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쇼다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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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쇼다 사건은 1898년 영국과 프랑스가 수단 파쇼다에서 식민지 지배권을 놓고 벌인 외교적 위기이다. 19세기 후반 아프리카 분할 경쟁 속에서 프랑스는 동쪽으로 횡단하는 식민지 건설을, 영국은 남북으로 종단하는 정책을 추진했다. 양국의 이해관계가 파쇼다에서 충돌하며 무력 충돌 직전까지 갔으나, 프랑스가 외교적으로 양보하며 철수했다. 이 사건은 영국과 프랑스 간의 마지막 심각한 식민지 분쟁으로, 1904년 영불 협상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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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쇼다 사건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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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정보 | |
기본 정보 | |
분쟁 이름 | 파쇼다 사건 |
일부 | 아프리카 분할 |
이미지 파일 | Fashoda Incident map - en.svg |
이미지 설명 | 사건 당시 중앙 및 동아프리카 지도 |
날짜 | 1898년 7월 10일 – 1898년 11월 3일 |
위치 | 파쇼다, 수단 |
결과 | 프랑스의 파쇼다 철수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프랑스 |
교전국 2 | 영국 이집트 |
지휘관 | |
지휘관 1 | 장바티스트 마르샹 |
지휘관 2 | 허버트 키치너 |
병력 규모 | |
병력 1 | 132명의 병사 |
병력 2 | 1,500명의 영국, 이집트, 수단 병사 |
사상자 | |
사상자 1 | 없음 |
사상자 2 | 없음 |
캠페인 상자 | |
관련 사건 | |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이어진 사건들 | 독일 통일 1866–1871 보불전쟁 1870–1871 제2차 유럽 협조 체제 1871 대동방 위기 1875–1878 보스니아 캠페인 1878 양국 동맹 1879 보어 전쟁 1880–1902 오스트리아-세르비아 동맹 1881–1903 삼국 동맹 1882 베를린 회의 1884 불가리아 위기 1885–1888 재보험 조약 1887–1890 프랑스-러시아 동맹 1894 청일전쟁 1894–1895 영국-독일 해군 군비 경쟁 1898–1912 파쇼다 사건 1898 영일 동맹 1902 5월 쿠데타 1903 러일 전쟁 1904–1905 영국-프랑스 협상 1904 제1차 모로코 위기 1905–1906 돼지 전쟁 1906–1908 영국-러시아 협상 1907 청년 튀르크당 혁명 1908 보스니아 위기 1908–1909 라코니기 밀약 1909 제2차 모로코 위기 1911 이탈리아-튀르크 전쟁 1911–1912 발칸 전쟁 1912–1913 프란츠 페르디난트 암살 1914 7월 위기 1914 |
아프리카 분할 전역 상자 | |
아프리카 분할 전투 | 보어 튀니지 수단 이집트 와소울루 에리트레아 다호메이 마쇼날란드 다호메이 마타벨렐란드 와소울루 아샨티 에티오피아 마타벨렐란드 잔지바르 베냉 와소울루 차드 파쇼다 보어 나미비아 탕가니카 모로코 줄루 와다이 모로코 모로코 트리폴리타니아 보어 |
2. 배경
19세기 후반, 유럽 열강들은 아프리카 분할을 가속화했다. 1885년 베를린 회의 이후, 영국, 프랑스, 독일, 벨기에, 이탈리아, 포르투갈, 스페인 등이 경쟁에 참여했다.[1] 이 과정에서 영국의 아프리카 종단 정책과 프랑스의 아프리카 횡단 정책은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프랑스는 대서양 연안(현재 세네갈)에서 동쪽으로 사헬 지역을 따라 니제르 강과 나일 강 사이를 연결하여, 대상로를 통한 무역을 장악하려 했다. 또한 홍해 입구 근처 프랑스 소말릴란드(현재 지부티)를 동쪽 거점으로 삼아 대륙 횡단을 꾀했다.[1]
영국은 남아프리카( 남아프리카 공화국, 베추아날란드 및 로디지아)와 동아프리카(현재 케냐)를 연결하고, 나일 강 유역을 확보하고자 했다. 당시 수단은 이 계획의 핵심 지역이었다. 영국의 세실 로즈는 케이프타운-카이로 철도 건설을 통해 아프리카를 영국의 통제하에 두려는 '적색 선' 계획을 추진했다.[2]
1898년 7월 장바티스트 마르샹이 파쇼다에 도착했을 때, 요새는 버려지고 폐허가 된 상태였다.[3] 파쇼다는 1855년 이집트 군대에 의해 습지대에 설립되었으며 배가 하역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장소 중 하나였다. 1870년대 중반에는 실룩족이 거주하는 시장 마을이 되었다.[3]
파쇼다는 영국과 프랑스 간의 오랜 갈등인 이집트 문제와도 관련 있었다. 1882년 이후 많은 프랑스 정치인들은 영국과의 이집트 공동 점령에 참여하지 않은 것을 후회하며, 상나일 강에 식민지 전초 기지를 건설하여 영국을 압박하려 했다.[4]
다른 유럽 국가들도 상나일 강 유역에 관심을 가졌다. 이탈리아는 1896년 아드와 전투에서 패배했고, 벨기에 콩고 자유국의 레오폴드 2세는 1896년 9월 콩고군을 파견했으나, 1897년 3월 병사들의 반란으로 실패했다.[3]
2. 1. 영국의 아프리카 종단 정책
19세기 후반, 영국은 남아프리카의 케이프 식민지부터 이집트의 카이로까지 연결하는 종단 정책을 추진했다. 이는 세실 로즈와 같은 제국주의자들의 주도로 이루어졌다.[2] 특히 나일강 유역, 그중에서도 수단 지역은 영국의 종단 정책에 있어 핵심적인 지역이었다.케이프타운에서 카이로까지(로즈의 꿈) 선을 긋고, 다카르에서 홍해의 뿔(호른)에 있는 프랑스 소말릴란드(현재 지부티)까지 또 다른 선을 긋는다면, 이 두 선은 동부 남수단 파쇼다(현재 코독) 근처에서 교차하는데, 이것이 파쇼다의 전략적 중요성을 설명한다. 프랑스의 동서 축과 영국의 남북 축은 공존할 수 없었다. 두 축의 교차점을 점령하고 유지할 수 있는 국가만이 자신의 계획을 진행할 수 있었다.[3]

2. 2. 프랑스의 아프리카 횡단 정책
프랑스는 아프리카 대륙을 서쪽의 세네갈에서 동쪽의 지부티까지 연결하는 횡단 정책을 추진했다. 이는 사하라를 통과하는 대상로를 장악하여 사헬 지역과의 무역을 통제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또한, 프랑스는 나일 강 상류에 거점을 마련하여 영국의 이집트 지배를 견제하고자 했다.[1]장바티스트 마르샹 대위가 이끄는 프랑스군은 1898년 7월 파쇼다에 도착하여 프랑스 국기를 게양했다.[1] 그러나, 이는 영국의 아프리카 종단 정책과 충돌하는 지점이었다. 케이프타운에서 카이로까지(로즈의 꿈)를 잇는 영국의 종단 축과 다카르에서 프랑스 소말릴란드(현재 지부티)까지 잇는 프랑스의 횡단 축은 파쇼다 근처에서 교차했고, 두 국가는 이 전략적 요충지를 차지하기 위해 대립했다.[3]
1855년 이집트 군대에 의해 습지대에 설립된 파쇼다는 실룩족이 거주하는 지역으로, 1870년대 중반에는 시장 마을이 되었다.[3] 빌헬름 융커는 1876년 이 마을을 "상당한 규모의 무역 장소"이자 "마지막 문명의 전초 기지"라고 묘사했다.[3]
프랑스는 이집트 문제와 관련하여 영국을 압박하고자 상나일 강에 식민지 전초 기지를 건설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나일 강의 물 공급을 차단하는 대규모 댐 건설 등의 아이디어도 나왔으나, 이는 비실용적이었다.[4]
2. 3. 양국 정책의 충돌
영국의 아프리카 종단 정책과 프랑스의 아프리카 횡단 정책은 수단의 파쇼다에서 교차하게 되었다. 영국의 종단 정책은 남아프리카의 케이프타운에서 이집트의 카이로를 잇는 것이었고, 프랑스의 횡단 정책은 세네갈의 다카르에서 지부티를 잇는 것이었다. 이 두 정책은 1898년 9월 파쇼다 사건으로 이어졌다.
19세기 후반, 아프리카 분할 시기에 유럽 열강들은 아프리카 대륙을 분할 점령하려 했다. 1885년 베를린 회의 이후, 영국, 프랑스, 독일, 벨기에, 이탈리아, 포르투갈, 스페인 등이 경쟁에 참여했다.[1]
프랑스는 대서양 연안에서 동쪽으로 사헬 지역을 따라 니제르 강과 나일 강 사이를 연결하려 했다. 또한 홍해 입구 근처 프랑스 소말릴란드(현재 지부티)를 동쪽 거점으로 삼아 대륙 횡단을 꾀했다.[1]
영국은 남아프리카와 동아프리카, 그리고 나일 강 유역을 연결하고자 했다. 수단은 이 계획의 핵심 지역이었다. 영국의 세실 로즈는 케이프타운-카이로 철도 건설을 통해 아프리카를 영국의 통제하에 두려는 이른바 '적색 선' 계획을 추진했다.[2]
장바티스트 마르샹이 1898년 7월 파쇼다에 도착했을 때, 요새는 버려지고 폐허가 된 상태였다.[3]
파쇼다는 영국과 프랑스 간의 오랜 갈등, 즉 이집트 문제와도 관련 있었다. 1882년 이후 많은 프랑스 정치인들은 영국과의 이집트 공동 점령에 참여하지 않은 것을 후회하며, 상나일 강에 식민지 전초 기지를 건설하여 영국을 압박하려 했다.[4]
다른 유럽 국가들도 상나일 강 유역에 관심을 가졌다. 이탈리아는 1896년 아드와 전투에서 패배했고, 벨기에 콩고 자유국의 레오폴드 2세는 1896년 9월 콩고군을 파견했으나, 1897년 3월 병사들의 반란으로 실패했다.[3]
키치너는 이집트군 복장을 하고 파쇼다에 상륙하여 프랑스 국기에서 떨어진 곳에 이집트 국기를 게양했다.
해군력에서 영국이 우세했고, 프랑스 외무장관 테오필 델카세는 독일과의 미래 분쟁에 대비하여 영국의 우호 관계를 원했기에, 위기를 평화적으로 해결하려 했다.[4]
프랑스 정부는 1898년 11월 3일 군대 철수 명령을 내렸고, 마르샹은 아비시니아와 지부티를 통해 부대를 철수시켰다.
2. 4. 기타 유럽 열강의 개입
파쇼다 사건은 영국과 프랑스 간의 마지막 심각한 식민지 분쟁이었으며, 그 고전적인 외교적 해결은 대부분의 역사가들에게 1904년 앙탕트 코르디알의 전조로 여겨진다.[4] 같은 해, 파쇼다는 공식적으로 코독으로 개명되었다. 현재의 남수단에 위치해 있다.3. 파쇼다 위기 (1898년)
1898년 7월, 장바티스트 마르샹 대위가 이끄는 프랑스 부대가 파쇼다에 도착하여 프랑스 국기를 게양했다. 한편, 영국의 아프리카 종단 정책 수행을 위해 허버트 키치너 장군은 수단 지역의 반란을 평정하고 철도를 부설하며 남하하여 1898년 9월 하르툼에 도달했다.[1]
옴두르만 전투에서 승리한 키치너는 프랑스 원정대를 조사하라는 명령을 받고 파쇼다로 향했다. 9월 18일, 키치너가 이끄는 영국군 함대는 나일강을 남하하여 파쇼다 마을에 도착했다. 그는 이집트 군복을 입고 파쇼다에 상륙하여 프랑스 국기와 다소 떨어진 곳에 이집트 국기를 게양했다. 마르샹은 키치너에게 철수를 요구받았으나, 이를 거절하여 긴장 상태가 이어졌다.
양국 군대는 대치하였으나, 본국 정부의 지시를 기다리며 자제심을 보였다. 이 문제는 영국과 프랑스 본국 정부로 넘어갔고, 양국 간의 짧은 의지 싸움이 벌어졌다. 영국은 파쇼다에서 프랑스의 즉각적이고 무조건적인 철수를 주장했고, 프랑스는 이를 공개적인 굴욕으로 받아들여야 했다.[1]
당시 해군력은 영국이 압도적으로 유리했다. 프랑스 외무장관 테오필 델카세는 영국과의 군사 충돌이 현명하지 않다고 판단했다. 그는 독일 제국과의 충돌에 대비하여 영국의 우정을 얻고 싶어 했고, 드레퓌스 사건 등으로 프랑스 군부가 국민의 신뢰를 잃은 상황에서 여론의 지지를 얻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결국 1899년 프랑스군은 파쇼다에서 철수했다.
이 사건은 제국주의 시대에 영국과 프랑스의 관계가 가장 긴장했던 사건이지만, 이후 양국 관계는 1904년 영불 화친 협정을 맺는 등 화해로 나아갔다.
3. 1. 마르샹 원정대
프랑스는 프랑스령 수단 정복 경험이 있는 장-바티스트 마르샹 선장을 서아프리카로 다시 파견했다.[1] 그는 세네갈 출신 서아프리카 식민군 병력을 주축으로 한 부대를 중앙 아프리카로 향하는 배에 태웠다.[1] 1896년 6월 20일, 마르샹은 120명의 티라유르와 12명의 프랑스 장교, 부사관, 지원 인력을 이끌고 가봉 식민지의 리브르빌에 도착했다.[5]마르샹의 부대는 빌린 벨기에 증기선을 타고 브라자빌을 출발하여 파쇼다 지역을 확보하고 프랑스 보호령으로 만들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들은 우방기 강을 따라 항해 가능 지점까지 이동한 후 정글과 관목을 지나 수단의 사막까지 육로로 이동했다.[1] 그들은 수단을 가로질러 나일 강으로 이동했다. 그들은 에티오피아를 가로질러 동쪽에서 온 크리스티앙 드 봉샹이 이끄는 탐험대와 만날 예정이었다.[1]
아프리카 중심부를 가로지르는 14개월간의 어려운 여정 끝에, 마르샹 탐험대는 1898년 7월 10일에 파쇼다에 도착했지만, 봉샹 탐험대는 에티오피아인들의 정지 명령과 바로 강 협곡에서의 사고로 인해 도착하지 못했다. 마르샹의 소규모 부대는 어떤 지원도 받지 못한 채 홀로 남게 되었다. 한편, 영국은 영국-이집트 수단 정복에 참여하여 이집트에서 상류로 이동하고 있었다. 9월 18일, 5척의 영국 군함으로 구성된 소함대가 고립된 파쇼다 요새에 도착했다. 그들은 허버트 키치너 경이 이끌고 1,500명의 영국, 이집트, 수단 병사들을 태우고 있었다. 마르샹은 접근하는 부대가 더르위시로 구성되어 있다는 잘못된 보고를 받았고, 군사적 위기가 아닌 외교적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3. 2. 키치너의 영국군
허버트 키치너가 이끄는 영국군은 1898년 9월 하르툼에 도달했다. 이들은 아프리카 종단 정책을 수행하기 위해 수단 지역의 반란을 평정하고 철도를 부설하며 남하했다. 옴두르만 전투에서 승리한 후, 키치너는 프랑스 원정대를 조사하라는 밀봉된 명령을 받고 파쇼다로 향했다.[1] 그는 이집트 군복을 입고 파쇼다에 상륙하여 프랑스 국기와 다소 떨어진 곳에 이집트 국기를 게양했다.3. 3. 일촉즉발의 대치
영국과 프랑스 양측 모두 파쇼다에 대한 자국 권리를 주장했지만, 본국으로부터 추가 지시를 기다리기로 합의했다.[6] 두 지휘관은 자제심을 보였고 심지어 어느 정도 유머까지 보였다. 키치너는 마르샹에게 위스키로 건배했는데, 프랑스 장교는 이를 두고 "조국을 위해 내가 한 가장 큰 희생 중 하나"라고 묘사했다. 키치너는 프랑스 정원을 시찰하며 "파쇼다에 꽃이라니. 오, 이 프랑스인들!"이라고 말했다. 보다 심각하게, 영국은 드레퓌스 사건으로 인한 프랑스의 정치적 혼란을 자세히 보도하는 프랑스 신문을 배포하며 프랑스가 마르샹과 그의 부대에 심각한 지원을 제공할 상황이 아니라고 경고했다.[6]이 만남에 대한 소식은 파리와 런던에 전달되었고, 양국의 자존심을 자극했다. 광범위한 대중적 분노가 이어졌고, 양측은 서로를 노골적인 확장주의와 침략으로 비난했다. 이 위기는 1898년 9월과 10월 내내 계속되었다. 영국 해군은 전쟁 명령을 초안 작성하고 예비군을 동원했다.
옴두르만 전투에서 마흐디의 군대를 격파한 영국-이집트 연합군 사령관 키치너는 이집트 휘하의 이름으로 수단을 재정복하는 과정에 있었으며, 전투 후 밀봉된 명령을 열어 프랑스 원정대를 조사하게 되었다. 키치너는 이집트 군복을 입고 파쇼다에 상륙하여 프랑스 국기에서 다소 떨어진 곳에 이집트 국기를 게양하는 것을 고집했다.
해군력 측면에서 영국이 압도적으로 유리한 상황이었고, 이는 위기 이후 프랑스 의원들도 인정한 사실이다.
4. 외교적 해결
1898년 9월, 키치너가 이끄는 영국군 함대가 나일강을 남하하여 파쇼다에 도착했다. 당시 프랑스 외무장관 테오필 델카세는 영국과의 군사적 충돌이 프랑스에 불리하다고 판단했다. 독일과의 충돌에 대비하여 영국의 우호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했고, 드레퓌스 사건 등으로 프랑스 군부에 대한 국민적 신뢰가 낮아 전쟁 수행에 대한 지지를 얻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결국 프랑스는 1899년 파쇼다에서 철수하기로 결정했다.
4. 1. 프랑스의 양보
프랑스는 영국에 비해 해군력이 약했고, 이는 위기 이후 프랑스 의원들도 인정한 사실이다.[1] 새로 임명된 프랑스 외무장관 테오필 델카세는 "그들에게는 병사가 있지만, 우리에게는 변명밖에 없다"라고 말하며 군사적 열세를 인정했다.[2] 게다가 델카세는 독일과의 미래 분쟁에 대비하여 영국의 우호 관계를 원했기 때문에 영국과의 전쟁은 득이 될 것이 없다고 판단했다.[3]프랑스 내 여론도 전쟁에 부정적이었다. 1898년 10월 13일, 앙리 로슈포르는 ''랑트랑시제''에 기고한 사설에서 "독일이 우리의 뺨을 계속 때리고 있다. 영국에게 우리의 뺨을 내밀지 말자"라고 주장하며 반전 여론을 조성했다.[4]
결국 프랑스 정부는 1898년 11월 3일 군대 철수를 명령했고, 이로써 파쇼다 사건은 평화적으로 종결되었다.[5] 장바티스트 마르샹은 나일 강을 따라 증기선을 이용하는 대신, 아비시니아와 지부티를 통해 육로로 철수하는 비교적 느린 길을 택했다.[6]
4. 2. 영국의 압박
옴두르만 전투에서 마흐디 군대를 격파한 영국-이집트 연합군 사령관 키치너는 수단을 재정복하는 과정에서 프랑스 원정대를 조사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키치너는 이집트 군복을 입고 파쇼다에 상륙하여 프랑스 국기에서 떨어진 곳에 이집트 국기를 게양했다.해군력에서 영국이 압도적으로 유리했으며, 이는 프랑스 의원들도 인정한 사실이었다. 프랑스 외무장관 드라카세는 "그들에게는 병사가 있지만, 우리에게는 변명밖에 없다"라고 말하며, 영국의 우정을 얻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하여 위기를 평화적으로 해결하고자 했다.[4] 10월 13일, ''랑트랑시장''에 실린 사설에서 로슈포르는 "독일이 우리의 뺨을 계속 때리고 있다. 영국에게 우리의 뺨을 내밀지 말자"라고 썼다.[5]
영국과 프랑스 정부 간의 짧은 의지 싸움이 있었고, 영국은 파쇼다에서 프랑스의 즉각적이고 무조건적인 철수를 주장했다. 프랑스는 이러한 조건을 받아들여 공개적인 굴욕을 겪어야 했다.[6]
프랑스 정부는 11월 3일 군대 철수 명령을 내렸고, 위기는 평화적으로 종결되었다.[7] 마르샹은 나일 강을 따라 증기선을 이용하는 대신, 아비시니아와 지부티를 통해 소규모 부대를 철수하기로 했다.[8]
4. 3. 1899년 영불 협약
1898년 영국과 프랑스는 타협을 이루었다. 1899년 3월, 양국은 나일강과 콩고강 유역의 경계를 확정하는 협약을 맺어 파쇼다 사건을 외교적으로 해결했다.[1] 이 협약으로 긴장 관계에 있던 영국과 프랑스는 관계가 가까워져 1904년 영불 화친 협정을 맺게 되었다.5. 결과 및 영향
1898년 파쇼다에서 발생한 영국과 프랑스 간의 충돌은 제국주의 시대 양국 관계에서 가장 긴장된 순간 중 하나였다. 이 사건은 영국령 카이로와 케이프타운을 잇는 종단 정책과 프랑스령 다카르(세네갈)와 지부티를 잇는 횡단 정책이 수단의 파쇼다에서 교차하면서 발생했다. 양국의 아프리카 전략상 매우 중요한 지점이었기 때문에 긴장이 고조되었다.
키치너가 이끄는 영국군 함대는 나일강을 남하하여 9월 18일 파쇼다에 도착했다. 당시 프랑스 외무장관 테오필 델카세는 영국과의 군사 충돌이 현명하지 않다고 판단했다. 그는 급속히 세력을 확장하던 독일과의 충돌에 대비하여 영국과의 관계 악화를 피하고자 했다. 또한 드레퓌스 사건 등으로 프랑스 군부는 국민의 신뢰를 잃은 상태였기 때문에, 먼 수단에서의 전쟁은 여론의 지지를 얻기 어려웠다.
결국 프랑스군은 1899년 파쇼다에서 철수했다. 해군력에서 영국이 압도적으로 유리한 상황이었고, 프랑스 의원들도 이를 인정했다.[4] 프랑스는 "그들에게는 병사가 있지만, 우리에게는 변명밖에 없다"라며 체념했다.[4]
5. 1. 영불 협상 (1904년)
1898년 파쇼다 사건으로 프랑스와 영국 사이에 긴장이 고조되었으나, 양국은 1899년 타협을 통해 관계를 회복했다. 특히 독일과의 미래 분쟁에 대비하여 영국의 우정을 얻고 싶어 했던 프랑스 외무장관 테오필 델카세는 위기를 평화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다.[4] 민족주의와 반영국 정서가 고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정부는 11월 3일 군대 철수 명령을 내려 위기를 평화적으로 종결지었다.[5] 이후 1904년 양국은 영불 화친 협정을 맺게 되었다.[1]5. 2. 아프리카 식민 통치에 미친 영향
이 사건 이후 영국과 프랑스는 아프리카에서 군사적 충돌을 피하고, 식민 통치에 전념하게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영국과 프랑스를 포함한 유럽의 식민지 보유국이 영향력을 잃기 시작하고, 각지에서 아프리카 여러 국가가 독립하여 아프리카의 해라고 불리는 1960년까지 양국은 협력적인 식민 통치를 유지했다.6. 유산
프랑스 식민지 장교 조르주 드 빌르부아-마르위(George de Villebois-Mareuil)는 영국-보어 전쟁을 파쇼다 사건에서 프랑스가 당한 굴욕을 갚을 기회로 여겼으나, 보쇼프 전투(Battle of Boshof)에서 전사했다.[7]
이 사건은 프랑스 외교 정책에서 '파쇼다 증후군(Fashoda syndrome)'이라는 개념을 낳았다. 이는 영국의 영향력이 미칠 가능성이 있는 지역에서 프랑스의 영향력을 주장하려는 시도를 의미한다. 따라서 이는 1945년 레반트 위기(Levant Crisis), 1970년대 비아프라(Biafra)의 나이지리아 내전(Nigerian Civil War), 1994년 르완다 내전(Rwandan Civil War)과 같은 후대의 위기나 갈등과 비교하는 데 사용되었다.
사건에 연루된 두 주요 인물은 프랑스 리옹시의 소느 강(Saône)을 가로지르는 길이 116m인 키치너-마르샹 다리(Pont Kitchener-Marchand)에 기념되고 있다. 이 다리는 1959년에 완공되었다.[8]
참조
[1]
서적
France and Britain in Africa: imperial rivalry and colonial ru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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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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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st Chester University
2019-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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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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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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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l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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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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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ndom Hou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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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La Presse Français et les Boë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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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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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structurae.n[...]
2019-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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