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스로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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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호스로 1세는 사산 제국의 22대 샤한샤(재위: 531–579)이다. 그는 '불멸의 영혼'을 뜻하는 아누시르반(Anushirvan)이라는 별칭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정의를 베푸는 자(Dādgar)라는 칭호로도 불렸다. 호스로 1세는 카바드 1세의 아들로, 비잔틴 제국과의 전쟁, 에프탈과의 전쟁, 예멘 원정 등을 통해 사산 제국의 영토를 확장했다. 그는 조세, 행정, 군사 개혁을 단행하여 중앙 집권 체제를 강화하고, 문화와 학문을 장려하여 페르시아 문화를 발전시켰다. 그의 치세는 사산 제국의 황금기로 평가받으며, 그의 유산은 이슬람 문화와 정치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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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스로 1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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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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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호 | 이란과 비이란의 왕중왕 |
통치 기간 | 531년 9월 13일 – 579년 2월 |
출생일 | 512–514년 |
출생지 | 사산 제국 아르데스탄 |
사망일 | 579년 2월 (65–67세) |
사망지 | 사산 제국 크테시폰 |
이전 통치자 | 카바드 1세 |
다음 통치자 | 호르미즈드 4세 |
왕가 | 사산 왕조 |
아버지 | 카바드 1세 |
어머니 | 이스파부단 가문 귀족 여성 |
종교 | 조로아스터교 |
자녀 | 호르미즈드 4세 아노샤자드 야즈단다르 |
이름 | |
로마자 표기 | Xosrōe |
2. 이름 및 칭호
는 학자들이 사용하는 그의 이름의 신 페르시아어 변형이며, 원래 이름은 중세 페르시아어인 였다. 이는 다시 아베스타어 ("좋은 명성을 가진 자")에서 파생되었다.[1] 이 이름은 그리스어로는 (Χοσρόηςgrc)로, 아랍어로는 ''Kisra''로 표기된다. 그는 개인 이름 외에도 ("불멸의 영혼")이라는 별칭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데, 이는 중세 페르시아어 을 신 페르시아어로 표현한 것이다. 그는 호스로 2세와 구별하기 위해 사후에 이 칭호를 받았다. 이 칭호는 그의 종교 개혁과 왕국의 번영 증진을 의미했으며, 아마도 신화 속 불멸의 왕 카이 호스로와도 관련이 있었을 것이다 (둘 다 경건한 왕이자 신앙의 "복원자"로 기억되었다). 이 이름의 다른 변형으로는 , ''Anushiravan'' 및 이 있다. 호스로는 또한 ("정의를 베푸는 자")라는 별칭으로도 알려졌으며,[2] 이슬람 시대에는 ''
알타바리의 아랍어 『예언자들과 왕들의 역사』와 페르도우시(1020년 사망)의 중세 페르시아 서사시 『샤나메』("왕의 서") 같은 이슬람 시대에 작성된 많은 자료들은 호스로 1세의 개혁에 관한 많은 정보를 제공하는데, 이는 대부분 중기 페르시아어 역사서 『호다이 나마그』("주의 서")에서 정보를 얻었을 가능성이 높다. 다른 작품들은 독립적으로 제작되었는데, 예를 들어 호스로 1세 자신이 저술했다고 전해지는 자서전인 『시라트 아누시르반』이 있으며, 이는 미스카와이흐(932–1030)의 저서에 보존되어 있다. 프로코피우스, 아가티아스, 메난드로스 프로텍토르와 같은 여러 그리스 자료들에서도 호스로 1세가 언급되는데, 이들은 호스로 1세의 이란-로마 전쟁 수행에 관한 중요한 정보를 제공한다. 시리아어 저술가인 에페소스의 존과 자카리아스 레토르 역시 호스로 1세를 작품에 포함시켜, 그의 원정이 로마 국경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들에게 가져온 결과에 대한 인식을 제공한다.
호스로 1세는 512년에서 514년 사이에 이란 중부 이스파한 주의 아르데스탄에서 태어났다.[3] 이 마을은 아케메네스 제국 시대부터 존재했으며, 호스로 시대에 번성했다. 신화 속 카야니 왕조의 왕 카이 바흐만이 세웠다고 전해지는 불의 신전도 있었다.[3] 사산 왕조는 카이 바흐만에게서 혈통을 이어받았다고 주장했다. 호스로는 사산 제국의 지배자 카바드 1세의 막내아들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이스파부드한 가문의 공주였으며, 이란 최고의 장군 바위의 누이였다.[3] 이스파부드한 가문은 사산 제국의 엘리트 귀족을 형성하는 이란의 7대 가문 중 하나였다. 그들은 "사산 왕조의 친족이자 파트너"로 인정받을 정도로 높은 지위를 누렸다. 이 가문은 사산 제국의 서부, 즉 남서부 지역(콰르와란)의 스파흐베드 직위를 맡았다.[4]
년경, 카바드 1세는 호스로의 왕위 계승을 확실하게 하기 위해 비잔틴 제국의 황제 유스티누스 1세에게 호스로를 양자로 삼아달라고 제안했다. 호스로는 경쟁 형제들과 마즈다크교 때문에 위협받고 있었다. 비잔틴 황제와 그의 조카 유스티니아누스는 처음에는 이 제안을 환영했지만, 유스티누스 1세의 법무 장관(퀘스토르 사크리 팔라티이) 프로클루스는 호스로가 비잔틴 왕위를 노릴 것을 걱정하여 반대했다.[5]
3. 역사 기록
4. 배경
귀족 가문의 전통에 따라 호스로는 5~7세 사이에 학교(frahangestān)에 다녔을 것이다. 그곳에서 글쓰기를 배우고, 미래의 사제(헤르바드)를 위한 학교 교육과 같은 방식으로 야슈트, 하도크트, 바얀 야스, 벤디다드를 배웠을 것이다. 또한 아베스타의 중세 페르시아어 번역본인 젠드를 공부했을 것이다. 그 후에는 승마, 궁술, 폴로(초우간) 및 군사적 창의성을 배웠을 것이다.
5. 초기 생애
비잔틴 제국은 호스로를 로마인이 아닌 야만인으로 양자를 삼는다는 대안을 제시했으나,[5] 결국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5] 호스로는 비잔틴에게 모욕감을 느끼고 적대감을 키웠다고 전해진다.[5]
협상에 참여했던 외교관 마흐보드는 시야우시가 의도적으로 협상을 방해했다고 비난했다.[5]
5. 1. 마즈다크교 박해
카바드 1세는 귀족과 성직자의 권력을 억제하기 위해 마즈다크교를 이용했으나, 520년대에 개혁이 진행되면서 지지를 철회했다.[3][6] 이후 조로아스터교, 기독교, 유대교 사제들은 마즈다크와 그의 추종자들을 비방하는 토론을 열었다.[6]
페르도우시가 쓴 샤나메 ("왕의 서")에 따르면, 카바드 1세는 마즈다크와 지지자들을 호스로 1세에게 보냈고, 호스로 1세는 지지자들을 머리만 땅에 묻고 발만 보이게 하여 살해했다.[6] 호스로 1세는 마즈다크에게 "아무도 본 적 없고 고대 현자들도 들어본 적 없는 나무를 발견할 것이다"라며 자신의 정원을 보게 했다.[6] 마즈다크는 추종자들의 시체를 보고 비명을 지르며 정신을 잃었고, 이후 교수대에 발이 묶인 채 부하들에게 화살을 맞아 처형되었다.[6] 페르도우시가 샤나메를 쓰기 위해 이전 사건 보고서를 사용했기에 이 이야기는 당시 기억의 일부를 전달할 수 있지만, 이야기의 타당성은 불확실하다.[7]
6. 즉위
531년에 즉위했다. 당시 사산 왕조는 잇따른 대외 전쟁으로 국내가 황폐해지고 쇠퇴의 조짐을 보였다. 호스로 1세는 국내 안정을 위해 노력했으며, 조로아스터교 신자였지만 기독교 신자 등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에게는 관대한 태도를 보였다.
6. 1. 권력 강화
호스로 1세는 왕위 계승 경쟁자였던 형 카우스를 처형했다.[1] 그는 또한 삼촌 바위를 비롯한 귀족들의 음모를 적발하고 관련자들을 처형했다.[1]7. 개혁
호스로 1세는 카바드 1세 때 시작된 조세 개혁을 완성하여 왕실의 권한을 크게 강화했다.[7] 이전에는 일곱 파르티아 가문 (수렌 가문, 와라즈, 카렌 가문, 이스파부드한 가문, 스판디야드 가문, 미란 가문, 지크)이 대부분의 토지를 소유하고 면세 혜택을 누리며 지방에서 세금을 징수했다.
그러나 마즈다크 혁명으로 인해 평등주의적 가치를 따르는 농민과 하층민들이 봉기하여 토지 소유에 큰 혼란이 발생했다. 이에 호스로 1세는 제국 내 모든 토지를 조사하고, 모든 토지에 대해 단일 세율을 적용하여 세금을 부과했다. 이전에 지방 귀족 가문에 속했던 세입은 중앙 정부로 귀속되었고, 고정세는 재무부에 안정적인 수입을 제공했다.
세금이 변동하지 않으면서 재무부는 해당 연도의 수입을 쉽게 예측할 수 있게 되었다. 호스로 1세 이전에는 토지에서 생산된 수확량을 기준으로 세금을 징수했지만, 새로운 시스템은 각 토지의 관개 권리를 기준으로 과세액을 계산하고 평균했다. 대추야자와 올리브나무를 재배하는 토지는 생산하는 나무의 양을 기준으로 약간 다른 방식으로 과세했다. 이러한 조세 개혁은 이후 관료제와 군대 개혁의 기반이 되었다.
호스로 1세는 봉건 귀족이나 마기에게 권력을 주지 않고 정부를 중앙 집권화했다.[6] 531년 로마와의 평화 협정은 호스로에게 내부 개선에 집중할 기회를 주었다.[7] 내부 개혁은 대귀족 가문을 희생시키면서 관료 국가를 성장시켰고, 중앙 정부와 샤한샤(왕중왕)의 권력을 강화했다. 세금 개혁은 제국에 안정성을 제공하고, 장기간의 군사 원정과 관료 기구에 더 많은 수입을 가져다주어 경제를 더욱 강력하게 만들었다.[7]
호스로 1세는 기존 사산 제국의 세 계급(마기, 귀족, 평민/농민) 외에 데흐칸이라는 소규모 토지 소유 계급을 새로 추가했다.[6] 데흐칸은 하위 귀족으로, 샤에게 충성하고 신뢰할 수 있다는 점에서 고위 귀족보다 관료직에 더 적합했다.[6] 이들은 사산 제국의 중추 세력으로 성장하여, 대부분의 토지와 지방 행정 직위를 차지했다.[6]
또한, 각 지방의 유력 가문이 넓은 영토를 다스리며 자체적인 왕을 두는 봉건제적 성격이 강했던 기존 체제에서 벗어나, 이들 가문의 권력을 약화시키고 중앙 정부로 권력을 집중시켰다. 세금 역시 중앙 정부로 직접 납부하도록 변경했다.
7. 1. 개요
호스로 1세는 초기 통치 시기에 북부 파디슈와르가르의 총독 왕이자 마즈다크교도였던 맏형 카우스와 대립했다.[6] 카우스는 자신이 더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왕위 계승자라고 주장했지만, 호스로의 군대에 패배하여 크테시폰으로 끌려갔다. 호스로는 카우스에게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도록 설득하려 했으나, 카우스는 죽음을 택했고 결국 호스로는 그를 처형할 수밖에 없었다.호스로의 통치에 대한 또 다른 위협은 그의 삼촌 바위였다. 바위는 다른 이란 귀족들과 함께 호스로를 몰아내고 호스로의 형제 자마스프의 아들 카바드를 왕으로 세우려는 음모를 꾸몄다. 이 음모를 알게 된 호스로는 바위를 비롯한 관련 귀족들과 자신의 모든 형제 및 그 자손들을 처형했다.[7] 또한, 호스로는 당시 어린아이였던 카바드의 처형도 명령했지만, 아데르구둔바데스가 명령에 불복하고 비밀리에 카바드를 길렀다. 541년, 아데르구둔바데스는 자신의 아들 바흐람에게 배신당해 호스로에게 발각되어 처형되었지만, 카바드는 비잔틴 제국으로 도망치는 데 성공했다.[7]
7. 2. 조세 개혁
호스로 1세는 봉건 귀족이나 마기에게 권력을 주지 않고 정부를 중앙 집권화했다.[6] 531년 로마와의 평화 협정은 호스로에게 내부 개선에 집중할 기회를 주었다.[7] 내부 개혁은 대귀족 가문을 희생시키면서 관료 국가를 성장시켰고, 중앙 정부와 샤한샤(왕중왕)의 권력을 강화했다. 세금 개혁은 제국에 안정성을 제공하고, 장기간의 군사 원정과 관료 기구에 더 많은 수입을 가져다주어 경제를 더욱 강력하게 만들었다.[7]7. 3. 행정 개혁
호스로 1세는 카바드 1세 때 시작된 조세 개혁을 완성하여 왕실의 권한을 크게 강화했다.[7] 이전에는 일곱 파르티아 가문 (수렌 가문, 와라즈, 카렌 가문, 이스파부드한 가문, 스판디야드 가문, 미란 가문, 지크)이 대부분의 토지를 소유하고 면세 혜택을 누리며 지방에서 세금을 징수했다.그러나 마즈다크 혁명으로 인해 평등주의적 가치를 따르는 농민과 하층민들이 봉기하여 토지 소유에 큰 혼란이 발생했다. 이에 호스로 1세는 제국 내 모든 토지를 조사하고, 모든 토지에 대해 단일 세율을 적용하여 세금을 부과했다. 이전에 지방 귀족 가문에 속했던 세입은 중앙 정부로 귀속되었고, 고정세는 재무부에 안정적인 수입을 제공했다.
세금이 변동하지 않으면서 재무부는 해당 연도의 수입을 쉽게 예측할 수 있게 되었다. 호스로 1세 이전에는 토지에서 생산된 수확량을 기준으로 세금을 징수했지만, 새로운 시스템은 각 토지의 관개 권리를 기준으로 과세액을 계산하고 평균했다. 대추야자와 올리브나무를 재배하는 토지는 생산하는 나무의 양을 기준으로 약간 다른 방식으로 과세했다. 이러한 조세 개혁은 이후 관료제와 군대 개혁의 기반이 되었다.
7. 4. 군사 개혁
호스로 1세는 기존 사산 제국의 세 계급(마기, 귀족, 평민/농민) 외에 데흐칸이라는 소규모 토지 소유 계급을 새로 추가했다.[6] 데흐칸은 하위 귀족으로, 샤에게 충성하고 신뢰할 수 있다는 점에서 고위 귀족보다 관료직에 더 적합했다.[6] 이들은 사산 제국의 중추 세력으로 성장하여, 대부분의 토지와 지방 행정 직위를 차지했다.[6]또한, 각 지방의 유력 가문이 넓은 영토를 다스리며 자체적인 왕을 두는 봉건제적 성격이 강했던 기존 체제에서 벗어나, 이들 가문의 권력을 약화시키고 중앙 정부로 권력을 집중시켰다. 세금 역시 중앙 정부로 직접 납부하도록 변경했다.
8. 군사 원정
호스로 1세는 사산 제국의 군사력을 강화하기 위해 여러 개혁을 단행했다. 이전에는 대가문의 봉건 영주에게 의존하여 병사와 기병을 제공받았으나, 호스로 1세는 중앙 정부의 급여를 받는 하위 데흐칸(deghan) 귀족 계급을 육성하여 군사력을 강화했다.[8] 이를 통해 아스바란(Aswaran) 기병대의 규모가 크게 증가했으며, 병력의 조직과 훈련에 더 많은 투자를 할 수 있게 되었다.
호스로 1세는 제국을 4개의 군사 구역으로 나누고, 각 구역에 스파흐베드(spahbed)라는 장군을 임명하여 통치했다. 이전에는 이란인 장군(에란-스파흐베드(Eran-spahbed))이 제국 전체의 군대를 통제했으나, 이러한 개혁으로 더욱 효율적인 군사 시스템을 구축할 수 있었다.[8] 4개의 군사 구역은 서쪽의 메소포타미아, 북쪽의 코카서스 지역, 중부 및 남서부 지역의 페르시아 만, 동쪽의 중앙 아시아로 구성되었다.
또한, 호스로 1세는 기병대(아스와란) 장비 목록을 작성하여 군사력을 표준화했다. 이 목록에는 헬멧, 목 가리개, 사슬 갑옷 셔츠, 찰갑 또는 흉갑, 다리 갑옷, 건틀릿, 검, 방패, 예비 현이 있는 활 2개, 화살 30개, 도끼 또는 철퇴, 그리고 말 갑옷이 포함되었다.[8]
8. 1. 비잔틴 제국과의 전쟁 (540-562)
프로코피우스grc, 아가티아스grc, 메난드로스 프로텍토르grc와 같은 여러 그리스 자료들은 호스로 1세의 이란-로마 전쟁 수행에 관한 중요한 정보를 제공한다.[8] 시리아어 저술가인 에페소스의 존syc과 자카리아스 레토르syc 역시 호스로 1세를 작품에 포함시켜, 그의 원정이 로마 국경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들에게 가져온 결과에 대한 인식을 제공한다.[8]대외적으로는 동로마 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 1세와 싸워 562년에 안티오키아에서 동로마 제국군을 격파하여 우위를 점하고 자국에 유리한 평화 조약을 체결했다.
8. 2. 에프탈과의 전쟁
557년 돌궐의 실점밀과 연합하여 에프탈을 공격해 부하라 전투에서 승리하고 멸망시켰다.[4] 567년에는 박트리아 지방까지 영토를 넓혔다.[4]8. 3. 예멘 원정
522년, 호스로 1세의 통치 이전에, 미아파시테 에티오피아인 집단이 아라비아 남부의 지배 세력이었던 힘야르인을 공격했다. 당시 아랍 지역 지도자는 이 공격을 저지했고, 사산 제국에 지원을 요청했다. 에티오피아인들은 이후 비잔틴 제국에 도움을 요청했다. 에티오피아인들은 또 다른 군대를 홍해를 건너 파견하여 아랍 지도자를 살해하고, 이 지역에 에티오피아 출신 왕을 옹립했다.[4]531년,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예멘의 에티오피아인들에게 사산 제국과 인도 간의 해상 무역을 중단할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에티오피아인들은 이 요청을 받아들이지 못했는데, 에티오피아의 장군 아브라하가 예멘 왕위를 차지하고 독립 국가를 세웠기 때문이다.[4] 아브라하 사후 그의 아들 마아드 카리브는 망명했고, 이복 형제가 왕위를 계승했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에게 거절당한 마아드 카리브는 호스로 1세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호스로 1세는 사령관 바흐레즈 휘하의 소규모 함대와 군대를 파견하여 예멘의 현 왕을 몰아냈다. 수도 사나를 점령한 후, 마아드 카리브의 아들 사이프가 왕위에 올랐다.[4]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예멘 아랍인들을 지원하지 않음으로써 호스로 1세는 마아드 카리브를 도울 수 있었고, 이후 예멘을 사산 제국의 한 공국으로 만들 수 있었다.[5] 570년에는 예멘 지방(아라비아 남부)으로 세력을 확대하여, 당시 이곳을 지배하던 에티오피아인을 몰아냈다.[6]
8. 4. 비잔틴 제국과의 전쟁 (572-591)
565년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사망하고 유스티누스 2세가 동로마 제국의 황제로 즉위했다. 555년, 사산 제국의 아르메니아 총독이자 호스로 1세의 친척인 치호르-비슈나스프(수렌)는 아르메니아의 수도 드빈에 불의 신전을 건설하고, 마미코니안 가문의 유력 인사를 처형했다. 이 처형은 큰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결국 572년 총독이 살해되고 드빈이 함락되는 반란으로 이어졌다.[10] 유스티누스 2세는 이 반란을 이용하여 호스로 1세에게 매년 주던 공물을 중단하고, 10년 전에 체결된 51년 평화 조약을 파기했다. 호스로 1세는 전쟁을 피하고자 세보흐트라는 기독교 외교관을 콘스탄티노플로 보내 유스티누스 2세를 설득하려 했다. 그러나 유스티누스 2세는 이를 거부하고, 동맹으로 여겼던 아르메니아인들을 돕기 위해 군대를 파견하여 같은 해에 니시비스를 포위했다.[10]한편, 호스로 1세는 골론 미흐란 휘하의 군대를 아르메니아로 보냈지만, 골론 미흐란은 타론에서 아르메니아 반란 지도자 바르단 3세 마미코니안에게 패배하고 전쟁 코끼리를 빼앗겼다. 그러나 얼마 후 골론 미흐란은 앙글을 점령했다.
573년, 호스로 1세는 아다르마한에게 군대를 주어 시리아를 침공하게 하고, 자신은 미흐란 가문의 세 명의 군 장교 이자드구샤스프, 파리부르즈, 바흐람 초빈과 함께[17] 다라로 진군하여 4개월 만에 도시를 함락시켰다. 아다르마한은 아파메아를 포함한 시리아의 여러 도시를 약탈했다.[17] 유스티누스 2세는 이 패배 이후 정신을 잃고 퇴위했다고 전해진다.
578년, 유스티누스 2세는 고위 군 장교 티베리우스에게 황제 자리를 물려주었다.[17] 호스로 1세는 유리한 상황이라 판단하여 다시 아르메니아를 침공했고, 초기에는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곧 상황이 바뀌어 비잔틴 제국이 많은 지역 지원을 얻게 되면서, 사산 제국은 다시 휴전을 시도했다. 하지만 얼마 후, 호스로 1세는 12,000명의 이란 병사와 동맹군이 보낸 8,000명의 사비르-아랍인 병사로 구성된 군대를 이끌고 시리아의 레사이나와 콘스탄티아 주변 지역을 황폐화시키며 상황을 반전시켰다.[17] 같은 시기에 호스로 1세의 주요 장군 중 한 명인 탐호스로는 테오도시오폴리스 침공을 가장하여 마우리키우스를 속이고 마르티로폴리스와 아미다의 시골을 약탈했다.[17]
그러나 새로 임명된 비잔틴 제국 최고 사령관 마우리키우스가 전장에 투입되면서 전쟁 상황은 빠르게 다시 역전되었다. 호스로 1세가 아르메니아에 사면을 내리고 그들을 다시 사산 제국으로 데려오면서 반란은 종식되었다. 평화 협상이 다시 시작되었지만, 579년 호스로 1세가 사망하면서 협상은 중단되었고,[17] 그의 아들 호르미즈드 4세가 왕위를 계승했다.
9. 종교 정책
호스로 1세는 조로아스터교 신자였지만, 유대인과 기독교인을 비롯한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을 제국의 일부로 여겼다.[11] 동방교회 지도자는 "이란의 Catholicos"(''Ērān Cathollicos'')라는 칭호를 가지고 있었다.[11]
사산 왕조의 군주들은 정치적으로 필요한 경우에만 다른 종교를 박해했다.[11] 호스로 1세는 교회를 활용하고 총대주교인 아바 1세를 좋아했지만, 아바 1세는 540년 전쟁에서 비잔틴 제국과 협력했다는 혐의를 받았다.[11] 그 결과 542년에 아바 1세는 자리에서 물러났지만 추방되는 것에 그쳤다.[11]
호스로 1세는 미흐라니드 출신의 그레고리와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하지만 그레고리가 518년 축제에서 조로아스터교를 공개적으로 거부하자, 궁정에서 그를 처벌하라는 압력이 들어왔다.[11] 호스로 1세는 그레고리를 해임하고 투옥해야 했지만, 미흐라니드 가문은 그레고리의 처형을 요구했고, 결국 그레고리는 처형되었다.[11]
호스로 1세는 조로아스터교의 정통성에 어긋나는 신념이나 관습을 가진 사람들을 가혹하게 처벌했다.[11] 의식과 원칙에서 벗어나는 것은 배교를 넘어 사회적, 정치적 악으로 여겨졌다.[11] 호스로 1세는 자서전에서 비정통적인 관행을 하는 귀족들을 처형하고, 마니교도로 추정되는 사람들을 이란에서 추방했다고 밝혔다.[11] 이는 왕실이 종교적인 문제로 정치 구조가 흔들릴 수 있다는 불안감을 가졌기 때문이었다.[11]
10. 건설
호스로 1세는 그의 긴 통치 기간 동안 다리, 도로, 댐, 성벽과 같은 많은 공공 사업을 추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18] 페르시아의 국경을 보호하기 위해 호스로는 중국 만리장성이나 잉글랜드 북부의 하드리아누스 장벽과 유사하게 그의 제국 주변에 일련의 성벽을 건설(및 요새화)했다.[18] 그는 제국의 한쪽에 건설하는 대신 네 곳에 건설했다.[18]
중세 페르시아 자료에 따르면, 호스로 1세는 카스피해 동쪽 해안에서 에프탈과 같은 유목 부족의 침략을 막기 위해 고르간 만리장성 건설을 명령했다.[18]
북서쪽에서는 데르벤트 요새를 더욱 요새화하여 알란, 투르크, 사리르, 하자르 및 기타 북쪽 이웃의 침략으로부터 이 지역을 보호했다.[19]
또 다른 성벽은 남서쪽에 건설되었으며, ''war-i tāzigān'' ("아랍의 성벽")이라고 불렸다.[18] 그는 또한 북동쪽에 또 다른 성벽인 탐미샤 성벽을 건설했을 수도 있다.[18]
방어 구조 외에도 호스로는 아소리스탄에 대규모 운하 시스템을 만들었는데, 이슬람 자료에서는 나흐라반 운하로 알려져 있다.[18] 그의 모든 건설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고 주목할 만한 업적은 크테시폰에 만든 궁전으로, 타크-에 카스라로 알려져 있다.[18]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이 궁전은 심하게 파괴되었지만, 제국의 가장 주목할 만한 건축적 업적 중 하나를 보여준다.[18]
540년 안티오키아 약탈 이후, 호스로는 포로로 잡은 주민들을 위해 크테시폰에서 남쪽으로 4km 떨어진 곳에 새로운 도시를 건설했다.[20] 그 도시는 티그리스 강 동쪽에 위치했으며, 공식적으로 ''Weh-andīōg-husraw'' ("안티오키아보다 더 나은 도시 [는] 호스로 [가 건설했다]" 또는 "호스로의 더 나은 안티오키아")로 명명되었다.[21] 그 도시는 공중 목욕탕과 경기장을 가지고 있었고, 안티오키아를 모델로 한 거리 계획이 있었다고 한다.[21] 기독교 인구에게는 종교와 매장의 자유가 주어졌다.[21] 그 도시는 비공식적으로 루마간("그리스인의 도시")으로 알려졌는데, 이후 칼리파국 시대에 아르-루미야가 되었다.[21] 그 도시의 유적은 오늘날까지도 부스탄 키스라("호스로의 정원")로 알려진 발굴되지 않은 장소에 위치해 있을 가능성이 높다.[21]
11. 주화
호스로 1세 통치 시기 사산 왕조는 부흥을 맞이하였으며, 그는 자신의 특별한 주화에 "이란인들은 두려움이 없어졌다"(''ērān abē-bēm kard''), "이란인들은 강해졌다"(''ērān abzonhēnēd'')와 같은 문구를 새겨 넣었다.[14]
12. 철인 군주
호스로 1세는 이란과 다른 지역에서 인품, 덕행, 그리스 철학 지식으로 칭송받았으며, 일부 로마인들은 그를 진정한 철인 군주로 여겼다.[22][23]
호스로 1세는 철학과 지식의 훌륭한 후원자로 알려졌다. 세르 연대기에는 관련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 황제가 529년에 아테네의 신플라톤주의 학파를 폐쇄했을 때, 호스로 1세는 동로마 제국에서 온 난민들을 받아들였다.[28] 그는 인도 철학, 과학, 수학, 의학에 큰 관심을 보였고, 여러 차례 사절단과 선물을 인도 궁정에 보내며, 궁정에서 가르칠 철학자들을 보내줄 것을 요청했다.[29] 호스로 1세는 그리스어, 산스크리트어, 시리아어 텍스트를 중세 페르시아어로 번역했다.[30] 그는 플라톤 철학에 대한 큰 관심 때문에 그리스 난민들로부터 "플라톤의 철인 군주"라는 칭호를 받았다.[31]
그리스, 이란, 인도, 아르메니아 학문 전통의 종합이 사산 제국 내에서 이루어졌다. 이 결과, 비마리스탄이라는 병리에 따라 병동을 분리하는 개념을 도입한 최초의 병원이 만들어졌다. 그리스 약리학은 이란과 인도 전통과 융합되어 의학 분야에서 상당한 발전을 이루었다.[32]
체스와 백개먼 같은 지적인 게임들은 호스로와 "인도의 위대한 왕" 사이의 외교 관계를 보여주고 기념했다. 인도 왕의 재상은 호스로 왕에게 유쾌하고 장난스러운 도전으로 체스를 발명했다. 체스 게임을 호스로에게 보낸 인도 통치자는 560/565년에 사르바바르만의 통치가 시작되어 579년에 호스로의 통치가 끝날 때까지 마우카리 왕조의 사르바바르만 칸나우지 왕이었다고 여겨진다.[25] 그 게임은 이란으로 보내질 때 다음과 같은 편지와 함께 도착했다. "왕 중의 왕이시여, 당신의 모든 제국은 당신의 현자들이 우리보다 더 현명해야 함을 의미합니다. 당신은 이 체스 게임에 대한 설명을 보내거나 수입과 공물을 보내십시오."[34] 호스로의 대재상은 수수께끼를 풀고 체스 게임 방법을 알아냈다. 이에 답하여 현명한 재상은 백개먼 게임을 만들고 같은 메시지와 함께 인도 궁정에 보냈다. 인도 왕은 수수께끼를 풀지 못하고 공물을 바쳐야 했다.[35]
호스로 1세는 군데샤푸르시에 있었던 곤디샤푸르 아카데미를 크게 확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26] 중세 페르시아어 백과사전 덴카르트는 샤푸르 1세 치세 동안 이러한 종류의 글들이 수집되어 아베스타에 추가되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리고 3세기 초 사산 왕조 궁정에서 활발한 사색과 토론이 이루어졌다는 기록이 이를 반영한다.[37]
곤디샤푸르 아카데미의 설립으로 철학, 의학, 물리학, 시, 수사학, 천문학 연구가 사산 왕조 궁정에 도입되었다.[38] 군데샤푸르는 이란과 시리아어 전통과 함께 그리스 및 인도 과학을 결합하는 중심지가 되었다. 곤디샤푸르의 교육 기관이 도입한 세계주의는 현대 연구의 촉매제가 되었다.
13. 유산
호스로 1세의 업적은 사산 제국을 중앙 집권화하고 번영을 이끌었으나, 그의 사후 귀족 세력의 반발로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지방 관리와 유력 귀족 가문들은 그들의 권력이 박탈된 것에 불만을 품었고, 호스로 1세 사후 곧바로 권력을 되찾기 시작했다.[36] 그의 치세는 이슬람 문화와 정치 생활에 큰 영향을 미쳤는데, 그의 많은 정책과 개혁은 분산된 연합에서 중앙 집권적 제국으로의 변환 과정에서 이슬람 국가에 도입되었다.[36]
호스로 1세의 치세에서 영감을 받은 상당수의 이슬람 작품들이 있으며, 자히즈의 ''타지 알 키탑''(Kitab al-Taj)이 그 예시이다. 호스로 1세의 치세를 언급하는 이슬람 텍스트가 많아 사실과 허구를 구별하기 어려울 수 있다.[36]
그의 치세 동안 고대 중국, 인도, 서방 세계 간의 실크로드가 발전되었고, 아마도 창설되었을 것이다.[37] 리처드 프라이는 호스로 1세가 비잔틴 제국 및 동쪽 에프탈과의 수많은 전쟁을 벌인 이유가 이 무역로에 사산 왕조의 지배력을 확립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한다.[36]
호스로 1세는 군디샤푸르시에 있었던 Academy of Gondishapur|군디샤푸르 아카데미영어를 창설했거나 크게 발전시킨 것으로 알려져 있다.[36] 군디샤푸르 아카데미가 창설된 것으로 철학, 의학, 자연학, 시학, 수사학, 천문학이 페르시아 궁정에 소개되었다.[38] 몇몇 역사가들의 기술에 따르면, 이 저명한 학술의 중심지는 그리스에서 온 망명자들에게 그들의 학문을 연구하고 공유할 장소를 제공하기 위해 창설되었다.[39] 군디샤푸르 아카데미는 페르시아와 아람의 전통에 더하여 그리스와 인도의 과학이 섞이는 초점이 되었다. 군디샤푸르 아카데미에 의해 소개된 코스모폴리탄의 개념은 근대 연구의 촉매가 되었다.
14. 가계도
카바드 1세 | |||||||||||||||
---|---|---|---|---|---|---|---|---|---|---|---|---|---|---|---|
colspan=4 | | ─ | ┬ | ─ | 호스로 1세 | |||||||||||
카우스 | 자마스프 | 크세르크세스 | colspan=9 | | ||||||||||||
colspan=9 style="border-top: 1px solid #aaa;" | | |||||||||||||||
colspan=9 style="border-top: 1px solid #aaa;" | | |||||||||||||||
colspan=4 | | ─ | ┬ | ─ | 아누쉬자드 | 호르미즈드 4세 | 야즈단다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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