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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시바 히데카쓰 (이시마쓰마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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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하시바 히데카쓰(이시마쓰마루)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나가하마성 성주 시절 얻은 첫 아들로 추정되나, 생모와 친자 여부에 대한 여러 설이 존재한다. "히데카쓰"라는 이름은 니와 나가히데와 시바타 가쓰이에의 이름을 따온 것으로 추정되며, 1576년에 사망했다. 나가하마 히키야마 축제는 히데카쓰의 탄생을 기념하여 시작되었다는 전승이 있다. 히데카쓰의 실존 자체에 대한 의문도 있지만, 나가하마성 역사박물관에서는 친자설을 유력하게 여기는 반면, 비친자설을 주장하는 견해도 있다. 묘호지에는 그의 초상화로 추정되는 그림과 묘소가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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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시바 히데카쓰 (이시마쓰마루)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하시바 히데카츠 초상화 (시가현 묘호지 소장)
하시바 히데카츠 초상화 (시가현 묘호지 소장)
아명이시마츠마루 (石松丸) 또는 이시마루 (石松)
계명본광원조각거사 (本光院朝覺居士)
신분
시대아즈치모모야마 시대
주군도요토미 히데요시
씨족키노시타씨 → 하시바씨 (도요토미씨)
가족 관계
아버지도요토미 히데요시
어머니이설 있음
형제히데카츠, 여아, 츠루마츠, 히데요리
양자히데카츠 (오츠기마루), 히데아키, 히데츠구, 히데카츠 (코키치), 고히메=히데이에, 히데야스
출생 및 사망
출생미상 (일설에는 겐키 원년 (1570년), 덴쇼 원년 (1573년), 덴쇼 2년 (1574년) 등)
사망덴쇼 4년 10월 14일 (1576년 11월 4일)

2. 약력

히데요시나가하마성 성주 시절에 얻은 첫 남자아이였다는 전승이 있다. 생모는 여러 설이 있으나, 모두 후궁이었고 히데카쓰는 서장자였다.

"히데카쓰(秀勝일본어)"라는 이름은 하시바 씨의 유래와 같이, 오다 가문의 숙로 니와 나가'''히데'''의 '히데'와 시바타 '''가쓰'''이에의 '가쓰' 두 사람의 편휘를 받은 것으로 추정되지만[1], 사료적 뒷받침은 없다.

덴쇼 4년(1576년) 10월 14일, 히데카쓰는 사망했다.

나가하마에 지금도 전해지는 히키야마 축제는 덴쇼 2년(1574년)에 히데요시가 아들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 시작했다는 전승이 있다.

2. 1. 생애

히데요시나가하마성 성주 시절에 얻은 첫 아들이라는 전승이 전해진다. 생모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지만, 어느 경우든 측실이었으며, 히데카쓰는 서장자이다.

"히데카쓰"라는 이름은 하시바 씨의 유래와 마찬가지로, 오다 가문의 숙로인 니와 나가'''히데'''의 '히데'와 시바타 '''가쓰'''이에의 '가쓰' 두 사람의 편휘를 받은 것으로 생각되지만[1], 사료적 뒷받침은 없다. 히데요시는 후에 양자로 삼은 오다 노부나가의 넷째 아들과 미요시 요시후사의 차남에게도 같은 이름을 붙였다.

덴쇼 4년(1576년) 10월 14일, 히데카쓰는 사망했다.

나가하마에 지금도 전해지는 히키야마 축제는 덴쇼 2년(1574년)에 히데요시가 아들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 시작했다는 전승이 있다.

2. 2. 생모에 대한 여러 설

호곤지의 「지쿠부시마 봉가장(竹生島奉加帳)」에는 「오우치카타(御内方)」 (정실 네네), 「오오카타도노(大方殿)」 (어머니 나카)에 이어, 「이시마쓰마루(石松丸)」, 「미나미도노(南殿)」라는 이름이 적혀있다. 이는 히데요시의 자녀와 그 생모인 측실을 기록한 것으로 추정된다. 쿠와타 타다치카는 이 기록 때문에 생모는 측실 미나미도노일 것으로 추측했으나, 핫토리 히데오는 측실치고는 기부액이 상당히 적으며, 이시마쓰마루의 생모라는 설에는 아무런 근거가 없다고 반박한다.

한편, 묘호지(妙法寺) 사찰 전승에는 생모가 마쓰노마루도노(교고쿠 류코)[2]라고 적혀있다. 그러나 그녀가 히데요시의 측실이 된 것은 덴쇼 11년 (1583년) 무렵이며, 덴쇼 2년 (1572년)에 히데카쓰를 낳았다는 것은 측실이 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시기와 상당한 차이가 있고, 당시에는 아직 남편인 타케다 모토아키가 살아있었을 시기였다. 키노시타 카츠토시와 키노시타 토시후사를 모토아키와 다쓰코의 아들이라고 보는 설도 있으나, 신빙성에는 문제가 있다.

3. 기록과 유물

시가현 나가하마시 묘호지에는 하시바 히데카쓰의 초상화로 추정되는 그림이 소장되어 있었으나 소실되었다. 현재는 법요용 족자 "본광원조각거사그림상(本光院朝覚居士絵像일본어)"의 사진이 남아있다.[3][4] 묘호지에는 1576년(덴쇼 4년) 10월 14일에 사망했다는 기록과 "조각령위(朝覺靈位일본어)"라는 법명이 새겨진 공양탑이 남아있다. 같은 시의 조동종 흥복산 도쿠쇼지에는 위패가 있으며, 법명은 "본광원조각거사(本光院朝覚居士일본어)"이다.[4]

인근의 천태종 보생산 치젠인에는 1576년(덴쇼 4년) 10월 14일 히데요시의 아들 히데카쓰가 요절하자, 같은 달 22일에 불교 공양료로 이카군 이노구치에서 30석의 사령(寺領)이 주어졌다는 전설이 있다.

2002년(헤이세이 14년) 묘소 이축 당시 발굴 조사에서 아즈치모모야마 시대 초기 다이묘 양식의 "석곽묘(石囲い箱棺墓일본어)"가 출토되었다. 매장자는 불분명하지만, 하시바 히데카쓰의 묘소라는 전승이 있던 장소에서 발견되어 히데카쓰의 무덤일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새로운 무덤의 발견으로 인해, 앞서 언급한 석조 갓 탑파(제목식 삿갓 탑파)가 함께 시 지정 문화재로 지정되었다.[5]

시가현 나가하마시 묘호지의 하시바 히데카츠 묘

4. 비실재설 및 비친자설

하시바 히데카쓰(이시마쓰마루)의 실존 여부와 친자 여부에 대한 논쟁은 계속되고 있다. 비실재설은 히데카쓰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지만, 고증학적으로는 덴쇼 4년(1576년)에 사망한 히데카쓰라는 인물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아들로 장례를 치렀다는 것은 사실로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비친자설은 히데카쓰가 히데요시의 친아들이 아니라는 주장을 제기한다.[4] 이와 관련하여 여러 사가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사가입장주요 내용
와타나베 요스케중립"친자인지, 양자인지는 불분명하지만 태합의 자식이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구와타 다다치카친자설
오와다 데쓰오친자설구와타의 설에 영향을 받음
미야모토 요시미친자설"어려서 죽은 외동아이인 친자를 도저히 잊을 수 없어, 후에 양자로 차례차례 히데카쓰의 휘를 사용한 것은 아닐까"
후쿠다 치즈루비친자설친자설은 확증이 없음
모리오카 에이이치[7]친자설"히데요시가 양자에게 잇달아 히데카쓰라고 이름 붙인 것으로 보아 히데요시가 히데카츠라는 칭호에 상당한 애착이 있었던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고, 최초의 히데카쓰가 친자일 확률이 높다"
오타 히로시[8]비친자설"구와타설은 완전한 짜맞추기이며, 히데요시 연구의 제일인자에게 실례가 되지만, 역사학의 논증으로는 성립하지 않는다"
핫토리 히데오비친자설오오타의 설을 지지


4. 1. 비실재설

이러한 정황 증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히데카쓰의 실존을 의문시하는 목소리(비실재설)는 남아 있지만, 고증적인 관점에서는 덴쇼 4년(1576년)에 '히데카쓰'라는 인물이 사망했다는 것은 사실로 추정할 수 있다. 히데요시의 아들로 장례를 치른 것 또한 확실하다.

그러나 히데카쓰가 히데요시의 첫 아들로 추정된다고 해도, 첫 번째 친자였는지는 의문이라는 의견이 있고[4], 근거로 삼는 사료는 앞서 언급한 추정 외에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이를 명확히 할 수 없다는 문제가 있다. 묘법사는 히데요시의 누나인 닛슈니가 개기(開基)가 된 즈이류지와 깊은 관계가 있으며, 두 절 모두 닛렌종이기 때문에, 혼코인 조가쿠 거사는 닛슈니의 아들이고, 히데쓰구 등과 형제이며, 마찬가지로 히데요시의 양자가 되었다는 추론이 성립한다는 설(와타나베의 설)도 있다[6] .

사가들의 의견은 엇갈리고 있으며, 앞서 언급한 설을 말한 와타나베 세이유는 "친자이든 양자이든 불분명하지만, 다이코 (히데요시)의 아들이었던 것은 사실이다"라는 불분명한 입장을 취하고 있지만, 구와타 다다치카는 친자설을 주장하고, 오와다 데쓰오도 구와타의 설의 영향을 받아 친자설을 지지한다. 미야모토 요시미도 "어려서 세상을 떠난 외아들의 친자를 잊지 못하고, 그 후의 양자에게 잇달아 히데카쓰의 휘(諱)를 사용한 것이 아닐까."라고 친자설을 취하고 있었다. 이에 대해 후쿠다 치즈루는 친자설은 확증이 없다고 의문시했다.

나가하마성 역사 박물관에서는, 모리오카 에이이치[7] 부참사(당시)가 "히데요시가 양자에게 잇달아 히데카쓰라고 이름 붙인 것으로부터, 히데요시가 '히데카쓰'라는 칭호에 상당한 애착이 있었던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고, '최초의 히데카쓰'가 친자일 확률이 높다"라고 써서 친자설을 유력하게 여기는 한편, 오타 코지[8] 관장(당시에는 학예원)은 "구와타설은 완전한 짜맞추기이며, 히데요시 연구의 제일인자에게 실례가 되지만, 역사학의 논증으로는 성립하지 않는다"라고 비친자설을 취한다. 핫토리 히데오는 (고증적으로 불성립이라는 점에서) "전적으로 그럴 것이다"라고 오타의 설을 지지하며, 비친자설을 주장하고 있다.

4. 2. 비친자설

히데카쓰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첫 아들인 것은 인정되지만, 친아들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을 제기하는 주장(비친자설)이 있다.[4] 비친자설과 관련된 사가들의 의견은 다음과 같다.

사가입장주요 내용
와타나베 요스케중립"친자인지, 양자인지는 불분명하지만 태합의 자식이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구와타 다다치카친자설
오와다 데쓰오친자설구와타의 설에 영향을 받음
미야모토 요시미친자설"어려서 죽은 외동아이인 친자를 도저히 잊을 수 없어, 후에 양자로 차례차례 히데카쓰의 휘를 사용한 것은 아닐까"
후쿠다 치즈루비친자설친자설은 확증이 없음
모리오카 에이이치[7]친자설"히데요시가 양자로 차례로 히데카쓰라고 명명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히데요시가 히데카츠라는 자칭에 상당한 애착이 있었던 것은 의심할 바 없으며, 최초의 히데카츠가 친자일 확률은 높다"
오타 히로시[8]비친자설"구와타설은 완전한 족집게로, 히데요시 연구의 일인자에게는 실례이지만, 역사학의 논증으로는 성립하지 않는다"
핫토리 히데오비친자설오오타설을 지지


5. 도요토미 정권과의 관계

하시바 히데카쓰(이시마쓰마루)는 히데요시의 초기 가신단 및 친족 관계에서 중요한 인물이다. 히데카쓰의 존재와 그의 이른 죽음은 도요토미 가문의 후계 구도 및 도요토미 정권의 성립 과정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있다.[2] 특히, 히데요시가 이후 여러 명의 양자를 들이고 그들에게 '히데카쓰'라는 이름을 부여한 것은, 친아들 여부와 관계없이 히데카쓰라는 존재가 히데요시에게 특별한 의미를 지녔음을 시사한다.[2]

히데카쓰가 히데요시의 친아들인지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있다. 와타나베 요스케는 친자인지 양자인지는 불분명하지만 히데요시의 아들이었다는 것은 사실이라고 보았다.[2] 구와타 다다치카와 오와다 테쓰오는 친자설을 지지했다.[2] 미야모토 요시미는 히데요시가 어려서 죽은 친아들을 잊지 못해 양자들에게 히데카쓰라는 이름을 준 것이 아닐까 추측하며 친자설을 지지했다.[2] 반면, 후쿠다 치즈루는 친자설에 대한 확증이 없다고 주장했다.[2]

나가하마성 역사박물관의 모리오카 에이이치 당시 부참사는 히데요시가 히데카쓰라는 이름에 애착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첫 히데카쓰가 친자일 확률이 높다고 보았다.[2] 반면 오오타 히로시 관장은 구와타 다다치카의 주장이 근거가 부족하다고 비판하며 비친자설을 주장했고, 핫토리 히데오 역시 오오타 히로시의 설을 지지했다.[2]

참조

[1] 서적 信長の血脈 : 三大英傑因縁譚99 学習研究社
[2] 간행물
[3] 문서
[4] 간행물
[5] 웹사이트 長浜市指定文化財 妙法寺 塚墓(石囲い箱棺墓) https://www.city.nag[...] 長浜市 2014-02-25
[6] 간행물
[7] 문서
[8]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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