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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물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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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풍물놀이는 한국의 전통 민속 공연으로, 농업의 고된 노동을 덜고 흥을 돋우기 위해 시작되어 여흥적 오락으로 발전했다. 유래에 대해서는 농경 기원설, 군악 기원설, 불교 관련설 등 다양한 학설이 존재한다. 풍물놀이는 지역에 따라 풍물굿, 풍악놀이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며, '농악'이라는 명칭은 일제강점기에 한국 문화를 비하하기 위해 사용되었다는 논란이 있으나, 국가무형문화재 지정 명칭으로 사용되고 2014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풍물놀이는 꽹과리, 징, 장구, 북, 소고 등의 악기와 춤, 진(陣)으로 구성되며, 지역별로 가락과 특징이 다르다. 현재 대한민국에는 중부 농악, 영남 농악, 호남 농악 등 다양한 종류의 풍물놀이가 존재하며, 각 지역의 특색을 반영한다. 또한, 미국을 비롯한 해외 한인 사회에서도 풍물놀이가 활발하게 공연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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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물놀이
기본 정보
농악 공연 모습
농악 공연 모습
다른 이름풍물, 풍물놀이
로마자 표기nong-ak, pungmullori, pungmul
유형민속 음악, 전통 연희
기원농경 사회의 노동요와 제의
지역대한민국 전역
악기꽹과리, 징, 장구, 북, 소고, 태평소
특징신명나는 리듬과 춤사위
공동체 의식 강화
다양한 형태의 공연
역사
기원삼한 시대의 제천 행사에서 유래
발전농경 사회의 발달과 함께 전국으로 확산
다양한 형태의 농악 발달
보존중요무형문화재 제11호로 지정
구성 요소
음악다양한 장단과 가락
연주자의 즉흥적인 연주
다양한 춤사위와 몸짓
연주자와 관객의 흥을 돋움
연희다양한 이야기와 재담
관객에게 즐거움을 선사
의미
공동체 의식 강화농악을 통해 마을 사람들의 화합과 단결을 도모
풍요 기원농악을 통해 풍년과 안녕을 기원
액운 퇴치농악을 통해 악귀와 재앙을 쫓아냄
유네스코 지정
지정2014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
지정 사유한국 농경 문화의 중요한 요소
공동체 의식 강화에 기여
문화적 다양성 증진에 기여

2. 유래

풍물놀이의 유래에 대해서는 농사 안택 축원설, 군악설, 불교 관계설 등 여러 가지 학설이 있다.[19] 현존하는 풍물놀이의 당굿, 샘굿, 집돌이로서의 지신밟기 등은 신을 즐겁게 해주는 오신(娛神)과 잡귀를 쫓아내는 축귀(逐鬼) 등을 포함하고 있다.[20]

원래 풍물놀이는 지역에 따라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다. 직역하면 "풍류 놀이"가 되는 '''풍물놀이'''와 '''풍물굿'''이 잘 알려져 있으며, 단순히 '''풍물'''이라고도 한다. 일제강점기에는 궁중 음악인 "아악"과 구분하여 "농악"으로 통칭되었으며, 대한민국 성립 후에는 "국악"이라고 불렀다. 최근에는 원래 명칭인 풍물이나 매구라는 말도 사용되고 있다.

2. 1. 농경 기원설

상고시대부터 농경 사회에서 농작업의 능률을 높이고 풍년을 기원하며 풍물놀이가 시작되었다는 설이 있다. 풍물놀이는 농사일의 노고를 덜고 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목적에서 출발하여 점차 흥겨운 오락으로 발전했을 것으로 추측된다.[19]

2. 2. 군악 기원설

고대 전쟁에서 군사들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사용된 군악에서 유래했다는 설이다. 풍물놀이에 사용되는 영기(令旗)와 군인이 쓰는 모자인 전립 등이 군악적 요소로 제시된다.[20] 진(陣)풀이 또한 군악 기원설의 증거로 볼 수 있다.

2. 3. 불교 관련설

풍물놀이의 유래에 관한 학설 중 하나는 불교와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조선 시대에는 유교가 국교로 정해지면서 불교가 박해를 받았고, 이에 따라 사찰은 산속으로 쫓겨나게 되었다. 불교 승려들은 사찰을 존속시키기 위해 목어나 징 등을 연주하며 포교 활동을 했다고 한다.[20] 이러한 불교설은 사물, 고깔, 삼색띠, 무동들의 나비춤 등에서 불교적인 요소를 찾을 수 있다는 점에서 제기되었다.[20]

3. 명칭

풍물굿은 지역에 따라 풍물놀이, 풍악놀이, 풍장놀이, 두레, 메굿, 메기굿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린다.[23] 1980년대 이후 문화운동의 일환으로 우리 전통문화를 새롭게 인식하는 과정에서 '농악'이라는 말 대신 현지인들이 사용하는 '풍물'이라는 용어를 적극 수용하여 '풍물굿'이라는 용어가 만들어졌다.

'농악'이라는 명칭은 일제강점기에 한국 전통 문화를 비하하기 위해 사용되었다는 주장이 있다.[21] 무용학자 정병호는 '농악'이 농민들이 하는 음악이라 하여 ‘농악(農樂)’으로 불렸다고 주장하며, 1936년 조선총독부에서 발행한 《部落祭》라는 책에서 처음 등장했다고 설명했다.[21]

그러나 조선 시대 학자 권섭(權燮·1671~1759)의 글에 '농악'이라는 용어가 이미 등장하여, '농악'이 일제 강점기에 만들어진 용어가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22]

하지만 권섭이 '농악'이라는 말을 사용했다고 해서 다양한 기능의 풍물굿을 '농악'이라는 용어로 대체할 수는 없다. 권섭이 말한 '농악'은 '농민들의 음악'을 뜻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합리적이며, 군악이나 무속음악과는 별도로 구분하고 있어 풍물굿 전체를 포괄하는 용어가 아니다.

이러한 이유로 '농악'이라는 명칭은 용어의 개념이 적합하지 않아 사용할 수 없음에도, 국가무형문화재 지정 명칭으로 여전히 '농악'이 사용되고 있다.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 시에도 '농악'이라는 명칭이 사용되어 논란의 여지가 있다.[24]

4. 역사

풍물놀이는 조선 시대 농촌에서 봄에는 풍작을 기원하고, 여름에는 농작업을 위로하며, 가을에는 수확을 축하하는 목적으로 행해졌다.[1] 오늘날에도 각 지방 농촌에 계승되고 있으며, 도시에서도 축제나 행사에 빠질 수 없는 것으로 사랑받고 있다.[1]

조선 시대에 풍물놀이는 대다수 인구에게 주요한 음악적 표현 방식이었다.[7] 그러나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농악'(農樂|농악한국어)이라는 용어가 널리 사용되며 그 의미가 억압되었다는 주장이 학자와 연주가들 사이에서 제기되고 있다.[8]

1977년, 건축가 김수근은 서울에 한국 전통 음악 및 무용 공연장인 공간사랑을 설계하고, 예술가와 학자들을 초청하여 행사를 기획했다.[10] 1978년 2월, 김덕수, 김용배를 비롯한 네 명의 남성 그룹은 평택(''웃다리'') ''풍물''을 각 네 개의 핵심 악기로 즉흥적으로 편곡하여 연주했다.[11]

전통 ''풍물''과 달리, ''사물놀이''는 앉아서 공연한다.


민속학자 심우성은 이 그룹을 사물놀이|四物놀이한국어라고 명명했는데, 이는 "네 개의 물건의 연주"를 의미한다.[11] ''사물놀이''는 이후 한국과 일본 전역에 교육 기관과 앙상블이 설립되면서 하나의 장르를 지칭하게 되었다.[12] 한편, 전통 ''풍물''은 새롭게 무대화되고 도시화된 형태와 구별하기 위해 ''농악''이라는 용어로 유지되었다.[13]

사물놀이의 등장은 풍물놀이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였다. 1980년대 문화운동의 일환으로 전통문화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면서 풍물굿이라는 용어가 적극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도시로 이주한 한국인들이 전통 문화를 버리면서 관심이 부족했고, 서양식 콘서트홀의 도입과 서양 고전대중음악의 인기가 높아진 것도 영향을 주었다.[9]

4. 1. 초기 발전

조선 시대에 농촌에서 풍물놀이는 봄에 풍작을 기원하고, 여름에 농작업을 위로하며, 가을에 수확을 축하하는 목적으로 행해졌다.[1]



오늘날에도 풍물놀이는 각 지방 농촌에 계승되고 있다. 도시에서도 화려한 의상을 입은 풍물놀이패와 음악은 축제나 행사에 빠질 수 없는 것으로 사랑받고 있다.[1]

4. 2. 일제강점기

조선 시대 동안, 풍물놀이는 대다수 인구에게 주요한 음악적 표현 방식이었다.[7] 오늘날 많은 학자와 연주가들은 '농악'(農樂|농악한국어)이라는 용어가 일제강점기에 한국인들 사이에서 널리 사용되면서 그 의미가 억압되었다고 주장한다.[8]

4. 3. 부흥과 발전

1977년, 저명한 건축가 김수근은 서울에 한국 전통 음악 및 무용 공연장인 공간사랑을 설계하고, 예술가와 학자들을 초청하여 행사를 기획했다.[10] 1978년 2월 공연 센터의 첫 번째 연주회에서, 김덕수와 김용배를 비롯한 네 명의 남성 그룹은, 모두 남사당패 단원의 후손으로, 평택(''웃다리'') ''풍물''을 각 네 개의 핵심 악기로 즉흥적으로 편곡하여 연주했다.[11]

전통 ''풍물''과는 달리, 이 공연은 관객을 마주보고 앉아서 진행되었으며, 다양한 리듬을 매우 유연하게 선보였다. 관객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었으며, 3개월 후 두 번째 공연이 곧 열렸다. 두 사람을 공간사랑에 소개한 민속학자 심우성은 이 그룹을 사물놀이|四物놀이한국어라고 명명했는데, 이는 "네 개의 물건의 연주"를 의미한다.[11] ''사물놀이''는 결국 한국과 일본 전역에 교육 기관과 앙상블이 설립되면서 전체 장르를 지칭하게 되었다.[12] 전통 ''풍물''을 이러한 새롭게 무대화되고 도시화된 형태와 구별하기 위해 ''농악''이라는 용어가 유지되었다.[13]

사물놀이의 등장은 풍물놀이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였다.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문화운동의 일환으로 전통문화에 대한 인식이 높아짐에 따라 풍물굿이라는 용어가 적극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정부의 지원과 관심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도시로 이주한 한국인들이 전통 문화를 버리면서 관심이 부족했고, 서양식 콘서트홀의 도입과 서양 고전대중음악의 인기가 높아진 것도 영향을 주었다.[9]

5. 구성

풍물굿은 발림, 가락, 진으로 구성된다.

진은 원래 군사 용어로 전쟁에서 양측 군대가 전투를 앞둔 배치를 가리키는 말이다. 가락에 따라 진풀이를 펼쳐 가며 판을 진행하는데, 원진, 방울진, 미지기진, 오방진 등은 대부분의 지방에서 공통적으로 보이고 있으며, 이외에도 지방에 따라 특색있는 진풀이들이 있다.

풍물놀이 연주자들은 다양한 색상의 의상을 착용한다. 불교의 고깔을 화려하게 만든 버전이 가장 일반적인 머리 장식이다. 숙련된 단체에서는 모든 연주자가 상모를 착용할 수 있는데, 상모는 연주자가 무릎을 굽혀 복잡한 패턴으로 돌리고 뒤집을 수 있는 긴 리본이 부착된 모자이다. 일부 지역 풍물 유형에서는 전통적인 마을 역할을 캐리커쳐로 분장한 잡색 (배우)들이 관객과 소통하며 연주자와 관객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든다.

밝은 색상의 천 띠는 종종 풍물의 기원을 무속 신앙에서 찾을 수 있다.

5. 1. 악기

풍물놀이에는 꽹과리, 장구, 북, 징, 소고 등 5가지 주요 악기가 사용된다. 이들은 모두 연주 방식이 다르며 고유한 소리를 낸다. 각 악기 연주자 중 첫 번째 연주자를 '수' 또는 '상'이라 부른다. 예를 들어 꽹과리 연주자는 '상쇠', 장구 연주자는 '수 장구', 북 연주자는 '수 북', 소고 연주자는 '수 북구'라고 부른다.[1]

오늘날 대부분의 ''쇠'' 연주자는 첫 번째 손가락이나 엄지손가락으로 매달아 왼손으로 악기를 잡는다.


농악에 사용되는 주요 악기는 다음과 같다.[1]

  • 징(鉦): 놋쇠로 만들어진 큰 꽹과리로, 전체 소리를 감싸는 역할을 한다.
  • 꽹과리: 놋쇠로 만들어진, 징보다 작은 얇은 꽹과리로, 전체의 리더 역할을 한다.
  • 장구(杖鼓): 장구라고도 한다. 모래시계형 타악기로, 나무를 파낸 통의 양면에 동물의 가죽을 씌운 북이다. 모양은 일본의 쓰즈미와 거의 같다.
  • : 나무를 파내어 양면에 말이나 소의 가죽을 씌운 북이다.
  • 소고(小鼓): 작은 북으로 손에 들고 춤을 추면서 두드린다.
  • 태평소(太平簫): 일본의 차르메라와 매우 유사한 관악기이다. 오보에와 마찬가지로 더블 리드형 목관악기이며, 호적 또는 날라리라고도 불린다.


사물놀이는 징, 꽹과리, 장구, 북을 사용하여 한국 전역의 농악의 리듬을 편집하여 무대 예술용으로 체계화한 단체로 1978년에 결성되었다.[1]

5. 2. 춤 (발림)

풍물굿의 몸동작은 아랫노름과 윗노름으로 구분할 수 있다.[14] 아랫노름은 주로 발동작을 일컫는데, 까치걸음, 절름발이 걸음 등 몇 가지를 제외하고는 정식 명칭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 전라우도 지방의 풍물굿이 비교적 화려한 아랫놀음을 보여준다. 윗노름은 상모를 여러 가지 형태로 돌려 모양을 만드는 것을 일컫는다. 한쪽 방향으로 한 번을 돌리는 외사, 한쪽 방향으로 두 번씩 돌리는 양사, 채끝을 나비 모양으로 만드는 나비사 등이 일반적으로 보여지는 상모 놀음이다.[14]

풍물에서 춤 요소는 풍물을 통합된 장르로서의 예술적, 미학적 특징을 더욱 심화시킨다. 이 춤은 윗놀음과 발놀음과 같은 개인 신체 구조 시스템과 개인이 집단을 완성하는 객체가 되는 그림 표현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춤의 형식과 인원 구성에 따라 군무, 독무, 잡색으로 나뉜다.[15]

  • 군무(群舞): 진풀이 (공연 중 다양한 대형을 선보임)
  • 독무(獨舞): 상쇠놀음(상쇠의 개인 놀이), 상모놀이(상모 돌리기), 설장구놀음(장구 놀이), 소고놀음(소고 놀이)
  • 잡색(雜色): 풍물패의 구성원이 특정 캐릭터로 분장하여 다양한 촌극을 연기한다. 모든 표현은 역할 기반의 자기 분석의 결과이다.

5. 3. 진 (陣)

진은 원래 군사 용어로 전쟁에서 양측 군대가 전투를 앞둔 배치를 가리키는 말이다. 가락에 따라 진풀이를 펼쳐 가며 판을 진행하는데, 원진, 방울진, 미지기진, 오방진 등은 대부분의 지방에서 공통적으로 보이고 있으며, 이외에도 지방에 따라 특색있는 진풀이들이 있다.

5. 4. 복장

풍물놀이 연주자들은 다양한 색상의 의상을 착용한다. 불교의 고깔을 화려하게 만든 버전이 가장 일반적인 머리 장식이다. 숙련된 단체에서는 모든 연주자가 상모를 착용할 수 있는데, 상모는 연주자가 무릎을 굽혀 복잡한 패턴으로 돌리고 뒤집을 수 있는 긴 리본이 부착된 모자이다.

일부 지역 풍물 유형에서는 전통적인 마을 역할을 캐리커쳐로 분장한 잡색 (배우)들이 관객과 소통하며 돌아다니며 연주자와 관객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든다.

6. 지역별 분류

대한민국에는 지방마다 다양한 농악이 있는데, 크게 경기도, 충청도, 강원도의 '중부 농악'(웃다리 농악), 경상도의 '영남 농악', 전라도의 '호남 농악'으로 나눌 수 있다. 이 세 가지 농악은 각 지역의 특성과 그 지역 사람들의 인간성을 나타낸다고 여겨진다.

호남 농악은 산악 지역의 '좌도 농악'과 평야 지역의 '우도 농악'으로 나뉜다. 좌도 농악은 같은 리듬을 반복하는 반면, 우도 농악은 다양한 군중 무용을 선보이며 템포가 빠르게 변한다.

한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통치 범위나 중국 연변 조선족 자치주에서도 농악무가 행해지고 있지만, 기본적으로 전통 예술과는 다른, 선전적인 것이 행해지고 있다.[1]

6. 1. 국가 지정 농악 (대한민국 중요무형문화재)


  • '''진주·삼천포 농악(제11-1호)''': 영남 농악에 속하며, 흰 바지와 색깔 있는 저고리를 입고 색 띠를 두르며, 모자(상모)를 쓰고 연주한다. 개인놀이가 발달했고, 빠른 가락이 많아 힘차고 흥겹다. 판굿의 전통을 이어받아 예술적 가치가 높으며, 팔진법, 버꾸놀이, 상쇠놀이, 무동놀이 등이 뛰어나다.[4]
  • '''평택농악(제11-2호)''': 두레 농악과 걸립패 농악의 성격을 갖는다. 징과 북이 적고 소고와 법고 구별이 없다. 가락의 가림새가 분명하고 노래굿이 있다. 두레 농악의 소박함과 남사당패의 전문적인 연희를 받아들여 복합적이고 수준 높은 농악이며, 무동놀이가 특히 발달했다.[4]
  • '''이리농악(제11-3호)''': 호남우도 농악에 속하며, 상쇠의 부포놀이가 다양하고 장구의 가락과 춤이 발달했다. 소고춤 기법이나 진풀이가 많고, 느린 가락을 자주 쓰며, 가락 하나하나가 치밀하게 변형 연주되어 리듬이 다채롭다. 가락의 기교가 뛰어나며, 마을사회의 역사와 함께하며 화합과 단합을 도모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4]
  • '''강릉농악(제11-4호)''': 영동 농악의 하나로 농경생활을 흉내 내는 농사풀이가 있어 농사풀이 농악이라고도 한다. 단체적인 놀이를 위주로 하며, 농사의 고달픔을 잊고 화합과 단합을 도모하는 역할을 한다.[4]
  • '''임실필봉농악(제11-5호)''': 호남좌도 농악에 속하며, 1920년경 상쇠 박학삼을 초빙하여 그의 농악을 배우면서 발전했다. 쇠가락의 맺고 끊음이 분명하여 힘차고 씩씩하며, 단체의 화합과 단결을 중시한다.[4]
  • '''구례잔수농악(제11-6호)''': 호남 좌도 농악의 성격과 특징을 가지며 마을굿으로서의 전통을 잘 간직하고 있다. 마을 사람들 중심으로 운영되는 마을 농악이며, 1954년부터 작성된 「농악위친계칙」과 「농악취친계 계재수지부」를 통해 농악 관련 계칙과 재정 상태를 알 수 있다.[24]


풍물은 1966년 "농악십이차"(농악십이차|농악십이차한국어)라는 이름으로 처음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1980년대에는 지역적 변동을 수용하기 위해 명칭이 "농악"으로 변경되었다.[3]

6. 2. 웃다리/중부 농악

대한민국에는 지방마다 다양한 농악이 있는데, 경기도, 충청도, 강원도에 전해지는 '중부 농악'(웃다리 농악)은 해당 지역의 특성과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인간성을 나타낸다고 여겨진다.

6. 3. 영남 농악

경상도에 전해지는 '영남 농악'은 대한민국 지방마다 존재하는 다양한 농악 중 하나이다. 진주·삼천포 농악이 대표적이며, 1966년 중요무형문화재 제11호로 지정되었다.[3][4]

6. 4. 호남 농악

호남 농악은 전라도 지역에 전승되는 풍물놀이로, 크게 우도 농악과 좌도 농악으로 나뉜다.[4] 우도 농악은 이리 농악이 대표적이며, 좌도 농악은 임실 필봉 농악과 구례 잔수 농악 등이 있다.

문화재청은 중요무형문화재 제11호로 지정된 다섯 가지 농악 중 이리 농악(1985년 지정)과 임실 필봉 농악(1988년 지정)을 호남 농악으로 인정한다.[4]

호남 지역의 좌도(左道)와 우도(右道)라는 명칭은 풍수지리적 원리에 따라 결정되었다. 서울에서 남쪽을 바라볼 때, 우도는 "오른쪽", 좌도는 "왼쪽"을 나타낸다.[4] 호남 좌도 농악은 다양한 형태와 빠른 리듬 패턴이 특징이며, 호남 우도 농악은 일반적으로 느리지만 우아한 리듬 패턴을 갖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6]

산악 지역의 좌도 농악은 같은 리듬을 반복해서 치는 반면, 평지 지역의 우도 농악은 다양한 군중 무용을 선보이며 템포가 빠르게 변한다.

6. 5. 조선족 농악 (중국)

중국 연변 조선족 자치주에서는 농악무가 행해지고 있지만, 기본적으로 전통 예술과는 다른 선전적인 것이 행해지고 있다.[1]

7. 풍물패

풍물패는 농악, 풍물굿, 메구라고도 불리는 풍물놀이를 하는 모임이다.

7. 1. 구성원

풍물놀이는 치배와 잡색으로 구성된다. 치배는 꽹과리, 징, 장구, 북, 소고 등의 악기를 연주하며 춤을 추는 사람을 일컫고, 잡색은 각기 맡은 배역에 따라 춤을 추며 풍물판의 흥을 돋우거나 다양한 역할을 수행한다.

풍물대의 구성원은 악기를 치는 사람들과 부락의 상징인 공기, 영기(令旗) 한 쌍, 무동(舞童, 호남 지방에서는 꽃나비라고 부름), 대포수(大砲手), 말뚝이, 4대부(四大夫)·8대부(八大夫), 수염을 단 양반 등이다. 구성원 수는 적으면 10여 명, 많으면 20여 명이 넘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 꽹과리를 치는 사람은 상쇠라 하여 풍물패의 지휘자가 되는데, 항상 선두에 서서 악대의 진형(陣形)을 일렬종대, 원형 등 여러 형태로 바꾸고 악곡의 변화를 이끈다. 상쇠는 머리에 전립을 쓰는데, 전립 꼭대기에는 끈을 달고 그 끝에 털 뭉치를 장식한다. 이것을 앞뒤로 흔들거나 뱅뱅 돌리며 재주를 부리고 춤을 추는 것을 상쇠놀음이라고 한다. 소고수는 벗구잽이라 하여 4∼5명에서 10여 명에 이르며, 역시 전립을 쓰고 그 끝에는 긴 종이 조각을 달아 손에 든 소고를 치며 머리를 흔들면 긴 종이끈이 멋지게 원을 그리는 모습을 보여준다. 잽이들은 지방에 따라 전립을 쓰기도 하고 조화(造化)로 장식한 종이고깔을 쓰기도 한다.

구성원들의 순서는 지방마다 차이가 있으며, 일반적으로 꽹과리, 징, 장구, 북, 소고 순서로 선다. 영남 지방에서는 꽹과리, 징, 북, 장구, 소고 순서로 선다.

8. 국제화

풍물놀이는 여러 국제 사회, 특히 해외에 거주하는 한국인들에 의해 연주되고 있다.

중국에 거주하는 한민족이 연행하는 풍물놀이 관련 춤 활동 중 일부는 "조선족 농악 무"(조선족 농악 무|朝鮮族農樂舞한국어)로 알려져 있으며, 유네스코에 문화 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미국 오클랜드, 로스앤젤레스, 시카고, 뉴욕, 볼티모어를 포함한 수많은 한인 공동체에서 풍물놀이가 공연되어 왔다.[16]

미국 대학 기반 풍물놀이 그룹으로는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 로스앤젤레스, 데이비스, 샌디에이고, 산타바바라, 어바인), 미시간 대학교 앤아버, 스토니브룩 대학교, 컬럼비아 대학교, 뉴욕 대학교, 매사추세츠 공과대학교, 하버드 대학교, 예일 대학교, 시카고 대학교,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코넬 대학교, 캘리포니아 공과대학교, 일리노이 대학교 어배너-섐페인, 뉴욕 주립 대학교 버팔로, 빙햄턴 대학교, 시라큐스 대학교, 스탠포드 대학교, 토론토 대학교, 브라운 대학교, 옥스퍼드 대학교극동 연방 대학교 등이 있다.[16]

8. 1. 미국의 풍물놀이 발전

1980년대에는 한인 활동가들을 중심으로 풍물놀이 단체가 결성되기 시작했다.[17] 1985년 뉴욕에서 비나리가,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에서 소리가 결성되었다.[17] 시카고의 한인 자원 문화 센터인 일과놀이(NAKASEC의 자매 단체)는 1988년에 결성되었고, 1990년에는 공동체 조직인 우리문화지키회에서 신명패가 결성되었다.[17]

1970년대와 1980년대에는 김봉준과 같은 한국인 예술가들이 미국에 머물며 풍물 단체를 만들고 가르침을 전파했다.[17] 1990년과 1991년 미국을 방문한 이종훈 목사는 로스앤젤레스, 뉴욕, 오클랜드 등지를 방문하며 풍물놀이 교육 자료를 제공하고, 하버드 대학교에서 굿거리 그룹을 결성하는 데 참여하는 등 중요한 역할을 했다.[17]

1990년대 초,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 대학교의 한울림,[18] 일리노이 대학교의 가락마당, 매사추세츠 공과대학교의 한소리, 뉴욕 대학교의 뉴리, 시카고 대학교의 Loose Roots 등 여러 대학에서 풍물 그룹이 결성되었다.[17] 일반적인 대학 풍물 그룹은 평균 15명에서 20명의 구성원을 가지는 반면, 어떤 단체들은 10명 미만으로 유지되기도 하고 30명에서 35명의 구성원을 가지기도 한다.[17]

1990년대 이후, 한인 입양아, 활동가, 노인, 어린이, 가톨릭 신자, 30대 중후반의 사람들 등 다양한 그룹을 위한 풍물놀이 단체가 설립되면서, 풍물놀이 커뮤니티는 더욱 확장되었다.[17] 버클리, 로스앤젤레스, 데이비스, 샌디에이고, 산타바바라, 어바인), 미시간 대학교 앤아버, 스토니브룩 대학교, 컬럼비아 대학교, 뉴욕 대학교, 매사추세츠 공과대학교, 하버드 대학교, 예일 대학교, 시카고 대학교,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코넬 대학교, 캘리포니아 공과대학교, 일리노이 대학교 어배너-섐페인, 뉴욕 주립 대학교 버팔로, 빙햄턴 대학교, 시라큐스 대학교, 스탠포드 대학교, 토론토 대학교, 브라운 대학교, 옥스퍼드 대학교 등 수많은 대학에서 풍물놀이 그룹이 활동하고 있다.[16]

참조

[1] 서적 Bands, Songs and Shamanistic Rituals: Folk Music in Korean Society. Royal Asiatic Society 1989
[2] 웹사이트 'Nongak' added to UNESCO list http://www.korea.net[...] Korea.net 2014-11-28
[3] Harvnb
[4] Harvnb
[5] Harvnb
[6] Harvnb
[7] Harvnb
[8] Harvnb
[9] Harvnb
[10] Harvnb
[11] Harvnb
[12] Harvnb
[13] Harvnb
[14] 논문 "In Pungmulgut, functions and aesthetic affects of the dance-Based on the actual of Pilbongnongak-." http://www.riss.kr/s[...] 2011
[15] 웹사이트 Jinpuri http://folkency.nfm.[...] 2019-03-15
[16] 웹사이트 Pungmul in the US http://uspungmul.wor[...] US Pungmul 2011-05-23
[17] 논문 The Roots and Routes of Pungmul in the United States 2001
[18] 웹인용 Hanoolim: Korean Cultural Awareness Group at UCLA https://community.uc[...]
[19] 서적 농악 민족문화문고간행회 1986-09-10
[20] 서적 농악 열화당 1986-12-05
[21] 서적 농악 열화당 1986-12-05
[22] 서적 농악명인 박남식 전승의 문굿과 도둑잽이굿 복원과 재현 도서출판 드림 2011-12-16
[23] 서적 농악 열화당 1986-12-05
[24] 웹사이트 문화재청 www.cha.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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