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란데런 백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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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플란데런 백국은 현재 벨기에, 프랑스, 네덜란드에 걸쳐 있던 중세 시대의 역사적 지역이다. 이 지역은 원래 브뤼헤 주변을 가리키는 용어였으며, 9세기 플랑드르 가우에서 시작되어 발드윈 1세가 초대 백작으로 임명되면서 백국으로 발전했다. 플란데런 백국은 11세기에서 13세기 사이에 경제적 번영을 누렸으나, 14세기 흑사병, 백년 전쟁, 영국의 직물 생산 증가로 쇠퇴하기 시작했다. 1369년 부르고뉴 공작과의 결혼으로 독립을 잃고, 이후 합스부르크 가문의 지배를 받다가 프랑스 혁명 이후 프랑스에 합병되어 소멸되었다.
"플랑드르"라는 용어는 원래 브뤼헤 주변 지역을 가리켰다. 이는 엘리지우스 성인(660년경)의 전기인 ''Vita sancti Eligii''에 처음 언급되었다. 이 저술은 684년 이전에 쓰여졌지만 725년 이후에야 알려지게 되었다. 이 저술에서는 "in Flandris"라는 장소만 언급하고 있다.
2. 어원
게르만어족에서 "플랑드르"와 "플라망어"(네덜란드어: ''Vlaanderen'', ''Vlaams'')의 어원을 제시한 것은 1948년 모리츠 기슬링이었다.[2] 이는 1943년 레네 베르데옌의 논문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3][4]
이 제안에 따르면, "플랑드르"와 "플라망어"는 원게르만어 *''flaumaz''(개울, 흐름, 홍수 또는 소용돌이를 의미)에서 유래한 단어에서 파생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를 바탕으로, 침수된 땅을 가리키는 원게르만어 ''*flaumdra''라는 용어가 있었다고 제안된다. 토리언스에 따르면, 이 제안의 강점은 이 용어가 이 저지대 해안 지역의 염습지와 개펄을 묘사한다는 것이다. 제방 건설이 1050년경에 시작되기 전에는 이 지역은 정기적으로 침수되었다. 그러나 이 제안의 약점은 필요한 게르만어 형태가 네덜란드어나 그 방언의 어떠한 기록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비교는 대신 고대 고지 독일어 ''flewen''과 ''flouwen'', 그리고 고대 노르드어 ''flaumr''을 기반으로 했다.
3. 지리
역사적인 플란데런 백국의 지리는 현재 벨기에의 플랑드르 지역과 부분적으로만 일치하며, 현재 서플랑드르 주와 동플랑드르 주를 넘어 프랑스와 네덜란드까지 걸쳐 있었다.
플란데런 백국은 현재 벨기에, 프랑스, 네덜란드 3개국에 걸쳐 있었다. 벨기에에는 서플랑드르와 동플랑드르 주, 안트베르펜 주의 일부, 에노 주의 일부가 포함되었다. 프랑스에는 프랑스 플랑드르와 아르투아가 포함되었고, 네덜란드에는 젤란드 플랑드르가 포함되었다.
3. 1. 벨기에
역사적인 플란데런 백국의 지리는 현재 벨기에의 플랑드르 지역과 부분적으로만 일치하지만, 그 지역에서조차 현재 서플랑드르 주와 동플랑드르 주를 넘어선다. 역사적인 백국 중 일부는 현재 프랑스와 네덜란드에 속해 있다. 백국이 포함하는 지역은 다음과 같이 분포되어 있다.국가 지역 벨기에 프랑스 네덜란드
3. 2. 프랑스
역사적인 플란데런 백국의 일부는 현재 프랑스에 속해 있으며, 다음과 같이 분포되어 있다.3. 3. 네덜란드
젤란드 플랑드르는 벨기에와 서스헬트 사이에 있는 지역으로, 현재 젤란드 주 남부에 해당한다. 1581년부터 네덜란드 공화국의 지배 아래 총독령의 일부가 되었다.
4. 상징
플랑드르 백국의 문장은 1168년부터 1191년까지 플랑드르 백작이었던 알자스의 필립이 만들었다고 전해지며, 금색 바탕에 검은색 사자(rampant lion)가 그려져 있다. 금박차 전투 이야기에서 이 문장과 그에 상응하는 전투 슬로건인 "Vlaendr'n den leeuw"("플랑드르여, 사자여")는 19세기에 헨드릭 콘시엔스의 소설 ''De Leeuw van Vlaanderen''을 통해 대중화되어 플랑드르 정체성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 결과, 백국의 문장은 플랑드르 공동체의 문장으로 남아 있다.
알자스의 필립이 1177년 사라센 기사에게서 정복했다는 성지에서 사자 깃발을 가져왔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이것은 신화다. 그가 레반트 지역을 한 발자국도 밟지 않았던 1163년부터 그의 개인 인장에 사자가 나타났다는 사실은 이를 반증한다. 실제로 필립은 서유럽의 유행을 따랐다. 같은 시기에 사자는 브라반트, 룩셈부르크, 홀란드, 림뷔르크 및 기타 영토의 문장에도 등장했다. 사자는 헤럴드 기호로 주로 신성 로마 제국의 국경 지역과 인접 국가에서 사용되었다. 이것은 개인 문장에 독수리를 사용한 황제로부터의 독립을 보여주는 방법일 가능성이 높다. 유럽에서 사자는 이솝의 우화와 같은 작품을 통해 로마 시대부터 잘 알려진 존재였다.
5. 역사
플랑드르 백국의 역사는 선사 시대부터 시작되어 여러 시대를 거쳐 발전해 왔다.
선사 시대와 고대플랑드르 지역에는 선사 시대부터 사람이 살았으며, 철기 시대에는 캠멜베르흐가 중요한 켈트족 정착지였다. 율리우스 카이사르 시대에는 벨가에 부족의 일부였으며, 메나피이, 모리니, 네르비이, 아트레바테스 등의 부족이 이 지역에 거주했다. 카이사르는 기원전 54년경 이 지역을 정복했고, 이후 주민들은 로마화되었다. 쾰른과 불로뉴쉬르메르를 연결하는 로마 도로가 방어선 역할을 했으며, 북쪽 지역은 북해의 홍수로 고통받았다. 해안과 스헬데 지역에는 앵글족, 작센족, 유트족 등 앵글족 부족들이 점차 나타났고, 리투스 삭소니쿰 해안 방어 시설은 420년경까지 유지되었다.
중세 초기4세기 이후, 색슨족과 프랑크족이 스헬트 지역에 다시 정착하여 게르만 문화와 언어를 유지했다. 5세기에는 살리안 프랑크족이 북부 프랑스와 왈로니아 지역에 정착했고, 6세기부터는 라인란트 출신 프랑크족과 다른 게르만 부족들이 북쪽 지역에 정착했다. 초기에는 기독교화가 더뎠으나, 베다스트와 투르네의 엘레우테리우스 등의 노력으로 아라스 주교구와 투르네 주교구가 재건되었다. 6세기 말에는 덴텔리누스 공국이 건설되어 프리지아족과 색슨족의 침입에 대한 군사적 방어 역할을 했다. 6세기 말과 7세기 말에는 파드칼레에서 새로운 게르만족 유입이 나타났고, "-inga haim" 형태의 새로운 정착지가 형성되었다. 7세기에는 종교, 군사, 행정 인프라 재건이 시작되었고, 8세기에는 이중 언어 지역이 나타났다. 8세기에는 다고베르트 1세의 지원 아래 생 베르탱 수도원, 생 바아스트 수도원 등 수도원 설립을 통한 새로운 기독교화 시도가 이루어졌다. 아만두스와 엘리지우스 등의 선교사들이 활동했으며, 엘리지우스는 "플랑드르"라는 단어를 처음 언급했다.[4] 7세기와 8세기에는 투르네 가우, 캉브레 가우, 타로 가우, 브라반트 가우, 로다닌 가우, 겐트 가우, 멤피스쿠스 가우, 플랑드르 가우, 오스터반트 가우, 쿠르트라크 가우 등 여러 가우(gaue) 또는 파지(pagi)가 만들어져 플랑드르 백국의 기초를 형성했다.[5]
카롤링거 왕조
751년 카롤링거 왕조가 메로빙거 왕조를 몰아내고 왕위를 차지했다. 샤를마뉴는 프랑크 왕국을 통일하고 아헨에 거주하며 영토를 순시했다. 811년에는 바이킹 침입에 대비하여 함대를 시찰했다. 플랑드르 지역은 스헬트강과 스카르프 강 주변의 도시들과 여러 해항 도시, 그리고 부유한 수도원들 덕분에 경제적으로 번영했다. 843년 베르됭 조약으로 프랑크 왕국이 분열되면서 플랑드르는 샤를 대머리의 서프랑크 왕국에 속하게 되었다. 870년 메르센 조약으로 서유럽은 서프랑크 왕국과 동프랑크 왕국으로 나뉘었고, 스헬트 강이 두 세력의 경계가 되었다.
플랑드르 백국의 발전 (9세기~11세기)
9세기에서 11세기 사이, 유럽은 바이킹, 마자르족, 사라센의 침입으로 위기를 겪었다. 프랑크 왕국의 중앙 정부는 약화되었고, 지역의 강력한 인물들이 등장했다. 플랑드르 백국은 포레스트 왕조가 이끌던 Pagus Flandrensis|플란데런시스la (Vlaanderengouw|플란데런하우nl)에서 유래했다. 862년, 발드윈 1세가 샤를 2세의 딸 주디트와의 결혼을 통해 플랑드르의 첫 번째 백작(변경백)이 되었다.[5] 발드윈 1세는 주변 영토를 백국에 편입시키며 세력을 확장했고, 스헬더강 남쪽과 서쪽의 모든 영토, 아르투아 백국 등을 포함하게 되었다.
번영기 (11세기~13세기)
1071년 카셀 전투 이후 플랑드르 백작 로베르 1세가 백작이 되었고, 플랑드르의 기사들은 유럽에서 존경받는 기사들이었다. 플랑드르 백작 로베르 2세는 클뤼니 개혁을 지지하고 제1차 십자군 전쟁에 참여했다. 플랑드르 가문은 1119년까지 통치했고, 이후 덴마크 가문, 알자스 가문이 차례로 백작령을 상속받았다. 티에리 알자스와 필리프 알자스 치하에서 플랑드르는 번성했다. 12세기 후반, 베르망두아 백작령이 플랑드르에 편입되면서 백작령은 크게 번영했다. 알자스 가문 통치 기간 동안 도시들이 발전하고 새로운 제도들이 형성되었으며, 여러 항구가 건설되었다. 영국, 발트해 연안 국가, 프랑스, 라인란트, 이탈리아 등과의 무역이 활발했고, 특히 영국과의 양모 무역은 직물 산업 발전에 중요했다. 플랑드르의 무역 도시들은 유럽에서 가장 도시화된 지역 중 하나가 되었다. 1194년, 에노 가문이 알자스 가문의 뒤를 이었다.
위기와 변화 (14세기~15세기)1278년 댕피에르 가문의 기 드 댕피에르가 백작이 되면서 프랑스와의 갈등이 시작되었다. 프랑스-플랑드르 전쟁(1297-1305)에서 플랑드르의 자치 도시들은 프랑스에 저항했고, 1302년 쇠박차 전투에서 승리했다. 그러나 결국 몽앙페벨 전투에서 패배하여 아티쉬르오르주 조약을 체결, 릴, 두에, 오르시를 프랑스에 넘겨주어야 했다. 14세기에는 흑사병, 백년전쟁, 영국의 직물 생산 증가 등으로 플랑드르의 번영이 쇠퇴했다. 1369년 마르가레트 드 당피에르의 결혼으로 플랑드르는 발루아-부르고뉴 가문의 영지가 되었다. 1449년 헨트 봉기가 일어났으나 1453년 진압되었다. 1482년 마리 부르고뉴가 사망하면서 합스부르크 가문의 필리프 1세가 백작이 되었고, 플랑드르 도시들은 봉기를 일으켰으나 진압되었다. 1493년 생리스 조약으로 플랑드르는 신성 로마 제국의 영토가 되었다.
합스부르크 시대 (16세기~18세기)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 치하에서 플랑드르는 부르고뉴 연합에 속했고, 겔더스 전쟁에 참여했다. 1549년 실질 조약으로 플랑드르는 신성 로마 제국의 독립 영토가 되었고, 네덜란드 17주의 일부가 되었다. 1566년 이미지 파괴 운동이 일어나 80년 전쟁과 네덜란드 공화국의 분리로 이어졌다. 플랑드르는 스페인의 지배를 받았고, 루이 14세 때 남부 지역이 프랑스에 합병되어 프랑스 플랑드르로 알려지게 되었다. 1678년 나이메헌 조약으로 이 상황이 공식화되었다. 스페인 합스부르크 단절 후,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가 플랑드르 백작이 되었고, 마리아 테레지아 치하에서 오스트리아 네덜란드는 번영했다.
프랑스 혁명과 이후1789년 요제프 2세에 대항하는 혁명이 일어났고, 1790년 플랑드르 백국은 벨기에 연합국의 창립 회원이 되었다. 1795년 프랑스에 합병되어 리스 주와 에스코 주로 나뉘면서 플랑드르 백국은 공식적으로 존재를 멈추었다. 프랑스 혁명 이후 플랑드르 백국은 복원되지 않았고, 네덜란드 연합 왕국과 벨기에에서 동플랑드르와 서플랑드르 주로 이어졌다.
5. 1. 선사 시대와 고대
플랑드르 백국이 될 지역에는 선사 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다. 철기 시대에는 캠멜베르흐가 중요한 켈트족 정착지였다. 율리우스 카이사르 시대에 주민들은 갈리아 북부의 모든 켈트족과 게르만족 부족을 통칭하는 벨가에의 일부였다. 플랑드르 지역에는 메나피이, 모리니, 네르비이, 아트레바테스 부족이 있었다.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기원전 54년경 이 지역을 정복했고, 1세기부터 3세기까지 주민들은 부분적으로 로마화되었다. 쾰른과 불로뉴쉬르메르를 연결하는 로마 도로는 방어선으로 사용되었다. 남쪽의 갈로-로마 인구는 유지되었지만, 북쪽은 무법 지대가 되어 북해의 정기적인 홍수로 고통받았다.
해안과 스헬데 지역에는 점차 앵글족 부족들이 나타났다. 로마인들에게 "작센"은 일반적인 용어였으며, 앵글족, 작센족, 유트족, 에룰레족을 포함했다. 불로뉴와 오덴부르크 주변의 해안 방어 시설인 "리투스 삭소니쿰"은 약 420년까지 기능을 유지했다. 이 요새들은 작센족 병사들이 지켰다.
톡산드리아 기반 지역에서 살리안 프랑크족은 로마 제국으로 더욱 확장했다. 아트레바테스 땅으로의 첫 침입은 448년 비쿠스 헬레나에서 격퇴되었다. 그러나 454년 로마 장군 플라비우스 아에티우스와 455년 로마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3세가 살해된 후, 살리안 프랑크족은 거의 저항에 부딪히지 않았다. 뒤스부르크에서 클로디오 왕은 캉브레와 투르네를 정복했고, 솜 강에 도달했다. 그의 사망 후 두 개의 살리안 왕국이 등장했다. 힐데리크 1세는 463년 투르네의 왕이자 서고트족에 대항하는 로마의 동맹국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는 또한 벨기카 세쿤다 지방의 관리였다. 그의 아들 클로비스 1세는 486년부터 프랑스 북부 전체를 정복했다.[1]
5. 2. 중세 초기
4세기 이후, 버려진 해안과 스헬트 지역에는 라인 강 동쪽에서 온 색슨족과 프랑크족이 다시 정착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게르만 문화와 언어를 유지했다. 5세기에는 살리안 프랑크족이 현재의 북부 프랑스와 왈로니아 지역에 정착하여 현지 갈로-로마 인구에 적응했다. 6세기부터는 북쪽의 무인지대에 라인란트 출신 프랑크족과 다른 게르만 부족들이 정착했다.초기 플랑드르 지역의 이주는 제한적인 기독교화를 동반했다. 선교사들이 이교도들을 개종시키려 했으나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주교구는 후기 로마 시대의 자연 경계를 따라 재건되었다. 카르보나리아 숲은 캉브레 대교구와 통에렌 주교구를 분리했고, 스헬트 강은 캉브레 주교구와 투르네 주교구 사이의 경계가 되었다. 베다스트와 투르네의 엘레우테리우스는 아라스 주교구와 투르네 주교구를 재건하는 임무를 맡았으나, 이들은 독립적으로 생존하지 못했다. 6세기 후반 아라스 주교구는 캉브레 주교구에, 7세기 초에는 투르네 주교구와 누아용 주교구가 합쳐졌다.
6세기 말, 덴텔리누스 공국이 건설되었다. 이 공국은 북해와 카르보나리아 숲 사이의 북서부 지역으로, 후대 플랑드르와 매우 유사한 윤곽을 가졌다. 이 공국은 프리지아족과 색슨족의 침입에 대한 군사적 방어 수단이었다. 600년 클로타르 2세는 이 공국을 아우스트라시아에 할양해야 했으나, 622~623년 아우스트라시아 이중 군주제가 복원된 후 다시 돌아왔다.

6세기 말과 7세기 말, 서쪽 파드칼레에서 새로운 유입이 나타났다. 이 지역은 5세기에 게르만화되었고, 삭손족과 프랑크족의 후손들이 미래의 플랑드르와 브라반트 공국에 정착했다. 네덜란드와 독일에서도 새로운 게르만 정착민들이 들어왔다. 이들의 새로운 정착지는 종종 게르만 지도자의 이름을 따서 "-inga haim"(X 부족의 정착지)을 추가하여 명명되었다. 예를 들어, 페테험은 'Petta 부족의 정착지'를 의미하는 "Petta-inga-haim"에서 유래했다.
플랑드르의 식민지화와 게르만화는 주로 6세기와 7세기에 일어났다. 7세기에 인구 수준이 충분히 증가하여 종교, 군사, 행정 인프라 재건을 시작했다. 언어학 분야에서는 8세기에 선형적인 언어 경계를 가진 광대한 이중 언어 지역이 나타났다. 파드칼레에서는 6세기~7세기에 언어 장벽이 나타났지만, 9세기에는 로마화 운동이 시작되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6세기 엘레우테리우스와 베다스트와 같은 주교들의 기독교화 시도는 대부분 실패했다. 8세기에 다고베르트 1세의 영향 아래 새로운 기독교화 시도가 이루어졌다. 그는 선교사들을 왕국의 북부 지역에 있는 왕실 영지에 임명했다. 선교사들은 이교 지역에서 기독교의 중심지 역할을 할 수도원과 수도회를 설립하는 임무를 맡았다. 649년 오도마르는 생토메르에 수도원(생 베르탱 수도원)을 설립했고, 680년 오베르투스는 아라스 근처에 생 바아스트 수도원을 설립했다. 인구의 기독교화는 주로 아만두스(생 바보 수도원과 겐트의 성 베드로 수도원)와 엘리지우스(해안 지역과 안트베르펜)와 같은 선교사들의 활동에 의해 이루어졌다. 엘리지우스는 그의 전기에서 650년경 이 지역을 순회했을 때 "플랑드르"라는 단어를 처음 언급했다.[4]
7세기 동안 플랑드르 영토에 최초의 가우(gaue) 또는 파지(pagi)가 만들어졌다. 가우는 도시의 행정 구역이었다. 7세기와 8세기의 가우는 플랑드르 백국의 기초를 형성하게 된다. 투르네 가우는 580년경에 시작되었고, 7세기에는 캉브레 가우, 타로 가우, 그리고 세기 말의 브라반트 가우가 있었다. 8세기에는 로다닌 가우, 겐트 가우, 멤피스쿠스 가우, 그리고 플랑드르 가우가 알려져 있다. 마지막으로, 오스터반트 가우와 쿠르트라크 가우도 메로빙거 왕조 시대의 가우로 간주된다.[5]
5. 3. 카롤링거 왕조
751년 카롤링거 왕조의 궁재들은 메로빙거 왕조를 권좌에서 몰아내고 스스로 왕위를 차지하는 데 성공했다. 마지막 메로빙거 왕인 힐데리크 3세는 후일 생 베르탱 수도원이 세워지는 생 오메르에 감금되었고, 왕권의 상징이었던 그의 긴 머리카락은 잘려나갔다.[1]
샤를마뉴는 그의 아버지 피핀의 뒤를 이어 네우스트리아와 아우스트라시아를 통치했고, 그의 동생 카를로만이 죽은 후에는 프랑크 왕국 전체를 재통합했다. 그는 아헨에 거주했지만 영토를 순시하며 많은 시간을 보냈다. 811년에는 바이킹의 침입에 대비하여 불로뉴와 겐트에 건조하도록 명령했던 함대를 시찰했다.[1]
미래의 플랑드르 지역은 경제적으로 번영하는 지역이었으며, 스헬트강을 따라 겐트, 투르네, 발랑시엔, 캉브레와 스카르프 강변의 두에에 있는 랑브르, 그리고 여러 해항 도시인 캥토빅, 불로뉴와 이제르 포르투스(이저강 하구의 항구), 이저강 어귀의 항구 등이 있었다. 또한 이 지역에는 생 베르탱 수도원, 생 바보 수도원, 생 아망 수도원, 생 바아스트 수도원과 같은 부유한 수도원들이 많았다.[1]
샤를마뉴의 뒤를 이은 아들 루이 경건왕 재위 시절에도 그의 세 아들은 상속 문제로 다투기 시작했다. 그들은 여러 조약을 체결했는데, 843년에 체결된 베르됭 조약이 최종적인 조약이 되었다. 이 조약들에 의해 동프랑크 왕국, 중프랑크 왕국, 서프랑크 왕국이 만들어졌다. 샤를 대머리가 상속받은 서프랑크 왕국에는 원래의 플랑드르 백국이 포함되었는데, 그 영역은 대략 오덴부르크, 아르덴부르크, 토르호우트 사이에 걸쳐 있었다.[1]
중프랑크 왕국의 왕들이 멸망한 후, 서프랑크 왕국과 동프랑크 왕국의 통치자들은 870년 메르센 조약에서 중프랑크 왕국을 서로 나누었다. 이제 서유럽은 두 세력으로 나뉘었다. 굳건한 서프랑크 왕국(후일의 프랑스)과, 동프랑크 왕국의 여러 공국들의 느슨한 연합(후일의 신성 로마 제국)이었다.[1]
북쪽에서는 이 두 세력이 스헬트 강으로 분리되었는데, 이 강은 이전에 서프랑크 왕국과 중프랑크 왕국을 분리했던 강이었다. 이 분리는 카를 5세 시대까지 변함없이 유지되었다.[1]
5. 4. 플랑드르 백국의 발전 (9세기~11세기)
9세기에서 11세기 사이, 유럽은 군사적, 경제적, 정치적으로 심각한 위기를 겪었다. 북쪽에서는 바이킹, 동쪽에서는 마자르족, 남쪽에서는 사라센이 침입하여 파괴를 일삼았다. 프랑크 왕국의 중앙 정부는 효과적인 방어를 조직할 수 없었고, 백성들은 멀리 떨어진 통치자들에 대한 신뢰를 잃었다. 이러한 권력 공백 속에서 샤를마뉴와 관련된 사람들의 후손인 지역의 강력한 인물들이 등장하였다.
플란데런 백국은 포레스트 왕조가 이끌던 Pagus Flandrensis|플란데런시스la (Vlaanderengouw|플란데런하우nl)에서 유래했으며, 샤를마뉴는 플랑드르 계곡 상류의 작은 봉건 영토들을 통합하는 데 기여했다. 포레스트 왕조는 비교적 황폐한 지역에서 교회의 지배력을 강화하기도 했다.
플랑드르의 첫 번째 변경백(백작)은 862년 백작이 된 발드윈 1세였다.[5] 발드윈은 프랑크 왕 샤를 2세의 딸인 플랑드르의 주디트와 도망쳤다. 이전에 두 명의 잉글랜드 국왕과 결혼했던 주디트는 아버지의 귀환 명령을 거부했다. 교황의 중재 후, 샤를 2세는 사위와 화해하고 변경백 칭호와 그에 상응하는 봉건 영토를 주었다. 변경백은 주로 군사적 임명이었고, 샤를 왕이 바이킹에게 살해될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발드윈을 변경백으로 임명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처음에 프랑스 국왕들은 바이킹 침략으로부터 북부 프랑스 국경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이러한 행위를 했다. 그러나 백작들은 위기 상황을 이용하여 주변의 약탈당한 영토들을 백국에 편입시켰다. 백작들은 세월이 흐르면서 원래 플랑드르 pagusla의 영향력을 스헬더강 남쪽과 서쪽의 모든 영토로 확장했는데, 여기에는 네 개의 행정구역의 영주권, 제일란드 플랑드르, 동쪽의 아르스트 변경백령, 남서쪽의 아르투아 백국이 포함되었다. 아르투아 백국은 1237년 별개의 백국이 될 때까지 플랑드르의 일부로 남아 있었다.
5. 5. 번영기 (11세기~13세기)
로베르 1세는 카셀 전투에서 조카 아르눌프 3세에 대한 반란을 성공적으로 진압하고 플랑드르 백작이 되었다.[6] 11세기와 12세기 플랑드르의 기사들은 십자군 전쟁 이전부터 유럽에서 가장 효과적이고 존경받는 기사들 중 일부였다.[7] 로베르 2세 백작은 클뤼니 개혁 운동을 지지했으며, 1096년 군대를 이끌고 제1차 십자군 전쟁(First Crusade)에 참여했다. 부르고뉴의 클레멘티아(Clementia of Burgundy) 백작 부인의 지도력과 아라스의 람베르트(Lambert of Arras) 주교의 옹호 덕분에 플랑드르 귀족 대다수가 4년 동안 자리를 비웠음에도 법과 질서는 유지되었다. 지역 성직자들은 하느님의 평화와 휴전(Peace and Truce of God) 운동을 장려했다.플랑드르 가문(House of Flanders)은 1119년 발두앵 7세(Baldwin VII of Flanders)가 후계자 없이 사망할 때까지 통치했으며, 이후 덴마크 가문(House of Denmark) 출신인 샤를 대왕(Charles the Good)이 백작령을 상속받았다. 그는 10세기부터 백작 작위와 함께 사용되어 온 "플랑드르 후작(Marquis of Flanders)"이라는 칭호를 버렸다.[8] 노르망디의 윌리엄 클리토(William Clito) (1127-1128)의 짧은 통치 기간 이후, 백작령은 알자스 가문(House of Alsace)의 티에리 알자스(Thierry of Alsace)에게 넘어갔다. 티에리(1128-1168)와 그의 후계자인 필립 알자스(Philip of Alsace) 치하에서 플랑드르의 중요성과 권력은 증가했다.
12세기 후반, 필립 알자스가 그의 아내의 상속을 통해 베르망두아 백작령(County of Vermandois)을 플랑드르에 편입시키면서 백작령은 엄청난 번영을 누렸다. 그가 통치하는 영토는 파리에서 25km 이내에 이르렀고, 그의 봉건 영주인 프랑스 국왕이 직접 통치하는 영토보다 컸다.
알자스 가문의 통치 기간 동안 도시들이 발전하고 새로운 제도들이 형성되었다. 그라블린(Gravelines), 니우포르트(Nieuwpoort, Belgium), 담(Damme), 비어플리트(Biervliet), 됭케르크(Dunkirk), 마르다이크(Mardijk) 항구가 건설되었고, 필립의 동생인 마티외 알자스(Matthew of Alsace)에 의해 칼레(Calais)가 건설되었다. 이 항구들은 식민지 개척 외에도 아(Aa, France), 이저(Yser), 즈윈(Zwin) 강의 퇴적물을 줄이는 역할을 하여 생토메르(Saint-Omer), 이프르(Ypres), 브뤼헤(Bruges)의 접근성을 위협하는 것을 막았다. 비어플리트는 또한 홀란드의 영향력에 대한 대응책으로도 기능했다.

무역 파트너로는 해상 무역을 통해 영국, 발트해 연안 국가들(Baltic countries), 프랑스가 있었고, 육로 무역을 통해 라인란트(Rhineland)와 이탈리아가 있었다. 영국과의 양모 무역은 플랑드르의 급성장하는 직물 산업(cloth industry)에 특히 중요했다. 많은 플랑드르 도시들의 부(그들의 종탑(Belltower)과 직물 시장(cloth hall)이 증명하듯이)는 직물 산업에서 비롯되었다. 이 외에도 영국과의 곡물 무역(grain trade)과 홀란드를 거친 함부르크와의 곡물 무역도 중요했다. 생토메르는 12세기에 프랑스 와인의 가장 중요한 중계항이 되었다. 플랑드르의 번영하는 무역 도시들은 이 지역을 유럽에서 가장 도시화된 지역 중 하나로 만들었다.
1194년 에노 가문(House of Hainaut)의 발두앵 1세(Baldwin I of Constantinople)가 알자스 가문의 뒤를 이었다.
5. 6. 위기와 변화 (14세기~15세기)
1278년, 댕피에르 가문의 기 드 댕피에르가 플랑드르 백작이 되었다. 프랑스 국왕은 플랑드르를 완전히 정복하고자 하여 프랑스-플랑드르 전쟁(1297-1305)을 시작했다. 12세기에 점점 강력해진 플랑드르의 자치 도시 중심지는 프랑스의 침략 시도를 물리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고, 1302년 쇠박차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패배시켰다. 그러나 결국 프랑스는 몽앙페벨 전투에서 승리했고, 그 후 아티쉬르오르주 조약(1305)에 따라 플랑드르는 릴, 두에, 오르시를 프랑스에 넘겨주고 과도한 벌금을 지불해야 했지만, 프랑스 왕국의 봉신으로서 독립을 유지했다. 이 기간 동안 플랑드르는 강력한 직물 산업과 다양한 예술 작품으로 상대적인 번영을 누렸다. 플랑드르의 무역은 매우 광범위하여 인도양 무역망을 통해서만 구할 수 있었던 상아로 만든 성모자상이 플랑드르에서 만들어지기도 했다.[9]
그러나 다음 세기에 플랑드르의 번영은 쇠퇴했다. 1348년 흑사병으로 인한 유럽 인구의 광범위한 감소, 백년전쟁(1338-1453) 기간 동안의 무역 중단, 그리고 영국의 직물 생산 증가 때문이었다. 플랑드르의 직조공들은 12세기에 이미 노퍽의 워스티드와 노스 월샴으로 이주하여 양모 산업을 확립했다.

1369년 마르가레트 드 당피에르와의 결혼을 통해 필리프 대담공 부르고뉴 공작은 플랑드르의 독립에 종지부를 찍었다. 플랑드르는 부르고뉴를 지배했던 발루아-부르고뉴 가문의 영지가 되었다. 1449년 헨트 시가 필리프 2세 공작에게 반란을 일으켰다. 1453년 필리프는 가베르 전투에서 반란군을 진압하여 봉기를 종식시켰다.
헨트와 브뤼헤는 이전에 사실상 도시 국가로 운영되었고,[11] 샤를 대담공 공작이 사망하자 마리 부르고뉴(샤를의 딸이자 계승자)에게서 빼앗은 대 특권을 통해 이러한 지위를 재확립하려고 시도했다. 1482년 마지막 부르고뉴 통치자였던 마리가 사망하면서 그녀의 어린 아들 필리프 1세(합스부르크 가문)가 새로운 백작이 되었고, 그녀의 남편 막시밀리안 1세가 섭정이 되었다. 플랑드르 도시들은 두 차례의 봉기를 일으켰지만, 결국 신성 로마 제국의 군대에 의해 진압되었다.
1493년 생리스 조약은 프랑스와 합스부르크 가문 사이에 평화를 가져왔다. 조약의 조건에 따라 플랑드르는 이후 신성 로마 제국의 영토가 되었다.
5. 7. 합스부르크 시대 (16세기~18세기)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 치하에서 플랑드르는 부르고뉴 연합에 속하게 되었다. 이 백국은 나중에 겔더스 전쟁에 참여하였다.1549년 실질 조약을 통해 플랑드르 백국은 공식적으로 프랑스로부터 분리되어 신성 로마 제국의 독립 영토가 되었다. 이 조약으로 플랑드르는 네덜란드 17주의 일부가 되었고, 이는 네덜란드를 구성하였으며 그 이후로 하나의 전체로서 상속되었다.
네덜란드는 제국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카를 5세 개인에게는 유년 시절을 보낸 지역이었고, 무역과 산업, 부유한 도시들 때문에 재정적으로도 중요했다. 영토는 합스부르크가의 스페인 지파인 스페인의 필립 2세에게 이전되었고, 1556년 이후로는 스페인 국왕에게 속했다.
1566년 프랑스 플랑드르의 스테인보르데에서 이미지 파괴 운동이 일어났다. 이 운동은 모든 네덜란드 지역으로 확산되어 결국 80년 전쟁의 발발과 네덜란드 공화국의 분리로 이어졌다. 원래 플랑드르는 유트레히트 동맹의 일원으로 북부 주와 협력하였고 1581년 폐위 선언에도 서명했지만, "겐트 칼뱅 공화국"으로 알려진 1579년부터 1585년까지 스페인 군대에 재정복되었다.
플랑드르는 스페인의 지배하에 남아 있었다. 프랑스 국왕 루이 14세의 노력으로 플랑드르의 남부 전체가 프랑스에 합병되어 남부 플랑드르 또는 프랑스 플랑드르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1678년 나이메헌 조약에서 공식화되었다.
스페인 합스부르크가 단절된 후,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가 플랑드르 백작이 되었다. 마리아 테레지아 치하에서 오스트리아 네덜란드는 번영하였다.
5. 8. 프랑스 혁명과 이후
1789년, 요제프 2세 황제에 대항하는 혁명이 일어났다. 1790년, 플랑드르 백국과 프랑스가 황제에게 반환한 영토를 구성하는 별도의 주인 서플랑드르는 벨기에 연합국의 창립 회원 중 두 곳이었다.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의 다른 지역들과 마찬가지로 플랑드르 백국도 독립을 선포했다. 이는 1790년 1월 4일 겐트의 금요일 시장에서 이루어졌다. "플랑드르 선언문(Manifest van Vlaenderen)"은 샤를-조제프 드 그라에브와 장-조제프 라프사에가 작성했다.플랑드르 백국은 1795년 프랑스에 합병되어 두 개의 주인 리스 주(오늘날의 서플랑드르)와 에스코 주(오늘날의 동플랑드르와 제일란드 플랑드르)로 나뉘면서 공식적으로 존재를 멈추었다. 오스트리아는 1797년 캄포포르미오 조약에서 이 손실을 확인했다.
프랑스 혁명 이후 플랑드르 백국은 복원되지 않았고, 대신 두 주는 일원적 네덜란드 연합 왕국에서 동플랑드르와 서플랑드르 주로서, 그리고 나중에 벨기에 혁명 이후 벨기에에서 계속 존재했다.
6. 주요 사건
연도 | 사건 |
---|---|
1071년 | 카셀 전투 |
1128년 | 악스푸엘 전투 |
1199년 | 페론 조약 |
1214년 | 부비네 전투 |
1226년 | 멜랑 조약 |
1253년 | 웨스트카펠레 전투 |
1302년 | 금박차 전투 |
1303년 | 아르케 전투 |
1304년 | 지리크제 전투, 몽스앙페벨 전투 |
1305년 | 아티쉬르오르주 조약 |
1328년 | 카셀 전투 |
1382년 | 웨스트로제베케 전투 |
1568년~1648년 | 80년 전쟁 |
1576년 | 헨트 화의 |
1579년 | 위트레흐트 연합 |
1581년 | 폐위 선언 |
참조
[1]
웹사이트
Medieval Flanders was a cultural crossroads full of multilingualism - News - Utrecht University
https://www.uu.nl/en[...]
2022-11-18
[2]
논문
Album Prof. Dr. Frank Baur. Den jubilaris bij zijn zestigsten verjaardag als huldeblijk aangeboden door collega's vakgenoten en oud-leerlingen
[3]
논문
Vlaanderen en Vlaming
https://www.dbnl.org[...]
[4]
논문
Een etymologie voor Vlaanderen, waar de wol vandaan komt
[5]
서적
The Story of Bruges
Stoddard Press
[6]
서적
Empires of the Steppes: A History of the Nomadic Tribes Who Shaped Civilization
Hanover Square Press
[7]
서적
Richard and John: Kings at War
Da Capo Press
[8]
서적
Medieval France: An Encyclopedia
Taylor & Francis
[9]
웹사이트
The Indian Ocean Trade: A Classroom Simulation » African Studies Center – Boston University
http://www.bu.edu/af[...]
[10]
웹사이트
Théâtre de tous les peuples et nations de la terre avec leurs habits et ornemens divers, tant anciens que modernes, diligemment depeints au naturel par Luc Dheere peintre et sculpteur Gantois[manuscript]
https://lib.ugent.be[...]
2020-08-25
[11]
서적
Monarchies, States Generals and Parliaments: The Netherlands in the Fifteenth and Sixteenth Centuries
https://books.google[...]
Cambridge University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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