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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마리테레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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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리 테레즈는 프랑스의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의 장녀로, 프랑스 혁명 시기에 탕플 탑에 유폐되는 등 불운한 삶을 살았다. 혁명 이후 오스트리아에서 망명 생활을 하다가, 1799년 앙굴렘 공작 루이 앙투안과 결혼했다. 남편과 시아버지 샤를 10세가 7월 혁명으로 폐위된 후 다시 망명 생활을 했으며, 1851년 오스트리아에서 사망했다.

2. 유년기

1778년 베르사유에서 루이 16세마리 앙투아네트의 장녀로 태어났다. 부모의 결혼 7년 만에 태어난 첫 아이였기에, 왕자가 아닌 공주라는 사실에 궁정 귀족들은 실망했지만, 마리 앙투아네트는 딸의 탄생에 감격하여 "아들이었다면 국가의 것이 되었겠지만, 너는 나의 것이고 내 모든 보살핌을 받게 될 거야."라고 말했다.[3] 공주의 이름은 외할머니인 마리아 테레지아스페인 왕 카를로스 3세의 이름을 따서 '마리 테레즈 샤를로트'로 지어졌다. 왕의 장녀에게 주어지는 칭호인 '마담 루아이얄'로 불렸다.

2. 1. 양육

마리 테레즈의 첫 가정 교사는 프랑스의 명문가인 로앙-게메네 가문의 게메네 공비였으나, 이후 가문이 파산하고 추문을 일으키면서 물러났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절친한 친구인 폴리냑 백작 부인이 그 자리를 대신하였다.[3]

루이 16세는 자녀들을 과잉보호하며 하고 싶은 대로 하게 하고, 원하는 것을 모두 들어주었다. 반면, 어머니 마리 앙투아네트는 딸을 엄하게 교육시켰다. 그 결과 마리 테레즈는 아버지를 훨씬 좋아하고 어머니를 멀리하게 되었다. 마리 앙투아네트루이 15세의 딸들인 마담 아델라이드, 빅투아르, 소피가 거만하고 제멋대로 행동하여 귀족들에게 경원시당하는 것에 대해, 프랑스 왕실의 가정 교육이 엄격하지 못했던 것이 원인이라고 판단했다. 그녀는 딸을 바르게 가르치겠다는 경각심이 매우 강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일부러 빈민 계층이 사는 곳을 마리 테레즈와 함께 방문하였고, 그들을 베르사유에 초대해 마리 테레즈로 하여금 그들을 대접하고 장난감을 나누어 주도록 하였다. 1784년에는 ''"먹을 것도, 입을 것도, 불을 피울 장작도 없는 불행한 사람들이 너무 많은 탓에"'' 그들을 돕기 위해 돈을 다 써버려 딸에게 신년 선물을 주지 못한 적도 있었다.

어린 시절 마리 테레즈는 부르봉 왕가와 합스부르크 왕가의 혈통을 물려받은 것에 자부심을 느끼며 자존심이 강하고 약간 조숙한 성격이었다고 한다. 9살 때 베르몽 신부로부터 어머니가 낙마했지만 무사하다는 이야기를 들은 마리 테레즈는 "만약 어머니가 죽었다면 무엇을 해도 자유였을 텐데"라고 대답해 신부를 아연실색하게 했다.

반면, 양육 담당자가 실수로 그녀의 발을 밟아 부상을 입힌 날 밤, 발의 상처를 알아챈 양육 담당자가 왜 부상당한 것을 말하지 않았는지를 묻자 "당신이 저를 다치게 해서 제가 아파할 때, 당신이 원인이라는 것을 알면 당신이 더 상처받았을 거예요"라고 대답했다는 일화도 있다.

1778년 7월 31일 베르사유 궁전의 시녀가 낳은 마리 필리핀 드 랑브리케가 10살 무렵의 마리 테레즈의 친구로 들어왔다. 이 소녀는 마리 테레즈와 똑같이 생겼다. 1788년 4월 30일 마리 필리핀의 어머니 필리핀이 사망하자 마리 앙투아네트는 에르네스틴으로 개명하고 양녀로 삼았다. 루이 16세는 에르네스틴을 위해 방을 마련하고, 고가의 피아노와 드레스를 사주었다.

2. 2. 형제자매

1781년 왕태자 루이 조제프 그자비에 프랑수아가 태어났고, 1785년에는 훗날 루이 17세가 되는 루이 샤를이 태어났다. 1786년에는 소피 엘렌 베아트리스 공주가 태어났으나, 소피 베아트리스는 1787년에, 루이 조제프는 1789년에 유전성 척추 결핵으로 요절하였다.[3]

3. 프랑스 혁명

루이 14세 시대부터 프랑스는 만성적인 적자에 시달리고 있었다. 루이 16세가 미국 독립전쟁을 지원하면서 재정 압박은 더욱 심해졌다. 설상가상으로 식료품 가격 폭등과 심각한 자연재해가 겹치면서 프랑스 내부에는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으로 극도로 불안한 상황이 조성되었다. 이러한 불만은 곧 강력한 권력을 지닌 왕족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졌고, 그중 가장 먼저 비판의 대상이 된 것은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였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평소 친한 친구들에게만 특혜를 베푸는 등 프랑스 왕비에게 요구되는 전통적인 태도와 거리가 멀었다. 또한, 적국 오스트리아 출신이라는 점은 귀족과 평민 모두에게 미움을 받는 원인이 되었다. 왕비를 폄훼하는 팸플릿들이 무수히 생산되면서 왕비의 평판은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1]

1789년, 왕권의 상징이었던 바스티유 감옥이 함락되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재정이자 왕비파였던 브르퇴이 남작은 독일로 도주했고, 왕의 동생 아르투아 백작 등 다수의 왕족들이 해외로 피신했다. 왕비의 최측근 폴리냑 공작 부인도 스위스로 피신했다. 결국 그해 10월 5일, 파리 시민들이 베르사유 행진을 감행하면서 왕실은 베르사유를 떠나 파리 튈르리 궁에 격리되었다.

3. 1. 탕플 탑 유폐

혁명의 열기와 정치적 위협이 점차 심해지자 왕족들은 몽메디로 도주할 계획을 세웠으나, 바렌느 앙 아르곤에서 붙잡히면서 실패로 끝났다. 왕족들은 탕플 탑으로 이송되었다. 1793년 1월, 루이 16세가 처형되었고, 1793년 10월에는 마리 앙투아네트가 처형되었다. 1794년에는 마담 엘리자베트가 처형되었고, 1795년에는 루이 17세가 사망했다. 마리 테레즈는 탕플 탑에 홀로 갇힌 채, 가족들의 사망 소식을 알지 못했다.

3. 2. 석방과 오스트리아 생활

1795년 7월 30일, 마리 테레즈의 외사촌인 신성 로마 황제 프란츠 2세는 프랑스 공화국 정부가 제시한 조건을 받아들여, 마리 테레즈의 신병과 프랑스인 포로를 교환하는 데 동의했다.[2] 마리 테레즈는 12월 19일 밤, 싫어하던 전 양육 담당 드 수시 부인과 그 딸, 간수 고망, 헌병 메샹과 함께 탕플 탑을 출발하여, 1796년 1월 9일 빈의 호프부르크 궁전에 도착했다.[2] 그러나 나폴레옹 군이 북 이탈리아에서 우세해지자, 여름 무렵까지 프라하 근교로 피난했다.

left 작, 1795년. 에르미타주 미술관 소장)]]

빈 궁정에서는 망명 귀족 지원과 부르봉 왕가 재건을 위해 헌신했고, 프란츠 2세는 마리 테레즈를 정중하게 대하고 수당도 지급했지만, 편지나 면회인을 엄격하게 감시했다.[2] 마리 테레즈는 때때로 레몬 즙으로 편지를 쓰는 등(암호/숨은 글씨) 매우 신중하게 통신과 송금을 했다.[2] 1797년, 통신을 계속하던 드 샤토렌 부인에게서 출산한 아들의 이름을 지어주기를 바라는 편지가 도착했고, 자신의 이름에서 샤를로 짓자는 제안을 회신했지만, 황제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냉담한 문장이 되었다.[2] 같은 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빈으로 진군했다.

페르센 백작은 마리 앙투아네트가 마리 테레즈를 위해 친척이나 친구들에게 분산하여 맡긴 금과 보석을 되찾아 상속시키려고 각국의 궁정을 분주하게 돌아다녔다.[2] 프란츠 2세가 그 대부분을 손에 넣었지만, 1797년 2월 24일 알현에서 마리 테레즈가 상속해야 할 재산의 소유를 인정하고, 후에 그 지참금으로 하겠다고 페르센 백작에게 대답했다.[2] 프란츠 2세는 마리 테레즈를 자신의 남동생인 카를 대공과 결혼시켜 프랑스의 이권을 얻으려고 생각했지만, 그녀는 부르봉 왕가의 삼촌 루이 18세 (프로방스 백작)가 추천하는 남동생 아르투아 백작(후의 샤를 10세)의 장남이자, 부계 사촌인 앙굴렘 공작 루이 앙투안과의 결혼을 선택했고, 유럽 대륙의 아군을 원했던 프란츠 2세도 이를 묵인했다.[2]

빈 궁정에서는 나폴리 왕국 출신 사촌이자 프란츠 2세의 황후 마리아 테레지아와 서로 싫어했지만, 황제의 여동생 마리아 클레멘티나 대공녀, 마리아 아말리아 공녀와는 친하게 지냈고, 1798년에 여동생이 사망했을 때 매우 슬퍼했다.[2]

4. 망명 생활과 결혼

앙굴렘 공 루이 앙투안


마리 테레즈는 빈에 도착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라트비아의 옐가바에 거주하던 숙부 프로방스 백작에게 보내졌다. 프로방스 백작은 프랑스 왕실을 결집시키기 위해 마리 테레즈와 부르봉 왕가의 일원과의 결혼을 추진했고, 마리 테레즈도 이에 찬성했다. 결국 숙부인 아르투아 백작의 장남 앙굴렘 공작 루이 앙투안이 신랑감으로 결정되었다.

4. 1. 영국 망명

왕실 가족은 영국으로 망명하였고, 버킹엄셔에 정착하였다. 마리 테레즈를 비롯한 아르투아 백작 일가는 주로 에든버러의 홀리루드 궁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1814년 나폴레옹 1세가 몰락하자 부르봉 왕가는 다시 왕위를 되찾고 프랑스로 되돌아왔다.

5. 왕태자비 시절

1827년


부르봉 왕가는 프랑스 복귀 후 왕실의 위엄을 되찾기 위해 노력했다. 1815년, 루이 16세마리 앙투아네트, 마담 엘리자베트의 시신을 생드니 대성당에 안치하고 화려하게 장식했다.

마리 테레즈는 어린 시절 고난을 겪었던 튀일리 궁에서의 생활을 싫어했다. 튀일리 궁에는 나폴레옹에 의해 'N'이 새겨져 있었고, 꿀벌과 독수리 장식이 붙어 있었다. 마리 테레즈는 나폴레옹 시대에 귀족이 된 신흥 귀족들에게 마음을 열지 않았고, 세례명으로 불러 상대를 화나게 했다. 신흥 귀족들은 마리 테레즈가 영국의 시골스러운 차림새로 파리로 돌아왔다고 조롱했다. 루이 18세는 마리 테레즈에게 "남들 앞에서 뚱한 표정을 짓지 말 것, 촌스러운 옷차림을 하지 말 것, 사람들 앞에서는 적어도 연지라도 바를 것"이라고 꾸짖었다.

마리 테레즈는 제정 시대에 성공한 옛 동료들도 싫어했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시녀였던 캉팡 부인이 학교를 열고 보나파르트 가문의 사람들을 교육하고 있다는 것을 알자, 면회조차 거절했다. 반대로 자신이 어려울 때 힘써준 폴린에게는 편지를 보내 궁정에 올 것을 요청했고, 드 샤토렌느 부인에게는 연봉을 정해주고 자신을 찾아오도록 했으며, 아들 샤를에게는 친위대 관련 일을 주선했다.

루이 16세마리 앙투아네트의 유해는 1805년에 발견되었지만, 루이 조제프의 유해는 발견되지 않았다. 망명 시대부터 루이 샤를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나타나 마리 테레즈에게 면회를 요청했지만, 그녀는 응하지 않았다. 1814년 12월 13일, 마리 테레즈는 동생의 생존을 확인하기 위해 루이 17세의 간수였던 앙투안 시몽의 미망인을 비공식적으로 방문했다. 시몽 부인은 루이 샤를이 탕플 탑에서 죽지 않았으며 1802년에 자신을 찾아왔었다고 답했다. 1815년 1월 27일, 파리 시립 병원을 방문한 마리 테레즈는 루이 샤를의 검시를 했던 필립 장 페르탱 의사를 소개받았다. 페르탱 의사는 루이 샤를의 심장을 잘라낸 경위를 이야기하고 그 용기를 건네주고 싶다고 했지만, 이후 전달에 실패하고 1825년 5월 파리의 드 케랑 대주교에게 맡겼다. 1826년 9월 페르탱 의사가 사망하자, 크리스탈 용기에 담긴 심장은 대주교의 서고에 숨겨졌다.

많은 민중들은 불행했던 시절과 루이 16세마리 앙투아네트의 유일한 직계 자손이라는 점 때문에 마리 테레즈를 반겼지만, 마리 테레즈는 자신에게 불행을 안겨준 민중들을 진심으로 싫어한다는 것을 숨기지 않았다. 또한 샤를 10세와 더불어 극단적으로 보수적이었던 그녀의 정치관은 지식인들 사이에서 경계 대상이 되었다.

5. 1. 백일천하와 재망명

1815년 2월 26일, 나폴레옹엘바섬을 탈출하여[4] 프랑스에 복귀하자, 루이 18세를 비롯한 왕족들은 겁에 질려 황급히 도주하였다. 그러나 보르도에 있던 마리 테레즈는 군대를 소집하고 나폴레옹에 맞서려 했다. 하지만 나폴레옹의 위세를 두려워한 군인들은 마리 테레즈를 보호할 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나폴레옹은 이 소식을 듣고 마리 테레즈를 "그 가문의 유일한 남자"라고 칭송하며, 그녀의 용기에 감탄하여 도망칠 수 있도록 놓아주었다.[4] 결국 마리 테레즈는 국외로 도피하였다.

1815년 3월 20일부터 시작된 나폴레옹의 백일천하 동안, 가론 강 기슭에서 베르트랑 클로렐이 이끄는 혁명군과 강 건너편에 진을 친 부르봉 왕가 군대가 대치했다. 이때 마리 테레즈는 지붕 없는 마차에 올라 반(反)나폴레옹 봉기를 연설했고, 이 내용은 다음 날 런던의 『더 타임스』에 소개되었다. 이를 알게 된 나폴레옹은 마리 테레즈를 "부르봉 왕가의 유일한 남자"라고 조롱했다. 헨트로 망명한 루이 18세는 그녀를 장미 전쟁에서 헨리 6세를 위해 랭커스터 가문의 군대를 지휘한 마거릿 오브 앙주에 비유했다.

1815년 6월 18일, 워털루 전쟁에서 나폴레옹이 패배하고[5] 세인트헬레나 섬에 유배되면서 부르봉 왕실은 다시 프랑스에 복귀하였다. 1824년, 루이 18세가 사망하고 샤를 10세가 즉위하자, 그의 장남 앙굴렘 공작이 왕태자가 되면서 마리 테레즈 또한 왕태자비가 되었다.

5. 2. 샤를 10세 시대와 7월 혁명

샤를 10세와 그의 아들 앙굴렘 공작이 7월 혁명으로 축출되면서, 마리 테레즈는 샤를 10세에 이어 앙굴렘 공작이 퇴위 서류에 서명하는 20분 가량만 프랑스의 왕비가 되었다.[1] 루이 필리프가 샤를 10세의 뒤를 이었다.[1] 마리 테레즈 부부는 불편한 존재가 되어 영국,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등에서 망명 생활을 하였다.[1]

6. 죽음

1844년 남편 앙굴렘 공작이 사망하였다. 자녀가 없었던 마리 테레즈는 시동생 베리 공작의 유복자인 샹보르 백작 앙리를 친자식처럼 키웠다. 루이 필리프의 왕위 계승을 결코 인정하지 않았던 마리 테레즈는 앙리를 진정한 왕위 계승자라고 생각하였다. 그녀의 추종자들은 물론이고 앙리 자신도 그렇게 생각하여, 그를 앙리 5세라 부르기도 하였다. 1851년, 마리 테레즈는 오스트리아의 프로스도르프에서 사망하였다.[1]

참조

[1] 서적
[2] 서적
[3] 문서 로마 가톨릭교회, 성공회, 정교회, 루터교에서의 대부모
[4] 지식백과 나폴레옹 1세 네이버 지식백과
[5] 서적 세계전쟁사 다이제스트100 가람기획 2011-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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