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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산강 방어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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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형산강 방어 전투는 1950년 9월 6일부터 14일까지 한국군 제3사단이 형산강을 중심으로 북한군 제5사단의 공세를 방어한 전투이다. 9월 4일, 한국군 수도사단은 포항 외곽 방어의 어려움을 느껴 형산강을 새로운 방어선으로 정하고 군단장의 승인을 받았다. 9월 6일, 제10연대의 무단 철수로 인해 방어선에 공백이 생겼고, 북한군은 이 틈을 타 형산강을 도하하여 옥녀봉과 운제산으로 진출했다. 한국군은 운제산 탈환을 위해 미군과 협력하여 반격 작전을 펼쳤고, 9월 12일 운제산을 점령하고 형산강변의 방어진지를 회복했다. 9월 14일 연일을 탈환하며 전투를 마무리했다. 이 전투를 통해 한국군은 방어 능력을 입증하고 반격의 발판을 마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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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산강 방어 전투
분쟁 정보
분쟁한국 전쟁
전체한국 전쟁
경주 동대교에서 본 형산강
날짜1950년 9월 5일 ~ 9월 13일
장소경상북도 포항시 형산강 일대
결과대한민국 국군 승전
교전 세력
지휘관
지휘관 1' 이종찬 제3사단장 대령'
' 김응조 제22연대장 중령'
' 이소동 제1대대장 중령'
' 정영록 제2대대장 중령'
' 정순민 제3대대장 중령'
' 김우영 제23연대장 대령'
' 최상준 제2대대장 대위'
' 김종병 제3대대장 대위'
' 이치업 제26연대장 대령'
지휘관 2' 마상철 제5사단장 소장'
' 박병수 제10연대장 대좌'
' 김봉문 제11연대장 대좌'
' 제12연대장'
' 오진우 제766부대장'
병력 규모
병력 11만 2600명
병력 28500명
사상자
사상자 1알 수 없음
사상자 2알 수 없음

2. 배경

1950년 9월 4일 한국군 수도사단장 이종찬 대령은 포항 외곽 방어진지를 유지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이에 대응하여 방어에 유리한 형산강변에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할 계획을 세워 군단장의 승인을 받았다.

9월 5일 새벽 2시 30분, 북한군 제5사단이 96고지[1]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고, 새벽 5시 30분에는 방어진지의 일부가 무너져 진지 안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이에 한국군 제3사단은 두호동에 배치된 제23연대 일부 병력을 96고지 남쪽의 죽림산[2]과 연화봉으로 급파하여, 제22연대의 주 저항선을 돌파한 북한군을 저지하게 했다. 북한군 SU-76 자주포 5대가 포항시 외곽으로 진출하여 미군 전차에 포격을 가했으나, 미 공군 전폭기에 의해 모두 파괴되었다. 한국군 제3사단은 오후 2시 30분부터 철수를 시작하여 그날 저녁 형산강에 도착해 방어진지를 구축했다.

3. 전투 과정

형산강 방어선 구축 초기, 한국군 제3사단형산강을 따라 방어선을 형성했으나, 일부 구간의 지형적 불리함과 예기치 못한 방어 공백 발생으로 위기를 맞았다. 9월 6일, 한국군 제10연대가 교대 부대 도착 전 철수하면서 생긴 약 5km의 방어선 공백을 통해 북한군 제5사단형산강을 도하하여 형산-운제산 축선으로 남하를 시도하고, 일부는 한국군 제23연대의 배후를 위협했다.[5][7] 이로 인해 기존 형산강 방어선은 9월 8일 사실상 붕괴되고 한국군은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해야 했다.

운제산 일대로 침투한 북한군을 저지하기 위해 한국군과 유엔군은 연합 작전을 펼쳤다. 한국군 제1군단과 美 처치 특수임무부대는 협력하여 운제산 탈환 및 북한군 퇴로 차단 작전을 개시했다.[8] 며칠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한국군 제18연대와 제22연대가 옥녀봉 등 주요 고지를 점령하고[12], 9월 12일 美 제19연대가 운제산을 최종 점령함으로써 북한군을 고립시키고 격퇴하는 데 성공했다. 같은 날 한국군 제18연대는 형산을 탈환하며 형산강 방어선을 회복했다.[13]

북한군의 9월 공세가 약화되자, 한국군은 형산강 일대에서 빼앗겼던 주 저항선을 회복하기 위한 반격을 시작했다. 특히 9월 14일, 한국군 제23연대가 특공대 침투와 연계한 돌격으로 연일을 탈환하면서[14] 형산강 방어 전투는 중요한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었다.

3. 1. 형산강 방어선의 붕괴

한국군 제3사단9월 6일 형산강을 따라 방어선을 구축했으나, 형산[3] 우측 중단동에서 연일까지 이어지는 약 3km 구간[4]은 강 건너편보다 지대가 낮아 북한군의 감제(瞰制)에 쉽게 노출되는 지형적 약점을 안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제10연대가 9월 6일 밤, 교대 부대인 제22연대가 도착하기 전에 임의로 철수하면서[5] 형산연일 사이 약 5km에 달하는 방어선에 결정적인 공백이 발생했다. 북한군 제5사단은 이 방어 공백을 이용하여 즉시 형산강 도하를 감행했다. 북한군은 형산-운제산-경주 축선으로 남하를 시도하는 한편, 일부 병력은 옥녀봉[7]과 197고지로 진출하여 제23연대의 방어 진지 배후를 위협했다.

진지 교대를 위해 이동하던 제22연대는 북한군의 기습적인 공격을 받아 진출이 저지되었고, 이후 197고지를 탈환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2km 후퇴하여 남성동 부근에 새로운 방어진지를 구축해야 했다. 일련의 과정 속에서 기존 형산강 방어선 유지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한국군 제3사단9월 8일 저녁, 송정동·장동·우복리를 잇는 선으로 물러나 새로운 방어선을 편성하게 되면서 형산강 방어선은 사실상 붕괴되었다.

3. 1. 1. 9월 6일

9월 6일의 상황


한국군 제3사단은 형산강을 따라 방어진지 구축을 완료하였다. 그러나 형산[3] 우측의 중단동에서 연일까지 3km 구간[4]은 강 건너편보다 지형이 낮아 북한군의 감제(瞰制,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제압함)에 쉽게 노출되었다. 이 때문에 한국군은 낮에는 방어진지 밖으로 나갈 수 없었고, 보급품 수송도 밤에만 가능했다.

같은 날, 군단 본부로부터 제8사단 소속 제10연대를 원 소속 부대로 복귀시키기 위한 준비 명령[5]이 내려왔다. 한국군 제3사단장 이종찬 대령은 해당 지역이 북한군의 감제 하에 있다는 점을 고려하여, 밤에 제22연대와 진지를 교대하도록 지시했다.

하지만 제10연대장 고근홍 중령은 교대 부대인 제22연대가 도착하기도 전에 임의로 부대를 철수시켰다. 이로 인해 형산연일 사이 약 5km에 달하는 방어선에 공백이 발생하였다.

북한군 제5사단 주력은 형산 맞은편 제산[6] 일대에 집결하여 형산-운제산-경주 축선으로 진출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이들은 한국군 방어선의 공백을 발견하고 즉시 증강된 1개 대대를 남쪽으로 이동시켰으며, 후속 병력을 부조 나루터 부근으로 집결시켰다. 또한 효자동 부근에 있던 북한군은 중단동 일대로 진출하여 제10연대가 구축했던 방어진지를 점령했다.

진지 교대를 위해 이동하던 제22연대의 선발대는 제10연대가 철수한 방어지역에 들어서자마자 북한군의 공격을 받았다. 제22연대장 김응조 중령은 즉시 연대 주력의 이동을 멈추고 수색대를 파견하여 형산과 중단동 일대에 이미 북한군이 진출한 상황을 확인하였다.

이에 한국군 제3사단장 이종찬 대령은 북한군 후속 부대의 형산강 도하를 막기 위해 제23연대에게 노출된 좌측 방면의 경계를 강화하도록 지시했다. 동시에 제22연대는 옥녀봉[7]으로 진출하여 형산을 거쳐 남하하는 북한군을 저지하도록 조치하고, 이 상황을 군단에 보고하였다.

3. 1. 2. 9월 7일

북한군 제5사단의 증강된 1개 대대는 운제산 방면으로 남하하였다. 또한 부조 나루터 부근에서 형산강을 건넌 북한군 일부 병력은 옥녀봉과 197고지로 진출하여 한국군 제23연대의 방어진지 배후를 위협하였다.

한편, 197고지 북동쪽 2.5km 지점인 장동으로 진출했던 한국군 제22연대는 197고지를 되찾기 위해 공격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북한군의 수적 우세와 불리한 지형 조건으로 인해 공격은 실패하였고, 오히려 2km를 후퇴하여 남성동 부근의 80고지 일대에 새로운 방어진지를 구축해야 했다.

한국군 제3사단장은 기존의 형산강 방어선을 유지하기 어렵다고 판단하여, 9월 8일 저녁에 송정동·장동·우복리 간 남북으로 흐르는 개천을 연하여 새 방어진지를 편성하였다.

3. 2. 운제산 전투

운제산 일대로 침투한 북한군을 저지하고 형산강 방어선을 회복하기 위해 한국군유엔군은 연합 작전을 전개했다. 9월 7일, 한국군 제1군단과 美 처치 특수임무부대는 협력하여 미군은 운제산 탈환을, 한국군은 북한군의 퇴로 차단 및 소탕을 맡기로 합의했다.[8] 이에 따라 한국군 제18연대 등이 투입되어 북한군의 남하를 저지하고, 미군은 데이비슨 준장을 지휘관으로 하는 특수임무부대를 편성했다.

며칠간의 준비와 공방을 거쳐, 9월 10일 한국군 제18연대가 197고지를 점령하고[12], 11일에는 한국군 제22연대와 제18연대가 협력하여 옥녀봉과 253고지를 점령함으로써 운제산의 북한군을 고립시켰다. 9월 12일, 美 제19연대 제1대대가 공군의 지원 하에 운제산을 최종적으로 점령했으며, 점령지는 한국군 제26연대에 인계되었다. 같은 날 한국군 제18연대는 형산을 탈환하고 형산강 방어선을 회복하는 데 성공했으며, 이 과정에서 운제산에서 철수하던 북한군 잔존 병력은 한국군의 공격을 받아 격퇴되었다.[13]

3. 2. 1. 9월 7일

한국군 제1군단장과 美 처치 특수임무부대장은 제3사단 방어지역으로 침투한 북한군을 저지하기 위해 협력하기로 했다. 이 합의에 따라 美 처치 특수임무부대는 운제산 탈환을 담당하고, 한국군은 북한군의 퇴로 차단과 소탕 작전을 맡기로 했다.[8]

이를 위해 한국군 제1군단은 아화에 배치된 제26연대에 원대복귀 준비명령[9]을 내렸고, 우선 제2대대를 방어지역으로 차량으로 이동시켰다. 한국군 제1군단장은 운제산의 북한군이 남서쪽으로 약 2km 떨어진 503고지까지 진출한 상황을 확인했다. 이에 따라 동산동에 집결하여 대기 중이던 수도사단 제18연대를 군단 예비로 전환하고, 503고지의 북한군을 저지하라는 임무를 부여했다. 한국군 제18연대는 503고지 남서쪽의 438고지부터 392고지 사이에 병력을 배치하여 북한군의 남하를 저지할 태세를 갖추었다.

한편, 美 처치 특수임무부대장은 운제산 탈환 임무를 美 제24사단 부사단장 데이비슨 준장에게 부여하고 이를 위한 특수임무부대를 편성하도록 지시했다.

3. 2. 2. 9월 8일

한국군 제1군단은 미국 데이비슨 특수임무부대의 공격 개시일이 연기된 것을 확인하였다.[10] 이에 따라 제3사단이 197고지와 옥녀봉을 탈환하여 운제산에 진출한 북한군의 퇴로를 차단하도록 지시하는 한편, 392고지와 438고지에 전개한 제18연대에는 197고지 공격을 위한 준비 명령을 내렸다.

3. 2. 3. 9월 9일

새벽에 한국군 제18연대장 임충식 대령은 연대 수색대를 운제산에 침투시켜 북한군이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있는 것을 확인하였다. 임충식 대령은 이를 북한군의 보급과 병력 증원에 차질이 생겨 경주로 진출하기 어려워졌다는 징후로 판단하고, 제1대대장 장춘권 소령에게 197고지 탈환 임무를 부여하였다. 이날 저녁, 제18연대 1대대장 장춘권 소령은 화산동 동쪽 1.5km 지점의 263고지로 진출하였다.

한국군 제23연대는 131고지[11]로 투입되어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북한군의 남하를 저지하였다.

한국군 제26연대는 건천을 떠나 경주·감포·양포동을 경유하여 세계동으로 이동하였으며, 한국군 제3사단은 원대 복귀한 제26연대에 제8연대 제3대대를 배속시켰다.

3. 2. 4. 9월 10일

06:00에 한국군 제18연대 1대대는 197고지를 공격하여 6시간 후인 12:00에 목표를 점령하였다. 그 무렵 공수동[12]의 제22연대도 옥녀봉을 목표로 공격을 개시하였다. 한국군 제26연대는 제23연대가 투입된 131고지로 진출하였다. 美 데이비슨 특수임무부대는 경주를 떠나, 19:00에 오천 비행장 남쪽의 용덕동에 도착하였다.

3. 2. 5. 9월 11일

아침에 美 제19연대 제1대대가 공격을 시작하자, 이 상황을 확인한 한국군 제18연대는 제2대대를 새터마을로 이동시켜 제22연대와 함께 옥녀봉을 협공하도록 했다.

16시에 한국군 제22연대는 옥녀봉을 점령하고, 제18연대 제2대대는 서쪽의 253고지를 점령했다. 이 결과 운제산의 북한군은 완전히 고립되었다.

3. 2. 6. 9월 12일

美 제19연대 제1대대는 공군 전폭기가 목표를 강타한 직후 운제산을 점령하였고, 점령한 고지를 한국군 제26연대에 인계하였다. 이날 오후, 한국군 제18연대는 형산을 탈환하고 형산강변의 방어진지를 회복하였다. 얼마 뒤, 운제산에서 철수한 북한군이 형산 서편의 개활지[13]를 횡단하는 것을 발견하고, 좌측방 낙산에 배치된 제1연대와 연합하여 이들을 타격하였다.

3. 3. 주 저항선 회복

북한군의 9월 공세가 점차 약화되면서, 대한민국 육군형산강 일대에서 빼앗겼던 주 저항선을 회복하기 위한 반격의 기회를 포착하였다. 특히 연일 지역 탈환은 주 저항선 회복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14]

3. 3. 1. 9월 13일

북한군 제5사단은 9월 공세 이후 전투력이 약화되어 9월 12일부터 9월 13일 사이에 수세로 전환하였다. 그러나 연일[14]에서는 증강된 북한군 1개 대대가 계속 저항하고 있었다. 한편, 대한민국 육군 제23연대는 청림동으로 이동한 제26연대와 임무를 교대한 후, 제2대대와 제3대대를 동원하여 연일을 공격하였으나 실패하였다.

3. 3. 2. 9월 14일

한국군 제23연대장 김종순 대령은 주간 공격이 어렵다고 판단하였다. 이에 따라 증강된 1개 소대 규모의 특공대를 편성하여 01:00에 연일로 침투시켰다. 특공대는 목표 지점의 배후를 급습하여 북한군을 혼란에 빠뜨렸다. 이 기회를 틈타 제23연대의 2개 대대가 돌격을 감행하였고, 마침내 05:00에 연일을 탈환하는 데 성공하였다.

4. 결과

한국군 제3사단은 1950년 9월 6일 방어선이 돌파된 이후 8일 만에 형산강변의 방어진지를 회복하고, 반격을 위한 준비의 일환으로 방어진지를 재편성하였다.

참조

[1] 위치 포항 북동쪽 1km 지점
[2] 지명 일명 탑산, 포항지구 전적비가 위치해있다.
[3] 위치 현 경주시 강동면 국당리 소재, 형산강 남부
[4] 기타 배속된 제8사단 10연대 방어지역
[5] 명령 육군본부 작전명령 제170호 1950-09-08
[6] 위치 현 경주시 강동면 유금리 소재, 형산강 북부 (오른쪽 지도 참조)
[7] 위치 현 경주시 연일읍 우복리, 중명리
[8] 위치 현 경상북도 경주시 서면 아화리
[9] 명령 제1군단 작전명령 제89호 1950-09-10
[10] 인용 9월 8일과 9일에 많은 비가 내렸기 때문에 유엔군 공군의 지원을 받을 수가 없었던 데 그 이유가 있었다. 국방부, 안강·포항전투 : 한국전쟁전투사 1986
[11] 좌표 EQ 346773
[12] 좌표 EQ 3179
[13] 위치 강동면 국당리
[14] 지명 일명 생지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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