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리 지카요시 (아즈치모모야마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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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호리 지카요시는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의 무장으로, 아버지 호리 히데마사, 형 호리 히데하루와 함께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섬겼다. 오다와라 정벌에 11세의 나이로 참전, 아버지 사후 에치젠국 2만 석을 영유했으며, 도요토미 히데요시로부터 하시바 씨와 도요토미 씨 성을 하사받고 히데야라는 이름을 받았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동군에 가담하여 공을 세웠으며,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가신이 되었다. 1611년 시모츠케국 모오카 번주가 되었으며, 오사카 전투에서 활약한 후 호리 씨로 돌아와 요시마사로 개명했다. 겐나 4년 미노국에 5천 석을 가증받았으며, 간에이 4년 가라스야마 번주가 되어 2만 5천 석을 영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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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리 히데하루는 아즈치모모야마 시대부터 에도 시대 초기의 무장으로, 아버지의 사망으로 가독을 상속받아 분로쿠의 역에 참전하고 후시미 성 공사에 기여했으며, 에치고 가스가야마 영주로 봉해진 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공을 세웠다.
호리 지카요시 (아즈치모모야마 시대) | |
---|---|
기본 정보 | |
씨명 | 호리 씨 |
이름 | 호리 지카요시 |
시대 | 아즈치모모야마 시대 - 에도 시대 전기 |
출생 | 덴쇼 8년 ( 1580년 ) |
사망 | 간에이 14년 5월 13일 ( 1637년7월 5일 ) |
어릴 적 이름 | 깃치요 |
다른 이름 | 손타로 히데이에 히데시게 요시마사 지카요시 야타로 ( 통칭 ) |
계명 | 도코지덴 바이야 소게쓰 다이코지 |
묘소 | 도쿄도시부야구히로오의 도코지 이바라키현 조소 시 이이누마 홍교지 |
관위 | 종5위 하, 미마사카 수 |
막부 | 에도 막부 |
섬긴 주인 | 도요토미 히데요시 히데요리 도쿠가와 이에야스 히데타다 이에미쓰 |
번 | 에치고자오도 번 번주 시모쓰케모카 번 번주 시모쓰케 가라스야마 번 번주 |
부모 | 아버지: 호리 히데마사, 어머니: 기타지마 요시시게의 딸 |
형제자매 | 히데하루 지카요시 무라카미 요시타다 곤도 마사나리 |
배우자 | 아사노 나가마사의 딸, 요바이인덴 |
자녀 | 지카마사 지카토모 지카야스 딸 ( 히노 스케히데 실) |
양자 | 쓰루치요 |
비고 | 현재 조소 시 도요오카마치 후루야 가에 남아있는 자료에 따름 |
번주 정보 | |
전임 | 아사노 나가시게 (모카 번) / 마쓰시타 시게쓰나 (가라스야마 번) |
후임 | 이나바 마사나리 (모카 번) / 호리 지카마사 (가라스야마 번) |
번 | 자오도 번 (1대), 모카 번, 가라스야마 번 (1대) |
임기 | 자오도 번: 1598년 ~ 1602년 모카 번: 1611년 ~ 1627년 가라스야마 번: 1627년 ~ 1637년 |
2. 생애
게이초 5년(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형 히데하루와 함께 동군에 가담하여 우에스기 가게카츠가 에치고에서 일으킨 우에스기 유민 일규 진압에 힘써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히데타다로부터 감장을 받았다. 전투 후, 이에야스에게서 소령을 안도받았다.
게이초 7년(1602년)경, 호리 나오마사와 불화하여 대립했고, 병을 핑계로 교토후시미에 있던 아버지의 저택에 은둔했다. 이때 가독을 양자인 쓰루치요에게 물려주었다. 이후, 기슈를 영유했던 아내의 친가인 아사노 가문에 의탁했다. 장인인 아사노 유키나가에게 신변 처리에 대해 상담하고, 슨푸의 이에야스에게 배알하여, 명령에 따라 쇼군 히데타다의 가신이 되었다. 4년 동안 근무한 후, 게이초 16년(1611년), 시모츠케국모오카에 1만 2,000석을 하사받아, 에도에서 히데타다에게 배알했다. 한편, 이 사이에 호리 종가는 개역 처분을 받았지만, 지카요시는 연좌되지 않았다.[2]
오사카 전투에서는 도이 도시카쓰의 휘하에서 분전했다. 이때, 하시바 씨를 폐하고 호리 씨로 돌아와, 히데나리(秀成일본어)라는 이름도 요시마사(嘉以일본어)로 개명했다.[3] 겐나 4년(1618년) 친동생 곤도 마사나리의 감봉분으로 미노국에 5000석을 추가로 받았다. 간에이 4년(1627년) 시모쓰케국 가라스야마에 2만 5,000석을 영지로 받아 가라스야마성을 하사받았다. 오늘날 알려진 "지카요시(親良일본어)"라는 이름이 확인되는 것은, 가라스야마 입봉 이후의 일이다.[4]
2. 1. 어린 시절과 도요토미 가문 섬김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섬긴 아버지 히데마사와 형 히데하루를 따라 오다와라 정벌에 11세의 나이로 첫 출진하였다. 아버지 사후 에치젠국에 2만 석을 영지로 받았으며, 덴쇼 19년(1591년) 종5위하 미마사카노카미에 임명되었고, 히데요시로부터 하시바 씨와 도요토미 성을 하사받고 히데야(秀也)라는 이름을 받았다. 호리 나오타카는 히데야로 개명하기 전의 이름을 '히데나리'라고 했지만, 타지마 유스케는 게이초 12년(1607년)에 사망한 야마나카 나가토시에게 보낸 서신에 히데나리의 서명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해 이전에 히데야에서 히데나리로 개명했다고 한다.[1]이후, 히데하루와 함께 에치고국으로 옮겨 봉해져 조오도에 4만 석을 영지로 받았고, 그 중 1만 석을 가로 곤도 시게카츠에게 주었다(이후 양자인 곤도 마사나리(호리 지카요시의 동생)가 계승). 히데요시가 사망하자, 유품으로 "스케자네의 칼"을 받았다.
게이초 5년(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형과 함께 동군에 가담했다. 간에이 제가계도전에 따르면, "우에스기 가게카츠는 본국에 있으면서 역모를 꾸미고, 사이토·가키자키·마루타 등을 군장으로 삼아, 이키의 무리를 이끌고 아이즈의 사카이 시모다 촌에 진을 쳤는데, 이때 지카요시가 스스로 군사를 맞이하여 매우 싸워 수급을 얻었으니, 곧 상의에 도달했다."라고 한다. 이처럼 아이즈의 우에스기 씨가 에치고에서 일으킨 우에스기 유민 일규 진압에 힘썼다. 이 공으로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히데타다로부터 감장을 받았으며, 감장에는 하시바 미마사카노카미 전이라고 적혀 있어 이때는 아직 하시바 씨를 칭하고 있었다. 전투 후, 이에야스로부터 영지를 안도받았다.
2. 2. 에치고 전봉과 세키가하라 전투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섬겼으며, 오다와라 정벌 때 11세의 나이로 첫 출진했다. 아버지 호리 히데마사 사후 에치젠국에 2만 석을 영유했다. 덴쇼 19년(1591년) 종5위하 미마사카노카미에 서임되었고, 히데요시로부터 하시바 씨와 도요토미 성을 하사받고 히데야(秀也)라는 휘(이름)를 받았다. 이후, 형 호리 히데하루와 함께 에치고국으로 전봉되어 조오도에 4만 석을 영유했고, 그 중 1만 석을 가로(가신)인 곤도 시게카츠에게 분여했다.[1] 히데요시 사후에는 유품으로 "스케자네의 칼"을 하사받았다.게이초 5년(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형과 함께 동군에 가담했다. 우에스기 가게카츠가 에치고에서 일으킨 우에스기 유민 일규 진압에 분주하여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히데타다로부터 감장(감사 편지)을 받았다.[2] 전투 후, 이에야스로부터 영지를 안도받았다.
2. 3. 호리 나오마사와의 불화와 가독 상속
덴쇼 19년(1591년) 종5위하 미마사카노카미에 서임되었고, 도요토미 히데요시로부터 하시바 씨와 도요토미 성을 하사받아 히데야(秀哉)라는 휘(이름)를 받았다. 호리 나오타카는 히데야로 개명하기 전의 휘를 '히데나리'라고 했지만, 친량 문서를 일람한 타지마 유스케는 게이초 12년(1607년)에 사망한 야마나카 나가토시에게 보낸 서신에 히데나리의 서명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해 이전에 히데야에서 히데나리로 개명했다고 한다.[1]게이초 7년(1602년)경, 호리 나오마사(히데마사의 사촌으로, 히데마사 시대부터 호리 씨 종가의 중신)와 불화하여 대립했고, 병을 핑계로 교토후시미에 있던 망부(亡父)의 저택에 은둔했다. 이때 가독을 양자인 쓰루치요에게 물려주었다. 푸다이 가신을 데리고 교토, 오사카를 거쳐 기슈로 가서, 기슈를 영유했던 아내의 친가인 아사노 가문에 의탁했다. 장인인 아사노 유키나가에게 신변 처리에 대해 상담하고, 슨푸의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배알하여, 명령에 따라 쇼군·히데타다의 가신이 되었다. 4년 동안 근무한 후, 게이초 16년(1611년), 시모츠케국모오카에 1만 2,000석을 하사받아, 에도에서 히데타다에게 배알했다. 한편, 이 사이에 호리 종가는 개역 처분을 받았지만, 출분(出奔)했던 친량은 연좌되지 않았다.[2]
2. 4. 시모쓰케 모오카 번주 시절
오다와라 정벌 때 11세의 나이로 첫 출진을 하였고, 아버지 히데마사가 사망한 후 에치젠국에 2만 석을 영유했다.[1] 덴쇼 19년(1591년) 종5위하 미마사카노카미에 서임되었고, 도요토미 히데요시로부터 하시바 씨와 도요토미 성을 하사받아, 히데야(秀也)라는 휘를 받았다.[1] 호리 나오타카는 히데야 개명 전의 휘를 '히데나리'라고 했지만, 타지마 유스케는 게이초 12년(1607년)에 사망한 야마나카 나가토시 앞으로 보낸 서신에 히데나리의 서명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해 이전에 히데야에서 히데나리로 개명했다고 한다.[1]그 후, 히데하루와 함께 에치고국으로 전봉되어, 조오도에 4만 석을 영유했고, 그 중 1만 석을 가로인 곤도 시게카츠에게 분여했다(이후, 양자인 곤도 마사나리(호리 친나오의 동생)가 계승).[1] 히데요시가 사망하자, 유품으로 "스케자네의 칼"을 하사받았다.[1]
게이초 5년(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형과 함께 동군에 가담했다.[1] 우에스기 가게카츠가 에치고에서 일으킨 우에스기 유민 일규 진압에 분주한 공적[1]으로 도쿠가와 이에야스, 히데타다로부터 감장을 받았다.[1] 감장에는 하시바 미마사카노카미 전이라고 적혀 있어, 이때는 아직 하시바를 칭하고 있었다.[1] 전투 후, 이에야스에게서 소령을 안도받았다.[1]
게이초 7년(1602년)경, 호리 나오마사와 불화하여 대립했고, 병을 칭하며 교토 후시미에 있던 망부의 저택에 은둔했다.[2] 이때, 가독을 양자인 쓰루치요에게 물려주었다.[2] 푸다이의 가신을 데리고 교토, 오사카를 거쳐 기슈에 들어가, 기슈를 영유했던 아내의 생가인 아사노 가문에 의탁했다.[2] 장인인 아사노 유키나가에게 신변 처리에 대해 상담, 슨푸의 이에야스에게 배알하여, 명령에 따라 쇼군·히데타다의 가신이 되었다.[2] 4년 동안 근무한 후, 게이초 16년(1611년), 시모쓰케국모오카에 1만 2,000석을 하사받아, 에도에서 히데타다에게 배알한다.[2] 한편, 이 사이에 호리 종가는 개역 처분을 받았지만, 출분했던 친량은 연좌되지 않았다.[2]
2. 5. 오사카 전투와 개명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섬겼던 아버지 히데마사와 형 히데하루가 사망한 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형과 함께 동군에 가담했다. 우에스기 유민 일규 진압에 공을 세워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히데타다로부터 감장을 받았으며, 소령을 안도받았다.[1]오사카 전투에서는 도이 도시카쓰 휘하에서 분전했다. 이때 하시바 씨를 폐하고 호리 씨로 돌아왔으며, 히데나리(秀成일본어)라는 이름도 요시마사(嘉以일본어)로 개명했다.[3]
2. 6. 시모쓰케 가라스야마 번주 시절과 사망
게이초 5년(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형 히데하루와 함께 동군에 가담했다. 우에스기 가게카츠가 에치고에서 일으킨 우에스기 유민 일규 진압에 힘써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히데타다로부터 감장을 받았다.[1] 전투 후, 이에야스로부터 영지를 보장받았다.게이초 7년(1602년)경, 호리 나오마사와 불화하여 교토 후시미의 저택에 은둔했고, 양자인 쓰루치요에게 가독을 물려주었다. 이후 장인 아사노 유키나가의 도움으로 이에야스를 알현하고 히데타다의 가신이 되었다. 게이초 16년(1611년), 시모쓰케국 모오카에 1만 2,000석을 받고 에도에서 히데타다를 알현했다. 이 사이 호리 종가는 개역되었으나, 지카요시는 연좌되지 않았다.[2]
오사카 전투에서는 도이 도시카츠 휘하에서 싸웠고, 이때 하시바 씨를 버리고 호리 씨로 돌아왔으며, 이름도 요시마사(吉政)로 바꾸었다.[3] 겐나 4년(1618년) 미노국에 5,000석을 추가로 받았고, 간에이 4년(1627년) 시모쓰케국 가라스야마에 2만 5,000석을 영지로 받아 가라스야마성을 하사받았다. '지카요시(親良)'라는 이름은 가라스야마 입봉 이후부터 확인된다.[4]
3. 가계
아버지 | 어머니 | 정실 | 측실 | 자녀 | 양자 |
---|---|---|---|---|---|
호리 히데마사 | 키타지마 요시시게의 딸 | 아사노 나가마사의 딸 요바이인 | 곤도 씨, 와카야마 씨, 오쿠무라 씨 | 호리 치카마사, 호리 치카토모, 호리 치카야스, 히노 스케히데의 부인 | 호리 쓰루치요 (호리 히데하루의 차남) |
3. 1. 부모
- 호리 히데마사 (아버지)
- 키타지마 요시시게의 딸 (어머니)
3. 2. 정실
아사노 나가마사의 딸 요바이인이다.3. 3. 측실
- 곤도 씨
- 와카야마 씨
- 오쿠무라 씨
3. 4. 자녀
이름 | 생모 | 비고 |
---|---|---|
호리 치카마사 | 곤도 씨 | |
호리 치카토모 | 와카야마 씨 | |
호리 치카야스 | 오쿠무라 씨 | |
히노 스케히데의 부인 | 오쿠무라 씨 | |
호리 쓰루치요 | (양자) | 호리 히데하루의 차남 |
3. 5. 양자
호리 쓰루치요 - 호리 히데하루의 차남[1]참조
[1]
서적
2016
[2]
서적
2016
[3]
서적
2016
[4]
서적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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