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화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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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홍화문은 1483년 창경궁 창건 시 정문으로 세워졌다. 서거정이 이름을 지었으며,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후 광해군 때 재건되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창경원 정문으로 사용되었으며, 현재 창경궁 복원 후에도 남아있다. 조선 후기에는 상장례에 사용되었으며, 명정전의 동쪽에 위치하여 동향으로 지어졌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중층 우진각지붕 건물로, 창경궁 옥천교, 행각, 십자각, 어구, 어도 등 주변 시설과 함께 창경궁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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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화문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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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정보 | |
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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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칭 | 창경궁 홍화문 |
종류 | 보물 |
지정 번호 | 384 |
지정일 | 1963년 1월 21일 |
시대 | 조선 시대 |
소유자 | 국유(문화재청) |
관리자 | 문화재청 창경궁관리소 |
참고 |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궁궐·관아/ 궁궐 |
주소 |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경궁로 185 (와룡동, 창경궁) |
2. 역사
1483년(성종 14년) 창덕궁 옆 옛 수강궁 터에 창경궁을 지을 때 정문으로 창건되었다.[1] 이름은 당시 의정부 좌찬성이던 서거정이 지었는데, 《서경》 〈주서(周書)〉의 "貳公弘化, 寅亮天地, 弼予一人", 즉 "공의 다음이 되어 조화를 넓혀[弘化] 천지를 공경하여 밝혀서 나 한 사람을 보필한다"는 구절에서 따왔다.[2]
1592년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어 1616년(광해군 8년)에 다시 지어졌으며, 이후에도 여러 차례 수리되었다.[5]
일제강점기에는 창경궁이 창경원으로 개조될 때 홍화문은 남아있어 창경원의 정문 노릇을 했다. 창경원이 창경궁으로 복원된 후에도 현재까지 이르고 있다.
조선 후기에는 중종 때부터 상장례를 위한 문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2. 1. 창건과 중건
1483년(성종 14년), 창덕궁 옆 옛 수강궁 터에 창경궁을 지을 때 정문으로 창건되었다.[1] 이름은 당시 의정부 좌찬성이던 서거정이 지었는데, 《서경》 〈주서(周書)〉의 "貳公弘化, 寅亮天地, 弼予一人", 즉 "공의 다음이 되어 조화를 넓혀[弘化] 천지를 공경하여 밝혀서 나 한 사람을 보필한다"는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2]
약 100여 년 뒤인 1592년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어 1616년(광해군 8년)에 다시 지어졌다. 이후에도 여러 차례 수리되었다.[5]
일제강점기에는 창경궁의 다른 건물들이 철거되며 창경원으로 개조될 때 남아있어 창경원의 정문 노릇을 했다. 창경원이 이후 창경궁으로 복원된 뒤 현재에 이르고 있다.
2. 2. 일제강점기와 현재
일제강점기에 창경궁의 다른 건물들이 철거되고 창경원으로 개조될 때에도 홍화문은 남아있어 창경원의 정문 역할을 했다. 이후 창경원이 창경궁으로 복원된 뒤에도 현재까지 이르고 있다.
2. 3. 상장례와 홍화문
홍화문은 조선 후기에 상장례를 위한 문으로 많이 사용되었는데, 중종 때부터 이러한 용법이 기록되어 있다. 창경궁은 1515년(중종 10년)부터 장경왕후의 혼전을 조성할 때부터 상장례 기사에 자주 등장하기 시작한다. 1530년에는 반우(返虞)를 위한 문으로 사용되었다. 이때 정현왕후의 혼전은 문정전에 설치되었다.[4]1659년에는 효종을 영릉에 장사지내고 돌아와 봉안할 때 역시 홍화문을 거쳤다. 1720년에는 숙종의 반우행렬도 홍화문을 지났다.
3. 구조와 기능
홍화문은 명정전과 함께 동쪽을 향하고 있으며, 조선 후기에는 상장례를 위한 문으로도 많이 사용되었다. 중종 때부터 이러한 용도로 사용된 기록이 있으며,[4] 장경왕후의 혼전, 정현왕후의 혼전, 효종의 승하, 숙종의 반우 행렬 등 상장례와 관련된 기록에 자주 등장한다.[4]
3. 1. 구조
명정전이 동쪽을 바라보고 지어져 그 정문인 홍화문도 동향으로 건설되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2층 건물로, 지붕은 우진각지붕 형태이다. 공포는 내7포, 외5포이며, 상층과 하층 모두 내3출목, 외2출목이다. 기둥 길이는 14척, 보 칸은 10척씩, 도리 칸은 3칸에 각 14척씩이다. 문 안에는 금천교가 있고, 남쪽 모서리에는 영군직소 20칸이 있었다. 남북으로 행각이 있는데, 남행각은 보 칸 2칸, 도리 칸 19칸으로 총 38칸이다.[3]문 왼쪽인 서북쪽 모서리에 계단이 있어 위층으로 오르내릴 수 있다. 위층 누각에 오르면 사면 벽에 설치된 판문을 통해 사방을 조망할 수 있다. 명정전의 공포형식과 유사하다는 점에서 명정문, 명정전과 함께 광해군 때 재건되었음을 알 수 있다.
지붕은 앞에서 볼 때 사다리꼴 모양의 우진각지붕이며, 처마를 받치기 위해 만든 공포는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다. 아래층은 기둥 사이마다 2짝씩 문짝을 달아 출입하게 하였고, 위층은 마루를 깔고 앞뒤 벽면에 작은 널문들을 달아 여닫을 수 있게 하였다. 지붕 꼭대기 양끝의 조각과 부드럽게 굽어 내린 내림마루 부분의 조각상이 건물의 위엄을 더한다.[5]
창경궁, 창덕궁 등의 건물과 함께 17세기 초반 목조건축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는다.[5]
3. 2. 기능
홍화문은 조선 후기에 상장례를 위한 문으로 많이 사용되었는데, 중종 때부터 이러한 용법이 기록되어 있다.[4] 창경궁은 1515년(중종 10년) 장경왕후의 혼전을 조성할 때부터 상장례 기사에 자주 등장한다. 1530년에는 반우(返虞)를 위한 문으로 사용되었다. 이 때 정현왕후의 혼전은 문정전에 설치되었다.[4]1659년에는 효종을 영릉에 장사지내고 돌아와 봉안할 때 역시 홍화문을 거쳤다.[4] 1720년에는 숙종의 반우행렬도 홍화문을 지났다.[4]
4. 홍화문 권역
4. 1. 주변 시설
홍화문의 좌측에는 수문장청이, 우측에는 훈군군번소가 있었다. 홍화문과 명정문 사이에는 금천이 흐르는데, 그 위에 창경궁 옥천교가 놓여 있다. 옥천교의 이름 역시 서거정이 지은 것이다. 홍화문의 좌우로 놓여 있는 외행각 중 북측 변에 놓여있는 행각에는 금천을 기준으로 서측에는 숭지문(崇智門)이, 동측에는 광덕문(光德門)이 놓여 있다. 홍화문으로 들어가 옥천교를 건너 명정문을 지나면 명정전으로 바로 이어진다.4. 2. 옥천교
옥천교는 창경궁의 금천을 건너는 다리로, 명정문과 홍화문 사이의 길을 이어주는 역할을 한다. 대한민국의 보물로 등재되어 있다.4. 3. 행각과 십자각
홍화문 행각은 복도 형태인 복랑(複廊)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초익공계 양식으로 지어졌다. 행각은 문보다 키가 낮아 기단을 네 벌대 장대석으로 쌓았다.홍화문 행각에는 다른 궁들과는 달리 십자각이 있다. 남쪽에 있는 것을 남십자각이라 하고, 북쪽에 있는 것을 북십자각이라 한다. 십자각은 중앙 기둥 한 개와 평기둥 8개, 총 9개의 기둥으로 받치고 있다.[2]
4. 4. 어구와 어도
금천이 흐르는 길을 어구(御構)라 한다. 어구의 폭은 대략 4.5m로, 동측에 2단, 서측에 4단의 석축을 쌓았다.[2] 홍화문에서 명정전으로 향하는 왕의 길인 어도(御道)는 총 82.97m로, 홍화문에서 옥천교까지 12.27m, 옥천교에서 명정문까지 21m, 나머지는 명정전까지의 길이이다. 경계석을 통해 양측의 내로(來路)와 가운데의 주로(主路)로 구분하였다.[2]참조
[1]
문서
수강궁
[2]
서적
창경궁 홍화문 정밀실측보고서
문화재청
2011-06-23
[3]
서적
궁궐지
[4]
실록
중종실록 69권, 중종 25년 9월 13일 기해 1번째기사
[5]
웹인용
홍화문
http://www.cha.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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