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이티 포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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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화이티 포드는 1950년부터 1967년까지 뉴욕 양키스에서 활약한 미국의 야구 선수이다. 좌완 투수로, 통산 236승을 기록했으며, 1961년에는 사이 영 상과 월드 시리즈 MVP를 수상했다. 월드 시리즈에서 최다승(10승) 기록을 보유하고 있으며, 1974년에는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은퇴 후에는 코치로 활동했으며, 2020년 9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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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티 포드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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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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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에드워드 포드 |
별칭 | 위원회 의장 새로운 사탕 |
선수 정보 | |
포지션 | 투수 |
투구/타석 | 좌투좌타 |
데뷔 | MLB / 1950년 7월 1일 |
마지막 경기 | MLB / 1967년 5월 21일 |
경력 | |
소속 팀 | 뉴욕 양키스 (1950년, 1953년–1967년) |
수상 및 업적 | |
올스타 선정 | 10회 (1954년–1956년, 1958년, 1959년, 1960년–1961년², 1964년) |
월드 시리즈 우승 | 6회 (1950년, 1953년, 1956년, 1958년, 1961년, 1962년) |
사이 영 상 | 1961년 |
월드 시리즈 MVP | 1961년 |
AL 승리 1위 | 3회 (1955년, 1961년, 1963년) |
MLB 평균자책점 1위 | 2회 (1956년, 1958년) |
영구 결번 | 뉴욕 양키스 No. 16 |
명예의 전당 헌액 년도 | 1974년 |
명예의 전당 투표율 | 77.8% (2차 투표) |
개인 정보 | |
출생일 | 1928년 10월 21일 |
출생지 | 미국 뉴욕 맨해튼 |
사망일 | 2020년 10월 8일 (91세) |
사망지 | 미국 뉴욕 레이크 석세스 |
통계 | |
승패 기록 | 236승 106패 |
평균자책점 | 2.75 |
탈삼진 | 1,956 |
외부 링크 | |
MLB.com | 화이티 포드, '위원회 의장', 사망 |
Retrosheet | 화이티 포드 |
야구 명예의 전당 | 1970–1979 야구 명예의 전당 1974년 헌액 |
뉴욕 타임즈 | 화이티 포드, 6회 우승 챔피언, 가장 위대한 생존 양키라는 타이틀 추가 가능 |
Baseball-Reference.com | 뉴욕 양키스 상위 10 투수 |
Baseball-Reference.com (포스트시즌) | 역대 및 단일 시즌 월드 시리즈 투수 리더 |
2. 생애 초기
에드워드 찰스 "화이티" 포드는 뉴욕 맨해튼에서 태어났다.[5] 5세 때 브롱스에 있는 양키 스타디움에서 몇 마일 떨어진 트라이보로 브리지 근처 퀸스의 애스토리아로 이사했다.[5] 그는 공립 학교를 다녔고, 퀸스의 서니사이드 근처에 있는 애비에이션 고등학교를 졸업했다.[6]
뉴욕 출신으로 1947년 뉴욕 양키스와 계약하며 프로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케이시 스텡걸 감독의 기대를 받으며[50] 1950년 7월 1일 메이저 리그에 데뷔하여 등번호 19번을 달고[51] 첫 시즌부터 9연승을 거두는 등 인상적인 활약을 펼쳤고, 신인왕 투표 2위에 올랐다.
1947년 뉴욕 양키스와 아마추어 자유계약선수로 계약을 맺었다. 마이너 리그에 머무는 동안 유난히 눈에 띄는 금발 때문에 '화이티'(Whitey)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53] 케이시 스텡걸 감독에게 높이 평가받아[50], 1950년 7월 1일에 등번호 19번[51]을 달고 메이저 리그에 데뷔했다. 데뷔전은 중간 계투 등판이었으나, 세 번째 등판에서 첫 승리를 거둔 이후 9연승을 기록했다. 이러한 활약 덕분에 신인임에도 MVP 투표에서 득표를 했고, 스포팅 뉴스가 올해의 신인으로 선정했다. 전미기자협회 선정 신인왕 투표에서는 월트 드로포에 이어 2위를 기록했다.
1951년 애스토리아의 성 패트릭 가톨릭 교회에서 조안과 결혼했으며,[7] 그들은 1950년대에 한동안 롱아일랜드의 글렌 코브에서 살며 슬하에 두 아들과 딸 하나를 두었다.[8]
1951년부터 1952년까지 한국 전쟁에 참전했으며, 통신병으로 복무 중 전봇대에서 떨어지는 사고를 당해 선수 생명이 위태로울 정도의 부상을 입었다. 하지만 헌신적인 재활 끝에 1953년 팀에 복귀했다.[50] 복귀 후 앨리 레이놀즈, 빅 래씨, 에디 로팟과 함께 양키스의 '빅 4' 선발진의 일원이 되었다.
3. 프로 선수 시절
그러나 1951년부터 1952년까지는 한국 전쟁에 통신병으로 참전해야 했다. 복무 중 전봇대 추락 사고로 선수 생명이 위태로울 정도의 부상을 입었으나, 재활을 거쳐 1953년 팀에 복귀했다[50]. 복귀 후 18승 6패를 기록하며 성공적으로 재기했다.
이후 포드는 양키스의 에이스 투수로 자리매김하며 팀의 황금기를 이끌었다. 1955년 다승왕을 시작으로, 1956년과 1958년에는 최우수 평균자책점, 1961년과 1963년에는 다시 다승왕 타이틀을 차지하는 등 꾸준히 리그 정상급 투수로 활약했다. 특히 1961년에는 25승 4패의 뛰어난 성적으로 사이 영 상을 수상했으며, 월드 시리즈에서는 베이브 루스의 기록을 넘어선 33⅔이닝 연속 무실점 신기록을 세우고 시리즈 MVP에 선정되었다.
1967년 현역에서 은퇴한 포드는 1974년 팀 동료였던 미키 맨틀과 함께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같은 해, 그가 사용했던 등번호 '''16'''번은 뉴욕 양키스의 영구 결번으로 지정되었다.
2020년 10월 8일, 롱아일랜드 자택에서 2020년 아메리칸 리그 지구 시리즈 제4차전을 관전하던 중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9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52]. 그의 부고 소식을 접한 양키스 구단은 다음 날 지구 시리즈 제5차전에서 유니폼 소매에 "16" 패치를 부착하고 경기에 나서며 고인을 추모했다.
3. 1. 마이너 리그와 메이저 리그 데뷔
1947년 뉴욕 양키스와 아마추어 자유계약선수로 계약을 맺었다. 마이너 리그 시절, 유난히 밝은 금발 머리 때문에 '화이티'(Whitey)라는 별명을 얻었다.[53][9]
1950년 7월 1일 뉴욕 양키스 소속으로 메이저 리그에 데뷔했으며,[51] 데뷔 시즌 등번호는 19번이었다.[13] 그는 데뷔 후 첫 패배를 당하기 전까지 9연승을 거두는 인상적인 활약을 펼쳤다. 이러한 활약으로 단 112 이닝만 던졌음에도 최우수 선수(MVP) 투표에서 득표했으며, ''스포팅 뉴스'' 올해의 신인으로 선정되었다.[10] 전미야구기자협회(BBWAA)가 선정한 신인왕은 월트 드로포에게 돌아갔다.
3. 2. 한국 전쟁 참전과 복귀
한국 전쟁 시기인 1951년과 1952년, 포드는 미국 육군에 징집되어 복무했다.[11] 그는 통신병으로 복무하던 중 전봇대에서 작업하다 추락하는 사고를 당해 선수 생명에 위협을 받기도 했으나, 재활을 거쳐 1953년 시즌 뉴욕 양키스에 복귀했다.[50] 복귀 후 포드는 기존의 앨리 레이놀즈, 빅 라시, 에디 로파트와 함께 양키스의 강력한 선발 투수진을 이루며, 이들은 '빅 4'로 불리게 되었다.[42][12] 포드는 신인 시절 등번호 19번을 사용했지만,[13] 군 복무 후 복귀하면서 등번호를 16번으로 변경했고, 이 번호는 그의 은퇴까지 함께했다.[14]
3. 3. 양키스의 에이스로 활약
막강한 투수진을 갖춘 뉴욕 양키스에서 처음에는 4선발 투수로 시작했으나, 점차 팀의 확실한 에이스 투수로 성장했다.[42][12] 그는 어떤 위기 상황에서도 마운드 위에서 침착함과 제구력을 잃지 않는 능력 덕분에 '이사회 의장'(Chairman of the Board)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또한, 당시 양키스 감독이었던 케이시 스텡걸이 포드와 그의 친구들인 빌리 마틴, 미키 맨틀을 함께 묶어 '위스키 슬릭'(Whiskey Slicks)이라고 부른 데서 유래한 '뺀질이'(Slick)라는 별명으로도 알려졌다.
포드는 타자를 압도하는 강속구를 가지지는 못했지만, 다양한 구종과 정밀한 제구력을 바탕으로 기교적인 투구를 펼쳤다. 좌완 투수로서 주자를 베이스에 묶어두는 견제 능력도 뛰어났다. 뉴욕 자이언츠의 에이스 샐 매글리는 포드가 자신과 비슷한 스타일이라며 "좋은 커브, 좋은 제구력, 체인지업, 그리고 가끔씩 던지는 위장 강속구"를 가졌다고 평가했다.[15] 뛰어난 탈삼진 능력을 갖추지는 않았다는 평가도 있지만, 1956년과 1958년에는 각각 6타자 연속 탈삼진을 기록하며 당시 아메리칸 리그 기록과 타이를 이루기도 했다. 1955년에는 2경기 연속 1안타 완투 경기를 펼치기도 했으나, 노히트 노런 경기는 기록하지 못했다.
그의 주요 수상 경력 및 리그 1위 기록은 다음과 같다.
연도 | 주요 성과 |
---|---|
1955년 | 아메리칸 리그 완투 1위, 다승 1위 |
1956년 | 아메리칸 리그 평균자책점 1위, 승률 1위 |
1958년 | 아메리칸 리그 평균자책점 1위 |
1961년 | 아메리칸 리그 다승 1위, 승률 1위, 사이 영 상 수상 |
1963년 | 아메리칸 리그 다승 1위, 승률 1위 |
1963년에도 뛰어난 성적을 거두었으나, 당시에는 양대 리그를 통합하여 사이 영 상 수상자를 선정했기 때문에 내셔널 리그의 샌디 쿠팩스에게 밀려 수상하지 못했다.[16]
포드의 통산 승수는 236승으로, 양키스의 강력한 타선을 고려할 때 압도적인 기록은 아닐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선수 생활 동안의 여러 요인을 고려해야 한다. 먼저 한국 전쟁 참전으로 인해 2시즌(1951-1952)을 뛰지 못했다.[11] 군 입대 전인 1950년의 높은 승률과 복귀 첫해인 1953년의 18승을 고려하면, 공백기가 없었다면 더 많은 승수를 기록했을 가능성이 있다.
더 중요한 것은 케이시 스텡걸 감독의 독특한 기용 방식이다. 스텡걸은 포드를 팀 내 최고의 투수로 여겼지만, 그를 정규 로테이션에 따라 등판시키기보다는 클리블랜드 인디언스나 화이트삭스와 같은 강팀과의 경기에 주로 투입했다. 이로 인해 포드는 다른 투수들보다 어려운 상대를 자주 만났고 등판 기회도 상대적으로 적었다.[54][16] 스텡걸의 후임으로 랠프 후크 감독이 부임한 1961년, 후크는 포드를 상대 팀에 관계없이 4일 로테이션에 맞춰 규칙적으로 등판시키겠다고 약속했다. 그 결과, 스텡걸 감독 아래에서는 9시즌 동안 한 번도 30선발 등판을 넘지 못했던 포드가 1961년에는 39경기에 등판하여 25승 4패라는 개인 통산 최고 성적을 기록하며 사이 영 상을 수상했다. 하지만 이 해는 팀 동료 로저 메리스와 미키 맨틀의 베이브 루스의 단일 시즌 홈런 기록 경신 경쟁이 큰 화제를 모았기 때문에 포드의 뛰어난 성적은 상대적으로 덜 주목받았다. 1961년에 포드가 세운 또 다른 주목할 만한 기록은 243이닝 연속 도루 허용이 없었다는 것인데, 이는 그의 뛰어난 주자 견제 능력을 보여준다.[16]
테드 윌리엄스는 포드를 "내가 상대했던 투수 중 손에 꼽힐 정도로 훌륭했다. 투구 조합이 좋아서 잡아당기기조차 힘들었다. 내가 그에게서 뽑아낸 안타는 모두 밀어친 것뿐이다. 실투가 없어서 정말 고생했다"고 평가했다[50] . 포드의 주무기는 커브였으며, 체인지업, 싱커, 슬라이더 등 다양한 구종을 구사한 기교파 투수였다. 그의 통산 승률 .690은 200승 이상을 기록한 20세기 투수 중 가장 높다.
포드는 선수 생활 말년에 구위 저하를 극복하기 위해 부정투구를 했다고 자서전에서 고백했다. 그는 "선수 생활 후반기에 나이가 들면서 살아남기 위해 속임수를 쓰기 시작했다"고 말하며, 1961년과 1963년의 뛰어난 성적은 부정투구 없이 이룬 것이라고 강조했다.[55][7] 은퇴 후 인터뷰에서는 때때로 공을 조작했음을 인정하기도 했다.[16][50]
3. 4. 수상 경력 및 통산 성적
포드는 뉴욕 양키스에서만 통산 236승(227선발승) 106패를 기록했으며, 이는 팀 역사상 최다승 기록이다. 레드 러핑이 통산 273승을 거두었지만 양키스 소속으로는 231승에 그쳤고, 로저 클레멘스 등 더 많은 승수를 기록한 투수들도 있지만 여러 팀을 거친 기록이므로, 순수하게 양키스에서만 활동한 투수 중에서는 포드가 최다승 투수이다.[19]통산 승패 기록이 300 이상인 투수들 중에서 포드의 승률 .690은 현대 야구 역사상 데이브 푸츠와 함께 역대 4위에 해당한다.[20] 그의 높은 승률은 단순히 강팀 양키스 소속이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포드가 활동한 16년 동안 양키스는 1,486승 1,027패(승률 .591)를 기록했는데, 포드의 기록(236승 106패, 승률 .690)을 제외하면 팀 승률은 .576으로, 포드의 개인 승률이 팀 평균보다 11.4% 포인트나 높다. 이는 팀의 덕을 보았다고 할 수 있지만, 그의 뛰어난 능력을 부인할 수 없는 증거이다.
포드의 통산 평균자책점 2.75는 1920년 라이브 볼 시대 이후 선수 경력을 시작한 선발 투수 중 역대 3번째로 낮은 기록이다. 2023년 기준으로 클레이튼 커쇼(2.48)와 제이콥 디그롬(2.53)만이 그보다 낮은 평균자책점을 기록했다.[21] 포드가 기록한 시즌 최악의 평균자책점도 3.24에 불과할 정도로 꾸준한 성적을 유지했다.[16] 또한 통산 45번의 완봉승을 거두었는데,[14] 이 중 8번은 1-0 승리였다.[16]
타자로서 포드는 통산 .173의 타율(1,023타수 177안타)을 기록했으며, 91 득점, 3홈런, 69 타점, 113 볼넷을 기록했다. 월드 시리즈 22경기에서는 타율 .082(49타수 4안타)에 4득점, 3타점, 7볼넷을 기록했다. 수비에서는 .961의 수비율을 기록했다.[14]
- '''주요 수상 경력'''
- 다승왕 3회: 1955년, 1961년, 1963년
- 최우수 평균자책점 2회: 1956년, 1958년
- 사이 영 상 1회: 1961년
- 월드 시리즈 MVP 1회: 1961년
- 베이브 루스 상 1회: 1961년
- MLB 올스타전 선출 8회: 1954년 - 1956년, 1958년 - 1961년, 1964년
- '''통산 성적'''
연도 | 나이 | 팀 | 리그 | 승 | 패 | 승률 | 평균 자책 | 선발 | 구원 | 완투 | 완봉 | 세이브 | 이닝 | 실점 | 자책점 | 피홈런 | 볼넷 | 탈삼진 | WHIP |
---|---|---|---|---|---|---|---|---|---|---|---|---|---|---|---|---|---|---|---|
1950 | 21 | 양키스 | AL | 9 | 1 | 0.900 | 2.810 | 12 | 5 | 7 | 2 | 1 | 112 | 39 | 35 | 7 | 52 | 59 | 1.241 |
1953 | 24 | AL | 18 | 6 | 0.750 | 3.000 | 30 | 2 | 11 | 3 | 0 | 207 | 77 | 69 | 13 | 110 | 110 | 1.435 | |
1954 | 25 | AL | 16 | 8 | 0.667 | 2.820 | 28 | 4 | 11 | 3 | 1 | 210 | 72 | 66 | 10 | 101 | 125 | 1.286 | |
1955 | 26 | AL | 18 | 7 | 0.720 | 2.630 | 33 | 4 | 18 | 5 | 2 | 253 | 83 | 74 | 20 | 113 | 137 | 1.187 | |
1956 | 27 | AL | 19 | 6 | .760 | 2.470 | 30 | 1 | 18 | 2 | 1 | 225 | 70 | 62 | 13 | 84 | 141 | 1.201 | |
1957 | 28 | AL | 11 | 5 | 0.688 | 2.570 | 17 | 2 | 5 | 0 | 0 | 129 | 46 | 37 | 10 | 53 | 84 | 1.291 | |
1958 | 29 | AL | 14 | 7 | 0.667 | 2.010 | 29 | 1 | 15 | 7 | 1 | 219 | 62 | 49 | 14 | 62 | 145 | 1.076 | |
1959 | 30 | AL | 16 | 10 | 0.615 | 3.040 | 29 | 4 | 9 | 2 | 1 | 204 | 82 | 69 | 13 | 89 | 114 | 1.387 | |
1960 | 31 | AL | 12 | 9 | 0.571 | 3.080 | 29 | 1 | 8 | 4 | 0 | 192 | 76 | 66 | 15 | 65 | 85 | 1.209 | |
1961 | 32 | AL | 25 | 4 | .862 | 3.210 | 39 | 0 | 11 | 3 | 0 | 283 | 108 | 101 | 23 | 92 | 209 | 1.180 | |
1962 | 33 | AL | 17 | 8 | 0.680 | 2.900 | 37 | 0 | 7 | 0 | 0 | 257 | 90 | 83 | 22 | 69 | 160 | 1.211 | |
1963 | 34 | AL | 24 | 7 | .774 | 2.740 | 37 | 1 | 13 | 3 | 1 | 269 | 94 | 82 | 26 | 56 | 189 | 1.099 | |
1964 | 35 | AL | 17 | 6 | 0.739 | 2.130 | 36 | 2 | 12 | 8 | 1 | 244 | 67 | 58 | 10 | 57 | 172 | 1.099 | |
1965 | 36 | AL | 16 | 13 | 0.552 | 3.240 | 36 | 1 | 9 | 2 | 1 | 244 | 97 | 88 | 22 | 50 | 162 | 1.191 | |
1966 | 37 | AL | 2 | 5 | 0.286 | 2.470 | 9 | 7 | 0 | 0 | 0 | 73 | 33 | 20 | 8 | 24 | 43 | 1.411 | |
1967 | 38 | AL | 2 | 4 | 0.333 | 1.640 | 7 | 0 | 2 | 1 | 0 | 44 | 11 | 8 | 2 | 9 | 21 | 1.114 | |
통산: 16년 | 236 | 106 | 0.690 | 2.750 | 438 | 35 | 156 | 45 | 10 | 3,170 | 1,107 | 967 | 228 | 1,086 | 1,956 | 1.215 |
- 각 연도의 '''굵은 글씨'''는 리그 최고 기록.
3. 5. 부정 투구 논란
포드는 선수 생활 말년에 부정 투구를 했다고 자서전과 인터뷰 등에서 인정했다. 그는 나이가 들면서 쇠퇴하는 기량을 보완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부정 투구를 했다고 변명했다.[55]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살아남기 위해 무언가가 필요했던 선수 경력 후반에 이르러서야 속이기 시작했다. 나는 1961년에 25승을 거둘 때는 속이지 않았다. 아무도 내 사이 영 상을 가져갈 생각을 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리고 1963년에 24승을 거뒀을 때도 속이지 않았다. 음, 어쩌면 조금은 그랬을지도.[7]
포드가 사용한 부정 투구 방법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었다.
- 머드볼: 양키 스타디움 홈구장에서 구장 관리인이 포수 엘스턴 하워드 근처의 땅을 미리 적셔 놓으면, 하워드가 균형을 잃은 척하며 공을 든 손으로 땅을 짚어 공의 한 면에 진흙을 묻힌 뒤 포드에게 던져주는 방식이었다.[16]
- 볼 스커핑: 공에 흠집을 내는 행위로, 때로는 자신의 결혼반지에 박힌 다이아몬드를 이용하기도 했으나 심판에게 발각되어 중단하라는 경고를 받았다. 또한, 포수 하워드는 자신의 정강이 보호대 버클을 날카롭게 갈아 공을 긁는 데 사용하기도 했다.[16]
포드는 1961년 캔들스틱 파크에서 열린 올스타전에서 윌리 메이스를 삼진으로 잡기 위해 스핏볼을 던졌다고 인정하기도 했다. 이는 당시 자이언츠 구단주였던 호레이스 스톤햄이 포드와 미키 맨틀이 컨트리 클럽 골프 프로 샵에서 구매한 1200USD 상당의 비용을, 포드가 메이스를 삼진으로 잡는다면 대신 지불해주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이었다. 경기 후 메이스가 무슨 공이었냐고 묻자 포드는 "미안, 윌리, 하지만 너에게 스핏볼을 던져야 했어"라고 답했다고 한다.[18]
4. 월드시리즈
포드는 특히 월드 시리즈 무대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 그는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역사상 다른 어떤 투수보다 많은 월드 시리즈 10승을 거두었다. 이와 함께 최다패(8패), 최다 선발 등판(22회), 최다 이닝, 최다 피안타, 최다 볼넷, 최다 탈삼진 등 월드 시리즈의 다양한 투수 기록 역시 포드의 이름으로 남아 있다.[22]
포드는 1955년부터 1958년, 그리고 1961년부터 1964년까지 두 차례에 걸쳐 4년 연속으로 월드 시리즈 1차전 선발 투수로 나서는 진기록을 세웠다. 이는 팀의 강력한 전력과 포드 개인의 뛰어난 기량이 결합된 결과로, 다시 나오기 어려운 대기록으로 평가받는다.
1960년 피츠버그 파이리츠와의 월드 시리즈에서는 당시 감독이었던 케이시 스텡걸이 포드를 3차전 선발로 아껴두는 전략을 사용했다. 포드는 이러한 결정에 불만을 품었으나, 등판한 3차전과 6차전에서 모두 완봉승을 거두며 실력을 입증했다. 만약 포드가 1차전부터 등판했다면 1905년 크리스티 매슈슨이 세운 월드 시리즈 3완봉승 기록에 도전할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남기도 했다. 또한 이 결정으로 인해 포드의 5년 연속 월드 시리즈 1차전 선발 등판 기록도 무산되었다. 이 시리즈는 7차전에서 빌 매저로스키의 끝내기 홈런으로 피츠버그 파이리츠의 승리로 막을 내렸고, 시리즈 종료 후 스텡걸 감독은 해임되고 랠프 후크가 새로운 감독으로 부임했다.
1961년 월드 시리즈에서는 베이브 루스가 가지고 있던 월드 시리즈 연속 이닝 무실점 기록(29⅔이닝)을 경신했다. 포드는 이 기록을 33⅔이닝까지 늘렸으나, 이후 MLB는 포드가 마지막 이닝을 채우지 못하고 실점했다는 이유로 공식 기록을 33이닝으로 조정했다. 이 기록은 2000년 같은 팀의 마리아노 리베라가 포스트시즌 연속 이닝 무실점 기록을 경신하기 전까지 약 40년간 깨지지 않았으며, 월드 시리즈 기록으로는 여전히 최고 기록으로 남아있다.[22] 포드는 1961년 신시내티 레즈를 상대로 월드 시리즈 2경기에 선발 등판하여 14이닝 무실점 호투를 펼쳤고, 월드 시리즈 MVP로 선정되었다.[14]
포드는 홈 구장인 양키 스타디움 외에도 다음과 같은 7개의 다른 구장에서 월드 시리즈 등판 기록을 가지고 있다.
구장 | 연도 | 상대 팀 |
---|---|---|
에벳 필드 | 1953년, 1956년 | 브루클린 다저스 |
밀워키 카운티 스타디움 | 1957년, 1958년 | 밀워키 브레이브스 |
포브스 필드 | 1960년 | 피츠버그 파이리츠 |
크로슬리 필드 | 1961년 | 신시내티 레즈 |
캔들스틱 파크 | 1962년 |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
다저 스타디움 | 1963년 | LA 다저스 |
스포츠맨스 파크 | 1964년 |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
5. 은퇴 이후
1966년 8월 심혈관계 문제로 수술을 받은 포드는 더 이상 투구가 어렵다고 판단하여 선수 생활을 마감하기로 결정했다. 1967년 5월, 마지막 경기에 선발 등판하여 1이닝만 소화한 뒤, 같은 달 말 38세의 나이로 은퇴를 선언했다. 선수 생활 초기에 등번호 19번을 사용했으나, 한국 전쟁 참전 후 복귀한 1953년부터는 16번으로 바꿔 은퇴할 때까지 사용했다. 그가 사용했던 등번호 16번은 이후 드와이트 구든 등[56] 여러 투수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은퇴 후에도 포드는 야구계와 인연을 이어갔다. 1964년 시즌 동안 양키스의 투수 코치를 맡았고,[31] 1968년에는 1루 베이스 코치로 활동했으며,[32] 1974년과 1975년에는 다시 투수 코치직을 수행했다.[33][34]
1974년, 포드는 팀 동료이자 친구였던 미키 맨틀과 함께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고,[23] 뉴욕 양키스는 이를 기념하여 그의 등번호 16번을 영구 결번으로 지정했다.[24] 1984년에는 롱아일랜드 스포츠 명예의 전당에도 이름을 올렸다.[25]
1987년 8월 2일, 양키스는 양키 스타디움의 모뉴먼트 파크에 포드와 또 다른 전설적인 좌완 투수 레프티 고메즈를 기리는 명판을 헌정했다.[26]
1999년, 포드는 ''스포팅 뉴스''가 선정한 '역대 최고의 야구 선수 100인' 중 52위에 선정되었고,[27] 같은 해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올-센추리 팀 후보에도 올랐다.[28] 2003년에는 뉴욕주 나쏘 카운티 스포츠 명예의 전당에도 헌액되었다.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그의 이름을 딴 장소들도 생겨났다. 1994년 캐나다 온타리오주 미시소거의 한 도로는 그의 이름을 따 '포드 로드(Ford Road)'로 명명되었다. 이 지역은 여러 거리가 명예의 전당 선수들의 이름으로 지어져 "야구 구역"으로 알려져 있다.[29] 2000년에는 뉴욕주 퀸스 아스토리아의 이스트 강변 야구장이 양키 스타디움 행사에서 '화이티 포드 필드(Whitey Ford Field)'로 공식 명명되었다.[30]
1977년, 포드는 토론토 블루 제이스의 창단 첫 경기 방송팀에 합류했으며,[35] 같은 해 새로 출범한 남자 프로 소프트볼 리그(APSPL)의 커미셔너로 활동하기도 했다.[37][38] 2002년에는 뉴욕주 가든 시티에 스포츠 테마 레스토랑 '화이티 포드의 카페'를 열었으나,[39] 1년이 채 되지 않아 문을 닫았다.[40][41]
2008년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올스타전에서는 시구를 맡았고,[36] 같은 해 11월 21일에는 옛 양키 스타디움의 마지막을 기념하는 행사에 요기 베라와 함께 특별 손님으로 참여했다.
포드는 말년에도 롱아일랜드와 플로리다의 자택을 오가며 생활했다.[4] 2020년 10월 8일, 92번째 생일을 약 2주 앞두고 롱아일랜드의 레이크 석세스 자택에서 9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2020년 아메리칸 리그 디비전 시리즈 4차전을 TV로 시청하던 중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영면했다.[42] 사망 원인은 공식 발표되지 않았으나, 수년간 치매를 앓아온 것으로 알려졌다.[42][43] 사망 당시 그는 토미 라소다에 이어 생존한 명예의 전당 헌액자 중 두 번째로 나이가 많았으며,[42] 1956년 월드 시리즈 우승팀 뉴욕 양키스의 마지막 생존 멤버였다.
6. 사망
2020년 10월 8일, 92번째 생일을 13일 앞둔 91세의 나이로 롱아일랜드의 레이크 석세스 자택에서 사망했다.[42] 사망 당시 그는 텔레비전으로 2020년 아메리칸 리그 디비전 시리즈 4차전을 시청하고 있었으며, 가족들이 곁에 있었다.[42] 사망 원인은 즉시 발표되지 않았지만, 수년 동안 치매를 앓고 있었다.[42][43]
그가 사망했을 당시, 그는 토미 라소다에 이어 명예의 전당 생존자 중 두 번째로 나이가 많은 사람이었다.[42] 그는 1956년 월드 챔피언 뉴욕 양키스의 마지막 생존 멤버였다. 포드의 부고를 접한 양키스는 다음 날 지구 시리즈 제5차전에서 유니폼 소매에 그의 등번호 "16" 패치를 부착하고 경기에 임했다.[52]
7. 그 외
- 1984년, 포드는 미키 맨틀과 함께 피어스 브로스넌 주연의 TV 시리즈 ''레밍턴 스틸''의 한 에피소드에 카메오로 출연했다.[44]
- 1997년 방영된 심슨 가족 에피소드 "마지 심슨의 뒤틀린 세상"에서는 포드가 야구 경기 중 관중이 던진 프레첼에 맞아 쓰러지는 모습이 묘사되었다. 이후 호머 심슨은 아내 마지에게 프레첼을 "화이티 와커(Whitey Whacker)"라고 부르자고 제안한다.
- 1998년, 그래미상 수상자인 음악가 에버라스트는 ''화이티 포드 씽스 더 블루스''라는 제목의 음반을 발매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으며, "화이티 포드"를 자신의 예명으로 사용하기도 했다.[45]
- 로저 메리스와 미키 맨틀이 1961년 베이브 루스의 단일 시즌 홈런 기록 경신 경쟁을 벌인 이야기를 다룬 HBO 영화 ''61*'' (2001)에서는 배우 앤서니 마이클 홀이 포드를 연기했다. 이 영화는 빌리 크리스탈이 감독했다.[46]
- 포드는 야구 선수들을 지원하는 단체인 Baseball Assistance Team에서 자문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 포드는 로버트 핀스키의 시 "더 나이트 게임"에서 명예의 전당 투수 샌디 쿠팩스와 함께 중심 인물 중 한 명으로 등장한다.[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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