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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트르 라브로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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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표트르 라브로프는 1823년 러시아 제국에서 태어난 혁명가, 철학자, 사회학자, 작가이다. 그는 군사 학교에서 수학 교수로 근무했으며, 1862년 혁명 운동에 참여하여 망명 생활을 했다. 라브로프는 인민주의를 선전하고, 국제노동자협회와 파리 코뮌에 참여했다. 그는 사회 혁명을 위한 인민 교육과 지식인의 역할을 강조했으며, 사회적 연대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라브로프는 1900년 파리에서 사망했으며, 그의 사상은 러시아 혁명에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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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트르 라브로프

2. 생애

표트르 라브로프는 1823년 6월 14일 러시아 제국 프스코프현의 유복한 귀족 가정에서 태어나, 1842년 군사 학교를 졸업하고 장교로 복무했다. 그는 자연과학, 논리학, 철학, 역사에 뛰어났으며, 1844년부터 1866년까지 군사 학교에서 수학 교수로 재직했다.

1862년, 라브로프는 러시아 최초의 인민주의(나로드니키) 단체인 토지와 자유에 합류하며 혁명 운동에 뛰어들었다. 1866년 체포되어 우랄산맥으로 유배를 갔으나, 1870년 해외로 탈출하여 국제노동자협회에서 활동했다.

1870년, 그는 《역사 서한》을 출간하여 파리 코뮌과 제1인터내셔널에 참가했으며, 카를 마르크스프리드리히 엥겔스를 만나기도 했다. 1872년에는 미하일 바쿠닌과 협력을 모색했으나 결렬되었다. 1873년부터 1877년까지 스위스 제네바에서 잡지 《전진》을 발행하며 인민주의를 전파했다.

1875년, 라브로프는 《마르세유의 노래》에 가사를 붙인 《노동자 마르세예즈》를 작사했는데, 이 곡은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러시아 임시 정부의 국가로 사용되기도 했다. 1883년부터 1887년까지는 인민의 의지당의 기관지 《인민의 의지당 통보》를 발행했다.

라브로프는 ''헤겔 철학''(1858–59), ''실천 철학 문제 연구''(1860) 등 40년 이상 다작을 남긴 작가이기도 했다. 그는 "미르토프"라는 필명으로 《역사 서한》(1870)을 써서 러시아 혁명 운동에 큰 영향을 주었다.

1900년 2월 6일, 라브로프는 프랑스 파리에서 76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2. 1. 초기 생애와 군 복무

군복을 입은 젊은 라브로프


표트르 라브로프는 1823년 6월 14일 러시아 제국 프스코프현의 유복한 귀족 가정에서 태어났다.[1][2] 그의 아버지는 러시아 제국군의 퇴역 포병 장교였고, 어머니는 러시아화된 스웨덴 상인 집안 출신이었다.[3] 그는 사관학교에 입학하여 1842년 육군 장교로 졸업했다. 그는 자연 과학, 역사, 논리학, 철학, 심리학에 정통했다. 또한 그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포병 대학 교수로 20년 동안 수학을 가르쳤다.[4]

2. 2. 혁명 운동 참여와 망명

1862년 러시아 최초의 인민주의(나로드니키) 단체인 토지와 자유에 합류하면서 혁명 운동에 참여했다.[1] 카라코조프가 알렉산드르 2세를 암살하려다 실패한 후 체포되었다. 그의 집에서 발견된 편지와 시들이 그를 곤경에 빠뜨리는 것으로 여겨졌고,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군사 감옥에 9개월 동안 수감되었다. 음모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는 제기되지 않았지만, 전복적인 사상을 출판하고 범죄 성향의 사람들에게 동정심을 보인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4]

볼로그다로 유배형을 선고받았고, 3년 후 가짜 여권을 얻기 위해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잠시 머물다가 탈출하여 해외로 도망쳤다.[4] 프랑스에서 주로 파리에 살았으며, 그곳에서 인류학회의 회원이 되었다. 라브로프는 초창기부터 유럽 사회주의 사상에 매료되었지만, 처음에는 그것이 러시아에 어떻게 적용되는지 알지 못했다.[5] 파리에 있는 동안 혁명적 사회주의 운동에 전적으로 헌신했다. 1870년 국제노동자협회 테른 분과 회원이 되었고, 1871년 파리 코뮌에도 참여했으며, 곧 국제적인 지원을 얻기 위해 해외로 갔다.

1872년 11월 스위스 취리히에 도착하여 "러시아 식민지"에서 미하일 바쿠닌의 경쟁자가 되었다. 취리히에서 대학교 근처의 프라우엔펠트 하우스에서 살았다. 라브로프는 혁명보다 개혁을 선호하거나, 적어도 개혁을 유익한 것으로 보았다. 표트르 트카초프와 같은 사람들의 음모론적 이데올로기에 반대하는 설교를 했다. 쿠데타는 러시아에서 쉬울 수 있지만, 사회주의 사회 건설에는 러시아 대중이 참여해야 한다고 믿었다.[5] 1872년에 잡지 ''Вперед!'' (직역: 앞으로!)를 창간했으며, 첫 번째 호는 1873년 8월에 발간되었다. 이 잡지를 사용하여 러시아의 특별한 역사적 발전에 대한 자신의 분석을 알렸다. 1877년과 1882년에는 영국 런던에서 시간을 보냈다.

라브로프 만년의 모습

2. 3. 언론 활동과 사상 발전

1862년 러시아 최초의 인민주의(나로드니키) 단체인 토지와 자유에 합류하면서 혁명 운동에 참가했다.[1][2] 1866년에 체포되었고 1868년에 우랄산맥으로 귀양을 갔다.[1] 1870년에 해외로 탈출하여 프랑스 파리에 본부를 두고 있던 국제노동자협회에서 활동했다.[1]

1870년 《역사 서한》을 출간하여 파리 코뮌, 제1인터내셔널에도 참가했고 영국 런던에 거주하고 있던 카를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엥겔스를 만나기도 했다.[1] 1872년 11월에 스위스 취리히를 방문하여 당시 로카르노에 거주하고 있던 미하일 바쿠닌과 연락해 잡지에 협조를 구했으나, 바쿠닌 측이 편집 참여를 조건으로 제시하는 바람에 12월에 결렬되었다.[1]

1873년부터 1877년까지 스위스 제네바에서 잡지 《전진》을 발행하면서 인민주의를 선전했다.[1] 1875년에는 프랑스의 국가인 《마르세유의 노래》에 선율을 맞춘 시 《노동자 마르세예즈》의 가사를 작사했는데, 1917년에 일어난 러시아 혁명을 계기로 탄생한 러시아 임시 정부의 국가로도 사용되었다.[1] 1883년부터 1887년까지 알렉산드르 2세 황제 암살 사건을 일으킨 러시아의 인민주의 테러 조직이었던 인민의 의지당의 기관지인 《인민의 의지당 통보》를 발행했다.[1]

라브로프는 40년 이상 다작의 작가였다. 그의 저서로는 ''헤겔 철학''(1858–59)과 ''실천 철학 문제 연구''(1860)가 있다. 망명 생활을 하는 동안 그는 자신의 사회주의 평론지 ''Вперед!''를 편집했다. 혁명 운동에 기여한 ''역사 서한''(1870)은 "미르토프"라는 필명으로 쓰여졌다.[4]

2. 4. 사망

1900년 2월 6일 프랑스 파리에서 향년 76세로 사망했다. 마지막 말은 "부르고 있다, … 잘 살았다, … 끝이다, 인생은 끝났다"였다.[1]

3. 사상

표트르 라브로프는 사회 혁명을 위한 인민 교육과 준비, 이를 위한 선전 활동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알렉산드르 게르첸의 《종》을 계승한 잡지를 발행, 처음에는 유럽 사회주의 사상을 러시아에 적용하려 했으나, 스위스 망명 중이던 젊은 러시아인들과 교류하며 보다 급진적인 행동을 요구받게 된다.[5]

《역사 서한》에서 라브로프는 사회학의 '주관적 방법'을 주장하며, '비판적으로 사고하는 개인', 즉 굳건한 의지를 가진 '영웅'을 대중보다 앞선 존재로 제시하고, 인텔리겐치아(지식인)의 역할이 러시아 역사에서 결정적이라고 강조했다. 이는 나로드니키 운동이 1870년대 말 '인민 속으로' 가기를 거부하고 테러리즘으로 전환한 것과 맥을 같이한다.[5]

라브로프는 특권층 문화가 노동 계급 희생으로 가능했기에 그 빚을 갚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문화 자체가 죄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인민에게 이익이 되지 않으면 문화는 존재 이유가 없다고 보았다. 이는 비사리온 벨린스키, 니콜라이 체르니솁스키, 레프 톨스토이 등 여러 지식인 사상과 공통된다.[5]

그는 "역사적 서한"에서 사회학과 개인 도덕 원칙 간의 불가분한 연결을 강조했다. 사회학적 지식은 항상 학자들의 의식적 이상에 의존하며, 라브로프에게는 긍정주의 지도자들과 카를 마르크스가 큰 영향을 미쳤다.[6] 이러한 영향은 사회학 연구 핵심 문제로서의 '연대' 개념으로 종합되었다. 라브로프는 사회학을 사회적 연대 형태를 다루는 과학으로 정의하고, 이를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누었다.[7]

유형설명
관습의 무의식적 연대
순수한 감정적 연대비판적 성찰에 의해 제어되지 않는 충동에 기반
의식적인 역사적 연대의식적으로 선택되고 합리적으로 정당화된 목표 달성을 위한 공동 노력의 결과



'의식적인 역사적 연대'는 가장 높은 인간 연대 유형으로, 처음 두 유형보다 늦게 발전, 정적인 '문화'를 역동적인 '문명'으로 전환한다. 라브로프에게 사회적 연대는 "개인 이익이 사회적 이익과 일치하며, 개인 존엄성은 연대 참여자 모두의 존엄성 유지로만 유지된다는 의식"이다.[7] 그렇지 않으면 단순한 습관, 이익, 감정, 신념의 공동체일 뿐이다. 연대는 사회 존재의 필수 전제 조건이며, 연대적 상호 작용은 사회를 단순 개인 집합과 구별한다. 개인이 의식적 존재라는 조건은 무의식적 유기체의 연대를 사회학 영역에서 제외, 사회 현상과 생물학적 현상 간 경계를 표시한다.[7]

라브로프는 러시아 역사 발전이 서유럽과 달라, 봉건주의와 그 진보적 특징을 경험하지 못했다고 보았다.[5] 1870년, 여러 서유럽 국가와 러시아의 경제, 정치, 사회 발전 수준을 비교, 러시아의 상대적 후진성과 빈곤을 언급했다.[5]

게오르기 플레하노프와 달리, 라브로프는 러시아의 개별적 역사를 기반으로 혁명 전술을 수립, 사회주의 건설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인구의 90%가 농민이고, 계급적 연관 없는 지식인이 존재했기에, 지식인을 전 세계 사회주의 혁명에 러시아가 참여하도록 준비시킬 유일한 사회 부분으로 여겼다.[5]

3. 1. 인민주의와 사회 혁명

표트르 라브로프는 사회혁명을 위해서는 인민을 교육하고 준비시켜야 하며, 이를 위해 선전 활동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게르첸이 발행하던 《종》을 계승한 잡지를 출간하기도 했다. 처음에는 유럽의 사회주의 사상을 러시아에 적용하려고 했으나, 스위스에서 망명 생활을 하던 젊은 러시아인들을 만나면서 보다 급진적인 행동을 요구받게 되었다.[5]

라브로프의 그림


라브로프는 자신의 저서 《역사 서한》에서 '비판적으로 사고하는 개인', 즉 굳건한 의지를 가진 '영웅'을 국민 대중에 앞서는 존재로 제시하며, 역사에서 인텔리겐치아(지식인)의 역할이 러시아에서 결정적인 요소라고 설명했다. 이는 1870년대 말 인민주의 운동이 '인민 속으로 가기'를 거부하고 테러리즘으로 방향을 전환한 사실과도 일맥상통한다.[5]

그는 특권층의 문화가 노동하는 계급의 희생으로 가능했으므로 그 빚을 갚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문화라는 것이 죄인가, 아닌가?"라는 질문에 직면하며, 인민에게 이익이 되지 않으면 문화는 존재할 이유가 없다고 보았다. 이러한 입장은 비사리온 벨린스키, 니콜라이 체르니솁스키, 레프 톨스토이 등 다른 인텔리겐치아들의 사상과도 공통점을 갖는다.[5]

라브로프는 사회주의가 서유럽 역사 발전의 자연스러운 결과라고 보았다. 그는 부르주아 생산 방식이 스스로 파멸의 씨앗을 뿌렸다고 믿었다. "라브로프는 미래가 서유럽 과학적 사회주의에 속한다고 가정하며 혁명 경력을 시작했는데, 이는 서유럽 문명의 물질적 조건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었다."[5] 그는 러시아의 역사적 발전이 서유럽과 상당히 다르다는 것을 인식했지만, 러시아가 더 큰 유럽 사회주의 운동에 합류할 수 있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라브로프는 러시아의 역사적 발전을 분석하면서, 러시아의 특수성이 봉건주의와 그 진보적인 특징들을 경험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있다고 결론 내렸다. 러시아는 13세기에 일어난 몽골 정복으로 인해 유럽의 발전에서 고립되었다는 것이다. 1870년, 라브로프는 여러 서유럽 국가와 러시아의 경제, 정치, 사회 발전 수준을 비교하며 러시아가 상대적으로 후진적이고 빈곤한 상태에 있다고 언급했다.[5]

이러한 역사 분석에도 불구하고, 라브로프는 여전히 러시아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가능하다고 믿었다. 그의 동시대인인 게오르기 플레하노프는 사회주의 혁명이 혁명적 노동자 정당의 발전과 함께 올 것이라고 믿었지만, 라브로프는 이러한 전망을 거부했다. 그는 러시아의 개별적인 역사를 기반으로 혁명적 전술을 수립하여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러시아 인구의 거의 90%는 농민이었고, 계급적 연관성이 없는 독특한 사람들인 지식인도 있었다. 라브로프는 이들이 "러시아 사회의 다른 요소들과 달리 과거에 의해 훼손되지 않았다"고 평가했다.[5]

따라서 라브로프는 진정한 사회주의 혁명이 성공하려면 농촌 인구를 통합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지식인을 전 세계적인 사회주의 혁명에 러시아가 참여할 수 있도록 준비할 수 있는 사회의 유일한 부분이라고 여겼다. 그는 지식인들에게 인민을 조직하고, 과학적 사회주의를 가르치며, 마침내 때가 왔을 때 인민과 함께 무기를 들 준비를 함으로써 러시아 역사 발전의 부족분을 보충하는 임무를 부여했다.[5]

3. 2. '주관적 사회학'과 인텔리겐치아의 역할

표트르 라브로프는 사회 혁명을 위해 인민을 교육하고 준비시키며, 이를 위한 선전 활동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게르첸이 발행하던 《종》을 이어받은 잡지를 출간했으며, 처음에는 유럽의 사회주의 사상을 러시아에 적용하려 했다. 그러나 스위스에서 망명 생활을 하던 젊은 세대의 러시아인들을 만나면서, 보다 급진적인 행동을 요구받게 된다.

라브로프는 자신의 저서 《역사 서한》에서 사회학의 '주관적 방법'을 주장했다. 즉, '비판적으로 사고하는 개인', 즉 굳건한 의지를 가진 '영웅'을 일반 대중보다 앞선 존재로 제시하며, 역사에서 지식인의 역할이 러시아에서 결정적인 요소라고 설명했다.[5] 이는 1870년대 말 나로드니키 운동이 '인민 속으로' 가기를 거부하고 테러리즘으로 방향을 전환한 사실과 일맥상통한다.

라브로프는 특권층의 문화가 노동 계급의 희생으로 가능했으므로, 그 빚을 갚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는 "문화 자체가 죄인가, 아닌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진다. 그는 인민에게 이익이 되지 않으면 문화는 존재할 이유가 없다고 보았으며, 이러한 입장은 비사리온 벨린스키, 니콜라이 체르니솁스키, 레프 톨스토이 등 다른 지식인들의 사상과도 공통점을 갖는다.

라브로프는 지식인을 전 세계적인 사회주의 혁명에 러시아가 참여할 수 있도록 준비할 수 있는 사회의 유일한 부분이라고 여겼다. 그는 그들에게 인민을 조직하고, 과학적 사회주의를 가르치고, 마침내 때가 왔을 때 인민과 함께 무기를 들 준비를 함으로써 러시아 역사 발전의 부족분을 보충하는 임무를 부여했다.[5]

3. 3. 문화와 인민의 이익

라브로프는 특권층의 문화는 노동하는 계급의 희생으로 가능했기에 그 빚을 갚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는 "문화 자체에 대한 적의는 아니지만 문화라는 것이 죄인가, 아닌가?"라는 물음에 직면하고 있다. 인민에게 이익이 되지 않으면 문화는 존재할 이유가 없다는 라브로프의 입장은 비사리온 벨린스키, 니콜라이 체르니솁스키, 레프 톨스토이를 비롯한 여러 지식인들의 사상과 공통점을 갖고 있다.[5]

3. 4. 사회적 연대

표트르 라브로프는 사회 혁명을 위한 인민의 교육과 준비, 그리고 이를 위한 선전 활동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그는 알렉산드르 게르첸이 발행했던 《종》을 계승한 잡지를 출간했고, 처음에는 유럽의 사회주의 사상을 러시아에 적용하려고 했다. 그러나 스위스에 망명해 있던 젊은 세대의 러시아인들을 만나면서 보다 급진적인 행동을 요구받게 된다.[6]

라브로프는 자신의 저서인 《역사 서한》을 통해 사회학에서 주관적 방법을 주장했다. 즉 '비판적으로 사고하는 개인', 굳건한 의지를 가진 '영웅'을 국민 대중에 선행하는 자로 제시하면서 역사에서 인텔리겐치아(지식인)의 역할이야말로 러시아에서는 결정적인 요소라고 설명했다. 이는 인민주의 운동이 1870년대 말에는 '인민 속으로 가기'를 거부하고 테러리즘으로 방침을 전환한 사실과 호응한다.[6]

라브로프는 특권층의 문화는 노동하는 계급의 희생으로 가능했던 그 부채는 갚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는 "문화 자체에 대한 적의는 아니지만 문화라는 것이 죄인가, 아닌가?"라는 물음에 직면하고 있다. 인민에게 이익이 되지 않으면 문화에 존재할 이유가 없다는 라브로프의 입장은 비사리온 벨린스키, 니콜라이 체르니솁스키, 레프 톨스토이를 비롯한 여러 인텔리겐치아들의 사상과의 공통점을 갖고 있다.[6]

그의 "역사적 서한"에서 라브로프는 과학으로서의 사회학과 개인 도덕의 기본 원칙 사이의 불가분한 연결을 강조했다. 그에 따르면 사회학적 지식은 항상 학자들의 의식적으로 선택된 이상에 의존한다.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라브로프의 사상의 이질성과, 그에게 긍정주의 전통의 지도자들과 카를 마르크스가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을 강조한다.[6] 이러한 모든 영향은 사회학적 연구의 핵심 문제로서의 라브로프의 연대라는 개념에서 어떤 방식으로든 종합되었다. 라브로프는 사회학을 사회적 연대의 형태를 다루는 과학으로 정의했으며, 이를 세 가지 주요 유형으로 세분했다.[7]

유형설명
관습의 무의식적 연대해당사항 없음
순수한 감정적 연대비판적 성찰에 의해 제어되지 않는 충동에 기반
의식적인 역사적 연대의식적으로 선택되고 합리적으로 정당화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공동의 노력의 결과



"의식적인 역사적 연대"는 인간 연대의 가장 높고 중요한 유형을 나타냈다. 그것은 처음 두 유형보다 늦게 발전했으며 정적인 "문화"를 역동적인 "문명"으로 전환하는 것을 선포했다. 요약하면, 라브로프의 관점에서 사회적 연대는 "개인의 이익이 사회적 이익과 일치하며, 개인의 존엄성은 이 연대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의 존엄성을 유지함으로써만 유지된다는 의식"이다.[7]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단순한 습관, 이익, 감정 또는 신념의 공동체일 뿐이다. 따라서 연대는 사회의 존재의 필수 전제 조건이다. 연대적 상호 작용은 사회를 단순한 개인의 집합과 구별하며, 후자의 현상은 사회학적 대상이 되지 않는다. 더욱이 개인이 의식적인 존재라는 조건은 무의식적인 유기체가 수행하는 연대/연대적 상호 작용의 형태를 사회학의 영역에서 제외하거나, 다른 말로 하면 사회적 현상과 생물학적 현상 사이의 경계선을 표시한다.[7]

4. 평가와 영향

표트르 라브로프는 사회 혁명을 위해 인민을 교육하고 준비시키며, 이를 위한 선전 활동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라브로프는 알렉산드르 게르첸이 발행했던 《종》을 계승한 잡지를 출간했고, 처음에는 유럽의 사회주의 사상을 러시아에 적용하려 했다. 그러나 스위스에 망명해 있던 젊은 세대의 러시아인들을 만나면서 보다 급진적인 행동을 요구받게 된다.[1]

라브로프는 자신의 저서인 《역사 서한》을 통해 사회학에서 주관적 방법을 주장했다. 즉 '비판적으로 사고하는 개인', 굳건한 의지를 가진 '영웅'을 국민 대중에 선행하는 자로 제시하면서 역사에서 인텔리겐치아(지식인)의 역할이야말로 러시아에서는 결정적인 요소라고 설명했다. 이는 인민주의 운동이 1870년대 말 '인민 속으로 가기'를 거부하고 테러리즘으로 방침을 전환한 사실과 호응한다.[1]

라브로프는 특권층의 문화는 노동하는 계급의 희생으로 가능했던 것이기에 그 부채를 갚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는 "문화 자체에 대한 적의는 아니지만 문화라는 것이 죄인가, 아닌가?"라는 물음에 직면하고 있다. 인민에게 이익이 되지 않으면 문화에 존재할 이유가 없다는 라브로프의 입장은 비사리온 벨린스키, 니콜라이 체르니솁스키, 레프 톨스토이를 비롯한 여러 인텔리겐치아들의 사상과 공통점을 갖고 있다.[1]

참조

[1] 웹사이트 Лавров П.Л. http://www.narovol.n[...] 2011-04-07
[2] 웹사이트 ЛАВРОВ, ПЕТР ЛАВРОВИЧ {{!}} Энциклопедия Кругосвет https://www.krugosve[...] 2023-01-09
[3] 간행물 Peter Lavrov and the Russian Revolutionary Movement http://dx.doi.org/10[...] 1973
[4] 뉴스 A Veteran Revolutionary 1900-02-10
[5] 간행물 The Russian Past and the Socialist Future in the Thought of Peter Lavrov The American Association for the Advancement of Slavic Studies
[6] 논문 Studies of Social Solidarity in Russia: Tradition and Modern Trends Springer Science+Business Media 2012
[7] 서적 'Historical Letters' Univ. of California press 19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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