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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체스카 도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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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란체스카 도너는 오스트리아 빈 출신의 여성으로, 이승만의 부인이자 대한민국의 초대 영부인이다. 빈 대학교에서 언어학 박사 학위를 받고 국제 연맹에서 통역관으로 일했으며, 1934년 이승만과 결혼했다. 이승만의 비서 역할을 수행하며 저서 집필을 도왔고, 4·19 혁명 이후 하와이로 망명했다가 1970년 귀국하여 1992년 사망했다. 그녀는 이승만의 외교 활동을 지원하고 검소한 생활을 했다는 긍정적 평가와 함께, 권위주의적 통치를 강화하고 특정 인물을 편애했다는 부정적 평가를 받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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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체스카 도너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1948년의 프란체스카 도너
1948년의 도너
본명Franziska Donner
한국어 이름프란체스카 도너
한국어 로마자 표기Peurancheseuka Doneo
한국어 이름 (다른 표기)이부란 / 리부란
한국어 이름 한자 표기李富蘭
한국어 이름 로마자 표기 (다른 표기)I Buran / Ri Buran
출생일1900년 6월 15일
출생지인저스도르프 바이 빈,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현재 , 오스트리아)
사망일1992년 3월 19일
사망지서울, 대한민국
안장 장소국립서울현충원
직위
직책대한민국의 제1대 대통령 배우자
재임 시작1948년 7월 24일
재임 종료1960년 4월 26일
대통령이승만
전임직책 생성
후임공덕귀
개인 정보
국적오스트리아대한민국
배우자이승만(1934년~1965년)
종교개신교(감리교)
자녀양자 이강석, 양자 이인수, 양자 이봉수
부모루돌프 도너(부), 프란치스카 게를하를틀(모)
기타 정보

2. 생애

오스트리아 에서 태어났다. 1934년 스위스 제네바의 국제 연맹에서 통역 등으로 일하던 중,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표로 방문한 이승만을 만나 같은 해 10월 미국 뉴욕에서 결혼했다.[5] 이는 두 사람 모두에게 재혼이었다. 결혼 초기, 그의 출신 국가인 오스트리아가 이름이 비슷한 오스트레일리아(호주)로 잘못 알려지고, 이승만과의 관계를 받아들이기 어려워했던 일부 해외 거주 한인 및 독립운동가들에 의해 '호주댁'이라 불리기도 했다.

1945년 10월 한국으로 건너왔으며, 남편 이승만이 초대 대통령에 취임한 후에는 영부인으로서 활동했다. 독일어, 영어, 프랑스어 등 외국어 능력과 타자 실력을 바탕으로 남편의 비서 역할을 수행하며 국제 외교 활동을 지원했다.[5] 제1공화국 말기에는 남편을 대신하여 일부 정책 문제 처리에 관여하기도 했다. 그러나 4·19 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실각하자 남편과 함께 미국 하와이로 망명했다.[5]

1965년 이승만이 하와이에서 사망한 후, 잠시 고향인 오스트리아에 머물다가 1970년 5월 16일 한국으로 돌아와 이화장에서 생활했다.[9][6] 귀국 후에는 청와대가 주최하는 각종 행사에 귀빈으로 초대받기도 했다. 1992년 3월 19일 서울특별시 이화장에서 9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5]

2. 1. 초기 생애와 교육

어린 시절의 프란체스카 도너.


1900년 오스트리아 교외의 인체르스도르프(Inzersdorf)에서 유대계[7] 탄산수 제조업체[2] 사업가인 루돌프 도너(Rudolf Donner)와 프란치스카 게르하르틀(Franziska Gerhartl) 사이의 세 딸 중 막내로 태어났다.[2][7] 아들이 없었던 아버지 루돌프 도너는 그녀가 가업을 잇기를 원했고, 아버지의 뜻에 따라 영국으로 유학하여 영어를 공부했다.[7]

출생 기록상의 이름은 프란치스카 도너(Franziska Donnerde)였으나, 이후 공식 문서에서는 프란체스카 도너(Franzeska Donnerde)라는 표기도 사용했다. 일반적으로는 이탈리아식 이름인 프란체스카(Francescait)로 가장 많이 알려졌으며, 대한민국의 모든 공식 문서(여권 포함)에도 이 이름이 사용되었다.[1]

1920년 독일의 자동차 경주 선수 헬무트 뵈룅(Helmut Böhlungde)과 결혼했으나 3년 뒤 이혼했다.[7] 이후 빈 대학교에서 언어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2] 학위 취득 후 스위스 제네바의 국제 연맹에서 통역관 및 하급 외교관으로 근무했다.[2]

2. 2. 이승만과의 만남과 결혼

1933년 프란체스카 도너와 이승만


1933년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국제 연맹 회의에 참석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표 이승만을 처음 만났다.[5] 당시 도너는 국제연맹에서 통역사 등으로 일하고 있었다. 이후 도너는 어머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승만과의 재혼을 결심하여, 1934년 10월 8일 미국 뉴욕시의 클레어몬트 호텔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이승만 역시 재혼이었다.

1934년, 하와이에 도착한 결혼 직후의 이승만과 프란체스카 부부. 목에 레이(Lei)를 걸고 있다.


프란체스카 도너는 세련된 매너와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등 뛰어난 외국어 실력을 갖추고 있어,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이승만에게 큰 힘이 되었다. 특히 이승만이 태평양 전쟁 발발을 예견하며 쓴 책으로 평가받는 《일본내막기》(Japan Inside Out)는 도너가 타자를 치는 등 직접 집필을 도와 완성될 수 있었다.[5] 부부는 처음에는 뉴욕과 워싱턴 D.C.에서 생활하다가, 많은 한인 교포들이 활동하던 하와이로 거처를 옮겼다. 도너는 하와이에서도 이승만의 비서 역할을 계속 수행했다.[5]

결혼 초기, 일부 한인 교포들과 독립운동가들은 이승만과의 관계를 받아들이기 어려워하며 프란체스카 도너를 '여사' 대신 '호주댁(濠洲宅)'이라 부르기도 했다. 이는 그의 출신 국가인 오스트리아(Austria)를 이름이 비슷한 오스트레일리아(Australia, 호주)로 잘못 알고 부른 데서 비롯된 별명이었다. 한때 그가 미국 출신이라는 잘못된 소문이 돌기도 했다. 이승만은 프란체스카 도너에게 '이금순(李錦順)' 또는 '이부란(李富蘭)'이라는 한국 이름을 직접 지어주었다.

2. 3. 대한민국에서의 활동

1946년, 방한 중 경교장을 찾아온 피치 박사 부부와 함께. 앞 줄 오른쪽 끝에서부터 조완구, 프란체스카, 김구, 피치 박사 부부. 뒷 줄 왼쪽 첫 번째는 엄항섭, 세 번째는 이기붕, 네 번째는 안우생, 가운데는 안미생, 오른쪽 첫 번째는 선우진, 네 번째는 서영해.


1945년 10월,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일본이 패전한 후, 남편 이승만미국 정부의 지원을 받아 한국으로 돌아왔고, 프란체스카 도너 역시 몇 달 뒤 한국으로 왔다.[5] 귀국 후 처음에는 돈암장과 이화장에서 거주했다.

독일어, 영어, 프랑스어 3개 국어에 능통하고 타자 실력도 갖춘 그녀는 미국에 있을 때부터 이승만의 비서 역할을 했으며, 특히 이승만의 저서 ''Japan Inside Out''(1940) 준비에 참여했다.[5] 한국에 와서도 남편의 비서 역할을 계속하며 그의 정치 활동, 특히 국제 외교 무대에서의 활동을 지원했다. 1948년 1월 12일 UN한국위원회가 서울에 도착했을 때 이승만을 따라 회의에 참관하기도 했다.

프란체스카 도너와 이승만, 장개석


이승만이 1948년 5월 제헌 국회의원과 국회의장에 이어 8월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자, 프란체스카는 대통령 배우자로서 경무대에 입주했다. 그러나 경무대 생활 초기, 남편 이승만을 찾아오는 방문객 문제에 관여하면서 보좌관들과 마찰을 빚기도 했다.

또한 해방 직후 이승만을 찾아오던 정치인들 중 안재홍을 비롯하여 송필만, 고희동 등을 탐탁지 않게 여겨 냉대했다는 증언이 있다. 이승만의 측근 윤치영의 비서를 지냈던 최기일에 따르면, 프란체스카는 특히 송필만, 고희동을 무시했다고 한다. 안재홍은 이러한 대우 등에 실망하여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이승만과 거리를 두게 되었고, 1950년 제2대 총선에는 독자적으로 출마했다.

한편, 프란체스카는 한국 생활 초기에 "호주댁"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는데, 이는 그녀의 출신국인 오스트리아가 이름이 비슷한 오스트레일리아(호주)로 잘못 알려졌기 때문이다. 또한 이승만과의 관계를 부정적으로 보던 일부 해외 거주 한국인들과 독립운동가들이 그녀를 '여사' 대신 비하적으로 부른 것이기도 했다.

2. 3. 1. 제1공화국 시절 (1948-1960)

1948년 3월, 남편 이승만이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1960년까지 재임하면서, 프란체스카 도너는 1948년부터 1960년까지 대한민국 제1호 영부인이 되었다.[5] 그녀는 거의 모든 공식 행사에 남편과 동행했다.[5] 독일어, 영어, 프랑스어 3개 국어에 능통하고 통역사 자격증과 타자 실력을 갖춘 그녀는 남편의 타이피스트이자 비서로서 국제 무대 활동을 지원하는 역할을 수행했다.[5]

1951년 9월 29일, 서울 수복 기념식에서 이승만과 이야기하고 있는 프란체스카.


경무대(현재의 청와대)의 안주인으로서 방문객 접대 문제 등에 직접 관여하면서 이승만의 보좌관이었던 박용만이나 외무장관 장택상 등과 마찰을 빚기도 했다. 장택상은 프란체스카에게 미움을 산 박용만을 자신의 주변으로 발령내어 보호하려 하기도 했다.

한편, 남편 이승만과 상공부 장관 임영신 사이에 불륜 관계라는 소문이 돌자 프란체스카는 임영신을 해고했다. 이후 윤치호의 딸 윤노라가 잠시 그녀의 시중을 들다가, 이승만의 비서였던 이기붕의 부인 박마리아윤치영의 부인 이은혜가 그 역할을 맡게 되었다. 프란체스카는 양반가 출신인 이은혜를 다소 부담스러워한 반면, 가난한 집안 출신으로 싹싹하게 처신했던 박마리아를 총애하게 되었다. 이는 박마리아와 그녀의 남편 이기붕이승만 정권의 최측근으로 급부상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으며, 박마리아는 프란체스카의 신임을 등에 업고 남편 이기붕의 정치적 권력을 강화하는 데 이를 적극 활용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1955년 11월에는 중앙대학교 대학원에서 명예 법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8] 제1공화국 말기에는 남편을 대신하여 일부 정책 문제 처리에 관여하기도 했다.

1960년 4·19 혁명으로 이승만이 대통령직에서 하야하자, 프란체스카는 남편과 함께 미국 하와이로 망명했다.[5]

2. 4. 망명과 귀국

1960년 4·19 혁명으로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한 후, 프란체스카는 남편과 함께 하와이로 떠났다. 초기 하와이 생활은 거처가 일정하지 않아 여러 곳을 옮겨 다녔으나, 현지 교포 사회의 도움으로 잠시 안정을 찾기도 했다. 이승만의 건강이 악화되면서 요양원으로 거처를 옮겼다.

1962년 12월, 하와이에서 양자 이인수 박사를 맞아 기뻐하고 있는 이승만과 프란체스카 내외.


1962년 12월에는 양자인 이인수 박사와 하와이에서 만나기도 했다.

1965년 7월 19일 이승만이 사망한 후에도 한동안 하와이에 머물렀다. 이후 외무부 장관이 발급한 특별 여권을 가지고 고향인 오스트리아로 돌아가 약 5년간 친정 동생과 언니의 집 등 친척 집을 오가며 지냈다.

1970년 5월 16일, 대한민국 정부의 배려로 한국으로 돌아왔다.[9] 귀국 후에는 청와대가 주관하는 각종 행사에 귀빈으로 초대받았으며, 양자인 이인수 내외와 함께 이화장에서 생활했다.[6] 만년에는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된 남편 이승만의 묘소를 참배하는 것을 낙으로 삼았다.

1987년에는 이승만의 전직 비서였던 윤치영의 구순 기념 논문 봉정식에 참석하였고, 1990년에는 소피텔 엠배서더 호텔에서 90회 생일 축하연을 열었으며 이때 오스트리아에 남아 있던 소수의 친지들이 방문하기도 했다.

1992년 3월 19일 서울특별시 이화장에서 향년 92세를 일기로 서거했다.[5] 사망하기 전 며느리인 조혜자 여사에게 남긴 유언은 다음과 같다고 전해진다.[10][11]

"어머님[12]은 유언으로 세 가지를 부탁했어요. '틀니를 끼워주고 태극기로 나를 덮어달라. 그리고 성경책을 무덤에 꼭 넣어달라.'"[11]

2. 5. 사망과 사후

1970년 오스트리아에서의 5년간의 거주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이후 1992년 사망할 때까지 서울이화장에서 양아들 이인수 부부와 함께 생활했다.[6] 청와대가 주최하는 각종 행사에 귀빈으로 자주 초대되기도 했다.

1992년 3월 19일 서울 이화장에서 9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5] 3월 23일 서울 정동제일 감리교회에서 영결식을 마친 뒤,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에 있는 남편 이승만의 묘소 옆에 안장되었다.

사후 이승만에 대한 연구 및 재평가 작업이 진행되면서, 프란체스카 여사에 대한 관심도 함께 높아졌다.

3. 가족 관계

오스트리아 빈에서 실업가 루돌프 도너(1863년~1922년)와 프란치스카 게를하를틀(1869년~1933년 이후) 사이의 셋째 딸로 태어났다. 위로 언니 2명이 있었다.

관계이름생몰년비고
아버지루돌프 도너1863년~1922년오스트리아 실업가
어머니프란치스카 게를하를틀1869년~1933년 이후
배우자헬무트 뵈룅독일의 자동차 선수, 1923년 이혼
배우자이승만1875년~1965년대한민국 초대·2대·3대 대통령
아들 (양자)이인수명지대학교 교수
며느리조혜자1942년 2월 16일~이인수의 배우자
시아버지이경선1839년~1912년
시어머니김말란 (김해 김씨)1833년~1896년



스위스 제네바에 있는 국제연맹에서 통역사로 일하던 1934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표로 방문했던 이승만과 만났다. 주변의 반대를 무릅쓰고 같은 해 10월 8일 미국 뉴욕에서 약혼했으며, 이 결혼은 프란체스카에게는 재혼이었다.

결혼 초기, 해외 거주 한국인독립운동가 중 일부는 이승만과의 관계를 받아들이지 않고 프란체스카를 '여사' 대신 "호주댁"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이는 그녀의 출신국인 오스트리아(Austria)를 이름이 비슷한 오스트레일리아(Australia, 호주)로 잘못 알고 부른 데서 비롯된 별명이다. 한때 미국 출신이라는 잘못된 정보가 퍼지기도 했다.

1945년 10월 한국으로 건너왔으며, 남편 이승만이 대통령에 취임한 후에도 독일어, 영어, 프랑스어에 능통하고 타자 실력을 활용하여 남편의 비서 역할을 수행하며 국제 활동을 지원했다. 제1공화국 말기에는 남편을 대신해 정책 문제를 처리하기도 했으나, 4·19 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실각하면서 함께 미국 하와이로 망명했다. 남편 이승만은 1965년 7월 19일 하와이에서 사망했다. 프란체스카는 이후 고향인 오스트리아를 거쳐 1970년 5월 16일 한국으로 돌아와 이화장에서 생활했으며, 청와대 주최 행사에 귀빈으로 초대받기도 했다. 1992년 3월 19일 서울특별시에서 9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4. 저서


  • 이승만 대통령의 건강 (이승만 연구총서 1)》(촛불, 2006)
  • 6.25이승만 : 프란체스카의 난중일기》(기파랑, 2010)

5. 평가

프란체스카 도너에 대한 평가는 주변 인물들에 따라 다소 엇갈리는 면이 있다. 이승만의 측근이었던 최기일은 그녀가 인색하고 냉정하다고 평가한 반면,[13] 이화장 시절 가까이 지냈던 방재옥은 매우 알뜰한 인물로 기억했다.[14]

5. 1. 긍정적 평가

스위스 제네바에 있는 국제연맹에서 통역사로 일하던 중 1934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표로 활동하던 이승만을 만나 결혼하였다. 1945년 10월 한국으로 건너와 남편이 대통령에 취임한 후에도 Deutsch|독일어de, English|영어영어, Français|프랑스어프랑스어에 능통하고 타자기 조작에도 능숙하여 남편의 비서 역할을 수행하며, 생애에 걸쳐 이승만의 국제 무대 활약을 지원했다.

5. 2. 부정적 평가

이승만의 비서실장을 지낸 윤치영의 공보비서로 돈암장을 출입했던 최기일은 프란체스카 도너를 상당히 인색하고 냉정한 인물로 평가했다. 최기일에 따르면, 이승만의 생신에 사람들이 오리고기, 닭고기, 쇠고기 등 귀한 음식을 많이 가져왔지만, 프란체스카는 남은 음식을 직원들과 나누거나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지 않고 결국 상해서 버리게 했다고 한다.[13]

또한, 남북협상과 좌우합작론을 주장하다가 전향하여 이승만을 찾아온 안재홍을 무시하고 냉소적으로 대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이를 본 최기일은 "안재홍 씨가 프란체스카 여사에게 푸대접을 받고 가시는 것을 보고 나는 조선 사람으로서 분한 마음이 들었다"고 증언했다.[13] 이러한 모습 때문에 윤치영임영신 등 주변 인물들은 "이 박사님이 너그러운 성품을 가진 한국 여성과 산다면 좋을 걸"이라고 한탄하기도 했다고 전해진다.[13]

한편, 해외 거주 한국인들과 독립운동가들 사이에서는 이승만과의 관계를 받아들이지 못해 그녀를 '여사' 대신 "호주댁"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이는 그녀의 출신국인 오스트리아(Austria)를 이름이 비슷한 오스트레일리아(Australia, 호주)로 잘못 알고 부른 데서 유래한 것이다.

6. 대중 매체에서의 등장


  • 《경무대 비화 잘돼갑니다》(1967년) - 후아나 데이비스 분
  • 야인시대》(2002년) - 김린 분
  • 《6·25 전쟁과 이승만》(2010년) - 차유경 분

참조

[1] 서적 Peurancheseuka Ri Seutori 프란체스카 리 스토리 (The story of Francesca Rhee) Raendeom Hauseu Jungang 랜덤하우스중앙 (Random House JoongAng) 2005
[2] 웹사이트 FamilySearch.org https://www.familyse[...] 2023-11-20
[3] 서적 Peurancheseuka Ri Seutori Raendeom Hauseu Jungang 2005
[4] 논문 The Making of the First Korean President: Syngman Rhee's Quest for Independence, 1875-1948 https://www.jstor.or[...] University of Hawai'i Press 2014
[5] 웹사이트 Rhee, Francesca Donner https://digitalarchi[...]
[6] 뉴스 Adopted son of Syngman Rhee dies at age 92 https://koreajoongan[...] 2023-11-02
[7] 기타
[8] 뉴스 중대서 학위 수여 대통령부인등 육명 경향신문 1955-11-07
[9] 간행물 월간조선 2001-03
[10] 기타
[11] 뉴스 [김한수의 오마이갓]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이승만 성경’ 속 책갈피 꽂힌 구절 https://v.daum.net/v[...] 2023-03-22
[12] 기타
[13] 서적 자존심을 지킨 한 조선인의 회상 생각의나무 2002
[14] 웹사이트 李承晩 대통령 내외와 14년간 생활한 方在玉씨 인터뷰 http://monthly.chosu[...]
[15]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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