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마오 후미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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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하마오 후미오는 일본의 로마 가톨릭 추기경으로, 1930년 도쿄에서 태어나 2007년 사망했다. 그는 히토츠바시 대학과 신학교를 졸업하고 로마에서 유학한 후 사제 서품을 받았으며, 요코하마 교구 주교와 이민 및 순례자 사목 평의회 의장을 역임했다. 2003년 추기경으로 서임되었으며, 가톨릭 교회의 전례와 교리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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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마오 후미오 | |
---|---|
기본 정보 | |
존칭 | 추기경님 |
이름 | 스테파노 후미오 하마오 |
직함 | 교황청 이주 및 이동자 사목 평의회 명예 의장 |
교회 | 로마 가톨릭교회 |
임명 | 1998년 6월 15일 |
임기 종료 | 2006년 3월 11일 |
이전 | 조반니 첼리 |
이후 | 레나토 라파엘레 마르티노 |
기타 직책 | 투스콜라나 가도 비아의 산 조반니 보스코 성당 추기경 (2003-07) |
서품 | 1957년 12월 21일 |
서품자 | 피에트로 시지스몬디 |
주교 서임 | 1970년 4월 29일 |
주교 서임자 | 브루노 뷔스텐베르크 |
추기경 임명 | 2003년 10월 21일 |
추기경 임명자 |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
계급 | 추기경 |
출생 이름 | 스테파노 후미오 하마오 |
출생일 | 1930년 3월 9일 |
출생지 | 일본, 도쿄 |
사망일 | 2007년 11월 9일 |
사망지 | 일본, 도쿄 |
이전 직책 | 오레토 명의 주교 (1970-79) 도쿄 대교구 보좌 주교 (1970-79) 요코하마 교구 주교 (1979-98) 일본 주교회의 의장 (1995-98) |
모교 | 히토쓰바시 대학 교황청 우르바노 대학교 |
모토 | Adveniat regnum Tuum (당신의 나라가 임하소서) |
일본어 이름 | 스테파노 하마오 후미오 (ステファノ 濱尾文郎) |
사목 정보 | |
교구 | 요코하마 (명예 주교) |
착좌 | 1980년 1월 15일 |
사임 | 1998년 6월 15일 |
이전 주교 | 아라이 가쓰사부로 |
이후 주교 | 우메무라 마사히로 |
학력 | |
학사 | 히토쓰바시 대학 (사회학) |
석사 | 우르바노 대학교 (철학, 신학) |
박사 | 그레고리오 대학교 (교회법) |
2. 생애
하마오 후미오는 하마오 시로 백작의 셋째 아들로 도쿄에서 태어났다. 히토츠바시 대학을 졸업하고 신학교에 입학하여 로마의 교황청 우르바노 대학교에서 공부한 후 1957년 12월 21일에 사제 서품을 받았다.[1] 서품 후에는 도쿄로 돌아와 추기경 대주교의 비서, 대교구 전례 위원회 비서, 그리고 대성당의 본당 신부로 봉사했다.[1] 1970년에는 일본항공 351편 납치 사건의 탑승객 중 한 명이었다.[2]
1970년 2월 5일 오레토의 명의 주교이자 도쿄 대교구의 보좌 주교로 임명되었으며, 1970년 4월 29일에 주교로 서임되었다.[2] 1979년 10월 30일 요코하마 교구 주교로 임명되었으며,[1] 1998년 6월 15일까지 약 20년간 교구장 직을 역임하였다. 1998년 10월, 교황청 이주·이동자 사목 평의회 의장(장관급)에 취임하여 2006년 3월까지 재임했다.
2003년 10월 21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산 조반니 보스코 인 비아 투스콜라나''의 추기경 부제로 서임되었다.[3] 2005년 교황 선거에서 교황 베네딕토 16세를 선출한 추기경 선거인단 중 한 명이었다. 2007년 11월 8일 폐암으로 사망했다.[4]
2. 1. 유년 시절과 교육
하마오 후미오는 하마오 시로 백작의 셋째 아들로 도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하마오 시로는 도쿄 대학 제8대 총장 및 제11대 문부대신을 지낸 하마오 아라타 백작의 양자였다.[1] 하마오의 집에는 신토와 불교 신사가 모두 있었지만, 1942년 어머니가 가톨릭으로 개종하면서 1946년에 하마오와 그의 형 하마오 미노루는 세례를 받았다.[1]하마오는 히토츠바시 대학을 졸업하고 신학교에 입학했다. 이후 로마의 교황청 우르바노 대학교에서 추가로 공부한 후, 1957년 12월 21일 사제 서품을 받았다.[1] 조치 대학 대학원 신학연구과 석사 과정을 거쳐, 1951년부터 1958년까지 로마의 교황청립 우르바노 대학교 및 그레고리안 대학교에 유학했다. 우르바노 대학교에서 철학 석사 및 신학 석사 학위를 취득하고, 그레고리안 대학교에서 교회법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1]
2. 2. 사제 서품과 초기 활동
하마오 후미오는 도쿄에서 하마오 시로 백작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집에는 신토와 불교 신사가 있었지만, 어머니가 1942년 가톨릭으로 개종하면서 1946년에 형제와 함께 세례를 받았다.[1] 히토츠바시 대학에서 공부한 후 신학교에 입학했고, 로마의 교황청 우르바노 대학교에서 공부한 후 1957년 12월 21일에 사제 서품을 받았다.[1]서품 후 도쿄로 돌아와 추기경 대주교의 비서, 대교구 전례 위원회 비서, 대성당 본당 신부 등으로 봉사했다.[1]
그의 학력 및 사제 서품 관련 정보는 다음과 같다.
구분 | 내용 |
---|---|
학력 | 히토츠바시 대학 사회학부 및 도쿄 가톨릭 신학원 졸업 |
조치 대학 대학원 신학연구과 석사 과정 수료 | |
로마 교황청립 우르바노 대학교 철학 석사 및 신학 석사 학위 취득 | |
그레고리안 대학교 교회법 박사 학위 취득 | |
사제 서품 | 1957년 12월 21일 로마에서 서품 |
서품 후 활동 | 도쿄 대주교관 세키구치 교회 (고이시카와 성 마리아 교회) 보좌 신부 |
도이 타츠오 도쿄 대주교 비서 | |
도쿄 교구 전례 위원회 위원장 | |
도쿄 카테드랄 (세키구치 교회) 주임 사제 |
1970년에는 일본항공 351편 납치 사건에 탑승한 승객 중 한 명이였다.[2]
2. 3. 주교 서품과 요코하마 교구장
1970년 2월 5일, 오레토의 명의 주교이자 도쿄 대교구의 보좌 주교로 임명되었으며, 1970년 4월 29일에 주교로 서임되었다.[2] 1979년 10월 30일 요코하마 교구 주교로 임명되었고,[1] 1980년 1월 15일에 요코하마 교구장으로 착좌했다. 1998년 6월 15일 은퇴하기까지 약 20년간 요코하마 교구장 직을 역임하였다.2. 4. 교황청 이주·이동자 사목 평의회 의장
1998년 6월 15일, 하마오 후미오는 요코하마 교구 주교직을 사임하고, 같은 해 10월 교황청 이주·이동자 사목 평의회 의장(장관급)에 취임했다.[1] 이 직책은 이민자와 순례자들의 사목을 담당하는 중요한 자리였으며, 동시에 대주교로 임명되었다.[1] 2006년 3월, 75세 정년으로 인해 퇴임할 때까지 이 직책을 수행했다.[4]2. 5. 추기경 서임과 말년
2003년 10월 21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추기경단으로 추대되어 ''산 조반니 보스코 인 비아 투스콜라나''의 추기경 부제 직함을 받았다.[3] 같은 해, 그는 지역 교회 권위 문제를 다루기 위해 ''제3차 바티칸 공의회'' 소집을 촉구했다.2005년 교황 선거에서 교황 베네딕토 16세를 선출한 추기경 선거인단 중 한 명이었다. 2006년 3월, 성인 시성성이 17세기 일본 순교자 188명의 시복을 승인한 지 한 달 만에 교황 평의회에서 사임했다.
아키히토 동궁 시종 (tōgūjijū, 東宮侍従)으로 봉사했던 하마오 미노루는 하마오 추기경의 형으로, 하마오 추기경에게 라틴어를 가르쳤다. 하마오 추기경은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인식된 "과도하게 서구화된" 편향과 "지나치게 지적인" 신학을 비판했다. 그는 교황 베네딕토 16세에게 로마 교황청 내에서 더 많은 아시아인을 요직에 임명할 것을 촉구했고, 직후 이반 디아스 추기경이 인류 복음화성 장관이 되었다.
하마오 추기경은 2007년 11월 8일 폐암으로 7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4]
3. 사상
하마오 후미오는 이주·이동자 사목 평의회 의장으로서 바티칸에서 이민자와 이주자를 위해 일했지만, 전례와 교의 면에서는 현지화 지향적이었고, 그렇기에 반바티칸적인 자세를 취하는 경우가 많았다.[5]
가톨릭교리서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견해를 보였고,[6]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라틴어 사용을 촉구했을 때 바티칸 고위 성직자로서 유일하게 반대 입장을 취했다.[6] 2007년 교황이 전례에서 라틴어 기도와 그레고리오 성가의 더 광범위한 사용을 장려했을 때도, 일본 가톨릭 교회에서 라틴어를 사용한 전례에 반대하는 입장을 고수했다.[7]
3. 1. 제3차 바티칸 공의회 소집 촉구
2003년 하마오 후미오는 현지 교회에 더 강한 권한을 부여하기 위한 제3차 바티칸 공의회 소집을 촉구했다.[5]3. 2. 가톨릭 교리서에 대한 비판
하마오는 2003년 현지 교회에 더 강한 권한을 부여하기 위한 제3차 바티칸 공의회를 촉구했다.[5]가톨릭교리서에 대해서 하마오는 부정적인 견해를 보였는데, "교리서는 신학이며, 그것도 유럽의 신학이지 동양적 신학이 아니다. 너무 어렵고, 지적이며, 논리적이다. 아시아인은 그다지 지적이지 않지만, 우리에게는 총명함이 있다. 직관적이고 심미적이다. 자신의 마음에 와닿는 무언가가 필요하다. 교리서는 사람들을 개종시키지 않는다"라고 말했다.[6]
3. 3. 라틴어 전례 반대
하마오 후미오는 바티칸에서 이민자와 이주자를 위해 일했지만, 전례와 교의 면에서는 현지화 지향적이었고, 그렇기에 반바티칸적인 자세를 취하는 경우가 많았다.[5]가톨릭교리서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부정적인 견해를 보였다.
: "교리서는 신학이며, 그것도 유럽의 신학이고, 동양적 신학이 아닙니다. 너무 어렵고, 지적이며, 논리적입니다. 아시아인은 그다지 지적이지 않지만, 우리에게는 총명함이 있습니다. 직관적이고 심미적입니다. 자신의 마음에 와닿는 무언가가 필요합니다. 교리서는 사람들을 개종시키지 않습니다."[6]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라틴어 사용을 촉구했지만, 하마오 후미오는 바티칸 고위 성직자로서 유일하게 반대 입장을 취했다. 그는 인도, 인도네시아, 일본 및 아시아 어디에서든 가톨릭 신자에게 라틴어를 배우도록 기대하는 것은 "현실성이 결여"되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6]
2007년 교황이 사도적 권고 '사크라멘툼 카리타티스'(사랑의 성사)를 발표하고, 전례에서 라틴어 기도와 그레고리오 성가의 더 광범위한 사용을 장려했지만, 하마오 후미오는 이에 대해 공공연히 반대했다. 그는 아키히토 천황이 황태자 시절 라틴어를 가르쳤음에도 "그것은 아시아인에게 불가능합니다. 아무도 라틴어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대부분의 사제가 배우지 않았고, 라틴어를 알지 못합니다. 완전히 유럽 중심적으로 지나칩니다"라고 주장하며, 일본 가톨릭 교회에서 라틴어를 사용한 전례에 반대하는 입장을 계속 취했다.[7]
4. 가족 및 친족
하마오 시로 백작(1896–1935)의 셋째 아들로 도쿄에서 태어났다. 하마오 시로 백작은 도쿄 대학 제8대 총장 및 제11대 문부대신인 하마오 아라타 백작의 양자였다.[1] 그의 형제인 하마오 미노루는 아키히토 동궁 시종으로 봉사했다. 하마오 추기경은 아키히토에게 라틴어를 가르쳤다.
관계 | 이름 | 비고 |
---|---|---|
증조부 | 가토 히로유키 | 남작, 문학박사·법학박사, 귀족원 의원, 도쿄 대학 총장 |
조부 | 가토 테루마로 | 남작, 의학박사·귀족원 의원 |
숙부 | 후루카와 롯파 | 희극 배우 |
부 | 하마오 시로 | 자작, 검사, 변호사, 추리 소설 작가, 귀족원 의원, 하마오 아라타의 양자 |
형 | 하마오 마코토 | 자작, 해군 장교 |
형 | 하마오 미노루 | 궁내청 동궁 시종·교육 평론가·황실 해설가 |
참조
[1]
웹사이트
日本人名大辞典+プラス:浜尾四郎 (Unabridged Dictionary of Japanese People Plus: Shirō Hamao)
http://kotobank.jp/w[...]
2012-03-14
[2]
웹사이트
HAMAO, Stephen Fumio (1930-2007)
https://cardinals.fi[...]
Florida International University
[3]
뉴스
Cardinal Calls for Third Vatican Council
http://www.toledobla[...]
[4]
뉴스
Cardinal Stephen Fumio Hamao
https://www.thetimes[...]
2007-11-13
[5]
뉴스
Cardinal urges more power for local churches FROM BLADE STAFF AND WIRE REPORTS
http://www.toledobla[...]
[6]
웹사이트
浜尾枢機卿のバチカン長官退職時のインタビュー記事・試訳
https://web.archive.[...]
[7]
뉴스
カトリック新聞
2007-0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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