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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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윤치영은 1898년 서울에서 태어나 일제강점기 와세다 대학교 유학 중 2·8 독립 선언에 참여하고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고문을 받는 등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광복 후 미군정 재무부 재산처분국장을 역임하고 이승만의 비서로 활동하며 정치에 입문, 제헌 국회의원, 외교국방위원회 위원장, 내무부 장관 등을 지냈다. 이승만, 박정희 정권에서 요직을 맡았으며, 1980년대에는 민주공화당 당의장 서리를 역임했다. 말년에는 이승만 기념사업회 회장 등을 지냈으며, 1996년 99세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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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성YMCA영어학교 동문 - 변영로
변영로는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의 시인이자 영문학자, 교수, 언론인으로, 3·1 운동 당시 독립선언서 영문 번역을 맡았으며, 초기 신시 개척에 앞장섰고, 후에는 대학교수로 재직하며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초대 위원장을 역임한 애주가로 유명한 인물이다.
윤치영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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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정보 | |
기본 정보 | |
이름 | 윤치영 |
한자 표기 | 尹致暎 |
로마자 표기 | Yun Chiyeong |
아명 | 자능(子能) |
호 | 동산(東山) |
출생일 | 1898년 2월 10일 |
출생지 | 대한제국 한성부 종로방 안국동 |
사망일 | 1996년 2월 9일 |
사망지 |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송파구 풍납동 서울아산병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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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 | |
대학 | 와세다 대학 정치경제학부 |
대학원 | 아메리칸 대학교 대학원 사회과학 석사 |
정치 경력 | |
소속 정당 | 한국민주당(1945년 8월) 무소속 (1945년 10월) 대한국민당(1948년 11월) 무소속 (1958년 12월) 자유당(1960년 1월) 민주공화당(1963년 2월) |
주요 경력 | 한국민주당 상임위원 대한국민당 전임위원 자유당 최고위원 민주공화당 고문 경희대학교 재단 이사장 |
관직 | |
직책 | 대한민국 초대 내무부 장관 |
대통령 | 이승만 |
임기 시작 | 1948년 8월 15일 |
임기 종료 | 1948년 12월 15일 |
전임자 | 정치 개방 |
후임자 | 신성모 |
직책 2 | 제13대 서울특별시장 |
임기 시작 2 | 1963년 12월 17일 |
임기 종료 2 | 1966년 3월 30일 |
전임자 2 | 윤태일 |
후임자 2 | 김현옥 |
가족 관계 | |
형제 | 윤치오(이복 형) 윤치소(이복 형) |
친족 | 윤치소(형) 윤보선(조카) 윤치호(종형) 윤영선(조카) 이병도(의형) 김성수(인척) |
배우자 | 홍진순 (사별 초배 부인, 자녀 없음) 이감덕 (사별 계배 부인, 자녀 없음) 이병영 (사별 3취 부인, 자녀 2남 2녀) 이은혜 (사별 4취 부인, 자녀 1남) |
자녀 | 3남 2녀 (셋째 아들 윤인선) |
기타 정보 | |
종교 | 개신교 |
참고 자료 |
2. 생애
윤치영은 1898년 2월 10일 경성부 안국동에서 태어났다. 대한민국 제2대 대통령인 윤보선의 외삼촌으로, 오랫동안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측근 및 비서로 지냈다. 이승만의 독립 활동을 돕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1]
1945년 광복 후, 이승만의 비서실장으로 활동하며 우익 정치 세력 결집에 힘썼다.[1] 대한민국 헌법 기초에 참여하고, 초대 내무부 장관과 UN 특별 파견 대사를 역임했다.[1] 1948년 8월부터 12월까지 대한민국 내무부 장관과 유엔 파견 대사를, 1951년부터 1952년까지는 제2대 주프랑스 대한민국 공사를 역임했다.
1948년부터 1956년까지 이기붕과 선거에서 패배하고 이후에도 그와 갈등을 겪었다. 1961년 5·16 군사정변 이후 박정희를 지지했다.
1963년 12월 17일부터 1966년 3월 30일까지 서울특별시장을 역임했다. 1968년에는 오랫동안 박정희에게 사회보장 문제에 대해 자문했다. 그는 조카 윤보선과 정치적으로 대립했고, 그 결과 박정희를 따르게 되었다.
1970년 12월과 1971년 6월 국무총리 후보로 거론되었으나 신민당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1971년 미국 고든 대학교에서 명예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7월 1일 대통령 특별보좌관에 임명되었다. 1972년 10월 유신 이후 학생 운동권으로부터 10월 유신의 원흉이라는 비판을 받았으나 긴급조치로 묻혀졌다. 그는 반공 척사대회와 이승복 추모행사 등에 참여하며 야당과 학생 운동가들을 비판했다.
1980년 초, 민주공화당 당의장 서리, 대한민국헌정회 회장을 역임하였다. 1996년 2월 9일 99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2. 1. 생애 초기

그는 대한민국 제2대 대통령인 윤보선의 외삼촌이었고, 오랫동안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측근 및 비서를 지냈다. 그는 이승만의 독립 활동을 돕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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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조선으로 돌아와 이승만과 친분을 맺고 하와이로 가서 독립운동에 종사했으며, 미국 본토로 건너가 프린스턴 대학교, 컬럼비아 대학교, 조지 워싱턴 대학교, 아메리칸 대학교 등에서 유학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일원으로 조선인 이민자들의 조직화, 구미(歐米) 각국에 대한 선전 활동, 동아일보 취재, 『삼일신보』(三一新報) 발행 및 편집에 참여했다.[1]
1937년 조선으로 돌아왔으나 임시정부와의 연루를 이유로 체포되어 묵비권을 행사한 채 석방되었지만, 당국 감시를 받는 상태가 계속되었다. 1938년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체포되어 기소유예 처분으로 석방된 후 친일로 전향하여 조선임전보국단 평의원, 국민동원총진회 중앙지도위원을 역임했다.[1]
1982년 2·8 독립 선언 참여 등을 이유로 건국포장을 수여받고 독립유공자로 서훈되었으나, 2009년 과거 친일 행위로 인해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었고, 2010년 국가보훈처에 의해 서훈이 취소되었다. 유족은 이에 불복하여 소송을 제기했고, 1심에서는 취소 절차상 하자가 있다는 이유로 원고 승소 판결을 받았으나, 2015년 서울고등법원 2심에서 원심 판결이 취소되어 원고는 패소했다.[2]
그는 충청남도 해평 윤씨 일원으로 한성부(지금의 서울특별시)에서 태어났다.[1] 중학교에 다니면서 YMCA에서 영어를 배우고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 대학에 입학했다. 이 기간에 일본 유학생들이 작성한 2·8 독립 선언에 서명하거나, 중학교 동창이었던 여운형의 일본 방문 환영 대회를 주최하는 등의 활동으로 경찰에 체포되었으나, 형 윤치성의 일본군에서의 공로 덕분에 투옥은 면했다.
2. 1. 1. 출생과 가계
윤치영은 1898년 2월 10일 경성부 안국동에서 무관 출신 윤영렬과 어머니 한진숙[11] 사이의 6남 2녀 중 여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날 무렵 그의 집은 굉장히 부유하여 집의 크기가 200칸이나 되었다고 한다. 그의 형제로는 윤치오, 윤치소, 윤치성, 윤치병, 윤치명 등이 있었고, 누이로는 윤활란, 윤노덕 등이 있었다.그의 9대조 윤두수와 윤근수는 조선 선조 때 형제 정승이었다. 증조부 윤득실은 통덕랑에 이르렀으나 술을 좋아하여 가세가 몰락하였다. 사후 증 이조참의, 의정부참찬에 거듭 추증되었다.
조부 윤취동 대에 한직인 지중추부사로 관직에 올랐다. 아버지 윤영렬이 중앙 관직에 진출하였으며 사촌 형 윤치호가 다시 외무부, 학부 협판과 한성부판윤으로 출세하여 가세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
조선 시대의 영의정 윤두수의 후손으로, 윤득실(尹得實)은 증조부[3], 윤취동(尹取東)은 조부[4], 윤영렬은 아버지이다. 전 대한제국 군무대신·법무대신 윤웅렬은 백부이며, 전 조선총독부 중추원 찬의 윤치오(尹致旿)는 형, 전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 윤치소(尹致昭)는 동생[1], 전 일본군 기병 중좌 윤치성(尹致晟)은 동생이다. 윤치병(尹致昞), 윤치명(尹致明)도 형제이며, 전 귀족원 조선대만칙선의원·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 윤치호, 전 육군 의무감 윤치왕, 전 주 영국 공사 윤치창(尹致昌)은 사촌이다.
전 서울대학교 총장 윤일선, 전 만주국 간도성 차장 윤명선(尹明善, 1900년), 전 대통령 윤보선, 그리고 윤원선(尹源善), 윤택선(尹澤善)[4]은 조카, 전 농림부 장관 윤영선, 그리고 윤연선(尹然善, 1936년)[3]은 사촌 조카이다[5][6]. 직계 후손으로 아나운서 윤인구(손자)가 있다[7].
2. 1. 2. 유년기와 학창 시절
윤치영은 해평 윤씨 집안 사람으로 한성부(지금의 서울특별시)에서 태어났다.[1] 어렸을 때는 고향인 충청남도 아산 둔포면으로 내려갔다. 아산에서 조카 윤보선과 함께 한문 서당을 다녔고, 한학자의 문하생이 되기도 했다.
이후 안성군수로 부임하는 아버지를 따라 경기도 안성에 있다가 다시 경성부로 올라와 교동국민학교를 졸업하였다.
그는 30년 연상의 맏형 윤치오와 윤치소, 사촌 윤치호의 집에 드나들던 노백린, 박영효, 유길준, 양기탁, 이승훈, 이승만, 김광서 등의 청년지사들을 보게 되었는데, 다른 형제나 조카들과 달리 그들의 대화를 유심히 들었다고 한다.

1913년 3월 관립 한성고등보통학교(현 경기중학교, 경기고등학교의 전신)에 무시험 추천으로 입학하였다. 그러나 입학 첫날부터 이 학교가 마음에 들지 않던 그는 가족과 상의 없이 중앙중학교로 전학을 갔다.
가족과의 상의도 없이 함부로 전학한 것에 대해 형 윤치오, 윤치소 등에게 책망을 받았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중앙중학교에서는 한글학자인 주시경을 국어 교사로 만났다. 중앙학교에 다니면서 YMCA학당 중학부 과정(야간)을 함께 다니며 영어를 배웠고, 변영로, 안재홍, 안재학(안재홍의 동생) 등과 알게 되었다.

YMCA 기독교 청년회에서는 이상재, 김규식, 이승만 등에게서 배웠다.
1912년 YMCA 기독교청년회 학당에서 그는 허정, 임병직, 이원순, 김영섭 등과 함께 이승만에게서 배웠다.[13] 윤치영과 그의 동문들은 여러 교사들 중 영어 교사였던 이승만에게 특히 매료되었다. 이후 윤치영은 그의 동문들 (임병직, 허정, 이원순, 김영섭) 등과 함께 이승만의 (열렬한) 추종자가 되었다.[13]
2. 2. 일제강점기 활동
1919년 조선 2·8독립선언에 참여하고,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체포되어 기소유예(起訴猶予) 처분을 받는 등 독립운동에 적극적이었다. 그러나 1938년 흥업구락부 사건 이후 친일로 전향하여 조선임전보국단 평의원, 국민동원총진회 중앙지도위원을 역임했다.[1]thumb과 윤치영 (1945년 10월 16일)]]
이승만의 비서로 활동하며 그의 독립운동을 도왔고, 대한국민임시정부 일원으로도 활동했다. 하와이와 미국 본토에서 프린스턴대학교, 컬럼비아대학교, 조지워싱턴대학교, 아메리칸대학교 등에서 유학하며 연구 활동과 함께 재미 한국인 조직화, 구미 각국에 대한 선전 활동, 동아일보 취재, 『삼일신보』 발행 및 편집에 참여했다.[1]
2. 2. 1. 일본 유학과 2·8 독립 선언
1915년 YMCA학당 중학부 2년 과정을 수료했고, 1916년 봄 중앙학교를 졸업했다. YMCA 강당에서 그는 강사로 있던 이상재, 이승만 등을 만났고 동문으로는 여운홍, 허정 등을 만났으며 중앙학교 동창인 여운홍의 형 여운형과도 알게 되었다. 이들은 후일 그의 인생에 영향을 미쳤다. 중앙학교 재학 당시 야구부와 축구부에 가입하였으며 졸업 직후 잠시 모교인 중앙학교의 야구부 코치로 활동하기도 했다. 중앙학교에서의 은사로는 국어와 역사 교과목을 가르치던 주시경, YMCA중학부에서는 월남 이상재 등의 감화를 받아 독립운동에 투신을 결심한다.1916년 조카인 윤보선이 민영철의 딸과 결혼하였다. 그는 집안의 주선으로 수군절도사 이봉구의 딸이며 역사학자 이병도의 누이인 이병영과 결혼하게 된다. 이병도는 그의 둘째 누나의 남편 이병림의 일족이었다. 그는 결혼식 첫 날에 신부의 얼굴을 보게 되었다 한다.
일찍부터 영어(英語)를 배운 그는 영어를 잘 구사하였는데, 유년시절에 배운 영어 실력은 훗날 미국 유학에 크게 기여하였다. 중앙중학교 7회 졸업생이었다. 그는 한글 외에도 영어, 한자, 중국어, 일본어, 프랑스어 등 5개 국어를 구사할 수 있었다. 중학교에 다니면서 YMCA에서 영어를 배우고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학교(早稲田大学)에 입학했다. 이 기간에 일본 유학생들이 작성한 조선 2·8독립선언(朝鮮2・8獨立宣言)에 서명하거나, 중학교 동창이었던 여운형(呂運亨)의 일본 방문 환영 대회를 주최하는 등의 활동으로 경찰에 체포되었으나, 형 윤치성(尹致晟)의 일본군(日本軍)에서의 공로 덕분에 투옥은 면했다.[1]
2. 2. 2. 임시정부 지원과 독립운동
1919년 2월 8일, 일본 와세다 대학 유학 중 동경 유학생들의 2·8독립 선언에 참여했다. 훈방 조치된 후 법적 면회가 허가되는 날마다 투옥된 동지들에게 음식물과 옷가지를 넣어주며 옥바라지를 했다.[21][22]이후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으나, 셋째형 윤치성이 일본 육사 출신으로 러일전쟁 때 일본군 기병대 장교로 참전해 용맹을 떨친 덕분에 불령선인 C등급으로 분류되어 구속을 면하고 훈계 방면되었다.
1919년 4월 재동경 YMCA 등을 방문하고 도쿄 시내 번화가와 서양인 거주지 등을 방문하던 중, 재동경 중국 YMCA에서 이승만의 밀명을 받고 파견된 조카 윤보선을 만났다. 윤보선은 당시 중국 남경 정부 요인 서겸(徐謙)의 조카로 위장하고 동경에 잠입한 것이었다.[14] 안재홍, 이광수, 윤일선 등과 함께 윤보선이 제출한 여권을 보고 안도하였다.
윤보선의 동경 잠입을 계기로 2월회를 비밀리에 조직했다. 이는 상하이 임시정부를 후원하기 위한 비밀 결사로서, 윤치영 등이 주동이 되어 김도연, 김준연, 유억겸, 백관수, 박승철, 최원순 등이 참여했다.[14]
2. 2. 3. 흥업구락부 사건과 투옥
1919년 4월 경 재동경 YMCA 등을 방문했던 윤치영은 재동경 중국 YMCA에서 이승만의 밀명을 받고 파견된 조카 윤보선을 만났다. 윤보선은 중국 남경 정부 요인 서겸(徐謙)의 조카로 위장하고 동경에 잠입한 것이었다.[14]윤보선의 동경 잠입을 계기로 윤치영은 2월회를 비밀리에 조직하였다. 이는 상하이 임시정부를 후원하기 위한 비밀 결사였다.[14] 1922년 와세다 대학 법학과를 졸업하였다.
사회주의 사상에는 절대 빠져들지 말라는 사촌형 윤치호의 경고와, 부유층에 대한 비판에 대한 혐오감을 가진 점 때문에 윤치영은 사회주의 청년 단체와는 멀리하였다.[14] 1922년 봄 인천 제물포항으로 귀국하였다. 귀국 직후 그는 상하이로 건너가려 하였으나, 사촌 형 윤치호와 스승 이승만 등의 만류로 고국에 체류하게 된다.
흥업구락부 사건 당시 윤치영은 84회의 고문을 당했다.[107] 윤치영이 서대문 경찰서에 투옥되었을 때 일제 경찰관은 윤치영을 84회나 고문을 강행하였다. 경찰은 흥업구락부의 간사인 윤치영을 전후 84회를 고문하여 물고문, 전기고문, 공중에 배만 묶어서 매달기, 비행기 태우기(거꾸로 매달기), 각목으로 배를 누르고 물을 먹이기, 각목으로 주리 틀기 등의 고문을 행했다.[107]
윤치영을 고문하던 중에 서대문 경찰서를 취재중인 신문기자에게 들켜서 형사들이 그 기자에까지 폭행하여 일본에서 크게 문제가 되었다.[107] 도쿄로부터 사카다니(坂谷) 남작(중앙조선협회장),과 세키야(關屋) 귀족원 의원이 조선총독을 보고 조선의 민족주의자를 다 죽일 수는 없지 않느냐고 경고하였다.[107]
결국 84회의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흥업구락부 동료의 명단을 발설하고 만다. 동아일보의 서정억 기자가 윤치영에게 가해지는 비인간적인 고문을 보고 항의하다가 경찰관에게 구타당해 갈비뼈와 얼굴에 심한 부상을 당했다. 서정억 기자는 죄인이 아니었고 이는 일본 언론계의 맹렬한 항의를 받으면서 윤치영에게 가해지던 고문 조차 완화되었다.
2. 3. 광복 이후
1945년 초, 윤치영은 대외활동을 자제하고 비밀리에 미국의 소리 단파 방송을 청취했다. 1945년 2월 4일 연합국의 얄타 회담 소식과 5월 7일 독일 항복 소식을 접하며 일본의 패망이 가까워졌음을 직감했다.[46]8월 초, 송진우로부터 건국동맹 결성 소식을 들었다. 8월 6일과 8월 9일,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 투하 소식을 접했다.[46] 이후 일본 천황의 항복 성명을 들었다.
광복 후, 윤치영은 이승만의 비서실장으로 활동하며 우익 정치 세력 결집에 힘썼다.[1] 대한민국 헌법 기초에 참여하고, 초대 내무부 장관과 UN 특별 파견 대사를 역임했다.[1]
2. 3. 1.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초기 정치 활동
1948년 1월, UN한국위원단이 한반도에 입국하였다. 인도의 수상 자와할랄 네루가 개인적으로 반한 감정을 갖고 있다는 정보를 접한 그는 UN한국위원단 단원들, 특히 인도 출신 크리슈나 메논의 주변에 사람을 붙여 그의 발언과 행동을 예의주시했다.1948년 4월 7일 압록강 동지회는 YMCA에서 임시회의를 개최하였다. 이때 그는 연단에서 단선단정을 반대하고 평양 일방 남북회담을 적극 추진하고 있는 김구를 지적하며, 중국으로부터 귀국 시에 임시정부를 해체하고 개인 자격으로 돌아오라는 하지 중장의 명령에 도장을 찍고 돌아왔으니 그는 임정을 팔아먹은 사람이라고 성토하였다.[57] 윤치영의 성토가 있자 청중은 흥분하여 연설을 중단시키라며 연단으로 뛰어오르는 사람들이 있었고, 윤치영은 흥분한 청중을 피해 뒷문으로 뛰어 도망쳤다.[57]
그는 김구 등의 단정 수립 반대를 호되게 비판했다.[24] 윤치영은 남북협상이란 기만적인 술책이며 평양 일방 남북회담에 불과하다[57] 고 일축했다.
윤치영은 '백범 선생이 국제정치적 감각이 없었기 때문에 그런 어리석은 판단을 했던 것[24]'이라고 분석했다. 또한 개인적으로 형님 아우 하며 친분이 있던 김규식과의 연락도 끊었다. 김규식은 사촌형 윤치호와 친분이 있었고, 자신의 프린스턴 대학교 동창 김관식의 6촌 형이기도 했다.
그는 대한민국 제2대 대통령인 윤보선의 외삼촌이었다. 윤치영은 오랫동안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측근 및 비서를 지냈다. 그는 이승만의 독립 활동을 돕는 것을 목표로 했다.
사임 후에도 그는 이승만의 비서를 지냈다. 1948년 8월부터 12월까지 대한민국 내무부 장관과 유엔 파견 대사를 역임했다. 1951년부터 1952년까지 제2대 주프랑스 대한민국 공사를 역임했다.
1948년부터 1956년까지 그는 이기붕과 선거에서 패배하고 이후에도 그와의 싸움이 이어졌다.
2. 3. 2. 이승만, 박정희 정권과의 관계
1948년 1월 UN한국위원단이 한반도에 입국하였을 때, 인도의 네루 수상이 반한 감정을 갖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UN한국위원단, 특히 인도 출신 크리슈나 메논의 주변에 사람을 붙여 그의 언행을 예의주시했다.[44]1948년 4월 7일 압록강 동지회 주최 임시회의에서 윤치영은 단선단정을 반대하고 남북회담을 추진하는 김구를 비판하며, 임시정부를 해체하고 개인 자격으로 귀국하라는 하지 중장의 명령에 동의했으니 임시정부를 팔아먹은 사람이라고 성토했다.[57] 이에 청중은 흥분하여 연설 중단을 요구하며 연단으로 뛰어올랐고, 윤치영은 뒷문으로 도망쳤다.[57]
그는 김구 등의 단정 수립 반대를 강하게 비판하며, 남북협상은 기만적인 술책이며 남북회담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24][57] 윤치영은 백범이 국제정치적 감각이 부족하여 어리석은 판단을 했다고 평가했다.[24] 또한, 사촌형 윤치호와 친분이 있던 김규식과의 연락도 끊었다.
1970년 1월 7일, 윤치영은 조국 근대화를 위해 강력한 지도 체제가 필요하다며 대통령 임기 조항을 포함한 헌법 개정의 필요성을 주장했다.[93][96] 1월 8일 김주인도 이에 동조하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남침 위협 속에서 강력한 지도자가 필요하므로 대통령 3선 금지 조항 폐지가 절실하다고 주장했다.[93][97][98]
여당은 개발도상국에서 서구 선진국형 정치 질서와 경제 근대화를 위해 강력한 영도 체제가 필수라고 주장했다. 윤치영은 박정희 대통령에게 조국에 봉사할 기회를 한번 더 주어야 한다며, 필요하다면 헌법적 장애를 제거해야 한다고 말했다.[98] 그는 강력한 지도자와 리더십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유신 개헌을 지지했다. 1970년 12월 공화당 총재 상임고문이 되었다.
1970년 12월과 1971년 6월 국무총리 후보로 거론되었으나 신민당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1971년 미국 고든 대학교에서 명예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7월 1일 대통령 특별보좌관에 임명되었다. 1972년 10월 유신 이후 학생 운동권으로부터 10월 유신의 원흉이라는 비판을 받았으나 긴급조치로 묻혀졌다. 그는 반공 척사대회와 이승복 추모행사 등에 참여하며 야당과 학생 운동가들을 비판했다.
조카인 윤보선 대통령과는 달리 자유당과 민주공화당에 입당하여 정치적으로 대립했다. 이승만과의 관계는 윤보선이 이승만의 측근이었다가 멀어지면서 대립하게 되었으나, 박정희의 경우에는 윤보선의 정적임에도 그의 측근으로 활동했다. 윤보선과는 정치적으로 대립했지만, 개인적으로는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다.
그는 대한민국 제2대 대통령인 윤보선의 외삼촌으로, 오랫동안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측근 및 비서를 지냈다. 그는 이승만의 독립 활동을 돕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사임 후에도 이승만의 비서를 지냈으며, 1948년 8월부터 12월까지 대한민국 내무부 장관과 유엔 파견 대사를 역임했다. 1951년부터 1952년까지 제2대 주프랑스 대한민국 공사를 역임했다.
1948년부터 1956년까지 이기붕과의 선거에서 패배하고 이후에도 그와 갈등을 겪었다. 1961년 5·16 군사정변 이후 박정희의 승인을 받았다.
1963년 12월 17일부터 1966년 3월 30일까지 서울특별시장을 역임했다. 1968년에는 오랫동안 박정희에게 사회보장 문제에 대해 자문했다. 그는 조카 윤보선과 대립했고, 그 결과 박정희를 따르게 되었다.
2. 3. 3. 말년
1970년 12월과 1971년 6월 국무총리 물망에 올랐으나 신민당의 집단 반발로 무산되었다.[44] 1971년 미국을 방문, 고든 대학교로부터 명예문학박사(Doctor of Letters)학위를 받았다. 7월 1일 대통령 특별보좌관에 임명되었다. 1972년 10월 박정희의 10월 유신이 발표된 후, 학생 운동권으로부터 그가 10월 유신의 원흉이라는 성토가 쏟아져나왔으나 곧 긴급조치 발표로 묻혀졌다. 이후 그는 각종 반공 척사대회와 이승복 추모행사 등에 참여하며 야당이 학생들을 선동하여 정권을 차지하는데 혈안이 되어 있다는 점과 야당은 국익보다 권력욕에 눈먼 집단이라며 야당, 학생 운동가들을 성토했다. 또한 일부 야당은 미국을 등에 업고 외세에 의존하려 든다며 질타하였다.조카인 대통령 윤보선과는 달리 여당인 자유당과 민주공화당에 입당하면서 정치적으로 대립하기도 하였다. 이승만과의 관계는 윤보선이 한때 이승만의 측근에 있다가 떨어져 나감으로서 대립하게 되었으나, 박정희의 경우는 윤보선의 정적임에도 그의 측근으로 활동했다. 윤보선과는 정치적으로 대립하였으나 개인적으로는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였다. 계속된 여당 생활로 처세술에 능하다는 부정적인 시각이 있다.
1976년에는 이승만박사 기념사업회 회장이 되었고, 안중근의사숭모회 이사장을 두 번 지냈다. 1978년 한국유신학술원 고문을 지냈다. 말년에는 덕수교회 장로로서 봉사하기도 했다. 그 밖에 이승만 기념사업회 일을 주관하였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 미국을 등에 업은 친일파가 세웠다는 주장에 반박, 학생운동가들과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1979년 12월 9일 국정자문회의 자문위원에 위촉되었다.
1980년 초 그는 민주공화당 당의장 서리, 대한민국헌정회 회장을 역임하였다. 그해 초 박창암이 이갑성의 밀정설을 주장했다가 소송당하자 박창암을 찾아가 아무도 해결 못 할 일을 해결하려 했다며 격려해주기도 했다. 1980년 4월 24일 국정자문회의 운영위원에 위촉되어 국정자문회의 운영회의를 주관하였다. 그해 재혼한 아내 이은혜와 사별하였다. 이후 윤치영은 재혼하지 않았다.
1980년 8월 국정자문회의 위원에 위촉되었다. 1981년 국정자문위원회 위원에 재위촉되었다. 기타 안중근의사숭모회 이사장, 국회의원 동우회 회장 등을 지냈다. 1963년과 1968년 2차례에 걸쳐 민주공화당 의장을 역임하면서 그는 격동기 한국 정치의 한가운데에 서 왔다. 1982년 건국포장을 수여받았다.
이후 이승만 기념사업회와 이승만 재평가 운동, 이승만 복권운동 등에 참여하였다. 정계 은퇴 후에도 1992년까지 서울특별시 직원들의 모임인 서울시 시우회장과 안중근의사 숭모회장을 맡아 활동했다.[28] 왕성한 사회활동을 계속하는 등 삶에 대한 강한 의욕을 보였다. 1980년대 그는 학생운동권 중 민족해방계열로부터 친일파라는 비난을 받아왔다. 민족해방파의 이승만의 정부 수립을 단독 정부로 보고, 단독정부 수립은 한국 분열의 원인이라는 주장을 하자 그는 미국에 의한 분단 주장을 반박하고, 박용만 등과 함께 대한민국 정부 수립의 정당성을 역설하며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1988년 8월 18일의 경향신문과의 기자회견에서는 이승만과 박정희를 가리켜 "정치란 어떤 것인지 보여준 인물들"이라며 두둔하기도 했다.
1985년 이준열사 기념사업회 회장에 선출되었다. 이후 한국자유총연맹 고문에 위촉되었고, 우익단체인 건국청년운동협의회를 조직하여 회장이 되었다. 이후 서북청년단, 대한독립청년단, 대동청년단, 민족청년단 등에서 활동하던 과거 우익 청년운동가 출신 회원 30만 명을 거느리고 활동하였다.[99]

윤치영은 87세가 넘어서도 서울 CC클럽에 혼자 나와 골프를 치곤 했다.[100] 사람들이 "선생님. 어떻게 혼자 나와 치십니까" 하면 그가 "이봐, 다 죽었잖아"라고 일갈했다. 조선일보 회장 방우영은 위트 속에 비애가 담겼다고 평가했다.[100]
1986년 국회의원동우회 회장에 선출되고 1987년 재선되었으며 전국청년운동협의회총본부 회장 등을 지냈다. 1987년 3월 12일 구순 기념 논문집을 봉헌하였다. 그해 건대사태가 발생하자, 그는 "최근과 같은 심각한 사태는 이제 종식해야 될 때라고 생각합니다. 역사에 비춰 결과가 불을 보듯 빤한 일을 익지 않은 아집으로 나라를 망치려는 이들이 많아 큰 걱정이에요"라고 지적했다.[101]
1987년 11월 4일 총리공관에서 열린 만찬에 국무총리 김정렬의 초청을 받았다. 1989년 6월 모교인 중앙고등학교로부터 자랑스러운 중앙인상을 수상하였다.
1986년 2월 2·8독립선언기념관설립추진위원회 위원장, 1987년부터 1990년까지 건국청년운동협의회 총본부 회장을 지냈다. 1989년 12월 23일 서울 프레스센터 20층에서 열린 건국청년운동사 출판 기념식에 최병렬 문화공보부 장관과 함께 임석하였다. 1989년 반공주의적 성향의 잡지 한국논단이 창간하자, 필진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다. 1990년에는 대한매일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나는 만년 여당인가 봅니다"라는 발언을 하였다.
1991년 한국논단과의 인터뷰에서 이승만이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한다며 이승만의 재평가를 주장하였다. 1992년 민주자유당의 김영삼이 출마하자 구 군사정권 출신인 제3공화국 당시 총리인 정일권, 5공, 6공화국의 실세인 정호용 등이 김영삼을 지지해 줄 것을 호소하며 지지를 보냈다. 그러나 그는 김영삼 지지 선언에 불참하였다.
1995년 3월 27일 이승만 박사 탄신 120주년 기념 예배에 참석하였다.[102] 만년에 그는 자신이 1920년대 미국 유학 시절부터 수집해온 장서 3,118권과 제헌국회 개헌 기념사진 등 기념물 121점을 기증했다.[28] 만년에 그는 서울 충정로에서 거주하였다. 그는 자신의 집에 이름을 쓴 문패를 달지 않고 윤저(尹邸)라는 문패를 달았다.[103] 1990년 조카인 윤보선이 서울대 병원에 입원하자 직접 찾아 병간호를 하였고, 윤보선이 92세를 일기로 서거하자 90대의 고령에도 윤보선의 아들, 며느리 등과 함께 문상객들을 맞이하기도 했다.
만년에 그는 1920년 미국 유학 이후부터 수집하던 책 3,118권과 국회의원 재직 시절 문서 121권을 국회 도서관에 무상 기증하였다. 1996년 1월 병환으로 서울 풍납동 중앙병원에 입원하였다. 1996년 2월 9일 오후 5시 17분 서울 풍납동 중앙병원 병실에서 사망했다. 사망 당시 그의 나이는 99세였다. 2월 13일 10시 서울특별시 성북동 덕수교회에서 발인하였고, 장례는 간소하게 치렀다.
3. 사상과 신념
윤치영은 평소 나이가 어리거나 아랫사람에게 묻는 것을 부끄러워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쳤다. 또한 넓은 곳을 다니며 가릴 것 없이 많은 것을 보고 배워야 한다고 강조했다.[109] 그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불치하문(不恥下問)하고 역사를 참고하여 후진들이 널리 보고 배워 전문 지식을 익히고 큰일을 그르치지 않기를 바란다고 하였다.[109] 그는 또 우리가 나아갈 길은 미래지향적인 삶이라고 주장하였다. 일제 강점기에서 벗어난 지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친일 논의가 있지만, 과거에 집착하는 것은 현명하지 않으며, 역사는 교훈으로 삼고 새로운 사고와 미래지향적인 안목으로 전향적인 자세를 가져야 한다고 했다.[110]
윤치영은 강력한 지도자만이 안정된 국가를 이룩할 수 있다고 확신하였다. 유능한 지도자를 중심으로 전 국민이 일치단결해야 한다는 신념은 1938년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고문을 당하면서 더욱 강화되었다. 그는 강력한 지도자의 지도 하에 일치 단결하여 부국강병을 이룩해야 한다는 부국강병론을 주장했다. 그는 이승만에게 조지 워싱턴과 케말 파샤를 합친 정치인이 될 것과 대통령과 스승, 천황을 겸할 것을 여러 차례 권고했다. 이는 임금이면서 동시에 스승, 아버지여야 한다는 조선 시대의 군사부일체론과 유사하다. 강력한 지도자 아래 일치단결하여 부국강병을 이룩해야 한다는 그의 확신은 박정희의 삼선개헌과 유신 선포에 대한 확고한 지지로 이어졌다.
그는 일찍부터 이승만에게 '국부(國父)'로서 건국 방략을 구체적으로 제시해줄 것을 요청하였다.[27] 또한 이승만에게 '집정관 겸 천황 겸 대통령의 지위와 권력'을 갖춘 독재적 지도자가 되라[27]고 권고하면서 자신은 이승만을 위해 '견마지로(犬馬之勞)의 힘'을 다하겠다고 다짐하였다.[27] 그는 많은 청년을 모아 이승만의 측근에 배치하였고, 이승만의 동지회의 뉴욕, 하와이, 캘리포니아, 샌프란시스코, 필라델피아 등 한국인 유학생과 이민자들이 모인 곳을 찾아다니며 청년들을 포섭하였다.
그는 1968년부터 박정희에 의해 추진된 삼선 개헌을 적극 지지하였다. 그는 '민족 중흥을 위해서는 강력한 리더십이 필요하며, 단군 이래 민족의 위인인 박정희 대통령이 계속 집권하기 위해서는 개헌을 해야 하고, 헌법상의 대통령 연임 금지 조항을 폐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90] 이것만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도발을 막고 경제 건설을 지속적으로 할 수 있는 길[90]'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강력한 통치자를 중심으로 전국민이 사심 없이 일치단결하는 것이 국력을 신장시키는 지름길이라 하였다.
그는 4·19 혁명을 혁명으로 인정하지 않고 '4.19 사태'로 평가하였다. 또한 4·19 혁명을 두고 특무대장을 지낸 김창룡 육군 소장의 요절을 아쉬워하기도 하였다.[77] 그는 4.19를 두고 이승만을 축출하려는 미국의 계략과 장면의 욕심을 비난했고, 4.19 이후의 사건 처리 미숙으로 이승만까지 하야하게 되었다고 보았다. 그는 김창룡이 오래 살았다면 4.19 사태와 같은 허술한 사태 처리로 이승만이 맥없이 하야하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보았다.[77] 그는 죽을 때까지 4·19 혁명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제1공화국 기간 중의 부패와 선거 관련 문제는 이승만과는 무관하다고 확신했다. 그는 '50년대의 그러한 행태들은 자유당 정권의 부패한 세력들에 의해 주도된 것이다. 가령 이기붕, 박마리아 같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권력을 더욱 유지하고 심지어는 대권을 생각해서 저지른 짓들이다.[112]'라고 주장했다.
그는 1970년대부터 이승만이 독재자라는 주장은 낭설이며 우의마의라는 단어의 어원을 설명하며, 이승만이 3선으로 퇴진하려 했으나, 이승만을 등에 업고 권력을 행사하려는 자유당 측근들의 간계로 관제 3선 출마 시위가 있었고, 이승만은 속은 것에 불과하다는 주장을 역설했다. 1979년 이후에는 공공연히 이승만의 3선 퇴진설과 우의마의라는 단어의 어원을 설명하며 학생 운동권의 이승만 독재자설에 반론을 제기했다.
1991년 한국논단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우리는 거시적인 차원에서 이박사를 평가해야 할 것이다. 그분은 평생을 독립투쟁에 몸바쳐 온 분이고, 민주주의를 가장 신봉하는 인물이었다.[112]'라고 평하였다.
윤치영은 1959년 조봉암이 용공 혐의로 기소되었을 때부터 조봉암이 용공분자는 아니라고 하였다. 그는 조봉암이 수감되었을 때 장택상과 함께 조봉암의 구명운동을 폈지만 실패로 돌아갔다. 후일 그는 '진보당 사건으로 연루되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불운을 겪었지만, 주변 정세를 잘못 판단하여 용공분자로 몰리는 불운을 가져오지 않았나 하는 안타까움과 애석함이 남아 있다.[113]'라고 평하였다. 한 인터뷰에서는 조봉암을 회고하면서 '비극의 주인공[76]'이라며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윤치영은 공산주의가 인간의 개성과 자유를 억압하는 비인간적인 사상이라고 규정했다. 그는 자유야말로 인간이 본연적으로 원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런데 공산주의는 이러한 인간의 본성을 인정하지 않는 사상이라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그는 '공산주의는 인간의 자유와 천부의 개성을 획일화시키며 과학 문명의 먼 장래를 내다보지 못한 비인간적 주의주장[110]'이라고 보았다. 그는 공산주의는 인간의 자유와 천부의 개성을 획일화시키며 과학 문명의 먼 장래를 내다보지 못한 비인간적 주의주장임을 일찍이 간파하고 이 나라의 주권을 남한에서만이라도 찾으려 했던 이 박사의 노선에 적극 찬동하였다고 한다.[110]
윤치영은 1980년대의 한 인터뷰에서 남한의 재벌들을 비판했다. 그는 재벌들이 시류에 잘 영합하는 것을 내심 아니꼽고 불쾌하게 바라봤다. 그는 '재벌들이 어디서 생겼소? 모두 이승만과 박정희(정권) 한테서 생긴 것 아니요? 그런데 그들이 요즘 어떻게 합니까? 이승만과 박정희를 어디 은인(恩人) 대접 합니까?[114]'라며 재벌들을 비판하기도 했다. 윤치영은 대한민국 재벌의 대다수는 이승만과 박정희가 만든 결과물로 인식하였다. 한편 그는 1960년 4·19 혁명과 관련해서 김창룡의 요절을 아쉬워했다.[77] 그는 4·19 혁명에 대해서 부정적이었다.[77][115]
4. 평가와 논란
윤치영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그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에 참여하기도 했지만, 해방 이후에는 이승만의 측근으로 활동하며 독재를 옹호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1944년 9월 국민총동원총진회 중앙지도위원을 맡았다.[45] 1944년 11월, 안재홍은 일본 정무총감 엔도가 여운형과 윤치영에게 중국의 장제스와 화평 교섭을 위한 밀서를 전달해 달라고 부탁했다고 전했다. 윤치영은 임시정부와 광복군이 있는 상황에서 이는 위험한 일이라며 거절했다.[44] 1945년 초, 일본이 불령선인으로 지목한 사람들을 처형할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하고 도주하려다 양주군에서 다시 되돌아왔으며, 이후 충격을 받고 공황상태에 빠졌다.
해방 후, 1948년 4월 7일 압록강 동지회에서 김구를 임정을 팔아먹은 사람이라고 비판하여 소동이 일기도 했다.[57] 그는 김구 등의 단정 수립 반대를 호되게 비판했고,[24] 남북협상은 기만적인 술책이라고 일축했다.[57] 윤치영은 '백범 선생이 국제정치적 감각이 없었기 때문에 그런 어리석은 판단을 했던 것'이라고 분석했다.[24]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는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윤치영을 포함시켰으나, 그의 독립운동 공적 때문에 논란이 되었다. 2010년에는 친일인명사전에 오른 다른 15명과 함께 서훈취소가 검토되었고,[105] 건국포장이 취소되었으나, 친일 의혹 여부는 여전히 논란 중이다.
1941년 태평양 전쟁 당시, 윤치영은 임전대책협의회 채권가두유격대에 참가하고, 동양지광사 주최의 미영타도(美英打倒) 대좌담회 연사로 참여하여 황민(皇民)의 사명을 연설했다.[41] 1941년 12월 20일 "미영 타도 대좌담회" 연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러한 친일 행적 때문에 민족문제연구소의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로 지목되었다.
그러나 윤치영은 1963년 서울특별시장 재직 당시 안중근의사 숭모회를 설립하고 초대와 3대 이사장을 역임했다. 1982년에는 건국포장이 추서되어 독립유공자로 서훈되었다.
윤치영은 자신에게 제기된 친일파 주장은 오해라고 주장했다. 그는 정치와 혁명, 독립운동은 구별되어야 하며, 북에 공산당을 둔 현실에서 국민은 서로 화합하여 이승만 대통령의 노선에 따라 국가 건설에 매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108]
윤치영은 창씨개명에 강하게 반대했다. 1940년 1월 문중 회의에서 창씨개명을 반대했고,[39] 5월 문중이 '이토'로 창씨하자 조선은 반드시 독립될 것이라며 비판했다. 그는 창씨개명 후에도 한국식 이름인 윤치영을 고집했다.[111]
결국 윤치영은 조선총독부의 요시찰 인물이 되었다. 1945년 여름, 총독부 경무국에 출입하는 지인으로부터 독립운동 관련 조선인 유지들을 사형시킬 계획을 전해 듣고 도주를 시도했으나, 결국 집으로 돌아왔다.[46] 미 군정 시기, 윤치영은 조선총독부 서류에서 1945년 초와 8월 패전 직전 조선인 독립운동가와 요시찰 인물들을 안양에 모아 살해할 계획과 자신의 이름이 포함된 것을 확인하고, 이를 회고록에 기록했다.[46]
4. 1. 긍정적 평가
윤치영은 청산유수와 같은 달변가로 널리 알려졌다. 독립운동가, 학자, 정치가로서 두 세기에 걸쳐 온갖 영욕을 겪은 현대사의 증인이었다.[28] 특히 제헌국회의원과 초대 내무부 장관을 지내면서 대한민국 정부의 출범과 발전에 나름대로 족적을 남겼다.[28] 정계 은퇴 후에도[28] 왕성한 사회활동을 계속하는 등 삶에 대한 강한 의욕을 보였다.[28] 2008년 8월의 ‘한국사 시민강좌’ 학술대회에서는 건국의 기초를 다진 32명을 선정할 때 정치 부문의 한 사람으로 평가되기도 하였다.[104] 보수주의 세력 일각에서는 그가 오랫동안 이승만을 측근에서 성실하게 보좌한 점 역시 높이 평가하고 있다.4. 2. 부정적 평가
윤치영은 1948년 김구의 단정 수립 반대를 비판하며, 남북협상은 기만적인 술책이고 평양 일방의 남북회담에 불과하다고 일축했다.[57] 그는 김구가 임시정부를 해체하고 개인 자격으로 귀국하라는 하지 중장의 명령에 서명했다며 임정을 팔아먹은 사람이라고 성토했다.[57] 또한 국제정치적 감각이 부족하다며 비판하고,[24] 개인적인 친분이 있던 김규식과의 연락도 끊었다.1972년 10월 유신 이후, 학생 운동권은 윤치영을 10월 유신의 원흉이라 비판했으나, 긴급조치 발표로 곧 묻혔다. 그는 반공 척사대회와 이승복 추모행사 등에 참여하며 야당과 학생 운동가들을 성토했다.
윤보선과 달리 자유당과 민주공화당에 입당하며 정치적으로 대립했고, 여당 생활로 처세술에 능하다는 비판도 받았다. 1987년 건대사태에 대해서는 "나라를 망치려는 이들이 많아 걱정"이라고 지적했다.[101]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선정되었으나, 독립운동 공적 때문에 논란이 있다. 2010년 친일 행적으로 건국포장이 취소되었으나, 친일 의혹 여부는 논란 중이다.
윤치영은 강력한 지도자만이 안정된 국가를 이룩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1938년 흥업구락부 사건을 겪으며 이러한 신념은 더욱 강화되었다. 그는 이승만에게 조선시대의 군사부일체론과 유사하게 대통령, 스승, 천황을 겸하는 지도자가 될 것을 권고했다. 이러한 확신은 박정희의 3선 개헌과 유신 선포 지지로 이어졌다. 이승만에게 '국부(國父)'로서 건국 방략을 제시하고, '집정관 겸 천황 겸 대통령'의 권력을 갖춘 독재자가 되라고 권고하며 자신은 '견마지로(犬馬之勞)의 힘'을 다하겠다고 다짐했다.[27]
1968년 박정희의 삼선 개헌을 지지하며, '민족중흥을 위해서는 강력한 리더십이 필요하며, 단군 이래의 민족의 위인인 박정희 대통령이 계속 집권하기 위해서는 개헌을 해야 한다.[90]'라고 주장했다.
4·19 혁명을 '4.19 사태'로 평가하고, 김창룡의 요절을 아쉬워하며 그가 있었다면 이승만이 하야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라고 보았다.[77] 제1공화국의 부패와 선거 문제는 이승만과 무관하며, 이기붕, 박마리아 등이 권력을 위해 저지른 일이라고 주장했다.[112] 이승만이 독재자라는 주장은 낭설이며, 자유당 측근들의 간계로 3선 출마 시위가 있었고, 이승만은 속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1991년 인터뷰에서 이승만을 평생 독립투쟁에 몸바친 민주주의 신봉자라고 평가했다.[112] 1959년 조봉암이 용공 혐의로 기소되었을 때 조봉암은 용공분자가 아니라며 장택상과 함께 구명운동을 폈지만 실패했다. 조봉암이 주변정세를 잘못 판단하여 불운을 겪었다고 평가했다.[113]
1980년대 인터뷰에서 남한의 재벌들이 이승만과 박정희 정권에서 생겼는데, 그들을 은인 대접하지 않는다며 비판했다.[114] 이기붕과 함께 이승만의 귀를 막았다는 비판도 있으며, 최기일은 윤치영과 이기붕이 이승만에 대한 여론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고 비판했다.[48]
박노자는 그를 극우주의자라고 평가하며,[86] 1960년대 서울 이주 제한 주장을 '전체주의적 꿈'이라고 평가했다.[86] 정경모는 여운형과 김구의 암살 배후로 지목했다.[116]
4. 3. 논란
윤치영은 1948년 4월 7일 압록강 동지회 임시회의에서 김구가 임시정부를 해체하고 개인 자격으로 귀국하라는 하지 중장의 명령에 도장을 찍고 돌아왔다며, 임정을 팔아먹은 사람이라고 성토했다.[57] 이에 청중이 흥분하여 연설 중단을 요구하며 연단으로 뛰어오르는 소동이 벌어졌고, 윤치영은 뒷문으로 도망쳤다.[57]그는 김구 등의 단정 수립 반대를 강하게 비판하며, 남북협상은 기만적인 술책이며 평양 일방의 남북회담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24][57] 윤치영은 김구가 국제정치적 감각이 부족하여 어리석은 판단을 했다고 평가했으며,[24] 사촌형 윤치호와 친분이 있던 김규식과의 연락도 끊었다.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는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윤치영을 포함시켰으나, 그의 독립운동 공적 때문에 논란이 되었다. 2010년에는 친일인명사전에 오른 다른 15명과 함께 서훈취소가 검토되었고,[105] 건국포장이 취소되었으나, 친일 의혹 여부는 여전히 논란 중이다.
흥업구락부 사건 당시 윤치영은 84회의 고문을 당했다.[107] 서대문 경찰서에 투옥되었을 때, 일본 경찰관은 윤치영에게 물고문, 전기고문, 비행기 태우기(거꾸로 매달기) 등 84회의 혹독한 고문을 가했다.[107] 윤치영은 타고난 체력과 달변으로 시간을 끌며 버텼으나, 결국 동료들의 명단을 발설하고 말았다. 동아일보의 서정억 기자가 이 고문 사실을 알고 항의하다가 경찰관에게 구타당하는 사건이 발생했고, 이는 일본 언론의 항의를 불러일으켜 고문이 완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1941년 태평양 전쟁 당시, 윤치영은 임전대책협의회 채권가두유격대에 참가하고, 동양지광사 주최의 미영타도(美英打倒) 대좌담회 연사로 참여하여 황민(皇民)의 사명을 연설했다.[41] 또한 {매일신보} 사설을 통해 대동아공영권 건설에 미칠 회담의 영향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1941년 12월 20일 "미영 타도 대좌담회" 연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러한 친일 행적 때문에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로 지목되었다.
그러나 윤치영은 1963년 서울특별시장 재직 당시 이은상, 우덕순 등과 안중근의사 숭모회를 설립하고 초대와 3대 이사장을 역임했다. 1982년에는 건국포장이 추서되어 독립유공자로 서훈되었다.
윤치영은 자신에게 제기된 친일파 주장은 오해라고 주장했다. 그는 정치와 혁명, 독립운동은 구별되어야 하며, 일제에 협력했다는 이유로 신생국가가 이들을 모두 추방하고 처벌하는 것은 볼셰비키 혁명이나 프랑스 혁명과 같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북에 공산당을 둔 현실에서 국민은 서로 관용과 용서로 이해하고 화합하여 이승만 대통령의 노선에 따라 국가 건설에 매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108]
윤치영은 창씨개명에 강하게 반대했다. 1940년 1월 문중 회의에서 창씨개명을 반대했고,[39] 5월 문중이 '이토'로 창씨하자 조선은 반드시 독립될 것이라며 잘못된 결정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창씨개명 후에도 한국식 이름인 윤치영을 고집했다. 1941년 동양지광 주최 미영타도 좌담회와 조선임전보국단 개최식에서도 본명인 윤치영을 사용했다.[111]
결국 윤치영은 조선총독부의 요시찰 인물이 되었다. 1945년 여름, 총독부 경무국에 출입하는 지인으로부터 10월 17일 안양 근교에서 독립운동 관련 조선인 유지들을 사형시킬 계획을 전해 듣고 도주를 시도했으나, 결국 집으로 돌아왔다.[46]
미 군정 시기, 윤치영은 조선총독부 서류에서 1945년 초와 8월 패전 직전 조선인 독립운동가와 요시찰 인물들을 안양에 모아 살해할 계획과 자신의 이름이 포함된 것을 확인하고, 이를 회고록에 기록했다.[46]
5. 가족 관계
윤치영 가계도 | ||
---|---|---|
직계 | 내용 | 비고 |
증조부 | 윤득실(尹得實, 1768년 - 1823년 9월 25일) | |
증조모 | 남양홍씨(1765년 - 1816년 5월 7일) | |
종조부 | 윤교동(尹敎東, 1786년 - 1829년 5월 8일) | |
종조모 | 나주임씨(羅州林氏) | |
종조부 | 윤우동(尹祐東) | |
조부 | 윤취동(尹取東, 1798년 7월 18일 - 1863년 12월 21일) | |
조모 | 고령신씨(高靈申氏) | |
안동김씨(安東金氏, 1800년? - 1900년 10월) | 아버지 윤영렬, 큰아버지 윤웅렬 형제의 생모 | |
고모 | 해평윤씨(1835년 - 1920년) | |
고모부 | 이원시(李源始, 본관은 용인), 2남 2녀 | |
이정구(李鼎九), 본관은 우봉 | 고종매부 | |
고종사촌 | 용인이씨 | |
부 | 윤영렬(尹英烈, 1854년 4월 15일 - 1939년 11월 4일) | |
모 | 한진숙(韓鎭淑, 1851년 ~ 1938년 2월 18일) | 한진창(韓鎭昌)의 누이 |
첫째 부인 | 이병영(李丙暎, 1900년 ~ 1926년(?) 2월 7일) | 이병도의 여동생, 이봉구(李鳳九)의 딸[119] |
아들 | 윤기성(尹琦成, 1917년 ~ 1923년) | 요절 |
둘째 부인 | 이은혜(異恩惠, 1902년 4월 21일~1980년 8월 23일) | 이화학당 여교사 역임[120] |
딸 | 윤성선(尹成善, 1924년 8월 11일 ~ ) | 숙명여자대학교 교수 |
사위 | 김상석(金相晳) | 김성수의 아들 |
외손자 | 김병기(金炳基, 1962년 ~ ) | 고려대학교 교수, 고려대학교 국제대학원장 역임 |
아들 | 이름 미상, 1940년생 | 요절 |
아들 | 윤인선(尹仁善, 1944년 1월 9일 ~ ) | 백제병원 기획실장, 국회사무처 서기관 역임 |
며느리 | 노호경(盧好京, 1948년 10월 23일 ~ ) | 의학자 노동두(盧東斗)의 딸 |
손자 | 윤인구(尹寅求, 1972년 9월 13일 ~ ) | 방송인·KBS아나운서 |
손자 | 윤한구(尹漢求, 1975년 3월 31일 ~ ) | |
큰 형 | 동암윤치오(東庵尹致旿, 1869년 8월 5일 ~ 1950년 12월 22일)[117] | |
둘째 형 | 동야윤치소(東野尹致昭, 일본식 이름: 伊東致昭, 1871년 8월 25일 ~ 1944년 2월 20일)[118] | |
조카 | 윤보선(海葦尹潽善, 1897년 8월 26일 ~ 1990년 7월 18일) | 대한민국 대통령 |
셋째 형 | 악연윤치성(岳淵尹致晟, 1875년 음력 3월 2일 - 1936년 양력 8월 11일) | |
넷째 형 | 간송윤치병(澗松尹致昞, 1880년 음력 6월 4일 - 1939년 양력 1월 24일) | |
다섯째 형 | 남강윤치명(南岡尹致明, 1885년 음력 9월 - 1944년 양력 4월 21일) | |
첫째 누나 | 윤활란(尹活蘭, ? - ?) | 5남 3녀 |
둘째 누나 | 윤정숙(尹貞淑, 1889년 6월 14일 - 1979년 11월 24일) | 아명은 노덕(老德) |
둘째 매형 | 이병림(李丙琳) | 사학자 이병도의 6촌 형, 1남 4녀 |
외조카 | 이영희 | 이화여자대학교 음과대학 교수 |
외조카 | 이달희 | |
외조카 사위 | 한상준 | 제6대 한양대학교 총장 |
남동생 | 이름 미상 | |
서모 | 이름 미상[119] | 아버지 윤영렬의 첩 |
이복 여동생 | 윤씨(이름 미상, ? ~ ?) | |
외조카딸 | 허현자(許炫子) | |
외조카사위 | 김두만(金斗萬, 1927년 2월 16일 ~ ) | 전 공군참모총장, 대붕상사 회장 역임 |
진외종손 | 김상우(金翔宇, 1954년 10월 14일 ~ ) | 정치가·국회의원, 정치학자 |
서모 | 장복첨(張福瞻, 1902년 1월 22일 ~ 1950년 8월 3일) | |
이복 동생 | 윤치정(尹致晶, 1921년 11월 25일 ~ ?) | |
이복 여동생 | 윤길희(尹吉喜, 1924년 6월 16일 ~ 1973년 6월 28일) | |
이복 여동생 | 윤인희(尹麟喜, 1927년 1월 17일 ~ ?) | |
이복 동생 | 윤치일(尹致日, 1935년 2월 10일 ~ 1985년 4월 8일) | |
이복 제수 | 김정숙(金貞淑, 김해김씨, 1938년 3월 10일 ~ ) | 김계준(金溪俊)의 딸 |
조카 | 윤우선(尹宇善, 1960년 8월 5일 ~ ) | |
조카 | 윤혜선(尹慧善, 1962년 3월 24일 ~ ) | |
조카 | 윤필선(尹弼善, 1964년 12월 20일 ~ ) | |
조카딸 | 윤선경(尹仙卿, 1966년 10월 26일 ~ ) | |
큰아버지 | 윤웅렬(尹雄烈, 1840년 4월 17일 - 1911년 9월 22일) | |
큰어머니 | 전주이씨(全州李氏, 1844년 9월 27일 - 1936년 2월 12일) | 이름은 이정무 |
사촌 누나 | 윤경희(尹慶姬, 1862년 - 1931년) | |
사촌 형 | 좌옹윤치호(佐翁尹致昊, 1864년 12월 26일 - 1945년 12월 9일) | |
큰어머니 | 다옥(茶玉) | 윤웅렬의 기생 첩 |
큰어머니 | 김정순(金貞淳, 1879년 3월 15일 - 1959년 11월 16일) | |
사촌 형 | 남포 윤치왕(南圃 尹致旺, 1895년 2월 17일 - 1982년 12월 21일) | |
사촌 형수 | 이모임(李慕姙, ? - 사망) | 이희덕(李熙悳)의 딸, 창씨명은 伊東慕姙 |
사촌 동생 | 윤치창(尹致昌, 1899년 3월 5일 ~ 1973년 10월 1일) | |
사촌 제수 | 손진실(孫眞實, 1901년 - 1990년) | 손정도의 딸, 다른 이름은 원미(元美) |
큰어머니 | 이름 미상 | 윤웅렬의 첩 |
사촌 형 | 윤길용(尹吉鏞, 1894년 - 요절) | |
외증조부 | 한익상(韓益相, 1767년 ~ 1846년) | 병조참판 역임 |
외조부 | 한치원(韓致元, 1821년 ~ 1881년) | 호는 동랑(冬郎), 부호군 역임 |
외삼촌 | 한진창(韓鎭昌, 1858년 1월 26일 ~ 1935년 2월 2일) | |
사돈 | 김성수(金性洙, 1891년 10월 11일 ~ 1955년 2월 18일) | 호는 인촌(仁村), 딸 윤성선의 시아버지 |
사돈 | 남궁억(南宮檍, 1863년 12월 27일 ~ 1939년 4월 5일) | 5촌 조카 윤광선의 장인 |
사돈 | 민영철(閔泳喆, 1864년 ~ 1912년) | 형 윤치오의 딸 윤시선의 시아버지이자 형 윤치소의 아들 윤보선의 장인, 민영환의 6촌 동생 |
사돈 | 현진건(玄鎭健, 1900년 8월 9일 ~ 1943년 4월 25일) | 7촌 조카사위 현정건의 동생이며, 형 윤치오의 후처 현송자의 6촌 동생 |
사돈 | 손정도(孫貞道, 1872년 7월 26일 ~ 1931년 2월 19일) | 사촌동생 윤치창의 장인 |
사돈 | 손원일(孫元一 , 1909년 5월 5일 ~ 1980년 2월 15일) | 사촌동생 윤치창의 처남 |
사돈 | 노동두(盧東斗, 1926년 ~ 2002년 11월 26일)[121] | 의학박사, 신경정신과 의사 |
역사학자 두계 이병도와는 이중으로 사돈관계를 형성했다. 이병도는 윤치영의 처남인 동시에 윤치소의 사돈이었다.
윤치소의 넷째 딸 윤계경(尹桂卿, 1918년 2월 13일 ~ ?)은 이재영(李宰寧, ? ~ ?)과 결혼했다.[122] 이재영은 이병도의 형 이병묵(李炳默)의 아들로[122], 수군절도사 이봉구(李鳳九)의 손자이다.
윤치소의 동생 윤치영은 이병영(李丙暎, 1900년 ~ )과 결혼했는데, 이병영은 수군절도사 이봉구(李鳳九)의 딸, 사학자 이병도의 여동생이었다.
이병도, 이병묵은 윤치소의 동생 윤치영의 처남인 동시에 윤치소의 딸이 이병도의 조카와 결혼하여 윤치영의 형 윤치소의 사돈이었다. 동시에 이병도, 이병묵의 6촌 형 이병림은 윤치소, 윤치영의 매제, 매형이 된다. 윤치소의 여동생이자 윤치영의 둘째 누나인 윤정숙(尹貞淑)은 이병도, 이병묵의 6촌 형 이병림(李丙琳)과 결혼 했다. 또한, 형 윤치오의 아들인 윤승선은 이병도의 6촌 여동생인 이을남과 결혼했다. 조카며느리 이을남은 윤치영의 첫 부인 이병영의 6촌 여동생이 된다.
6. 저서
- 《윤치영의 20세기 : 동산회고록(尹致暎의 20世紀 : 東山回顧錄)》 (삼성출판사, 1991)
- 《건국청년운동사(建國靑年運動史)》
- 《민족의 갈 길》
7. 기타
- 말년까지 '멋쟁이'라는 별명에 어울리게 골프를 즐겼으며 빨간 넥타이를 자주 맸다. 빨간 넥타이는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되기도 했다.[28] 윤치영의 공보비서를 지낸 최기일은 '그는 한국에서 내가 보았던 사람 중에 옷을 가장 잘 차려입은 사람이었다. 그는 훤칠한 키에 깡마른 편이었지만 전체적으로 그의 신체적 외관은 매우 인상적이었다.'고 묘사했다.[48]
- YMCA 청년회에 있을 때 축구부와 야구부에 관여하였고, 야구부의 주장 겸 감독으로도 활동했다. 광복 이후에도 이승만을 모시고 체육경기장을 늘 찾았으며, 1947년 서울시 체육경기연맹에 참여하기도 했다. 80대의 나이에도 골프, 축구, 족구 등에 참여하였다.
- 처음 보는 이에게는 거만하고 거칠게 대하였으나, 젊은 사람들과 대화하기를 좋아하여 나이에 상관없이 여러 젊은이들이 그와 쉽게 어울렸다.
- 9대 선조 윤두수의 영정 족자, 아버지 윤영렬과 어머니 한진숙의 사진, 이승만 사진, 박정희 사진, 더글러스 맥아더와 장개석의 사진을 늘 자신의 옆에 두었다.
- 윤치영의 가문은 장수하는 것으로도 유명하였다. 1984년 윤치영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우리 집안에서는 80세 이전에 별세하는 것은 예외적이며 환갑을 맞은 사람은 30대 젊은이 취급을 받는다."고 농담을 하기도 했다.[123]
- 19세기 한국 남성 중 이례적으로 요리도 할 줄 알았던 그는 직접 요리를 하여 이승만의 돈암장을 찾아온 김원봉과 박헌영을 대접했다. 김원봉은 윤치영이 손수 요리해서 차려온 음식을 먹었으나, 박헌영은 독이 들어있을지도 모른다며 끝까지 입에 대지 않았다.
- 제5대 대통령 선거 당시 야당 대통령후보들을 겨냥, "만약 구정치인들이 정권을 잡는다면 몇 달 안에 혁명이 다시 일어날 것"이라는 폭탄발언을 하여[28] 정가에 파문을 일으켰다.[28]
- 개인적으로는 이범석, 안호상 등과 가까이 지냈다.
- 이승만의 또 다른 측근이었던 장택상과는 앙숙이었다. 후에는 이기붕과도 앙숙이었고, 장면이 이승만의 곁을 떠나자 장면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시각을 보였다. 목사로 국무총리서리에서 3번 인준 부결된 이윤영과 가까이 지냈으며 그에게는 호의적이었다.
- 1958년 진보당 사건으로 검거되어 사형당한 조봉암을 옹호하기도 하였다. 조봉암이 체포되었을 때 그는 조봉암은 용공분자는 아니라고 옹호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조봉암의 사형이 집행된 뒤에도 윤치영은 그가 용공분자는 아니라고 진술하였다. 그에 의하면 '그가 진보당 사건으로 연루되어 결국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불운을 겪게 되었지만 그가 그리 된 데에는 주변정세를 잘못 판단하여 용공분자로 몰리는 불운을 가져오지 않았나 하는 안타까움과 애석함이 남아 있다.[113]'는 것이다. 조봉암의 체포 당시 자유당과 민주당 양측에서 조봉암을 공격하는 중, 장택상과 함께 조봉암을 옹호한 몇 안 되는 정치인이기도 했다.
- 윤치영은 독실한 신앙인으로 덕수교회 장로로 선출되었다. 그는 독실한 신앙인으로 90이 넘은 고령에도 장로 자격으로 다니던 교회인 덕수교회의 각종 행사를 도맡아서 주관하였다. 한편 그는 해방 정국에서 우익 운동을 할 때부터 '나는 (이승만의) 비서니까 다 알고, 다 내 말이면 된다'하고 다녔다.[58]
- 그는 13대 서울특별시장을 역임했다. 그의 조카 윤보선은 제2대 서울특별시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윤보선이 서울 시장에 임명되었을 당시 그는 내무부 장관이었다. 그의 조카사위인 장석윤 역시 후에 내무부 장관을 지내기도 했다.
- 1948년 11월 친이승만 성향의 정당 대한국민당을 창당하는데 참여하였다.
- 1950년 1월 27일 민국당과 무소속 일부가 제출한 내각책임제 개헌안에 대해서, "개헌을 추진하는 자들이야말로 정권욕에 사로잡힌 매국노"라고 주장하며 개헌 저지에 앞장섰다.[125]
- 한국 전쟁이 터지자 인척이었던 이범석을 데리고 탈출하려고 이범석의 집을 방문했으나 그가 먼저 탈출한 사실을 확인하고 배신감을 느꼈다고 한다.
- 1963년 이후에는 자유당을 탈당, 박정희의 민주공화당에 건너가서 활동했다.
- 경기도 광주군에는 그의 별장이 있었다.
- 1981년부터 1982년까지 방영된 TV 드라마 《제1공화국(1st Republic)》에서 배우 김용건이 연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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