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황고둔 사건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황고둔 사건은 1928년 6월 4일, 만주로 철수하던 펑톈 군벌의 수장 장쭤린이 탑승한 열차가 관동군에 의해 폭파된 사건이다. 일본 관동군은 장쭤린을 제거하고 친일 괴뢰 정권을 수립하려 암살을 계획했으나, 사건은 국제 사회의 비난을 받고 일본의 외교적 고립을 초래했다. 장쭤린의 아들 장쉐량은 국민정부에 합류하여 일본에 대한 저항 의지를 보였고, 이 사건은 만주 사변과 만주국 건국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이 사건은 한국 독립운동에도 영향을 미쳤으며, 현재까지도 진상 규명과 역사적 평가에 대한 논란이 지속되고 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1928년 6월 - 1928년 6월 17일 일식
    1928년 6월 17일 일식은 부분 일식으로, 여러 주기적 현상과 연관되어 과거의 일식들과 유사한 경로로 관측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 중국의 철도 사고 - 2011년 원저우 철도 추돌 탈선 사고
    2011년 원저우 철도 추돌 탈선 사고는 낙뢰로 정차한 고속철 열차를 후속 열차가 덮쳐 발생한 중국 저장성의 철도 사고로, 안전 문제와 언론 통제 시도로 사회적 파장을 일으키고 중국 고속철도 정책과 기술 수출에 영향을 미쳤다.
황고둔 사건
사건 개요
이름황고둔 사건
원어 이름중국어: 皇姑屯事件 (Huánggū Tún Shìjiàn)
일본어: 張作霖爆殺事件 (Chōsakurin bakusatsu jiken), 満州某重大事件 (Manshu bou judai jiken)
사건 종류암살
발생 시간오전 5시 23분
시간대UTC+08:00
발생 날짜1928년 6월 4일
발생 장소중화민국 랴오닝성선양시 황고둔역 인근 철교
원인폭탄
동기만주에 친일 지도자 옹립 시도
목표장쭤린
주최자간토군의 고모토 다이사쿠 대좌
가담자도미야 가네오 대위, 후지이 사다토시 중위
결과장쭤린 사망, 중국 동북부 불안정화 실패
피해
사망자장쭤린, 우쥔성
부상자장징후이, 모더후이, 류저, 위궈한
가해자
입안가와모토 다이사쿠, 하타 신지, 도이하라 겐지, 무라오카 초타로
실행도미야 데쓰오, 간다 야스노스케, 기리하라 사다토시
소속간토군
동기만주에서의 일본의 권익 확보
여파
영향다나카 기이치 내각 총사퇴, 장쉐량의 동북역치
기타 정보
표적장쭤린
사용 수단황색 화약 (일설에는 흑색 화약)
관여 인원최소 8명
희생자 수20명
부상자 수53명
관련자진전차

2. 배경

1911년 신해혁명 이후 중국은 중앙 정부의 통제력이 약화되고 각지의 군벌들이 권력을 장악하는 혼란기를 겪었다. 중국 북부에서는 베이양 군벌이 여러 파벌로 분열되었고, 그중 펑톈 군벌의 지도자 장쭤린이 가장 강력한 세력으로 떠올랐다.[1]

1924년 제1차 국공합작 당시 중국에 대한 외세의 지원은 다음과 같이 분열되어 있었다.

세력지원국
펑톈 군벌일본
즈리 군벌유럽미국
중국 국민당소련



일본은 러일 전쟁 이후 만주 지역에 경제적, 정치적 이익을 가지고 있었고, 관동주에 주둔한 관동군을 통해 펑톈 군벌에 물질적, 물류적 지원을 제공했다. 장쭤린은 일본의 지원을 받아 자신의 영토를 확장했지만, 일본은 장쭤린과 만주를 공동 점령하는 미래를 구상했다.[1]

그러나 장쭤린은 만주 무역, 투자 및 경제적 기회에 미국과 영국도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도록 허용함으로써, 미국 및 영국과의 관계 개선을 시도했다.[1] 이러한 정책 변화는 일본이 1923년 간토 대지진과 경제 공황으로 경제 위기에 직면한 시기에 일어나 관동군 지도부에 우려와 불만을 야기했다.[1]

국민혁명군장제스가 이끈 북벌의 성공으로 중국 국민당은 장쭤린이 통제하던 베이징 정부를 격파했다. 국민당은 중화민국의 일부로 공식적으로 주장되는 만주에 대한 통치를 회복할 태세를 갖춘 것으로 보였다.[1]

일본은 만주가 소련이나 국민당의 지배하에 놓이는 것을 전략적으로 용납할 수 없다고 생각했고, 장쭤린은 더 이상 만주를 "사실상" 독립적으로 유지할 수 있는 신뢰할 수 있는 동맹자로 보이지 않았다. 일본은 전투나 외세의 간섭 없이 만주에 대한 실질적인 통제를 확립할 맥락이 필요했고, 장쭤린을 더 협력적인 지도자로 교체하여 펑톈 군벌을 분열시키는 것이 그럴 것이라고 믿었다.[1]

2. 1. 1910년대 ~ 1920년대 만주 정세

1911년 신해혁명 이후, 중국은 중앙 정부의 통제력이 약화되고 각 지역 군벌들이 할거하는 혼란한 상황에 놓였다. 만주 지역은 일본, 러시아, 중국 등 여러 세력의 각축장이 되었으며, 특히 일본은 러일 전쟁 종전 이후 만주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해왔다.[1]

1924년 제1차 국공합작 당시 중국에 대한 외세의 지원은 다음과 같이 분열되어 있었다.

세력지원국
펑톈 군벌일본
즈리 군벌유럽미국
중국 국민당소련



펑톈 군벌의 지도자 장쭤린만주를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마적 출신의 장쭤린은 러일 전쟁에서 일본에 협력한 덕분에 일본의 비호를 받았고, 일본 관동군의 지원 아래 돤치루이를 실각시키고 만주에서의 실질적인 지배를 확립하여 유력한 군벌 지도자가 되었다.[1]

장쭤린


장쭤린은 일본의 만주 보전 의향에 반하여 중국 본토 진출의 야망을 품었다. 1922년 제1차 봉직 전쟁에서 패배한 후, 동삼성의 중화민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하고 일본과의 관계 개선을 성명했다. 그러나 이는 다음 전쟁에 대비하기 위한 방편에 불과했다.[12]

1924년 제2차 봉직 전쟁에서 펑위샹의 배신으로 대승을 거둔 장쭤린은 이듬해 세력 범위를 창장까지 넓혔다. 1925년 가장 신뢰하던 부하 궈쑹링이 반기를 들었으나, 관동군의 지원으로 위기를 모면했다. 1927년에는 베이징의 소련 대사관을 습격하여 중화민국과 소련의 국교가 단절되었다.[12]

국민혁명군장제스가 이끈 북벌의 성공으로 중국 국민당은 베이징 정부를 격파했는데, 베이징 정부는 장쭤린이 통제하고 있었다. 국민당은 만주에 대한 통치를 회복할 태세를 갖춘 것으로 보였다.[1]

1926년 경쟁자들이 잇달아 쓰러지자, 장쭤린은 베이징에 입성하여 대원수 취임을 선언하고, "자신이 중화민국의 주권자가 될 것"이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만주에서의 장쭤린의 위신은 저하되었고, 봉천 정부의 재정은 파탄 위기에 놓였다. 1927년 세출에서 군사비 비율은 97%였으며, 불환지폐를 남발하여 봉천 지폐 가치가 폭락했다.[12]

1927년 6월, 모리 카쿠 정무 차관 주도로 다나카 기이치 총리가 주최한 동방 회의가 개최되었다. 이 회의에서는 동삼성에서의 일본의 특수한 지위와 권익이 침해될 우려가 있을 경우 적절한 조치를 취하기로 결정되었다.[13]

1928년 장제스는 유럽 및 미국의 지원을 얻어 다시 북벌을 실시한다. 당시 중화민국에서는 민족 의식이 고양되고, 반일 폭동이 다발했다. 일본은 만주에서 혼성 제28여단을 산둥에 파견하고, 대신 조선의 혼성 제40여단을 만주에 파견했다. 5월 18일, 미국은 일본에 만주에 대한 적극적인 행동에 대해 사전에 내용을 보여줄 것을 요구했다.[12]

5월 20일부터 관계 당국의 회의가 열렸고, 5월 25일 기정 방침으로 결정되었지만, 다나카 총리는 미국의 여론을 의식하여 강행을 주저했다. 가와모토 다이사쿠는 "다나카 총리가 미국의 여론을 의식하고 기정 방침의 강행을 주저했다"라고 발언했다.[12]

무라오카 조타로 관동군 사령관은 장쭤린의 암살을 결심했다. 가와모토 다이사쿠 대좌는 처음에는 반대했지만, 후에 독자적인 전 책임을 지고 감행했다고도 한다.[15]

2. 2. 장쭤린의 등장과 성장



마적 출신 장쭤린러일 전쟁 당시 일본군에 협력하여 일본의 비호를 받았다.[12] 일본 관동군의 지원으로 돤치루이를 실각시키고 만주에서 실질적인 지배를 확립, 유력한 군벌 지도자가 되었다.

장쭤린은 일본의 만주 보전 의향에 반해 중국 본토 진출의 야망을 품었다.[12] 1918년 3월, 돤치루이 내각이 재현되자 창장 오지까지 남정군을 진출시켰다. 1920년 8월, 안직 전쟁에서는 직예파를 지원해 승리했지만, 곧바로 직예파와 대립했다. 1922년 제1차 봉직 전쟁에서 패배한 후, 동삼성의 중화민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하고 일본과의 관계 개선을 표명했다. 철도 건설, 산업 장려, 조선인 안정, 토지 상업 임대 등 여러 문제 해결에 노력하는 자세를 보였으나, 이는 다음 전쟁에 대비하기 위한 방편에 불과했다.[12]

2. 3. 일본의 대륙 침략 야욕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일본은 만주를 자국의 세력권으로 편입하려는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만주는 풍부한 자원과 전략적 위치를 가지고 있어 일본의 대륙 침략을 위한 중요한 발판으로 여겨졌다.[1]

1923년 간토 대지진과 경제 공황으로 일본 경제가 어려움을 겪자, 관동군 지도부는 만주에 대한 야심을 더욱 키웠다. 장제스가 이끄는 국민혁명군의 북벌 성공으로 중국 국민당이 만주에 대한 통치권을 회복할 움직임을 보이자, 일본은 위기감을 느꼈다.[1]

당시 만주는 중화민국의 영토로 공식적으로 주장되었으나, 일본은 만주가 소련이나 국민당의 지배하에 놓이는 것을 전략적으로 용납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일본은 펑톈 군벌의 지도자 장쭤린을 제거하고 더 협력적인 지도자로 교체하여 펑톈 군벌을 분열시키려 했다.[1]

마적 출신의 장쭤린은 러일 전쟁에서 일본에 협력한 덕분에 일본의 비호를 받았고, 일본 관동군의 지원 아래 만주에서 실질적인 지배력을 확립한 유력한 군벌 지도자였다. 그러나 장쭤린은 일본의 만주 보전 의향에 반하여 중국 본토 진출의 야망을 품었다.[12]

제1차 국공 합작(1924년) 당시, 여러 나라의 지원 방침은 다음과 같았다.

세력지원 국가
펑톈 군벌 (장쭤린)일본
직예파유럽미국
중국 국민당소련 (실질적으로는 당내의 공산당원에 대한 지지)



1927년 모리 카쿠 정무 차관 주도로 열린 동방 회의에서 일본은 만주에서의 특수한 지위와 권익이 침해될 경우, 어떤 상대든 적절한 조치를 취하기로 결정했다.[13]

1928년 장제스가 유럽과 미국의 지원을 얻어 다시 북벌을 실시하자, 일본은 산둥 출병을 통해 개입했다. 이 과정에서 지난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14]

일본은 만주에서 혼성 제28여단을 산둥에 파견하고, 대신 조선의 혼성 제40여단을 만주에 파견했다. 5월 18일, 미국은 일본의 만주에 대한 적극적인 행동 가능성에 우려를 표하며, 구개국 조약을 제시했다.[12]

2. 4. 국공합작과 북벌

1924년 제1차 국공 합작이 성립되면서, 중국 내에서는 군벌 세력을 타도하고 통일 국가를 수립하려는 움직임이 본격화되었다. 1926년 장제스가 이끄는 국민혁명군은 북벌을 시작하여 북방 군벌들을 차례로 격파해 나갔다.[12]

1926년 당시의 지원 방침은 다음과 같았다.

세력주요 지원 국가
봉천군 (장쭤린)일본
직예파유럽 및 미국
중국 국민당소비에트 연방(실질적으로는 당내의 공산당원에 대한 지지)



북벌로 직예파가 궤멸(1926년)된 후, 장쭤린은 중국에 권익을 가진 유럽 및 미국(영국, 프랑스, 독일, 미국 등)의 지원을 얻기 위해, 일본에서 유럽 및 미국 친화적인 자세로 전환했다. 권익을 확대하고 싶어 하는 유럽 및 미국, 특히 대륙 진출에 늦었던 미국이 적극적으로 장쭤린을 지원했다.

동시에 국민당 내에서도 유럽 및 미국의 지원을 노리고 있었지만, 1927년 4월 독자적으로 상하이를 해방시킨 노동자들의 동향을 우려한 장제스가 중국 공산당원과 이에 동조하는 일부 노동자를 숙청하여, 국공 합작이 붕괴되었다. 북벌의 지속은 불가능해졌지만, 이 숙청 이후, 장제스는 유럽 및 미국 세력과의 연합에 성공했다.

1928년 4월, 장제스는 유럽 및 미국의 지원을 얻어, 재차 북벌을 실시한다. 이 당시의 지원 방침은 다음과 같은 구도로 변화했다.

세력주요 지원 국가
봉천군 (장쭤린)
국민당유럽 및 미국
공산당소련


2. 5. 만주를 둘러싼 열강들의 갈등

1923년 간토 대지진과 잇따른 경제 공황으로 일본이 심각한 경제 위기에 직면하면서, 관동군 지도부는 만주에 대한 정책 변화에 대해 우려와 불만을 갖게 되었다.[1] 이러한 상황은 장제스가 이끄는 중국 국민당의 북벌 성공으로 더욱 복잡해졌다. 국민당은 만주에 대한 통치권 회복 의지를 보였고, 이는 만주를 전략적으로 중요하게 여기던 일본에게 용납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1]

소련은 몽골과 탄누 투바에 괴뢰 정부를 세우고, 중국 국민당과 중국 공산당을 지원하며 영향력을 확대했다.[1] 일본은 만주가 소련이나 국민당의 지배하에 놓이는 것을 전략적으로 용납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1]

미국은 만주에 대한 일본의 독점적 지배를 인정하지 않았다. 1928년 5월 18일, 미국은 일본에 만주에 대한 적극적인 행동을 취할 경우 사전에 내용을 알려줄 것을 요구했고, 19일에는 켈로그 국무장관이 "만주는 중화민국의 영토"라며 구개국 조약을 제시했다.[12]

3. 장쭤린 폭사 사건

1928년 6월 4일, 장쭤린이 베이징에서 만주로 철수하던 중 황구툰에서 폭사한 사건이다. 이 사건은 일본 관동군장쭤린을 제거하고 만주에 친일 정권을 세우기 위해 일으킨 것으로, 고모토 다이사쿠 대좌가 주도했다.

장쭤린이 탄 열차가 펑톈 근교 황구툰의 징펑선과 만철 롄창선 입체 교차 지점을 통과할 때, 만철선 육교에 설치된 폭약이 폭발했다. 이로 인해 열차와 철교가 파괴되었고, 장쭤린은 중상을 입고 다시푸로 옮겨졌으나 곧 사망했다. 동승했던 우쥔성은 즉사했고, 그 외 17명이 사망했다.

장쭤린의 아들 장쉐량은 이 사건에 격노하여 국민 정부와 연계, 일본에 대항하는 길을 모색했다. 1928년 12월 29일, 장쉐량은 봉천성에 청천백일만지홍기를 게양하여(역치) 국민당 지지를 명확히 했다. 이는 만주 사변의 배경 중 하나가 된다.

한편, 드미트리 프로호로프 등은 이 사건이 스탈린의 명령에 따라 나움 에이팅곤이 계획하고 일본군의 소행으로 위장한 것이라는 설을 주장했으나, 역사학계에서는 통설을 재검토할 만한 설로 다루어지지 않고 있다.

미국의 외교관 존 밴 앤트워프 맥머리는 일본이 장쭤린을 폭사했다는 설에 의문을 제기했다.[63] 다키자와 이치로도 일본 측은 장쭤린을 중시하고 있었으며, 살해할 이유가 없다고 주장했다.[64]

3. 1. 사건 발생

장쭤린 암살 사건, 1928년 6월 4일


장쭤린의 객차 잔해


1928년 6월 4일 이른 아침, 장쭤린은 베이징에서 만주로 돌아가던 중 장제스가 이끄는 북벌군과의 결전을 단념하고 철수하던 중이었다. 장쭤린이 탑승한 특별 열차가 선양 근교 황구툰의 징펑선과 만철 롄창선의 입체 교차 지점을 시속 10km 정도로 통과하던 중, 일본 관동군이 설치한 폭탄에 의해 암살되었다. 폭탄은 상부를 지나는 만철선 육교의 교각 또는 교량에 설치되어 있던 황색 화약 300kg이었다. 열차는 위에서 쏟아지는 폭풍으로 짓눌리듯 대파되어 불탔고, 교차하던 철교도 붕괴되었다.[49]

폭탄은 1발은 불발되었고, 당황하여 예비로 준비된 2발째 폭탄의 스위치를 누르자, 그것이 폭발했다. 둘 다 실패할 경우에 대비해 선로에 탈선 장치를 설치하고, 탈선된 곳에 발도대를 투입하여 장쭤린을 살해할 계획이었다.[49]

동승했던 일본군 장교 의아성야에 따르면, 열차는 총 20량이었고, 장쭤린이 탑승한 것은 8량째였지만,[18] 폭파로 인해 그 앞쪽 차량이 대파되었고, 선두 쪽 6량은 200미터 정도 주행 후 전복되었으며, 열차의 후반부는 화재가 발생했다. 8량째에는 장쭤린 옆에 오준승, 그 다음으로 의아성야가 앉아 회담을 하고 있었는데, 우쥔성이 장쭤린과 기가 세이야에게 춥다며 권유하여 장쭤린은 외투를 입으려고 일어선 순간, 굉음과 함께 솟아올라 폭발물이 머리 위에서 쏟아져 내려왔고, 기가 세이야는 즉시 열차에서 뛰어내렸으며, 장쭤린은 코와 다른 부위에 경상을 입고 호위병의 도움을 받아 내렸다.[20]

장쭤린은 다시푸에 도착한 지 얼마 안 되어 사망했고, 동승했던 우쥔성은 즉사했으며, 그 외 경비 및 측근 17명이 사망했다. 이 열차에는 장쭤린에게 일본에서 파견된 군사 고문인 의아성야 소령도 동승했지만, 가벼운 부상만 입고 화를 면했다.[22]

이 사건은 일본 관동군의 독단적인 행동으로, 일본 정부의 사전 승인 없이 이루어진 것으로 알려졌다. 관동군의 젊은 장교인 고모토 다이사쿠 대령은 장쭤린 암살이 일본의 요구에 더 유연한 새로운 지도자를 세울 수 있는 가장 빠른 방법이라고 믿고, 도쿄의 직접적인 명령 없이 작전을 계획했다.

3. 2. 암살 계획

관동군은 장쭤린을 제거하고 만주에 친일 괴뢰 정권을 수립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고모토 다이사쿠 대령이 암살 계획을 주도했으며, 도미야 가네오 대위 등이 실행에 가담했다.[49]

고모토 다이사쿠는 장쭤린 암살이 일본의 요구에 더 유연한 새로운 지도자를 세울 수 있는 가장 빠른 방법이라고 믿고, 도쿄의 직접적인 명령 없이 작전을 계획했다. 일본의 중국 전문가 사사키 도이치는 자신이 고모토에게 이 아이디어를 제공했다고 주장했다. 고모토의 부하인 도미야 카네오 대위가 이 계획을 실행하는 책임을 맡았다. 폭탄은 공병 소위 후지이 사다토시가 다리에 설치했다.

관동군 사령부에서는 국민당의 소행으로 위장하여 장쭤린을 암살하는 계획을 관동군 사령관 무라오카 조타로 중장이 발안하고, 가와모토 다이사쿠 대좌가 모든 책임을 지고 결행하기로 했다. 가와모토의 지시에 따라 6월 4일 새벽, 폭약 준비는 현장의 수비 담당이었던 독립 수비대 제4중대장 도노미야 데쓰오 대위, 같은 제2대대 소속 간다 야스노스케 중위, 조선군에서 관동군으로 파견되었던 기리하라 사다토시 공병 중위 등이 협력하여 진행했다.

현장 지휘는 현장 부근의 철도 경비를 담당하는 독립 수비대의 도노미야 데쓰오 대위가 맡았다. 이들은 장쭤린이 탑승한 것으로 보이는 제2열차 중앙의 귀빈차를 노리고 독립 수비대의 감시소에서 폭약에 점화했다. 그 결과, 폭풍으로 인해 위에서 철교(만철 소유)가 붕괴되는 형태로 객차가 찌그러진 채 불탔다.[23]

가와모토 등은 미리 매수한 중국인 아편 중독자 3명을 현장 근처로 데려가 총검으로 찔러 살해하고 시체를 방치한 후 "범행은 장제스 군의 변의대 (게릴라)에 의한 것이다"라고 발표하여 이 사건이 국민당 공작대에 의한 것이라는 위장 공작을 펼쳤다. 그러나 3명 중 한 명이 죽은 척하고 현장에서 도망쳐 장쉐량에게 달려가 상황을 설명했기 때문에 진상이 중국 측에 알려졌다.[25][26]

3. 3. 위장 공작

가와모토 다이사쿠 등은 매수한 중국인 아편 중독자 3명을 현장 근처로 데려가 총검으로 찔러 살해하고 시체를 방치한 후 "범행은 장제스 군의 변의대 (게릴라)에 의한 것이다"라고 발표하여 이 사건이 국민당 공작대에 의한 것이라는 위장 공작을 펼쳤다. 그러나 3명 중 한 명이 죽은 척하고 현장에서 도망쳐 장쉐량에게 달려가 상황을 설명했기 때문에 진상이 중국 측에 알려졌다.[25][26]

한편, 중국의 전범 수용소까지 가와모토 다이사쿠와 행동을 함께 했던 히라노 레이지가 전후 출판한 가와모토의 전기 "만주의 음모자"(1959년)에 따르면, 펑톈의 아편 중독 환자 2명에게 일본군 밀정이 되도록 제안하고, 착수금 50JPY을 건네주고 3일 밤늦게 현장의 철도 감시소까지 비밀 명령을 받으러 오게 하여 사살, "남방 변의대"로 인정할 수 있는 종이 조각을 품속에 쑤셔 넣었다고 한다.[27]

4. 사건 이후

사건 현장의 선로는 현재도 사용되고 있으며[24], 장쭤린 열차가 대파된 하선은 선양 북역에서 베이징으로 향하는 고속 열차 등에, 상선은 선양역에서 지린 방면으로 향하는 열차 등에 사용되고 있다. 상하선 교차점 부근 경사면에는 "황고둔 사건 발생지"()라고 적힌 석비가 있지만[65], 철도 시설 내에 있어 일반인의 출입은 불가능하며, 선로 옆에서만 볼 수 있다.

위는 롄징 선


장쭤린이 향하던 선양역선형 개량으로 배선이 변경되어, 장쭤린 열차가 사용했던 선로로는 들어갈 수 없다.[24] 이후 선양 북역 이전 등으로 구 징펑 선의 경로도 변경되어, 구 노반은 도로로 전용되었다.

4. 1. 국제 사회의 비난과 일본의 정치적 위기

장쉐량은 일본과의 분쟁 및 군사적 자극을 피하기 위해 아버지의 암살에 일본이 연루되었다는 직접적인 비난을 피하고, 장제스국민정부와 화해 정책을 추진했다.[3][4] 이 사건은 만주에서 일본의 정치적 입지를 약화시켰다.[3][4]

이 암살은 일본 육군 참모 본부나 문민 정부의 사전 동의 없이 하급 장교들에 의해 수행되었다. 히로히토 천황은 이 사건을 비판했고, 결국 다나카 기이치 일본 내각총리대신은 사건 공모자들을 체포 및 기소하지 못한 책임을 지고 해임되었다.[5]

관동군은 만주에서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만주 사변을 일으켜 만주 침략을 정당화하고 괴뢰국 만주국을 건국했다. 장쭤린의 아들 장쉐량은 국민 정부와 연계하여 일본에 대항할 길을 모색했고, 1928년 12월 29일 봉천 성 안팎에 청천백일만지홍기를 게양했다(역치).[61] 이는 만주 사변의 배경 중 하나가 되었다.

4. 2. 장쉐량의 역치와 만주 사변

장쭤린의 아들 장쉐량은 아버지의 죽음 이후 일본에 대한 저항 의지를 분명히 하고 국민정부에 합류했다. 장쉐량은 일본과의 분쟁을 피하면서도 장제스의 국민정부와 화해 정책을 추진했다.[3][4] 1928년 12월 29일, 장쉐량은 만주 전역에 청천백일만지홍기를 게양하며 국민정부에 대한 지지를 선언했다(易幟|역치중국어).[61] 이는 장쉐량이 국민당파임을 명확히 한 사건이었다.

일본은 장쉐량의 반일 노선에 위협을 느끼고, 결국 만주 사변을 일으켜 만주 침략을 정당화하고 만주국을 건국하게 된다.

5. 역사적 평가와 논란

황고둔 사건은 단순한 암살 사건을 넘어, 동아시아 정세에 큰 영향을 미친 중대한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이 사건은 일본의 침략 의도를 명백히 드러냈으며, 중국의 반일 감정을 고조시켜 만주 사변 발발의 한 원인이 되었다.

일본 극우 세력은 이 사건을 자신들의 침략 행위를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이용하려 하며, 사건의 책임을 부정하거나 소련의 소행으로 왜곡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역사적 사실과 다르며, 학계에서도 인정받지 못하는 주장이다.

5. 1. 일본 극우 세력의 역사 왜곡

일본 극우 세력은 장쭤린 폭사 사건을 자신들의 침략 행위를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이용하려 한다. 이들은 사건의 책임을 부정하거나, 심지어 소련의 소행으로 왜곡하기도 한다. 장쭤린의 아들 장쉐량은 이 사건에 격노하여 국민 정부와 연계하여 일본에 대항할 길을 모색했다.[61] 1928년 12월 29일, 장쉐량은 봉천성 안팎에 청천백일만지홍기를 게양하고(역치) 국민당파와의 기치를 명확히 하였다.[61] 이는 훗날 만주 사변의 배경 중 하나가 된다.

5. 2. 소련 특무기관 범행설 등 음모론

일부에서는 장쭤린 폭사 사건이 소련 특무기관의 소행이라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역사적 근거가 부족하며, 학계의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다.

참조

[1] 서적 Japanese Imperialism, 1894–1945 Oxford University Press
[2] 문서 Beasley, p. 187
[3] 서적 The Search for Modern China Norton & Sons
[4] 문서 Beasley, p. 188
[5] 서적 Hirohito and the Making of Modern Japan
[6] 서적 日本軍閥暗闘史 静加堂書店
[7] 서적 陰謀・暗殺・軍刀 一外交官の回想 岩波書店 1950-06-10
[8] 서적 日本歴史大事典 小学館
[9] 학술지 張作霖、楊宇霆の暗殺
[10] 웹사이트 奉天事件 https://kotobank.jp/[...]
[11] 웹사이트 満州某重大事件 https://kotobank.jp/[...]
[12] 문서 張作霖爆殺事件の真相
[13] 웹사이트 張作霖爆殺事件 -河本大作関東軍高級参謀の真意- https://www.nids.mod[...] 防衛研究所 2024-09-23
[14] 서적 昭和史の事典 (株)東京堂出版 1995-06-10
[15] 학술지 日中戦争
[16] 웹사이트 張作霖爆殺事件 ー河本大作関東軍高級参謀の真意ー https://www.nids.mod[...] 防衛研究所 2024-11-22
[17] 서적 軍服生活四十年の想出
[18] 뉴스 張作霖の使った列車は貴賓車22輌からなるもので爆破は機関車から11輌目を吹き飛ばし、続く4輌を焼失させた タイムズ 1928-06-05
[19] 웹사이트 張作霖爆殺事件における野党民政党の対応 - 5-45-55-sato.pdf https://gssc.dld.nih[...] 日本大学大学院総合社会情報研究科 2024-09-21
[20] 뉴스 張作霖爆殺事件 1928-06-05
[21] 뉴스 張作霖爆殺事件 1928-06-06
[22] 뉴스 張作霖爆殺事件 2008-06-15
[23] 학술지 日中戦争
[24] 잡지 鉄道ジャーナル
[25] 서적 張作霖爆殺 中央公論社
[26] 서적 昭和史の謎を追う (上) 文藝春秋
[27] 뉴스 張作霖爆殺事件 2008-06-15
[28] 학술지 日中戦争
[29] 뉴스 1928-06-05
[30] 뉴스 1928-06-05
[31] 뉴스 邦人に対する空気緩和す 1928-06-05
[32] 뉴스 1928-06-06
[33] 문서 共同調査報告の内容は現場の状況、事件当日の日中特別警備協定、中国国民党の便衣隊による事件であること、爆薬装填箇所を特定する結論からなり、便衣隊については折衝により承認がなされ、爆薬装填箇所についても大部分も合意されていたが中国側は各項目全部の不承認を訴えた(『東京朝日新聞』1928年6月17日付夕刊一面)。なお、日本側報道によれば、奇妙なことにこの最後の項目は結論でありながら爆薬争点箇所についてのものとなっている
[34] 웹사이트 外務省記録『張作霖爆死事件 松本記録』 https://www.jacar.go[...] 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 2009-05-17
[35] 학술지
[36] 서적 三代回顧録 東洋経済新報社 1964
[37] 서적 溥儀の忠臣・工藤忠  忘れられた日本人の満洲国 朝日新聞出版 2010
[38] 서적 検証戦争責任II 中央公論新社 2006
[39] 서적 町野武馬政治談話録音速記録 国立国会図書館
[40] 문서 張作霖爆殺事件調査報告
[41] 서적 三代回顧録
[42] 서적 満洲事変の裏面史 国書刊行会 1976
[43] 서적 昭和史の謎を追う
[44] 논문 張作霖爆殺事件の再考察
[45] 서적 昭和史発掘
[46] 서적 赤い夕陽の満州野ヶ原で
[47] 서적 陸軍を動かした人々 八小堂書店 1960-01-01
[48] 뉴스 漸く判明した兇変当時の真相 1928-06-22
[49] 웹사이트 河本大作 私が張作霖を殺した https://www.aozora.g[...] 本の未来基金 2024-09-25
[50] 뉴스 「関東軍司令官の意思くんだ」張作霖爆殺事件 「This is 読売」に掲載 1997-10-08
[51] 웹사이트 張作霖爆殺事件 http://yu77799.g1.xr[...] ゆう 2024-09-25
[52] 뉴스 事件を日本の陰謀となし、奉天の日支間雲行険悪 1928-06-05
[53] 뉴스 現地保護を捨てて京奉線は出兵せず 1928-06-07
[54] 뉴스 在満居留民の金融状態悪化 1928-09-09
[55] 서적 西園寺公と政局 第一巻 岩波書店 1950
[56] 웹사이트 目撃!にっぽん 2020/08/14(金)14:05 の放送内容 ページ1 https://web.archive.[...] 株式会社ワイヤーアクション 2023-11-27
[57] 서적 昭和史の謎を追う 文藝春秋 1999-12-10
[58] 웹사이트 『拝謁記』の張作霖爆殺事件における昭和天皇発言と定説との違い(坂東太郎. https://news.yahoo.c[...] Yahoo! 2023-11-27
[59] 뉴스 組閣後満二年二ヶ月 遂に野垂れ市の悲運 1929-06-30
[60] 서적 昭和陸軍全史1 (株)講談社 2014-07-20
[61] 뉴스 日本との約束を無視し、東三省に白日旗翻る 1928-12-30
[62] 뉴스 2006-02-28
[63] 서적 平和はいかに失われたか
[64] 간행물 張作霖を「殺った」ロシア工作員たち 2006-05
[65] 웹사이트 皇姑屯:战争导火索在这里点燃 http://news.sina.com[...]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