는 것을 믿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1]
데 베르토다노 대위는 "카빈니어스의 행동에 대한 소문이 피터스버그로 새어 들어왔기" 때문에 조사를 시작했다. 하지만 포트 에드워드와의 전신선이 고장나 더 이상의 정보를 얻을 수 없었다.[1] 그는 "두 명의 훌륭한 원주민 정찰병"을 포트 에드워드로 보내 부시벨트 카빈니어스와 테일러 대위 참모진의 하인으로 일했던 흑인 남아프리카 소년들에게 질문하게 했다. 9일 후, 정찰병 중 한 명이 돌아와 보어인 전쟁 포로 살해 및 헤세 목사 암살에 대한 정보를 가져왔다. 포트 에드워드의 소년들에 따르면, 헤세 목사 살해는 모란트의 명령에 따라 피터 핸콕 중위가 저질렀다.[1]
베를린 선교회의 피터스버그 감독인 크라우스 목사 역시 공식적인 설명에 회의적이었고, 손탁과 엔델만 목사를 비밀리에 소환하여 반돌리어코프 지역으로 보내 조사를 지시했다.[2] 1901년 11월 베를린 선교 본부 보고서에서는 그들의 조사가 1901년 9월 8일부터 11일까지 진행되었으며, 무덤을 찾아 표시하고 흑인 하인의 시신을 발견하여 매장했다고 발표했다.[2]
선교회는 나중에 ''미션하우스 베를린''에 "10월 30일, 살해된 헤세 목사 Jnr.의 장례식이 스위스 선교 기지 엘림에서 거행되었다. 이틀 전, 그의 시신은 선교사 갓슐링의 입회하에 영국 군인들에 의해 살해 현장에서 발굴되어 주석으로 안을 댄 관에 안치되어 엘림으로 옮겨졌다."라고 기록했다.[3] 남아프리카 역사가 찰스 리치에 따르면, 몇몇 역사가들은 만약 헤세 목사가 살해되지 않았다면, 다른 부시벨트 카빈니어스의 살인 사건은 재판에 회부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의견을 가지고 있다.[4]
5. 1. 헌트 대위의 죽음과 복수
1901년 8월, 모랜트의 상관이자 친구였던 퍼시 헌트 대위가 보어인과의 교전 중 사망했다. 헌트 대위의 시신이 훼손된 채 발견되자, 모랜트는 복수심에 불타올랐다. 얼마 후, 무장한 보어 코만도 3명이 요새로 이동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은 모랜트는 부하들을 이끌고 그들을 막으러 갔다. 보어인들은 항복했지만, 모랜트는 그들을 무장 해제한 후 총살했다.[1]이후 모랜트는 레네한 소령을 설득하여 수색대를 조직, 켈리 소대가 이끄는 보어 부대를 추적했다. 켈리는 영국군에 맞서 싸우다 항복하지 않고 코만도가 된 인물이었다. 모랜트의 수색대는 1901년 9월 16일 포트 에드워드를 출발, 일주일간의 힘든 이동 끝에 켈리의 라거를 기습하여 그를 생포하는 데 성공했다. 영국 사령관 홀 대령은 모랜트에게 축하 메시지를 보냈고, 모랜트는 2주간의 휴가를 받았다.[1]
5. 2. 플로리스 비서 살해 사건
1901년 8월 11일, 코에도스 강 근처에서 부상당한 포로 플로리스 비서가 보복 살인되었다.[3] 비서는 이틀 전 모란트 중위가 이끄는 BVC 순찰대에 의해 체포되었는데, 철저한 심문을 받고 순찰대에 의해 약 24.14km를 이동한 후, 모란트 중위는 부하들에게 총살대를 구성하여 그를 사살하라고 명령했다.[3] 총살대에는 BVC 기병 A.J. 페트리, J.J. 길, 위튼, T.J. 보타가 포함되었으며, BVC 해리 피크턴 중위가 자비의 최후 일격을 가했다.[3] 플로리스 비서의 살해는 1901년 8월 6일 두이펠스코프에서 모란트의 절친한 친구인 BVC 페르시 프레데릭 헌트 대위가 전투 중 사망한 것에 대한 보복이었다.[3]5. 3. 8명의 보어인 살해 사건
모랜트와 그의 부하들의 활동이 영국 당국에 보고되기 약 일주일 전, 헤세 목사가 피터스버그로 가는 길에 포트에서 약 약 24.14km 떨어진 피터스버그 도로에서 총에 맞아 사망한 채 발견되었다는 보고가 있었다.[1]데 베르토다노 대위는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1901년 8월 마지막 주 즈음에, 맥윌리엄스에게서 P.P.러스트 선교 기지에서 헤세 목사의 즉시 귀환을 간절히 요청한다는 전보를 받았다." 그는 포트 에드워드에 본부에서 전보를 보내 헤세가 몇 주 동안 구금된 이유에 대한 완전한 설명을 요구했지만, 변명만 늘어놓는 답신을 받았다. 8월 29일쯤 헤세 목사가 반돌리어 쿱스 근처에서 보어인들에게 총격을 받았다는 또 다른 전보가 왔지만, 데 베르토다노는 보어인들이 선교사에게 총을 쐈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1]
데 베르토다노는 카빈니어스의 행동에 대한 소문이 피터스버그로 새어 들어왔기 때문에 조사를 시작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포트 에드워드와의 통신이 끊겼기 때문에 "두 명의 훌륭한 원주민 정찰병"을 파견하여 부시벨트 카빈니어스와 테일러 대위의 참모진의 하인으로 일했던 흑인 남아프리카 소년들에게 비밀리에 질문하게 했다. 9일 후, 정찰병 중 한 명이 돌아와 보어인 전쟁 포로 살해 및 헤세 목사 암살에 대한 정보를 가져왔다. 포트 에드워드의 소년들에 따르면, 헤세 목사 살해는 모란트의 명령에 따라 피터 핸콕 중위가 저질렀다.[1]
베를린 선교회의 피터스버그 감독인 크라우스 목사 역시 데 베르토다노 대위처럼 공식적인 설명에 회의적이었다. 그 결과 크라우스 목사는 손탁과 엔델만 목사를 비밀리에 소환하여 통행증을 받도록 주선하고 반돌리어코프 지역으로 보내 조사를 지시했다.[2]
''1901년 11월 베를린 선교 본부 보고서''에서는 다음과 같이 발표했다. "그들의 조사는 1901년 9월 8일부터 11일까지 진행되었다. 그들은 무덤을 찾아 돌과 나무 십자가로 표시하여 나중에 도로가 다시 자유롭게 통행할 수 있게 되었을 때, 마카판스포르트 선교 기지에서 재매장을 위해 시신을 다시 찾을 수 있도록 했다. 같은 방식으로, 그들은 또한 흑인 하인의 시신을 발견했다. 그는 아직 매장되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그를 그가 발견된 같은 장소에 묻었다."[2]
선교회는 나중에 ''미션하우스 베를린''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10월 30일, 살해된 헤세 목사 Jnr.의 장례식이 스위스 선교 기지 엘림에서 거행되었다. 이틀 전, 그의 시신은 선교사 갓슐링의 입회하에 영국 군인들에 의해 살해 현장에서 발굴되어 주석으로 안을 댄 관에 안치되어 엘림으로 옮겨졌다."[3]
남아프리카 역사가 찰스 리치에 따르면, "몇몇 저명한 남아프리카 역사가, 지역 열성가 및 평론가들은 만약 헤세 목사가 살해되지 않았다면, 다른 부시벨트 카빈니어스의 살인 사건은 재판에 회부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의견을 공유한다."[4]
1901년 10월 21일, 홀 대령은 모든 포트 에드워드 장교와 부사관을 피터스버그로 소환했다. 1901년 10월 23일 아침, 모든 사람들은 피터스버그 외곽 8km 지점에서 기병대에 의해 맞이받았고 "죄인처럼 마을로 끌려갔다". 모란트는 프레토리아에서 휴가를 마치고 돌아온 후 체포되었다.[1]
데 베르토다노 대위는 모란트가 자신에게 다가와 선교사 총격 사건에 대한 재판은 군대의 수치이며 스캔들이고, 자신은 무죄이며, 몇 명의 보어인을 쏘았기 때문에 희생양으로 선택되었다고 말했다고 회상했다. 데 베르토다노는 모란트에게 "당신을 재판에 넘기도록 한 데 대해 매우 자랑스럽습니다. 당신과 핸콕이 불쌍한 노인 헤세를 냉혈하게 보어인을 쏜 것을 보고할까 봐 두려워서 살해했다는 것을 당신은 마음속으로 알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1]
5. 4. 다니엘 헤세 목사 살해 사건
1901년 8월, 모랜트와 그의 일당의 활동을 영국 당국에 보고하려던 독일 선교사 헤세 목사가 피터스버그로 가던 중 포트에서 약 약 24.14km 떨어진 피터스버그 도로에서 총에 맞아 사망한 채로 발견되었다.[1]데 베르토다노 대위는 헤세 목사가 몇 주 동안 구금된 이유에 대해 포트 에드워드에 설명을 요구했지만, 답신은 변명뿐이었고 헤세 목사가 8월 26일 또는 27일에 떠날 것이라고 말했다. 8월 29일쯤 헤세 목사가 반돌리어 쿠프스 근처에서 보어인들에게 총격을 받았다는 전보가 왔지만, 데 베르토다노 대위는 보어인들이 선교사에게 총을 쐈다는 것을 믿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1]
데 베르토다노 대위는 "두 명의 훌륭한 원주민 정찰병"을 포트 에드워드로 보내 부시벨트 카빈니어스와 테일러 대위 참모진의 하인으로 일했던 흑인 남아프리카 소년들에게 질문하게 했다. 9일 후, 정찰병 중 한 명이 돌아와 보어인 전쟁 포로 살해 및 헤세 목사 암살에 대한 정보를 가져왔다. 포트 에드워드의 소년들에 따르면, 헤세 목사 살해는 모란트의 명령에 따라 피터 핸콕 중위가 저질렀다.[1]
베를린 선교회의 피터스버그 감독인 크라우스 목사 역시 공식적인 설명에 회의적이었고, 손탁과 엔델만 목사를 비밀리에 소환하여 반돌리어코프 지역으로 보내 조사를 지시했다.[1]
1901년 11월 베를린 선교 본부 보고서에서는 그들의 조사가 1901년 9월 8일부터 11일까지 진행되었으며, 무덤을 찾아 표시하고 흑인 하인의 시신을 발견하여 매장했다고 발표했다.[1]
1901년 10월 30일, 살해된 헤세 목사의 장례식이 스위스 선교 기지 엘림에서 거행되었다.[1]
남아프리카 역사가 찰스 리치에 따르면, 몇몇 역사가들은 만약 헤세 목사가 살해되지 않았다면, 다른 부시벨트 카빈니어스의 살인 사건은 재판에 회부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의견을 가지고 있다.[1]
1901년 10월 16일, 대배심에 해당하는 영국군의 조사 법정이 소집되었고, 법정의 재판장은 H.M. 카터 대령, E. 에반스 대위와 피터스버그의 군사령관인 윌프레드 N. 볼턴 소령이 보좌했다. 법정의 첫 심리는 1901년 11월 6일에 시작되어 4주 동안 진행되었고, 심의는 2주 더 진행되었다.[1]
헤세 목사 살해와 관련하여 모란트 중위와 핸콕 중위는 "현역 복무 중 살인죄를 범한" 혐의로 기소되었다.[1]
육군성에 보낸 기밀 보고서에서 J. St. 클레어 대령은 모란트 중위가 이러한 명령을 실행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이며, 핸콕 중위는 기꺼이 그들의 주 처형인으로 나섰다고 썼다.[1]
5. 5. 체포와 군사재판
1902년 1월 16일, 모랜트와 그의 동료 피고인들에 대한 군사재판이 시작되어 여러 단계로 진행되었다. Peterburg영어에서 비교적 편안한 환경에서 두 번의 주요 심리가 열렸다. 하나는 비서 살인 사건, 다른 하나는 "8명의 보어인" 사건에 관한 것이었다. BVC 회원들의 많은 진술이 이루어졌으며, 피고인들에게 불리한 증거를 제시했다. 예를 들어, 트루퍼 톰슨은 1901년 23일 아침에 8명의 보어인과 함께 있는 한 무리의 군인들을 보았다고 진술했다. "모랜트가 명령을 내렸고, 포로들은 길에서 끌려가 총에 맞아 죽었으며, 핸콕이 권총으로 두 명을 죽였다. 모랜트는 나중에 우리에게 자신의 뜻대로 해야 한다고 말했고,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무엇을 예상해야 할지 알게 될 것이다." 샤프 상병은 "모랜트와 핸콕을 처형하는 사격 분대에 참여하기 위해 맨발로 100마일을 걸어갈 것이다"라고 말했다.두 번째 심리 직후, 피고인들은 족쇄에 묶여 삼엄한 경비를 받으며 프리토리아로 이송되었고, 헤세 목사 살인 혐의에 대한 세 번째 주요 혐의로 재판을 받았다. 헤세 목사 살인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받았지만, 모랜트와 그의 동료 피고인들은 나머지 두 혐의로 빠르게 사형을 선고받았다. 모랜트와 핸콕은 선고 18시간 후에 총살되었고, 위튼의 형은 키치너 경에 의해 종신형으로 감형되었다. 키치너는 모랜트와 핸콕의 사형 집행 영장에 직접 서명했다. 현장 원수는 처형이 일어났을 때 순방 중이었다.
5. 6. 처형
1902년 2월 27일 05:00시, 위튼은 모런트와 핸콕에게 짧게 작별 인사를 할 수 있었지만, 감방 문에 있는 작은 문을 통해 그들을 보기만 하고 손을 맞잡았다.[2]06:00시 직전에 모런트와 핸콕은 프레토리아 요새에서 끌려 나와 퀸스 온 캐머런 하이랜더 부대의 사격에 의해 처형되었다. 두 사람은 눈을 가리는 것을 거부했다. 모런트는 담배 케이스를 사격대 지휘관에게 주었다. 그의 마지막 말은 "똑바로 쏴, 이 녀석들아! 엉망으로 만들지 마!"[3]라고 전해진다. 그러나 1902년 4월 3일자 ''케이프 아거스''의 한 동시대 보고서에 따르면 그의 마지막 말은 "(눈가리개를) 벗겨라"였고, 그것을 제거하자 "확실히 잘 해내라!"였다.[4] 위튼은 그 당시 프레토리아 기차역에 있었고 그의 동료들을 죽인 일제 사격 소리를 들었다고 썼다. 그러나 처형에 참석한 로버트 푸어는 자신의 일기에 위튼과 픽턴 중위를 05:30에 출발하는 기차에 태웠다고 썼다. 따라서 위튼은 처형이 일어났을 때 케이프타운으로 가는 길에 수 마일을 갔을 것이다.
6. 유산과 논란
오스트레일리아 연방 정부는 키치너에게 해명을 요구했고, 키치너는 모런트 등이 독일 선교사를 포함한 20건의 살인 혐의를 받았으며, 이 중 12건이 입증되었다고 밝혔다. 또한 보어 포로 8명이 살해된 사건은 헌트 대위의 부당한 대우에 대한 복수였다는 주장은 입증되지 않았다고 덧붙였다.[5]
조지 위튼은 28개월 복역 후 석방되어 오스트레일리아로 돌아와 ''제국의 희생양''이라는 책을 출판했다. 그러나 이 책은 가해자를 피해자로, 판사를 악당으로 묘사하는 반쪽 진실을 제공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1929년, 위튼은 제임스 프란시스 토마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피터 핸콕이 모런트의 명령에 따라 다니엘 헤세 목사를 살해했다고 자백했다고 밝혔다.[7]
모런트와 그의 연대 소속 병사들이 다수의 보어 특공대원들을 살해한 것은 일반적으로 인정되지만, 역사적 의견은 여전히 엇갈린다. 모런트의 옹호자들은 그와 핸콕이 부당하게 처벌받았다고 주장하며, 영국군이 보어 반군에 대한 "포로를 받지 않는다"는 정책의 존재를 숨기려 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부시벨트 카빈니어스는 호주군이 아닌 영국 제국군 부대였으며, 모런트와 핸콕은 영국 장교였다는 반론도 있다.
남아프리카 역사가 아서 데이비에 따르면 헌트는 살해당했을 때 겨우 28세였고 군사 법규에 대한 지식은 제한적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여러 증인들이 헌트가 포로를 받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언급했다는 기록이 존재한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스트레일리아 정부는 모런트와 핸콕의 처형에 대해 매우 분개하여 제1차 세계 대전 동안 영국 군대에 의해 오스트레일리아 군인이 군사 재판을 받지 않도록 주장했다.[9][10]
1981년, 남아프리카 역사가 C.A.R. 슐렌버그 박사는 공공 기록 보관소에 편지를 보냈고, 재판 기록이 1923년에서 1958년 사이에 영국 공무원에 의해 파기되었다는 답변을 받았다.
알프레드 테일러(Alfred Taylor)는 짐바브웨 플럼트리 근처의 농장으로 돌아갔지만, 1941년 담낭염과 폐렴으로 사망했다. 정보 정찰병 헨리 레데보어는 크루거 국립 공원에서 유명한 야생 동물 감시원이 되었다.
찰스 리치에 따르면, 전쟁 후, 2차 윌츠와 피에테르스버그 헌병인 윌프레드 N. 볼튼 소령은 군 복무를 포기하고 민간 치안 판사가 되었으며, 부시벨트 카빈병 피해자들의 일부 후손과 관련되어 정의를 실현하는 데 헌신했다.
모런트와 핸콕이 헤세 목사 살인 혐의에 대해 무죄 판결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선교사의 미망인 요한나 헤세는 전쟁성으로부터 5000GBP를 받았다. 8명의 보어 사건에서 모런트의 명령으로 살해된 학교 교사 남편을 둔 피터넬라 야코바 바흐르메이예르 부인은 100GBP의 선금을 받은 후 매년 50GBP를 더 받았다. 8명의 보어 사건에서 살해된 교회 집사 남편을 둔 캐럴 스미트 부인은 100GBP를 받았고, 자녀당 100GBP를 추가로 받았다. 3명의 보어 사건에서 아버지와 두 형제가 살해된 로엘프 반 스타덴의 두 딸은 각각 200GBP를 받았다.
리치는 또한 전쟁 후, 부시벨트 카빈병과 영국 육군 정보부의 확인된 백인 희생자의 총 수는 22명으로 고정되었지만, 지역 연구를 통해 흑인과 백인을 포함하여 최소 36명의 알려진 희생자가 밝혀졌다고 기록했다.
모런트와 핸콕의 무덤은 오랫동안 방치되었지만, 브루스 베레스포드의 영화가 개봉된 후 오스트레일리아 관광객들의 인기 있는 순례 장소가 되었다. 1998년 6월, 오스트레일리아 정부는 새로운 콘크리트 슬래브로 묘지를 개조하는 데 1500USD를 지출했다.
남아프리카 정부는 또한 듀이벨스클루프에서의 야간 전투, "8명의 보어 사건" 동안 모런트 중위의 명령으로 총살된 4명의 아프리카너와 4명의 네덜란드 학교 교사의 집단 무덤 등 일부 사건의 위치를 표시하는 일련의 기념물을 세웠다.[11]
역사가 찰스 리치에 따르면, 2002년 앵글로-보어 전쟁 100주년 기념 행사 동안, 재판의 재연이 피에테르스버그에서 제작되었다. 헤세 사건에 증인들이 증언을 하도록 소환되었을 때, 헤세 목사의 손녀인 말리 스무츠 교수가 앞으로 나와 영국 군이 그녀의 할아버지의 수레에서 회수하여 전쟁 후 헤세 가족에게 돌려준 물건들을 제시했다. 이 물건들은 작은 엽총, 성경, 그리고 회중 시계였다.
6. 1. '제국의 희생양' 논란
오스트레일리아 연방 정부는 키치너에게 해명을 요구했고, 1902년 4월 5일 키치너는 오스트레일리아 총독에게 전문을 보냈다. 전문 내용은 오스트레일리아 언론에 게재되었는데, 모런트와 핸콕 등이 독일 선교사를 포함한 20건의 살인 혐의를 받았고, 이 중 12건이 입증되었다는 내용이었다.[5] 살인 사건은 프리토리아에서 북쪽으로 약 80마일 떨어진 트란스발의 스펠론켄 지역에서 발생했다. 키치너는 모런트가 범죄의 원흉이고 핸콕이 냉혈하게 실행했다고 밝혔다. 8명의 보어 포로 살해는 헌트 대위의 부당한 대우에 대한 복수라고 주장되었지만, 그러한 부당한 대우는 입증되지 않았다. 키치너는 경감할 만한 사유가 없다고 판단했고, 위튼의 형량은 종신 노역으로 감형했다.[5]모런트와 핸콕의 처형 이후, 이 사건은 호주에서 큰 논란을 일으켰다. 많은 사람들은 이들이 영국군의 전쟁 범죄를 은폐하기 위한 희생양이라고 믿었다. 특히, 모런트가 호주인이었기 때문에 더욱 가혹한 처벌을 받았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9][10]
조지 위튼은 ''제국의 희생양''이라는 책을 출판하여 이 사건에 대한 논란을 더욱 증폭시켰다. 그러나 이 책은 사실 왜곡과 진실이 아닌 내용이 많다는 비판을 받았다. 오스트레일리아 역사가 크레이그 윌콕스는 위튼의 책이 가해자를 피해자로 묘사하는 반쪽 진실을 제공했다고 비판했다.
모런트와 핸콕의 사면 문제는 최근까지도 논쟁의 대상이다. 2010년 엘리자베스 2세 여왕에게 사면 청원이 보내졌지만, 영국 국방부는 새로운 증거가 발견되지 않았다며 기각했다.[17]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역사학자들은 모런트 등이 유죄 판결을 받은 이유를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이들의 사면에 반대하는 입장을 보였다.[15]
6. 2. 문학과 영화
모런트의 이야기는 여러 책, 연극, 영화로 만들어졌다. 1907년 조지 위튼은 《제국의 희생양》이라는 논란이 많은 회고록을 출판했다.1980년 브루스 베레스포드 감독의 영화 《브레이커 모런트》는 모런트 사건을 다시 조명하며 국제적인 관심을 받았다. 모런트와 핸콕의 무덤은 오랫동안 방치되었지만, 영화 개봉 후 오스트레일리아 관광객들의 인기 있는 순례 장소가 되었다.[11]
2002년, 닉 블레진스키는 《똑바로 쏴라, 이 나쁜 놈들아': '브레이커' 모런트 살해의 진실된 이야기》라는 책을 출판했다. 이 책은 모런트와 다른 사람들이 몇몇 범죄를 저질렀을 것이고 징계 조치를 받을 만했을 수도 있지만, 키치너의 '포로 없음' 명령이 실제로 존재했다는 증거가 제시되었다고 주장했다.
6. 3. 역사적 재평가
오스트레일리아 연방 정부는 키치너에게 해명을 요구했고, 키치너는 모런트 등이 독일 선교사를 포함한 20건의 살인 혐의를 받았으며, 이 중 12건이 입증되었다고 밝혔다. 또한 보어 포로 8명이 살해된 사건은 헌트 대위의 부당한 대우에 대한 복수였다는 주장은 입증되지 않았다고 덧붙였다.[5]조지 위튼은 28개월 복역 후 석방되어 오스트레일리아로 돌아와 ''제국의 희생양''이라는 책을 출판했다. 그러나 이 책은 가해자를 피해자로, 판사를 악당으로 묘사하는 반쪽 진실을 제공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1929년, 위튼은 제임스 프란시스 토마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피터 핸콕이 모런트의 명령에 따라 다니엘 헤세 목사를 살해했다고 자백했다고 밝혔다.[7]
2004년에는 당시 헌병 사령관이었던 로버트 푸어의 일기가 발견되었는데, 여기에는 부시벨트 기병대가 항복한 보어인들을 총살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12] 이 일기 내용은 포로를 받지 말라는 명령이 실제로 존재했다는 증거로 해석되기도 하고, 보어족의 항복을 받아들인 후 총살한 것은 잘못이었다는 해석으로 나뉘기도 한다.[13][14]
모런트와 그의 연대 소속 병사들이 다수의 보어 특공대원들을 살해한 것은 일반적으로 인정되지만, 역사적 의견은 여전히 엇갈리고 있다. 모런트의 옹호자들은 그와 핸콕이 부당하게 처벌받았다고 주장하며, 영국군이 보어 반군에 대한 "포로를 받지 않는다"는 정책의 존재를 숨기려 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부시벨트 카빈니어스는 호주군이 아닌 영국 제국군 부대였으며, 모런트와 핸콕은 영국 장교였다는 반론도 있다.
남아프리카 역사가 아서 데이비에 따르면 헌트는 살해당했을 때 겨우 28세였고 군사 법규에 대한 지식은 제한적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여러 증인들이 헌트가 포로를 받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언급했다는 기록이 존재한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스트레일리아 정부는 모런트와 핸콕의 처형에 대해 매우 분개하여 제1차 세계 대전 동안 영국 군대에 의해 오스트레일리아 군인이 군사 재판을 받지 않도록 주장했다.[9][10] 모런트와 핸콕의 무덤은 오랫동안 방치되었지만, 브루스 베레스포드의 영화가 개봉된 후 오스트레일리아 관광객들의 인기 있는 순례 장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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