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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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885년은 당나라, 일본, 신라 등 여러 국가에서 연호를 사용한 해이다. 주요 사건으로 6월 신라 사신의 귀국, 8월 사쓰마국의 개문악 분화, 황소의 난으로 장안에서 쫓겨났던 당 희종 황제의 귀환 등이 있었다. 유럽에서는 노르만족의 파리 포위, 베르사유 조약 체결, 교황 하드리아노 3세의 사망 등이 있었으며, 아랍 제국에서는 타와힌 전투가 벌어졌다. 이 해에는 효공왕, 견신검 등이 탄생하고, 메토디우스, 교황 아드리아노 3세 등이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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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85년 - 파리 공방전 (885–886년)
9세기 말 바이킹이 파리를 포위 공격했으나, 파리 시민들이 오도 백작과 고슬랭 주교의 지휘하에 저항했고, 프랑크 왕국의 카를 3세는 바이킹에게 뇌물을 주어 물러나게 했으며, 이 사건은 로베르 가문의 부상과 파리의 중심지 부상에 기여했다. - 빈 문단이 포함된 문서 - 광주고등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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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2년은 율리우스력으로 수요일에 시작하는 평년으로, 이사벨 1세의 이슬람교 금지 칙령 발표, 콜럼버스의 중앙아메리카 해안 탐험, 바스쿠 다 가마의 인도 상관 설립, 크리미아 칸국의 킵차크 칸국 멸망, 비텐베르크 대학교 설립, 최초의 아프리카 노예들의 신대륙 도착 등의 주요 사건이 있었다.
885년 | |
---|---|
연도 정보 | |
연도 | 885년 |
세기 | 9세기 |
십년단위 | 880년대 |
달력 | |
율리우스력 | 885년 |
로마 약자 | DCCCLXXXV |
간지 | 을사년(乙巳年) |
육십간지 | 42 |
일본 | 간교(元慶) 9년 |
황기 | 1545년 |
불기 | 1429년 |
히브리력 | 4645~4646년 |
이슬람력 | 271~272년 |
2. 연호
- 당: 중화 5년, 광계 원년
- 일본: 간교 9년, 닌나 원년
- 발해: 대현석 15년
- 신라: 헌강왕 11년
- 남조
- "정명승지대동"을 하나의 연호로 보는 설에 따르면 정명승지대동 9년
- 정명, 승지, 대동을 각각 다른 연호로 보는 설도 있으며, 그 중 하나가 사용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3. 기년
국가 | 군주 | 연호 | 비고 |
---|---|---|---|
당 | 희종 | 중화 5년, 광계 원년 | |
신라 | 헌강왕 | 11년 | |
발해 | 대현석 | 15년 | |
일본 | 겐케이 9년, 닌나 원년, 황기 1545년 | ||
남조 | 정명승지대동 9년 | "정명승지대동"을 하나의 연호로 보는 설 | |
남조 | 정명, 승지, 대동 | 각각 다른 연호로 보는 설도 있으며, 그 중 하나가 사용되었을 가능성도 있음 | |
기타 | 비고 | ||
간지 | 을사 | ||
단기 | 3218년 |
4. 사건
- 동로마 제국의 황제 바실리우스 1세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성 소피아 대성당을 개축했다.
- 프랑스 왕국과 바이에른 사이에서 베르사유 조약이 체결되었다.
- 노르만족이 파리를 포위했다. (이후 파리 공방전으로 이어짐)
- 교황 하드리아노 3세가 사망하고, 교황 스테파노 5세가 로마 가톨릭교회의 110대 교황으로 즉위하였다.
- 모라비아의 성 메토디우스가 사망했다.
- 6월 - 히젠국에 도착한 신라 사신을 귀국시켰다.
- 8월 29일 - 사쓰마국의 개문악이 대분화했다.
- 황소군에게 장안에서 쫓겨났던 당 희종 황제가 도성으로 돌아왔다.
4. 1. 지역별
==== 유럽 ====- 여름 - 뚱보 카를 황제는 로비트(현재 네덜란드)에서 관료 회의를 소집하고, 전 국왕 로타르 2세의 사생아인 알자스 공작 휴와 그의 봉신 프리슬란트 공작 고드프리드가 자신을 모반했다고 비난했다. 휴는 눈이 멀고 생 갈 수도원(현재 스위스)으로 유배되었다. 고드프리드는 프리지아 및 작센 공국 귀족들의 공모로 프리지아인들에게 살해되었다. 지역 백작인 홀란트의 게롤프는 살해 이후 서부 프리지아 해안선을 덴마크로부터 인수했다.[1]
- 여름 - 뚱보 카를은 조카 카린티아의 아르눌프(바이에른의 카를로만의 사생아)와 단순왕 샤를(말더듬이 루이의 5세 아들)의 주장을 무시하고, 사생아 아들 베르나르를 후계자로 지명했다. 프랑크 주교들이 이에 항의하자, 카를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교황 아드리안 3세를 보름스로 소환했다. 아드리안은 로마를 파비아의 주교 요한에게 맡기고 독일로 향했지만, 포 강을 건넌 직후 사망했다.[1]
- 11월 25일 - 파리 공방전: 노르드인 추장 시그프리드와 신릭이 이끄는 바이킹 군대가 300척의 롱쉽(10,000명)으로 구성된 함대를 이끌고 센 강을 따라 동프랑크로 항해했다. 그들은 파리 앞에 나타나 자유로운 통행을 허용해 주면 공물(데네겔드)을 지불하겠다고 제안했지만 거절당했다.[1]
- 11월 27일 - 바이킹은 파리 공방전을 시작하여 발리스타, 망고넬, 투석기로 북동쪽 탑을 공격했다. 모든 바이킹의 공격은 소규모 수비대(약 200명)와 함께 도시를 방어하는 파리 백작 오도에 의해 격퇴되었다. 시그프리드는 철수를 결정하고 강 오른쪽 둑에 야영지를 건설했다. 한편 그는 도시를 매설하고 식량을 찾아 시골을 수색했다.[1]
==== 영국 ====
- 알프레드 대왕은 세인트 데이비드 대성당의 노비스 주교의 친척인 아서를 잉글랜드 궁정으로 소환한다. 아서는 1년 중 6개월을 왕의 시종으로 봉사하기로 동의하고, 웨일스 왕들의 종주로서 알프레드를 인정하는 협상을 돕는다.[1]
- 덴마크 바이킹이 켄트주에 상륙하여 로체스터를 포위한다. 도시 방어가 개선되었기에, 알프레드 대왕이 군대를 조직할 수 있을 만큼 오랫동안 도시가 버틴다. 알프레드 대왕은 바이킹이 영국 해협을 건너 유럽으로 도망가도록 강요한다.[2]
- 다페드 왕국의 히파이드, 브리체이니아그의 엘리세드, 글리위싱의 호웰 압 리스 왕은 웨일스에서 아나라우드 압 로드리 왕의 군대에 의해 괴롭힘을 당하자 알프레드 대왕에게 보호를 요청하고 그의 종주권을 받아들인다. 아나라우드는 군사 동맹을 스칸디나비아 요크의 구드레드 왕과 맺으려 한다.[3]
==== 아랍 제국 ====
- 알-무타디드 휘하의 아바스 칼리파조 무슬림 군대(4,000명)가 람라(현 이스라엘) 인근에서 툴룬 왕조 통치자 쿠마라와이흐에게 패배했다. (타와힌 전투) 이 전투로 아바스 왕조가 시리아를 툴룬 왕조로부터 되찾으려는 시도는 종식되었다. 아바스 군대의 상당수는 포로로 잡혀 중세 이집트로 이송되었다. 쿠마라와이흐는 칼리파 정부와의 화해를 목표로, 현대 이라크로 돌아가기를 원하는 병사들은 몸값 없이 풀어주었고, 나머지는 이집트에 정착할 기회를 주었다.[1]
==== 동아시아 ====
4. 1. 1. 유럽
- 여름 - 뚱보 카를 황제는 로비트 (현재 네덜란드)에서 관료 회의를 소집하고, 전 국왕 로타르 2세의 사생아인 알자스 공작 휴와 그의 봉신인 프리슬란트 공작 고드프리드가 자신을 모반했다고 비난했다. 휴는 눈이 멀고 생 갈 수도원 (현재 스위스)으로 유배되었다. 고드프리드는 프리지아 및 작센 공국 귀족들의 공모로 프리지아인들에게 살해되었다. 지역 백작인 홀란트의 게롤프는 살해 이후 서부 프리지아 해안선을 덴마크로부터 인수했다.[1]
- 여름 - 뚱보 카를은 조카 카린티아의 아르눌프 (바이에른의 카를로만의 사생아)와 단순왕 샤를 (말더듬이 루이의 5세 아들)의 주장을 무시하고, 사생아 아들 베르나르를 후계자로 지명했다. 프랑크 주교들이 이에 항의하자, 카를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교황 아드리안 3세를 보름스로 소환했다. 아드리안은 로마를 파비아의 주교 요한에게 맡기고 독일로 향했지만, 포 강을 건넌 직후 사망했다.[1]
- 11월 25일 - 파리 공방전: 노르드인 추장 시그프리드와 신릭이 이끄는 바이킹 군대가 300척의 롱쉽 (10,000명)으로 구성된 함대를 이끌고 센 강을 따라 동프랑크로 항해했다. 그들은 파리 앞에 나타나 자유로운 통행을 허용해 주면 공물 (데네겔드)을 지불하겠다고 제안했지만 거절당했다.[1]
- 11월 27일 - 바이킹은 파리 공방전을 시작하여 발리스타, 망고넬, 투석기로 북동쪽 탑을 공격했다. 모든 바이킹의 공격은 소규모 수비대 (약 200명)와 함께 도시를 방어하는 파리 백작 오도에 의해 격퇴되었다. 시그프리드는 철수를 결정하고 강 오른쪽 둑에 야영지를 건설했다. 한편 그는 도시를 매설하고 식량을 찾아 시골을 수색했다.[1]
4. 1. 2. 영국
- 알프레드 대왕은 세인트 데이비드 대성당의 노비스 주교의 친척인 아서를 잉글랜드 궁정으로 소환한다. 아서는 1년 중 6개월을 왕의 시종으로 봉사하기로 동의하고, 웨일스 왕들의 종주로서 알프레드를 인정하는 협상을 돕는다.[1]
- 덴마크 바이킹이 켄트주에 상륙하여 로체스터를 포위한다. 도시 방어가 개선되었기에, 알프레드 대왕이 군대를 조직할 수 있을 만큼 오랫동안 도시가 버틴다. 알프레드 대왕은 바이킹이 영국 해협을 건너 유럽으로 도망가도록 강요한다.[2]
- 다페드 왕국의 히파이드, 브리체이니아그의 엘리세드, 글리위싱의 호웰 압 리스 왕은 웨일스에서 아나라우드 압 로드리 왕의 군대에 의해 괴롭힘을 당하자 알프레드 대왕에게 보호를 요청하고 그의 종주권을 받아들인다. 아나라우드는 군사 동맹을 스칸디나비아 요크의 구드레드 왕과 맺으려 한다.[3]
4. 1. 3. 아랍 제국
알-무타디드 휘하의 아바스 칼리파조 무슬림 군대(4,000명)가 람라(현 이스라엘) 인근에서 툴룬 왕조 통치자 쿠마라와이흐에게 패배했다. (타와힌 전투) 이 전투로 아바스 왕조가 시리아를 툴룬 왕조로부터 되찾으려는 시도는 종식되었다. 아바스 군대의 상당수는 포로로 잡혀 중세 이집트로 이송되었다. 쿠마라와이흐는 칼리파 정부와의 화해를 목표로, 현대 이라크로 돌아가기를 원하는 병사들은 몸값 없이 풀어주었고, 나머지는 이집트에 정착할 기회를 주었다.[1]4. 1. 4. 동아시아
4. 2. 주제별
이전 출력에서는 주어진 원본 소스가 없어 '주제별' 섹션에 대한 내용을 작성할 수 없었습니다. 원본 소스 부재는 여전하므로, 이번에도 해당 섹션에 대한 내용은 작성할 수 없습니다.4. 2. 1. 종교
7월 8일 - 교황 아드리아노 3세가 모데나 근처 롬바르디아에서 1년 반의 재임 기간을 마치고 사망했다. 그는 카를 3세가 보름스에서 소집한 제국 의회로 가는 길이었다.[1] 교황 스테파노 5세가 로마 가톨릭교회의 110대 교황으로 즉위하였다.[1]5. 탄생
6. 사망
- 4월 6일 - 메토디우스, 동로마 제국의 지식인이자 기독교 성직자 (* 826년)
- 5월 19일 (닌나 1년 음력 4월 2일) - 우지코 내친왕, 헤이안 시대의 황족, 이세 사이구 (* 생년 미상)
- 7월 8일 - 아드리아노 3세, 로마 가톨릭교회 교황
- 7월 25일 – 라게놀드, 뇌스트리아 변경백
- 11월 17일 - 작센의 리우트가르트, 프랑크 여왕
- 미히라 보자, 구르자라-프라티하라 왕조의 왕 (836년 출생)
- 무이레다크 막 브레인, 레인스터 왕 (아일랜드)
- 주징메이, 중국 환관이자 군사 지도자, 암살됨
- 천루이, 중국 군벌이자 총독
- 6월 - 고드프리드, '바다의 왕', 살해됨
- 7/8월 - 술라이만 이븐 와합, 무슬림 관료이자 재상
- 게레발드, 샬롱쉬르손 주교
참조
[1]
서적
Germany in the Early Middle Ages, c. 800–1056
Longman
[2]
간행물
K̲h̲umārawayh
[3]
백과사전
Khumārawaih
https://books.google[...]
BRILL
[4]
브리태니커
Daigo emperor of Japan
https://www.britan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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