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콜라이 미하일롭스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니콜라이 미하일롭스키는 1842년 러시아에서 태어나 1904년 사망한 인민주의 사상가이자 문학 평론가이다. 그는 학생 운동 참여로 퇴학당한 후 문학 활동을 시작하여 여러 잡지에 기고했으며, 피에르조제프 프루동의 저서를 번역하기도 했다. 인민주의 잡지 편집에 참여하고, 톨스토이 운동을 비판하며 문학의 사회성을 강조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미하일롭스키는 영웅과 군중 이론을 통해 개인의 역할과 대중의 심리적 영향력을 강조했으며, 러시아의 농촌 공동체를 사회주의의 기반으로 보았다. 그는 테러리즘을 지지하고 자본주의를 비판하여 러시아의 마르크스주의 진영과 대립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러시아의 사회학자 - 피티림 소로킨
피티림 소로킨은 러시아 태생의 미국 사회학자로, 사회 분화, 계층화, 갈등 이론을 제시하고 사회 문화 역학 이론을 연구했으며, 러시아 혁명 당시 사회혁명당원으로 활동 후 미국으로 망명, 하버드 대학교 사회학과를 설립하여 사회학 발전에 기여했다. - 러시아의 사회학자 - 표트르 라브로프
표트르 라브로프는 19세기 러시아의 사회학자이자 철학자, 혁명가로서 인민주의 이론가이며, 사회 혁명을 위한 인민 교육과 선전 활동의 중요성을 강조했고, 《역사 서한》을 통해 사회학에서 주관적 방법을 주장하며 인텔리겐치아의 역할을 강조했으며, 망명 생활 중 국제노동자협회에서 활동하고 잡지 《전진》을 발행하며 인민주의를 선전하고 《노동자 마르세예즈》의 가사를 작사하기도 했다. - 칼루가주 출신 - 게르만 티토프 (아이스하키 선수)
게르만 티토프는 소련 리그와 NHL에서 활약하며 우승과 메달을 획득하고 러시아 아이스하키 국가대표팀에서도 활약한 은퇴한 아이스하키 선수이자 지도자이다. - 칼루가주 출신 - 세르게이 알료시코프
소련의 군인 세르게이 알료시코프는 어린 나이에 전쟁에 참전하여 47 친위 소총 사단에 입양된 최연소 병사로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공을 세워 훈장을 받았으며, 이후 법학을 전공하고 검찰청에서 근무하다 심장마비로 사망했고, 그의 이야기는 영화 《솔저 보이》의 모티브가 되었다. - 러시아의 문학 평론가 - 니콜라이 네크라소프
니콜라이 네크라소프는 러시아의 시인이자 작가, 비평가, 출판인으로, 농노제 사회의 부조리와 농민들의 고통을 사실적으로 묘사하여 사회에 반향을 일으켰고, 주요 문학 잡지를 통해 당대 문학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 러시아의 문학 평론가 - 니콜라이 도브롤류보프
니콜라이 도브롤류보프는 러시아의 혁명적 민주주의 사상가이자 문학 평론가로서, 문학 작품을 통해 사회 비판을 전개하며 러시아 사회 변혁 운동과 한국 민주화 운동에 영향을 미쳤다.
니콜라이 미하일롭스키 - [인물]에 관한 문서 |
---|
2. 생애
니콜라이 미하일롭스키는 1842년 11월 27일 칼루가주 메숍스크에서 태어나 1904년 2월 10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사망한 러시아의 사회 사상가, 문학 평론가, 번역가, 언론인이다.
귀족 출신 지주 가문의 아들로 태어나 페테르부르크 광산기술전문학교에 재학했으나 학생 운동 가담으로 퇴학당했다. 1860년 잡지 《새벽》을 통해 문학 활동을 시작했고, 여러 정기 간행물에 글을 기고했다. 1867년에는 피에르조제프 프루동의 《프랑스의 민주주의》를 러시아어로 번역 출간했다.
1868년부터 인민주의(나로드니키) 계열 잡지 《조국의 기록》 편집에 참여했고, 1879년에는 인민의 의지당 지도부 인사들과 만남을 가졌다. 1880년대에는 톨스토이 운동을 비판하고 문학의 사회성을 강조했으며,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을 분석한 《잔혹한 천재》를 집필했다.
1870년대와 1880년대 러시아에서 정치 및 경제 개혁의 주창자로서 명성을 얻었다. 1869년부터 1884년 폐간될 때까지 ''오테체스트벤니예 자피스키''(조국의 기록)에 기고했다. 1873년에는 ''세베르니 베스트니크''의 공동 편집자가 되었으며, 1890년부터 1904년 사망할 때까지 블라디미르 코로렌코와 함께 ''러스크예 보가트스트보''(러시아의 보물)의 공동 편집자로 활동했다. 그의 저작물 전집은 1913년에 출판되었다.
2. 1. 초기 생애
1842년 11월 27일 칼루가주 메숍스크에서 귀족 출신 지주 가문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페테르부르크 광산기술전문학교 재학 시절 학생 운동에 가담한 사실이 확인되어 퇴학당했다. 1860년 발레리안 크렘핀이 편집자를 맡았던 잡지 《새벽》을 통해 문학 활동을 시작했고 《도서 게시판》, 《열린 법원》, 《일주간》, 《현대 평론》을 비롯한 여러 정기 간행물에 글을 게재했다. 1867년 피에르조제프 프루동의 저서 《프랑스의 민주주의》를 러시아어로 번역해서 출간했다.2. 2. 인민주의 운동 참여
1868년부터 인민주의(나로드니키) 계열의 잡지 《조국의 기록》 편집에 참여했다.[1] 1878년에 니콜라이 네크라소프가 사망한 이후에는 미하일 살티코프셰드린, 그리고리 옐리세예프와 함께 잡지 《조국의 기록》 편집자로 활동했다.[1] 1879년에는 상트페테르부르크 넵스키가 80번지에 위치한 도서관에서 파벨 자소딤스키를 비롯한 인민의 의지당 지도부 인사들과 만남을 가졌다.[1]1882년부터 1891년까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추방되었지만 혁명 조직과 계속 연락했다.[1] 1884년에 잡지 《조국의 기록》 발행이 금지된 이후에는 《북방의 사자》와 《러시아의 사상》을 통합한 잡지 《러시아의 기록》을 창간했다.[1] 1892년에는 《러시아의 부》 편집을 맡았다.[1]
2. 3. 추방과 저술 활동
1882년부터 1891년까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추방되었으나, 이 기간 동안에도 혁명 조직과의 연락을 계속 유지했다. 1884년 잡지 《조국의 기록》이 발행 금지되자, 《북방의 사자》와 《러시아의 사상》을 통합하여 《러시아의 기록》을 창간했다. 1892년에는 《러시아의 부》의 편집을 맡았으며, 생애 마지막 10년 동안에는 마르크스주의자들과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2. 4. 말년과 죽음
1892년부터 《러시아의 부》의 편집을 맡았으며, 생애 마지막 10년 동안은 마르크스주의자들과 논쟁을 벌였다. 1904년 2월 10일에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62세로 사망했으며,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볼코프 묘지에 매장되었다.[1]3. 사상
미하일롭스키는 표트르 라브로프의 사상을 계승하여 역사에서 영웅의 역할을 강조하고 '주관적 방법'으로 사회 진보를 이룰 수 있다고 보았다. 그는 소수의 자각적인 테러리스트에 의한 요인 암살을 개혁의 수단으로 인정했다.
미하일롭스키는 러시아 농촌 공동체가 미래 사회주의의 기반이 될 수 있다고 보았으며, 인민의 의지당과 같은 지식인이 농촌이 자본주의에 의해 해체되기 전에 사회 구조를 바꿀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테러리즘을 지지하고 자본주의와 프롤레타리아의 역할을 부정했기 때문에 게오르기 플레하노프 등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자들과 대립했다.
그는 선진적인 인텔리겐치아(지식인)가 사회 발전을 이끌 수 있다는 이론을 제시하고, "영웅과 군중" 이론을 통해 개인의 역할과 집단 행동의 메커니즘을 설명했다.
미하일롭스키는 역사 발전을 개성 출현 과정으로 보았고, 개성을 위한 투쟁을 환경 적응 문제로 간주했다. 그는 다윈주의의 사회 발전 적용을 비판하며, 칼 에른스트 폰 베어의 법칙과 연대 원칙을 추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완벽한 인간을 사회 진보의 기준으로 보았고, 단순 협력과 연대를 중시했다. 그는 러시아 농민 공동체인 옵쉬나를 특별하게 여겼다.[7]
3. 1. 사회 철학
미하일롭스키는 인민주의 진영에서 표트르 라브로프의 사상을 계승한 인물로 여겨진다. 그는 역사에서 영웅의 역할을 강조하고 '주관적 방법'에 의해 사회의 진보를 가져오기를 기대했다. 즉 소수의 자각적인 테러리스트들에 의한 요인 암살을 개혁을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인정했다.[3]미하일롭스키는 러시아의 자연 경제와 가까운 상태에 있는 농촌 공동체가 장래에 사회주의의 기반이 될 수 있다고 보았다. 농촌이 자본주의에 의해서 분해되기 이전에 상층의 사회 구조를 바꾸어 버리는 것은 인민의 의지당과 같은 지식인에 의해서만 해결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는 테러리즘을 지지하고 자본주의와 프롤레타리아의 역할을 부정했기 때문에 게오르기 플레하노프를 포함한 러시아의 마르크스주의 진영과 대립했다.[3]
미하일롭스키는 선진적인 인텔리겐치아(지식인)가 선택한 방향에 따라 사회 발전을 변화시킬 가능성을 철학적으로 입증한 이상적이고 자유로운 이론을 전개했다. 또한 "영웅과 군중" 이론을 발전시켜 사람이 모방하려는 성향에 의한 집단 행동의 메커니즘을 설명했다.[3] 그는 "영웅과 군중"(1882) 등의 논문에서 새로운 이론을 제시하며, 개인은 반드시 뛰어난 개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우연히 어떤 상황에서 군중을 이끌거나 군중보다 앞서게 된 모든 개인을 의미한다고 주장했다.[3] 미하일롭스키는 특정 순간에 개인은 군중에게 실질적인 힘을 부여할 수 있으며(자신의 감정과 행동을 통해), 이로 인해 전체 사건이 특별한 힘을 얻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따라서 개인의 역할은 대중의 인식에 의해 강화되는 심리적 영향력에 달려 있다.[4]
미하일롭스키는 혁명의 심리적 영감이 죄책감이었던 '자신의 부와 특권을 예리하게 인식'하는 급진적 사상가 중 한 명이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우리는 보편적 진리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 대중의 오랜 고통을 치러야만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는 대중에게 빚진 자이며, 이 빚이 우리의 양심을 짓누르고 있다.'[5]
미하일롭스키는 역사적 과정을 사회 환경의 분화가 진행되어 결국 개성이 출현하는 과정으로 간주했다. 그는 개성을 위한 투쟁을, 개인이 환경에 적응하는 다윈주의적 생존 경쟁과는 대조적으로, 환경이 인격에 적응하는 문제로 보았다. 다윈주의자들이 생물학적 법칙을 사회 발전으로 전이하는 것을 비판하면서, 미하일롭스키는 1) 유기체가 단순한 것에서 복잡한 것으로 발달한다는 칼 에른스트 폰 베어의 법칙, 2) 단순한 협력에 기초한 연대 원칙을 다윈주의에 추가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6]
미하일롭스키는 완벽하고 조화롭게 발달된 인간이라는 이상을 얻는 것을 사회 진보의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보았다. 단순한 협력은 유사한 관심사와 기능을 가진 동등한 사람들의 사회적 연합이며, "연대"는 해당 사회의 주요 속성인 반면, 복잡한 협력의 경우 상호 관련된 집단의 "투쟁"이 주요 속성인 고도로 발달된 분업이 존재한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사회는 발달의 진전된 단계를 거칠 수 있지만, 분업과 복잡한 협력에 기반한 유럽 자본주의의 경우와 같이, 낮은 유형의 조직에 속할 수 있다. 따라서 미하일롭스키는 농민 러시아가 자본주의 서방에 비해 발달 단계는 뒤떨어지지만, 조직 유형으로 판단할 때는 앞선다고 결론 내렸다. 더욱이, 19세기 러시아 사상가들 대부분처럼, 그는 러시아를 다른 국가와 구별하는 독특한 특징인 ''옵쉬나''(전통적인 농민 공동체)에 특별한 중요성을 부여했다.[7]
3. 2. 영웅과 군중 이론
미하일롭스키는 자신의 저작에서 영웅과 대중(군중)의 관계에 대한 아이디어를 발전시켰다. 19세기 말~20세기 초 혁명적 성향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강한 성격이나 재능을 가진 개인이 엄청난 일을 해낼 수 있고 심지어 역사의 흐름을 바꿀 수 있다는 생각과는 반대로, 미하일롭스키는 "영웅과 군중"(1882) 등의 논문에서 새로운 이론을 제시하며, 개인은 반드시 뛰어난 개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우연히 어떤 상황에서 군중을 이끌거나 군중보다 앞서게 된 모든 개인을 의미한다고 주장했다.[3] 그는 특정 순간에 개인은 군중에게 실질적인 힘을 부여할 수 있으며(자신의 감정과 행동을 통해), 이로 인해 전체 사건이 특별한 힘을 얻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따라서 개인의 역할은 대중의 인식에 의해 강화되는 심리적 영향력에 달려 있다.[4]미하일롭스키는 혁명의 심리적 영감이 죄책감이었던 '자신의 부와 특권을 예리하게 인식'하는 급진적 사상가 중 한 명이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우리는 보편적 진리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 대중의 오랜 고통을 치러야만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는 대중에게 빚진 자이며, 이 빚이 우리의 양심을 짓누르고 있다.'[5]
미하일롭스키는 인민주의 진영에서 표트르 라브로프의 사상을 계승한 인물로 여겨진다. 그는 역사에서 영웅의 역할을 강조하고 '주관적 방법'에 의해 사회의 진보를 가져오기를 기대했다. 즉 소수의 자각적인 테러리스트들에 의한 요인 암살을 개혁을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인정했다.
그는 선진적인 인텔리겐치아(지식인)가 선택한 방향에 따라 사회 발전을 변화시킬 가능성을 철학적으로 입증한 이상적이고 자유로운 이론을 전개했다. 또한 "영웅과 군중" 이론을 발전시켜 사람이 모방하려는 성향에 의한 집단 행동의 메커니즘을 설명했다.
미하일롭스키는 역사적 과정을 사회 환경의 분화가 진행되어 결국 개성이 출현하는 과정으로 간주했다. 그는 개성을 위한 투쟁을, 개인이 환경에 적응하는 다윈주의적 생존 경쟁과는 대조적으로, 환경이 인격에 적응하는 문제로 보았다. 다윈주의자들이 생물학적 법칙을 사회 발전으로 전이하는 것을 비판하면서, 미하일롭스키는 1) 유기체가 단순한 것에서 복잡한 것으로 발달한다는 칼 에른스트 폰 베어의 법칙, 2) 단순한 협력에 기초한 연대 원칙을 다윈주의에 추가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6] 그는 완벽하고 조화롭게 발달된 인간이라는 이상을 얻는 것을 사회 진보의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보았다. 단순한 협력은 유사한 관심사와 기능을 가진 동등한 사람들의 사회적 연합이며, "연대"는 해당 사회의 주요 속성인 반면, 복잡한 협력의 경우 상호 관련된 집단의 "투쟁"이 주요 속성인 고도로 발달된 분업이 존재한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사회는 발달의 진전된 단계를 거칠 수 있지만, 분업과 복잡한 협력에 기반한 유럽 자본주의의 경우와 같이, 낮은 유형의 조직에 속할 수 있다. 따라서 미하일롭스키는 농민 러시아가 자본주의 서방에 비해 발달 단계는 뒤떨어지지만, 조직 유형으로 판단할 때는 앞선다고 결론 내렸다. 더욱이, 19세기 러시아 사상가들 대부분처럼, 그는 러시아를 다른 국가와 구별하는 독특한 특징인 ''옵쉬나''(전통적인 농민 공동체)에 특별한 중요성을 부여했다.[7]
3. 3. 사회 진보론
미하일롭스키는 표트르 라브로프의 사상을 계승한 인민주의 진영의 인물로 여겨진다. 그는 역사에서 영웅의 역할을 강조하고 '주관적 방법'에 의해 사회의 진보를 가져오기를 기대했다. 즉, 소수의 자각적인 테러리스트들에 의한 요인 암살을 개혁을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인정했다.[4]미하일롭스키는 러시아의 자연 경제와 가까운 상태에 있는 농촌 공동체는 장래에 사회주의의 기반이 될 수 있다고 보았다. 농촌이 자본주의에 의해서 분해되기 이전에 상층의 사회 구조를 바꾸어 버리는 것은 인민의 의지당과 같은 지식인에 의해서만 해결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 미하일롭스키는 테러리즘을 지지하고 자본주의와 프롤레타리아의 역할을 부정했기 때문에 게오르기 플레하노프를 비롯한 러시아의 마르크스주의 진영과 대립했다.
미하일롭스키는 선진적인 인텔리겐치아(지식인)가 선택한 방향에 따라 사회 발전을 변화시킬 가능성을 철학적으로 입증한 이상적이고 자유로운 이론을 전개했다. 또한 "영웅과 군중" 이론을 발전시켜 사람이 모방하려는 성향에 의한 집단 행동의 메커니즘을 설명했다.[3] 그는 특정 순간에 개인은 군중에게 실질적인 힘을 부여할 수 있으며(자신의 감정과 행동을 통해), 이로 인해 전체 사건이 특별한 힘을 얻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따라서 개인의 역할은 대중의 인식에 의해 강화되는 심리적 영향력에 달려 있다.[4]
미하일롭스키는 혁명의 심리적 영감이 죄책감이었던 '자신의 부와 특권을 예리하게 인식'하는 급진적 사상가 중 한 명이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우리는 보편적 진리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 대중의 오랜 고통을 치러야만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는 대중에게 빚진 자이며, 이 빚이 우리의 양심을 짓누르고 있다.'[5]
미하일롭스키는 역사적 과정을 사회 환경의 분화가 진행되어 결국 개성이 출현하는 과정으로 간주했다. 그는 개성을 위한 투쟁을, 개인이 환경에 적응하는 다윈주의적 생존 경쟁과는 대조적으로, 환경이 인격에 적응하는 문제로 보았다. 다윈주의자들이 생물학적 법칙을 사회 발전으로 전이하는 것을 비판하면서, 1) 유기체가 단순한 것에서 복잡한 것으로 발달한다는 칼 에른스트 폰 베어의 법칙, 2) 단순한 협력에 기초한 연대 원칙을 다윈주의에 추가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6]
미하일롭스키는 완벽하고 조화롭게 발달된 인간이라는 이상을 얻는 것을 사회 진보의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보았다. 단순한 협력은 유사한 관심사와 기능을 가진 동등한 사람들의 사회적 연합이며, "연대"는 해당 사회의 주요 속성인 반면, 복잡한 협력의 경우 상호 관련된 집단의 "투쟁"이 주요 속성인 고도로 발달된 분업이 존재한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사회는 발달의 진전된 단계를 거칠 수 있지만, 분업과 복잡한 협력에 기반한 유럽 자본주의의 경우와 같이, 낮은 유형의 조직에 속할 수 있다. 따라서 미하일롭스키는 농민 러시아가 자본주의 서방에 비해 발달 단계는 뒤떨어지지만, 조직 유형으로 판단할 때는 앞선다고 결론 내렸다. 더욱이, 19세기 러시아 사상가들 대부분처럼, 그는 러시아를 다른 국가와 구별하는 독특한 특징인 ''옵쉬나''(전통적인 농민 공동체)에 특별한 중요성을 부여했다.[7]
4. 저작
미하일롭스키는 1870년대와 1880년대 러시아에서 정치 및 경제 개혁의 주창자로 명성을 얻은 사상가 그룹의 일원이었다. 그는 1869년부터 1884년 폐간될 때까지 ''오테체스트벤니예 자피스키''에 기고했다. 1873년에는 ''세베르니 베스트니크''의 공동 편집자가 되었으며, 1890년부터 1904년 사망할 때까지 블라디미르 코로렌코와 함께 ''러스크예 보가트스트보''("러시아의 보물")의 공동 편집자로 활동했다. 그의 저작물 전집은 1913년에 출판되었다.
- Что такое прогресс?|진보는 무엇인가ru (1869년)
- Герой и толпа|영웅과 군중ru (1869년)
5. 평가와 영향
미하일롭스키는 1870년대와 1880년대 러시아에서 정치 및 경제 개혁의 주창자로 명성을 얻었다. 그는 1869년부터 1884년 폐간될 때까지 ''오테체스트벤니예 자피스키''에 기고했으며, 1890년부터 1904년 사망할 때까지 블라디미르 코로렌코와 함께 ''러스크예 보가트스트보''("러시아의 보물")의 공동 편집자로 활동했다.[3] 그의 저작물 전집은 1913년에 출판되었다.
그는 "영웅과 군중"(1882) 등의 논문에서 개인이 반드시 뛰어난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우연히 어떤 상황에서 군중을 이끌게 된 모든 개인을 의미한다고 주장했다.[3] 그는 특정 순간에 개인이 군중에게 자신의 감정과 행동을 통해 실질적인 힘을 부여하여 전체 사건이 특별한 힘을 얻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즉, 개인의 역할은 대중의 인식에 의해 강화되는 심리적 영향력에 달려있다.[4]
미하일롭스키는 혁명의 심리적 영감이 죄책감이었던 급진적 사상가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우리는 보편적 진리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 대중의 오랜 고통을 치러야만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는 대중에게 빚진 자이며, 이 빚이 우리의 양심을 짓누르고 있다.'라고 썼다.[5]
그는 역사적 과정을 사회 환경의 분화가 진행되어 결국 개성이 출현하는 과정으로 보았다. 그는 개성을 위한 투쟁을 환경이 인격에 적응하는 문제로 보았으며, 다윈주의적 생존 경쟁과는 대조적이라고 생각했다.[6] 그는 1) 유기체가 단순한 것에서 복잡한 것으로 발달한다는 칼 에른스트 폰 베어의 법칙, 2) 단순한 협력에 기초한 연대 원칙을 다윈주의에 추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6]
미하일롭스키는 완벽하고 조화롭게 발달된 인간이라는 이상을 사회 진보의 기준으로 보았다. 단순한 협력은 유사한 관심사와 기능을 가진 동등한 사람들의 사회적 연합이며 "연대"가 주요 속성인 반면, 복잡한 협력의 경우 상호 관련된 집단의 "투쟁"이 주요 속성인 고도로 발달된 분업이 존재한다고 보았다. 그는 농민 러시아가 자본주의 서방에 비해 발달 단계는 뒤떨어지지만, 조직 유형으로 판단할 때는 앞선다고 결론 내렸다. 또한, 19세기 러시아 사상가들 대부분처럼, 그는 러시아를 다른 국가와 구별하는 독특한 특징인 ''옵쉬나''(전통적인 농민 공동체)에 특별한 중요성을 부여했다.[7]
그의 사상에 대한 비판과 분석은 플레하노프의 『일원론적 사관의 발전의 문제(К вопросу о развитии монистического взгляда на историюru|일원론적 사관의 발전의 문제)』(1895년), K. 발리셰프스키의 "러시아 문학"(1900년), 이바노프-라즈움니크의 『인텔리겐치아(Обь интеллигенциru|인텔리겐치아)』(1908)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참조
[1]
간행물
Гринин Л. Е. Личность в истории: эволюция взглядов
http://www.isras.ru/[...]
История и современность
2010
[2]
Americana
Mikhailovski, Nikolai Konstantinovitch
[3]
서적
Heroes and Crowd: Collected Works in Sociology
Aleteya
1998
[4]
논문
The Role of an Individual in History: A Reconsideration
http://www.socionauk[...]
2010
[5]
서적
A People's Tragedy: The Russian Revolution 1891–1924
The Bodley Head
2014
[6]
논문
Studies of Social Solidarity in Russia: Tradition and Modern Trends
2012
[7]
웹사이트
Минувшее. Ру
http://www.minuvshee[...]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