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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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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의 군주는 프랑크 왕국 시기부터 프랑스 혁명과 제정 시대를 거쳐 오늘날까지 존재했던 프랑스의 통치자들을 의미한다. 프랑크 왕국은 메로빙거 왕조를 시작으로 카롤링거 왕조를 거쳐 서프랑크 왕국으로 발전했다. 서프랑크 왕국은 카페 왕조, 발루아 왕조를 거쳐 프랑스 왕국으로 이어졌으며, 부르봉 왕가가 프랑스 혁명 이전과 이후에 걸쳐 통치했다. 이 외에도 나폴레옹 1세와 나폴레옹 3세는 프랑스 제국을, 루이 필리프 1세는 오를레앙 왕조를 이끌었다. 프랑스 군주의 칭호는 시대에 따라 "프랑크인의 왕", "프랑스 국왕", "프랑스인의 왕", "프랑스 황제" 등으로 변화했다. 현재 프랑스에는 부르봉 왕가의 정통 왕위 계승자, 오를레앙 왕위 요구자, 보나파르트 왕위 요구자 등이 존재하며, 영국 왕위 요구자, 자코바이트 왕위 계승자도 프랑스 왕위를 주장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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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군주
개요
프랑수아 1세의 초상화
프랑수아 1세의 초상화 (레오나르 리무쟁 제작)
프랑스 군주
칭호프랑스 국왕
통치프랑스
상세 정보
거주지루브르 박물관, 베르사유 궁전, 퐁텐블로 성
임명 방식상속 (초기에는 선출도 있었음)
첫 번째 통치자샤를 2세
마지막 통치자나폴레옹 3세
역사
왕국 수립베르됭 조약 (843년)
왕정 폐지프랑스 혁명 (1792년)
참고
이전프랑크 왕국
이후프랑스 제1공화국, 프랑스 제1제국, 프랑스 왕정복고, 7월 왕정, 프랑스 제2공화국, 프랑스 제2제국, 프랑스 제3공화국

2. 프랑스의 군주 목록

프랑스 국왕들은 12세기 말까지 "프랑크인의 왕"(Rex Francorumla)이라는 칭호를 사용했다. 필리프 2세는 1190년에 "프랑스 국왕"(라틴어: ''Rex Franciae''; 프랑스어: ''roi de France'') 칭호를 처음으로 사용했으며(재위 1180-1223), 그 후 "프랑크인의 왕" 칭호는 점차 사용 빈도가 줄어들었다.[3] 그러나 ''Francorum Rex''는 루이 12세가 1499년에, 프랑수아 1세가 1515년에, 앙리 2세가 1550년경에 사용하는 등 때때로 계속 사용되었으며, 18세기까지 동전에도 사용되었다.[4]

1791년 프랑스 헌법이 시행되던 짧은 기간(1791-1792)과 7월 혁명 이후인 1830년에는 "프랑스인의 왕"(''roi des Français'')이라는 경칭이 "프랑스 국왕 (그리고 나바라 국왕)" 대신 사용되었다. 이는 군주의 칭호를 프랑스 영토 소유가 아닌 프랑스 국민과 연결하는 인민 주권 군주제로 알려진 헌법적 혁신이었다.[5]

보나파르트 왕가는 19세기 프랑스에서 제1제국제2제국 시대인 1804년부터 1814년까지, 1815년, 그리고 1852년부터 1870년까지 "프랑스 황제"(''Empereur des Français'')라는 칭호를 사용했다.[6]

14세기부터 1801년까지 영국(그리고 이후 영국의) 군주들은 프랑스 왕위를 주장했지만, 이러한 주장은 백년 전쟁 기간 동안 잉글랜드의 헨리 6세가 파리를 포함한 북부 프랑스 대부분을 통치했던 짧은 기간을 제외하고는 명목상에 불과했다. 1453년까지 영국은 프랑스에서 대부분 축출되었고 헨리의 주장은 그 이후 정당성이 없는 것으로 여겨졌다. 프랑스 역사학에서는 일반적으로 잉글랜드의 헨리 6세를 프랑스 국왕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2. 1. 프랑크 왕국 (486년 ~ 843년)

"프랑스"라는 이름은 게르만족의 일파인 프랑크족에서 유래했다. 메로빙거 왕조는 전설적인 인물로 여겨지는 부족장 Pharamond|파라몬la에서 기원하지만, 실제 첫 왕은 클로비스 1세이다. 클로비스 1세는 486년에 갈리아의 로마군 사령관 시아그리우스를 격파하고 프랑크 왕국을 성립시켰다.

메로빙거 왕조는 카롤루스 왕조로 대체되었다. 카롤루스 왕조는 처음에는 아우스트라시아의 궁재였지만 점차 통합을 추진하여 클로비스 1세 이래 프랑크 왕국 전체를 통합하였다. 피핀 3세가 왕위에 오르면서 메로빙거 왕조는 막을 내렸다. 피핀 3세의 아들 샤를마뉴가 지배하던 광대한 영토는 루트비히 1세에 의해 분할되었다. 로타르 1세 치세 하인 843년, 프랑크 왕국은 베르됭 조약에 따라 동프랑크 왕국, 로타링기아, 서프랑크 왕국으로 나뉘었다. 샤를 2세는 서프랑크 왕국의 첫 번째 왕이다.

2. 1. 1. 메로빙거 왕조 (486년 ~ 751년)

486년 클로비스 1세가 메로빙거 왕조 프랑크 왕국을 성립시켰다.[7] 클로비스 1세 사후, 프랑크 왕국은 그의 아들들에 의해 네우스트리아, 파리, 부르군트, 아우스트라시아로 분할되었고, 이후에도 분열과 왕들 간의 투쟁이 계속되었다.

2. 1. 2. 카롤루스 왕조 (751년 ~ 843년)

카롤링거 왕조는 7세기경 아르눌핑 가문과 피피니드 가문에서 기원한 프랑크 귀족 가문이다. 이 가문은 8세기에 권력을 공고히 하여, 궁재와 ''프랑크족 공작이자 군주''의 직위를 세습화하고 메로빙거 왕조의 실세가 되었다. 카를 마르텔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는데, 그의 아들 피핀 3세는 751년에 메로빙거 왕조를 폐위시키고, 교황청과 귀족들의 동의를 얻어 프랑크 왕국의 국왕으로 즉위했다.[7]

카롤루스 대제(샤를마뉴) (재위 768–814) 통치 하에서 프랑크 왕국은 중앙유럽 깊숙이 확장되어 이탈리아와 현대 독일의 대부분을 정복했다. 그는 또한 교황으로부터 "로마 황제"로 즉위했는데, 이 칭호는 결국 신성 로마 제국의 독일 통치자들이 물려받았다.

경건왕 루이 (재위 814–840)는 왕국을 아들들에게 분할했다. 그러나 그의 죽음 이후 3년간의 내전이 벌어졌고, 베르됭 조약으로 끝을 맺어 프랑키아는 세 개의 왕국으로 분할되었다.[8][9]

2. 2. 서프랑크 왕국 (843년 ~ 987년)

843년 베르됭 조약으로 프랑크 왕국이 분열되면서 샤를 2세가 서프랑크 왕국의 초대 왕이 되었다. 서프랑크 왕국은 이후 프랑스 왕국의 기원이 된다.

9세기 말, 카롤루스 왕조의 권위가 약해지면서 로베르 가문 출신의 우드가 왕위에 올랐다. 이후 서프랑크 왕국은 카롤루스 왕조와 로베르 가문 사이에서 왕위가 번갈아 계승되는 혼란기를 겪었다. 로베르 1세는 수아송 전투에서 샤를 3세에 맞서 싸우다 전사하였는데, 이는 전투 중에 사망한 유일한 왕의 사례이다.[1] 라울은 로베르 1세의 사위였다.

936년 루이 4세가 즉위하면서 카롤루스 왕조가 다시 왕위를 되찾았다. 이후 로테르, 루이 5세까지 카롤루스 왕조의 통치가 이어졌다.

위그 카페는 로베르 1세의 손자이며, 카페 왕조를 열었다.

2. 2. 1. 카롤루스 왕조 (843년 ~ 888년)

초상이름재위 기간비고
--샤를 2세843년 ~ 877년카롤루스 1세 (대제)의 손자, 루이 1세의 아들
--루이 2세877년 ~ 879년샤를 2세의 아들
--루이 3세879년 ~ 882년루이 2세의 아들, 카를로만과 공동 왕
--카를로만879년 ~ 884년루이 2세의 아들, 루이 3세와 공동 왕
--카를 3세885년 ~ 888년루이 1세의 손자, 동프랑크 국왕 루트비히 2세의 아들


2. 2. 2. 로베르 왕조 및 카롤루스 왕조 (888년 ~ 987년)

대수초상이름재위 시작재위 종료비고
1
외드888년 1월 13일898년 1월 1일로베르 왕조
2
샤를 3세 단순왕898년 1월 1일922년 6월 30일카롤링거 왕조
3
로베르 1세922년 6월 30일923년 6월 15일로베르 왕조
4
라울923년 6월 15일936년 1월 14일보종 왕조, 로베르 1세의 사위
5
루이 4세 해외왕936년 1월 14일954년 9월 10일카롤링거 왕조
6
로테르954년 9월 10일986년 3월 2일카롤링거 왕조
7
루이 5세986년 3월 2일987년 5월 22일카롤링거 왕조, 979년부터 공동 국왕


2. 3. 프랑스 왕국 (987년 ~ 1792년, 1814년 ~ 1848년)

카페 왕조는 987년에 프랑크 공작으로 봉사하고 왕으로 선출된 로베르 가문 출신 위그 카페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보나파르트가 이끄는 제국을 제외하고, 프랑스의 모든 군주는 위그 카페의 직계 남성 후손이었다. 왕위는 14세기까지 부계 혈통을 통해 아버지에서 아들로 이어졌으며, 이 시기를 직계 카페 왕조 통치라고 한다.[21] 그 이후 왕위는 필리프 3세의 후손인 분가인 발루아 왕가로 넘어갔다.

발루아 왕가는 프랑스 종교 전쟁 중인 16세기 말에 단절되었고, 직계 카페 왕조의 루이 9세를 통해 내려온 먼 친척인 부르봉 왕가로 대체되었다. 부르봉 왕가는 프랑스 혁명으로 폐위될 때까지 프랑스를 통치했지만, 나폴레옹 몰락 후 부르봉 왕정 복고를 통해 왕위에 복귀했다.

7월 혁명으로 샤를 10세가 폐위되고, 보다 자유주의적인 정치 성향을 가진 먼 친척인 루이 필리프 1세가 왕위에 올랐다. 마지막으로 통치한 카페 왕조 출신은 7월 왕정 (1830–1848)의 왕인 루이 필리프 1세였으며, 그는 분가인 부르봉-오를레앙 왕가의 일원이었다.

2. 3. 1. 카페 왕조 (987년 ~ 1328년)

위그 카페


서프랑크 왕국의 왕이었던 위그 카페가 987년 왕위에 오르면서 카페 왕조가 시작되었다. 카페 왕조는 로베르 가문 출신인 위그 카페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카페 왕조의 왕위는 14세기까지 부계 혈통을 통해 아버지에서 아들로 이어졌으며, 이 시기를 직계 카페 왕조 통치라고 한다.

이름즉위일사망일 혹은 퇴위일전 왕과의 관계칭호
위그 카페987년 5월 22일996년 10월 24일로베르 1세의 손자프랑크인의 왕
로베르 2세 경건왕996년 10월 24일1031년 7월 20일위그 카페의 아들.[21]
앙리 1세1031년 7월 20일1060년 8월 4일로베르 2세의 아들.[21]
필리프 1세1060년 8월 4일1108년 7월 29일앙리 1세의 아들.[9]
루이 6세 비만왕1108년 7월 29일1137년 8월 1일필리프 1세의 아들
루이 7세1137년 8월 1일1180년 9월 18일루이 6세의 아들
필리프 2세 존엄왕1180년 9월 18일1223년 7월 14일루이 7세의 아들프랑크인의 왕
루이 8세 사자왕1223년 7월 14일1226년 11월 8일필리프 2세의 아들프랑스 왕
루이 9세 성왕1226년 11월 8일1270년 8월 25일루이 8세의 아들
필리프 3세 무적왕1270년 8월 25일1285년 10월 5일루이 9세의 아들
필리프 4세 미남왕1285년 10월 5일1314년 11월 29일필리프 3세의 아들프랑스와 나바르의 왕
루이 10세 완고왕1314년 11월 29일1316년 6월 5일필리프 4세의 아들
장 1세 유복자왕1316년 11월 15일1316년 11월 20일루이 10세의 아들
필리프 5세 장신왕1316년 11월 20일1322년 1월 3일필리프 4세의 아들. 루이 10세의 남동생
샤를 4세 단려왕1322년 1월 3일1328년 2월 1일필리프 4세의 아들. 루이 10세와 필리프 5세의 남동생


2. 3. 2. 발루아 왕조 (1328년 ~ 1589년)

필리프--1328년 4월 1일[1] – 1350년 8월 22일발루아 백작 샤를의 아들이자 필리프 3세의 손자, 샤를 4세의 사촌1293년 – 1350년 8월 22일
(57세)
그의 통치는 계승 분쟁의 결과에 의해 지배되었으며, 이는 백년 전쟁으로 이어졌다.
장 2세 ("좋은")
1350년 8월 22일[2] – 1364년 4월 8일필리프 6세의 아들1319년 4월[3] – 1364년 4월 8일
(45세)
푸아티에 전투 (1356)에서 영국군에게 포로로 잡혔고, 일련의 굴욕적인 조약을 체결해야 했다.
샤를 5세 ("현명한")
1364년 4월 8일[4] – 1380년 9월 16일장 2세의 아들; 1349년 7월 16일에 도팽으로 임명됨1337년 1월 21일 – 1380년 9월 16일
(43세)
그의 통치는 봉건 영주들과의 내부 투쟁으로 특징지어졌다.
샤를 6세 ("미친", "사랑받는")
1380년 9월 16일[5] – 1422년 10월 21일샤를 5세의 아들1368년 12월 3일 – 1422년 10월 21일
(53세)
1388년까지 삼촌들의 섭정 통치를 받았다. 자연사하기 전에 오랫동안 정신 질환을 앓았다.
헨리 6세
(주장자)
1422년 10월 21일[6]
1453년 10월 19일[7]
(논쟁 중; 31년)샤를 6세의 외손자, 1420년 5월 21일 트루아 조약 이후 상속자로 인정받음1421년 12월 6일 – 1471년 5월 21일
(49세)
1422년 9월 1일부터 잉글랜드 왕. 1437년까지 여러 섭정 하에 통치했다.
샤를 7세 ("승리자", "훌륭하게 섬김을 받은")
1422년 10월 21일[8] – 1461년 7월 22일샤를 6세의 아들이자 헨리 6세 (잉글랜드)의 삼촌, 1417년 4월에 도팽으로 임명됨1403년 2월 22일 – 1461년 7월 22일
(58세)
그의 통치는 백년 전쟁의 종결을 보았다.
루이 11세 ("신중한", "보편적인 거미")
1461년 7월 22일[9] – 1483년 8월 30일샤를 7세의 아들1423년 7월 3일 – 1483년 8월 30일
(60세)
그의 통치는 왕권의 강화와 확장을 보았다. 그의 통치 동안 수많은 음모로 인해 "보편적인 거미"라는 별명을 얻었다.
샤를 8세 ("상냥한")
1483년 8월 30일[10] – 1498년 4월 7일루이 11세의 아들1470년 6월 30일 – 1498년 4월 7일
(27세)
1491년까지 누이 앤의 섭정 통치를 받았다. 길고 성공적이지 못한 이탈리아 전쟁을 시작했다. 상인방에 머리를 부딪혀 사망했다.



샤를 4세의 죽음은 발루아 왕가와 플랜태저넷 왕가 사이의 백년 전쟁을 시작시켰다. 플랜태저넷 왕가의 주장은 랭커스터 왕가로 알려진 방계 가문이 프랑스 왕위 계승을 놓고 이어받았다. 발루아 왕가는 고대 살리카법을 통해 남성만 계승하는 장자 상속의 권리를 주장하며, 최근 프랑스 왕으로부터 가장 가까운 직계 남성 혈통을 가졌다. 그들은 필리프 3세의 셋째 아들인 발루아 백작 샤를의 후손이었다. 플랜태저넷 왕가는 그들의 주장을 더 최근의 프랑스 왕과의 가까움에 근거했는데, 에드워드 3세는 어머니 이자벨을 통해 필리프 4세의 손자였다.

두 왕가는 그들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백년 전쟁을 벌였다. 발루아 왕가가 결국 성공했고, 프랑스 역사학은 그들의 지도자들을 정당한 왕으로 간주한다. 플랜태저넷 왕가 출신인 헨리 6세는 트루아 조약 이후 프랑스 왕위를 de jure로 장악했는데, 이 조약은 1801년까지 프랑스 왕위에 대한 잉글랜드의 주장의 근거가 되었다. 발루아 왕가는 위그노 전쟁의 배경 속에서 1589년까지 프랑스를 통치했으며, 이 왕가는 단절되었다. 나바라는 남성만 계승하는 장자 상속의 전통이 없었기 때문에, 나바라 왕가는 루이 10세의 딸인 잔 2세를 시작으로 프랑스와 구별되었다.

2. 3. 3. 부르봉 왕조 (1589년 ~ 1792년, 1814년 ~ 1830년)

프랑수아 1세의 조카의 자식
프랑수아 2세, 샤를 9세, 앙리 3세의 육종형제이며, 첫 번째 결혼으로 의형제루이 13세1610년 5월 14일1643년 5월 14일앙리 4세의 아들루이 14세1643년 5월 14일1715년 9월 1일루이 13세의 아들
루이 15세1715년 9월 1일1774년 5월 10일루이 14세의 증손루이 16세1774년 5월 10일1792년 8월 10일루이 15세의 손자



루이 16세의 아들 루이 샤를은 1793년 1월 21일부터 1795년 6월 8일까지 명목상 프랑스의 왕 루이 17세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 기간 동안 유폐되어 있었으며, 권력은 공화국의 지도자들에게 있었다. 루이 17세의 사후, 그의 숙부(루이 16세의 동생) 루이 스타니슬라스가 루이 18세로서 왕위를 주장했지만, 법적으로 프랑스 왕이 된 것은 1814년 왕정 복고에 의해서였다.

2. 3. 4. 오를레앙 왕조 (1830년 ~ 1848년)

7월 혁명으로 샤를 10세가 폐위되고, 보다 자유주의적인 정치 성향을 가진 먼 친척인 루이 필리프 1세가 왕위에 올랐다. 샤를 10세의 아들 루이는 아버지와의 20분간의 논쟁 끝에 왕위 계승권을 포기하는 문서에 서명했지만, 대관식을 치르지 않아 프랑스의 진정한 국왕으로 인정받는 것에 논란이 있다. 루이의 조카 앙리 역시 일부에서 앙리 5세로 여겨졌지만, 새로운 정권은 그의 주장을 인정하지 않았다.[14]

샤를 10세는 루이 필리프를 어린 앙리 5세의 섭정인 ''왕국 부총독''으로 임명하고, 손자를 하원(당시 프랑스 의회)에 후계자로 삼고 싶다는 의사를 발표하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루이 필리프는 자신의 계승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이를 실행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프랑스 의원들은 그의 자유주의 정책과 당시 프랑스 국민들 사이에서의 인기를 알고, 루이 필리프를 새로운 프랑스 국왕으로 선포하여 부르봉 가문의 적통을 대체했다.[14]

초상화이름문장재위 기간계승생애 세부 정보
루이 필리프 1세 ("시민왕")
1830년 8월 9일 – 1848년 2월 24일루이 13세의 6대손이자 샤를 10세의 먼 친척; 7월 혁명 동안 샤를 10세의 퇴위 후 하원에 의해 국왕으로 선포됨1773년 10월 6일 – 1850년 8월 26일
(76세)
루이 필리프 2세
(주장자)
1848년 2월 24–26일
(2일; 논란)
루이 필리프 1세의 손자1838년 8월 24일 – 1894년 9월 8일
(56세)


2. 4. 프랑스 제국 (1804년 ~ 1814년, 1815년, 1852년 ~ 1870년)

(64세)


2. 4. 1. 보나파르트 왕조 (1804년 ~ 1814년, 1815년, 1852년 ~ 1870년)

나폴레옹 1세


나폴레옹 1세1804년 5월 18일부터 1814년 4월 11일까지, 그리고 1815년 5월 20일부터 6월 22일까지 재위했다.[24]

나폴레옹 2세


나폴레옹 2세1815년 6월 22일부터 7월 7일까지 재위했지만, 실제로 즉위하지는 않았다.[24]

나폴레옹 3세


나폴레옹 3세1852년 12월 2일부터 1870년 9월 4일까지 재위했다. 1870년 보불 전쟁에서 패배하면서 제정이 종료되고 프랑스 제3공화국이 수립되었다.[24]

3. 칭호

필리프 2세가 1190년에 최초로 "프랑스 국왕"(Rex Franciaela)이라는 칭호를 사용한 이후, "프랑크인의 왕" 칭호는 점차 사용되지 않았다.[3] 그러나 ''Francorum Rex''는 루이 12세가 1499년에, 프랑수아 1세가 1515년에, 앙리 2세가 1550년경에 사용하는 등 18세기까지 동전에 사용되기도 했다.[4]

프랑스 국왕의 칭호는 다음과 같이 변화했다.



1791년 프랑스 헌법 시행 기간(1791년 ~ 1792년)과 7월 혁명 이후인 1830년에는 "프랑스 국왕 (그리고 나바라 국왕)" 대신 "프랑스인의 왕"(roi des Français프랑스어)이라는 경칭이 사용되었다. 이는 군주의 칭호를 프랑스 영토가 아닌 프랑스 국민과 연결하는 인민 주권 군주제로의 헌법적 혁신이었다.[5]

보나파르트 왕가에서는 19세기 프랑스에서 제1제국제2제국 시대인 1804년부터 1814년까지, 1815년, 그리고 1852년부터 1870년까지 "프랑스 황제"(Empereur des Français프랑스어)라는 칭호가 사용되었다.[6]

4. 왕위 요구자

다음은 이전 군주들의 후손으로, 프랑스 대통령과 서로의 주장을 거부하며 프랑스의 정통 군주라고 주장해 온 다양한 프랑스 왕위 요구자들이다.

5. 한국과의 관계

프랑스는 조선과 1886년에 조불 수호 통상 조약을 체결하여 공식적인 외교 관계를 맺었다.

6. 비고

1830년 8월 2일
(20분; 논쟁의 여지 있음)샤를 10세의 아들1775년 8월 6일 – 1844년 6월 3일 (68세)

앙리 5세 (주장)1830년 8월 2일 – 9일
(7일; 논쟁의 여지 있음)샤를 10세의 손자1820년 9월 29일 – 1883년 8월 24일 (62세)


참조

[1] 서적 Clovis chez les historiens https://books.google[...] Librairie Droz 2022-03-16
[2] 서적 Popular History of France https://books.google[...] Longman
[3] 서적 A History of Western Public Law https://books.google[...] Springer 2022-03-14
[4] 서적 Renaissance France at War https://books.google[...] Boydell & Brewer Ltd
[5] 서적 Mystifying the Monarch Amsterdam University Press
[6] 서적 Histoire de Napoléon III Barbier
[7] 서적 Webster's Third New International Dictionary of the English Language, Unabridged Merriam-Webster
[8] 서적 Kingdoms and communities in Western Europe, 900–1300 https://archive.org/[...] Clarendon Press
[9] 서적 The Shaping of German Identity: Authority and Crisis, 1245-1414 https://books.googl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22-04-01
[10] 문서 Louis the Pious
[11] 간행물 Annales S. Benigni Divionensis 824. https://www.dmgh.de/[...] Monumenta Germaniae Historica 2023-03-26
[12] 간행물 Annales Vedastini 882 http://www.thelatinl[...] 2010-12-25
[13] 간행물 Annales Vedastini. 884. http://www.thelatinl[...] 2010-12-25
[14] 간행물 Obituaires de la province de Sens https://gallica.bnf.[...] 2022-10-06
[15] 간행물 Annales S. Benigni Divionensis 884. https://www.dmgh.de/[...] 2023-03-26
[16] 간행물 Karl III https://www.deutsche[...] 1977
[17] 간행물 Annales S. Benigni Divionensis 899. https://www.dmgh.de/[...] Monumenta Germaniae Historica 2022-03-29
[18] 간행물 Annales Prumienses 898. https://www.dmgh.de/[...] Monumenta Germaniae Historica 2022-03-29
[19] 간행물 Obituaires de la province de Sens https://gallica.bnf.[...] 2022-10-06
[20] 서적 Histoire de son temps https://books.google[...] J. Renouard 1845
[21] 문서 Because neither Hugh nor Philip were sole or senior king in their own lifetimes, they are not traditionally listed as kings of France and are not given ordinals.
[22] 문서 Chronique latine de Guillaume de Nangis, de 1113 à 1300 https://gallica.bnf.[...] 2024-01-28
[23] 문서 Chronique parisienne anonyme du XIVe siècle https://gallica.bnf.[...] 2024-02-29
[24] 문서 Louis XVI's powers as king became obsolete following the March on Versailles on 5 October 1789, after which he became a hostage of the revolutionary forces.
[25] 논문 Les trois actes d'abdication de Napoléon Ier http://www.cairn.inf[...] 2014
[26] 웹사이트 France: Commission of Government: 1815 - Archontology https://www.archonto[...] 2023-12-09
[27] 웹사이트 Shortest reign of a monarch https://www.guinness[...] 2023-02-10
[28] 논문 Notes de vexillologie royale française https://books.goog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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