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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인형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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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인형극은 신성물에서 유래한 정적 인형에서 시작하여, 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 인형극과 유사한 형식으로 발전했다. 삼국시대 이전부터 존재했을 가능성이 있으며, 서역 인형극의 유입과 결합하여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다. 현재는 꼭두각시놀음이 대표적인 형태로,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전승되고 있다. 현대에는 서양 인형극이 도입되어 다양한 창작 인형극이 시도되었으며, 한국인형극협회와 춘천인형극제 등을 통해 인형극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2. 유래

인형의 원초적 형태는 신성물인 정적(靜的) 인형에서 찾을 수 있다. 인간은 자기 확대를 위한 소박한 창의로 조작적 우인물(偶人物)을 만들었고, 이는 신앙의 대상으로 숭상되었다. 이는 원시 신앙의 한 단계를 보여주는 예시이기도 하다. 신앙적·상징적 대상으로서의 우인물은 발전 과정에서 정물(靜物)에서 동물(動物)로 발달했을 것으로 추정되며, 고대 인형의 간단한 손발 동작 부위에서 이러한 사실이 실증된다.

3. 한국 인형극의 계통

한국 인형극은 중국, 일본을 비롯한 동아시아 여러 나라의 인형극과 극 형식 및 인형 구조에서 유사성을 보인다. 중국 인형극은 무대를 높이 만들고 사방에 투명한 유리를 두른 다음 그 안에서 조종자가 인형을 놀린다. 일본 인형극은 무대에 난간을 만들고 포장을 쳐 그 안에서 조종한다. 이는 한국 민속 인형극 '덜미'의 연출 방식과 비슷하여 같은 계통임을 알 수 있다.[1]

중국, 한국, 일본에서 인형극을 가리키는 명칭이 각각 '곡독(郭禿)', '꼭두', '구구쓰(クグシ)'로 불리는 것은, 중국의 '곡독'에서 한국의 '꼭두'가 되고, 이것이 일본으로 건너가 '구구쓰'가 되었다는 동양 인형극의 전이 과정을 보여주는 것으로 여겨진다.[1]

한국에 전해진 인형극이 중국 고유의 것인지, 아니면 중국 이외의 지역에서 중국을 거쳐 유입된 것인지, 그리고 현재 한국 민속 인형극이 중국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은 것인지는 추가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세계 인형극사와 동양 인형극사를 다룬 자료에 따르면, 중국 인형극은 서역에서 유입되었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한국의 경우, 삼국시대 이전의 옛 문헌에 나타난 인형 및 인형놀이 기록을 바탕으로 추론해 볼 때, 고구려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인형에 대한 문헌 기록이 존재한다. 그러나 오늘날과 같은 '덜미' 형식의 인형놀이가 언제 형성되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한국 민족의 자생적 필요에 의해 발생한 정적 또는 동적 인형이 먼저 생겨나고, 민중의 의지가 더해져 발전하던 중, 삼국시대 중엽 이후 고려 초 이전 시기에 서역계 인형극이 중국을 거쳐 들어와 기존의 인형 및 인형놀이와 혼합되어 오늘날과 같은 '덜미'의 초기 형태를 갖추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민중의 모임이나 축제 등에서 연희되다가, 조선시대에 들어 봉건 지배 체제의 중앙집권화와 지배층과 피지배층 간의 대립 심화로 인해 저항적인 민중 연희로 발전하였다. 이로 인해 연희자들은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유랑 생활을 하였다. 조선조에는 지배층의 직접적인 박해와 일본 제국주의 세력을 포함한 외세의 조직적인 탄압으로 쇠퇴의 길을 걸었다. 일제강점기 이후에도 남사당패에 의해 인형극의 명맥이 이어졌으나, 내용이 왜곡, 변질되고 민중 놀이로서의 성격을 지키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4. 종류

한국의 전통 인형극은 기록상으로 망석중놀이, 발탈, 그림자 인형놀이, 장난감 인형놀이, 풀각시놀이 등이 있었으나, 현재는 대부분 사라져 볼 수 없게 되었다.

현재 한국 민속인형극의 종류는 꼭두각시놀음(덜미) 하나뿐이다. 망석중놀이나 장난감인형놀이도 있었지만, 연극으로 발전하는 과정에 있었을 뿐 극으로서 체계를 갖추지는 못하고 사라졌다.

많은 학자들은 인형극과 가면극의 선후 문제와 발생지를 논하지만, 이는 결국 병립할 문제로 보인다. 한 문화 현상의 발상은 획일적이기보다는 동류·동시 발원성을 고려해야 한다. 이러한 근거에서 '한국 인형극의 서역계 유입설'이 유력하며, 그 시원은 고구려 쯤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의견이다.

한국에는 토착적인 각시놀이 등이 있었고, 후에 발전된 서역계 인형극놀이가 중국을 거쳐 '곡독'이란 명칭으로 들어와 내용과 명칭상 합쳐져 꼭두각시놀음이 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림자 인형놀이', '망석중놀이' 등 전래했던 인형놀이는 모두 사라지고, 이제는 꼭두각시놀음만이 유일하게 남아있다.

4. 1. 꼭두각시놀음

꼭두각시놀음 공연 (2007년 하이서울페스티벌)


꼭두각시놀음은 한국의 민속극 중 하나로, 그 유래나 내용, 규모면에서 다른 나라의 민속 인형극에 비해서도 손색이 없다고 평가받기도 한다. 1964년 12월 7일 국가무형문화재 제3호로 지정되었다.[2] 지정 당시 명칭은 ‘꼭두각시놀음’이었으며, 실제 연희자들이나 고로(古老)들은 '덜미'라는 이름을 쓰고 있어서 이를 토착적인 명칭으로 추측하기도 한다.

꼭두각시놀음은 남사당패에 의해 주로 연희되었으며, 민중 취향의 내용을 짙게 품고 있다는 특징이 있다.

4. 1. 1. 특징

인형은 각 기관의 움직임을 인형 밑에서 손을 넣어 실로 조종하는 독특한 형태로 되어 있다.[3]

꼭두각시놀음의 연희조종법(演戱操縱法)은 동양 인형극 계통의 특이한 성격으로 보이는 대잡이(인형 조종자)와 산받이(판소리의 고수와 비슷한 인형과의 대화자)가 서로 재담(臺詞)을 주고 받으며, 잽이(악사)의 장단을 타고 극을 진행하는 것이다. 이것은 한국 탈놀음에서 갖는 '마당굿' 형식의 놀이판과 극술을, 인형놀이를 위한 것으로 만든 형태이다. 모든 줄거리는 어느 특정한 작가의 작품이 아닌 민중의지의 표현으로, 시대 변화에 따라 그 내용을 민중사의 줄기와 같이 하고 있다.

꼭두각시놀음은 유랑연희집단인 남사당패 놀이의 여섯 종목 중 제일 마지막 순서로서 이들 놀이가 서로 연계성을 가지고 있다. 즉 꼭두각시놀음풍물놀이, 버나(대접돌리기), 살판(땅재주), 어름(줄타기), 덧보기(탈놀음) 등의 순서 중 그 끝판에 노는 것이다. 꼭두각시놀음을 정확히 이해하려면 이 남사당패 놀이 6종목을 계속하여 보는 것이 유익하다. 40여 개의 인형과 10여 개의 소도구에 의하여 2시간 내외의 연희시간을 소요하는 이 인형놀이는 음악(풍물)·묘기(妙技:버나)·체기(體技:살판, 어름)·연극(덧보기) 등의 내용과 성격이 다른 다섯 종목 다음으로 가장 차분한 가운데 많은 뜻을 전하고 있다.

4. 1. 2. 연구 방법

하나밖에 없는 민속인형극 꼭두각시놀음은 자칫 사라지거나 고전극화될 위험이 있다. 그러나 꼭두각시놀음은 민중의 의지를 통해 자생적으로 전승되어야 할 귀중한 유산이므로, 결코 사라져서는 안 된다. 한국의 민속인형극을 감상하고 연구하기 위해서는 중국, 일본 및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의 민속인형극을 비교 연구하는 것이 좋다. 이는 그 유입 과정을 알려주고, 또 하나의 문화권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그동안 한국의 민속인형극은 대다수 민중과의 관계가 제한되거나 차단된 채 너무 오래 떨어져 있었지만, 이제라도 민중의지의 소산으로 다시 승화되어야 한다.

4. 1. 3. 전승 및 보존

일제강점기에는 서민들에게 인기가 있어 전국 공연을 통해 보존되었다.[4]

이 놀이의 연희자로서 수련은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며, 전공자에 의해 조종법이 전수되어야 한다. 또한 잽이(樂士)들의 장단에 있어서도 전공자의 출현이 필요하다. 해방 이후, 전 남사당패 출신인 남형우와 양도일 두 노인이 10여 명의 전수생을 지도하여 사라질 위기를 모면하였다. 1964년 문화공보부 문화재관리국에서는 남형우(南亨祐), 양도일, 송창선을 인간문화재로 지정·위촉하였다. 이 밖에도 인간문화재로 위촉되지 않은 기능보유자로 최은창, 지수문, 이돌천 등이 있다.

4. 2. 망석중놀이

1930년대까지 개성의 '초파일놀이'에 포함되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신라팔관회연등회(燃燈會)에서 잡기(雜技)와 가무백희(歌舞百戱)가 행해졌다는 기록이 있으나, 이것이 '망석중놀이'와 비슷한 형태였는지, 혹은 그림자 인형놀이였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현재로서는 막연히 그림자 인형놀이였을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4. 3. 장난감 인형놀이

초기적인 민속인형극의 하나로, '장난감 인형놀이'는 극으로서의 체계를 갖추지 못한 채 사라졌다.[3] 그러나 오늘날에도 시골에서는 어린이들이 물곳풀로 남녀 인형을 만들어 노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여기서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3]

4. 4. 그림자 인형놀이

등잔불을 이용하여 손으로 짐승이나 사람의 형태를 그림자로 만드는 초보적인 형태가 남아있다.[4]

4. 5. 각시놀이

초기적인 민속인형극의 하나이다. 소나무 껍질이나 호박, 감자 등 적당한 재료를 선택하여 인형을 만들어 노는 것으로, 일반적으로 '각시놀이'라는 이름으로 전해지고 있다.

4. 6. 발탈

발탈은 초기적인 민속인형극의 하나이다. 포장무대(布帳舞臺)와 같은 형식에서 놀았다고 전해지는데, 이를 탈놀이로 보느냐 인형놀이로 보느냐 하는 것은 현재 연희기능 보유자가 없어 알 수 없다. 이 놀이는 지금부터 50∼60년 전까지는 간혹 볼 수 있었으며, 직접 구경했던 노인들의 회고에 따르면, 발탈의 구조가 꼭두각시놀음에서의 상좌(上佐) 인형과 같이 포대괴뢰(布袋傀儡) 형태임을 알 수 있어 주목된다.[4]

5. 꼭두각시극의 연희본

김재철의 <<조선 연극사(朝鮮演劇史)>>에는 민속인형극에 대한 최초의 논고와 함께, 부록으로 <조선인형극 꼭두각시극 각본>이 실려 있다. 이것이 꼭두각시놀음 연희본으로는 최초의 것이다.[1] 이후 <노득필 구술본>과 <남형우·양도일 구술본> 정도가 새로 발굴되었다.[1] 기존 채록본들은 8막 또는 10막으로 분석되는데, 이는 덜미의 독자적 극형식을 고려하여 새롭게 분석해야 할 필요성을 제기한다.[1]

전통극을 채록하고 보존하려면 '우리 극'의 극형식상의 독자성을 충분히 고려해야 하며, 서구극의 틀에 억지로 맞추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1]

남사당패 외에도 광대, 걸립패, 산대도감패 등 다양한 집단에서 덜미를 연희했기 때문에, 철저한 조사를 통해 새로운 연희본을 찾을 가능성이 충분히 존재한다.[1] 최상수 채록본의 구술자인 노득필은 남사당패가 아닌 다른 집단 출신으로 보인다.[1] 황해도 장연 출신 최선묵의 증언에 따르면, 8·15 광복 직후 해주에서 덜미 조종자 홍성모, 양만고, 오세인 등이 광복기념 연희를 했다고 한다.[1] 걸립패 출신 덜미 조종자로는 송창선의 형인 송대선이 있지만, 고령으로 직접 연희는 어렵다.[1]

6. 현대 인형극

서양에서 전해진 인형극은 개화기 이후 새로운 문물과 함께 들어와 종교계와 교육계에서 활용되었다.[5] 한국전쟁 이후 1960년에는 《푸른 대지》가 원각사에서 공연되었고,[6] 방송국에서는 어린이를 위한 인형극이 제작 및 방영되는 등 다양한 창작 인형극이 시도되었다.

1966년에는 '꼭둑각시 놀음'이라는 제목으로 드라머 센터에서 고전 뮤지컬 인형극이 공연되었다.[7] 1967년에는 《흥부와 놀부》가 애니메이션 인형극으로 제작되어 극장에서 개봉하였다.[8] 한국방송공사에서는 《토끼와 승냥이》를 제작하여 1962년 1월부터 매일 10분간 방영하였고, 이어서 장편 인형극이 방영되었다. 이후 각 방송국에서 인형극이 방영되었는데, 초기에는 《소공녀》(1964년)·《집없는 천사》(1975년) 등 명작, 1970년대 중반부터는 《사명당》·《명장 김유신》(1976년)·《호동왕자》(동양방송, 1976년) 등의 역사물을 주요 소재로 하였다. 1970년대 후반부터는 《제트호 출동하라》(문화방송) 등의 모험·공상과학류가 등장하였다. 1980년대 이후로는 사람이 직접 인형 모양의 탈을 쓰고 연기하는 '탈인형극'이 유행하였고, 어린이 인형극의 방영이 줄어들었다.[9]

1979년 9월, 이경희가 국제꼭두극연맹(UNIMA) 한국본부를 설립하고 첫 회장직을 맡았다.

1982년 11월에는 조용수, 강승균, 안정의, 심우성, 서인수 등이 중심이 되어 한국인형극협회를 창립했고, 1984년 제1회 서울국제인형극제를 개최했다.

1989년에는 인형극인인 강승균, 안정의와 문화기획자 강준혁, 강준택 등이 중심이 되어 제1회 춘천인형극제를 열어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10]

참조

[1] 뉴스 朝鮮演劇史 (26) - 三國以前으로부터現代까지 동아일보 1931-05-16
[2] 뉴스 모습 없는 寶物 「重要無形文化財」로 동아일보 1965-01-14
[3] 뉴스 사라진 꼭둑각시놀음 復興運動 동아일보 1964-08-19
[4] 뉴스 「꼭둑각시」놀음과 더불어 45年 南雲龍씨 回甲기념 公演 동아일보 1967-09-09
[5] 웹사이트 인형과 40년 함께 한, 우리나라 꼭두극의 대부 안정의 선생 http://www.ohmynews.[...]
[6] 뉴스 人形劇公演 경향신문 1960-11-25
[7] 뉴스 人形劇 첫 劇場進出 서울 人形극회 "꼭둑각시놀음" 경향신문 1966-11-16
[8] 뉴스 放學 대목 노리는 兒童영화 「붐」 경향신문 1967-06-24
[9] 뉴스 푸대접받는 TV人形劇 경향신문 1984-07-13
[10] 웹인용 예술지식디렉토리|인형극 https://web.archive.[...] 2014-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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