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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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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시녀들》은 1656년 스페인 화가 디에고 벨라스케스가 그린 유화 작품이다. 펠리페 4세의 궁정 시종으로 일했던 벨라스케스가 왕족과 시녀들을 묘사했으며, 그림 속에는 벨라스케스 자신도 등장한다. 이 작품은 당시 화가의 사회적 지위, 예술과 현실의 관계, 시각적 표현 등 다양한 주제를 담고 있으며, 거울, 빛, 인물들의 배치 등을 통해 복합적인 의미를 전달한다. 후대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쳐, 프란시스코 고야, 존 싱어 사전트, 파블로 피카소 등 많은 예술가들이 이 작품을 재해석하거나 오마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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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녀들
작품 정보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라스 메니나스, 프라도 미술관 소장품
라스 메니나스
제목라스 메니나스
원어 제목Las Meninas ()
다른 제목여관들 (女官-)
화가디에고 베라스케스
제작 연도1656년
종류유화
기법캔버스에 유채
크기가로 276 cm, 세로 318 cm
소장프라도 미술관
위치마드리드

2. 역사적 배경

17세기 스페인에서 화가들은 시인이나 음악가와 같은 예술가가 아닌 기술자로 취급받아, 사회적 지위를 누리는 경우가 드물었다. 하지만 벨라스케스는 펠리페 4세 왕실과의 관계를 통해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높여 나갔다.

펠리페 4세 장례식 당시 상복을 입은 마르가리타 왕녀(1651–73), 후안 델 마조 작


본 작품에 그려진 마르가리타 왕녀. 1734년에 발생한 화재로 손상을 입은 왼쪽 볼 부분은 이후 다시 채색되었다.


펠리페 4세는 첫 부인 이사벨 왕비와 사별하고 아들 발타사르 카를로스마저 사망한 후, 오스트리아의 마리아나와 재혼하여 마르가리타 왕녀를 낳았다. 이후 펠리페 프로스페로 왕자와 카를로스 2세가 태어났지만, 펠리페 프로스페로는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2. 1. 펠리페 4세와 스페인 궁정

17세기 스페인에서 화가들은 시인이나 음악가와 같은 예술가가 아닌 기술자로 취급받아, 사회적 지위를 누리는 경우가 드물었다.[7] 그럼에도 불구하고 벨라스케스는 펠리페 4세 왕실을 통해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개척해 나갔다. 1651년 2월, 벨라스케스는 왕궁의 시종으로 임명되었다.[8] 이 자리는 그에게 많은 물질적, 사회적 혜택을 주었지만, 동시에 많은 의무를 지웠다. 사망하기까지 8년 동안 그가 완성한 작품은 많지 않으며, 대부분 왕실 구성원들의 초상화이다.[8]

펠리페 4세는 첫 부인인 이사벨 왕비가 1644년에 사망하고 외아들 발타사르 카를로스마저 2년 뒤에 사망하자, 후계자를 얻기 위해 1649년 마리아나 왕비와 재혼하였다. 마르가리타 왕녀는 그들의 첫 아이이자 그림이 완성될 당시의 유일한 자녀였다. 이후 펠리페 프로스페로 왕자와 카를로스 2세가 태어났지만, 펠리페 프로스페로는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벨라스케스는 마리아나 왕비와 아이들의 초상화를 그렸으며, 펠리페 4세 자신은 만년에 초상화를 그리는 것을 거부하였으나 이 작품에는 자신이 등장하는 것을 특별히 허락하였다.

1650년대 초반, 펠리페 4세는 벨라스케스에게 죽은 발타사르 카를로스가 살았던 방을 하사하여 궁정 박물관으로 조성하고 그의 작업 공간으로 쓰게 했다. '시녀들'이 전시되었던 곳이 바로 이 곳이다. 펠리페 4세는 이 곳에 전용 의자를 마련해 놓고 벨라스케스가 작업하는 모습을 종종 지켜보곤 했다. 엄격한 궁내 예절 속에서도 예술을 사랑했던 펠리페 4세는 벨라스케스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벨라스케스의 죽음 이후, 펠리페 4세는 왕위 후계자 선택을 위해 작성한 비망록에 "난 희망을 잃었다"라는 내용을 남겼다.[9][10]

1640년대와 1650년대 사이에 벨라스케스는 궁정 화가 겸 펠리페 4세의 수많은 서양화 컬렉션을 담당하는 학예사 역할을 맡았다. 그는 업무에 있어 상당한 자유를 보장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는 거울, 조각상, 융단 등을 사용하여 가장 값비싼 그림들이 자리한 전시관들의 내부 장식을 관리하였다. 또한 펠리페 4세가 소유한 많은 작품들의 감정 및 관리 업무 역시 그의 일이었다. 1650년대 초, 벨라스케스는 미술 분야의 권위자로서 모든 스페인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현재 프라도 미술관에 있는 티치아노, 라파엘로, 루벤스 등의 작품을 포함한 많은 작품들은 벨라스케스가 직접 수집, 정리한 것이다.[11]

2. 2. 벨라스케스의 생애와 작품 활동

17세기 스페인에서 화가들은 사회적 지위를 누리는 경우가 드물었다. 화가는 시인이나 음악가와 같은 예술가가 아닌 기술자로 취급받았다.[7] 그럼에도 불구하고 벨라스케스는 펠리페 4세 왕실을 통해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개척해 나갔으며, 1651년 2월 왕궁의 시종으로 임명되었다.[8] 이 직책은 그에게 많은 물질적, 사회적 혜택을 주었지만, 동시에 많은 의무를 지웠다. 벨라스케스가 사망하기까지 8년 동안 그가 완성한 작품은 많지 않으며, 대부분 왕실 구성원들의 초상화이다.[8]

펠리페 4세의 첫 부인인 이사벨 왕비는 1644년에 사망하였으며, 그들 사이의 외아들인 발타사르 카를로스 역시 2년 뒤에 사망하였다. 후계자가 없자 펠리페 4세는 1649년 오스트리아의 마리아나 왕비와 재혼하였으며, 마르가리타 왕녀는 그들의 첫 아이이자 그림이 완성될 당시의 유일한 자녀였다. 마르가리타 왕녀 이후 펠리페 프로스페로 왕자와 카를로스 2세가 태어났지만, 펠리페 프로스페로 왕자는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벨라스케스는 마리아나 왕비와 아이들의 초상화를 그렸으며, 펠리페 4세 자신은 만년에 초상화를 그리는 것을 거부하였으나 이 작품에는 자신이 등장하는 것을 특별히 허락하였다.[8] 1650년대 초반 펠리페 4세는 벨라스케스에게 죽은 발타사르 카를로스가 살았던 방을 하사하여 궁정 박물관으로 조성하게 함으로써 그의 작업 공간을 마련해 주었다. '시녀들'이 전시되었던 곳이 바로 이 곳이다. 펠리페 4세는 이 곳에 전용 의자를 마련해 놓고 벨라스케스가 작업하는 모습을 종종 지켜보곤 했다. 예술을 사랑했던 펠리페 4세는 벨라스케스와 매우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던 것으로 보이며, 벨라스케스의 죽음 이후 펠리페 4세는 왕위 후계자 선택을 위해 작성한 비망록에 "나는 희망을 잃었다"라는 내용을 남겼다.[9][10]

1640년대와 1650년대 사이에, 벨라스케스는 궁정 화가 겸 펠리페 4세의 수많은 서양화 컬렉션을 담당하는 학예사 역할을 맡았다. 그는 업무에 있어 상당한 자유를 보장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는 거울, 조각상, 융단 등을 사용하여 가장 값비싼 그림들이 자리한 전시관들의 내부 장식을 관리하였다. 또한 펠리페 4세가 소유한 많은 작품들의 감정 및 관리 업무 역시 그의 일이었다. 1650년대 초, 벨라스케스는 미술 분야의 권위자로서 모든 스페인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현재 프라도 미술관에 있는 작품들 중 티치아노, 라파엘로, 루벤스 등의 작품을 포함한 많은 작품들은 벨라스케스가 직접 수집, 정리한 것이다.[11]

2. 3. 작품의 보관 및 보존 상태

이 작품의 최초 제목은 '가족(La Familia)'이었다. 작품 속 인물들이 누구인지를 파악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 이 작품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스페인 황금시대의 바사리'라고 불리는 안토니오 팔로미노가 1724년에 완성한 스페인 화가들의 일생을 기록한 작품집에 수록되어 있다.[3][14]

적외선 관찰 결과, 작품 속 벨라스케스의 머리가 원래 왼쪽이 아닌 오른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는 것을 포함하여, 작가가 작품을 수정한 흔적인 자잘한 펜티멘토들이 발견되었다.[15]

이 작품은 왼쪽과 양쪽 모두가 잘려나갔다.[16] 1734년 발생한 화재로 인해 알카사르가 완전히 불타 없어지면서 이 작품 역시 피해를 입었으며,[17] 이후 왕실 소속 화가인 후안 가르시아 데 미란다가 복원하였다. 마르가리타 왕녀의 왼쪽 볼 부분은 안료가 크게 소실되어 완전히 새로 채색하였다. 화재에서 빠져나온 이후 이 작품은 1747년부터 48년까지 왕실 소유가 되었는데, 이때 그림 속의 마르가리타 왕녀가 이복 자매인 마리아 테레사로 잘못 밝혀졌으며 이러한 실수는 1772년 새 마드리드 왕궁에서 이 작품을 접수한 후에도 반복되었다.[18] 1794년에 작성된 왕실 소유 작품 목록에서 이 작품의 이름은 '펠리페 4세 가족'이었으며, 1814년에 작성된 목록에도 동일한 제목으로 기재되었다. 1819년 프라도 미술관으로 옮겨졌으며, 1843년에 제작된 프라도 미술관 카탈로그에서 처음으로 '시녀들'이라는 제목을 사용하였다.[18]

최근 이 작품은 질감과 색상의 손실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있다. 오염과 관중들에 노출됨으로 인해 시녀들이 입은 옷이 만들어내었던 흰색과 파란색의 선명한 대비가 바래었다. 1984년 미국 미술품 복원 전문가 존 브릴리의 감독 아래 19세기에 실시된 복원작업 중 생성된 황색 먼지층을 제거하기 위한 마지막 작품 복원 작업이 이루어졌다. 미술사학자 페데리코 제리의 말에 따르면 이 작업은 '분노어린 저항'을 불러일으켰으며, 이는 작품이 손상을 입기 때문이 아니라 작품의 모습이 변하기 때문이었다.[19][20] 하지만 로페즈-레이의 의견의 따르면, '복원은 불가피했다'.[18] 작품의 크기, 중요성, 가치 등의 이유로 인해 이 작품은 전시회를 목적으로 한 외부 대여를 금하고 있다.

3. 작품 분석

『시녀들』은 처음에는 『라 파밀리아(가족)』로 불렸다.[102] 1724년, 스페인 황금 시대의 조르조 바사리로 불리는 안토니오 팔로미노가 『시녀들』에 대한 상세한 내용을 출판하면서, 그림 속 몇몇 인물들의 모델이 밝혀졌다.[103] 적외선 조사 결과, 화가 자신의 손에 의한 변경점(펜티멘토)이 발견되었는데, 예를 들어 처음에는 베라스케스 자신의 머리가 오른쪽이 아닌 왼쪽에 기울어져 있었다.[104]

『시녀들』은 원래 크기보다 좌우가 잘려 작아졌다.[105] 1734년 알카사르(성) 화재로 작품이 손상되어 궁정 화가 후안 가르시아 데 미란다가 보수했는데, 공주의 왼쪽 뺨은 안료 손실이 심해 거의 전부 다시 칠해야 했다.[106] 1747~1748년 왕실 컬렉션 목록에 포함될 당시 마르가리타 공주는 이복 언니 마리 테레즈 도트리슈로 잘못 기록되었고, 1772년 신 마드리드 왕궁 목록에도 그대로였다.[107] 1794년 목록에는 초기 제목인 『펠리페 4세의 가족』으로, 1814년 목록에도 그대로 등록되었다. 1819년 프라도 미술관 창설로 컬렉션에 추가되었으며,[107] 1843년 프라도 미술관 카탈로그에 처음으로 『시녀들』이라는 제목으로 게재되었다.[107]

최근 『시녀들』은 텍스처와 색조에 손상이 나타나고 있다. 오염과 방문객 노출로 인해 "시녀" 의상의 파란색과 흰색 안료도 한때 선명했던 대비가 약해졌다.[107] 1984년, 미국 미술 복원가 존 블레어리가 19세기 보수 이후 쌓인 먼지의 "노란 베일"을 제거했지만, 격렬한 항의를 받았다.[108][109] 그러나 로페스 레이는 복원에 흠잡을 데가 없다고 평가했다.[107]

『시녀들』은 그 크기, 중요성, 가치 때문에, 전시를 위해 대여되는 일은 없다.[110]

3. 1. 등장인물

등장인물 해설

  • 마르가리타 왕녀(1): 펠리페 4세와 마리아나 왕비의 딸로, 그림의 중심에 서 있다. 다섯 살의 어린 나이로, 이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레오폴트 1세와 결혼한다.
  • 이사벨 데 벨라스코(2): 마르가리타 왕녀에게 허리를 굽히며 시중을 드는 시녀(meninaspt)이다.
  • 마리아 아구스티나 사르미엔토 데 소토마요르(3): 또 다른 시녀로, 마르가리타 왕녀 앞에 무릎을 꿇고 금색 쟁반에 붉은 컵(부카로es)을 받쳐 올리고 있다.
  • 마리아 바르볼라(4): 왕실의 난쟁이로, 연골무형성증을 앓고 있는 독일인이다. 마리바르볼라라고도 불린다.
  • 니콜라스 페르투사토(5): 이탈리아 출신의 난쟁이로, 발로 스페인 마스티프를 장난스럽게 깨우려 하고 있다.
  • 마르셀라 데 울로아(6): 왕녀의 샤프롱으로, 상복을 입고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호위병(7)과 이야기하고 있다.
  • 호세 니에토 벨라스케스(8): 왕실의 시종이자 벨라스케스와 친척 관계였을 가능성이 있는 인물이다. 1650년대에 왕비의 시종이자 왕실 태피스트리 작업 책임자였다. 그림 뒷편 계단에 멈춰 서 있다.
  • 디에고 벨라스케스(9): 화가 자신의 모습이다. 그림 왼쪽에 이젤에 받쳐진 큰 캔버스를 두고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 가슴에는 산티아고 기사단의 붉은 십자가가 있는데, 이는 그가 그림 완성 3년 후인 1659년에 받은 것이다.
  • 펠리페 4세와 마리아나 왕비(10, 11): 거울 속에 비친 모습으로 등장한다.

3. 2. 구성 및 양식

Las Meninases원근법을 사용하여 복잡하고 독특한 구성을 보여준다. 이 작품은 마드리드에 있는 펠리페 4세알카사르es 궁전 내 벨라스케스의 작업실을 배경으로 한다.[25] 실비오 가기(Silvio Gaggi)의 말에 따르면, 천장이 높은 방은 "단일 원근법으로 나눌 수 있는 단순한 상자"처럼 묘사된다.[26]

작품 속 인물들은 기하학적 격자 구조(수평 4등분, 수직 7등분)에 맞춰 배치되어 있다.[123] 캔버스의 아랫부분에 주요 인물들이 집중되어 있으며,[124] 깊이감은 선 원근법과 인물들의 겹침, 그리고 특히 명암의 능숙한 표현을 통해 구현되었다.[123]

그림에는 세 개의 초점이 있다: 마르가리타 공주, 벨라스케스의 자화상, 그리고 거울에 비친 펠리페 4세와 마리아나 왕비의 모습이다.[123]

빛의 활용은 이 작품의 핵심 요소이다. 오른쪽 창문과 열린 문에서 들어오는 빛은 인물들의 형태와 질감을 강조하고, 초점을 명확히 한다.[125] 특히, 마르가리타 공주는 밝은 빛을 받아 그림의 중심 인물로 부각된다. 벨라스케스는 빛과 그림자를 사용하여 각 인물의 입체감과 질감을 표현하고, 시선을 그림 속 특정 지점으로 유도한다.

벨라스케스는 이전 작품인 얀 반 에이크의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에서 영향을 받아 거울을 활용한 구성을 선보였다.[15][62]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과 유사하게, 시녀들에서도 거울은 그림 바깥의 공간, 즉 국왕 부부와 관람객의 존재를 암시한다.[35] 그러나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의 거울이 볼록 거울인 반면, 시녀들의 거울은 평면 거울이며, 원근법을 왜곡하지 않고 국왕 부부의 모습을 비춘다.[35]

거울에 비친 국왕 부부의 모습은 그림의 공간 구성을 더욱 복잡하게 만든다. 관람객은 국왕 부부의 시점에서 그림을 보는 것인지, 아니면 국왕 부부와 함께 그림을 보는 것인지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존재한다.[57]

벨라스케스는 인물들의 시선, 특히 마르가리타 왕녀, 벨라스케스 자신, 그리고 난쟁이 마리 바르볼라의 시선을 통해 관람객을 그림 속으로 끌어들인다.[29]



반 에이크의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에 있는 거울의 세부 묘사. 반 에이크의 그림은 "뒤쪽"에서 그림 공간을 보여주며, ''시녀들''의 거울에 비친 모습처럼 그림 공간 앞에 두 명의 인물이 더 있다.

3. 3. 회화 양식

벨라스케스는 바로크 시대에 일반적으로 사용했던 안료를 사용했다. 그가 주로 사용한 안료는 연백, 청금석(무릎을 꿇은 시녀의 치마에 사용), 진사와 붉은 레이크, 황토, 탄소 블랙 등이다.[24] 이러한 안료들은 당시 스페인 화가들이 일반적으로 사용하던 재료였다.

벨라스케스는 초기 작품에서부터 자신만의 독특한 표현 방식을 시도했으며, 이는 《시녀들》에서도 잘 나타난다. 예를 들어, 유일한 누드화인 『거울의 비너스』에서는 비너스의 얼굴이 거울 속에 흐릿하게 표현되어 현실감이 떨어진다. 초기 작품 『마르타와 마리아의 집의 그리스도』에서는 그리스도와 제자들의 모습이 뒤쪽 방으로 통하는 창문을 통해서만 보이는 독특한 구성을 사용했다.[144] 이러한 실험적인 시도는 벨라스케스 회화의 특징을 보여준다.

4. 작품의 해석

《시녀들》은 단순한 그림이 아니라, 다양한 해석과 논쟁을 불러일으킨 작품이다. 주요 미술사학자들은 이 그림에 나타난 권력 관계, 시선의 정치학, 재현의 문제 등을 심층적으로 탐구해 왔다.

미셸 푸코는 저서 《말과 사물》에서 《시녀들》을 분석하며, 이 그림이 유럽 예술의 새로운 에피스테메(사고방식)의 첫 발현이라고 주장했다. 푸코는 화가, 모델, 감상자 간의 복잡한 시각 관계에 주목하며, "우리가 그림을 감상하면, 화가는 그림 속에서 차례로 우리를 돌아본다. 서로 힐끗 보고, 시선이 얽힌다"고 묘사했다.[140][141] 푸코에게 《시녀들》은 고전과 모던 사이의 전환점에 위치하며, 예술에서 "표현"이 순수한 형태로 그려지게 된 순간을 나타낸다.[142]

언스트 곰브리치는 왕과 왕비가 초상화를 위해 포즈를 취하는 동안, 공주와 시녀들이 그 과정을 즐겁게 만들기 위해 함께 있는 장면이라고 해석했다.[39] 곰브리치는 이 그림이 모델들의 즉흥적인 아이디어에서 비롯되었을 수 있다고 추측했다.[40] 레오 스타인버그는 왕과 왕비가 관람객의 왼쪽에 있고, 거울에 비친 것은 왕과 왕비의 초상화라고 주장했다.[42] 케네스 클라크는 시녀들이 인판타 도냐 마르가리타를 설득하여 부모와 함께 포즈를 취하게 하려는 장면이라고 보았다.[43]

이처럼 《시녀들》에 대한 다양한 해석은 이 작품이 단순한 왕실 초상화가 아니라, 예술과 현실, 권력과 시선 등 복잡한 주제를 담고 있는 철학적이고 사회학적인 의미를 지닌 작품임을 보여준다.

벨라스케스는 이전 작품들에서 보여주었던 표현의 관습들을 《시녀들》에서도 활용했다. 《로케비 비너스》에서는 대상의 얼굴이 거울 속에 흐릿하게 나타나고,[75] 《마르타와 마리아의 집의 그리스도》에서는 그리스도와 그의 동료들이 뒤쪽 방의 창문을 통해서만 보이는 등, 시점과 시각적 트릭을 사용했다.[76]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1618년작 ''마르타와 마리아의 집의 그리스도'' 작. 작은 그림은 다른 방의 모습, 벽에 걸린 그림, 또는 거울에 비친 모습일 수 있다.


《시녀들》의 복잡함은 "예술, 그리고 인생은 환상이다"라는 것을 암시한다고도 해석된다. 이는 페드로 칼데론 데 라 바르카의 철학극 《인생은 꿈》과도 연결되는데, 이 작품은 "인생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그림자, 환영, 그리고 거짓"이라고 말한다.[137]

존 맨치프 화이트는 이 그림이 벨라스케스의 인생과 경력, 그리고 그의 예술을 보여주는 이력서와 같다고 평가했다. 왕궁의 방에 왕족과 조정 신하들이 모여 있고, 코르테스에서의 생활을 암시하는 오브제들이 놓여 있는 이 그림은, 벨라스케스가 예술가로서의 자신과 그의 그림에 대해 높은 존경을 요구했음을 보여준다.[113]

4. 1. 상징과 알레고리



《시녀들》은 마드리드에 있는 펠리페 4세의 알카사르 궁전 내 벨라스케스의 작업실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25] 천장이 높은 방은 "단일 원근법으로 나눌 수 있는 단순한 상자"처럼 묘사된다.[26]

작품에는 여러가지 상징과 알레고리가 숨겨져 있다.

  • 등장 인물: 중앙에는 마르가리타 테레사 (1)가 서 있다. 그녀는 두 명의 시녀의 시중을 받는다. 공주에게 정중하게 허리를 굽히려는 도냐 이사벨 데 벨라스코 (2)와 마르가리타 테레사 앞에 무릎을 꿇고 붉은 컵(부카로es)에 담긴 음료를 금색 트레이에 받쳐서 제공하는 도냐 마리아 아구스티나 사르미엔토 (3)이다.[27] 인판타의 오른편에는 두 명의 난쟁이가 있는데, 연골무형성증을 앓는 오스트리아 출신 마리 바르볼라 (4)와[27] 이탈리아 출신 니콜라시토 페르투사토 (5)는 그의 발로 졸린 스페인 마스티프를 장난스럽게 깨우려 한다. 공주의 시중을 드는 도냐 마르셀라 데 울로아 (6)는 슬픔에 잠긴 옷을 입고 신원을 알 수 없는 보디가드 (7)와 이야기하며 그들 뒤에 서 있다.[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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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면 오른편에는 1650년대에 여왕의 시종이자 왕실 태피스트리 작업의 책임자였던 돈 호세 니에토 벨라스케스 (8)가 서 있는데, 그는 화가의 친척일 수도 있다. 니에토는 멈춘 듯 보이며, 그가 "오고 있는지 가고 있는지"는 불분명하다.[29] 그는 실루엣으로 묘사되어 있으며, 짧은 계단에서 커튼을 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미술사가 아날리사 레페넨은 이러한 배경 조명과 열린 문은 "우리의 시선을 불가피하게 깊이로 이끈다"고 말한다.[30] 원근법소실점은 문에 있다. 니에토는 관람객의 시점과 동일한 왕과 여왕만 볼 수 있으며, 전경의 인물들은 볼 수 없다. 조엘 스나이더는 니에토가 여왕의 시종이었고 그녀를 위해 문을 열고 닫아야 했다고 언급하며, 니에토가 왕과 여왕이 떠날 수 있도록 문에 나타난다고 제안한다.[31]

벨라스케스 본인 (9)은 장면의 왼쪽에, 이젤에 받쳐진 큰 캔버스를 넘어 바깥쪽을 바라보며 그려져 있다.[32] 그의 가슴에는 산티아고 기사단의 붉은 십자가가 있는데, 그는 이 십자가를 그림이 완성된 지 3년 후인 1659년에 받았다. 팔로미노에 따르면, 펠리페 4세는 벨라스케스 사후에 이 십자가를 추가하도록 명령했으며, "어떤 사람들은 국왕이 직접 그렸다"고 말한다.[33]

  • 거울: 뒷벽에 있는 거울은 펠리페 4세 (10)와 마리아나 여왕 (11)의 상반신과 머리를 비추고 있다. 가장 일반적인 추정은 이 반사가 벨라스케스가 그들을 그릴 때 부부가 취하고 있는 자세를 보여주며, 딸이 지켜보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림은 그들이 본 장면을 보여준다.[35]

뒷벽에 걸린 거울의 세부 묘사, 펠리페 4세와 그의 아내 오스트리아의 마리아나의 반사된 이미지를 보여준다


묘사된 아홉 명의 인물 중 다섯 명은 왕실 부부 또는 관람객을 직접 바라보고 있다. 그들의 시선은 왕과 여왕의 반사와 함께 왕실 부부의 그림 밖 존재를 확인한다.[29] 미술사가 H. W. 얀손과 조엘 스나이더는 왕과 여왕의 이미지가 관람객에게 보이지 않는 벨라스케스의 캔버스에서 반사된 것이라고 제안한다.[36][37] 이 그림에는 화가가 그린 왕실 부부의 유일한 알려진 더블 초상화가 포함되어 있다.[38]

  • 그림 속 그림: 그림 속에는 루벤스의 ''변신 이야기'' 연작 중 하나와 벨라스케스의 사위이자 주요 조수인 델 마소가 야코프 요르다엔스의 작품을 복사한 그림을 포함한 여러 그림들이 걸려 있다.[25] 그림들은 이 무렵 촬영된 목록에 기록된 정확한 위치에 전시되어 있다.[32] 오른쪽 벽에는 여덟 개의 작은 그림이 격자 모양으로 걸려 있는데, 관람객의 시야 각도로 인해 프레임만 보이고 있다.[29] 이들은 목록에서 루벤스 오비드 연작의 델 마소 복사본으로 식별할 수 있지만, 두 개의 주제만 볼 수 있다.[25]


뒷벽의 그림은 ''아테네 여신과 아라크네''와 ''아폴로가 마르시아스를 이김''을 대표하는 것으로 인식된다. 두 이야기는 모두 지혜의 여신이자 예술의 수호신인 미네르바를 포함한다. 이 두 전설은 모두 인간이 신에게 도전하고 끔찍한 결과를 초래하는 이야기다. 한 학자는 미네르바아라크네라는 두 여성과 관련된 전설이 여왕의 모습과 같은 쪽에 있으며, 아폴로 신과 사티로스 마르시아스와 관련된 남성 전설은 왕의 쪽에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44]

  • 영향: 이 그림은 얀 반 에이크의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 (1434)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높다. 당시 반 에이크의 그림은 펠리페의 궁전에 걸려 있었고, 벨라스케스에게 익숙했을 것이다.[15][62]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 역시 그림 공간 뒤쪽에 거울이 위치해 있으며, 벨라스케스의 그림을 보는 관람객과 같은 시야각을 가진 두 명의 인물을 비추고 있다.

미셸 푸코는 저서 《말과 사물》(1966)의 첫 장을 《시녀들》 분석에 할애했다. 푸코는 이 그림을 매우 자세하게 해설했지만, "규정하는 것도, 예술사를 조사한 여러 문헌을 참조하는 것도 아닌" 상태였다.[140] 푸코는 주제에 얽매이지 않고 그림을 파악했으며, 화가의 의도한 작략, 화가와 시녀와 감상자의 시각 관계의 복잡하게 강조된 연결이었다.

푸코에게 《시녀들》은 유럽 예술의 새로운 에피스테메, 즉 사고방식의 첫 발현이었다.

5. 작품의 영향



루카 지오르다노는 1692년 나폴리 출신 화가로, 펠리페 4세의 개인 아파트에 보관된 그림을 볼 수 있도록 허가받은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시녀들''에 깊은 감명을 받았으며, 이 작품을 "회화의 신학"이라고 묘사했다.[46] 또한 ''벨라스케스에 대한 경의''(런던 국립 미술관 소장)를 그리는 데 영감을 받았다.[81] 18세기 초, 그의 작품은 국제적인 인정을 받기 시작했고, 이후 영국 수집가들이 작품을 인수하기 위해 스페인으로 건너갔다. 당시 영국 미술 애호가들 사이에서 이탈리아 미술의 인기가 절정에 달했기 때문에, 그들은 이탈리아의 영향을 명확히 보여주는 그림에 집중했고, ''시녀들''과 같은 다른 그림들은 대체로 무시했다.[82]

''시녀들''의 영향은 후안 바티스타 마르티네스 델 마소가 그린 두 점의 초상화에서 거의 즉각적으로 나타난다. 이 초상화들은 어떤 면에서는 ''시녀들''의 모티프를 뒤집고 있다. 1666년, 마소는 당시 15세였고 신성 로마 제국 황제와 결혼하기 위해 마드리드를 떠나려던 인판타 마르가리타 테레사를 그렸다. 배경에는 멀리 물러나 있는 두 개의 문 안에 인물들이 있는데, 하나는 새로운 왕 카를로스 2세(마르가리타 테레사의 오빠)이고, 다른 하나는 난쟁이 마리바르볼라였다. 마리아나 왕비의 마소 초상화는 알카사르의 문을 통해 젊은 왕과 난쟁이들(마리바르볼라를 포함할 수 있음), 그리고 그에게 음료를 제공하는 시종들을 다시 보여준다.[83][84] 마소의 그림 ''화가의 가족'' 또한 ''시녀들''과 비슷한 구성을 보여준다.[85]

5. 1. 후대 화가들에게 미친 영향

프란시스코 고야는 1778년에 ''시녀들''을 에칭으로 제작했고,[86] 이후 스페인의 카를로스 4세와 그의 가족을 그리면서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을 모델로 삼았다. 고야의 작품 속 왕족들은 ''시녀들''에서처럼 화가의 작업실을 방문하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졌다. 두 그림 모두 화가는 캔버스에 작업을 하고 있으며, 캔버스의 뒷면만 보인다. 그러나 고야는 ''시녀들''의 따뜻하고 분위기 있는 원근법 대신 피에르 가시에가 "임박한 질식"의 느낌이라고 표현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고야의 왕족들은 "대중을 향한 무대"에 등장하며, "그림자 속에서 화가는 음산한 미소를 지으며 '그들을 보고 스스로 판단해 보시오!'라고 말하는 듯하다."[80]

19세기 영국 미술 수집가 윌리엄 존 뱅크스는 반도 전쟁 (1808–1814) 중 스페인을 방문하여 마소가 그린 ''시녀들''의 사본을 구입했다.[87] 뱅크스는 이 그림이 벨라스케스가 직접 그린 유화 스케치라고 믿었지만, 벨라스케스는 보통 그림을 그리기 전 연구를 하지 않았다. 뱅크스는 자신이 구입한 그림을 "내 컬렉션의 영광"이라 칭하며, "오랫동안 거래를 했고 높은 가격을 지불해야 했다"고 말했다.[88]

1879년 존 싱어 사전트는 ''시녀들''의 소규모 복사본을 그렸고, 1882년에는 ''에드워드 달레이 보이트의 딸들''을 그려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에 대한 경의를 표했다.

존 싱어 사전트의 ''에드워드 달레이 보이트의 딸들''(1882), 캔버스에 유채, x , 보스턴 미술관 소장


존 라버리 경은 벨라스케스의 걸작을 자신의 초상화 ''1913년 버킹엄 궁전의 왕족''의 기초로 삼았다. 조지 5세는 그림을 그리는 동안 라버리의 작업실을 방문했고, 펠리페 4세가 벨라스케스 그림 속 인물에 산티아고 기사단 십자가를 그렸다는 전설을 떠올리며 라버리에게 자신의 초상화에도 직접 참여할 수 있는지 물었다. 라버리는 "로열 블루가 적절할 것이라고 생각하여 팔레트에 섞은 후, [조지 5세]가 붓을 들고 가터 훈장 리본에 칠했다"고 회상했다.[87]

1957년 8월부터 12월까지 파블로 피카소는 ''시녀들''과 그 인물들을 소재로 58점의 연작을 그렸으며, 이 작품들은 현재 스페인 바르셀로나 피카소 미술관의 ''시녀들'' 방에 전시되어 있다.[89] 피카소는 연작에서 등장인물을 바꾸지 않고 장면의 자연스러움을 대체로 유지했다. 미술관 측은 피카소의 작품이 "형태, 리듬, 색상 및 움직임에 대한 포괄적인 연구"로 구성되었다고 설명한다.[92]



리처드 해밀턴은 1973년에 ''피카소의 시녀들''이라는 판화를 제작하여 벨라스케스와 피카소 두 화가를 모두 참고했다.[90] 사진 작가 조엘-피터 위트킨은 스페인 문화부의 의뢰를 받아 벨라스케스의 그림과 다른 스페인 예술가들의 작품을 참고하여 ''시녀들, 뉴 멕시코'' (1987)를 제작했다.[91]

2004년, 비디오 아티스트 이브 서스먼은 ''시녀들''에서 영감을 받은 고화질 비디오 작품 ''알카사르에서 89초''를 촬영했다. 이 작품은 왕족과 시종들이 벨라스케스의 그림과 똑같은 구도로 모이기 전후 약 89초 동안의 순간들을 재현한 것이다. 서스먼은 건축가, 세트 디자이너, 안무가, 의상 디자이너, 배우, 영화 제작진 등 35명으로 구성된 팀을 꾸렸다.[93]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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