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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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혜근은 고려 후기의 승려로, 1320년 경상도 영해에서 출생하여 1376년에 입적했다. 20세에 출가하여 묘적암의 요연 선사에게 도를 얻었으며, 회암사에서 깨달음을 얻었다. 원나라 연경과 둔황을 방문하여 지공선사에게 법을 이어받았고, 원나라 여러 지역을 순례하며 광제선사 주지를 지냈다. 귀국 후에는 오대산에 머물렀으며, 공민왕의 요청으로 신광사에 머물고 홍건적의 난을 겪었다. 왕사로 책봉되어 송광사, 회암사 주지를 역임하며 사찰 중수를 이끌었다. 말년에는 밀양 영원사로 옮겨졌으나 병세가 악화되어 여흥 신륵사에서 입적했다. 저서로 《몽산법어》, 《나옹화상행장》 등이 있으며, 관련 문화재로는 보물 제697호인 《나옹화상어록 및 나옹화상가송》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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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근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법명 | 혜근(惠勤) |
속명 | 아원혜(牙元慧) |
출생일 | 1320년 2월 24일 |
출생지 | 고려 경상도 영해 |
국적 | 고려 |
거주지 | 고려 개경 |
입적지 | 고려 양광도 여흥 신륵사 |
소속 | 고려 양광도 양주 회암사(주지승) |
부모 | 아서구(부), 연일 정씨 부인(모) |
종파 | 대승불교 |
저작 | 《몽산법어(蒙山法語)》 |
스승 | 요연 |
제자 | 야운 |
경력 | 공민왕(왕전)의 왕사 |
직업 | 불교 승려(佛敎 僧侶) |
출가 | 1339년 고려 충숙왕 치세 말기 시대의 서해도의 장연의 묘적암(妙寂庵) |
입적일 | 1376년 6월 2일 |
법랍 | 37세 |
입적 원인 | 병사 |
웹사이트 | 혜근(나옹 선사) - 두피디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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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혜근은 1339년(충숙왕 후7년) 봄, 병으로 일찍 죽은 고향 친구의 장례를 보고 20세에 출가했다. 이듬해(1340년) 묘적암의 요연 선사에게서 득도하고,[5] 1344년 회암사에서 정진하던 중 깨달음을 얻었다.[5]
1347년 원나라 옌징으로 건너가 여러 승려에게 가르침을 받았고, 1348년 둔황에서 지공선사에게서 법을 이어받았다.[5] 1351년부터 1354년까지 중국 원나라 전역을 돌아다녔으며,[5] 1354년부터 이듬해까지 랴오닝 진저우의 광제선사 주지승을 지냈다.[5]
1358년 고려로 귀국, 1371년 왕사(王師)로 책봉되었다.[5] 1376년 대간의 탄핵으로 밀양 영원사로 옮겨가던 중 병을 얻어 여흥 신륵사에서 입적했다.[5]
2. 1. 출생과 가계
1320년(충숙왕 7년) 음력 1월 15일(2월 24일) 경상도 영해에서 원나라 셴양 출신 고려 이민자인 아버지 아서구(牙瑞具)와 경상도 영산군(靈山郡) 출신 어머니 연일 정씨(延日 鄭氏) 사이에서 외동아들로 태어났다.[5][6] 아버지는 원나라의 한족계 이주민 출신이었다.2. 2. 출가와 초기 수행
혜근은 1339년(충숙왕 후7년) 봄, 병으로 일찍 세상을 떠난 고향 친구의 장례를 치른 후, 20세에 출가하였다.[5] 이듬해인 1340년(충혜왕 후1년) 정월, 묘적암의 요연(了然중국어) 선사에게서 득도하였다.[5]1344년(충목왕 즉위년)에는 양광도 양주에 있는 회암사에서 4년 동안 밤낮으로 홀로 정진하던 중 갑자기 깨달음을 얻었다.[5]
2. 3. 원나라 유학과 지공선사와의 만남
1347년(충목왕 3년) 원나라 옌징(현재의 중국 베이징)으로 건너가 이름난 승려들을 찾아 가르침을 받았다. 1348년(충목왕 4년)에는 원나라 둔황에 잠시 머물렀던 인도 출신 승려 지공선사에게서 법을 이어받았다.[5]이후 1351년(충정왕 3년)부터 1354년(공민왕 3년)까지 중국 원나라 전역을 돌아다녔다.[5]
2. 4. 귀국 후 활동과 왕사 책봉
1358년(공민왕 7년) 고려로 귀국한 혜근은 1360년(공민왕 9년) 오대산에 머물렀다.[5]1361년(공민왕 10년) 왕(공민왕)과 태후(공원왕후)와 궁주(덕녕공주)의 청으로 전라도 장수 소재 신광사(新光寺)에 잠시 머물렀으며, 같은 해 11월 홍건적의 난이 일어났을 때 사찰(장수 신광사)을 지켰다.[5]
1363년(공민왕 12년) 구월산에 들어갔고, 1365년(공민왕 14년)에는 물러나는 것을 허락받아 여러 산사(山寺)를 돌아다녔다. 1366년(공민왕 15년) 금강산에 있었고, 1369년(공민왕 18년) 오대산으로 다시 들어갔다.[5]
1370년(공민왕 19년) 회암사(檜巖寺)에 자신의 스승인 요연(了然, 1299년 출생~1370년 입적) 선사(禪師)의 유골을 안치했고, 같은 해 음력 9월 10일 공부선(功夫選)을 거행했다.[5]
1371년(공민왕 20년) 혜근은 법복(法服)과 발우(鉢盂)를 하사받고 왕사(王師)로 책봉되었다. 이와 동시에 대조계종사(大曹溪宗師), 선교도총섭(禪敎都摠攝), 근수본지중흥조풍복국우세보제존자(勤修本智重興祖風福國祐世普濟尊者)라는 칭호를 받았다.[5] 그 후 송광사에 있다가 회암사 주지가 되었으며, 각 지역의 사찰(절)을 중수 및 중축했다.[5]
2. 5. 입적
1376년 (우왕 2년) 낙성을 축하하는 법회를 크게 열었으나, 대간(臺諫)의 탄핵으로 혜근은 밀양의 영원사(靈源寺)로 옮겨지게 되었다. 이 때 병이 도진 혜근은 한강에 이르러 호송 관원이었던 탁첨(卓詹)에게 병세가 위중하여 뱃길로 가고 싶다고 말했고,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 7일 만에 여흥(驪興: 현재의 대한민국 경기도 여주시)에 도착해 신륵사에 머물렀다.[5] 탁첨이 재촉하여 다시 떠나자고 했지만, 혜근은 결국 음력 5월 15일 진시(辰時: 오전 7시부터 9시 사이)에 신륵사에서 입적(入寂)했다.[5]3. 사상과 영향
고려 말기의 승려 혜근은 불교 사상에 있어 선(禪)과 교(敎)를 아우르는 특징을 보였으며, 그의 사상은 후대에 큰 영향을 미쳤다.
4. 저서 및 관련 문화재
- 《몽산법어》
- 《나옹화상행장(懶翁和尙行狀)》 - [https://jnliboldbook.sen.go.kr/web.do?cmd=MAIN 종로도서관 소장]
- 나옹화상어록 및 나옹화상가송 - 보물 제697호[1]
- 이천 영월암 마애여래입상 - 보물 제822호[1]
- 나옹님 - 중요민속문화재 제17-12호[1]
- 나옹선사부도및석등 -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50호[1]
- 여주 신륵사 삼층석탑 -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33호[1]
- 문경 대승사 묘적암 나옹화상 영정 -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408호[1]
4. 1. 저서
- 《몽산법어》
- 《나옹화상행장(懶翁和尙行狀)》 - 고려 후기의 선승 나옹화상 혜근(1320~1376)의 행장(行狀), 어록(語錄), 가송(歌頌)을 각련(覺璉)이 모으고, 혼수(混修)가 교정하여 간행한 선가(禪家) 법어집(法語集)이자 유고 문집이다.[1]
4. 2. 관련 문화재
- 나옹화상어록 및 나옹화상가송 - 보물 제697호이다.
- 이천 영월암 마애여래입상 - 보물 제822호로 나옹선사가 부모님을 천도하기 위해 조성한 것이라는 유래가 전해오고 있다.
- 나옹님 - 중요민속문화재 제17-12호이다.
- 나옹선사부도및석등 -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50호이다.
- 여주 신륵사 삼층석탑 -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33호이다.
- 문경 대승사 묘적암 나옹화상 영정 -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408호이다.
5. 전기 자료
이색의 『목은문고』 권14, <보제존자 시 선각탑명>은 나옹의 생애와 사상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는다.
5. 1. 이색의 『목은문고』
이색의 『목은문고』 권14에 실린 <보제존자 시 선각탑명>은 나옹의 사리를 모신 회암사 선각탑 건립 배경과 나옹의 행적, 그리고 나옹이 남긴 게송 등을 기록하고 있다. 이 글은 나옹의 생애와 사상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는다.6.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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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1]
문서
한자어 이름 개명
[2]
문서
아원혜
[3]
문서
음력 1월 15일
[4]
문서
음력 5월 15일
[5]
서적
보제 존자 시 선각의 탑명
[6]
문서
혜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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