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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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의 군주는 프랑크 왕국 시기부터 프랑스 혁명과 제정 시대를 거쳐 오늘날까지 존재했던 프랑스의 통치자들을 의미한다. 프랑크 왕국은 메로빙거 왕조를 시작으로 카롤링거 왕조를 거쳐 서프랑크 왕국으로 발전했다. 서프랑크 왕국은 카페 왕조, 발루아 왕조를 거쳐 프랑스 왕국으로 이어졌으며, 부르봉 왕가가 프랑스 혁명 이전과 이후에 걸쳐 통치했다. 이 외에도 나폴레옹 1세와 나폴레옹 3세는 프랑스 제국을, 루이 필리프 1세는 오를레앙 왕조를 이끌었다. 프랑스 군주의 칭호는 시대에 따라 "프랑크인의 왕", "프랑스 국왕", "프랑스인의 왕", "프랑스 황제" 등으로 변화했다. 현재 프랑스에는 부르봉 왕가의 정통 왕위 계승자, 오를레앙 왕위 요구자, 보나파르트 왕위 요구자 등이 존재하며, 영국 왕위 요구자, 자코바이트 왕위 계승자도 프랑스 왕위를 주장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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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군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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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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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군주 | |
칭호 | 프랑스 국왕 |
통치 | 프랑스 |
상세 정보 | |
거주지 | 루브르 박물관, 베르사유 궁전, 퐁텐블로 성 |
임명 방식 | 상속 (초기에는 선출도 있었음) |
첫 번째 통치자 | 샤를 2세 |
마지막 통치자 | 나폴레옹 3세 |
역사 | |
왕국 수립 | 베르됭 조약 (843년) |
왕정 폐지 | 프랑스 혁명 (1792년) |
참고 | |
이전 | 프랑크 왕국 |
이후 | 프랑스 제1공화국, 프랑스 제1제국, 프랑스 왕정복고, 7월 왕정, 프랑스 제2공화국, 프랑스 제2제국, 프랑스 제3공화국 |
2. 프랑스의 군주 목록
프랑스 국왕들은 12세기 말까지 "프랑크인의 왕"(Rex Francorumla)이라는 칭호를 사용했다. 필리프 2세는 1190년에 "프랑스 국왕"(라틴어: ''Rex Franciae''; 프랑스어: ''roi de France'') 칭호를 처음으로 사용했으며(재위 1180-1223), 그 후 "프랑크인의 왕" 칭호는 점차 사용 빈도가 줄어들었다.[3] 그러나 ''Francorum Rex''는 루이 12세가 1499년에, 프랑수아 1세가 1515년에, 앙리 2세가 1550년경에 사용하는 등 때때로 계속 사용되었으며, 18세기까지 동전에도 사용되었다.[4]
1791년 프랑스 헌법이 시행되던 짧은 기간(1791-1792)과 7월 혁명 이후인 1830년에는 "프랑스인의 왕"(''roi des Français'')이라는 경칭이 "프랑스 국왕 (그리고 나바라 국왕)" 대신 사용되었다. 이는 군주의 칭호를 프랑스 영토 소유가 아닌 프랑스 국민과 연결하는 인민 주권 군주제로 알려진 헌법적 혁신이었다.[5]
보나파르트 왕가는 19세기 프랑스에서 제1제국과 제2제국 시대인 1804년부터 1814년까지, 1815년, 그리고 1852년부터 1870년까지 "프랑스 황제"(''Empereur des Français'')라는 칭호를 사용했다.[6]
14세기부터 1801년까지 영국(그리고 이후 영국의) 군주들은 프랑스 왕위를 주장했지만, 이러한 주장은 백년 전쟁 기간 동안 잉글랜드의 헨리 6세가 파리를 포함한 북부 프랑스 대부분을 통치했던 짧은 기간을 제외하고는 명목상에 불과했다. 1453년까지 영국은 프랑스에서 대부분 축출되었고 헨리의 주장은 그 이후 정당성이 없는 것으로 여겨졌다. 프랑스 역사학에서는 일반적으로 잉글랜드의 헨리 6세를 프랑스 국왕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2. 1. 프랑크 왕국 (486년 ~ 843년)
"프랑스"라는 이름은 게르만족의 일파인 프랑크족에서 유래했다. 메로빙거 왕조는 전설적인 인물로 여겨지는 부족장 Pharamond|파라몬la에서 기원하지만, 실제 첫 왕은 클로비스 1세이다. 클로비스 1세는 486년에 갈리아의 로마군 사령관 시아그리우스를 격파하고 프랑크 왕국을 성립시켰다.메로빙거 왕조는 카롤루스 왕조로 대체되었다. 카롤루스 왕조는 처음에는 아우스트라시아의 궁재였지만 점차 통합을 추진하여 클로비스 1세 이래 프랑크 왕국 전체를 통합하였다. 피핀 3세가 왕위에 오르면서 메로빙거 왕조는 막을 내렸다. 피핀 3세의 아들 샤를마뉴가 지배하던 광대한 영토는 루트비히 1세에 의해 분할되었다. 로타르 1세 치세 하인 843년, 프랑크 왕국은 베르됭 조약에 따라 동프랑크 왕국, 로타링기아, 서프랑크 왕국으로 나뉘었다. 샤를 2세는 서프랑크 왕국의 첫 번째 왕이다.
2. 1. 1. 메로빙거 왕조 (486년 ~ 751년)
486년 클로비스 1세가 메로빙거 왕조 프랑크 왕국을 성립시켰다.[7] 클로비스 1세 사후, 프랑크 왕국은 그의 아들들에 의해 네우스트리아, 파리, 부르군트, 아우스트라시아로 분할되었고, 이후에도 분열과 왕들 간의 투쟁이 계속되었다.2. 1. 2. 카롤루스 왕조 (751년 ~ 843년)
카롤링거 왕조는 7세기경 아르눌핑 가문과 피피니드 가문에서 기원한 프랑크 귀족 가문이다. 이 가문은 8세기에 권력을 공고히 하여, 궁재와 ''프랑크족 공작이자 군주''의 직위를 세습화하고 메로빙거 왕조의 실세가 되었다. 카를 마르텔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는데, 그의 아들 피핀 3세는 751년에 메로빙거 왕조를 폐위시키고, 교황청과 귀족들의 동의를 얻어 프랑크 왕국의 국왕으로 즉위했다.[7]카롤루스 대제(샤를마뉴) (재위 768–814) 통치 하에서 프랑크 왕국은 중앙유럽 깊숙이 확장되어 이탈리아와 현대 독일의 대부분을 정복했다. 그는 또한 교황으로부터 "로마 황제"로 즉위했는데, 이 칭호는 결국 신성 로마 제국의 독일 통치자들이 물려받았다.
경건왕 루이 (재위 814–840)는 왕국을 아들들에게 분할했다. 그러나 그의 죽음 이후 3년간의 내전이 벌어졌고, 베르됭 조약으로 끝을 맺어 프랑키아는 세 개의 왕국으로 분할되었다.[8][9]
2. 2. 서프랑크 왕국 (843년 ~ 987년)
843년 베르됭 조약으로 프랑크 왕국이 분열되면서 샤를 2세가 서프랑크 왕국의 초대 왕이 되었다. 서프랑크 왕국은 이후 프랑스 왕국의 기원이 된다.9세기 말, 카롤루스 왕조의 권위가 약해지면서 로베르 가문 출신의 우드가 왕위에 올랐다. 이후 서프랑크 왕국은 카롤루스 왕조와 로베르 가문 사이에서 왕위가 번갈아 계승되는 혼란기를 겪었다. 로베르 1세는 수아송 전투에서 샤를 3세에 맞서 싸우다 전사하였는데, 이는 전투 중에 사망한 유일한 왕의 사례이다.[1] 라울은 로베르 1세의 사위였다.
936년 루이 4세가 즉위하면서 카롤루스 왕조가 다시 왕위를 되찾았다. 이후 로테르, 루이 5세까지 카롤루스 왕조의 통치가 이어졌다.
위그 카페는 로베르 1세의 손자이며, 카페 왕조를 열었다.
2. 2. 1. 카롤루스 왕조 (843년 ~ 888년)
초상 | 이름 | 재위 기간 | 비고 |
---|---|---|---|
-- | 샤를 2세 | 843년 ~ 877년 | 카롤루스 1세 (대제)의 손자, 루이 1세의 아들 |
-- | 루이 2세 | 877년 ~ 879년 | 샤를 2세의 아들 |
-- | 루이 3세 | 879년 ~ 882년 | 루이 2세의 아들, 카를로만과 공동 왕 |
-- | 카를로만 | 879년 ~ 884년 | 루이 2세의 아들, 루이 3세와 공동 왕 |
-- | 카를 3세 | 885년 ~ 888년 | 루이 1세의 손자, 동프랑크 국왕 루트비히 2세의 아들 |
2. 2. 2. 로베르 왕조 및 카롤루스 왕조 (888년 ~ 987년)
대수 | 초상 | 이름 | 재위 시작 | 재위 종료 | 비고 |
---|---|---|---|---|---|
1 | 외드 | 888년 1월 13일 | 898년 1월 1일 | 로베르 왕조 | |
2 | ![]() | 샤를 3세 단순왕 | 898년 1월 1일 | 922년 6월 30일 | 카롤링거 왕조 |
3 | ![]() | 로베르 1세 | 922년 6월 30일 | 923년 6월 15일 | 로베르 왕조 |
4 | ![]() | 라울 | 923년 6월 15일 | 936년 1월 14일 | 보종 왕조, 로베르 1세의 사위 |
5 | ![]() | 루이 4세 해외왕 | 936년 1월 14일 | 954년 9월 10일 | 카롤링거 왕조 |
6 | ![]() | 로테르 | 954년 9월 10일 | 986년 3월 2일 | 카롤링거 왕조 |
7 | ![]() | 루이 5세 | 986년 3월 2일 | 987년 5월 22일 | 카롤링거 왕조, 979년부터 공동 국왕 |
2. 3. 프랑스 왕국 (987년 ~ 1792년, 1814년 ~ 1848년)
카페 왕조는 987년에 프랑크 공작으로 봉사하고 왕으로 선출된 로베르 가문 출신 위그 카페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보나파르트가 이끄는 제국을 제외하고, 프랑스의 모든 군주는 위그 카페의 직계 남성 후손이었다. 왕위는 14세기까지 부계 혈통을 통해 아버지에서 아들로 이어졌으며, 이 시기를 직계 카페 왕조 통치라고 한다.[21] 그 이후 왕위는 필리프 3세의 후손인 분가인 발루아 왕가로 넘어갔다.발루아 왕가는 프랑스 종교 전쟁 중인 16세기 말에 단절되었고, 직계 카페 왕조의 루이 9세를 통해 내려온 먼 친척인 부르봉 왕가로 대체되었다. 부르봉 왕가는 프랑스 혁명으로 폐위될 때까지 프랑스를 통치했지만, 나폴레옹 몰락 후 부르봉 왕정 복고를 통해 왕위에 복귀했다.
7월 혁명으로 샤를 10세가 폐위되고, 보다 자유주의적인 정치 성향을 가진 먼 친척인 루이 필리프 1세가 왕위에 올랐다. 마지막으로 통치한 카페 왕조 출신은 7월 왕정 (1830–1848)의 왕인 루이 필리프 1세였으며, 그는 분가인 부르봉-오를레앙 왕가의 일원이었다.
2. 3. 1. 카페 왕조 (987년 ~ 1328년)

서프랑크 왕국의 왕이었던 위그 카페가 987년 왕위에 오르면서 카페 왕조가 시작되었다. 카페 왕조는 로베르 가문 출신인 위그 카페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카페 왕조의 왕위는 14세기까지 부계 혈통을 통해 아버지에서 아들로 이어졌으며, 이 시기를 직계 카페 왕조 통치라고 한다.
이름 | 즉위일 | 사망일 혹은 퇴위일 | 전 왕과의 관계 | 칭호 |
---|---|---|---|---|
위그 카페 | 987년 5월 22일 | 996년 10월 24일 | 로베르 1세의 손자 | 프랑크인의 왕 |
로베르 2세 경건왕 | 996년 10월 24일 | 1031년 7월 20일 | 위그 카페의 아들.[21] | |
앙리 1세 | 1031년 7월 20일 | 1060년 8월 4일 | 로베르 2세의 아들.[21] | |
필리프 1세 | 1060년 8월 4일 | 1108년 7월 29일 | 앙리 1세의 아들.[9] | |
루이 6세 비만왕 | 1108년 7월 29일 | 1137년 8월 1일 | 필리프 1세의 아들 | |
루이 7세 | 1137년 8월 1일 | 1180년 9월 18일 | 루이 6세의 아들 | |
필리프 2세 존엄왕 | 1180년 9월 18일 | 1223년 7월 14일 | 루이 7세의 아들 | 프랑크인의 왕 |
루이 8세 사자왕 | 1223년 7월 14일 | 1226년 11월 8일 | 필리프 2세의 아들 | 프랑스 왕 |
루이 9세 성왕 | 1226년 11월 8일 | 1270년 8월 25일 | 루이 8세의 아들 | |
필리프 3세 무적왕 | 1270년 8월 25일 | 1285년 10월 5일 | 루이 9세의 아들 | |
필리프 4세 미남왕 | 1285년 10월 5일 | 1314년 11월 29일 | 필리프 3세의 아들 | 프랑스와 나바르의 왕 |
루이 10세 완고왕 | 1314년 11월 29일 | 1316년 6월 5일 | 필리프 4세의 아들 | |
장 1세 유복자왕 | 1316년 11월 15일 | 1316년 11월 20일 | 루이 10세의 아들 | |
필리프 5세 장신왕 | 1316년 11월 20일 | 1322년 1월 3일 | 필리프 4세의 아들. 루이 10세의 남동생 | |
샤를 4세 단려왕 | 1322년 1월 3일 | 1328년 2월 1일 | 필리프 4세의 아들. 루이 10세와 필리프 5세의 남동생 |
2. 3. 2. 발루아 왕조 (1328년 ~ 1589년)
필리프(57세)
그의 통치는 계승 분쟁의 결과에 의해 지배되었으며, 이는 백년 전쟁으로 이어졌다.

장
(45세)
푸아티에 전투 (1356)에서 영국군에게 포로로 잡혔고, 일련의 굴욕적인 조약을 체결해야 했다.

(43세)
그의 통치는 봉건 영주들과의 내부 투쟁으로 특징지어졌다.

(53세)
1388년까지 삼촌들의 섭정 통치를 받았다. 자연사하기 전에 오랫동안 정신 질환을 앓았다.

(주장자)
1453년 10월 19일[7]
(논쟁 중; 31년)
(49세)
1422년 9월 1일부터 잉글랜드 왕. 1437년까지 여러 섭정 하에 통치했다.

(58세)
그의 통치는 백년 전쟁의 종결을 보았다.

(60세)
그의 통치는 왕권의 강화와 확장을 보았다. 그의 통치 동안 수많은 음모로 인해 "보편적인 거미"라는 별명을 얻었다.

(27세)
1491년까지 누이 앤의 섭정 통치를 받았다. 길고 성공적이지 못한 이탈리아 전쟁을 시작했다. 상인방에 머리를 부딪혀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