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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르헤 세라노 엘리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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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호르헤 세라노 엘리아스는 과테말라의 정치인으로, 1991년부터 1993년까지 과테말라 대통령을 역임했다. 산 카를로스 과테말라 대학교에서 산업공학 학위를, 스탠퍼드 대학교에서 경제, 교육, 과학 분야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85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으나 3위를 기록했으며, 1990년 선거에서 승리하여 대통령이 되었다. 재임 기간 동안 군의 민간 통제를 강화하고 경제 불황을 반전시키려 했으나, 1993년 헌법을 정지하고 의회를 해산하는 등 권위주의적인 시도를 하다 축출되어 국외로 도피했다. 현재는 파나마에서 부동산 개발업자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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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르헤 세라노 엘리아스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호르헤 세라노 엘리아스 공식 사진, 1991년
공식 사진, 1991년
직책과테말라 대통령
임기 시작1991년 1월 14일
임기 종료1993년 6월 1일
부통령구스타보 아돌포 에스피나 살게로
이전 대통령비니시오 세레소
다음 대통령구스타보 아돌포 에스피나 살게로
출생일1945년 4월 26일
출생지과테말라 시티
배우자마그다 비앙키 데 세라노
자녀5명
정당연대 행동 운동

2. 초기 생애 및 교육

미국에서 학업을 마친 후 과테말라로 돌아와 공무원으로 활동했다.[1] 1976년 과테말라를 강타한 대지진 당시, 여러 미국 개신교 단체들과 협력하여 재건 및 구호 활동에 참여하며 본격적인 사회 활동을 시작했다.[1] 이 시기 원주민의 열악한 상황에 대한 보고서를 발표했으나, 이로 인해 위협을 받아 1981년 미국으로 망명했다.[1]

1982년 에프라인 리오스 몬트 장군이 쿠데타로 집권하자 귀국하여, 리오스 몬트 정부의 국가 자문 위원회 부위원장(또는 국무회의 장관)을 역임했다.[1] 세라노는 리오스 몬트와 마찬가지로 개신교 신자였다. 그는 1970년대 기독교 민주당(DCG) 당원으로 정치 활동을 시작했으며, 이후 국민 쇄신당으로 당적을 옮겼다.

1985년 11월 대통령 선거에 국가 협력 민주당(PDCN)과 혁명당(PR)의 연합 후보로 출마했으나, 비니시오 세레소와 호르헤 카르피오 니콜레에 이어 12.6%의 득표율로 3위를 기록했다.[1] 이듬해인 1986년에는 직접 Movimiento de Acción Solidaria|모비미엔토 데 악시온 솔리다리아es (MAS, 연대행동운동)을 창당했다.

비니시오 세레소 정권 시기인 1987년, 내전 종식을 위한 URNG 게릴라와의 평화 협상을 위해 국가 화해 위원회(CNR)가 설립되자, 정당 대표 자격으로 참여하여 4명의 위원 중 한 명으로 활동했다.[1]

2. 1. 출생 및 가정 환경

호르헤 세라노 엘리아스는 1945년 4월 26일 과테말라 시티에서 아버지 호르헤 아단 세라노와 레바논 출신 어머니 로사 엘리아스 사이에서 태어났다.[1] 과테말라 리세오를 졸업한 후 산 카를로스 과테말라 대학교에서 산업공학 학위를 취득했다.[1] 이후 미국 캘리포니아주에 위치한 스탠퍼드 대학교로 유학하여 경제 성장을 연구하고, 교육과학 분야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1]

원래 가톨릭 신자였으나, 28세에 개신교(프로테스탄트) 교회인 엘 샤다이(El Shaddai)에 소속되며 종교를 바꾸었다.

2. 2. 학력

과테말라 리세오를 졸업한 후 산 카를로스 과테말라 대학교에서 산업공학 학위를 받았다.[1] 이후 미국스탠퍼드 대학교에서 경제 성장을 연구하고 교육과학 분야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1]

3. 정치 경력

1990년 대통령 선거에서 '연대 행동 운동'(MAS)의 후보로 나섰다. 같은 해 11월 11일에 치러진 1차 투표에서는 24.1%의 득표율로 2위를 기록했으나, 이듬해 1991년 1월 6일 결선 투표에서 68.1%를 득표하여 경쟁자 호르헤 카르피오를 누르고 당선되었다. 카르피오는 선거 과정에서 세라노의 개신교 신앙을 문제 삼으려 했으나 큰 효과를 보지 못했다.

1991년 1월 14일, 세라노는 비니시오 세레소의 뒤를 이어 과테말라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이로써 그는 에프라인 리오스 몬트 이후 과테말라에서 두 번째로 가톨릭 신자가 아닌 대통령이 되었다. 또한, 그의 취임은 수십 년 만에 처음으로 현직 대통령이 선거를 통해 선출된 야당 후보에게 평화적으로 정권을 이양한 사례였다. 하지만 그가 속한 연대 행동 운동(MAS)은 과테말라 의회 총 116석 중 18석만을 확보한 소수 여당이었기 때문에, 세라노는 기독교 민주당(DCG) 및 카르피오가 이끌던 중앙국민연합(UCN)과 불안정한 연립 정부를 구성해야 했다.[2]

세라노 정부의 성과는 엇갈렸다. 군 고위 장교 여럿을 교체하고 군부가 과테말라 민족혁명단결(URNG) 게릴라와의 평화 협상에 참여하도록 설득함으로써 군의 민간 통제를 일부 강화하는 데 성공했다. 또한 벨리즈의 독립과 주권을 인정하는 정치적으로 부담스러운 결정을 내리기도 했다. 경제적으로는 이전 정부로부터 물려받은 침체 상황을 일부 개선하여 물가 상승률을 낮추고 실질 경제 성장률을 높이는 성과를 거두었다.[3]

그러나 1993년 5월 25일, 세라노는 1993년 과테말라 헌법 위기를 일으키며 헌법 효력을 불법적으로 정지시키고, 의회와 대법원을 해산했다. 또한 검열을 실시하고 부패 척결을 명분으로 시민의 자유를 제한하려 시도했다. 이러한 자체 쿠데타는 페루알베르토 후지모리 대통령이 1년 전 감행했던 쿠데타와 유사한 방식이었다.

세라노의 쿠데타 시도는 과테말라 사회 각계각층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혔으며, 특히 언론인 호세 루벤 사모라가 이끄는 신문 시글로 베인티우노가 비판의 선봉에 섰다. 국제 사회의 압력과 더불어, 헌법재판소가 쿠데타를 위헌으로 판결하고 군부가 이 결정을 집행하면서 세라노는 정치적으로 고립되었다. 결국 이러한 압박 속에서 세라노는 6월 1일 대통령직에서 사임하고 국외로 망명했다. 그의 사임 후 부통령 구스타보 아돌포 에스피나 살게로가 임시로 대통령직을 승계했으나, 에스피나 역시 쿠데타에 연루되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의회는 그를 해임하고 인권 옴부즈맨이었던 라미로 데 레온 카르피오를 새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3. 1. 초기 정치 활동

세라노는 1945년 4월 26일 과테말라 시티에서 호르헤 아단 세라노와 레바논계 어머니 로사 엘리아스 사이에서 태어났다. 과테말라 리세오를 졸업하고 산 카를로스 과테말라 대학교에서 산업공학을 전공했으며, 이후 미국 스탠퍼드 대학교에서 경제 성장 연구 및 교육, 과학 분야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처음에는 가톨릭 신자였으나 28세에 개신교 교회인 엘 샤다이(El Shaddai) 소속이 되었다.

과테말라로 돌아와 공무원으로 일하던 중, 1976년 과테말라 대지진이 발생하자 여러 미국 개신교 단체와 협력하여 재건 및 구호 활동에 참여하며 본격적인 사회 활동을 시작했다. 이 시기 그는 과테말라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열악한 상황을 고발하는 문서를 발표했는데, 이로 인해 극우 세력의 위협을 받게 되어 1981년 미국으로 망명했다.

1982년, 복음주의 성향의 에프라인 리오스 몬트 장군이 쿠데타로 집권하자 과테말라로 귀국하여 정부 자문 위원회 부위원장(국무회의 장관)으로 활동했다.[1] 세라노 역시 리오스 몬트와 같은 개신교 신자였다. 그는 초기에는 기독교 민주당(DCG) 소속이었으나 이후 국민 쇄신당으로 당적을 옮겼다.

1985년 11월 대통령 선거에 국가 협력 민주당(PDCN)과 혁명당(PR)의 연합 후보로 출마했으나, 비니시오 세레소와 호르헤 카르피오 니콜레(Jorge Carpio Nicolle)에 이어 12.6%의 득표율로 3위를 기록했다. 이듬해인 1986년, 세라노는 독자적으로 Movimiento de Acción Solidaria|모비미엔토 데 악시온 솔리다리아es (연대행동운동, MAS)라는 정당을 창당했다.

1987년 9월, 비니시오 세레소 정권 하에서 내전 종식을 위해 URNG 게릴라와의 협상을 목표로 설립된 국가 화해 위원회(Comisión Nacional de Reconciliación, CNR)의 4인 위원 중 한 명으로 참여하며 평화 협상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3. 2. 리오스 몬트 정부 참여

세라노는 과테말라원주민들이 처한 비참한 상황을 다룬 저서를 출판한 후 극우 세력의 위협을 받아 1981년 미국으로 망명했다.[1] 이듬해인 1982년, 복음주의 성향의 장군 에프라인 리오스 몬트쿠데타로 정권을 잡자 과테말라로 돌아왔다.[1] 그는 리오스 몬트 정부 하에서 정부 자문 위원회 부위원장과 국무회의 장관을 역임했다.[1] 세라노와 리오스 몬트는 모두 프로테스탄트였다.[1]

3. 3. 1985년 대선 출마

1982년 에프라인 리오스 몬트 장군 정부에서 정부 자문 위원회 부위원장(혹은 국무회의 장관)으로 일하기 위해 귀국했다.[1]

1985년 11월 대통령 선거에 '국가 협력 민주당'(PDCN)과 혁명당(PR)의 후보로 출마하여[1] (일부 자료에서는 혁명당(PR)과 국민화해민주당(PRDN) 후보로 언급되기도 한다) 12.6%의 득표율을 기록했다.[1] 이 선거에서 그는 비니시오 세레소와 호르헤 카르피오 니콜레에 이어 3위를 차지했다.

이듬해인 1986년, 세라노는 직접 '연대행동운동'(Movimiento de Acción Solidariaes, MAS)이라는 정당을 조직했다. 또한 1987년 9월에는 정당 대표로서 국가 화해 위원회(CNR, 또는 CRN)의 네 명의 위원 중 한 명이 되어 과테말라 내전 종식을 위한 협상 과정에 참여했다.[1]

3. 4. 국가 화해 위원회 활동

비니시오 세레소 정권 하인 1987년, 과테말라 민족혁명단결(URNG) 게릴라와의 협상을 위한 국가 화해 위원회(Comisión Nacional de Reconciliación|CRNes)가 설립되었다. 세라노는 1987년 9월 정당 대표로서 이 위원회에 참여하여 4명의 위원 중 한 명으로 활동하는 등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1]

4. 대통령 재임 (1991-1993)

1991년 1월 14일, 비니시오 세레소로부터 평화적으로 정권을 이양받아 과테말라 대통령에 취임했다. 이는 수십 년 만에 현직 대통령이 선출된 야당 승자에게 권력을 넘긴 첫 사례였으며,[2] 20세기 과테말라에서 민간인 대통령 간 이루어진 첫 정권 교체이기도 했다. 세라노는 에프라인 리오스 몬트 이후 과테말라 역사상 두 번째 비가톨릭 신자 대통령이었다. 그러나 그가 이끈 연대 행동 운동(MAS)은 의회 소수 정당에 불과하여 국정 운영에 어려움을 겪었다.[2]

대통령 재임 중 세라노는 군 고위 장교를 교체하고 군부가 과테말라 내전 종식을 위한 평화 협상에 참여하도록 설득하며 군의 민간 통제를 강화하려 시도했다.[3] 또한, 국내 정치적으로 큰 논란에도 불구하고 이웃 나라 벨리즈의 독립과 주권을 공식 인정하는 결정을 내렸다.[3] 경제 분야에서는 전임 정부로부터 물려받은 경제 불황을 일부 개선하여 물가 상승률을 낮추고 실질 성장률을 높이는 성과를 보였다.[3] 하지만 신자유주의적 경제 정책은 학생과 노동자들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 재임 기간 동안 좌파 게릴라와 우파 죽음의 부대에 의한 폭력, 마약 밀매 문제 등 사회 불안은 여전했으며, 과테말라 민족혁명단결(URNG)과의 평화 협상 역시 큰 진전을 보지 못했다. 한편, 이 시기 원주민 인권 운동이 활발해져 1992년 리고베르타 멘추노벨 평화상을 수상하는 등 국제적인 주목을 받기도 했다.

1993년 5월 25일, 세라노는 부패 척결을 명분으로 내세워 의회와 사법부 등 다른 국가 기관과의 갈등 끝에 헌법을 정지시키고 의회와 대법원을 해산하는 자체 쿠데타를 감행했다.[2] 이는 페루알베르토 후지모리 대통령이 벌인 쿠데타를 모방한 것이었으나, 과테말라 시민 사회의 강력한 저항과 국제 사회의 압력, 그리고 군부의 반대에 부딪혀 실패로 돌아갔다.[3] 결국 세라노는 1993년 6월 1일 대통령직에서 사임하고 국외로 망명했으며, 이후 인권 옴부즈맨 출신의 라미로 데 레온 카르피오가 후임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4. 1. 1990년 대선 승리

세라노는 1990년 대통령 선거에서 연대 행동 운동(MAS, Movimiento de Acción Solidariaes)의 후보로 나섰다. 1990년 11월 11일에 치러진 1차 투표에서는 24.1%의 표를 얻어 호르헤 카르피오에 이어 2위를 기록하며 결선 투표에 진출했다. 당시 군부 출신 에프라인 리오스 몬트도 출마를 시도했지만, 과거 쿠데타 경력 때문에 헌법에 따라 대통령 후보가 될 수 없었다.

1991년 1월 6일 열린 결선 투표에서 세라노는 호르헤 카르피오를 68.1%의 득표율로 누르고 승리했다. 카르피오 측은 선거 운동 과정에서 세라노의 개신교 근본주의 신념을 쟁점화하려 했으나, 선거 결과에 큰 영향을 주지는 못했다. 세라노의 승리 배경에는 1차 투표에서 리오스 몬트를 지지했던 표심이 결선에서 세라노에게 옮겨간 것이 주요 원인으로 꼽힌다. 다만, 세라노가 특별히 개신교 유권자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은 것은 아니라는 분석도 존재한다.

1991년 1월 14일, 세라노는 비니시오 세레소의 뒤를 이어 과테말라 대통령으로 공식 취임했다. 이 정권 교체는 과테말라에서 수십 년 만에 처음으로 현직 대통령이 선거를 통해 선출된 야당 후보에게 평화적으로 권력을 넘겨준 사례였으며,[2] 20세기 과테말라 역사상 민간인 출신 대통령 사이의 첫 정권 이양이기도 했다. 또한 세라노는 에프라인 리오스 몬트에 이어 과테말라 역사상 두 번째 비가톨릭 신자 대통령이 되었다. 그의 당인 MAS는 의회 116석 중 18석만을 확보했기 때문에, 세라노는 기독교 민주당과 카르피오의 국민중심연합(UCN)과 불안정한 연립 정부를 구성해야 했다.[2]

4. 2. 취임 및 권력 이양

세라노는 1990년 대통령 선거에서 연대 행동 운동(MAS)의 대통령 후보로 출마했다. 그는 11월 11일 1차 투표에서 24.1%의 득표율로 호르헤 카르피오에 이어 2위를 차지하며 결선 투표에 진출했다.[2] 이 선거에는 에프라인 리오스 몬트도 출마하려 했으나,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인물은 대통령이 될 수 없다는 헌법 조항에 따라 후보 자격을 얻지 못했다.

1991년 1월 6일 열린 결선 투표에서 세라노는 호르헤 카르피오를 상대로 68.1%의 압도적인 득표율로 승리했다.[2] 카르피오는 선거 과정에서 세라노의 개신교 근본주의 신념을 문제 삼으려 했으나 큰 영향을 주지 못했다.[2] 세라노의 승리에는 리오스 몬트 지지 세력이 그를 지지한 것이 주요 요인으로 분석된다.

1991년 1월 14일, 세라노는 비니시오 세레소의 뒤를 이어 과테말라 대통령으로 공식 취임했다. 이로써 그는 리오스 몬트 이후 과테말라에서 두 번째 비가톨릭 신자 대통령이 되었다.[2] 또한, 그의 취임은 수십 년 만에 현직 대통령이 민주적 선거를 통해 선출된 야당 후보에게 평화적으로 정권을 이양한 첫 사례이자,[2] 20세기 과테말라 역사상 민간인 출신 대통령 간의 첫 정권 교체라는 의미를 가졌다.

그러나 세라노의 소속 정당인 MAS는 과테말라 의회 전체 116석 중 18석만을 확보한 소수 여당에 불과했다. 이 때문에 세라노는 안정적인 국정 운영을 위해 기독교 민주당 및 카르피오가 이끌던 중앙국민연합(UCN)과 불안정한 연립 정부를 구성해야 했다.[2]

4. 3. 정책 및 업적

1990년 대통령 선거에서 '연대 행동 운동(MAS)' 후보로 나섰으나 11월 11일 1차 투표에서는 24.1% 득표에 그쳐 호르헤 카르피오에게 뒤졌다. 그러나 1991년 1월 6일 결선 투표에서는 68.1%를 득표하여 카르피오를 누르고 승리했다. 이는 쿠데타 경력으로 출마가 금지된 에프라인 리오스 몬트의 지지 세력이 세라노에게 옮겨간 결과로 분석된다. 카르피오 측은 세라노의 근본주의적 신념을 문제 삼으려 했으나 큰 영향을 주지 못했다.[2]

1991년 1월 14일, 세라노는 비니시오 세레소의 뒤를 이어 과테말라 대통령에 취임했다. 이는 과테말라에서 리오스 몬트 이후 두 번째 비가톨릭 신자 대통령이었으며, 수십 년 만에 처음으로 현직 대통령이 민주적 선거를 통해 선출된 야당 후보에게 평화적으로 정권을 이양한 사례였다.[2] 하지만 그가 속한 MAS는 의회 116석 중 18석만을 확보했기 때문에, 기독교 민주당 및 카르피오의 중앙국민연합(UCN)과 불안정한 연립 정부를 구성해야 했다.[2]

세라노 정부의 정책과 업적은 엇갈리는 평가를 받는다. 군 고위 장교 여럿을 교체하고 군부가 과테말라 민족혁명단결(URNG)과의 평화 협상에 참여하도록 설득함으로써 군의 민간 통제를 강화하는 성과를 거두었다.[3] 또한, 정치적으로 논란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벨리즈의 독립과 주권을 공식 인정했다.[3] 경제적으로는 전임 정부로부터 물려받은 불황을 극복하여 물가 상승률을 낮추고 실질 성장률을 높이는 데 성공했다.[3] 신자유주의적 경제 정책을 추진했으나, 이는 학생과 노동자들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

한편, 세라노 집권기에도 좌파 게릴라와 우파 죽음의 부대에 의한 폭력, 마약 밀매 문제가 지속되었다. 시민 사회 운동과 원주민 인권 운동이 활발해져 1992년에는 리고베르타 멘추노벨 평화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URNG 게릴라와의 평화 협상은 계속되었지만, 정부 측 입장과 게릴라 및 UN의 요구 사이에 간극이 커 최종 합의에는 이르지 못했다.

1993년 5월 25일, 세라노는 부패 척결을 명분으로 내세워 1993년 과테말라 헌법 위기를 일으켰다. 그는 헌법 효력을 정지시키고 의회와 대법원을 해산했으며, 언론 검열을 실시하고 시민의 자유를 제한하려 시도했다. 이는 페루알베르토 후지모리가 감행했던 1992년 쿠데타와 유사한 자체 쿠데타였다.[3]

그러나 이러한 비상 조치는 시글로 베인티우노 신문의 호세 루벤 사모라 등이 주도한 시민 사회의 거센 반발에 부딪혔다. 국제 사회의 압력과 헌법재판소의 위헌 결정, 그리고 이를 집행한 군부의 반대로 인해 세라노의 쿠데타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결국 세라노는 6월 1일 대통령직에서 사임하고 국외로 망명했다.[3] 그의 사임 후 부통령 구스타보 아돌포 에스피나 살게로가 잠시 권한을 대행했으나, 그 역시 쿠데타 연루 혐의로 의회에 의해 해임되고 인권 옴부즈맨 출신의 라미로 데 레온 카르피오가 새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4. 4. 1993년 헌법 위기 (세라나소)

세라노 정권의 기반인 연대 행동 운동(MAS)은 과테말라 의회 116석 중 18석만을 차지한 약소 세력이었다. 의회나 사법부 등 다른 정치 세력과 대립하던 세라노는 1993년 5월 25일, 자체 쿠데타를 일으켰다. 이는 스페인어로 '세라나소'Serranazoes라고 불린다.

세라노는 이 쿠데타를 통해 불법적으로 헌법을 정지시키고, 의회와 대법원을 해산했으며, 검열을 실시하고 부패 척결을 명분으로 시민의 자유를 제한하려 시도했다.[2] 이러한 시도는 페루알베르토 후지모리 대통령이 1992년에 감행했던 자체 쿠데타를 모방한 것이었다.

그러나 세라노의 행동은 과테말라 사회 대부분의 거센 반발에 부딪혔다. 특히 시글로 베인티우노 신문의 호세 루벤 사모라가 주도한 강력한 항의 시위가 일어났다. 국제 사회의 압력과 경제 제재 움직임, 그리고 헌법재판소의 위헌 결정을 집행한 군부의 반대가 이어졌다. 이러한 압력 속에서 세라노는 1993년 6월 1일 대통령직에서 사임하고 엘살바도르를 거쳐 파나마로 망명했다.

세라노의 사임 후, 부통령 구스타보 아돌포 에스피나 살게로가 임시로 대통령직을 승계했으나, 그 역시 세라노의 자체 쿠데타에 연루되었다는 이유로 의회에 의해 해임되었다. 1993년 6월 6일, 과테말라 의회는 인권 문제 옴부즈맨이었던 라미로 데 레온 카르피오를 후임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세라노는 현재까지 파나마에 거주하고 있다. 과테말라 정부는 부패 혐의 등으로 그의 송환을 여러 차례 요구했지만, 파나마 정부는 이를 거부하고 있다. 1993년 7월 26일에는 파나마에서 세라노의 차량이 저격을 당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4]

5. 대통령 퇴임 이후

세라노 정권의 기반인 MAS는 과테말라 공화국 의회에서 18석밖에 차지하지 못한 약소 세력이었다. 의회나 과테말라 사법부 등 다른 정치 세력과 대립하던 세라노는 1993년 5월 25일, 페루알베르토 후지모리 대통령의 사례를 모방하여 스스로 쿠데타를 일으켰다. 이 사건은 스페인어로 '세라나소'(Serranazoes)로 알려져 있다. 그는 의회를 해산하고 헌법의 효력을 정지시켰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는 국내의 대규모 항의 시위와 국제 사회의 경제 제재 움직임을 불러일으켰다. 결국 군부마저 등을 돌려 반쿠데타를 시도했고, 1993년 6월 1일 군부에 의해 세라노 정권은 무너졌다. 6월 6일, 과테말라 의회는 인권 문제 옴부즈맨이었던 라미로 데 레온 카르피오를 후임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권좌에서 물러난 세라노는 엘살바도르를 거쳐 파나마로 망명했다. 1993년 7월 26일에는 파나마에서 그의 차량이 저격을 당하는 사건도 발생했다.[4] 과테말라 정부는 부패 혐의로 세라노의 송환을 여러 차례 요구했지만, 파나마 정부는 이를 계속 거부하고 있다. 세라노는 현재 파나마와 미국 플로리다주 등지에서 부동산 개발업자 및 투자자로 활동하고 있다.

5. 1. 가족 관계

세라노는 현재 부인 마그다 비안키 데 세라노와 함께 파나마에 거주하고 있다. 슬하에 쌍둥이 아들과 후안 파블로 세라노라는 아들, 그리고 두 명의 딸을 두었다. 세 명의 자매가 있으며, 그중 한 명인 올가 스텔라 세라노 데 살라자르는 남편 라파엘 살라자르 파르판과 함께 과테말라 시티에 거주하고 있다.

참조

[1] 웹사이트 Jorge Serrano Elias http://www.cidob.org[...] 2010-01-22
[2] 웹사이트 Jorge Serrano Elias http://www.cidob.org[...] 2010-01-22
[3] 웹사이트 Jorge Serrano Elias http://www.cidob.org[...] 2010-01-22
[4] 뉴스 Shot fired at former Guatemalan president's car https://www.upi.com/[...] 1993-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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