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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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전투는 군대 간의 물리력 충돌을 통해 상대방을 굴복시키거나 목표를 달성하려는 행위이다. 고대부터 연구가 진행되었으며, 나폴레옹 시기에 근대적인 전투 이론이 성립되었다. 전투는 지휘관의 능력, 지형, 무기, 사기 등 다양한 요소에 의해 영향을 받으며, 20세기 이후에는 수송 및 기술 발달로 인해 전장의 규모와 기간이 확대되었다. 전투는 육전, 해전, 공중전으로 분류되며, 전술적 특징에 따라 결전, 조우전, 소모전 등으로 구분된다. 현대 사회에서 전투는 개인과 정치에 큰 영향을 미치며, 전자전과 같은 비군사적 형태의 경쟁도 전투로 간주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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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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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정보 | |
기본 정보 | |
유형 | 군사적 교전 |
군사학 분야 | 전쟁과 군사 작전 |
전투의 특징 | |
참여자 | 군대 무장 단체 |
규모 | 소규모 접전부터 대규모 전쟁까지 다양 |
목적 | 전술적 목표 달성 전략적 목표 달성 특정 지역 장악 적군 섬멸 |
전투의 요소 | |
지형 | 평야 산악 도시 해상 |
날씨 | 맑음 비 눈 안개 |
시간 | 주간 야간 |
무기 | 냉병기 화기 폭탄 미사일 사이버 무기 |
병력 | 보병 기병 포병 기갑부대 공군 해군 |
전투의 단계 | |
준비 단계 | 병력 배치 정보 수집 작전 계획 수립 |
개전 단계 | 공격 개시 방어 태세 전환 |
교전 단계 | 직접적인 전투 행위 |
종결 단계 | 승리 패배 철수 협상 |
전투의 결과 | |
전술적 승리 또는 패배 | 특정 전투에서의 승패 |
전략적 영향 | 전쟁 전체의 흐름에 미치는 영향 |
인적 피해 | 사망자 부상자 포로 |
물적 피해 | 파괴된 건물 손실된 장비 환경 파괴 |
전투의 분류 | |
지상전 | 육지에서 벌어지는 전투 |
해전 | 해상에서 벌어지는 전투 |
공중전 | 공중에서 벌어지는 전투 |
시가전 | 도시 지역에서 벌어지는 전투 |
특수전 | 특수 부대에 의해 수행되는 전투 |
사이버전 | 사이버 공간에서 벌어지는 전투 |
관련 개념 | |
군사 작전 | 전투를 포함한 군사 활동 |
전쟁 | 여러 전투로 이루어진 무력 충돌 |
전략 | 전쟁 또는 전투 목표 달성을 위한 계획 |
전술 | 전투를 수행하는 구체적인 방법 |
군사 기술 | 전투에 사용되는 장비 및 기술 |
기타 정보 | |
어원 | 프랑스어 'bataille'에서 유래 라틴어 'battualia'에서 유래 |
2. 역사적 배경
영국의 전쟁사가 존 키건은 전쟁이란 "상대방의 물리력을 분쇄하고자 하는 정신에 이끌린 군대 간에 발생하는 사건"이라 정의하였다.
전투 행위의 이상적 목표는 상대를 굴복시켜 승리하는 것이나, 전략적 필요성 등의 사정으로 인해 절충적인 목표를 위해 전투를 벌일 수도 있다. 교전 상대의 항복을 받아 내거나, 도주하게 하거나, 더 이상 전투 행위를 할 수 없도록 무력화했을 때 그 전투를 승리했다고 할 수 있다. 전투는 대개 승리를 위한 값비싼 희생을 치르고 상대를 굴복시킴으로써 종결되지만, 종종 어느 한 편도 상대를 굴복시킬 수 없는 교착 상태에 빠지기도 한다. 일방이 전투의 종결을 원치 않는 경우 무장 봉기 상황이 되기도 한다.
전투(battle)는 1297년에 처음으로 증명된 고대 프랑스어(Old French) bataille프랑스어에서 유래한 차용어이다. 이 단어는 "군인과 검투사의 싸움과 검술 연습"을 의미하는 후기 라틴어(Late Latin) battualiala에서 유래하며, 다시 게르만어에서 온 후기 라틴어(Late Latin) battuerela "때리다"에서 유래한다. 영어 단어 배터리(battery)도 중세 영어(Middle English) batrienm를 통해 같은 어원에서 파생되었다.[4][5]
2. 1. 고대 및 중세 시대
전쟁사에서 전투를 구성하는 요소, 상호 관계, 형태, 구조, 원리에 관한 최초의 연구는 고대 중국의 손자(孫武) (기원전 535년 - ?)가 진행했지만, 그 이후에는 연구가 발전하지 않았다. 유럽에서도 나폴레옹 전쟁 이전에는 베게티우스(4세기경), 모리키우스(539 - 602), 레오(필요한 정보 추가), 모리스 드 사크스, 프리드리히 2세 (프로이센 왕) 등의 선구적인 연구가 있었다. 그러나, 근대적인 전투 이론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1769 - 1821) 시대에 들어서 성립되었다. 나폴레옹은 군사 이론 논문을 저술하지 않았지만, 사기(士氣)가 물적 요소보다 세 배의 효과를 가지며, 기동적인 전력 운용의 중요성을 지적하는 등 연구 성과를 남겼다. 나폴레옹의 참모였던 앙투안-앙리 조미니는 나폴레옹의 군사 사상을 이론화하여 전투의 원칙을 확립했다. 그것은 주력을 결정적인 지점, 즉 적의 측면이나 후방에 집중시키는 보편적인 원칙이다. 칼 폰 클라우제비츠(1780 - 1831)는 조미니와는 다른 접근 방식으로 나폴레옹의 군사 사상을 해석하고, 독자적인 방식으로 전투의 법칙, 전투력의 요소, 공격과 방어 행동을 체계화했다. 클라우제비츠의 전투 이론은 적의 섬멸을 목적으로 하는 폭력적인 행동으로 정의되며, 전투력의 우열에 따라 승패가 결정되는 것으로 공식화된다.2. 2. 근대
20세기 이전의 전투는 대부분 하루 안에 결판이 났다. 공성전과 같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면 게티즈버그 전투나 라이프치히 전투와 같이 큰 규모의 전투도 3일이면 충분했다. 이는 전장에 군대를 투입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에 이르러 수송의 발달과 참호전의 등장은 전투 기간을 몇 주 또는 수 개월까지 늘렸다. 그러나, 길고 긴 지구전이라 할지라도 개인 병사들에게는 임무 교대를 통해 숨 돌릴 틈을 주었다.본래 분대나 소대 같은 작은 단위의 군대 국지전을 뜻하던 전투의 개념은 전쟁의 역사를 거치면서 라이프치히 전투와 같이 수백, 수천의 군대가 하나의 전투에 투입되거나, 쿠르스크 전투와 같이 하나의 전투를 위해 입체적인 작전이 수립되는 등 대규모화되었다. 전투원이 지닌 무기의 사거리를 벗어나지 못했던 전장의 크기 역시 영국 본토 항공전이나 대서양 전투와 같이 거대한 지리적 공간으로 확대되었다.
현대의 전투에는 전투원 이외에도 의료, 수송, 화기 지원 등 다양한 구성원들이 참여한다. 전투의 승패는 여러 요인에 따라 결정되며, 전투원과 장비의 수와 질, 지휘관의 능력, 지형 등이 가장 중요한 요인들이다. 무기와 갑옷은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으며, 많은 경우 군대는 상대보다 더 발전된 무기를 통해 승리를 거두었다. 극단적인 예로 옴두르만 전투에서 전통적인 무기를 사용한 수단의 대규모 마흐디스트 군대는 맥심 기관총과 포병으로 무장한 영국-이집트군에 의해 궤멸되었다.
때로는 비정통적인 방식으로 사용된 단순한 무기가 유리한 것으로 판명되기도 했다. 스위스 창병들은 전통적으로 방어적인 무기를 공격적인 무기로 전환하는 능력을 통해 많은 승리를 거두었다. 19세기 초 줄루족은 새로운 유형의 창인 이클와를 채택함으로써 부분적으로 라이벌과의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무기가 열세인 군대도 때때로 승리했는데,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이 그러한 예이다. 알레시아 전투에서 로마군은 수적으로 열세였지만 우수한 훈련 덕분에 승리했다.
전투는 지형에 의해서도 결정될 수 있다. 고지를 점령하는 것은 수많은 전투에서 주요 전술이었다. 고지를 점령한 군대는 적군이 올라오도록 강제하여 적군을 지치게 한다. 울창한 초목이 있는 정글과 숲 지역은 열세인 군대에게 유리한 전력 증폭제 역할을 한다. 항공기의 발명으로 지형의 중요성은 현대전에서 감소했을 수 있지만, 특히 게릴라전에서 위장을 위해 지형은 여전히 중요하다.
한니발, 율리우스 카이사르, 칼리드 이븐 알왈리드, 수부타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와 같은 숙련된 장군과 지휘관은 전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지휘관의 명령을 신뢰하고 승리를 확신하는 군대는 항상 자신의 모든 행동을 의심하는 군대보다 사기가 높다. 영국 해군은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넬슨 경 제독의 명성 덕분에 승리했다.
전투를 구성하는 요소, 상호 관계, 형태, 구조, 원리에 관한 최초의 연구는 고대 중국의 손자(孫武)(기원전 535년 - ?)의 연구 업적을 들 수 있지만, 그 이후에는 연구가 발전하지 않았다. 유럽에서도 나폴레옹 전쟁 이전에는 베게티우스(4세기경), 모리키우스(539 - 602), 레오(필요한 정보 추가), 모리스 드 사크스, 프리드리히 2세 (프로이센 왕) 등의 선구적인 연구가 있었다. 하지만, 근대적인 전투 이론은 나폴레옹 시대에 들어서부터 성립되었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1769 - 1821)는 군사 이론에 관한 논문을 저술하지 않았지만, 사기(士氣)가 물적 요소에 비해 세 배의 효과를 가지며, 기동적으로 전력을 운용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나폴레옹의 참모였던 앙투안-앙리 조미니는 나폴레옹의 군사 사상을 이론화하여 전투를 규정하는 전투의 원칙을 확립했다. 그것은 주력을 어떤 결정적인 지점, 즉 적의 측면이나 후방에 집중시키는 보편적인 원칙이다. 칼 폰 클라우제비츠(1780 - 1831)는 나폴레옹 전쟁에 참여하여 조미니와는 다른 접근 방식으로 나폴레옹의 군사 사상을 해석하고, 독자적인 접근 방식으로 전투의 법칙, 전투력의 요소, 공격과 방어의 행동을 체계화했다. 클라우제비츠의 전투 이론은 적의 섬멸을 목적으로 하는 폭력적인 행동에 의해 정의되며, 전투력의 우열에 따라 승패가 결정되는 것으로 공식화된다.
조미니와 클라우제비츠의 영향을 받은 연구자들은 이후 전투 연구를 이론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한 연구 성과를 남겼다. 미국에서는 데니스 하트 마한(1802-1871)이 조미니의 영향 아래 전투에서 의존해야 할 원칙을 제시했고, 독일에서는 헬무트 카를 베른하르트 폰 몰트케가 훈령전술과 포위를 중시한 기동 이론을 제기했다. 프랑스에서는 샤를 알단 드 피그에 의해 전투에서의 사기라는 심리적 요소를 규명하여 전투 이론 연구에 기여했다. 해상 전투 연구자인 알프레드 세이어 마한(1840-1914)은 조미니와 그의 아버지 데니스 하트 마한의 영향 아래 육상 전투 연구를 해상 전투에 응용하는 데 성과를 거두었고, 전투의 일반 이론이 지리적 환경의 변화에도 적응 가능함을 보였다. 몰트케의 연구를 계승한 알프레트 폰 슐리펜(1833-1913)은 전투에서의 섬멸 원리를 발전시켜 포위 섬멸 교리를 확립했고, 그 연구 성과는 슐리펜 계획으로 결실을 맺었다. 콜마르 폰 데어 골츠는 몰트케와 슐리펜의 영향 아래 그때까지 독일에서의 전투 연구를 종합하여 프랑스와 영국에 소개하는 역할을 했다. 페르디낭 포슈는 드 피그의 연구에 영향을 받으면서도 독일의 섬멸 원리를 수용했고, 특히 사기와 같은 정신적 요소를 전투 이론에서 위치시켰다. 항공 전투에 전투 이론을 처음으로 응용한 줄리오 두에는 육상이나 해상과는 다른 지리적, 기술적 조건하에서 이루어지는 전투가 이론적으로 어떤 작전을 가능하게 하는지를 명확히 했다. 존 프레데릭 찰스 풀러는 현대 전투 이론을 연구하기 위한 과학적인 방법론을 준비하고, 전투의 원리를 현대 전투의 형태에 따라 발전시켰다. 프레데릭 랜체스터(1868-1946)는 전투의 수학적 모델화에 착수하여 특히 전투력과 전투 결과의 인과적인 관계를 정식화했다.
2. 3. 현대
현대의 전투에는 전투원뿐만 아니라 의료, 수송, 화기 지원 등 다양한 구성원들이 참여한다. 20세기 이전의 전투는 대부분 하루 안에 끝났지만,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참호전과 수송의 발달로 전투 기간이 몇 주 또는 몇 달까지 늘어났다. 쿠르스크 전투처럼 대규모 입체 작전이 수립되기도 하고, 영국 본토 항공전이나 대서양 전투와 같이 전장의 범위가 매우 넓어지기도 했다.[1]3. 전투 이론
전투 이론은 고대 중국 손자(孫武)의 연구에서 시작되었지만, 그 이후 큰 발전은 없었다. 유럽에서도 나폴레옹 전쟁 이전에는 베게티우스, 모리키우스, 레오 6세, 모리스 드 삭스, 프리드리히 2세 (프로이센 왕) 등의 선구적인 연구가 있었으나, 근대적인 전투 이론은 나폴레옹 시대에 들어서야 성립되었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군사 이론 논문을 저술하지는 않았지만, 사기(士氣)가 물적 요소보다 세 배의 효과를 가지며, 기동적인 전력 운용의 중요성을 강조했다.[6]
앙투안-앙리 조미니는 나폴레옹의 군사 사상을 이론화하여 전투의 원칙을 확립했는데, 이는 주력을 결정적인 지점(적의 측면이나 후방)에 집중시키는 보편적인 원칙이다. 칼 폰 클라우제비츠는 조미니와는 다른 방식으로 나폴레옹의 군사 사상을 해석하고, 독자적인 방식으로 전투의 법칙, 전투력의 요소, 공격과 방어의 행동을 체계화했다. 클라우제비츠는 적의 섬멸을 목적으로 하는 폭력적인 행동으로 전투를 정의하며, 전투력의 우열에 따라 승패가 결정된다고 보았다.
조미니와 클라우제비츠의 영향을 받은 연구자들은 이후 전투 연구를 이론적으로 발전시켰다. 미국에서는 데니스 하트 마한이 조미니의 영향을 받아 전투에서 의존해야 할 원칙을 제시했고, 독일에서는 헬무트 카를 베른하르트 폰 몰트케가 훈령전술과 포위를 중시한 기동 이론을 제기했다. 프랑스에서는 샤를 알단 드 피그가 전투에서의 사기라는 심리적 요소를 규명하여 전투 이론 연구에 기여했다.
알프레드 세이어 마한은 데니스 하트 마한의 영향으로 육상 전투 연구를 해상 전투에 응용하여, 전투의 일반 이론이 지리적 환경 변화에도 적응 가능함을 보였다. 알프레트 폰 슐리펜은 전투에서의 섬멸 원리를 발전시켜 포위 섬멸 교리를 확립했고, 이는 슐리펜 계획으로 이어졌다. 콜마르 폰 데어 골츠는 독일에서의 전투 연구를 종합하여 프랑스와 영국에 소개했다. 페르디낭 포슈는 드 피그의 연구에 영향을 받으면서도 독일의 섬멸 원리를 수용했고, 사기를 전투 이론에 포함시켰다.
줄리오 두에는 항공 전투에 전투 이론을 처음으로 응용하여, 육상이나 해상과는 다른 지리적, 기술적 조건에서 이루어지는 전투가 이론적으로 어떤 작전을 가능하게 하는지를 명확히 했다. 존 프레데릭 찰스 풀러는 현대 전투 이론 연구를 위한 과학적인 방법론을 준비하고, 전투의 원리를 현대 전투의 형태에 따라 발전시켰다. 프레데릭 랜체스터는 전투의 수학적 모델화에 착수하여 전투력과 전투 결과의 인과 관계를 공식화했다.
3. 1. 전투의 개념
영국의 전쟁사가 존 키건은 전쟁이란 "상대방의 물리력을 분쇄하고자 하는 정신에 이끌린 군대 간에 발생하는 사건"이라 정의하였다.전투 행위의 이상적 목표는 상대를 굴복시키고 승리하는 것이나, 전략적 필요성 등의 사정으로 인해 절충적인 목표를 위해 전투를 벌일 수도 있다. 교전 상대의 항복을 받아 내거나, 도주하게 하거나, 또는 더 이상 전투 행위를 할 수 없도록 무력화 시켰을 때 그 전투를 승리했다고 할 수 있다. 전투는 대개 승리를 위한 값비싼 희생을 치르고 상대를 굴복시킴으로써 종결된다. 그러나 종종 어느 한 편도 상대를 굴복시킬 수 없는 교착 상태에 빠지기도 한다. 일방이 전투의 종결을 원치 않는 경우 종종 무장 봉기의 상황이 되기도 한다.[6]
20세기 이전의 전투들은 대부분 하루 안에 결판이 났다. 공성전과 같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면 게티즈버그 전투나 라이프치히 전투와 같은 대규모 전투도 3일에 불과하였다. 이는 전장에 군대를 투입하는데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에 이르러 수송의 발달과 참호전의 등장은 전투의 기간을 몇 주 또는 수 개월까지 연장시켰다.[1] 그러나, 길고 긴 지구전이라 할지라도 개인 병사들에게는 임무 교대를 통해 숨돌릴 틈을 주었다.
본래 분대나 소대 같은 적은 단위의 군대 국지전을 뜻하던 전투의 개념은 전쟁의 역사를 거치면서 라이프치히 전투와 같이 수백 수천의 군대가 하나의 전투에 투입되는가 하면 쿠르스크 전투와 같이 하나의 전투를 위해 입체적인 작전이 수립되기도 하는 등 대규모화되었다. 전투원이 지닌 무기의 사거리를 벗어나지 못했던 전장의 크기 역시 영국 본토 항공전이나 대서양 전투와 같이 거대한 지리적 공간으로 확대되었다.
전투에 참여한 구성원 역시 변화하였는데 현대의 전투에는 전투원 이외에도 의료, 수송, 화기지원 등 다양한 구성원들이 참여하고 있다.
군사과학에서 개념으로서 전투의 결정적인 특징은 군대의 조직, 운용 및 기술의 변화와 함께 변해왔다. 존 키건은 전투의 이상적인 정의를 "두 개의 군대 사이에서 발생하는 것으로, 한쪽 또는 양쪽의 도덕적, 물리적 붕괴로 이어지는 것"이라고 제시했지만, 전투의 기원과 결과를 이렇게 간결하게 요약하기는 어렵다.[6] 20세기와 21세기의 전투는 군사 작전에서 군대의 대규모 부대 간의 전투로 정의되며, 군사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사용된다.[7] 전투 기간이 1주일 이상인 경우, 종종 작전 계획상의 이유로 작전이라고 불린다. 전투는 계획될 수도 있고, 조우전으로 발생할 수도 있으며, 한쪽이 다른 쪽이 전투에서 철수할 수 없는 경우 한쪽에 의해 강제될 수도 있다.
전투는 항상 군사력을 사용하여 임무 목표를 달성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8] 전투에서 승리는 한쪽이 다른 쪽에 임무를 포기하고 항복하게 하거나, 다른 쪽을 격파하거나, 또는 다른 쪽을 섬멸하여 사망 또는 포획으로 이어지는 경우 달성된다.
전투 이론에서 최초로 전투의 본질을 철학적으로 정의한 클라우제비츠는 전쟁과의 관계에서 전투의 성격을 파악하고 있다. 클라우제비츠는 전쟁은 정치의 연장선상에 위치하며 정책의 도구로서 특징지어진다고 논하며, 이를 현실의 전쟁이라고 부른다. 동시에 클라우제비츠는 정책의 도구로서 전쟁을 보지 않고, 오히려 정치에 대해 고립적인 행위로서 전쟁을 볼 경우, 전쟁 본래의 성격이 무제한의 폭력에 있음을 밝히고 절대전쟁으로 정식화했다. 그의 전투의 기본적인 개념은 절대전쟁과 마찬가지로 본래의 성격이 적의 섬멸에 다름 아님을 논하고 있다. “전투는 곧 투쟁이며, 이 투쟁의 목적은 적의 격멸 또는 정복이기 때문”이며, 이것이 전투의 가장 간결한 개념이라고 정의했다. 그에게 있어 전쟁에서의 모든 전략적 행위는 전투에 이르는 것이며, 개별 전투는 그 규모를 불문하고 전쟁 전체의 목적에 종속하는 목표를 위해 행해진다.
3. 2. 전투의 법칙
군사학에서 전투는 시대에 따라 군대 조직, 운용 방식, 기술의 발전에 맞춰 변화해왔다. 존 키건은 전투를 "두 군대 사이에서 발생하여 한쪽 또는 양쪽의 도덕적, 물리적 붕괴로 이어지는 것"으로 정의했지만, 전투의 기원과 결과를 간결하게 설명하기는 어렵다.[6] 현대의 전투는 군사 작전에서 대규모 부대 간의 충돌로, 군사적 목표 달성을 위해 벌어진다.[7] 전투가 일주일 이상 지속되면 작전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전투는 계획될 수도, 우발적으로 발생할 수도 있으며, 한쪽이 철수할 수 없는 상황에서 강요될 수도 있다.전투의 목적은 군사력을 사용하여 임무 목표를 달성하는 것이다.[8] 한쪽이 임무를 포기하고 항복하거나, 격파되어 후퇴하거나, 섬멸되어 사망 또는 포로로 이어질 때 전투에서 승리한다. 하지만 패배한 쪽에 유리한 피르적 승리로 끝날 수도 있고, 어느 쪽도 승리하지 못하는 교착 상태가 될 수도 있다. 재래전을 피하고 직접적인 전투를 원하지 않는 갈등은 종종 저항의 형태로 나타난다.
19세기까지 대부분의 전투는 짧게 끝났으며, 많은 전투가 하루 만에 끝났다. (프레스턴 전투, 민족 전투, 게티즈버그 전투는 예외적으로 3일 동안 지속되었다.) 이는 야전에서 군대를 보급하고 야간 작전을 수행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포위 공격은 전투를 장기화하는 일반적인 방법이었다. 20세기 제1차 세계 대전 중 참호전과 운송 수단의 발달로 전투 기간이 수일 또는 수주로 연장되었다.[1] 이로 인해 전투 피로를 막기 위해 부대 순환이 필요했으며, 부대는 한 달 이상 작전 지역에 머무르지 않는 것이 좋았다.

군사 역사에서 "전투"라는 용어는 다양한 규모의 전투를 지칭할 때 오용되기도 했다. 특히 수십만 명의 병력이 참여하는 전략군(라이프치히 전투, 우한 전투)의 경우 더욱 그렇다. 전투가 벌어지는 공간은 전투원의 무기 사정거리에 따라 달라진다. 포병과 항공기 등장 이전에는 양측이 서로 시야 또는 도달 범위 안에 있어야 전투가 가능했다. 현대전에서는 후방 지원 부대가 포함되면서 전장의 깊이가 증가했다. 보급, 포병, 의료 인력 등이 최전방 전투 부대보다 많아지기도 한다.
전투는 수많은 개별 전투, 스커미쉬, 소규모 교전으로 구성되며, 전투원은 전투의 일부분만 경험한다. 보병에게는 소규모 공격과 대규모 공세의 차이가 크지 않을 수 있으며, 전투의 결과를 예측하기도 어렵다. 1916년 7월 1일 솜 전투에서 참호를 넘은 영국 보병 중 전투가 5개월 동안 지속될 것이라고 예상한 사람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워털루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압도적으로 격파한 연합군 보병 중 일부는 다음 날 와브르 전투에서 다시 싸워야 했다.
전투의 승패는 전투원과 장비의 수와 질, 지휘관의 능력, 지형 등 여러 요인에 의해 결정된다. 무기와 갑옷은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으며, 발전된 무기를 가진 군대가 승리하는 경우가 많았다. 옴두르만 전투에서 맥심 기관총과 포병으로 무장한 영국-이집트군은 전통적인 무기를 사용한 수단의 마흐디스트 군대를 궤멸시켰다.
때로는 비정통적인 방식으로 사용된 단순한 무기가 유리하게 작용하기도 했다. 스위스 창병은 방어용 무기를 공격용으로 전환하여 많은 승리를 거두었다. 19세기 초 줄루족은 새로운 창인 이클와를 채택하여 전투에서 승리했다. 무기가 열세인 군대도 승리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이 그 예이다. 훈련된 군대는 종종 더 중요하며, 알레시아 전투에서 로마군은 수적으로 열세였지만 우수한 훈련 덕분에 승리했다.
지형도 전투에 영향을 미친다. 고지를 점령하는 것은 많은 전투에서 중요한 전술이었다. 고지를 점령한 군대는 적군이 올라오도록 강제하여 지치게 할 수 있다. 울창한 초목이 있는 정글과 숲은 열세인 군대에게 유리하다. 항공기의 발명으로 지형의 중요성은 감소했지만, 게릴라전에서 위장을 위해 여전히 중요하다.
한니발, 율리우스 카이사르, 칼리드 이븐 알왈리드, 수부타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와 같은 유능한 장군과 지휘관은 중요한 역할을 했다. 지휘관의 명령을 신뢰하고 승리를 확신하는 군대는 사기가 높다. 영국 해군은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넬슨 경 제독의 명성 덕분에 승리했다.

항공기는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처음으로 대규모로 사용된 이후 전쟁에서 역할이 커졌다. 처음에는 정찰과 소규모 폭격에 주로 사용되었지만, 스페인 내전과 제2차 세계 대전을 거치며 중요성이 커졌다. 항공기는 폭격기와 전투기로 전문화되었다. 폭격기는 지상 목표물이나 함선을 폭격하고, 전투기는 적기를 요격하거나 폭격기를 호위한다. 영국 본토 항공전과 미드웨이 해전은 이 시대의 주목할 만한 공중전이다. 헬리콥터는 베트남 전쟁에서 처음으로 대규모로 사용되었고, 오늘날에도 지상군 수송과 증강에 널리 사용된다. 현대 전투기는 폭격 능력이 강화되어 지상 목표물 폭격에 주로 사용되며, 요격기보다 대공포가 적기 방어에 더 많이 사용된다. 항공기는 군과 해군 모두의 주요 도구로, 헬리콥터를 이용한 병력 수송 및 지원, 공중 폭격을 통한 선제 공격, 항공모함을 중심으로 하는 현대 해군 등에서 그 중요성을 확인할 수 있다.
클라우제비츠는 전투에서 승패가 전력의 우열에 의해 결정된다는 수의 법칙을 제시했다. 그는 부대 규모가 승리를 결정하며, 수적 우세가 유일한 승리 요인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부대의 성질에도 주목하여 이 법칙이 모든 전투에 적용 가능하다고 보았다. 클라우제비츠의 이론은 전투 이론으로 정리되었고, 부대의 전투 능력은 양군 각각의 수적 전력과 전력의 성질, 그리고 전투에 영향을 미치는 환경 변수의 곱으로 구해지며, 양군 부대의 전투 능력을 나눈 값이 전과로 구해진다는 것을 밝혔다. 이를 수식으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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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은 부대의 병력, V는 전투에 영향을 미치는 환경 변수, Q는 부대의 특성, r은 적군, b는 청군, O는 전투 결과이며, 전투 결과가 양군의 전투 능력에 의해 정량적으로 결정됨을 알 수 있다. 유사한 법칙화는 랜체스터(Lanchester)의 랜체스터의 법칙이나 오시포프(Osipov)의 오시포프 방정식으로 정리되어 있다.
3. 3. 마찰 (클라우제비츠)
클라우제비츠는 실제 전투가 이론상의 전투와는 전혀 다른 성격을 갖는 요소로서 마찰 (클라우제비츠)을 고안했다. 마찰이란 지형, 기후 등의 자연환경이나 적의 불규칙적인 행동, 우발적인 사건 등을 포함하는 장애를 가리킨다. 실제로 계획을 실행에 옮기면 예측 불가능한 상황이 연이어 발생하여 계획이 의존했던 전제가 무너지는 경우가 있다. 전투에서 마찰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지만, 그중 하나에 정보적 요소가 있다. 전투에서는 적 부대가 일반적으로 위장·은폐에 의해 자신의 존재를 가능한 한 알리지 않으려 하기 때문에, 적 부대의 정보를 얻는 것은 기본적으로 쉽지 않다. 단편적인 정보를 종합적으로 분석할 뿐만 아니라, 변화하는 상황에 따라 정보를 갱신하는 것도 필요하다. 그러나 상황의 전부를 완벽하게 파악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며, 지휘관은 항상 불완전한 정보에 의존하여 결단을 내릴 필요성이 있다. 이 정보의 불확실성은 마찰 중에서 특히 전장의 안개라고 명명되어 있으며, 전장에서의 의사결정의 어려움을 보여준다.[1]3. 4. 전투 행동
영국의 전쟁사가 존 키건은 전쟁이란 "상대방의 물리력을 분쇄하고자 하는 정신에 이끌린 군대 간에 발생하는 사건"이라 정의하였다.전투 행위의 이상적 목표는 상대를 굴복시키고 승리하는 것이나, 전략적 필요성 등의 사정으로 인해 절충적인 목표를 위해 전투를 벌일 수도 있다. 교전 상대의 항복을 받아 내거나, 도주하게 하거나, 또는 더 이상 전투 행위를 할 수 없도록 무력화 시켰을 때 그 전투를 승리했다고 할 수 있다. 전투는 대개 승리를 위한 값비싼 희생을 치르고 상대를 굴복시킴으로써 종결된다. 그러나 종종 어느 한 편도 상대를 굴복시킬 수 없는 교착 상태에 빠지기도 한다. 일방이 전투의 종결을 원치 않는 경우 종종 무장 봉기의 상황이 되기도 한다.[6]
20세기 이전의 전투들은 대부분 하루 안에 결판이 났다. 공성전과 같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면 게티즈버그 전투나 라이프치히 전투와 같은 대규모 전투도 3일에 불과하였다. 이는 전장에 군대를 투입하는데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에 이르러 수송의 발달과 참호전의 등장은 전투의 기간을 몇 주 또는 수 개월까지 연장시켰다.[1] 그러나, 길고 긴 지구전이라 할지라도 개인 병사들에게는 임무 교대를 통해 숨돌릴 틈을 주었다.
본래 분대나 소대 같은 적은 단위의 군대 국지전을 뜻하던 전투의 개념은 전쟁의 역사를 거치면서 라이프치히 전투와 같이 수백 수천의 군대가 하나의 전투에 투입되는가 하면 쿠르스크 전투와 같이 하나의 전투를 위해 입체적인 작전이 수립되기도 하는 등 대규모화되었다. 전투원이 지닌 무기의 사거리를 벗어나지 못했던 전장의 크기 역시 영국 본토 항공전이나 대서양 전투와 같이 거대한 지리적 공간으로 확대되었다.
전투에 참여한 구성원 역시 변화하였는데 현대의 전투에는 전투원 이외에도 의료, 수송, 화기지원 등 다양한 구성원들이 참여하고 있다.
군사과학에서 개념으로서의 전투의 결정적인 특징은 군대의 조직, 운용 및 기술의 변화와 함께 변해왔다. 존 키건은 전투의 이상적인 정의를 "두 개의 군대 사이에서 발생하는 것으로, 한쪽 또는 양쪽의 도덕적, 물리적 붕괴로 이어지는 것"이라고 제시했지만, 전투의 기원과 결과를 이렇게 간결하게 요약하기는 어렵다.[6] 20세기와 21세기의 전투는 군사 작전에서 군대의 대규모 부대 간의 전투로 정의되며, 군사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사용된다.[7] 전투 기간이 1주일 이상인 경우, 종종 작전 계획상의 이유로 작전이라고 불린다. 전투는 계획될 수도 있고, 조우전으로 발생할 수도 있으며, 한쪽이 다른 쪽이 전투에서 철수할 수 없는 경우 한쪽에 의해 강제될 수도 있다.
전투는 항상 군사력을 사용하여 임무 목표를 달성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8] 전투에서 승리는 한쪽이 다른 쪽에 임무를 포기하고 항복하게 하거나, 다른 쪽을 격파(후퇴하게 하거나 추가적인 전투 작전을 수행할 수 없게 만드는 것)하거나, 또는 다른 쪽을 섬멸하여 사망 또는 포획으로 이어지는 경우 달성된다. 전투는 결국 패배한 쪽에 유리한 피로스의 승리로 끝날 수도 있다. 전투에서 결론이 나지 않으면 교착 상태가 될 수 있다. 한쪽이 재래전을 사용하여 직접 전투로 결정을 내리고자 하지 않는 갈등은 종종 저항이 된다.
19세기까지 대부분의 전투는 기간이 짧았으며, 많은 전투가 하루의 일부에 불과했다. (프레스턴 전투, 민족 전투 (1813), 게티즈버그 전투는 3일 동안 지속되었다는 점에서 예외적이었다.) 이는 주로 야전에서 군대를 보급하거나 야간 작전을 수행하는 것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전투를 장기화하는 수단은 일반적으로 포위 공격이었다. 20세기 제1차 세계 대전 중 포위 공격과 유사한 성격을 가진 참호전의 발전과 운송의 개선은 전투 기간을 수일 또는 수주로 연장시켰다.[1] 이로 인해 전투 피로를 방지하기 위해 부대 순환이 필요하게 되었으며, 부대는 가능하면 한 달 이상 작전 지역에 머무르지 않는 것이 좋았다.
군사 역사에서 "전투"라는 용어의 사용은 거의 모든 규모의 전투를 언급할 때 오용으로 이어졌으며, 특히 수십만 명의 병력이 한 번에 하나의 전투(라이프치히 전투) 또는 작전(우한 전투)에 참여하는 전략군에 의해 그러했다. 전투가 차지하는 공간은 전투원의 무기 사정거리에 따라 달라진다. 이러한 광의의 "전투"는 기간이 길고 영국 본토 항공전이나 대서양 전투의 경우처럼 광대한 지역에 걸쳐 일어날 수 있다. 포병과 항공기가 등장하기 전까지 전투는 양측이 서로 시야 안에, 아니면 도달 범위 안에 있는 상태로 벌어졌다. 현대전에서는 후방 지역의 지원 부대가 포함됨에 따라 전장의 깊이도 증가했다. 보급, 포병, 의료 인력 등은 종종 최전방 전투 부대보다 수적으로 많다.
전투는 수많은 개별 전투, 스커미시 및 소규모 교전으로 구성되며, 전투원은 일반적으로 전투의 일부만 경험한다. 보병에게는 소규모 공격의 일부인 전투와 대규모 공세 간에 거의 차이가 없을 수 있으며, 전투의 미래 경과를 예상할 가능성도 낮다. 1916년 7월 1일 솜 전투에서 참호를 넘은 영국 보병 중 몇 명이나 전투가 5개월 동안 지속될 것이라고 예상했겠는가? 워털루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압도적으로 패배시킨 연합군 보병 중 일부는 다음 날(와브르 전투) 다시 싸워야 할 것으로 예상했다.
전투 방식에는 명백한 차이가 있다. 초기 전투는 아마도 경쟁하는 사냥 집단 간의 무질서한 군중 간의 싸움이었을 것이다. 기원전 15세기의 최초로 확실하게 기록된 전투인 메기드 전투에서 양측 군대는 조직적이고 훈련을 받았지만, 로마 제국의 많은 전쟁 동안 야만인들은 여전히 폭도 전술을 사용했다.
계몽 시대가 시작되면서 군대는 고도로 훈련된 대열로 싸우기 시작했다. 각 군인은 장교의 명령을 따르고 개인이 아닌 부대 단위로 싸웠다. 군대는 연대, 대대, 중대, 소대로 나뉘었다. 이러한 군대는 행진하여 대열을 정비하고 부대별로 사격했다.
반면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대열을 지어 싸우지 않고 게릴라 전술을 사용했다. 미국 식민지 주민과 유럽군은 미국 남북 전쟁까지 훈련된 대열을 사용했다.
1850년대부터 제1차 세계 대전까지 참호전으로 알려진 새로운 전투 양식이 등장했으며, 이는 전술적 무선 통신으로 이어졌다. 1915년에는 화학전도 시작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까지는 정밀한 작전이 중요해짐에 따라 소규모 부대인 소대와 중대의 사용이 훨씬 중요해졌다. 1915년~1917년의 참호전 교착 상태와 달리 제2차 세계 대전에서는 소규모 부대가 다른 소대와 조우하는 전투가 벌어졌다. 결과적으로 정예 부대가 훨씬 더 인정받고 구별되었다. 기동전도 전차의 출현과 함께 놀라운 속도로 부활하여 계몽 시대의 대포를 대체했다. 이후 포병이 점차 전방 부대의 역할을 대체했다. 현대 전투는 제2차 세계 대전과 유사하며, 항공기와 미사일을 사용한 간접 전투가 전쟁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게 되어 전투는 주로 도시 점령에 국한되고 있다.
전투는 참여하는 개인뿐 아니라 정치적 행위자들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전투의 개인적 영향은 가벼운 심리적 문제부터 영구적이고 심각한 부상까지 다양하다. 일부 전투 생존자들은 겪었던 상황에 대한 악몽을 꾸거나 특정 광경이나 소리에 비정상적인 반응을 보이며, 플래시백을 경험하기도 한다. 전투의 신체적 영향으로는 흉터, 절단, 병변, 신체 기능 상실, 실명, 마비 및 사망이 포함될 수 있다. 전투는 정치에 영향을 미친다. 결정적인 전투는 패배한 측으로 하여금 항복하게 할 수 있으며, 아스쿨룸 전투와 같은 피로스의 승리는 승리한 측으로 하여금 목표를 재고하게 할 수 있다. 내전에서의 전투는 종종 군주나 정치 세력의 운명을 결정지었다. 대표적인 예로는 장미 전쟁과 자코바이트 반란이 있다. 전투는 한쪽 또는 다른 쪽의 전쟁 지속에 대한 의지를 좌우한다. 예를 들어 한국 전쟁 중 인천 상륙 작전과 베트남 전쟁 중 테트 공세 동안의 후에 전투를 들 수 있다.
전투는 전쟁의 계층 구조 속에서 이해할 수 있다. 여기서는 전투의 하위 개념인 교전과 전투의 상위 개념인 작전 및 전쟁에 대해 개괄적으로 살펴본다.
- 교전(engagements) - 적대하는 전력 간에 발생하는 작은 충돌, 소규모의 접전을 가리킨다. 단, 한쪽 전력이 방어 행동을 취하고 있는 경우에는 이것이 전투로 발전하지 않는다. 다만, 공중전에서는 미사일이나 기관포가 사용된 시점에서 교전으로 간주된다.
- 전투(battles) - 전투는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작전을 통해) 적대하는 전력에 의해 조직적으로 수행되는 전술적 충돌이며, 교전의 집합체이다. 각종 전력의 특징에 따라 그 진행은 다양하며, 매우 광범위한 지역에서 장시간에 걸쳐 진행될 수도 있지만, 즉시 결전이 되는 경우도 있다. 교전에서 양측이 상황을 발전시켜 나가면 전투에 이르는 경우도 있다.
- 작전 - 전투를 원활하고 합리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계획 및 실행되는 것이 작전이다. 이 작전에 기반하여 전투가 진행된다. 전투는 작전의 하위 개념이다.
- 전쟁 - 전쟁은 주로 국가 간에 전역 작전 및 일련의 작전이 지속적으로 실행되고 있는 상황이며, 작전·전투의 집합체라고 할 수 있다.
작전 계획 수립 시에는 작전 목표, 적 부대의 규모와 배치, 투입 가능한 부대, 작전 지역의 지형 등을 바탕으로 계획을 세우고, 전투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수행할 것인지를 계획한다. 예를 들어 적에 대한 공세 작전을 계획할 경우, 적의 위치와 규모 등을 고려하여 어떤 기동 공격(포위, 우회, 돌파 등)을 할 것인지를 결정하여 공세를 계획한다. 이 과정에서 필요한 무기탄약, 시간, 예상되는 실패의 위험 등을 고려하여 구체적인 운용이 결정된다.
작전이 결정된 후, 상급 지휘관은 각급 지휘관에게 작전 내용을 전달한다. 이 내용을 바탕으로 작전 부대는 각자의 임무를 이해하고 장비를 정비하며, 포병 부대와 항공 부대에 화력 지원을 요청하고, 병참 조직으로부터 탄약과 식량 등을 받아 전투를 준비한다.
전투에서 적을 섬멸하기 위해서는 먼저 적의 움직임을 “구속”하는 것이 필요하다. 신속하게 기동하는 적에 대해 확실하게 기동 공격을 하는 것은 어렵기 때문에, 우회나 포위를 통해 적의 기동력을 감소시킨다. 적의 구속에 성공하면, 적의 전투력을 무력화·저하시키기 위해 적을 혼란에 빠뜨리는 “교란”을 한다. 교란을 통해 적 부대의 연계를 분단하여 조직적인 저항을 봉쇄하고, 역습의 틈을 주지 않도록 노력한다.
전투에서는 항상 위치의 우위를 둘러싼 공방이 있으며, 전장에서는 적과 아군이 빈번하게 이동한다. 이 이동을 “기동”이라고 하며, 이 능력은 기동력으로 간주되고, 기동력은 긴요 지형의 확보나 우회·포위 등 적과의 이동 속도를 다투는 전술 행동에 큰 영향을 미친다. 또 적을 구속·교란하여 무력화시키면, 최종적으로 화력 공격·돌격을 한다. 이것을 “타격”이라고 하며, 여기서 적을 제압할 수 있다.
전투 후 적의 일부가 고립되어 남아 있다면, 전과 확장이 이루어진다. 전과 확장을 통해 더 많은 피해를 적에게 주고, 전투의 전과를 더욱 확대할 수 있다. 또 이에 이어 전장에서 이탈하는 적에 대해 추격이 이루어지는 경우도 있다. 작전이 종료된 후에는 전장을 수색하여 사상자에 적절한 조치를 취하고, 유기물을 수거하는 등의 전장 정리를 실시하며, 사상자를 수용하고, 정보를 수집하고, 약탈을 방지한다.
4. 전투의 유형
전투는 그 목적과 방식에 따라 다양하게 분류할 수 있다. 전투의 이상적인 목표는 상대를 굴복시켜 승리하는 것이지만, 전략적 필요에 따라 절충적인 목표를 위해 전투를 벌이기도 한다. 상대를 항복시키거나, 도주하게 하거나, 무력화시키면 전투에서 승리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어느 한쪽도 상대를 굴복시킬 수 없는 교착 상태에 빠지기도 하며, 한쪽이 전투 종결을 원치 않으면 무장 봉기로 이어지기도 한다.[6]
과거에는 대부분의 전투가 하루 안에 끝났지만, 제1차 세계 대전을 거치며 수송의 발달과 참호전의 등장으로 전투 기간이 몇 주 또는 몇 달로 늘어나기도 했다. 전투의 규모 역시 분대나 소대 단위의 국지전에서 쿠르스크 전투와 같이 대규모 작전이 수립되는 형태로 발전했으며, 영국 본토 항공전이나 대서양 전투처럼 전장의 범위도 매우 넓어졌다.[1] 현대전에는 전투원 외에도 의료, 수송, 화력 지원 등 다양한 구성원이 참여한다.[1]
전투는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이 분류할 수 있다.
- '''결전'''은 양측이 시간과 장소를 합의하여 벌이는 전투이다.
- '''조우전'''(또는 우연한 전투)은 양측이 준비 없이 전장에서 충돌하는 조우 교전이다.
- '''소모전'''은 적에게 지속 불가능한 손실을 입히는 것을 목표로 한다. 제1차 세계 대전의 서부 전선에서 벌어진 많은 전투가 소모전의 형태를 띠었다.
- '''돌파 전투'''는 적의 방어선을 뚫는 것을 목표로 한다.
- '''포위전'''(독일어: bewegungskrieg)은 적을 포위망에 가두는 전투이다.
- '''포위 작전'''은 하나 또는 양쪽 측면을 공격하는 것이다. 칸나이 전투가 대표적인 예이다.
- '''섬멸전'''은 패배한 쪽이 전장에서 궤멸되는 전투이다. 나일 해전에서 프랑스 함대가 이러한 경우에 해당한다.
결정적 전투는 전쟁의 전개를 결정하거나 적대 행위를 종식시키는 등 정치적 영향력이 큰 전투를 말한다. 스몰렌스크 전투, 헤이스팅스 전투, 하틴 전투 등이 이에 해당한다.
4. 1. 지리적 환경에 따른 분류
육전은 육지에서 이루어지는 전투이다. 보병, 차륜형 등 다양한 기동 수단과 부대 편제, 다양한 공격·방어·퇴각 작전 등의 전술 행동, 그리고 화기가 발달한 현대에는 장·단거리, 직접·곡사 사격 등을 유기적으로 조합하여 수행된다. 또한 육지는 인간의 생활 기반이 존재하기 때문에, 육전은 복잡한 심리적 영향을 미친다. 육전은 매우 다양한 측면을 가지고 있으며, 작전, 지형, 기후, 시간대, 전술 등에 따라 다양하게 분류할 수 있다.- 야전 - 인공 건축물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 지역에서의 육상 전투.
- 진지전 - 여러 개의 야전 축성·진지가 준비된 지역에서 이루어지는 전투. 전선이 교착 상태에 빠지고, 그 야전 진지가 점차 증강되는 경우 발생한다(참호전 포함).
- 공성전 - 한쪽이 요새·성채에 틀어박혀 방어를 취하고, 적대하는 전력이 그것에 대해 공격하여 발생하는 전투(근대 이후에는 요새전이라고 함).
- 농성전 - 공격해 오는 적에 대해 요새·성채에 틀어박혀 맞서 싸우는 전투. 공성전의 수비측에서의 명칭(참고로, 남북 전쟁에서 코앞에 있는 요새끼리 전투가 벌어진 사례가 있었다).
- 유격전 - 적 전력의 후방 또는 적의 지배 지역에서의 전투(게릴라전과 거의 동의어).
- 삼림전 - 열대우림 등 식생이 무성한 지역에서의 육상 전투.
- 산악전 - 고저 차가 심한 산악 지역에서의 전투.
- 시가전 - 인공 건축물이 밀집한 도시 지역에서의 전투.
- 습지전 - 습지 등 습기가 많은 장소에서의 전투.
- 설중전 - 한랭지에서의 전투.
- 사막전 - 사막 지역에서의 전투.
- 상륙전 - 상륙을 시도하는 전력과 그것을 저지하려는 전력이 충돌하는 해안·강변에서의 전투.
- 기동전 - 부대가 기동하면서 수행되는 전투[11].
- 회전 - 대규모 부대가 결전을 목적으로 준비한 후, 전장에서 대치하여 벌이는 전투. 주로 근대의 세계 대전 이전의 전투를 가리킨다.
- 조우전 - 기동 중에 적과 우연히 접촉하여 발생하는 전투. 회전의 반의어.
- 백병전 - 근접 전투 부대에 의한 돌격을 주요 전술 행동으로 하는 전투[12].
4. 2. 전술적 특징에 따른 분류
- 결전은 양측이 전투의 시간과 장소에 동의하는 전투이다.
- 조우전(또는 우연한 전투)은 양측이 공격이나 방어를 준비하지 않은 채 전장에서 충돌하는 조우 교전이다.
- 소모전은 적에게 자체 손실보다 지속 불가능한 손실을 입히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는 수적으로 더 큰 손실일 필요는 없다. 한쪽이 다른 쪽보다 훨씬 더 많은 수라면, 양측의 사상자 수가 거의 같더라도 소모전에 기반한 전략을 추구할 수 있다. 제1차 세계 대전의 서부 전선의 많은 전투는 의도적(베르됭)이거나 비의도적(솜)으로 소모전이었다.
- 돌파 전투는 적의 방어선을 뚫어 취약한 측면을 노출시키는 것을 목표로 한다.
- 포위전—독일 기동전(독일어: bewegungskrieg)의 독일어 Kesselschlacht—은 적을 포위망에 가둔다.
- 포위 작전은 하나 또는 양쪽 측면을 공격하는 것을 포함한다. 고전적인 예로는 칸나이 전투의 양면 포위가 있다.
- 섬멸전은 나일 해전에서 프랑스 함대처럼 패배한 쪽이 전장에서 궤멸되는 전투이다.
전투는 일반적으로 위에 나열된 여러 유형의 혼합이다.
결정적 전투는 정치적 영향을 미치는 전투로, 스몰렌스크 전투와 같이 전쟁의 전개를 결정하거나, 헤이스팅스 전투나 하틴 전투와 같이 적대 행위를 종식시키는 전투이다. 결정적 전투는 국가 간의 권력 또는 국경의 균형을 바꿀 수 있다. '결정적 전투'라는 개념은 1851년 에드워드 셰퍼드 크리시의 ''세계 15대 결정적 전투'' 출판으로 인기를 얻었다. 영국의 군사 사학자 J.F.C. 풀러(''서구 세계의 결정적 전투'')와 B.H. 리델 하트(''역사상의 결정적 전쟁'')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크리시의 저술 스타일을 따른 책을 썼다.
육전은 육지에서 이루어지는 전투이다. 보병, 차륜형 등 다양한 기동 수단과 부대 편제, 다양한 공격·방어·퇴각 작전 등의 전술 행동, 그리고 화기가 발달한 현대에는 장·단거리, 직접·곡사 사격 등을 유기적으로 조합하여 수행된다. 또한 육지는 인간의 생활 기반이 존재하기 때문에, 육전은 복잡한 심리적 영향을 미친다. 육전은 매우 다양한 측면을 가지고 있으며, 작전, 지형, 기후, 시간대, 전술 등에 따라 다양하게 분류할 수 있다.
- 야전 - 인공 건축물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 지역에서의 육상 전투.
- 진지전 - 여러 개의 야전 축성·진지가 준비된 지역에서 이루어지는 전투. 전선이 교착 상태에 빠지고, 그 야전 진지가 점차 증강되는 경우 발생한다(참호전 포함).
- 공성전 - 한쪽이 요새·성채에 틀어박혀 방어를 취하고, 적대하는 전력이 그것에 대해 공격하여 발생하는 전투(근대 이후에는 요새전이라고 함).
- 농성전 - 공격해 오는 적에 대해 요새·성채에 틀어박혀 맞서 싸우는 전투. 공성전의 수비측에서의 명칭(참고로, 남북 전쟁에서 코앞에 있는 요새끼리 전투가 벌어진 사례가 있었다).
- 유격전 - 적 전력의 후방 또는 적의 지배 지역에서의 전투(게릴라전과 거의 동의어).
- 삼림전 - 열대우림 등 식생이 무성한 지역에서의 육상 전투.
- 산악전 - 고저 차가 심한 산악 지역에서의 전투.
- 시가전 - 인공 건축물이 밀집한 도시 지역에서의 전투.
- 습지전 - 습지 등 습기가 많은 장소에서의 전투.
- 설중전 - 한랭지에서의 전투.
- 사막전 - 사막 지역에서의 전투.
- 상륙전 - 상륙을 시도하는 전력과 그것을 저지하려는 전력이 충돌하는 해안·강변에서의 전투.
- 기동전 - 부대가 기동하면서 수행되는 전투[11].
- 회전 - 대규모 부대가 결전을 목적으로 준비한 후, 전장에서 대치하여 벌이는 전투. 주로 근대의 세계 대전 이전의 전투를 가리킨다.
- 조우전 - 기동 중에 적과 우연히 접촉하여 발생하는 전투. 회전의 반의어.
- 백병전 - 근접 전투 부대에 의한 돌격을 주요 전술 행동으로 하는 전투[12].
공중전은 공중 전력에 의한 전투를 말한다. 공중전은 매우 신속하게 전개되며, 지구상 어디에서든 발생할 수 있고, 높은 타격력으로 적과 교전할 수 있다는 특징이 있다. 공중 전력은 장시간 특정 공역에 머무를 수 없기 때문에, 그 전개는 즉시 결전이며, 적 공중 전력을 격파함으로써 공중 우세를 얻을 수 있다. 단, 공군은 그 전력의 특징상 작전에 따라 분류하고 있다.
- 전략적 공중 작전 - 적의 전략적 요충지·요선에 대한 공격을 수행하는 작전을 말한다.
- 전술적 공중 작전 - 작전 지역에서 아군 육상 및 해상 전력과 연계하여 적 부대를 공격하는 작전을 말한다.
- 방공 작전 - 침공하는 적 공중 전력을 격파, 방해함으로써 방호 대상을 방호하는 작전을 말한다.
5. 현대 사회와 전투
20세기 이전의 전투는 대부분 하루 안에 결판이 났다. 공성전과 같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면 게티즈버그 전투나 라이프치히 전투와 같은 대규모 전투도 3일을 넘지 않았다. 이는 전장에 군대를 투입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제1차 세계 대전에 이르러 수송의 발달과 참호전의 등장은 전투 기간을 몇 주 또는 수개월까지 늘렸다. 그러나, 길고 긴 지구전이라 할지라도 개인 병사들에게는 임무 교대를 통해 숨 돌릴 틈을 주었다.
본래 분대나 소대 같은 적은 단위의 군대 국지전을 뜻하던 전투의 개념은 전쟁의 역사를 거치면서 라이프치히 전투와 같이 수백, 수천의 군대가 하나의 전투에 투입되거나 쿠르스크 전투와 같이 하나의 전투를 위해 입체적인 작전이 수립되는 등 대규모화되었다. 전투원이 지닌 무기의 사거리를 벗어나지 못했던 전장의 크기 역시 영국 본토 항공전이나 대서양 전투와 같이 거대한 지리적 공간으로 확대되었다.
현대의 전투에는 전투원 이외에도 의료, 수송, 화기지원 등 다양한 구성원들이 참여한다.
전장(Battlespace)은 군대의 전구 작전을 위해 공중, 정보, 육지, 해양 및 우주를 포함한 모든 요소를 통합하고 결합하는 통합된 전략적 개념이다. 적과 아군 군대, 시설, 기상, 지형 및 전자기 스펙트럼을 포함하여 전투력을 적용하고, 부대를 보호하거나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이해해야 하는 환경, 요인 및 조건을 포함한다.
5. 1. 비군사적 전투
전투는 전력이 ''직접적으로'' 전투력을 행사하여 상대를 제거하더라도 목표를 달성하려고 할 때 발생하는 것이므로, 여기서 설명하는 것은 엄밀히 말하면 전투가 아니다. 하지만 투쟁의 형태로 일반적으로 인식되고 있다.참조
[1]
서적
[2]
서적
[3]
서적
[4]
서적
[5]
웹사이트
battle
https://www.merriam-[...]
[6]
서적
[7]
서적
[8]
서적
[9]
서적
Raatteen tie : Talvisodan pohjoinen sankaritarina
Ajatus kirj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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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Rannikolta Raatteen tielle : sotaveteraanien haastatteluihin, sotapäiväkirjoihin sekä moniin muihin lähteisiin perustuva teos
Karttimo-Salminen yhteistyöryhm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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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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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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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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