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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다 간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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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풀다 간격은 냉전 시대에 소련과 바르샤바 조약기구군의 서유럽 침공 가능성에 대비한 전략적 요충지였다. 독일 중부 지역의 지형적 특징 때문에 기계화된 병력 이동에 적합하지 않았지만, 프랑크푸르트암마인으로의 진격을 가능하게 하여 서독의 수도인 본을 위협할 수 있었다. 미국은 풀다 간격을 방어하기 위해 제5군단을 배치하고, 핵무기를 포함한 다양한 군사 자산을 배치했다. 소련군의 공격을 감시하고 지연시키기 위해 정찰 부대를 운용했으며, NATO의 방어 전략과 바르샤바 조약기구의 공격 전략이 상호 작용하며 냉전 시대의 긴장을 반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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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다 간격
지도
개요
독일어 명칭풀다-뤼케 (Fulda-Lücke)
설명냉전 시대 전략적 요충 지역
중요성소련군과 바르샤바 조약군이 서독을 침공할 경우 가장 가능성이 높은 침공 경로 중 하나로 여겨짐
냉전 시대 주요 배치 (1985년경)
미국 부대V 군단
제 3 기갑 사단
제 8 기계화 보병 사단
제 11 기갑 기병 연대
소련 부대제8 근위군
약어 설명ACR = 기갑 기병 연대 (미국)
CAS = 근접 항공 지원
CSS = 전투 근무 지원
D = 사단
G = 근위
MR = 자동차화 소총
Regt Hq = 연대 본부
RHQ = 지역 본부
T = 탱크
주요 위치3/11
2/11
RHQ
1/11
CAS
CSS

제3 기갑 사단
제8 기계화 보병 사단
제79 근위 전차 사단
제27 근위 자동차화 소총 사단
제39 근위 자동차화 소총 사단
제57 근위 자동차화 소총 사단

2. 냉전 시대 전략적 요충지

풀다 간격을 통과하는 북쪽 경로는 Knüllgebirge 남쪽을 지나 포겔스베르크 산맥의 북쪽 측면을 따라 이어진다. 더 좁은 남쪽 경로는 플리에와 킨지히 계곡을 통과하며, 북쪽에는 포겔스베르크가 있고, 남쪽에는 뢴 산맥과 Spessart 산맥이 있다.[2] 풀다 간격의 서쪽 출구는 평평한 지형이 라인강까지 이어져, 북대서양 조약 기구(NATO)가 막기 전에 소련이 라인강에 도달하여 건너려는 시도에 유리하게 작용했을 것이다. 그 사이에 있는 마인강은 큰 장애물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풀다 간격 경로는 북독일 평원보다 기계화된 병력 이동에는 덜 적합했지만, 프랑크푸르트암마인으로 바로 진격할 수 있는 길을 제공했다. 본에 있는 서독의 수도는 서쪽으로 200km 떨어져 있었다. Seven Days to the River Rhine의 내용과 같이, 풀다 간격을 통한 소련 또는 바르샤바 조약군의 급속한 공격은 서독 영토를 분리하여 서독의 장기적인 존속을 어렵게 만들 수도 있었다.

2. 1. 지형적 특징

2. 2. 군사적 중요성

풀다 간격 경로는 북독일 평원보다 기계화된 병력 이동에는 덜 적합했지만, 프랑크푸르트암마인으로 바로 진격할 수 있는 길을 제공했다.[2] 이는 라인강까지 평평한 지형으로 이어져, 마인강을 건너 라인강에 도달하려는 소련군의 시도에 유리하게 작용했을 것이다. 또한 본에 있는 서독의 수도는 서쪽으로 불과 200km 떨어져 있었다.[2] Seven Days to the River Rhine의 내용과 같이, 풀다 간격을 통한 소련 또는 바르샤바 조약군의 급속한 공격은 서독 영토를 두 부분으로 분리하여 서독 국가의 장기적인 존속을 유지하기 어렵게 만들 수도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대한민국을 포함한 자유 진영 국가들은 풀다 갭 방어를 중요하게 여겼다.

3. 지형적 특징에 대한 전략적 대응

철의 장막 양측의 전략가들은 풀다 간격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고, 이에 따라 풀다 간격을 방어하고 공격하기 위한 병력을 배치했다. 풀다 간격 방어는 미국 제5군단(V Corps)의 임무였다.[3] 풀다 간격의 실제 독일 내부 국경은 정찰 부대에 의해 경계되었으며, 그 식별 및 구조는 냉전 시대 동안 변화했다.

풀다 간격 주변의 지형.


1945년 6월부터 1946년 7월까지 풀다 북쪽과 남쪽 지역의 미국과 독일 점령 소련군 지역 사이 국경에 대한 정찰 및 보안은 제3보병사단과 제1보병사단의 임무였다.[3] 1946년 7월, 제1, 제3, 제14 헌병 연대가 나중에 냉전 시대 풀다 간격으로 유명해진 지역에서 지역 간 국경 보안을 책임졌다.[4] 이 헌병 연대들은 이후 ''기갑 기병 연대''로 명칭이 변경되었다.[5][6] 1951년부터 1972년까지 제14기갑기병연대(14th ACR)가 풀다 간격을 순찰했다.[7] 1972년부터 냉전이 끝날 때까지는 제11기갑기병연대(11th ACR)가 제14기갑기병연대의 임무를 인계받아 정찰 임무를 수행했다.[7]

평시 기갑 기병대의 임무는 소련군의 선제 공격 징후를 감지하기 위해 동서 국경을 감시하는 것이었다. 전쟁 시에는 소련군의 공격을 지연시켜 제5군단의 다른 부대가 동원되어 풀다 간격을 방어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임무였다. 기갑 기병대는 또한 바르샤바 조약기구군과 지속적인 시각적 접촉을 유지하면서, 그들의 구성과 활동을 보고하고, 기병대가 지연 작전을 수행하는 동안 진격하는 바르샤바 조약기구군을 배치하도록 강요하는 차단 부대로서도 활동했을 것이다.

독일 중부 도시 풀다 인근의 지형.


풀다 간격을 방어하고 바르샤바 조약기구의 진격을 막기 위해, 미국 제5군단은 프랑크푸르트 및 바트크로이츠나흐 지역 기지에서 두 개의 사단(하나의 기갑 사단과 하나의 기계화 사단)을 이동시킬 계획을 세웠다.[8] 1947년부터 1951년까지 제1보병사단은 독일 주둔 유일의 미국 사단이었지만, 여러 헌병대 부대를 합하면 또 다른 사단 규모와 맞먹었다. 1950년 12월 10일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이 한국 전쟁으로 인해 국가 비상사태를 선포한 결과, 1951년 미국 군대가 독일에 증강되었고, CONUS에서 4개 사단(제4보병사단, 제2기갑사단 등)이 도착하여 제5군단에 배속되었다.[9]

1956년 5/6월, 제3기갑사단(3rd AD)이 도착하여 프랑크푸르트 주변에 주둔했고,[9] 1957년 12월, 제8보병사단(기계화)(8th ID)이 도착하여 바트크로이츠나흐 지역에 주둔했다.[9] 1963년 ROAD 재편성 이후, 제3기갑사단과 제8보병사단의 제5군단 배치는 냉전이 끝날 때까지 안정적으로 유지되었다.

소련군의 양적 우위에 대응하여, 미국은 수년 동안 풀다 간격에 원자력 파괴 지뢰를 배치했다.[12] 또한 1960년대 초부터 핵탄두 탑재가 가능한 중거리 미사일(MGM-5 코퍼럴, MGM-29 서전트, MGM-52 랜스)도 배치되었다.[13]

1975년부터 소련의 서유럽 공격 전략에는 기동 작전 그룹의 사용이 포함되었다.[14] 1976년부터 1984년까지 제4보병사단의 제4여단이 비스바덴에 주둔했으며, 제5군단에 배속되었다. 1979년부터는 제68기갑연대(1-68 Armor) 제1대대가 빌트플레켄에 주둔하며 풀다 간격 방어를 지원했다. 제54공병대대도 빌트플레켄에 주둔하여 주요 교량, 도로 등을 파괴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1980년 9월, 제533군사정보(MI) 대대가 프랑크푸르트에서 재창설되어 전자전 능력을 제공했다.[15] 제3기갑사단은 자체 공격 헬리콥터 부대로 증강되었으며, 1987년 AH-64 아파치를 배치한 최초의 군부대였다.

오랫동안 제5군단의 주요 적은 소련 제8근위군이었으며, 이어서 소련 제1근위전차군의 4개 기갑 사단과 1개 기계화 보병 사단을 포함한 추가 군대가 뒤따를 예정이었으므로, 풀다 간격은 냉전 시대 유럽에서 일어날 수 있는 가상 전투에서 소련 블록이 서유럽으로 진입하는 주요 진입로가 되었다. 양측 군대 모두 장비가 잘 갖춰져 있었고, 새로운 장비를 받는 데 우선순위를 두었다.

3. 1. NATO의 방어 전략

철의 장막 양측의 전략가들은 풀다 간격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고, 이에 따라 풀다 간격을 방어하고 공격하기 위한 병력을 배치했다. 풀다 간격 방어는 미국 제5군단(V Corps)의 임무였다.[3] 풀다 간격의 실제 독일 내부 국경은 정찰 부대에 의해 경계되었으며, 그 식별 및 구조는 냉전 시대 동안 변화했다.

1945년 6월부터 1946년 7월까지 풀다 북쪽과 남쪽 지역의 미국과 독일 점령 소련군 지역 사이 국경에 대한 정찰 및 보안은 제3보병사단과 제1보병사단의 임무였다.[3] 1946년 7월, 제1, 제3, 제14 헌병 연대가 나중에 냉전 시대 풀다 간격으로 유명해진 지역에서 지역 간 국경 보안을 책임졌다.[4] 이 헌병 연대들은 이후 ''기갑 기병 연대''로 명칭이 변경되었다.[5][6] 1951년부터 1972년까지 제14기갑기병연대(14th ACR)가 풀다 간격을 순찰했다.[7] 1972년부터 냉전이 끝날 때까지는 제11기갑기병연대(11th ACR)가 제14기갑기병연대의 임무를 인계받아 정찰 임무를 수행했다.[7]

평시 기갑 기병대의 임무는 소련군의 선제 공격 징후를 감지하기 위해 동서 국경을 감시하는 것이었다. 전쟁 시에는 소련군의 공격을 지연시켜 제5군단의 다른 부대가 동원되어 풀다 간격을 방어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임무였다. 기갑 기병대는 또한 바르샤바 조약기구군과 지속적인 시각적 접촉을 유지하면서, 그들의 구성과 활동을 보고하고, 기병대가 지연 작전을 수행하는 동안 진격하는 바르샤바 조약기구군을 배치하도록 강요하는 차단 부대로서도 활동했을 것이다.

풀다 간격을 방어하고 바르샤바 조약기구의 진격을 막기 위해, 미국 제5군단은 프랑크푸르트 및 바트크로이츠나흐 지역 기지에서 두 개의 사단(하나의 기갑 사단과 하나의 기계화 사단)을 이동시킬 계획을 세웠다.[8] 1947년부터 1951년까지 제1보병사단은 독일 주둔 유일의 미국 사단이었지만, 여러 헌병대 부대를 합하면 또 다른 사단 규모와 맞먹었다. 1950년 12월 10일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이 한국 전쟁으로 인해 국가 비상사태를 선포한 결과, 1951년 미국 군대가 독일에 증강되었고, CONUS에서 4개 사단(제4보병사단, 제2기갑사단 등)이 도착하여 제5군단에 배속되었다.[9]

1956년 5/6월, 제3기갑사단(3rd AD)이 도착하여 프랑크푸르트 주변에 주둔했고,[9] 1957년 12월, 제8보병사단(기계화)(8th ID)이 도착하여 바트크로이츠나흐 지역에 주둔했다.[9] 1963년 ROAD 재편성 이후, 제3기갑사단과 제8보병사단의 제5군단 배치는 냉전이 끝날 때까지 안정적으로 유지되었다.

소련군의 양적 우위에 대응하여, 미국은 수년 동안 풀다 간격에 원자력 파괴 지뢰를 배치했다.[12] 또한 1960년대 초부터 핵탄두 탑재가 가능한 중거리 미사일(MGM-5 코퍼럴, MGM-29 서전트, MGM-52 랜스)도 배치되었다.[13]

1975년부터 소련의 서유럽 공격 전략에는 기동 작전 그룹의 사용이 포함되었다.[14] 1976년부터 1984년까지 제4보병사단의 제4여단이 비스바덴에 주둔했으며, 제5군단에 배속되었다. 1979년부터는 제68기갑연대(1-68 Armor) 제1대대가 빌트플레켄에 주둔하며 풀다 간격 방어를 지원했다. 제54공병대대도 빌트플레켄에 주둔하여 주요 교량, 도로 등을 파괴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1980년 9월, 제533군사정보(MI) 대대가 프랑크푸르트에서 재창설되어 전자전 능력을 제공했다.[15] 제3기갑사단은 자체 공격 헬리콥터 부대로 증강되었으며, 1987년 AH-64 아파치를 배치한 최초의 군부대였다.

3. 2. 바르샤바 조약기구의 공격 전략

철의 장막 양측의 전략가들은 풀다 간격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고, 이에 따라 풀다 간격을 방어하고 공격하기 위한 병력을 배치했다.[14] 냉전 시기 유럽에서 일어날 수 있는 가상 전투에서 소련 블록이 서유럽으로 진입하는 주요 진입로였다.[14]

풀다 간격 방어는 미국 제5군단(V Corps)의 임무였다.[3] 1945년 6월부터 1946년 7월까지 풀다 북쪽과 남쪽 지역의 미국과 독일 점령 소련군 지역 사이 국경에 대한 정찰 및 보안은 제3보병사단과 제1보병사단의 임무였다.[3] 1946년 7월, 제1, 제3, 제14 헌병 연대가 지역 간 국경 보안을 책임졌다.[4] 1951년부터[6] 1972년까지 제14기갑기병연대(ACR)가 풀다 간격을 순찰했고,[7] 1972년 제11기갑기병연대(11th ACR)가 임무를 인계받아 냉전이 끝날 때까지 정찰 임무를 수행했다.

기갑 기병대는 소련군의 선제 공격 징후를 감지하기 위해 동서 국경을 감시하고, 전쟁 시 소련군의 공격을 지연시켜 미국 제5군단의 다른 부대가 동원되어 풀다 간격을 방어할 수 있도록 하는 임무를 수행했다.[8] 또한 바르샤바 조약기구군과 지속적인 시각적 접촉을 유지하면서, 그들의 구성과 활동을 보고하고, 기병대가 지연 작전을 수행하는 동안 진격하는 바르샤바 조약기구군을 배치하도록 강요하는 차단 부대로서도 활동했다.[8]

제5군단은 프랑크푸르트 및 바트크로이츠나흐 지역 기지에서 두 개의 사단(하나의 기갑 사단과 하나의 기계화 사단)을 이동시킬 계획을 세웠다.[8] 1950년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이 국가 비상사태를 선포한 결과,[9] 1951년 제4보병사단과 제2기갑사단이 제5군단에 배속되었다. 1956년 제3기갑사단(3rd AD)이 프랑크푸르트 주변에, 1957년 제8보병사단(기계화)(8th ID)이 바트크로이츠나흐 지역에 도착했다.

1950년대 독일 주둔 미군의 변화에 따라, 제19기갑기병단은 1953년 프랑크푸르트에서 활동을 시작하여 제19기갑단을 거쳐 1955년 제4기갑단으로 재지정되었다. 1956년 제7군 병력 목록에는[10] 제4기갑단이 제5군단에 배속되어 제2기갑사단, 제3기갑사단, 제10보병사단과 함께 있음을 보여준다. 1958년 USAREUR 병력 목록은[11] 제5군단이 제3기갑사단(본부 프랑크푸르트), 제8보병사단(본부 바트크로이츠나흐), 제4기갑단(본부 프랑크푸르트) 및 뷔르츠부르크에 본부를 둔 제3보병사단을 포함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1963년 ROAD 재편성 이후, 제3기갑사단과 제8보병사단의 제5군단 배치는 냉전이 끝날 때까지 안정적으로 유지되었다. 그러나 소련군의 엄청난 양적 우위로 인해 제5군단이 전쟁 발발 시 효과적이었을지는 미지수이며, 이에 대응하여 미국은 풀다 간격에 원자력 파괴 지뢰를 배치했다.[12] 1960년대 초, 풀다 간격은 MGM-5 코퍼럴 유도 미사일 부대에 의해 보호되었고, 1962년 MGM-29 서전트 미사일, 1973년 MGM-52 랜스 미사일로 교체되었다.[13]

오랫동안 제5군단의 주요 적은 소련 제8근위군이었으며, 이어서 소련 제1근위전차군의 4개 기갑 사단과 1개 기계화 보병 사단이 뒤따를 예정이었다.[14] 1975년부터 소련의 서유럽 공격 전략에는 풀다 간격과 같은 NATO 방어 진지를 우회하기 위한 기동 작전 그룹의 사용이 포함되었다.[14]

1976년부터 1984년까지 제4보병사단의 제4여단이 비스바덴에 주둔했으며, 또한 미국 제5군단에 배속되었다. 1979년부터 제8보병사단의 제1대대, 제68기갑연대(1-68 Armor)가 빌트플레켄에 주둔하며 제11기갑기병연대를 지원했다. 또한 빌트플레켄에는 제108군사정보(MI) 대대와 델타 중대 레인저가 배속되어 소련군의 보급선과 지휘 구조를 공격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제144병기중대는 제8보병사단과 제3기갑사단에 할당된 탄약과 풀다 간격 지역의 화학 및 핵 탄약을 담당했다. 제54공병대대는 빌트플레켄에 주둔하며 주요 교량, 도로 및 기타 통로를 파괴하는 임무를 받았다.

1980년, 제533군사정보(MI) 대대가 프랑크푸르트에서 재창설되어 제3기갑사단에 배속되었다.[15] 제533 MI 대대는 전자전 능력을 제공하고, 전파 방해 및 기만 통신을 통해 적의 무선 네트워크에 침투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제3기갑사단은 1987년 공격 헬리콥터 AH-64 아파치를 배치한 최초의 군부대였다.

3. 3. 기타 부대

1979년부터 적대 행위 발생 시 풀다 간격에서 제11기갑기병연대를 지원하기 위해 파견된 제5군단의 첫 번째 부대는 제8보병사단의 제1대대, 제68기갑연대(1-68 Armor)로, 간격 남쪽 빌트플레켄에 주둔했다.[15] 1-68 기갑연대의 임무는 간격의 일부에 방어선을 구축하여 다른 제5군단 부대가 진격하여 방어할 수 있는 방패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또한 빌트플레켄에는 제108군사정보(MI) 대대가 있었고, 델타 중대 레인저가 배속되었다. 레인저의 임무는 침략하는 소련군의 보급선과 지휘 구조를 공격하는 것이었다.

제144병기중대는 제8보병사단과 제3기갑사단에 할당된 탄약의 대부분을 담당했으며, 빌트플레켄에서 ASP #3을 운영했다. 제144병기중대는 또한 풀다 간격 지역에 대한 화학 및 핵 탄약을 담당했으며, ASP #3과 여러 전방 보관 및 수송 기지를 운영했다. 제54공병대대는 또한 빌트플레켄에 주둔했으며, 풀다 간격을 통해 소련군의 진격을 방해하기 위해 주요 교량, 도로 및 기타 통로를 파괴하고, 1-68 기갑연대가 소련군과의 교전을 쉽게 할 수 있도록 중요한 공병 서비스를 제공하는 임무를 받았다.[15]

1980년 9월, 제533군사정보(MI) 대대가 프랑크푸르트에서 재창설되어 제3기갑사단에 배속되었다.[15] 제533 MI 대대는 제3기갑사단 사령관에게 전자전 능력을 제공하기 위해 풀다 간격에 자산을 배치했다. MI 대대의 임무는 포병 및 공습을 위해 침략군을 식별하고 표적으로 삼고, 국방언어연구소에서 훈련받은 러시아 및 독일어 언어학자를 사용하여 전파 방해 및 기만 통신을 통해 적의 무선 네트워크에 침투하는 것이었다. 제3기갑사단은 자체 공격 헬리콥터 부대로 증강되었으며, 1987년 공격 헬리콥터 맥도넬 더글라스(나중 보잉) AH-64 아파치를 배치한 최초의 군부대였다.[15]

참조

[1] 웹사이트 Fulda Gap https://www.britanni[...] Encyclopaedia Britannica 2020-10-31
[2] 웹사이트 The Fulda Gap https://www.blackhor[...] The Blackhorse Association 2015-06
[3] 서적 US Army Border Operations in Europe https://history.army[...] 2019-03-30
[4] 웹사이트 Border Ops, Map 3 http://www.history.a[...] 2019-03-30
[5] 서적 US Army Border Operations in Europe https://history.army[...] 2019-03-30
[6] 서적 US Army Border Operations in Europe https://history.army[...] 2019-03-30
[7] 웹사이트 History of the 14th ACR http://www.14cav.org[...] 2012-02-19
[8] 간행물 General Balck and von Mellenthin on Tactics: Implications for NATO Doctrine https://apps.dtic.mi[...] BMD Corporation 1980-12-19
[9] 웹사이트 USAREUR Units - 19th Armor Gp http://www.usarmyger[...] 2013-01-16
[10] 웹사이트 USAREUR Units - 7th SUPCOM http://www.usarmyger[...] 2015-09-14
[11] 웹사이트 USAREUR Units - 7th SUPCOM http://www.usarmyger[...] 2013-01-16
[12] 서적 The History of the Joint Chiefs of Staff: The Joint Chiefs of Staff and National Policy, Volume VI, 1955–56 GPO 1992
[13] 문서 Personal knowledge
[14] 간행물 pp. 104–105 of the Jan–Feb 2010 issue http://www.hsdl.org/[...] Military Review, the journal of the U.S. Army's Combined Arms Center, Fort Leavenworth KS. 2010-01
[15] 웹사이트 533rd MI Bn https://web.arch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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