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프 2세 드 부르고뉴 공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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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필리프 2세 드 부르고뉴 공작은 1342년 퐁투아즈에서 태어나 푸아티에 전투에서 용감하게 싸워 '용감공'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1363년 부르고뉴 공작위를 받아 영토를 확장했으며, 1369년 플랑드르 백작 마르그리트 3세와 결혼하여 플랑드르, 아르투아, 부르고뉴 자유 백국을 상속받았다. 그는 샤를 6세의 섭정으로 프랑스 궁정에서 권력을 행사했으나, 오를레앙 공작 루이와의 갈등으로 부르고뉴파와 아르마냐크파의 내전을 초래했다. 필리프 2세는 1404년 사망했으며, 그의 영토와 권력은 장남 장 1세에게 상속되었다. 그는 샹몰 샤르트뢰즈 수도원을 건설하고 부르고뉴 조각의 걸작으로 평가받는 묘를 남겼다. 필리프 2세는 캉브레 이중 결혼 등 혼인 동맹을 통해 외교적 관계를 강화하며, 북쪽으로의 영토 확장을 위해 노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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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프 2세 드 부르고뉴 공작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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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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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필리프 2세 |
별칭 | 용맹공 |
프랑스어 이름 | Philippe II le Hardi |
네덜란드어 이름 | Filips de Stoute |
출생일 | 1342년 1월 17일 |
출생지 | 프랑스 왕국 퐁투아즈 |
사망일 | 1404년 4월 27일 (62세) |
사망지 | 에노 백국 할레 |
매장지 | 디종 샹몰 수도원 |
배우자 | 마르그리트 3세 (1369년 결혼) |
자녀 | 용맹공 장, 마르그리트, 마리아, 앙투안, 필리프 2세 드 느베르 외 |
가문 | 발루아-부르고뉴 가문 |
아버지 | 장 2세 |
어머니 | 보헤미아의 본 |
작위 | |
부르고뉴 공작 | 1363년 9월 6일 – 1404년 4월 27일 |
이전 | 필리프 1세 |
이후 | 용맹공 장 |
섭정 | |
프랑스 섭정 | 1382년 - 1388년 |
군주 | 샤를 6세 |
공동 섭정 | 장 드 베리, 루이 2세 드 부르봉 |
2. 생애
필리프 2세는 프랑스 발루아 왕가의 왕자이자 초대 발루아-부르고뉴 공작으로서, 그의 생애는 프랑스 왕국의 정치와 부르고뉴 공국의 성장에 큰 영향을 미쳤다. 1342년 퐁투아즈에서 장 2세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어린 나이에 푸아티에 전투 (1356년)에 참전하여 용맹함을 보여 '용감공'(fr)이라는 별명을 얻었으나, 아버지와 함께 포로가 되기도 했다. 1363년 아버지로부터 부르고뉴 공작령을 분봉령으로 받아 발루아-부르고뉴 가문을 열었다.
1369년 플랑드르의 상속녀 마르그리트와 결혼하여 광대한 영토를 상속받을 기반을 마련했고, 장인 루이 2세를 도와 플랑드르 도시들의 반란(1379-1382)을 진압하는 데 기여했다. 그는 상속받은 플랑드르 지역의 경제적 중요성을 인식하고 도시들과 타협하여 통치 기반을 다졌다. 1390년에는 샤롤레 백작 칭호를 얻었다.
프랑스 궁정에서도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형 샤를 5세 사후 조카 샤를 6세가 어린 나이에 즉위하자, 삼촌들과 함께 섭정으로 활동하며(1380-1388)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샤를 6세가 친정을 선언하며 잠시 권력에서 밀려났으나, 1392년 샤를 6세가 정신 이상 증세를 보이자 다시 권력을 잡아 1402년까지 프랑스를 실질적으로 통치했다. 이 과정에서 샤를 6세의 동생 오를레앙 공작 루이와 왕실 재정 및 정책을 둘러싸고 심각한 갈등을 빚었으며, 이는 훗날 부르고뉴파와 아르마냐크파 사이의 내전으로 이어지는 원인이 되었다.
그는 부르고뉴의 와인 산업에도 관심을 보여, 1395년 피노 누아 품종을 장려하고 상대적으로 품질이 낮은 가메 포도 재배를 금지하는 명령을 내리기도 했다.
1404년 4월 27일 에노 백국의 할레(현 벨기에)에서 사망했으며, 그의 영지와 정치적 지위는 아들 장 1세(용맹공)에게 계승되었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부르고뉴 공국은 프랑스 왕국 내에서 강력한 독립 세력으로 성장하는 발판을 마련했다.
2. 1. 출생과 초기 생애
1342년 1월 17일, 성 안토니우스 축일에 프랑스 퐁투아즈에서 태어났다.[1] 당시 프랑스 왕위 추정 상속인이자 노르망디 공작이었던 장 2세와 그의 첫 번째 부인 본 드 뤽상부르 사이에서 태어난 넷째 아들이었다. 장성한 형제자매는 모두 7명이었고, 남자 형제들 중에서는 막내였다. 그의 위로는 프랑스 왕 샤를 5세, 앙주 공작 루이 1세, 베리 공작 장이 있었다.어머니 본 드 뤽상부르는 보헤미아 국왕 얀과 왕비 엘리슈카 프르제미슬로브나의 딸이었으며,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4세는 필리프의 외숙부였다. 필리프의 부모는 1332년 7월 28일 믈룅의 노트르담 대학 교회에서 결혼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아버지 장 2세가 프랑스 국왕으로 즉위하기 1년 전인 1349년 9월 11일, 프랑스 모뷔아송에서 흑사병으로 사망하여 프랑스 왕비가 되지는 못했다.[6] 아버지 장 2세는 1350년에 프랑스 국왕으로 즉위했다.
필리프는 1356년 푸아티에 전투에서 아버지 장 2세와 함께 싸웠는데, 이때 14세의 나이로 보여준 용맹함 덕분에 "용담공"(fr)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아버지와 함께 영국군에게 포로로 잡혔고, 1360년 브레티니 조약에서 몸값 조건이 합의될 때까지 아버지와 함께 잉글랜드에서 억류 생활을 했다.

석방된 후 1360년, 필리프는 아버지로부터 투렌 공작으로 봉해졌다. 하지만 1363년 9월 6일, 푸아티에 전투에서의 용맹함에 대한 보상으로, 카페 가문의 후계자가 끊어진 부르고뉴 공작령을 분봉령(아파나주)으로 받으면서 투렌 공작령은 왕실에 반납했다.[1] 부르고뉴 공작으로 정식 임명된 사실은 아버지 장 2세가 사망한 후, 형 샤를 5세가 1364년 6월에 발표한 칙서를 통해 공표되었다.[1]
2. 2. 푸아티에 전투 참전
필리프는 14살이 되던 해인 1356년에 백년전쟁에 참전하여 푸아티에 전투에서 아버지 장 2세와 함께 용감하게 싸웠다. 비록 이 전투에서 프랑스가 크게 패배하며 아버지와 함께 잉글랜드 군의 포로가 되었지만[7], 그의 용감한 활약은 두드러져 후대에 '용담공'(le Hardi|르 아르디프랑스어, the Bold|더 볼드영어)이라는 별칭을 얻게 되었다.[7] 그는 1360년 브레티니 조약에서 몸값 조건이 합의될 때까지 아버지 장 2세와 함께 잉글랜드에서 포로 생활을 하였다.[7]2. 3. 부르고뉴 공작 즉위
1363년,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 1세가 후사 없이 낙마 사고로 사망하면서 부르고뉴 공국은 상속 문제에 놓였다.[8] 필리프 1세의 할아버지 오도 4세의 누이가 프랑스 발루아 왕가의 시조 필리프 6세의 왕비 부르고뉴의 잔이었기 때문에, 부르고뉴 공국은 프랑스 왕실로 상속되었다.이에 프랑스 국왕 장 2세는 넷째 아들 필리프에게 부르고뉴 공국을 왕자령(apanage) 또는 분봉령으로 하사했다.[9][12] 이는 1356년 푸아티에 전투에서 당시 14세였던 필리프가 보여준 용맹함에 대한 보상이었다.[12] 이 전투에서의 활약으로 필리프는 '용감공'(le Hardi프랑스어)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필리프는 푸아티에 전투에서 아버지 장 2세와 함께 싸우다 영국군에게 포로로 잡혔고, 1360년 브레티니 조약으로 몸값 조건이 합의될 때까지 아버지와 함께 억류되었다.
부르고뉴 공작위를 받으면서, 필리프는 1360년에 봉해졌던 투렌 공작 지위는 왕실에 반납했다.[12] 왕자령은 자치권이 많이 인정되지만 후계자가 없을 경우 왕실로 귀속되는 영지였다.[10] 이로써 필리프 2세는 발루아-부르고뉴 가문의 시조가 되었다.
2. 4. 결혼과 영토 확장

필리프 2세의 영토 확장은 주로 결혼을 통해 이루어졌다. 그의 형인 프랑스 국왕 샤를 5세는 백년 전쟁 중 잉글랜드를 견제하기 위한 외교 정책의 일환으로, 동생 필리프 2세가 플랑드르 백작령의 상속녀와 결혼하기를 원했다. 필리프 2세 역시 부르고뉴 백작령(프랑슈콩테)을 다시 확보하고자 하는 강한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11] 당시 플랑드르 백작 루이 2세의 어머니이자 프랑스 왕가 출신인 마르그리트 드 프랑스는 자신의 손녀이자 상속녀인 마르그리트 드 당피에르가 잉글랜드의 에드먼드 왕자가 아닌 프랑스 왕족과 결혼하기를 바랐고, 아들 루이 2세를 설득했다.
결과적으로 1369년 6월 19일, 필리프 2세는 헨트에서 마르그리트 3세와 성대한 결혼식을 올렸다.[11][12] 이 결혼을 통해 필리프 2세는 장차 플랑드르 백작령, 아르투아 백작령, 부르고뉴 백작령, 느베르 백작령, 레텔 백작령 등을 상속받을 권리를 확보하게 되었다. 샤를 5세는 이 결혼의 대가로 플랑드르 백작에게 왈롱 지역 일부를 넘겨주어야 했다.
1379년부터 필리프 2세는 장인 루이 2세를 도와 헨트를 중심으로 일어난 플랑드르 도시들의 반란을 진압하는 데 참여했다. 특히 1382년 11월 27일에는 로제베케 전투에서 프랑스 왕 샤를 6세의 지원을 받아 반란 지도자 필리프 판 아르테벨데를 격파하며 반란을 진압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384년 1월 30일, 장인 루이 2세가 사망하자 필리프 2세는 아내 마르그리트와 함께 플랑드르, 아르투아, 부르고뉴 자유 백국 등을 상속받았다.[11] 그러나 플랑드르 도시들은 쉽게 새로운 영주에게 복종하지 않았다. 필리프 2세는 강압보다는 화해를 추구하는 유연한 정책을 펼쳤다. 그는 공문서에 플랑드르 지역에서 사용되는 플라망어 사용을 인정하고, 도시들의 경제적 이익(주로 직물 산업)을 고려하는 등 실리적인 접근을 취했다. 또한 브뤼허, 헨트, 이퍼르의 대표로 구성된 기존의 '세 멤버(Leden)' 의회에 브뤼허 자유구 지역을 추가하여 '네 멤버(Vier Leden)'로 확대하며 도시들의 참여를 유도했다. 마침내 1385년 12월, 투르네 화약을 통해 헨트 시를 비롯한 플랑드르 도시들과 최종적으로 화해하고 각 도시의 특권을 인정함으로써 플랑드르 지역에 대한 통치권을 확립했다.
1390년에는 샤롤레 백작령을 추가로 획득하여 영토를 더욱 확장했다. 이처럼 결혼과 상속, 그리고 외교 및 군사적 노력을 통해 필리프 2세는 광대한 영토를 확보하여 부르고뉴 공국의 위상을 크게 높였다. 하지만 이는 동시에 프랑스 왕실로부터 점차 독립적인 세력을 구축하는 기반이 되었고, 훗날 그의 후손들이 프랑스 왕실과 지속적으로 갈등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2. 5. 섭정과 권력 투쟁
1380년 9월, 형 샤를 5세가 사망하자, 그의 어린 아들 샤를 6세가 11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샤를 5세는 어린 아들 샤를 6세의 통치기에 혼란을 막기 위해 왕족과 귀족에게 역할을 분담하는 유언을 남겼지만, 왕의 숙부들 간의 대립은 피할 수 없었다. 같은 해 11월 30일, 샤를 6세의 네 삼촌인 앙주 공작 루이, 베리 공작 장, 필리프 2세(이상 아버지 쪽), 그리고 부르봉 공작 루이(어머니 쪽)는 공동 통치를 위한 섭정 회의를 구성하고 맹약을 맺었다.1380년부터 1388년까지 이어진 섭정 기간 동안 필리프 2세는 다른 섭정들보다 적극적으로 활동하며 권력과 세력을 확장했다. 앙주 공작 루이는 나폴리 왕국 계승 문제에 몰두하다 1384년 사망했고, 베리 공작 장은 주로 랑그도크 지역에 관심을 두었으며 정치에는 큰 관심이 없었고, 부르봉 공작 루이는 왕의 아들이 아니라는 지위와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성격 탓에 영향력이 크지 않았다. 필리프 2세는 섭정으로서 1382년 아렐 반란과 같은 세금 반란을 진압하는 등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또한 같은 해, 장인인 플랑드르 백작 루이 2세가 헨트 등 플랑드르 도시들의 반란으로 어려움에 처하자, 샤를 6세의 지원을 받아 이를 도왔다. 11월 27일 로즈베케 전투에서 반란 지도자 필리프 판 아르테벨데를 격파하고 반란을 진압했다.
1388년 11월, 20세가 된 샤를 6세는 랭스에서 친정을 선언하고, 숙부들 대신 샤를 5세 시대의 고문관들이었던 마르무세파의 조언을 따르기로 결정했다. 이로 인해 필리프 2세를 포함한 숙부들은 권력 중심에서 잠시 밀려났다. 필리프 2세는 실망한 형 베리 공작에게 "언젠가 때가 올 것"이라며 위로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1392년 8월, 샤를 6세가 브르타뉴 원정길에서 갑작스러운 정신 이상 증세를 보이며 발작을 일으켰다. 이는 친구이자 고문인 올리비에 드 클리송에 대한 암살 미수 사건에 분노하여 암살 시도범 피에르 드 크라옹을 처벌하러 가던 중 발생한 일이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필리프 2세는 즉시 상황을 장악하고 다시 섭정으로서 권력을 잡았으며, 샤를 6세의 고문이었던 마르무세파를 실각시켰다. 그는 1402년까지 프랑스의 실질적인 통치자 역할을 했다. 또한 샤를 6세의 측근이었던 프랑스 국왕군 사령관 올리비에 드 클리송을 실각시켰다[2]。
필리프 2세의 권력 복귀는 왕실 내부에 새로운 갈등의 씨앗을 뿌렸다. 샤를 6세의 동생인 오를레앙 공작 루이는 자신이 아닌 숙부 필리프 2세가 섭정을 맡은 것에 불만을 품고 그와 대립하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왕실 재정을 각자 다른 목적(루이는 사치스러운 생활 유지, 필리프 2세는 부르고뉴와 저지대 국가에서의 영토 확장 야심)에 사용하려 하면서 갈등을 빚었다. 또한 외교 정책에서도 이견을 보였는데, 교회 대분열 문제에서 필리프 2세는 로마를 지지하는 파리 대학교와 입장을 같이했지만, 오를레앙 공작은 아비뇽을 지지했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선출 문제에서도 필리프 2세는 루프레히트를, 오를레앙 공작은 폐위된 벤체슬라우스를 지지하며 사사건건 대립했다[2]。 필리프 2세는 상대적으로 신중하고 개혁적인 이미지를 구축한 반면, 오를레앙 공작 루이는 방탕하고 무책임하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이러한 대립은 필리프 2세 사후 부르고뉴파와 아르마냐크파 사이의 격렬한 내전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1402년, 양자는 파리 주변에 군대를 모아 무력 충돌 직전까지 갔으나, 왕비 이자보 드 바이에른을 비롯한 왕족들의 중재로 화해했다. 같은 해 샤를 6세가 일시적으로 정신이 안정되자 동생 오를레앙 공작 루이를 섭정으로 인정했으나, 루이의 실정이 이어지자 필리프 2세는 사망 직전인 1404년에 다시 섭정으로서 프랑스의 통제권을 되찾았다. 필리프 2세는 생전에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고자 왕가와의 혼인을 적극 추진하여, 손녀 마르그리트를 왕세자 루이와, 손자 필리프(훗날 선량공 필리프 3세)를 왕세자의 누나 미셸과 각각 약혼시켰다[2]。 또한 1400년에는 잉글랜드의 헨리 4세와 샤를 6세 사이의 휴전 협정을 중재하기도 했으며, 한때 적대했던 클리송으로부터 어린 브르타뉴 공작 장 5세와 아르튀르 형제를 맡아 후견인으로서 양육했다[2]。

2. 6. 사망과 유산
필리프 2세는 1404년 4월 27일 할레(현 벨기에)에서 사망했으며, 그의 영지와 권력은 장남 장 1세(무외공)에게 상속되었다.그의 증손자인 샤를(용담공)이 1477년 낭시 전투에서 남성 후계자 없이 전사하면서 부르고뉴의 계승 문제는 복잡해졌다. 샤를의 딸이자 필리프 2세의 현손[13]인 마리는 자신의 상속지인 네덜란드와 부르고뉴를 지키기 위해 합스부르크가의 막시밀리안과 결혼했다.[14][15] 이 결혼으로 인해 플랑드르(네덜란드)를 포함한 부르고뉴 영토의 통치권을 둘러싸고 프랑스 왕국과 합스부르크 가문 사이에 지속적인 갈등이 발생했다.
네덜란드 삼부회의 지지를 받은 막시밀리안 1세는 1479년 긴가트 전투에서 프랑스 군대를 물리치며 합스부르크 가문이 상속받은 영지의 대부분을 지키는 데 성공했다.[16] 그러나 1482년 3월 마리가 사망하자[17][18], 막시밀리안은 프랑스와 아라스 조약을 체결하여 영토 분쟁을 다시 조정해야 했다.
필리프 2세는 자신의 왕조 묘역을 마련하기 위해 1378년 디종 외곽의 샹몰 영지를 구입하여 샹몰 샤르트뢰즈 수도원(1383–1388)을 건설했다. 그의 무덤은 탄식하는 자 조각상들과 엎드린 묘비상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부르고뉴 조각의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이 조각들은 장 드 마르비유(1381–1389), 클라우스 슬루터(1389–1406), 클라우스 드 베르브(1406–1410)가 차례로 제작했다. 공작의 공식 화가였던 장 말루엘은 다색 및 금박 장식을 담당했다.
필리프 2세가 사망한 후, 그의 시신은 내장을 제거하고 방부 처리되어 납 관에 안치되었다. 1404년 6월 16일, 시신은 샹몰 샤르트뢰즈 수도원의 성가대에 안장되었고, 그의 내장은 할레의 생 마르탱 교회로 보내졌다. 1792년 프랑스 혁명 중 그의 시신은 디종 대성당으로 옮겨졌으며, 이듬해 그의 무덤은 혁명가들과 약탈자들에 의해 훼손되었다. 묘는 19세기 전반에 복원되었으며, 오늘날에는 옛 부르고뉴 공작 궁전이었던 디종 미술관에 보관되어 있다.
3. 정책
필리프 2세는 부르고뉴 공국의 기반을 다지고 프랑스 왕국 내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다방면에 걸쳐 적극적인 정책을 펼쳤다. 그의 정책은 부르고뉴 공국의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발전에 중요한 기여를 했다.
국내 정치에서는 1380년 조카인 샤를 6세가 즉위하자 형제들과 함께 섭정으로 활동하며 프랑스 중앙 정치에 깊숙이 관여했다. 1384년 아내 마르그리트를 통해 플랑드르, 아르투아, 부르고뉴 백국령 등 광대한 영지를 상속받은 후에는, 플랑드르 도시들의 반란을 로즈베케 전투에서 진압하고 1385년 투르네 화약을 통해 도시들과 화해하며 영지를 안정시켰다. 1392년 샤를 6세가 정신 이상 증세를 보이자 다시 권력의 중심에 서서 국왕의 동생인 오를레앙 공작 루이와 대립하며 프랑스 정치를 주도했다. 이러한 경쟁은 훗날 부르고뉴파와 아르마냐크파 사이의 내전으로 이어지는 배경이 되었다.
외교적으로는 혼인 정책을 통해 부르고뉴의 세력을 확장하는 데 주력했다. 1369년 플랑드르 상속녀 마르그리트와의 결혼은 그의 영토 확장에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또한 1385년 자녀들과 비텔스바흐 가문 자녀들 간의 '''캉브레 이중 결혼'''을 성사시켜 에노 백작령, 홀란트 백작령, 젤란트 백작령에 대한 영향력을 확보하는 발판을 마련했다. 백년 전쟁과 관련해서는 잉글랜드와의 관계를 관리하며 1400년 휴전 협정을 중재하기도 했고, 니코폴리스 십자군 패배로 아들 장 1세가 포로로 잡히자 막대한 몸값을 지불하고 구출하는 등 가문의 위신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경제 분야에서는 플랑드르 지역의 주요 산업인 모직물 산업을 보호하고 무역을 장려하여 경제적 번영을 도모했다.[1] 또한 부르고뉴의 포도주 산업 육성에도 힘써, 1395년 품질이 낮은 가메 품종 재배를 금지하고 고급 품종인 피노 누아 재배를 장려하는 칙령을 내려 부르고뉴 포도주의 명성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2]
문화적으로도 필리프 2세는 예술 후원에 적극적이었다. 멜키오르 브루데를람, 클라우스 슬루터르, 장 말루엘, 린부르크 형제 등 당대 최고의 예술가들을 후원하여 플랑드르와 부르고뉴 지역에 화려한 궁정 문화를 꽃피웠다. 특히 디종에 가문의 웅장한 묘소인 샹몰 수도원을 건립하고 예술 작품 제작을 지원하는 등 문화 발전에 큰 족적을 남겼다.[4]
3. 1. 내치
1380년 9월, 샤를 5세가 사망하자 그의 어린 아들 샤를 6세가 왕위에 올랐다. 필리프 2세는 두 형인 앙주 공작 루이 1세와 베리 공작 장 1세, 그리고 매부인 부르봉 공작 루이 2세와 함께 조카 샤를 6세의 섭정이 되었다. 샤를 5세는 왕족 간의 역할을 분담하는 유언을 남겼으나, 숙부들 사이의 권력 다툼은 피할 수 없었다. 1380년 11월 30일, 국왕의 삼촌들은 공동 통치 맹약을 맺었지만, 필리프 2세는 이 기간 동안 자신의 권력과 세력을 꾸준히 확대하여 프랑스 왕국 내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확보했다.1382년, 장인인 플랑드르 백작 루이 2세가 헨트를 중심으로 한 플랑드르 도시들의 반란(헨트 반란 (1379–1385년))으로 어려움에 처하자, 필리프 2세는 샤를 6세의 지원을 받아 장인을 도왔다. 같은 해 11월 27일, 로즈베케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반란 지도자 필리프 반 아르테벨데(Philip van Artevelde)를 격파하고 반란을 진압했다.
1384년 1월 30일, 장인 루이 2세가 사망하자 필리프 2세는 아내 마르그리트와 함께 플랑드르, 아르투아, 느베르, 레텔 및 부르고뉴 백국령(프랑슈콩테)을 상속받았다. 그는 광대한 새 영지를 방문했지만, 플랑드르의 도시들은 쉽게 복종하지 않았다. 필리프 2세는 강압보다는 화해를 택하는 유연한 자세를 보였다. 그는 공적인 서신에 플랑드르에서 사용되는 플라망어 사용을 인정하는 등 현지 사정을 고려하는 정책을 폈다. 이러한 노력 끝에 1385년 12월, 투르네 화약(Peace of Tournai)이 체결되어 헨트 시와 플랑드르 백작(즉, 필리프 2세) 간의 화해가 이루어졌고, 도시들의 특권이 재확인되었다. 이를 통해 그는 부르고뉴 공국의 영토를 크게 확장하고 안정시키는 데 성공했다.
1388년 11월, 20세가 된 샤를 6세가 친정을 선포하자 필리프 2세를 포함한 숙부들은 권력에서 잠시 멀어졌다. 샤를 5세 시절의 고문관들, 소위 "마르무제(Marmousets)"라 불린 이들이 국왕의 친정을 주도했다. 필리프 2세는 실망한 형 베리 공작을 달래며 때를 기다렸다.
기회는 1392년 9월, 샤를 6세가 갑작스러운 정신 이상 증세를 보이면서 다시 찾아왔다. 국왕이 통치 불능 상태에 빠지자 "마르무제"는 실각했고, 필리프 2세는 다시 권력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이제 그는 샤를 6세의 동생인 오를레앙 공작 루이와 섭정권을 놓고 경쟁하게 되었다. 두 사람의 대립은 여러 방면에서 나타났다. 교회 대분열 문제에서 필리프 2세는 파리 대학교와 함께 로마 교황청을 지지하며 분열 종식을 원했지만, 오를레앙 공작은 아비뇽 교황청을 지지했다. 또한 밀라노 공국과의 혼인 관계를 통해 북이탈리아에 개입하려는 오를레앙 공작의 시도를 필리프 2세가 저지했다. 1400년 로마왕 벤체슬라우스가 폐위되자, 필리프 2세는 새로운 로마왕 루프레히트를 지지한 반면, 오를레앙 공작은 벤체슬라우스 지지를 고수하는 등 사사건건 충돌했다. 필리프 2세는 샤를 6세의 측근이자 프랑스 국왕군 사령관이었던 올리비에 드 클리송을 실각시키기도 했다.[2]
1402년, 필리프 2세와 오를레앙 공작은 파리 근교에 군대를 집결시켜 무력 충돌 직전까지 갔으나, 왕비 이자보 드 바이에른을 비롯한 다른 왕족들의 중재로 극적인 화해를 이루었다. 1403년에는 이자보 왕비를 중심으로 한 정권이 수립되었다. 두 사람의 갈등은 필리프 2세 생전에는 궁정 내 권력 투쟁 수준에 머물렀지만, 이는 훗날 부르고뉴파와 아르마냐크파 사이의 파괴적인 내전으로 이어지는 씨앗이 되었다.
권력 투쟁 속에서도 필리프 2세는 가문의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손녀 마르그리트를 프랑스 도팽 루이와 약혼시켰고, 동시에 마르그리트의 남동생이자 자신의 후계자인 필리프(훗날의 선량공 필리프 3세)를 왕세자 루이의 누나인 미셸과 약혼시켜 프랑스 왕가와의 관계를 더욱 공고히 했다.
1396년 9월, 필리프 2세의 장남이자 후계자인 느베르 백작 장 1세(훗날의 용맹공 장 1세)이 참전한 니코폴리스 십자군이 오스만 제국 군대에게 참패하는 사건이 있었다. 장은 포로로 잡혔고, 필리프 2세는 그의 석방을 위해 20만 플로린이라는 막대한 몸값을 지불해야 했다. 그럼에도 필리프 2세는 크게 낙담하지 않고 오히려 새로운 기사단을 창설하는 등 의연한 모습을 보였다.
또한 필리프 2세는 외교 무대에서도 활약했다. 1400년 잉글랜드의 새로운 국왕 헨리 4세와 샤를 6세 사이의 휴전 협정을 중재했으며, 한때 적대했던 올리비에 드 클리송으로부터 어린 브르타뉴 공작 장 5세와 그의 동생 아르튀르 형제를 맡아 후견인으로서 양육하기도 했다.
만년에는 가문의 영지를 더욱 확장할 기회를 잡았다. 아내 마르그리트의 고모이자 브라반트 여공작인 잔에게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필리프 2세의 차남 앙투안을 후계자로 삼는다는 약정을 맺었다. 1404년 앙투안을 데리고 브뤼셀로 가서 잔을 만났으나, 체류 중 건강이 악화되어 근교의 할레(당시 에노 백국령, 현 벨기에)로 옮겨 요양하던 중 4월 27일 그곳에서 사망했다.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남겨진 가족들은 장례 비용 마련에 어려움을 겪을 정도로 평생 금전 문제에 시달렸다고 전해진다.
필리프 2세 사후, 부르고뉴 공작위는 장남 장 1세(용맹공)가 계승했고, 브라반트 공작위는 1406년 잔 여공작이 사망한 후 약속대로 차남 앙투안이 이어받았다.[3]
필리프 2세는 권력 확장에 힘쓰는 한편, 예술과 문화 발전에도 깊은 관심을 보였다. 그는 멜키오르 브루데를람, 클라우스 슬루터르, 장 말루엘, 린부르크 형제 등 당대 최고의 예술가들을 후원하고, 서적 수집, 태피스트리 제작, 금은 세공, 조각 등 호화로운 예술 활동을 장려했다. 특히 디종에 가문의 웅장한 묘소인 샹몰 수도원을 건립했고, 자신도 이곳에 묻혔다. 그의 이러한 후원은 플랑드르와 부르고뉴 지역에 화려한 궁정 문화를 꽃피우는 기반이 되었다.[4]
3. 2. 외교
필리프 2세의 외교 정책은 부르고뉴 공국의 영토 확장과 정치적 영향력 강화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그는 혼인 동맹, 군사 개입, 정치적 협상 등 다양한 방법을 활용하여 자신의 목표를 추구했다.
1369년 6월 19일, 필리프 2세는 플랑드르 백작의 상속녀인 마르그리트 드 당피에르와 겐트에서 결혼했다. 이 결혼은 형인 프랑스 국왕 샤를 5세의 백년 전쟁 관련 대(對)영국 외교 전략과도 맞물려 추진된 것으로, 장차 부르고뉴 백작령, 르텔 백작령, 느베르 백작령, 아르투아 백작령, 플랑드르 백작령 등 광대한 영지가 필리프 2세에게 상속될 길을 열었다. 이는 부르고뉴 공국의 세력 기반을 크게 확장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1382년, 장인인 플랑드르 백작 루이 2세가 헨트를 중심으로 한 플랑드르 도시들의 반란(헨트 반란 (1379–1385년))으로 어려움에 처하자, 필리프 2세는 조카인 프랑스 국왕 샤를 6세의 지원을 받아 군사적으로 개입했다. 같은 해 11월 27일 로즈베케 전투에서 반란 지도자 필리프 반 아르테벨데를 격파하고 반란을 진압하는 데 성공했다.
1384년 루이 2세가 사망하자 필리프 2세는 아내 마르그리트와 함께 플랑드르 백작령을 상속받았다. 그는 플랑드르 도시들과의 관계에서 대립보다는 화해를 추구하며 유연한 자세를 보였다. 공문서에 플라망어 사용을 인정하는 등 유화책을 통해 1385년 투르네 화약을 이끌어냈고, 이를 통해 플랑드르 도시들의 특권을 인정하며 영지를 안정시켰다.
북쪽으로의 영토 확장을 위해 1385년 4월 12일, 필리프 2세는 자녀들과 비텔스바흐 가문의 바이에른 공작 알브레히트 1세의 자녀들 간의 이중 결혼('''캉브레 이중 결혼''')을 성사시켰다. 장남 장은 알브레히트 1세의 딸 마르그리트 드 바비에르와, 장녀 마르그리트는 알브레히트 1세의 아들 빌헬름과 결혼했다. 이를 통해 에노 백작령, 홀란트 백작령, 젤란트 백작령에 대한 부르고뉴의 영향력을 확보하는 발판을 마련했다. 나아가 같은 해 7월 17일에는 샤를 6세와 비텔스바흐 가문 출신의 이자보 드 바비에르의 결혼을 주선하여 프랑스 왕가 내에서의 입지를 더욱 강화했다[5]。
1392년 샤를 6세가 정신 이상 증세를 보이자, 필리프 2세는 국왕의 동생인 오를레앙 공작루이와 함께 섭정으로서 프랑스 정치의 중심에 섰다. 그러나 두 사람은 외교 정책 등 여러 사안에서 첨예하게 대립했다. 교회 대분열 문제에서 필리프 2세는 로마를 지지하는 파리 대학교의 입장을 따랐으나, 오를레앙 공작은 아비뇽을 지지했다. 또한 신성 로마 제국의 로마왕 선출 문제에서도 필리프 2세는 루프레히트를, 오를레앙 공작은 폐위된 벤체슬라우스를 지지하며 대립각을 세웠다. 이러한 갈등은 1402년 양측이 파리 근교에 군대를 집결시켜 무력 충돌 직전까지 가는 상황을 초래했으나, 왕비 이자보 드 바비에르 등 왕족들의 중재로 가까스로 화해했다. 필리프 2세는 샤를 6세의 측근이자 프랑스 국왕군 사령관이었던 올리비에 드 클리송을 실각시키는 등[2] 궁정 내 영향력을 꾸준히 확대하려 노력했다. 비록 그의 생전에는 궁정 투쟁 수준에 머물렀지만, 이러한 대립 구도는 훗날 부르고뉴파와 아르마냐크파 간의 내전으로 이어지는 배경이 되었다.
대외적으로는 1396년 아들 장이 참전한 니코폴리스 십자군이 오스만 제국에 대패하면서 외교적, 재정적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 장이 포로로 잡히자 그의 석방을 위해 20만 플로린이라는 막대한 몸값을 지불해야 했다. 백년 전쟁과 관련해서는 1386년 잉글랜드 침공 계획을 세웠으나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고, 1400년에는 잉글랜드의 헨리 4세와 프랑스의 샤를 6세 사이의 휴전 협정을 중재하기도 했다.
필리프 2세는 혼인 동맹을 통해 프랑스 왕가 및 주변 제후들과의 관계를 더욱 공고히 하고자 했다. 손녀 마르그리트를 프랑스 왕세자 루이 드 기엔과 약혼시키고, 손자 필리프(훗날 필리프 3세 선량공)를 루이 왕세자의 누나인 미셸 드 프랑스와 약혼시켰다. 또한 1393년에는 딸 카트린과 마리를 각각 오스트리아 공작, 사보이아 공작과 결혼시켜 동방의 군주들과도 인척 관계를 맺었다.
그 외에도 어린 브르타뉴 공작 장 5세와 그의 동생 아르튀르 형제의 후견인을 맡아 양육했으며, 아내 마르그리트의 고모인 브라반트 여공 잔에게 자식이 없자 자신의 차남 앙투안을 후계자로 삼는 약정을 맺어 브라반트 공국에 대한 계승권도 확보했다. 1404년 앙투안을 데리고 브뤼셀로 가 잔을 만났으나, 이 여행 중 건강이 악화되어 할레(현 벨기에)에서 사망했다.
3. 3. 경제
필리프 2세는 자신이 다스리는 부르고뉴와 플랑드르 지역의 경제적 번영을 위해 노력했다. 특히 플랑드르의 주요 산업이었던 모직물 산업을 보호하고 무역을 장려하여 경제 활성화를 꾀했다.[1] 또한, 부르고뉴의 포도주 산업 육성에도 힘썼다. 그는 1395년, 품질이 상대적으로 낮은 가메(Gamay) 품종의 재배를 금지하고 고급 품종인 피노 누아(Pinot Noir)의 재배를 장려하는 칙령을 발표했다.[2] 이는 부르고뉴 포도주의 품질을 높이고 명성을 확립하는 데 중요한 기여를 한 것으로 평가받는다.4. 자녀
필리프 2세는 1369년 6월 19일 마르가레타와 혼인했다.[11][12] 마르가레타는 플랑드르 백작 루이 2세의 딸이자 후계자였다. 이 결혼을 통해 필리프 2세는 1384년 장인 루이 2세가 사망한 후 아내가 상속받은 플랑드르 백국, 아르투아 백국, 부르고뉴 자유 백국을 자신의 통치하에 두게 되어 부르고뉴 공국의 세력을 크게 확장하는 기반을 마련했다.
필리프 2세와 마르가레타 3세 사이에는 총 9명의 자녀가 태어났다.
이름 | 생몰년 | 주요 정보 | 배우자 |
---|---|---|---|
장 1세 | 1371년 - 1419년 | 부르고뉴 공작 ("무구공") | 바이에른 공작 알브레히트 1세의 딸 마르그리트 |
샤를 | 1372년 - 1373년 | 요절 | - |
마르그리트 | 1374년 - 1441년 | 에노 백작, 홀란트 백작, 젤란트 백작 부인 | 바이에른 공작 빌헬름 2세 |
루이 | 1377년 - 1378년 | 요절 | - |
카트린 | 1378년 - 1425년 | 오스트리아 공작 부인 | 오스트리아 공작 레오폴트 4세 |
본느 | 1379년 - 1394년 | 요절 | - |
앙투안 | 1384년 - 1415년 | 브라반트 공작. 아쟁쿠르 전투에서 전사. | - |
마리 | 1386년 - 1422년 | 사보이아 공작 부인 | 사보이아 공작 아메데오 8세 (후의 대립교황 펠릭스 5세) |
필리프 | 1389년 - 1415년 | 느베르 백작. 아쟁쿠르 전투에서 전사. | - |
필리프 2세는 자녀들의 혼인을 통해 부르고뉴의 영토 확장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대표적인 사례는 1385년 4월 12일 캉브레에서 열린 이중 결혼식이다. 그는 장남 장을 비텔스바흐 가문의 바이에른 공작 알브레히트 1세의 딸 마르그리트와 결혼시키고, 동시에 장녀 마르그리트를 알브레히트 1세의 아들 빌헬름 2세와 결혼시켰다. 이 '''캉브레 이중 결혼'''은 에노, 홀란트, 젤란트 지역에 대한 부르고뉴의 영향력을 강화하는 중요한 발판이 되었다.[5] 또한 1393년에는 딸 카트린을 오스트리아 공작 레오폴트 4세와, 딸 마리를 사보이아 공작 아메데오 8세와 결혼시켜 동쪽으로의 세력 확장을 도모했다. 이러한 전략적인 혼인 정책은 부르고뉴 공국이 프랑스 왕실로부터 점차 독립적인 세력으로 성장하고 독자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5. 평가
필리프 2세는 중세 말 부르고뉴 공국과 프랑스 왕국 역사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 인물이다. 그는 뛰어난 정치적 수완과 야망으로 부르고뉴 공국을 유럽의 주요 세력으로 성장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으며, 특히 플랑드르 지역을 성공적으로 통합하여 공국의 경제적, 정치적 기반을 강화했다는 긍정적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그의 통치는 프랑스 왕국 내 정치적 혼란을 심화시키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조카인 샤를 6세의 섭정으로 활동하며 권력을 확장하고, 이후 오를레앙 공작 루이와 치열한 대립을 벌이며 프랑스 왕실의 분열을 조장했다. 이러한 갈등은 훗날 아르마냐크-부르고뉴 내전으로 이어지는 배경이 되었다는 부정적 평가도 존재한다.
또한, 그는 예술과 문화의 열렬한 후원자로서 부르고뉴 궁정을 당대 유럽 문화의 중심지로 만들었으나, 이러한 활동과 정치적 야심은 막대한 재정적 부담을 동반하기도 했다. 그의 통치는 부르고뉴의 번영과 프랑스의 혼란이라는 양면성을 지니며, 복합적인 역사적 평가를 받는다.[2][3]
5. 1. 긍정적 평가
필리프 2세는 부르고뉴 공국을 강력한 독립 세력으로 성장시킨 정치적, 군사적 역량을 높이 평가받는다. 1380년부터 1388년까지 조카인 샤를 6세의 섭정으로 활동하며 프랑스 왕국 내에서 권력과 세력을 크게 확대하여 강력한 영향력을 확보했다. 이는 이후 부르고뉴 공국 발전의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특히 플랑드르 문제 해결 과정에서 그의 역량이 두드러진다. 1382년 장인인 플랑드르 백작 루이 2세가 헨트를 중심으로 한 도시 반란(헨트 반란 (1379–1385년))으로 어려움을 겪자, 조카인 샤를 6세의 지원을 받아 군사적으로 개입했다. 같은 해 11월 27일 로즈베케 전투에서 반란 지도자 필립 판 아르테벨더를 격파하고 반란을 성공적으로 진압하여 군사적 능력을 보여주었다.
1384년 플랑드르 백작령을 아내와 함께 상속받은 후에는 무력보다는 외교적 수완과 정치적 유연성을 발휘했다. 플랑드르 도시들이 쉽게 귀순하지 않자, 대립 대신 화해를 추구하며 공적인 서신에 플라망어 사용을 인정하는 등 유화적인 정책을 펼쳤다. 이러한 노력은 1385년 12월 투르네 화약 체결로 이어졌고, 이를 통해 헨트 시와의 화해를 이루고 플랑드르 도시들의 특권을 인정해주었다. 이는 필리프 2세의 뛰어난 협상 능력과 정치적 감각을 보여주는 사례로, 무력 충돌 없이 플랑드르를 부르고뉴 공국의 통치 아래 안정적으로 편입시키는 데 기여했다.
5. 2. 부정적 평가
필리프 2세는 프랑스 왕 샤를 5세가 사망한 후 어린 조카 샤를 6세의 섭정을 맡으면서 강력한 권력을 추구했다. 이는 샤를 5세가 왕족 간의 역할을 분담하여 정치적 혼란을 막으려 했던 유언에도 불구하고, 다른 숙부들과의 권력 다툼을 심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2] 1388년 샤를 6세가 친정을 선언하며 잠시 권력에서 밀려났으나, 1392년 샤를 6세가 정신 이상 증세를 보이자 다시 정국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이후 필리프 2세는 샤를 6세의 동생이자 경쟁자인 오를레앙 공작 루이와 지속적으로 대립하며 프랑스 정치의 불안정을 키웠다. 두 사람의 갈등은 교회 대분열에 대한 입장 차이(로마 교황청 지지 vs 아비뇽 교황청 지지), 이탈리아 정책,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선출 문제 등 외교 전반에 걸쳐 나타났다. 1402년에는 파리 근교에서 군대를 동원하여 무력 충돌 직전까지 가는 등 극심한 대립은 프랑스 왕실의 권위를 약화시키고 귀족 세력 간의 분열을 조장했다. 이는 훗날 부르고뉴파와 아르마냐크파 사이의 파괴적인 내전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또한 필리프 2세는 과도한 재정 지출로 비판을 받았다. 1396년 니코폴리스 전투에서 아들 장이 포로로 잡히자 그의 몸값으로 20만 플로린이라는 막대한 금액을 지불했으며, 이후에도 새로운 기사단을 창설하는 등 재정적 부담을 가중시켰다. 예술 후원에 힘써 클라우스 슬루터르, 린부르크 형제 등 당대 최고의 예술가들을 지원하고 샹몰 수도원과 같은 호화로운 건축물을 남겼지만, 이는 막대한 비용을 수반하는 사치스러운 생활의 일부로 여겨지기도 한다. 실제로 그가 사망했을 때 남은 가족들이 장례 비용 마련에 어려움을 겪을 정도로 그의 재정 상태는 좋지 않았다. 이러한 점들은 그가 프랑스 왕국의 안정보다는 부르고뉴 가문의 세력 확장과 개인적인 위세를 과시하는 데 더 집중했다는 비판으로 이어진다.[3][4]
5. 3. 종합적 평가
필리프 2세는 중세 말 프랑스와 부르고뉴 역사에 큰 영향을 미친 인물로, 그의 통치는 부르고뉴 공국의 발전과 프랑스 왕국의 혼란이라는 양면성을 지닌다.1380년 형 샤를 5세가 사망한 후, 어린 조카 샤를 6세의 섭정 중 한 명으로 참여하며 프랑스 정치의 중심에 섰다. 그는 이 시기에 다른 왕족들과의 경쟁 속에서 자신의 권력 기반을 다지고 영향력을 키웠다. 1382년에는 장인 플랑드르 백작을 도와 헨트 등 플랑드르 도시들의 반란 진압에 기여했고(로즈베케 전투), 1384년 장인이 사망하자 아내 마르가레타와 함께 플랑드르 백작령을 상속받았다. 그는 플랑드르 도시들과의 대립보다는 화해를 추구하며 플라망어 사용을 공인하는 등 유연한 정책을 펼쳤고, 1385년 투르네 화약을 통해 플랑드르를 안정적으로 통치하게 되었다. 이는 부르고뉴 공국의 영토와 경제력을 크게 신장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1392년 샤를 6세가 정신 이상 증세를 보이면서 프랑스 정국은 다시 혼란에 빠졌고, 필리프 2세는 국왕의 동생인 오를레앙 공작 루이와 치열한 권력 투쟁을 벌였다. 교회 대분열에 대한 입장 차이, 이탈리아 정책, 신성 로마 제국 황제 계승 문제 등 여러 사안에서 두 사람은 끊임없이 대립했다. 이러한 갈등은 필리프 2세 생전에는 궁정 내 권력 다툼 수준에 머물렀지만, 그의 사후 아들 용맹공 장과 오를레앙 공작 가문 사이의 극심한 대립으로 이어져 아르마냐크-부르고뉴 내전이라는 파괴적인 내전을 촉발하는 원인이 되었다. 이는 결과적으로 백년 전쟁 중인 프랑스의 국력을 약화시켰다.
군사적으로는 1396년 니코폴리스 전투에서 아들 장이 오스만 제국 군대에 포로로 잡히는 실패를 겪기도 했으며, 그의 석방을 위해 20만 플로린이라는 막대한 몸값을 지불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리프 2세는 손주들을 프랑스 왕가와 혼인시키는 등 정치적 영향력을 유지하고 확장하려는 노력을 계속했다. 또한, 차남 앙투안을 브라반트 여공의 후계자로 만들어 영토 확장의 기반을 마련하기도 했다.
한편, 필리프 2세는 예술과 문화의 열렬한 후원자였다. 그는 멜키오르 브루데를람, 클라우스 슬루터르, 장 말루엘, 린부르크 형제와 같은 당대 최고의 예술가들을 초빙하여 활동을 지원했으며, 디종에 자신과 가문의 묘소로 사용될 샹몰 수도원을 화려하게 건립했다. 이러한 후원을 통해 부르고뉴 궁정은 국제적인 명성을 지닌 예술과 문화의 중심지로 발전할 수 있었다.[4]
그러나 그의 야심찬 정치 활동과 호화로운 문화 후원은 막대한 재정적 부담을 동반했다. 니코폴리스 전투 패배 후 아들의 몸값 지불은 큰 지출이었으며, 그가 사망했을 때 장례 비용 마련에 어려움을 겪었다는 사실은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재정 관리에 어려움이 있었음을 시사한다.
종합적으로 필리프 2세는 뛰어난 정치적 수완과 야망으로 부르고뉴 공국을 유럽의 강대국 반열에 올려놓은 유능한 군주였다. 하지만 그의 권력 추구는 프랑스 왕국의 분열을 심화시키는 요인이 되었으며, 화려한 문화 후원의 이면에는 재정적 압박이라는 그림자가 존재했다. 그는 부르고뉴의 번영을 이끌었지만 동시에 프랑스 내전의 씨앗을 뿌린 복합적인 인물로 평가받는다.[2][3]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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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공사
2004-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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