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소련은 1922년 러시아 사회주의 연방 소비에트 공화국과 다른 소비에트 공화국들이 연합하여 탄생한 사회주의 연방 국가였다. 소비에트는 15개의 공화국으로 구성되었으며, 2차 세계 대전 이후 미국과 함께 세계를 양분하는 초강대국으로 부상했다. 그러나 1980년대 말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개혁 정책은 오히려 소련 해체를 가속화했고, 1991년 8월의 쿠데타 시도 실패 이후 각 공화국의 독립 움직임이 거세지면서 1991년 12월 26일 해체되었다. 소련은 계획 경제 체제를 통해 산업화를 이루었으나, 1970년대부터 경제 침체를 겪었으며, 1980년대 고르바초프의 개혁 정책에도 불구하고 경제난을 극복하지 못했다.
소비에트 연방의 역사는 1917년 볼셰비키 혁명으로 시작하여 1991년 경제 붕괴와 정치적 분열 속에서 해체로 끝났다. 1922년 러시아 내전 이후 설립된 소련은 소련 공산당 지배하의 일당 독재 국가였다. 레닌 시기에는 신경제정책(NEP)이 시행되어 사회주의 정책과 시장 지향적 개혁이 공존했다.
2. 국명과 상징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즉, '''소련'''이라는 명칭은 러시아어로 '평의회' 또는 '회의'를 뜻하는 소비에트(Советru)에서 유래했다. 노동자, 농민, 병사의 공동체 조직인 소비에트는 직접민주제, 간접민주제를 거부하고, 인민민주 상향식 선거를 통해 일당제 체제 하에서 평의회 대의원을 선출했다. 이는 블라디미르 레닌이 자신의 저서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파리 코뮌과 러시아 특유의 소비에트 제도를 본따 만든 것이라고 밝혔다.
소련의 국장은 1923년에 처음 제정되어 1991년 해체될 때까지 사용되었다.[368] 국장 가운데에는 지구를 배경으로 금색 낫과 망치가 그려져 있으며, 지구 아래쪽에는 떠오르는 금색 태양이, 지구 위쪽에는 빨간색 별이 있다. 국장 양쪽을 밀 이삭이 감싸고 있으며 빨간색 리본으로 묶여 있는데, 이 리본에는 소련의 표어인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라는 문구가 15개 공화국의 언어로 쓰여 있다.
소비에트(ru)라는 러시아어는 “평의회”를 의미하며, 슬라브 원어의 vět-iti("알리다") 동사 어근에서 파생되었다. 노동자 대표에 의한 평의회로서의 “소비에트”는 1905년 러시아 1차 혁명에서 처음 등장했다.
2. 1. 국명의 유래
"소비에트"(Совет|소볘트ru)라는 단어는 러시아어 단어 에서 유래했으며, '의회', '집회', '조언'을 의미한다. 궁극적으로는 원시 슬라브어 동사 어간 ('알리다')에서 유래하며, 슬라브어 věstsla('뉴스'), 영어 'wise'와 관련이 있다. '소비에트니크(sovietnik)'라는 단어는 '의원'을 의미한다.[5]
노동자 의회로서의 소비에트는 1905년 러시아 혁명 동안 처음 등장했다. 제국군에 의해 신속하게 진압되었지만, 1917년 2월 혁명 이후 전국적으로 노동자와 병사 소비에트가 등장하여 러시아 임시 정부와 권력을 공유했다.[7] 블라디미르 레닌이 이끄는 볼셰비키는 모든 권력이 소비에트로 이양되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노동자와 병사들의 지지를 얻었다.[6] 10월 혁명 이후, 볼셰비키가 소비에트의 이름으로 임시 정부로부터 권력을 장악하자,[7][8] 레닌은 러시아 사회주의 연방 소비에트 공화국(RSFSR)의 수립을 선포했다.
1922년 조지아 사건 동안 레닌은 러시아 SFSR과 다른 국가 소비에트 공화국들이 더 큰 연합을 형성할 것을 촉구했는데, 그는 처음에 이를 유럽과 아시아 소비에트 공화국 연합(links=no|Союз Советских Республик Европы и Азии|Soyuz Sovyetskikh Respublik Evropy i Azii|소유스 소볘츠키흐 레스푸블리크 예브로피 이 아지rus)이라고 명명했다. 이오시프 스탈린은 처음에 레닌의 제안에 반대했지만 궁극적으로 받아들였고, 레닌과의 합의 하에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USSR)으로 이름을 변경했지만, 모든 공화국은 처음에는 '사회주의 소비에트'로 시작했으며 1936년까지 다른 순서로 변경되지 않았다. 또한 여러 공화국의 지역 언어에서 각 언어의 '의회' 또는 '의회의'라는 단어는 러시아어 '소비에트'의 각색으로 상당히 늦게 변경되었거나 다른 언어에서는 전혀 변경되지 않았다. 예를 들어 우크라이나 SSR의 경우이다.
СССР|SSSRru(라틴 알파벳으로는 ''SSSR'')는 키릴 문자로 쓰여진 USSR의 러시아어 동족어의 약어이다. 소비에트는 이 약어를 너무 자주 사용했기 때문에 전 세계의 사람들이 그 의미에 익숙해졌다. 그 후 가장 일반적인 러시아어 약어는 Союз ССР|소유스 SSRru (음역: )이며, 영어로는 'SSRs 연합'으로 번역된다. 또한 러시아어 축약형 명칭 Советский Союз|소볘츠키 소유스ru (음역: , 직역하면 '소비에트 연합'을 의미함)도 일반적으로 사용되지만, 축약되지 않은 형태로만 사용된다. 최소한 대조국 전쟁이 시작된 이후로는 소비에트 연방의 러시아어 명칭을 СС|SSru로 축약하는 것은 금기시되어 왔는데, 그 이유는 러시아 키릴 문자 약어 СС|SSru가 영어로 'SS'인 악명 높은 나치 독일의 친위대|슈츠슈타펠de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2. 2. 국기
소련 국기의 가로 세로 비율은 2:1이다. 바탕은 혁명을 상징하는 붉은색이다. 금색의 낫과 망치는 각각 농민과 노동자를 상징하며, 그 위에 있는 붉은 별은 5대륙 노동자의 단결을 의미한다. 1955년에는 낫과 망치의 크기가 이전보다 조금 작아졌고, 1980년에는 국기 바탕색이 진홍색에서 약간 연한 진홍색으로 바뀌었다.
2. 3. 국장
소비에트 연방에서 국가 상징으로 사용된 것은 붉은 별과 낫과 망치를 기반으로 한 국장이었다. 이것은 소비에트 국가와 10월 혁명을 구현하는 구성 국가들과 공산 혁명의 특징적인 상징으로서 큰 의미를 지녔다.[368]
3. 역사
1920년대 후반 요셉 스탈린이 집권하면서 중앙집권화와 전체주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스탈린 통치는 강제적인 농업 집단화, 급속한 산업화, 그리고 대숙청으로 특징지어진다. 소련은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연합국의 승리에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수백만 명의 인명 피해를 입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소련은 냉전 시기 서방 진영에 맞선 동구권을 이끌며 세계 양대 초강대국으로 부상했다. 이 시기 소련은 군비 경쟁, 우주 경쟁, 그리고 전 세계의 대리 전쟁에 참여했다. 니키타 흐루쇼프는 탈스탈린화를 추진하며 흐루쇼프 해빙으로 알려진 자유화와 개방의 시대를 열었다. 그러나 레오니드 브레즈네프 시기에는 침체 시대가 도래하여 경제 쇠퇴, 정치 부패, 경직된 노년층 지배가 나타났다. 중앙 집중적인 성격, 기술적 후진성, 비효율성으로 인해 소련 경제는 어려움을 겪었고, 막대한 군사비 지출과 동구권 유지 부담은 이를 더욱 악화시켰다.
1980년대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글라스노스트(개방)와 페레스트로이카(개혁) 정책은 소련 체제를 활성화하려 했으나, 오히려 해체를 가속화했다. 소비에트 공화국 전역에서 민족주의 운동이 강화되었고, 공산당의 통제력은 약화되었다. 1991년 8월 고르바초프에 대한 강경파 공산주의자들의 쿠데타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고, 이는 1991년 12월 26일 소련 해체로 이어졌다.
3. 1. 러시아 혁명과 내전 (1917년 ~ 1922년)
1917년 레닌이 이끄는 볼셰비키가 10월 혁명을 일으켜 러시아 임시정부를 무너뜨리고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인 러시아 사회주의 소비에트 공화국을 수립했다.[288] 그러나 10월 혁명으로 인한 긴장은 볼셰비키의 적군과 반볼셰비키 세력인 백군 간의 러시아 내전으로 이어졌다.
협상국들의 개입에도 불구하고 적군은 1920년까지 내전에서 승리했고, 1921년까지는 10월 혁명 이후 러시아 공화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여러 지역(우크라이나 등)을 점령하여 볼셰비키가 지배하는 소비에트 공화국을 각지에 수립했다.[288] 볼셰비키는 구 러시아 제국 영토의 재통합을 계획하고, 1922년 12월 30일 러시아, 우크라이나, 자카프카스, 벨라루스(백러시아)의 4개 소비에트 공화국으로 이루어진 소비에트 연방(소련)을 수립했다.[288]
3. 1. 1. 2월 혁명과 임시 정부
1917년 3월 8일(러시아력 2월 23일) 수도 페트로그라드에서 발생한 시위를 시작으로 2월 혁명이 일어나 러시아 제국이 붕괴되고 점진적인 개혁을 지향하는 러시아 임시 정부가 수립되었다.[304] 임시 정부는 제1차 세계 대전 참전을 결정했지만, 독일군과의 전선은 이미 붕괴되었고, 국내 정치적 혼란도 수습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한편, 2월 혁명에서 노동자와 병사 대표에 의한 소비에트(회의, 평의회)가 러시아 전역에서 조직되었고, 그중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진 페트로그라드 노동자·병사 대표 소비에트와 임시 정부 사이에는 "이중 권력" 상태가 발생했다.
1917년 8월, 라브르 코르닐로프 장군이 임시 정부에 대한 반란을 일으켰고, 그것이 소비에트의 힘에 의해 진압되자 소비에트 내에서는 레닌이 이끄는 볼셰비키에 대한 지지가 높아졌다. 볼셰비키는, 그동안 소비에트에 대한 전권 집중을 호소하며, 전쟁 계속을 주장하는 임시 정부와의 대결 자세를 드러냈다.
3. 1. 2. 10월 혁명과 볼셰비키 정권 수립
1917년 3월 8일(러시아력 2월 23일) 수도 페트로그라드에서 발생한 시위를 시작으로 2월 혁명이 일어나 러시아 제국이 붕괴되고 점진적인 개혁을 지향하는 러시아 임시 정부가 수립되었다. 임시 정부는 제1차 세계 대전 참전을 결정했지만, 독일군과의 전선은 이미 붕괴되었고, 국내 정치적 혼란도 수습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한편, 2월 혁명에서 노동자와 병사 대표에 의한 소비에트(회의, 평의회)가 러시아 전역에서 조직되었고, 그중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진 Петроградский совет рабочих и солдатских депутатов|페트로그라드 노동자·병사 대표 소비에트ru와 임시 정부 사이에는 "이중 권력" 상태가 발생했다.
1917년 8월, 라브르 코르닐로프 장군이 임시 정부에 대한 반란을 일으켰고, 그것이 소비에트의 힘에 의해 진압되자 소비에트 내에서는 레닌이 이끄는 볼셰비키에 대한 지지가 높아졌다. 볼셰비키는 소비에트에 대한 전권 집중을 호소하며, 전쟁 계속을 주장하는 임시 정부와의 대결 자세를 드러냈다. 같은 해 10월, 볼셰비키는 무장봉기를 결정하고, 11월 7일(율리우스력 10월 25일) 수도 페트로그라드의 거의 전역을 장악하고 임시 정부로부터 권력을 탈취했다(10월 혁명). 이 11월 7일이 러시아 혁명 기념일이다. 같은 날 개최된 제2차 전러시아 소비에트 대회에서는 소비에트에 의한 체제 수립과, 신정부인 인민위원회의 수립이 선포되었다. 총리에 해당하는 인민위원회 의장에는 레닌, 외무 인민위원에는 트로츠키, 민족 문제 인민위원에 요시프 스탈린이 취임했다. 소비에트 정권은 모스크바 근교를 장악하고, 11월 10일에는 좌파 사회혁명당을 정권에 편입시켰다. 1918년 1월 10일부터 제3차 전러시아 소비에트 대회가 개최되어 러시아가 노동자·병사·농민의 소비에트 공화국임을 선포하고, 연방제를 취한다는 선언이 채택되었다(러시아 사회주의 연방 소비에트 공화국).
1918년 3월, 볼셰비키는 독일 제국을 포함한 중앙 연합국과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체결하고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이탈했지만, 이후 연합국에 의한 시베리아 파병의 간섭 전쟁과, 백군 등 반혁명 세력과의 러시아 내전 (1917-22)에 대처하게 되었다. 한편,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이나 아제르바이잔의 바쿠 코뮌 등 볼셰비키파 소비에트 정권도 각지에서 잇따라 수립되었다. 이들 정권은 독립국이었지만, 러시아 소비에트 정부의 일부라고 스스로 규정하기도 했다.
러시아 내전이 종식 국면에 접어들자 각지의 소비에트 정권 사이에서 통합 움직임이 강해졌다. 러시아 공산당에 의해 각지 혁명 정권과의 통합이 진행되어, 1920년에는 러시아 연방 공화국과 아제르바이잔 사회주의 소비에트 공화국 사이에 긴밀한 군사적·정치적 동맹 조약이 체결되었고,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조지아, 아르메니아와도 유사한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들 국가는 헌법을 가진 주권 국가였지만, 최고 기관은 전러시아 소비에트 대회와 전러시아 중앙 집행 위원회였고, 러시아 연방 공화국의 주도권은 명확했다.
1921년 1월에는 연료 위기, 수송 위기, 식량난이 연쇄적으로 발생했고, 3월에는 크론슈타트 반란도 일어나 당내에서도 당내 민주화가 요구되었다. 당 지도부는 당원이 과다하다는 이유로 "당의 총숙청"을 시작하여, 당력의 길이에 따라 계층이 만들어지고, 고참 당원에 의한 과두 지배가 성립하게 되었다.
1922년 5월 레닌이 뇌출혈로 쓰러져 목숨은 건졌지만 영향력은 급속히 저하되었다. 4월에는 스탈린이 러시아 공산당 서기장에 취임하여 당 조직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8월에는 소비에트 정권 통합을 위한 위원회가 설치되었고, 스탈린이 주도자 중 한 명이 되었다. 스탈린은 9월에 각 정권이 자치 공화국으로서 러시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에 가입한다는 통합 방식을 발표했다. 이 의견은 조지아를 제외한 소비에트 공화국의 찬성을 얻어 채택되었지만, 각 공화국에게는 불만이 남는 것이었고, 레닌의 지도에 따라 10월 중앙위원회에서는 각 공화국이 대등한 공화국으로서 연방에 가입한다는 형식이 정해졌다. 그러나 이 수정에서는 자카프카스의 3개 공화국이 일단 연방이 된 후 가입하는 것이 정해졌기 때문에, 조지아에서 격렬한 반발을 불렀다(조지아 문제). 반대파는 점차 몰리고, 이에 따라 자카프카스 사회주의 연방 소비에트 공화국이 성립했다.
1922년 12월에는 I Всесоюзный съезд Советов|제1차 소비에트 연방 전연방 소비에트 대회ru가 개최되어, 12월 30일 러시아 사회주의 연방 소비에트 공화국, 우크라이나 사회주의 소비에트 공화국, 벨라루스 사회주의 소비에트 공화국, 자카프카스 사회주의 연방 소비에트 공화국의 4개국이 평등한 입장에서 가입한다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의 수립을 선언하는 Договор об образовании СССР|소비에트 연방의 결성에 관한 조약ru이 조인되었다. 이 연방에는 각국이 자유로운 의지로 참가·탈퇴할 수 있다고 규정되어 있었고, 새로운 최고 기관의 설립도 결정되었다.
1923년, 스탈린 등 당내 주류파는 소련 체제의 정당성을 공장 노동자의 지지에서 찾아 노동자의 입당 캠페인을 전개했지만, 당내 대립을 더욱 불러일으켰다. 공장 노동자를 지지 기반으로 보는 한편, 농민은 잠재적으로 "적"(반혁명 분자)으로 간주되었다.
1924년 1월 31일에는 첫 번째 소비에트 연방 헌법이 제정되었다.
1924년 레닌이 사망했지만, 생전에는 스탈린과 트로츠키의 대립을 걱정하여 스탈린을 경계하게 되었다. 스탈린은 먼저 트로츠키를 고립시키고, 다음으로 레닌의 측근이었던 그리고리 지노비예프와 레프 카메네프, 카를 라덱 등을 공격했다. 1927년 트로츠키, 지노비예프, 카메네프를 당에서 제명함으로써 명확한 우월자로서의 지위를 확보했고, 스탈린은 공식적으로 최고 지도자가 되었다.
3. 1. 3. 러시아 내전과 소비에트 연방 수립
1917년 레닌이 이끄는 볼셰비키가 10월 혁명을 일으켜 러시아 임시정부를 무너뜨리고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인 러시아 사회주의 소비에트 공화국을 수립했다.[288] 그러나 10월 혁명으로 인한 긴장은 볼셰비키의 적군과 반볼셰비키 세력인 백군 간의 러시아 내전으로 이어졌다.
협상국들의 개입에도 불구하고 적군은 1920년까지 내전에서 승리했고, 1921년까지는 10월 혁명 이후 러시아 공화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여러 지역(우크라이나 등)을 점령하여 볼셰비키가 지배하는 소비에트 공화국을 각지에 수립했다.[288] 볼셰비키는 구 러시아 제국 영토의 재통합을 계획하고, 1922년 12월 30일 러시아, 우크라이나, 자카프카스, 벨라루스(백러시아)의 4개 소비에트 공화국으로 이루어진 소비에트 연방(소련)을 수립했다.[288]
3. 2. 스탈린 시대 (1924년 ~ 1953년)
1933년 아돌프 히틀러가 독일의 정권을 잡으면서 나치 독일은 중앙유럽을 독일인의 생활권(Lebensraumde 레벤스라움)으로 만들려 했다.[369] 반면 스탈린은 중앙유럽과 동유럽 국가를 공산화하여 위성 국가로 만들고자 했기에, 소련과 독일은 중앙유럽 지배권을 두고 충돌하게 되었다.[369]
1939년 8월, 소련과 나치 독일은 독소 불가침조약을 맺었다. 같은 해 9월 1일 나치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자, 소련도 9월 17일 폴란드를 침공하여 독일과 함께 폴란드를 점령했다.[369] 1940년에는 핀란드의 영토를 빼앗고 발트 3국을 병합했다.[369]
1941년 6월 22일, 나치 독일은 독소 불가침조약을 파기하고 소련을 침공하면서 대조국전쟁이 시작되었다.[369] 이로써 소련은 연합국에 가담하게 되었다. 초기에는 독일군이 우세하여 모스크바 근처까지 진격했으나, 쿠르스크 전투 이후 소련군이 전세를 역전시켰다. 1945년 4월 30일, 소련군은 베를린을 함락시키고 독일과의 전쟁에서 승리했다.[369]
1945년 8월 8일, 소련은 얄타 회담의 협정에 따라 소일 불가침조약을 파기하고 일본 제국에 선전포고하여 일본과의 전쟁에서도 승리했다.[369] 제2차 세계 대전 승리 후, 소련은 만주국을 점령했지만 중국공산당에게 넘겨주었다. 또한 북위 38도선 이북의 한반도를 점령하고 사할린을 획득했다.[369]
제2차 세계 대전은 소련 정부의 국가 지도 방향을 결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소련 정부는 애국주의와 민족주의를 강조하며 소련인을 단결시켰다.[369] 러시아 정교회의 지위를 회복시키고, 소련군의 명칭을 붉은 군대에서 소비에트군으로, '''국가'''를 인터내셔널가에서 소련 찬가로 바꾸었다.[369]
3. 2. 1. 일국사회주의와 계획 경제
요셉 스탈린은 일국사회주의를 내세워 중앙집권적 계획 경제를 추진했다. 1927년 가을, 농민들이 국가에 싼값으로 곡물을 판매하는 것을 거부하면서 곡물 조달에 어려움이 발생하고 도시의 식량난이 심화되었다.[309] 스탈린은 곡물 조달난의 원인을 “쿨락(부농)”에게 돌리며 탄압을 강화했고,[309][313] 1929년 12월에는 “쿨락 계급의 말살”을 선언했다.[310] 또한 농민들을 콜호스에 편입시키면서 농업 집단화를 강제적으로 추진했다.[309]
산업화를 위해 5개년 계획을 추진했다. 1932년부터 1934년까지 우크라이나, 북카프카스, 볼가 유역, 카자흐스탄에서 기근이 발생하여 수백만 명이 희생되었다.[309] 카자흐스탄에서는 농업 집단화로 100만 명이 사망했고,[315] 농민의 30%가 중국으로 탈출했다. 우크라이나에서는 400만 명에서 600만 명이 기근으로 희생되었다.[313](홀로도모르)[314] 북카프카수스에서도 100만 명이 희생되었다.[315] 소련 전체의 기근으로 인한 사망자는 600만 명에서 700만 명으로 추정된다.
쿨락(부농)으로 분류된 농민 수백만 명이 극북 지역이나 시베리아의 강제 수용소(굴락)로 강제 이주당했다.[309] 백해-발트 해 운하 건설 등 대규모 인프라 건설에는 쿨락과 탄압받은 공산당원 등의 수감자 노동력이 동원되었다.
3. 2. 2. 농업 집단화와 대기근
1927년 가을, 소련은 농민들이 국가에 싼값으로 곡물을 판매하는 것을 거부하면서 곡물 조달에 어려움을 겪었고, 이는 도시의 식량난으로 이어졌다.[309] 이는 스탈린의 계획을 위협하는 위기 상황이었다.[309]
스탈린은 곡물 조달난의 원인을 쿨락(부농)에게 돌리며 탄압을 강화했고,[309][313] 1929년 12월에는 “쿨락 계급의 말살”을 선언했다.[310] 그는 농민들을 콜호스라는 집단농장에 강제로 편입시키는 농업 집단화를 추진했다.[309] 굶어 죽는 사람들이 발생하자, 스탈린은 집단화에 따른 기근은 “꾸며낸 이야기”이며 “악의적인 소문”이라고 일축했다.[311]
1932년 8월, 스탈린은 사회주의적 재산 보호법을 통해 곡물을 “횡령”한 자는 전 재산 몰수와 함께 사형 또는 10년형에 처하도록 했다.[312] 1932년 말부터 1933년 초에는 국내 여권이 의무화되었지만, 농민에게는 발급되지 않아 도시로의 이동이 제한되었다.[312]
1932년부터 1934년까지 우크라이나, 북카프카스, 볼가 유역, 카자흐스탄에서 기근이 발생하여 수백만 명이 희생되었다.[309] 특히 카자흐스탄에서는 농업 집단화로 100만 명이 사망했고,[315] 농민의 30%가 중국으로 탈출했다. 우크라이나에서는 400만 명에서 600만 명이 기근으로 희생되었는데, 이를 홀로도모르라고 부른다.[314] 북카프카수스에서도 100만 명이 희생되었다.[315] 소련 전체의 기근으로 인한 사망자는 600만 명에서 700만 명으로 추정되지만, 희생자 수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쿨락(부농)으로 분류된 농민 수백만 명은 극북 지역이나 시베리아의 강제 수용소(굴락)로 강제 이주당했다.[309] 백해-발트 해 운하 건설 등 대규모 인프라 건설에는 쿨락과 탄압받은 공산당원 등의 수감자 노동력이 동원되었다. 1930년대의 부농 숙청 운동에서는 650만 명이 희생되었고, 강제 수용소에서는 350만 명이 사망했다.[315]
3. 2. 3. 대숙청
요셉 스탈린 통치 시기 소련에서는 정치적 반대자와 쿨락(부농)으로 분류된 농민, 그리고 소수 민족 등 수백만 명이 희생된 대숙청이 자행되었다.[315] 1929년 12월 스탈린은 "쿨락 계급의 말살"을 선언하고,[310] 농민들을 콜호스에 강제로 편입시키는 농업 집단화를 추진했다.[309]
1932년부터 1934년까지 우크라이나, 북카프카스, 볼가 유역, 카자흐스탄 등지에서 발생한 대기근으로 수백만 명이 사망했다.[309] 특히 우크라이나에서는 홀로도모르로 불리는 대기근으로 400만~600만 명이 희생되었고,[313][314] 북카프카수스에서도 100만 명이 희생되었다.[315] 소련 전체의 기근으로 인한 사망자는 600만 명에서 700만 명으로 추정된다.
쿨락으로 분류된 농민들은 극북 지역이나 시베리아의 굴락으로 강제 이주당했다.[309] 백해-발트 해 운하 건설 등 대규모 인프라 건설에는 이들의 노동력이 동원되었다. 1930년대 부농 숙청 운동으로 650만 명이 희생되었고, 강제 수용소에서는 350만 명이 사망했다.[315]
3. 2. 4. 제2차 세계 대전
1939년 8월, 소련은 나치 독일과 독소 불가침조약을 맺었다. 같은 해 9월 1일 나치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자, 소련도 9월 17일 폴란드를 침공하여 독일과 함께 폴란드를 점령했다.[369] 1940년에는 핀란드의 영토를 빼앗고 발트 3국을 병합했다.[369]
1941년 6월 22일, 나치 독일은 독소 불가침조약을 파기하고 소련을 침공하면서 대조국전쟁이 시작되었다.[369] 이로써 소련은 연합국에 가담하게 되었다. 초기에는 독일군이 우세하여 모스크바 근처까지 진격했으나, 쿠르스크 전투 이후 소련군이 전세를 역전시켰다. 1945년 4월 30일, 소련군은 베를린을 함락시키고 독일과의 전쟁에서 승리했다.[369]
1945년 8월 8일, 소련은 얄타 회담의 협정에 따라 소일 불가침조약을 파기하고 일본 제국에 선전포고하여 일본과의 전쟁에서도 승리했다.[369] 제2차 세계 대전 승리 후, 소련은 만주국을 점령했지만 중국공산당에게 넘겨주었다. 또한 북위 38도선 이북의 한반도를 점령하고 사할린을 획득했다.[369]
제2차 세계 대전은 소련 정부의 국가 지도 방향을 결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소련 정부는 애국주의와 민족주의를 강조하며 소련인을 단결시켰다.[369] 러시아 정교회의 지위를 회복시키고, 소련군의 명칭을 붉은 군대에서 소비에트군으로, '''국가'''를 인터내셔널가에서 소련 찬가로 바꾸었다.[369]
3. 3. 냉전 시대 (1945년 ~ 1991년)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승리한 소련은 만주국을 점령했지만 중국공산당에게 주었다. 또한 북위 38도선 이북의 한반도를 점령하였고, 사할린을 얻었다.[369]
제2차 세계 대전은 전후 소련 정부의 국가 지도 방향을 결정하는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소련 정부는 애국주의와 민족주의를 강조하며 소련인을 단결시켰고,[369] 러시아 정교회의 지위를 회복시켰으며, 소련군 명칭을 붉은 군대에서 소비에트군으로, 국가(國歌)를 인터내셔널가에서 소련 찬가로 바꾸는 등 "프롤레타리아에게는 조국이 없다."는 공산주의 이념에서 벗어난 모습을 보였다.
소련은 냉전 동안 서방 진영에 대항하는 동구권을 이끌며 군비 경쟁, 우주 경쟁, 그리고 전 세계의 대리 전쟁에 참여했다.
소련은 중앙 집중적인 성격, 기술적 후진성, 비효율성으로 인해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다. 막대한 군사비 지출과 동구권 유지 부담은 소련 경제에 더욱 부담을 주었다.
1950년대 후반, 소련은 스푸트니크 1호를 발사하여 미국과의 우주 개발 경쟁을 시작했다.[127] 스푸트니크 5호는 실험용 개들을 우주로 보냈으며, 1961년 유리 가가린이 보스토크 1호를 타고 인류 최초로 우주 비행에 성공했다.[128]
1970년대에는 우주 왕복선 설계가 제안되었지만, 전자 산업의 결함으로 1980년대 후반까지 연기되었다. 최초의 우주 왕복선 부란은 1988년에 무인 비행을 했고, ''프티치카''는 1991년에 취소되었다. 에네르기야는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미사용 초대형 로켓이었다.[131]
1980년대 후반, 소련은 ''살류트'' 정거장을 기반으로 미르 궤도 정거장을 건설하여 민간 연구 임무를 수행했다.[133][132] 미르는 1986년부터 1998년까지 운영되었고, 미국 모듈이 추가되기도 했다. 그러나 기내 화재 이후 2001년 대기권에 진입하여 소멸되었다.[133]
1980년대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글라스노스트(개방성)와 페레스트로이카(개혁) 정책은 소련 체제를 활성화하려 했지만, 오히려 해체를 가속화했다. 소비에트 공화국 전역에서 민족주의 운동이 탄력을 받았고, 공산당의 통제력은 약화되었다. 1991년 8월, 강경파 공산주의자들의 쿠데타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고, 이는 1991년 12월 26일 소련 해체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3. 3. 1. 냉전의 시작과 동서 대립
1933년 1월 아돌프 히틀러가 독일의 정권을 잡았고, 나치 독일은 중앙유럽 일대를 독일인의 생활권(Lebensraum|레벤스라움de)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스탈린은 중앙유럽, 동유럽 국가를 공산화하여 위성 국가로 두고 싶어 했는데, 소련과 독일은 결국 중앙유럽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충돌하게 된다. 1939년 8월 소련과 나치 독일은 독소 불가침조약을 맺고, 그 해 9월 1일 나치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자 소련도 9월 17일 폴란드를 침공하였고 독일과 소련은 폴란드의 영토를 점령하였다. 이어 소련은 1940년에는 핀란드의 영토를 빼앗았고 발트 3국까지 탈환하였다. 그러나 1941년 6월 22일 나치 독일은 독소 불가침조약을 파기, 독일과 소련 사이에 전쟁(대조국전쟁)이 발발했다. 그 결과로써 소련은 연합국에 참전하게 되었다. 초기에는 독일군이 우세하여 소련의 수도 모스크바 근처까지 진격했으나, 쿠르스크 전투 이후 소련군은 전세를 역전시켜 끝내 1945년 4월 30일 나치 독일의 수도 베를린을 함락시키고 독일과의 전쟁에서 승리했다. 소련은 동부 독일을 점령했고 서부 독일을 점령한 프랑스, 영국, 미국과 독일을 분할하여 관리하기로 하였다. 1945년 8월 8일에는 얄타 회담의 협정에 근거해 소-일 불가침조약을 파기, 일본 제국에 선전포고를 하여 일본과 전쟁을 해 승리했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승리한 소련은 만주국도 점령했지만 중국공산당에게 주었다. 또한 북위 38도선 이북의 한반도를 점령하였고, 사할린을 얻을 수 있었다.[369]
3. 3. 2. 흐루쇼프 시대: 탈스탈린화와 해빙
니키타 흐루쇼프 집권 후, 탈스탈린화 정책이 추진되면서 소련 사회에는 흐루쇼프 해빙이라 불리는 자유화와 개방의 시대가 열렸다.[369] 흐루쇼프는 ""개인숭배에 관하여" 연설을 통해 스탈린 시대를 비판했다.[369]
이 시기 소련은 우주 개발 경쟁에서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었다. 1957년 스푸트니크 1호를 발사하여 인류 최초의 인공위성을 쏘아 올렸고,[127] 1961년에는 유리 가가린이 보스토크 1호를 타고 인류 최초로 우주 비행에 성공했다.[128]
그러나 흐루쇼프 시대는 1956년 헝가리 혁명과 같은 사건으로 인해 그 한계가 드러나기도 했다. 또한, 우주 프로그램은 우주 개발 경쟁의 '달' 부분에서 미국에게 패배 하기도 하였다.
3. 3. 3. 브레즈네프 시대: 침체와 긴장 완화
1982년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사망 이후, 유리 안드로포프와 콘스탄틴 체르넨코가 연이어 소련의 지도자가 되었으나, 이들은 모두 병약하여 제대로 된 정책을 펼치지 못했다. 이는 브레즈네프 시대부터 이어진 장로 지배의 문제점을 드러냈다.
1985년,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집권하여 경제 위기를 극복하고자 페레스트로이카(개혁)를 추진했다. 고르바초프는 인민 대표 대회를 창설하고, 최초의 민주적 선거를 실시하여 개혁의 걸림돌이었던 보수 관료들을 제거하려 했다. 또한,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사고 이후 글라스노스트를 통해 정보 통제를 완화하고, 소련 헌법 제6조(당의 지도성)를 삭제하여 일당 독재제를 포기하고 다당제와 대통령제를 도입했다. 1990년, 고르바초프는 간접 선거를 통해 초대 소련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은 소련 공산당 내부의 갈등을 심화시켰다. 특히 보수파는 개혁으로 인해 군산 복합체 등 자신들의 기득권을 잃을 것을 우려했다. 공산당은 보리스 옐친 등 급진 개혁파, 고르바초프 등 온건 개혁파, 그리고 보수파로 분열되었다. 경제 개혁은 지지부진했고, 인플레이션과 물자 부족은 심각해졌다. 보리스 옐친은 1990년 소련 공산당을 탈당하고 지역 간 대표 그룹을 결성하여 공산당에 대항했다. 1991년 러시아 공화국 대통령 선거에서 옐친이 당선되면서 급진 개혁파의 영향력이 커졌고, 이는 보수파를 자극하여 8월 쿠데타의 한 원인이 되었다.
3. 3. 4. 아프가니스탄 침공 (1979년)
소련은 1979년부터 1989년까지 아프가니스탄에 군사적으로 개입했다.[3]
3. 3. 5.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 (1985년 ~)
1982년 레오니트 브레즈네프가 사망한 후, 유리 안드로포프, 콘스탄틴 체르넨코와 같은 고령의 지도자들이 잇따라 권력을 잡았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취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투병 생활을 하다 결국 사망했다. 이 때문에 경제 문제를 중심으로 한 내정뿐만 아니라 외교, 아프가니스탄 문제 등에 대해서도 구체적인 정책을 거의 실행하지 못하면서 브레즈네프 시대부터 이어져온 장로 지배를 국내외에 각인시켰다.
이후, 유리 안드로포프와 콘스탄틴 체르넨코 시대에 더욱 심각해진 경제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1985년 3월 미하일 고르바초프 정권이 탄생했다. 고르바초프 정권은 사회주의 체제의 개혁과 쇄신을 내걸고 페레스트로이카(개혁)를 추진했다. 고르바초프의 선출은 하룻밤 사이에 열린 회의에서 결정되었다.
이로써 오랫동안 지속된 일당 독재 체제하에서 부패한 정치 체제의 개혁이 진행되었다. 1988년에는 기존의 소련 최고 회의를 대신하여 인민 대표 대회 창설이 결정되었고, 이듬해 3월 26일에는 소련 최초의 민주적 선거인 제1회 인민 대표 대회 선거가 실시되었다. 고르바초프는 인민 대표를 국민의 직접 선거로 선출함으로써 개혁의 걸림돌이 되고 있던 보수 관료(아파라치키)를 제거하고자 했다. 1986년 4월에 발생한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사고의 대응 지연과 은폐로 소련의 심각한 관료주의 체질이 드러나자, 고르바초프는 글라스노스트를 본격화하여 정보 통제 완화를 추진했다. 이를 통해 소련 국민들 사이에서는 역사를 다시 검토하고 활발한 정치 논의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글라스노스트가 진전되면서 국민들 사이에서 민주화 요구가 확대되었고, 이를 수용하여 소련 공산당의 지도적 역할을 명시한 소련 헌법 제6조가 삭제되었다. 1990년에는 소련 공산당의 일당 독재제 포기와 다당제, 대통령제 도입이 결정되었다. 같은 해 3월 15일, 인민 대표에 의한 간접 선거를 통해 고르바초프가 초대 소련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이와 동시에 당국의 검열을 폐지하는 신문법이 제정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일련의 정치·경제 개혁은 일정한 성과를 거두었지만, 개혁의 범위와 속도를 둘러싸고 소련 공산당 내부의 갈등을 격화시켰다. 특히 보수파는 개혁으로 인해 군산 복합체 등 자신들의 기득권이 상실될 것을 우려하여 강하게 반발했다. 공산당은 보리스 옐친 등 급진 개혁파, 고르바초프 등 온건 개혁파, 그리고 보수파 그룹으로 분열되었다. 당내 분열로 인해 국내 경제 개혁은 더디게 진행되었고, 경제 위기는 더욱 심각해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보리스 옐친은 보수파가 장악한 공산당을 떠나 1990년 7월 소련 공산당 제28차 당 대회를 계기로 탈당했다. 그는 가브리엘 포포프, 아나톨리 삽차크, 유리 아파나셰프, 안드레이 사하로프 등과 함께 비공산당 계열의 정치 조직인 지역 간 대표 그룹을 결성하여 공산당에 대항했다. 한편, 온건 개혁파였던 고르바초프는 보수파와 급진 개혁파 양쪽의 압박을 받아 획기적인 개혁을 추진할 수 없었다.
기존의 중앙 집권적인 명령 경제를 폐지하고 시장 메커니즘을 도입하려 했지만, 보수파의 저항 등으로 경제 개혁이 지연되면서 국내에서는 인플레이션과 물자 부족이 심각해졌다. 시민들 사이에서는 상황을 타개하지 못하는 고르바초프와 소련 공산당에 대한 비판이 높아졌다. 이러한 국민들의 불만을 흡수한 것은 보리스 옐친을 비롯한 급진 개혁파였다. 1991년 6월 12일에는 러시아 공화국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어 옐친이 당선되었고, 7월 10일에 취임했다. 러시아 공화국 대통령 선거와 같은 날 모스크바 시장 선거와 레닌그라드 시장 선거가 각각 실시되어 포포프와 삽차크가 각각 모스크바 시장과 레닌그라드 시장에 당선되었다. 이처럼 급진 개혁파가 약진하면서 보수파는 초조함을 느꼈고, 이는 훗날 8월 쿠데타로 이어지는 요인 중 하나가 되었다.
3. 3. 6. 동유럽 혁명과 냉전 종식
1982년 브레즈네프가 사망한 후, 유리 안드로포프(Yuri Andropov)와 콘스탄틴 체르넨코(Konstantin Chernenko) 같은 고령의 지도자들이 연이어 권력을 잡았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취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병으로 사망했기 때문에, 경제 문제를 비롯한 내정은 물론 외교나 아프가니스탄 문제에 대해서도 구체적인 정책을 거의 실행하지 못했다. 이는 브레즈네프 시대부터 이어진 장로 지배를 국내외에 각인시키는 결과로 이어졌다.
이후, 심각해진 경제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1985년 3월 미하일 고르바초프(Mikhail Gorbachev) 정권이 탄생했다. 고르바초프 정권은 사회주의 체제의 개혁과 쇄신을 목표로 페레스트로이카(개혁)를 추진했으며, 고르바초프의 선출은 하룻밤 만에 결정되었다.
오랜 기간 지속된 일당 독재 체제하에서 부패한 정치 체제의 개혁이 시작되었다. 1988년에는 기존의 소련 최고 회의를 대신하여 인민 대표 대회 창설이 결정되었고, 이듬해 3월 26일 소련 최초의 민주적 선거인 제1회 인민 대표 대회 선거가 실시되었다. 고르바초프는 인민 대표를 국민의 직접 선거로 선출하여 개혁의 걸림돌이었던 보수 관료(아파라치키)를 제거하고자 했다. 1986년 4월 발생한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사고에 대한 대응 지연과 은폐는 소련의 심각한 관료주의 체질을 드러냈고, 고르바초프는 글라스노스트를 본격화하여 정보 통제 완화를 추진했다. 이를 통해 소련 국민들 사이에서는 역사를 다시 생각하고 활발한 정치 토론을 하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글라스노스트의 진전과 함께 국민들 사이에서 민주화 요구가 커졌고, 이를 수용하여 소련 공산당의 지도적 역할을 명시한 소련 헌법 제6조가 삭제되었다. 1990년에는 소련 공산당의 일당 독재제를 포기하고 다당제와 대통령제를 도입하기로 결정했다. 같은 해 3월 15일, 인민 대표의 간접 선거를 통해 고르바초프가 초대 소련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이와 함께 당국의 검열을 폐지하는 신문법이 제정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정치·경제 개혁은 일정한 성과를 거두었지만, 개혁의 범위와 속도를 둘러싸고 소련 공산당 내부의 갈등을 격화시켰다. 특히 보수파는 개혁으로 인해 군산 복합체 등 자신들의 기득권이 사라지는 것을 우려하여 강하게 반발했다. 공산당은 옐친 등 급진 개혁파, 고르바초프 등 온건 개혁파, 그리고 보수파로 분열되었다. 당내 분열로 인해 국내 경제 개혁은 더디게 진행되었고, 경제 위기는 더욱 심각해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보리스 옐친(Boris Yeltsin)은 보수파가 장악한 공산당을 떠나 1990년 7월 소련 공산당 제28차 당 대회를 계기로 탈당했다. 그는 가브리엘 포포프(Gavril Popov), 아나톨리 사브차크(Anatoly Sobchak), 유리 아파나셰프(Yuri Afanasyev), 안드레이 사하로프(Andrei Sakharov) 등과 함께 비공산당 계열의 정치 조직인 지역 간 대표 그룹을 결성하여 공산당에 맞섰다. 한편, 온건 개혁파였던 고르바초프는 보수파와 급진 개혁파 양쪽의 압박을 받아 획기적인 개혁을 추진하지 못했다.
기존의 중앙 집권적인 명령 경제를 폐지하고 시장 메커니즘을 도입하려 했으나, 보수파의 저항 등으로 경제 개혁이 지연되면서 국내에서는 인플레와 물자 부족이 심각해졌다. 시민들은 상황을 해결하지 못하는 고르바초프와 소련 공산당에 대한 비판을 쏟아냈다. 이러한 국민들의 불만을 흡수한 것은 옐친 등 급진 개혁파였다. 1991년 6월 12일 러시아 공화국 대통령 선거에서 옐친이 당선되어 7월 10일 취임했다. 같은 날 모스크바 시장 선거와 레닌그라드 시장 선거가 실시되어 포포프와 사브차크가 각각 당선되었다. 이러한 급진 개혁파의 약진은 보수파를 초조하게 만들었고, 이는 훗날 8월 쿠데타의 한 원인이 되었다.
3. 4. 소련의 붕괴 (1991년)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글라스노스트(개방)와 페레스트로이카(개혁) 정책은 소련 체제를 개혁하려는 시도였으나, 결과적으로 소련의 붕괴를 가속화했다. 소비에트 공화국들 사이에서 민족주의 운동이 강화되었고, 소련 공산당의 통제력은 약화되었다.[61]
1980년대 중반, 소련의 마지막 지도자였던 고르바초프는 ''글라스노스트''와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을 통해 소련 체제를 개혁하고 경제를 자유화하려 했다. 이는 공산당의 지배력을 유지하면서 경제 침체를 극복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고르바초프의 개혁으로 냉전은 종식되었지만, 소련 내에서는 민족주의와 분리주의 운동이 강화되었다.
1991년 8월, 공산당 강경파들은 고르바초프에 대한 쿠데타를 일으켰으나, 보리스 옐친 러시아 대통령을 중심으로 한 반대 세력에 의해 저지되어 실패했다. 이 사건으로 공산당의 권위는 크게 실추되었고,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를 비롯한 여러 공화국들이 독립을 선언했다.
1948년 소련은 “자연 개조 계획”을 실행하며 목화 재배를 위해 대규모 관개 사업을 시작했다. 그 결과, 1960년을 기점으로 아랄해의 면적이 급격히 줄어들어 말라붙기 시작했고, 1979년에는 염분 농도 상승으로 어류 대부분이 폐사하여 어업이 붕괴되었다. 모래와 소금을 휘날리는 모래폭풍에는 다량의 소금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잔류 농약과 화학 비료, 세균 무기의 잔재 등 인체에 유해한 물질이 포함되어 있어 천식 등 호흡기 질환이 대유행했다. 식물은 자라지 못하고 죽음의 사막이 되어 사람이 살 수 없게 되었고, 농업도 불가능해지면서 많은 마을과 도시가 사라졌다.
결국 1991년 12월 25일, 고르바초프는 사임하고 소련의 해체가 공식화되었다. 이로써 거의 70년간 지속된 소련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소련의 해체 이후 모든 공화국은 포스트소비에트 독립국으로 탄생했다.[61]
소련 붕괴 후인 2005년, 카자흐스탄 정부는 아랄해의 소멸을 막기 위해 세계은행 등의 지원을 받아 코카랄 둑을 건설하는 등의 노력을 기울였고, 북아랄해는 회복 추세에 있다. 그러나 우즈베키스탄이 영유하는 남아랄해는, 말라붙은 호수 바닥에서 석유와 가스 채굴 계획을 세우고 있다.
3. 4. 1. 민족 문제의 격화와 연방 체제의 동요
1980년대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글라스노스트(개방성)와 페레스트로이카(개혁) 정책은 소련 체제를 활성화하려고 했지만, 오히려 해체를 가속화했다.[61] 소비에트 공화국 전역에서 민족주의 운동이 탄력을 받았고, 공산당의 통제력은 약화되었다.[61]
1924년, 1936년, 그리고 1977년에 공포된 소련 헌법은 국가 권력을 제한하지 않았다.[50] 당, 최고 소비에트, 그리고 정부의 행정부와 입법부를 대표하는 인민위원회 사이에는 공식적인 권력 분립이 존재하지 않았다.[51] 이 시스템은 법령보다는 비공식적인 관례에 의해 지배되었으며, 확립된 지도자 승계 메커니즘은 존재하지 않았다.[52]
1990년 고르바초프는 소련 대통령직을 신설하고 그 직에 취임하여 당과 무관하게 집행부에 권력을 집중시켰고,[58] 소련 인민위원회로 개명된 정부를 자신의 통제하에 두었다.[59]
고르바초프 하의 연방 당국, 보리스 옐친이 이끌고 새로 선출된 러시아 SFSR 최고 소비에트를 장악한 개혁가들, 그리고 공산당 강경파 사이의 긴장이 고조되었다. 1991년 8월 19일부터 21일까지 강경파는 쿠데타를 기도했다. 쿠데타는 실패했고, 소련 국가평의회는 '과도기' 동안 최고 국가 권력 기관이 되었다.[60] 고르바초프는 서기장직에서 사임하고 소련이 멸망하기까지 마지막 몇 달 동안만 대통령직을 유지했다.[61]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로 모든 공화국이 포스트소비에트 독립국으로 탄생했다.[61]
소련 붕괴 후인 2005년, 카자흐스탄 정부는 아랄해의 소멸을 막기 위해 세계은행 등의 지원을 받아 코카랄 둑을 건설하는 등의 노력을 기울였고, 북아랄해는 회복 추세에 있다. 그러나 우즈베키스탄이 영유하는 남아랄해는, 말라붙은 호수 바닥에서 석유와 가스 채굴 계획을 세우고 있다.
구성국이라는 존재는 헌법에 명시되어 있으며, 예를 들어 1936년 연방 헌법에서는 구성국을 다음과 같이 명시하고 있다.
> ...'''제13조'''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은 평등한 권리를 가진 아래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자유 의사에 따른 결합을 기반으로 형성된 연합 국가이다.
>
> ...'''제15조''' 연방 구성 공화국은 각각 공화국의 특수성을 고려하고, 연방 헌법에 부합하는 범위 내에서 고유한 헌법을 가진다.
3. 4. 2. 8월 쿠데타와 공산당 해체
1980년대 중반, 소련의 마지막 지도자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글라스노스트''(개방)와 ''페레스트로이카''(개혁) 정책을 통해 소련 체제를 개혁하고 경제를 자유화하려 했다. 이는 공산당의 통제력을 유지하면서 경제 침체를 극복하기 위한 시도였다. 고르바초프의 개혁으로 냉전은 종식되었지만, 소련 내에서는 민족주의와 분리주의 운동이 강화되었다.
1991년 8월, 공산당 강경파들은 고르바초프에 대한 쿠데타를 일으켰으나, 보리스 옐친 러시아 대통령을 중심으로 한 반대 세력에 의해 실패했다. 이 사건으로 공산당의 권위는 크게 실추되었고,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를 비롯한 여러 공화국들이 독립을 선언했다.
결국 1991년 12월 25일, 고르바초프는 사임하고 소련의 해체가 공식화되었다. 이로써 거의 70년간 지속된 소련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3. 4. 3. 독립 국가 연합 창설과 소련 해체
1989년 혁명의 여파로 동유럽의 공산 정권들이 무너지자, 소련 내에서도 글라스노스트와 페레스트로이카의 영향으로 민족주의와 분리주의 움직임이 거세졌다. 발트 3국을 필두로 여러 공화국들이 독립을 선언하며 연방 탈퇴를 시도했다.
1991년 8월 쿠데타는 이러한 흐름을 더욱 가속화시켰다. 미하일 고르바초프 대통령의 권위는 실추되었고, 보리스 옐친 러시아 대통령을 중심으로 한 개혁 세력이 부상했다.
결국 1991년 12월 8일,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3개 공화국 지도자들은 벨로베자 협정을 체결하여 소련 해체와 독립 국가 연합(CIS) 창설을 선언했다. 이는 사실상 소련의 종말을 의미했다. 12월 21일에는 알마아타 의정서를 통해 다른 공화국들도 CIS에 합류하면서 소련은 공식적으로 해체되었다.
4. 지리
22402200km2 면적의 소련은 세계에서 가장 큰 국가였으며,[10] 이 지위는 러시아 연방이 계승하고 있다.[11] 지구 육지 면적의 6분의 1을 차지하는 그 크기는 북아메리카와 비슷했다.[12] 소련의 영토는 11개의 시간대를 가로질러 서쪽에서 동쪽으로 이상, 남쪽에서 북쪽으로 이상 뻗어 있었다. 소련에는 툰드라, 타이가, 스텝, 사막, 산악의 다섯 가지 기후대가 있었다.
소련은 세계에서 가장 긴 국경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길이는 가 넘었으며, 이는 지구 둘레의 1.5배에 달했다. 그 중 3분의 2는 해안선이었다. 소련은 1945년부터 1991년까지 아프가니스탄, 중화인민공화국, 체코슬로바키아, 핀란드, 헝가리, 이란, 몽골, 북한, 노르웨이, 폴란드, 루마니아, 터키와 국경을 접하고 있었다. 베링 해협은 소련과 미국을 갈라놓았다.
소련에서 가장 높은 산은 타지키스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코뮤니즘봉(현재 이스마일 소모니 봉)으로, 높이는 였다. 소련은 또한 세계에서 가장 큰 호수 대부분을 포함하고 있었다. 카스피해(이란과 공유), 그리고 세계에서 가장 크고(부피 기준) 깊은 담수호이자 러시아 내륙의 수역인 바이칼 호가 있다.
소련의 환경 문제는 아랄 해의 사례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4. 1. 영토와 기후
1948년 소련은 자연 개조 계획을 실행하며 목화 재배를 위해 대규모 관개 사업을 시작했다. 그 결과, 1960년을 기점으로 아랄해의 면적이 급격히 줄어들어 말라붙기 시작했고, 1979년에는 염분 농도 상승으로 어류 대부분이 폐사하여 어업이 붕괴되었다. 모래와 소금을 휘날리는 모래폭풍에는 다량의 소금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잔류 농약과 화학 비료, 세균 무기의 잔재 등 인체에 유해한 물질이 포함되어 있어 천식 등 호흡기 질환이 대유행했다. 식물은 자라지 못하고 죽음의 사막이 되어 사람이 살 수 없게 되었고, 농업도 불가능해지면서 많은 마을과 도시가 사라졌다.소련 붕괴 후인 2005년, 카자흐스탄 정부는 아랄해의 소멸을 막기 위해 세계은행 등의 지원을 받아 코카랄 둑을 건설하는 등의 노력을 기울였고, 북아랄해는 회복 추세에 있다. 그러나 우즈베키스탄이 영유하는 남아랄해는 말라붙은 호수 바닥에서 석유와 가스 채굴 계획을 세우고 있다.
4. 2. 환경 문제
1948년 소련은 "자연 개조 계획"을 실행하며 목화 재배를 위해 대규모 관개 사업을 시작했다. 그 결과, 1960년을 기점으로 아랄해의 면적이 급격히 줄어들어 말라붙기 시작했고, 1979년에는 염분 농도 상승으로 어류 대부분이 폐사하여 어업이 붕괴되었다. 모래와 소금을 휘날리는 모래폭풍에는 다량의 소금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잔류 농약과 화학 비료, 세균 무기의 잔재 등 인체에 유해한 물질이 포함되어 있어 천식 등 호흡기 질환이 대유행했다. 식물은 자라지 못하고 죽음의 사막이 되어 사람이 살 수 없게 되었고, 농업도 불가능해지면서 많은 마을과 도시가 사라졌다.[217][218]소련 붕괴 후인 2005년, 카자흐스탄 정부는 아랄해의 소멸을 막기 위해 세계은행 등의 지원을 받아 코카랄 둑을 건설하는 등의 노력을 기울였고, 북아랄해는 회복 추세에 있다. 그러나 우즈베키스탄이 영유하는 남아랄해는 말라붙은 호수 바닥에서 석유와 가스 채굴 계획을 세우고 있다.[217][218]
5. 정치
소련에는 소련 최고회의가 대표하는 입법부, 장관회의가 대표하는 행정부, 그리고 유일한 합법 정당이자 국가의 최종 정책 결정자인 소련 공산당(CPSU)의 세 가지 권력 계층이 있었다.[32]
소련 최고 소비에트(소비에트 의회의 후신)는 소련 역사의 대부분 기간 동안 명목상 최고 국가 기관이었다.[41] 초창기에는 당의 결정을 승인하고 이행하는 도장 역할을 했지만,[42] 1950년대 후반, 1960년대, 1970년대에 권한과 기능이 확대되어 새로운 국가 위원회와 위원회를 설립했다. 5개년 계획과 예산 승인과 관련된 권한도 추가로 얻었다.[42] 최고 소비에트는 본회의(일반적으로 연 2회 개최) 사이에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최고 소비에트 간부회(중앙집행위원회의 후신)[45]를 선출하고,[43] 최고 재판소,[43] 검찰총장,[44] 그리고 소련 장관평의회(1946년 이전에는 인민위원회 평의회)를 임명했다. 소련 장관평의회는 의장(총리)을 수장으로 하며, 경제와 사회 행정을 담당하는 거대한 관료 조직을 운영했다.[45] 소련 구성 공화국의 국가 및 당 구조는 중앙 기관의 구조를 대체로 모방했지만, 러시아 SFSR은 다른 구성 공화국과 달리 대부분의 역사 동안 CPSU의 공화국 지부가 없었고 1990년까지 전국 당에 의해 직접 통치되었다. 지방 당국은 마찬가지로 당위원회, 지방 소비에트 및 집행위원회로 조직되었다. 국가 체제는 명목상 연방제였지만, 당은 일원적이었다.[46]
국가 안보 경찰(KGB와 그 전신 기관들)은 소련 정치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붉은 테러와 대숙청[47]에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스탈린 사후 엄격한 당의 통제를 받게 되었다. 유리 안드로포프 체제하에서 KGB는 정치적 반대를 억압하고 광범위한 정보원 네트워크를 유지하며, 당-국가 구조에서 어느 정도 독립적인 정치 행위자로서 다시 자리매김했고,[48] 1970년대 후반과 1980년대 초 고위 당 간부를 겨냥한 부패 방지 운동으로 절정에 달했다.[49]
1924년, 1936년, 그리고 1977년에 공포된 소련 헌법은 국가 권력을 제한하지 않았다.[50] 당, 최고 소비에트, 그리고 정부의 행정부와 입법부를 대표하는 인민위원회 사이에는 공식적인 권력 분립이 존재하지 않았다.[51] 이 시스템은 법령보다는 비공식적인 관례에 의해 지배되었으며, 확립된 지도자 승계 메커니즘은 존재하지 않았다. 레닌[52]과 스탈린[53] 사후, 그리고 흐루쇼프의 해임[54] 이후(이는 정치국과 중앙위원회의 결정 때문이었다)[56] 정치국에서는 치열하고 때로는 치명적인 권력 투쟁이 벌어졌다. 말렌코프[55]와 흐루쇼프를 제외한 고르바초프 이전의 모든 공산당 지도자들은 당내 투쟁 중에 해임되었고, 나머지는 모두 재임 중에 사망했다.[56]
1988년부터 1990년 사이에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당 최고 기관의 권력을 약화시키고 최고 소비에트의 당 의존성을 줄이는 개혁을 단행했다. 소련 역사상 최초로 1989년 3월 경쟁 선거를 통해 대다수의 의원이 직접 선출된 인민대표자회의가 설립되었다. 이 회의는 이제 최고 소비에트를 선출했고, 최고 소비에트는 상임 의회가 되었으며 이전보다 훨씬 강력해졌다. 1920년대 이후 처음으로 당과 인민위원회의 제안을 무조건 승인하지 않았다.[57] 1990년 고르바초프는 소련 대통령직을 신설하고 그 직에 취임하여 당과 무관하게 집행부에 권력을 집중시켰고,[58] 소련 인민위원회로 개명된 정부를 자신의 통제하에 두었다.[59]
고르바초프 하의 연방 당국, 러시아에서 보리스 옐친이 이끌고 새로 선출된 러시아 SFSR 최고 소비에트를 장악한 개혁가들, 그리고 공산당 강경파 사이의 긴장이 고조되었다. 1991년 8월 19일부터 21일까지 강경파는 쿠데타를 기도했다. 쿠데타는 실패했고, 소련 국가평의회는 '과도기' 동안 최고 국가 권력 기관이 되었다.[60] 고르바초프는 서기장직에서 사임하고 소련이 멸망하기까지 마지막 몇 달 동안만 대통령직을 유지했다.[61]
5. 1. 일당 독재 체제
내각은 소련 최고 집행 기관이자 최고 회의의 휘하기관이었다. 내각의 수장은 총리이며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에서 선출했다.역대 소련의 총리는 다음과 같다.
이름 | 재임 기간 |
---|---|
이오시프 스탈린 | 1941년 5월 6일 ~ 1953년 3월 5일 |
게오르기 말렌코프 | 1953년 ~ 1955년 |
니콜라이 불가닌 | 1955년 ~ 1958년 |
니키타 흐루쇼프 | 1958년 3월 27일 ~ 1964년 10월 14일 |
미하일 고르바초프 | 1985년 ~ 1990년 3월 |
발렌틴 파블로프 | 1991년 1월 14일 ~ 1991년 8월 22일 |
이반 실라예프 | 1991년 9월 6일 ~ 1991년 12월 25일 |
소련에는 소련 최고회의가 대표하는 입법부, 장관회의가 대표하는 행정부, 그리고 유일한 합법 정당이자 국가의 최종 정책 결정자인 소련 공산당의 세 가지 권력 계층이 있었다.[32]
소련 공산당의 최고 의사결정 기구는 중앙위원회였으며, 당 대회와 회의에서 선출되었다. 중앙위원회는 다시 정치국(1952년부터 1966년까지는 서기국이라 불림), 서기국, 그리고 서기장(1953년부터 1966년까지는 제1서기)을 선출했는데, 서기장은 사실상 소련의 최고 지도자였다.[33] 권력 장악 정도에 따라 정치국이 집단 지도체로서, 또는 항상 정치국원 중 한 명이었던 서기장이 당과 국가를 실질적으로 이끌었다.[34](1941년 이후 스탈린의 매우 개인적인 권력 행사 기간은 제외)[35] 일반 당원들의 통제를 받지 않았는데, 당 조직의 핵심 원칙은 민주적 중앙집중제였으며, 상급 기관에 대한 엄격한 복종을 요구했고, 선거는 무투표로 상부에서 제안된 후보를 승인했다.[36]
소련 공산당은 주로 임명 시스템에 대한 통제를 통해 국가에 대한 지배력을 유지했다. 모든 고위 정부 관리와 최고 소비에트의 대의원 대부분이 소련 공산당 당원이었다. 당 지도자들 중 스탈린(1941~1953)과 흐루쇼프(1958~1964)는 총리직을 겸임했다. 흐루쇼프의 강제 퇴임 이후 당 지도자는 이러한 이중 직책을 맡는 것이 금지되었지만,[37] 이후 서기장들은 임기 중 적어도 일부 기간 동안 대부분 의례적인 직책인 최고 소비에트 수뇌부 의장, 즉 명목상의 국가 원수직을 맡았다. 하급 기관들은 하부 당 조직의 감독을 받았고, 때로는 그 기능을 대체하기도 했다.[38]
그러나 실제로 당이 국가 관료 조직에 대해 행사할 수 있었던 통제 수준은, 특히 스탈린 사후에는 완전하지 않았고, 관료 조직은 당과 때로는 상충되는 다른 이익을 추구했으며,[39] 파벌은 공식적으로 금지되었지만, 당 자체가 상하로 일치된 단일체도 아니었다.[40]
1924년, 1936년, 그리고 1977년에 공포된 소련 헌법은 국가 권력을 제한하지 않았다.[50] 당, 최고 소비에트, 그리고 정부의 행정부와 입법부를 대표하는 인민위원회 사이에는 공식적인 권력 분립이 존재하지 않았다.[51] 이 시스템은 법령보다는 비공식적인 관례에 의해 지배되었으며, 확립된 지도자 승계 메커니즘은 존재하지 않았다. 레닌[52]과 스탈린[53] 사후, 그리고 흐루쇼프의 해임[54] 이후(이는 정치국과 중앙위원회의 결정 때문이었다)[56] 정치국에서는 치열하고 때로는 치명적인 권력 투쟁이 벌어졌다. 고르바초프 이전의 모든 공산당 지도자들은 당내 투쟁 중에 해임된 말렌코프[55]와 흐루쇼프를 제외하고는 모두 재임 중에 사망했다.[56]
1988년부터 1990년 사이에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당 최고 기관의 권력을 약화시키고 최고 소비에트의 당 의존성을 줄이는 개혁을 단행했다. 소련 역사상 최초로 1989년 3월 경쟁 선거를 통해 대다수의 의원이 직접 선출된 인민대표자회의가 설립되었다. 이 회의는 이제 최고 소비에트를 선출했고, 최고 소비에트는 상임 의회가 되었으며 이전보다 훨씬 강력해졌다. 1920년대 이후 처음으로 당과 인민위원회의 제안을 무조건 승인하지 않았다.[57] 1990년 고르바초프는 소련 대통령직을 신설하고 그 직에 취임하여 당과 무관하게 집행부에 권력을 집중시켰고,[58] 소련 인민위원회로 개명된 정부를 자신의 통제하에 두었다.[59]
고르바초프 하의 연방 당국, 러시아에서 보리스 옐친이 이끌고 새로 선출된 러시아 SFSR 최고 소비에트를 장악한 개혁가들, 그리고 공산당 강경파 사이의 긴장이 고조되었다. 1991년 8월 19일부터 21일까지 강경파는 쿠데타를 기도했다. 쿠데타는 실패했고, 소련 국가평의회는 '과도기' 동안 최고 국가 권력 기관이 되었다.[60] 고르바초프는 서기장직에서 사임하고 소련이 멸망하기까지 마지막 몇 달 동안만 대통령직을 유지했다.[61]
5. 2. 소비에트 제도
내각은 소련 최고 집행 기관이면서 최고 회의의 휘하기관이었다. 내각의 수장은 총리이며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에서 선출했다.역대 소련의 총리는 다음과 같다.
- 이오시프 스탈린 (1941년 5월 6일 ~ 1945년)
- 이오시프 스탈린 (1945년 ~ 1953년 3월 5일)
- 게오르기 말렌코프 (1953년 ~ 1955년)
- 니콜라이 불가닌 (1955년 ~ 1958년)
- 니키타 흐루쇼프 (1958년 3월 27일 ~ 1964년 10월 14일)
- 미하일 고르바초프 (1985년 ~ 1990년 3월)
- 발렌틴 파블로프 (1991년 1월 14일 ~ 1991년 8월 22일)
- 이반 실라예프 (1991년 9월 6일 ~ 1991년 12월 25일)
소련 최고평의회(Верховный Совет)는 소련의 최고 권력기관으로 법을 만들고 강력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상설 기관으로는 최고평의회 상임위원회를 선출했으며, 최고 회의 간부회 의장이 소련 국가 원수였다.
연방평의회(연방원)와 민족평의회(민족원)의 양원제를 택했으며, 임기는 모두 5년이었다. 연방 회의는 30만 명을 1개 선거구로 한 소선거구제를 택했고, 민족 회의는 각 민족별 인구를 반영해 설치했다. 그 대의원은 소련의 15개 공화국, 11개 자치공화국, 5개의 자치구 및 민족관구에서 선출되었다.
소련에는 세 가지 권력 계층이 있었다. 소련 최고회의가 대표하는 입법부, 장관회의가 대표하는 행정부, 그리고 유일한 합법 정당이자 국가의 최종 정책 결정자인 소련 공산당(CPSU)이었다.[32]
소련 공산당의 최고 의사결정 기구는 중앙위원회였으며, 당 대회와 회의에서 선출되었다. 중앙위원회는 다시 정치국(1952년부터 1966년까지는 서기국이라 불림), 서기국, 그리고 서기장(1953년부터 1966년까지는 제1서기)을 선출했는데, 서기장은 사실상 소련의 최고 지도자였다.[33] 권력 장악 정도에 따라 정치국이 집단 지도체로서, 또는 항상 정치국원 중 한 명이었던 서기장이 당과 국가를 실질적으로 이끌었다.[34](1941년 이후 스탈린의 매우 개인적인 권력 행사 기간, 즉 정치국이 아닌 국무원의 직책을 통해 직접 행사한 기간 제외)[35] 일반 당원들의 통제를 받지 않았는데, 당 조직의 핵심 원칙은 민주적 중앙집중제였으며, 상급 기관에 대한 엄격한 복종을 요구했고, 선거는 무투표로 상부에서 제안된 후보를 승인했다.[36]
소련 공산당은 주로 임명 시스템에 대한 통제를 통해 국가에 대한 지배력을 유지했다. 모든 고위 정부 관리와 최고 소비에트의 대의원 대부분이 소련 공산당 당원이었다. 당 지도자들 중 스탈린(1941~1953)과 흐루쇼프(1958~1964)는 총리직을 겸임했다. 흐루쇼프의 강제 퇴임 이후 당 지도자는 이러한 이중 직책을 맡는 것이 금지되었지만,[37] 이후 서기장들은 임기 중 적어도 일부 기간 동안 대부분 의례적인 직책인 최고 소비에트 수뇌부 의장, 즉 명목상의 국가 원수직을 맡았다. 하급 기관들은 하부 당 조직의 감독을 받았고, 때로는 그 기능을 대체하기도 했다.[38]
그러나 실제로 당이 국가 관료 조직에 대해 행사할 수 있었던 통제 수준은, 특히 스탈린 사후에는 전혀 완벽하지 않았고, 관료 조직은 당과 때로는 상충되는 다른 이익을 추구했으며,[39] 파벌은 공식적으로 금지되었지만, 당 자체가 상하로 일치된 단일체도 아니었다.[40]
1924년, 1936년, 그리고 1977년에 공포된 소련 헌법은 국가 권력을 제한하지 않았다.[50] 당, 최고 소비에트, 그리고 정부의 행정부와 입법부를 대표하는 인민위원회 사이에는 공식적인 권력 분립이 존재하지 않았다.[51] 이 시스템은 법령보다는 비공식적인 관례에 의해 지배되었으며, 확립된 지도자 승계 메커니즘은 존재하지 않았다. 레닌[52]과 스탈린[53] 사후, 그리고 흐루쇼프의 해임[54] 이후(이는 정치국과 중앙위원회의 결정 때문이었다)[56] 정치국에서는 치열하고 때로는 치명적인 권력 투쟁이 벌어졌다. 고르바초프 이전의 모든 공산당 지도자들은 당내 투쟁 중에 해임된 말렌코프[55]와 흐루쇼프를 제외하고는 모두 재임 중에 사망했다.[56]
1988년부터 1990년 사이에 상당한 반대에 직면한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당 최고 기관의 권력을 약화시키고 최고 소비에트의 당 의존성을 줄이는 개혁을 단행했다. 소련 역사상 최초로 1989년 3월 경쟁 선거를 통해 대다수의 의원이 직접 선출된 인민대표자회의가 설립되었다. 이 회의는 이제 최고 소비에트를 선출했고, 최고 소비에트는 상임 의회가 되었으며 이전보다 훨씬 강력해졌다. 1920년대 이후 처음으로 당과 인민위원회의 제안을 무조건 승인하지 않았다.[57] 1990년 고르바초프는 소련 대통령직을 신설하고 그 직에 취임하여 당과 무관하게 집행부에 권력을 집중시켰고,[58] 이제 소련 인민위원회로 개명된 정부를 자신의 통제하에 두었다.[59]
고르바초프 하의 연방 당국, 러시아에서 보리스 옐친이 이끌고 새로 선출된 러시아 SFSR 최고 소비에트를 장악한 개혁가들, 그리고 공산당 강경파 사이의 긴장이 고조되었다. 1991년 8월 19일부터 21일까지 강경파는 쿠데타를 기도했다. 쿠데타는 실패했고, 소련 국가평의회는 '과도기' 동안 최고 국가 권력 기관이 되었다.[60] 고르바초프는 서기장직에서 사임하고 소련이 멸망하기까지 마지막 몇 달 동안만 대통령직을 유지했다.[61]
사법부는 다른 정부 부처로부터 독립적이지 않았다. 최고재판소는 하급 법원(인민재판소)을 감독하고 헌법에 따라 또는 최고회의가 해석한 대로 법을 적용했다. 헌법감독위원회는 법률과 행위의 헌법적합성을 검토했다. 소련은 판사, 검찰총장, 변호사가 "진실을 밝히기" 위해 협력하는 심문제도의 로마법을 사용했다.[62]
1924년 헌법 | 1936년 헌법 | 1977년 헌법[326][327][328] | ||
---|---|---|---|---|
최고 결정 기관 | 소비에트 대회 | 최고 회의 | 인민대표대회 | |
최고 입법 기관 | 중앙집행위원회 | 최고 회의 간부회 | 최고 회의 | 최고 회의 |
임시 입법 기관 | 중앙집행위원회 간부회 | |||
최고 행정 기관 | 인민위원회 | 인민위원회[329] | 각료 내각 |
5. 3. 권력 분립과 개혁
소비에트 연방은 여러 소비에트 공화국으로 구성된 연방 국가였으나, 실제로는 중앙집권 체제를 띠었고, 일련의 개혁이 마무리된 1990년까지는 소비에트 연방 공산당의 일당 독재 국가였다.간접 대의제를 거부하고, 노동자 조직인 "소비에트"(협의회, 평의회)가 각 직장의 최하위 단위부터 최고 의결 단위(최고회의)까지 조직됨으로써 국가가 구성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소비에트 제도가 효과적으로 기능한 기간은 거의 없었고, 실제로는 소비에트의 최소 단위부터 최고 단위까지 모두에 침투한 사적 조직(비국가 조직)인 소비에트 연방 공산당이 모든 소비에트를 지배하여 사실상 일당 독재 국가였다(러시아 혁명 직후 레닌 시대 초창기와 고르바초프 시대는 몇몇 정당이 존재했다). 이러한 당에 의한 국가 각 단위 장악과 이중 권력 체제는 종종 "당-국가 체제"라고 불린다.
이러한 세포를 넓게 펼친 민주 집중제와 계획 경제를 기반으로 하는 소위 소련식 사회주의 체제는 아파라치키("기관"이라는 뜻)에 의한 억압적인 체제였으며, 언론 등의 표현, 집회, 결사의 자유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다. 지도자 선출을 위한 노멘클라투라 제도는 족벌주의의 온상이 되어 새로운 계급을 만들어냈다. 일반 노동자와 농민에게는 지배자가 로마노프 왕조의 황제에서 공산당으로 바뀐 것뿐이었고, 정치적으로는 어떤 해방도 없었으며, 오히려 로마노프 왕조 시대보다 억압적이고 비민주적인 일당 독재 체제였다. 그 때문에 실질적인 최고 지도자인 소비에트 연방 공산당 서기장은 "붉은 황제"(붉은은 공산주의를 나타내는 색깔)라고도 불렸다.
스탈린 시대부터 고르바초프가 대통령제를 도입할 때까지 명목상의 국가 원수는 최고회의 간부회의 의장이었지만, 실권은 소비에트 연방 공산당 서기장이 장악하고 있었다.
브레즈네프 이후로는 공산당 서기장이 최고회의 간부회의 의장을 겸임하게 되었지만, 최고회의 간부회의 의장의 권한은 의례적·명예적인 것이었고, 그들의 권력의 원천은 지배 정당인 공산당의 서기장 직책이었다.
5. 4. 사법 제도
소련의 사법 제도는 소련 최고회의가 대표하는 입법부, 장관회의가 대표하는 행정부와 함께 세 가지 권력 계층 중 하나였다.[32]5. 5. 인권
소련의 인권은 엄격하게 제한되었다. 소련은 1927년부터 1953년까지 전체주의 국가였으며,[63][64][65][66] 1990년까지 일당 독재 국가였다.[67] 언론의 자유는 억압되었고 반체제 행위는 처벌받았다. 자유 노동조합, 사기업, 독립 교회 또는 반대 정당 참여를 포함한 독립적인 정치 활동은 허용되지 않았다. 국내 및 특히 국외 이동의 자유는 제한되었다. 국가는 시민의 사유 재산권을 제한했다.소비에트 연방의 인권 개념은 국제법과 크게 달랐다. 소련의 법 이론에 따르면, "개인에게 주장되어야 할 인권의 수혜자는 정부이다"[359], 즉 "소비에트 국가가 인권의 원천이다"[360]라고 생각되었다.
6. 행정 구역
소련의 행정 구역은 복잡한 체계를 가지고 있었다. 크게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Сове́тская Социалисти́ческая Респу́блика, 약칭 СCCP)들의 연합체로 구성되었으며, 각 공화국은 다시 자치 공화국, 주, 자치주, 자치구 등으로 나뉘었다.
소련 초기에는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자카프카스 연방 공화국 4개 공화국으로 시작했다. 이후 중앙아시아 지역의 민족 경계 설정, 자카프카스 연방 공화국 해체, 제2차 세계 대전 전후 발트 3국 병합, 몰도바 지역 병합, 겨울 전쟁을 통한 카렐리야 획득 등으로 구성 공화국 수가 늘어났다.
자카프카스 연방 공화국 해체로 아제르바이잔, 아르메니아, 조지아 3개 공화국이 분리 독립했지만, 카렐로-핀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은 자치 공화국으로 격하되기도 했다.
각 구성 공화국 내에는 자치 공화국(Автономная Советская Социалистическая Республика, 약칭 АССР)이 존재했다. 이들은 특정 민족 집단에게 자치권을 부여한 행정 구역이었다. 예를 들어, 러시아 SFSR 내에도 여러 자치 공화국이 있었다.
6. 1. 구성 공화국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1955년) | 수도 | 가입 | 탈퇴 | 현재 | 수도 | |
---|---|---|---|---|---|---|
1 | 모스크바 | 1922년[319] | 1991년 | 러시아 | 모스크바 | |
2 | 키예프 | 1922년[319] | 1991년 | 우크라이나 | 키이우 | |
3 | 민스크 | 1922년[319] | 1991년 | 벨라루스 | 민스크 | |
4 | 타슈켄트 | 1924년[320] | 1991년 | 우즈베키스탄 | 타슈켄트 | |
5 | 알마티 | 1936년[321] | 1991년 | 카자흐스탄 | 아스타나 | |
6 | 트빌리시 | 1936년[322] | 1991년 | 조지아 | 트빌리시 | |
7 | 바쿠 | 1936년[322] | 1991년 | 아제르바이잔 | 바쿠 | |
8 | 빌뉴스 | 1940년[323] | 1991년 | 리투아니아 | 빌뉴스 | |
9 | 키시뇨프 | 1940년 | 1991년 | 몰도바 | 키시너우 | |
10 | 리가 | 1940년[323] | 1991년 | 라트비아 | 리가 | |
11 | 프룬제 | 1936년[321] | 1991년 | 키르기스스탄 | 비슈케크 | |
12 | 두샨베 | 1929년[321] | 1991년 | 타지키스탄 | 두샨베 | |
13 | 예레반 | 1936년[322] | 1991년 | 아르메니아 | 예레반 | |
14 | 아시가바트 | 1924년[320] | 1991년 | 투르크메니스탄 | 아시가바트 | |
15 | 탈린 | 1940년[323] | 1991년 | 에스토니아 | 탈린 |
소비에트 연방은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러시아어: Советская Социалистическая Республика, 약칭 СCCP)의 연합체로 성립되었다는 특이한 사정이 존재하며, 그 때문에 소련의 영토는 소련의 영토인 동시에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하 "구성 공화국")의 영토이기도 했다.
초기 소비에트 연방은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그리고 카프카스에 위치한 자카프카스 연방 공화국의 4개 공화국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 후 중앙아시아 민족 경계 설정 작업, 1936년 자카프카스 연방 공화국 폐지, 제2차 세계 대전 전후의 발트 3국 병합, 몰도바 공화국이 위치한 베사라비아 지역 재영유, 겨울 전쟁에서의 카렐리야 획득으로 10개 이상의 구성 공화국을 갖게 되었다. 다만, 자카프카스 해체로 공화국이 된 아제르바이잔, 아르메니아, 조지아 3개국과 대조적으로, 카렐로-핀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에서 자치 공화국으로 강등된 카렐리야의 예도 있다.
6. 2. 자치 공화국
소련의 행정 구역은 복잡한 구조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자치 공화국(AR)이었다. 자치 공화국은 구성 공화국(SSR) 내에 위치하며, 특정 민족 집단에게 자치권을 부여한 행정 구역이었다. 예를 들어 러시아 SFSR 내에도 여러 자치 공화국이 존재했다.[1]자치 공화국 (AR) | 주 (obl) |
---|---|
자치 공화국 | 주/지역 |
6. 3. 자치주와 자치구
소련 행정 구역 |
---|
러시아 SFSR |
자치 공화국 (AR) |
주 (obl) |
자치구 (AO) |
7. 군사
소련은 미국을 필두로 하는 서방 국가에 대항하기 위해 강력한 군사력을 유지했다. 이를 위해 핵무기와 이를 탑재할 수 있는 초음속 폭격기,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원자력잠수함, 초음속 전투기, 전차 등을 배치했다.
1960년대에 들어서 동서 간 핵 개발 경쟁이 치열해짐에 따라 소련은 초대형 수소폭탄 AN602를 제조했다. 일명 “차르 봄바”라고 불리는 이 수소폭탄은 히로시마형 원폭의 약 3300배의 위력으로, 제2차 세계 대전 중 전 세계에서 사용된 총 폭약량의 약 10배에 달하는 위력을 가진, 인류 역사상 최대의 단일 무기였다. 이 시기에 소련이 운용을 시작한 자동 보복 시스템은 사소한 판단 실수만으로도 세계적인 핵전쟁을 일으킬 수 있다는 점에서 “종말병기”라고 불렸다. 그 위험성을 보여주는 실례로 1983년 감시 시스템의 컴퓨터가 핵미사일 발사를 오보한 사건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강력한 군사력 유지는 군사비 증대를 가져와 국가 예산을 압박했고, 그 결과 민생용 인프라 및 유통 시스템 등의 정비에 차질을 빚어 국민 경제를 쇠퇴시켰다. 1979년부터 10년간 지속된 아프가니스탄 침공은 아무런 성과 없이 실패했다. 막대한 전비를 지출하고 많은 병사의 목숨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소비에트 연방의 위신까지 실추시켜 결국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를 앞당겼다고 여겨진다.
소련은 바르샤바 조약기구를 결성하여 자본주의 진영과 대립하였으며, 동시에 회원국 내에서 일어난 반소, 반공 운동에 무력으로 개입하였다. 또한, 북한, 중화인민공화국, 쿠바, 베트남 등 사회주의 국가에 각종 무기를 수출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나라에 무기와 그 기술을 수출하고 장교 등을 파견하여 군사 훈련을 하였으며, 스파이나 테러리스트 양성 등도 지원했다.
7. 1. 강력한 군사력
소련은 미국을 필두로 하는 자본주의 진영에 대항하기 위하여 재래식 무기뿐만 아니라 1949년에 원자 폭탄을, 1953년에는 수소 폭탄을 만들었다. 1961년에는 역사상 가장 큰 폭탄인 차르 봄바를 만들었다. 1957년에는 세계 최초로 대륙간 탄도 미사일을 개발하고 많은 핵잠수함을 배치하여, 미국과 대등한 수준의 강력한 군사력을 유지했다.


그러나 이러한 강력한 군사력을 유지하기 위한 막대한 예산은 국민들의 생활을 피폐하게 했다. 1979년부터 10년 동안 계속된 아프가니스탄 침공은 소련을 국제사회로부터 고립시켰다. 또한 대한항공 007기 격추사건과 같이 타국 민간기를 격추하는 등 관료주의와 권위주의는 서방 여러 나라의 반발을 샀다.
1925년 9월 군사법에 따라 소련군은 육군, 공군, 해군, 합동국가정치국(OGPU) 및 내무군으로 구성되었다.[94] OGPU는 나중에 독립되었고 1934년 NKVD 비밀경찰에 합류하여 내무군은 국방 및 내무 인민위원회의 공동 지휘를 받았다. 2차 세계 대전 후에는 전략 로켓군(1959년), 방공군(1948년) 및 국가민방위군(1970년)이 창설되었는데, 이들은 공식적인 소련 체계에서 중요도 순으로 1위, 3위, 6위를 차지했다(육군은 2위, 공군은 4위, 해군은 5위).
육군은 가장 큰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1989년에는 150개의 기계화 사단과 52개의 기갑 사단에 나뉘어 200만 명의 병사가 복무했다. 1960년대 초까지 소련 해군은 상당히 작은 군 부대였지만, 카리브 해 위기 이후 세르게이 고르슈코프의 지휘 아래 상당히 확장되어 전함과 잠수함으로 유명해졌다. 1989년에는 50만 명이 복무했다. 소련 공군은 전략 폭격기 함대에 초점을 맞추었고, 전시에는 적의 기반 시설과 핵 능력을 제거하는 임무를 맡았다. 공군은 또한 전쟁에서 육군을 지원하기 위한 다수의 전투기와 전술 폭격기를 보유하고 있었다. 전략 로켓군은 28개 기지와 300개 지휘소에 배치된 1,400개 이상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보유하고 있었다.
전후 시대에 소련군은 동독 봉기 진압(1953년), 헝가리 혁명(1956년), 체코슬로바키아 침공(1968년) 등 해외 여러 군사 작전에 직접 참여했다.[3][95][96] 또한 1979년부터 1989년까지 아프가니스탄 전쟁에도 참전했다. 소련에서는 징병제가 시행되어 18세 이상의 신체 건강한 모든 남성이 군대에 징집되었다.[97]
1960년대 동서 간 핵 개발 경쟁이 치열해짐에 따라, 소련은 초대형 수소폭탄 AN602를 제조했다. 일명 “차르 봄바”라고 불리는 이 수소폭탄은 히로시마형 원폭의 약 3300배, 제2차 세계 대전 중 전 세계에서 사용된 총 폭약량의 약 10배에 달하는 위력을 가진 인류 역사상 최대의 단일 무기였다. 이 시기 소련이 운용을 시작한 자동 보복 시스템은 사소한 판단 실수만으로도 세계적인 핵전쟁을 일으킬 수 있다는 점에서 “종말병기”라고 불렸다. 그 위험성을 보여주는 실례로 1983년 감시 시스템의 컴퓨터가 핵미사일 발사를 오보한 사건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군사력 유지는 군사비 증대를 가져와 국가 예산을 압박했고, 그 결과 민생용 인프라 및 유통 시스템 등의 정비에 차질을 빚어 국민 경제를 쇠퇴시켰다. 1979년부터 10년간 지속된 아프가니스탄 침공은 아무런 성과 없이 실패했다. 막대한 전비를 지출하고 많은 병사의 목숨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소비에트 연방의 위신까지 실추시켜 결국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를 앞당겼다고 여겨진다.
7. 2. 군사 퍼레이드
소련은 자국의 군사력과 소련군의 위용을 과시하기 위하여 붉은 광장에서 미사일, 탱크, 장갑차 등을 동원하여 평균적으로 1년에 한 번씩 군사 퍼레이드를 벌였다.[94]
7. 3. 핵개발
소련은 미국을 필두로 하는 자본주의 진영에 대항하기 위하여, 재래식 무기 이외에도 1949년에 원자 폭탄을 만들었고 1953년에는 수소 폭탄을 만들었다. 1961년에는 가장 큰 폭탄 차르 봄바를 만들었다. 그리고 소련은 1957년 세계 최초로 대륙간 탄도 미사일을 많이 만들었고 많은 핵잠수함을 배치하여 미국과 세계 1위를 경쟁할 정도로 강력한 군사력을 유지하고 있었다.[94]소련은 미국이 맨해튼 계획으로 핵 개발을 성공하자 여기에 참가했던 과학자들을 스파이로 만들어 정보를 입수했고 결국 세계에서 두 번째로 핵 개발에 성공하였다.
러시아 제국 시절인 1900년대에 이미 러시아 몇몇 연구기관들은 방사성 동위 원소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었고, 이후 들어선 소련은 1930년대부터 핵물리학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이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였다. 그러나 1930년대 당시엔 핵물리학 자체가 미지와 이론으로만 존재하던 학문이었고, 이오시프 스탈린의 5개년 계획에서는 핵물리학 같은 실질적인 활용이 힘든 분야보다는 중공업을 활용할 수 있는 일반물리학이나 기계 등에 더 집중했다. 하지만 국가의 존망이 걸린 대조국전쟁이 한창인 1942년에 원자력 기술에 대한 관심이 부활하게 된다.
1942년 4월, 소련 핵물리학자 게오르기 플료로프는 이오시프 스탈린에게 독일·미국·영국의 과학자들이 핵분열 등의 핵물리학 관련 논문들을 작성하지 않거나, 작성되었던 핵물리학 논문들이 사라지는 등의 양상이 보인다는 이야기를 편지로 보낸다. 이는 독일은 물론이고, 미국, 영국 역시 핵무기를 개발하고 있다는 유력한 암시였고, 이에 스탈린도 뒤처지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무기대여법으로 물자와 무기를 받고 있는데다 독일과의 끝도 없을 것만 같은 총력전이 현실인지라, 스탈린은 방첩/첩보 조직 NKVD를 시켜 정보를 빼오게 했다. 놀랍게도 소련의 핵 개발은 독소전쟁의 전황이 불투명했던 1942년부터 시작되었고, 이때 소련은 존망의 기로에 선 상태였다.
그래서 NKVD의 총수인 라브렌티 베리야는 이고리 쿠르차토프를 총수로 하는 핵무기 프로젝트를 가동하게 된다. 맨해튼 계획의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와 마찬가지로 이고리 쿠르차토프도 당시 40대의 비교적 젊은 과학자였다. 그리고 맨해튼 계획의 페르세우스나 클라우스 푹스 같은 간첩들로부터 정보를 얻어냈다.
이런 첩보들이 도움이 되기는 했지만, 핵무기의 제조는 이러한 단편적 정보보다는 거대한 설비를 건설할 수 있는 기술력과 자금, 이 프로젝트에서 일할 수 있는 과학자가 필요했기 때문에, 독소전쟁으로 엄청난 피해를 입은 소련에게 핵 개발의 규모와 어려움은 거의 맨해튼 계획과 별 차이가 없었다. 맨해튼 계획에서도 전체적인 진행 상황은 오펜하이머만 알고 있었고, 나머지 과학자들은 그저 자기 맡은 분야만을 알 수 있었기 때문에 이런 간첩들이 빼오는 정보는 매우 제한적이었다. 소련은 자원이 많았기 때문에 이를 구하는 데는 별 어려움은 없었다.
이에 대해서 영국의 사학자 브라이언 모이나한은 이런 말을 했다. "미국인들은 소련이 정상적인 코스를 밟는다면 빨라야 50년대에 핵을 개발할 수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소련은 (미국인들이 생각했던) 정상적인 방식으로 개발하지 않았다." 그런데 소련이 주로 스파이들의 힘으로 핵 개발에 성공했다는 시각이 있고, 냉전 시기만 해도 소련이 맨해튼 계획을 베껴서 핵 개발을 완료할 수 있었다고 기술하고 있었지만, 그것은 편견으로써 소련의 핵 개발은 맨해튼 계획의 첩보가 없었어도 완성될 수 있었다는 견해가 있다. 이미 스탈린 시절에 핵 개발을 위한 광범위한 인력과 인프라가 건설되었기 때문에, 자원이 풍부한 소련에게 있어서 핵 개발은 그리 어려운 문제가 아니었다고 한다. 한편 냉전 종식 직후에 공개된 소련 정보기관원의 증언에 따르면 포섭된 간첩들이 빼낸 정보보다, 포섭되지 않은 과학자들이 소련을 응원하는 차원으로 제공한 조언들이 훨씬 많고 내용도 좋았다고 한다.
소련의 오펜하이머라고 할 수 있는 이고리 쿠르차토프는 연구 회의를 할 때, 이렇게 정보원이 얻어온 단편적 정보를 그저 자신의 아이디어인 것처럼 이야기하면서, 왜 그렇게 되는지 알아보라는 식으로 연구 방향을 이끌었다고 한다. 이는 스파이 활동이 들통나지 않게 하려는 조치였다. 1945년 소련 간첩망은 원자폭탄 초기 설계도 하나를 빼올 수 있었는데, 이것이 정말 도움이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린다. 어쨌든 이런 첩보 활동은 수많은 시행착오를 조금이나마 줄이는 데 도움이 되었다. 핵 개발과 관련해서 어떤 방향으로 진행할 것이냐에 대해서 알아야 할 것은 매우 많았다. 이런 정보들은 당시에 정확히 알지 못하니 엄청난 자원을 소모하여 행한 실험을 통해 나온 결과값으로 결정할 수 있었던 게 미국이었다.
하지만 그럴 여력이 없던 소련의 과학자들은 어느 방법을 선택할 것이냐에 대한 결론을 참고할 수 있었기 때문에 자원의 낭비를 줄이고 올바른 길을 적은 비용으로 찾아갈 수 있었다. 물론 다시 한 번 반복하는 얘기지만, 소련 과학자들의 핵분열에 대한 바탕 지식이 없었다면 도움이 안 될 자료들이었지만, 어떤 방법으로 가야 하는지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던 유능한 소련 과학자들에게는 그 정도의 자료로도 도움이 되었다. 물론 소련이 이렇게까지 미국의 원자폭탄에 관한 정보를 수집할 수밖에 없었던 가장 큰 이유가 독소전쟁의 화망에 소련의 원자력 프로그램이 큰 타격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레닌그라드에서는 1939년부터 사이클로트론이 건설되려 했지만 레닌그라드 포위전의 영향으로 중단되었고 모스크바에서 건설되던 사이클로트론 역시 모스크바 공방전의 영향으로 중단되었다. 하르코프 물리-기술 연구소도 1940년, 핵폭발을 이론적으로 증명해냈지만 1년 만에 독일군의 군홧발에 짓밟혀 연구가 중단되었다. 즉, 소련이 악조건 속에서 연구 기간을 단축하려면 이러한 정보 수집도 필요했던 것이다.
그리고 열심히 첩보에 공들인 결과 DT 반응을 발표 공표 3년 전에 알아내는 쾌거도 이뤄냈다. 그러나 이미 비탈리 긴즈부르크와 안드레이 사하로프같은 소련 과학자들이 이 현상을 이미 예측하고 있었다. 그래서 소련의 핵 개발에선 이런 첩보뿐만 아니라, 소련 과학자들의 연구도 큰 역할을 했다.
이후 소련은 1946년 12월 25일, 유럽 최초의 원자로인 F-1을 모스크바에 건설했다. 사용된 우라늄은 나치 독일이 우란프로옉트 연구 과정에서 사용되다 압류된 것을 사용했으며 미국으로부터도 일부 수입했다. 그리고 폴란드 인민 공화국, 동독, 체코슬로바키아, 불가리아에서도 우라늄이 채굴되었고 카자흐 SSR에서 대규모 우라늄 광산이 발견되면서 소련의 핵 개발은 더욱 탄력을 받게 되었다.
참고로 당시 소련은 핵 개발에 필요한 우라늄을 주로 굴라그 죄수를 동원해 얻어냈는데, 광산의 작업 환경이 위험해 사망자들이 많았다. 여기서 광부에 대한 위험 요소로써 단순히 방사선량 노출만 감안하는 것은 순전한 무지의 산물이다. 가공하지 않은 천연 우라늄 광석은 방사선 수치가 매우 낮으므로 딱히 방사능 오염을 우려할 수준은 아니다. 미국에서도 이 천연 우라늄 광석의 채굴은 일반 민간 광부들이 맡았다. 다만 굴라그 죄수가 아니라 핵 공장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은 안전 조치 미비 때문에 방사능 오염으로 상당히 희생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사실 방사능에 대한 위험성에 대한 자각이란 게 1950년대 이후로나 생겨난 것이다.
1948년에는 첼랴빈스크에 마야크 재처리 공장이 건설되어 소련은 본격적으로 군사용 플루토늄을 추출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되었다. 핵 개발을 감독하던 라브렌티 베리야는 팻 맨과 유사한 내파형 원자폭탄을 개발할 것을 지시했다.
그렇게 해서 카자흐 SSR의 세미팔라틴스크의 실험장에서 1949년 8월 29일 22kt급의 RDS-1을 터트리고 유럽 최초의 핵보유국으로 등극했다.
그리고 소련은 그 뒤로도 열심히 연구를 계속하여 1953년 8월 12일, 수소폭탄을 개발/시험했다고 발표했으나 사실은 이것 역시 냉전 시절의 프로파간다로써 기껏해야 강화된 핵융합 폭탄에 불과했다. 결국 안드레이 사하로프가 독자적인 텔러-울람 설계를 만들어내어 1955년 비로소 수소폭탄 실험을 성공시켰다. 그리고 소련은 자신들의 핵무기를 서방 측에 자랑하고 싶어하여 1961년 차르 봄바란 괴물을 만듦으로 핵 역량에 대해서 확고한 우위를 주장하려 했다.
소련은 이런 핵 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는 도시들을 모두 비밀도시로 지정했으며, 보통 아톰그라드로 불렀다. 현재도 이 도시들에 위치한 핵 시설들이 가동되고 있다. 이 도시들의 문장은 모두 원자력과 관련이 되어있다.
소련 측은 핵 개발에 나선 데에는 또 다른 이유도 있었다고 주장했는데, 바로 미국의 위협에 맞서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다. 1948년까지만 해도 소련은 아직 핵무기가 없었고, 그래서 미국이 독한 마음을 품고 핵무기를 내세워 압박을 가해오면 막아낼 도리가 없었다는 것. 그러나 미국도 아직 핵무기를 막 개발하기 시작했던 1942년에 이미 소련의 핵무기 개발이 개시되었으므로 이것은 사후에 내놓은 핑계에 불과할 뿐이다. 애초에 미국에서 핵무기 개발을 총괄 지휘했던 로스 앨러모스 연구소의 설립조차 1943년에 있었던 일이다.
1960년대에 들어서 동서 간 핵 개발 경쟁이 치열해짐에 따라 소련은 초대형 수소폭탄 AN602를 제조한다. 일명 “차르 봄바”라고 불리는 이 수소폭탄은 히로시마형 원폭의 약 3300배의 위력으로, 제2차 세계 대전 중 전 세계에서 사용된 총 폭약량의 약 10배에 달하는 위력을 가진, 인류 역사상 최대의 단일 무기였다. 이 시기에 소련이 운용을 시작한 자동 보복 시스템은 사소한 판단 실수만으로도 세계적인 핵전쟁을 일으킬 수 있다는 점에서 “종말병기”라고 불렸다. 그 위험성을 보여주는 실례로 1983년 감시 시스템의 컴퓨터가 핵미사일 발사를 오보한 사건이 있다.
7. 4. 군사 지원
소련은 미국을 필두로 하는 서방 국가에 대항하기 위해 강력한 군사력을 유지했다. 핵무기와 이를 탑재할 수 있는 초음속 폭격기, ICBM, 원자력잠수함, 초음속 전투기, 전차 등을 배치했다.[94]
1960년대 동서 간 핵 개발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소련은 초대형 수소폭탄 AN602 (차르 봄바)를 제조했다. 히로시마형 원폭의 약 3300배 위력을 가진 이 폭탄은 인류 역사상 최대의 단일 무기였다. 이 시기 소련의 자동 보복 시스템은 “종말병기”라고 불렸으며, 1983년 감시 시스템 오작동 사건은 그 위험성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러한 군사력 유지는 국가 예산을 압박했고, 민생 인프라 정비에 차질을 빚어 국민 경제를 쇠퇴시켰다. 1979년부터 10년간 지속된 아프가니스탄 침공은 소련의 위신을 실추시키고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를 앞당겼다.
동구권 바르샤바 조약 기구의 중심국이었던 소련은 동유럽에 군사기지를 두고 위성국의 개혁 운동(헝가리 혁명, 프라하의 봄)을 무력으로 진압했다. 또한 바르샤바 조약 기구 가맹국뿐 아니라 중화인민공화국, 북한, 쿠바, 북베트남 등 전 세계의 반미 사회주의 국가에 다양한 무기를 수출했다. 현재도 제3세계에는 구 소련제 무기가 대량으로 유통되고 있다.
소련은 이들 국가에 군사 기술을 수출하고 장교를 파견하여 군사 훈련을 실시했으며, 모스크바의 파트리스 루뭄바 인민우호대학교 등에서 스파이 및 테러리스트 양성, 자금 지원, 무기 공급 등을 지원했다. 한국 전쟁과 베트남 전쟁 등 대리 전쟁에서 우방을 적극 지원했다.[95][96]
냉전 기간 동안 소련은 미국과 유럽 국가 등 서구 국가 및 남아메리카, 중동, 아시아, 아프리카 국가들의 비사회주의 정권 국가 내 사회주의 정당 및 반정부 세력, 불법 단체, 테러 조직, 반전 운동 단체(대부분 반미 운동)에 대한 지원을 실시했다. 여기에는 각종 군사 시설 등에서의 스파이 및 테러리스트 양성과 자금 지원, 무기 공급 등이 포함되었다.
8. 경제
소련은 계획 경제 체제를 실시했으며, 1986년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혼합 경제를 받아들이기 전까지는 중앙에서 경제를 통제했다. 고스플란의 역할이 축소되고 생산 수단을 맡은 경영인들의 역할이 중요해졌다. 농민들은 콜호스에서 일했다.
1920년대 러시아 내전으로 피폐해진 경제를 회복하기 위해 레닌은 신경제정책을 통해 자본주의를 도입했다. 경제가 안정된 후 다시 계획 경제로 전환했고, 1930년대 이오시프 스탈린의 5개년 계획이 성공하면서 경제 발전을 이룩했다. 대공황에도 불구하고 높은 경제 성장률을 기록하며 1938년 세계 2위의 경제 대국이 되었지만, 농민 수탈과 노동자들의 과도한 중노동으로 인해 중앙 계획경제에 대한 불만이 커졌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1965년 독립채산제를 시행하여 혼합 경제 체제를 받아들였다.[374]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도 1950년대와 1960년대 높은 경제 성장률을 기록했지만, 1970년대부터 침체되기 시작했다.
소련은 넓은 영토와 풍부한 자원을 바탕으로 초강대국 지위를 유지했다. 미국과 대등한 핵무기를 보유하여 직접적인 군사 충돌을 억제했지만, 국내총생산과 1인당 GDP는 미국의 2/3에서 1/3 수준이었다.
소련은 국민의 삶의 질을 희생하면서 중공업 투자와 군사비 지출에 집중했다. 1950년대 15%였던 투자율은 1980년대 30%에 달했고, 1980년대 중반 군사비 비율은 16%로 추정된다. 1970년대 이후 첨단 기술의 중요성이 커졌지만, 중공업 위주였던 소련은 기술 도입에 어려움을 겪었고, 기술 발전 속도가 둔화되어 1980년대에는 마이너스를 기록했다.
소련 경제는 1950년대부터 1960년대 초까지 미국을 빠르게 따라잡았지만, 1960년대부터 성장 속도가 둔화되었다. 1975년 소련의 대미 상대적 국력은 45%로 정점에 달했지만, 이후 쇠퇴하여 미국과의 격차가 커졌다.
소련 붕괴 후 러시아의 군사력과 경제력은 급격히 약화되었고, 미국과의 격차는 더욱 커졌다. 경제 혼란으로 사회보장제도가 붕괴되자, 친미적이고 페레스트로이카를 추진한 미하일 고르바초프를 "미국에 영혼을 판 매국노" 또는 "국익을 해친 배신자"라고 비판하는 목소리가 높았다.[348]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소련) | 미국 | |
---|---|---|
GDP (구매력평가, 1989년 – 백만 달러) | 26595억달러 | 52333억달러 |
인구 (1990년 7월) | 약 2억 9,093만 명 | 약 2억 5,041만 명 |
1인당 GDP (구매력평가, 달러) | 9211USD | 21082USD |
노동력 (1989년) | 약 1억 5,230만 명 | 약 1억 2,555만 명 |
8. 1. 계획 경제
소련은 계획 경제 체제를 실시했으며, 농민들은 집단 농장에서 일했다. 의료비 등은 무료였고 세금은 전혀 없었다. 1930년대 세계 대공황으로 자본주의 국가들이 불황에 시달릴 때, 소련은 그 영향을 받지 않고 높은 경제 성장을 달성하여 세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이러한 경제 성장은 정치범과 사상범을 중심으로 한 강제 노동으로 이루어졌고, 부는 공산당 상층부에 집중되었다는 사실이 후에 밝혀졌다.[374]존 케네스 갤브레이스는 "자본주의 국가들이 1930년대에 대공황과 불황에 시달렸을 때, 소련의 사회주의 경제는 끊임없이 발전하여 미국에 이어 세계 제2의 공업국이 되었다. 그리고 완전 고용과 사회 보장을 달성했다"라고 평가하면서도, 1970년대에는 붕괴하기 시작했다고 결론지었다. 1960년대 이후 계획경제의 파탄이 가시화되면서 소비재 부족 등으로 국민 생활은 궁핍해졌다.
유통 문제로 농산물이 소비자에게 전달되기 전에 부패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로 인해 암시장 경제와 부정부패가 만연했고, 공산 귀족이 나타나는 결과가 초래되었다.
회계는 사회주의에 기반하여 진행되었으며, 회계사는 계획경제를 추진하는 최고 국민경제회의를 위해 일했다. 국영 기업의 회계 책임자는 대차대조표와 회계보고서를 작성하여 회계를 조직할 책임을 맡았다. 중앙집권화와 집단농장화가 진행된 1930년대부터는 스탈린주의자들에 의해 회계학이 개별 기업만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았고, 스탈린주의에 비판적인 회계사들은 활동의 장을 빼앗겼으며, 소련 재무성과 중앙통계국이 회계의 지도와 감독을 담당하게 되었다.
회계 담당자는 중앙 부처의 계획을 바탕으로 실무를 수행하는 부기계와 상급 기관에 책임을 지는 회계 담당자로 나뉘었다. 경영 개선이나 전문가로서의 주도성을 발휘할 여지는 없어졌고, 회계는 경직화되었다. 1960년대부터는 경제 개혁에 따른 분권화가 시작되어 계획경제와 기업 관리에서 이윤, 원가, 가격, 이자 등도 평가되기 시작했고, 회계사는 과학기술협회(HTO)에 소속되어 전문가로 활동하였다. HTO에서는 자본주의 국가들의 회계 도입도 검토되었다.
1980년대 후반의 페레스트로이카부터 민영화와 시장경제화가 시작되어 서구 국가들과의 합작 기업에서 시장경제의 회계가 부분적으로 도입되었고, 기업의 영업 비밀이 인정되었다. 1991년 소련 붕괴 이후 시장경제화가 더욱 진행되었고, 러시아에서는 공인회계사에 해당하는 감사사가 국가자격화되었다.
1989년 기준 미소 비교 1990년 월드 팩트북 자료 기반[347] | ||
---|---|---|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소련) | 미국 | |
GDP (구매력평가, 1989년 – 백만 달러) | 26595억달러 | 52333억달러 |
인구 (1990년 7월) | 약 2억 9,093만 명 | 약 2억 5,041만 명 |
1인당 GDP (구매력평가, 달러) | 9211USD | 21082USD |
노동력 (1989년) | 약 1억 5,230만 명 | 약 1억 2,555만 명 |
소련은 미국과 같은 수준의 GDP를 가지고 있지는 않았지만, 넓은 영토와 풍부한 자원을 바탕으로 초강대국 지위를 확보하고 있었다. 미국과 맞먹는 수준의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다고 여겨졌기 때문에, 직접적인 대결은 양측 모두에게 막대한 손실을 초래할 수 있었고, 이는 소련의 군사 행동에 미국이 개입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하지만 국내총생산과 1인당 GDP는 미국의 2/3에서 1/3 수준에 불과했다.
소련은 국민의 삶의 질을 희생하면서 중공업 투자와 군사비 지출에 자원을 집중했다. 1950년대 약 15%였던 소련의 투자율은 1980년대에는 30%에 달했고, 어떤 추정에 따르면 1980년대 중반 군사비 비율은 16%에 달했다. 1970년대 이후 컴퓨터와 반도체와 같은 첨단 기술 부문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중공업 위주의 소련은 이러한 기술을 도입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고, 기술 발전 속도는 둔화되었으며, 결국 설비 노후화와 맞물려 1980년대에는 기술 발전률이 마이너스를 기록했다.
소련 경제는 1950년대부터 1960년대 초까지 미국 국력을 놀라운 속도로 따라잡았고, 니키타 흐루쇼프의 "20년 이내에 미국을 추월할 것이다"라는 발언도 믿을 만한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1960년대에 들어서 그 속도는 둔화되었지만, 1975년 소련의 대미 상대적 국력은 45%로 정점에 달했다. 그러나 그 이후로는 쇠퇴 국면에 접어들었고, 미국과의 상대적 국력 격차는 더욱 커졌다.
소련 붕괴 후 러시아의 군사력과 경제력은 급격히 약화되었고, 미국과의 1인당 GDP와 군사비 격차는 더욱 커졌다. 또한 경제 혼란의 영향으로 국민들은 사회보장제도의 붕괴로 고통을 겪었기 때문에, 친미적이고 페레스트로이카를 추진한 미하일 고르바초프를 "미국에 영혼을 판 매국노" 또는 "국익을 해친 배신자"라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348]
8. 2. 산업화와 경제 성장

소련은 1985년 GDP 2.2조달러로 세계 2위의 경제 대국이었다. 1인당 GDP는 약 9300USD(1990년 기준, 세계 31위)였다. 소련은 생산 노동자에 한하여 주 35시간 근로제를 채택했으며, 농업 종사자는 특별한 경우에만 주 41시간 근로까지 허용했다.[373] 소련은 군수산업, 산업정비기기산업 부문에서 세계 1위였으며, 1986년 고르바초프가 혼합 경제를 받아들였다. 1965년 이전까지 소련 경제는 고스플란이 통제했으나, 이후 고스플란의 역할이 축소되고 각 생산 수단을 맡은 경영인들의 역할이 중시되었다. 농민들은 콜호스에서 일했다.
1920년대 러시아 내전으로 소련 경제는 피폐해졌다. 계획 경제의 문제점이 부각되자, 레닌은 자본주의를 도입하여 신경제정책을 실시하였다. 경제 안정 후 소련은 다시 계획 경제로 경제를 운용하였으며, 1930년대 스탈린의 5개년 계획이 성공하면서 경제 발전을 이룩했다. 대공황으로 자본주의 국가들이 불황에 시달렸지만 소련은 영향을 받지 않고 높은 경제 성장률을 기록, 1938년 세계 2위의 경제 대국이 되었다. 그러나 1925년부터 지속된 계획 경제는 농민들을 수탈하고 노동자들에게 과도한 중노동을 안겼다. 이로 인해 중앙 계획경제에 대한 노동자들의 불만이 생겼고, 1965년 독립채산제를 시행하여 혼합 경제 체제를 받아들였다.[374]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에도 소련 경제는 크게 발전했다. 1950년대와 1960년대에 높은 경제 성장률을 기록했지만 1970년대부터 침체되기 시작했다. 1986년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혼합 경제를 받아들였다.

이오시프 스탈린은 1928년부터 5개년 계획을 실시하면서 콤비나트 공업지대를 만들었다. 드네프르 콤비나트, 앙가라-바이칼 콤비나트, 우랄 콤비나트, 쿠즈네츠크 콤비나트 등이 대표적이다.
소련은 중공업에 치중하여 경공업 생필품의 질은 서방 세계에 비해 떨어졌다. 천연가스와 석유를 세계에서 가장 많이 생산하는 국가였다.
경제적으로 계획경제 체제가 실시되었고, 농민의 집단화(집단농장)가 추진되었다. 의료비 등이 무료이고 세금이 없다는 점으로도 알려졌다. 1930년대 세계 대공황으로 자본주의 국가들이 불황에 시달릴 때, 소련은 영향을 받지 않고 높은 경제 성장을 달성하여 세계 각국에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그 경제 성장은 정치범이나 사상범을 중심으로 한 강제 노동에 의해 뒷받침되었고, 부는 공산당 상층부에 집중 배분되었다는 실태가 후에 밝혀졌다.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는 “자본주의 국가들이 1930년대에 대공황과 불황에 시달렸을 때, 소련의 사회주의 경제는 끊임없이 발전하여 미국에 이어 세계 제2의 공업국이 되었다. 그리고 완전 고용과 사회 보장을 달성했다”라고 평가하면서도, 1970년대에는 붕괴하기 시작했다고 결론지었다. (그러나 1930년대 당시 소련 경제 약진 뒤에는 수백만 명에 달하는 강제 노동자들의 거의 무상의 노동에 의한 공헌이 있었던 점을 갤브레이스는 간과하거나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실제로 1960년대 이후 계획경제의 파탄이 결정적인 것이 되어, 소비재 부족 등으로 국민 생활은 궁핍해졌다.
유통이 정비되지 않아 농산물 생산이 충분해도 소비자에게 전달되기 전에 부패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 때문에 암시장 경제나 부정부패가 만연하고, 공산 귀족이 창궐하는 결과가 되었다.
회계도 사회주의에 기반하여 진행되었으며, 회계사는 계획경제를 추진하는 최고 국민경제회의를 위해 일했다. 국영 기업의 회계 책임자는 대차대조표와 회계보고서를 작성하여 회계를 조직할 책임을 맡았다. 중앙집권화와 집단농장화가 진행된 1930년대부터 스탈린주의자들에 의해 회계학이 개별 기업만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았고, 스탈린주의에 비판적인 회계사들은 활동의 장을 빼앗겼으며, 소련 재무성과 중앙통계국이 회계의 지도와 감독을 담당하게 되었다.
회계 담당자는 중앙 부처의 계획을 바탕으로 실무를 수행하는 부기계와 상급 기관에 책임을 지는 회계 담당자로 나뉘었다. 경영 개선이나 전문가로서의 주도성을 발휘할 여지는 없어졌고, 회계는 경직화되었다. 1960년대부터 경제 개혁에 따른 분권화가 시작되어 계획경제와 기업 관리에서 이윤, 원가, 가격, 이자 등도 평가되기 시작했고, 회계사는 과학기술협회(HTO)에 소속되어 전문가로 활동하였다. HTO에서는 자본주의 국가들의 회계 도입도 검토되었다.
1980년대 후반 페레스트로이카부터 민영화와 시장경제화가 시작되어 서구 국가들과의 합작 기업에서 시장경제의 회계가 부분적으로 도입되었고, 기업의 영업 비밀이 인정되었다. 1991년 소련 붕괴 이후 시장경제화가 더욱 진행되었고, 러시아에서는 공인회계사에 해당하는 감사사가 국가자격화되었다.
1989년 기준 미소 비교 1990년 월드 팩트북 자료 기반[347] | ||
---|---|---|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소련) | 미국 | |
GDP (구매력평가, 1989년 – 백만 달러) | 2조 6,595억 달러 | 5조 2,333억 달러 |
인구 (1990년 7월) | 약 2억 9,093만 명 | 약 2억 5,041만 명 |
1인당 GDP (구매력평가, 달러) | 9,211달러 | 21,082달러 |
노동력 (1989년) | 약 1억 5,230만 명 | 약 1억 2,555만 명 |
소련은 미국과 같은 수준의 GDP를 가지진 않았지만, 넓은 영토와 풍부한 자원을 바탕으로 초강대국 지위를 확보했다. 미국과 맞먹는 수준의 핵무기를 보유하여 직접적인 대결은 양측 모두에게 막대한 손실을 초래할 수 있었기에, 소련의 군사 행동에 미국이 개입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하지만 국내총생산과 1인당 GDP는 미국의 2/3에서 1/3 수준에 불과했다.
소련은 국민의 삶의 질을 희생하면서 중공업 투자와 군사비 지출에 자원을 집중했다. 1950년대 약 15%였던 소련의 투자율은 1980년대 30%에 달했고, 1980년대 중반 군사비 비율은 16%였다. 1970년대 이후 컴퓨터와 반도체 같은 첨단 기술 부문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중공업 위주의 소련은 기술 도입에 어려움을 겪었고, 기술 발전 속도는 둔화되었으며, 결국 설비 노후화와 맞물려 1980년대 기술 발전률이 마이너스를 기록했다.
소련 경제는 1950년대부터 1960년대 초까지 미국 국력을 놀라운 속도로 따라잡았고, "20년 이내에 미국을 추월할 것이다"라는 흐루쇼프의 자신감 넘치는 발언도 믿을 만한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1960년대에 그 속도는 둔화되었지만, 1975년 소련의 대미 상대적 국력은 45%로 정점에 달했다. 그러나 이후 쇠퇴 국면에 접어들었고, 미국과의 상대적 국력 격차는 더욱 커졌다.
소련 붕괴 후 러시아의 군사력과 경제력은 급격히 약화되었고, 미국과의 1인당 GDP와 군사비 격차는 더욱 커졌다. 경제 혼란의 영향으로 국민들은 사회보장제도의 붕괴로 고통을 겪었기 때문에, 친미적이고 페레스트로이카를 추진한 고르바초프를 "미국에 영혼을 판 매국노" 또는 "국익을 해친 배신자"라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348]
8. 3. 농업 집단화
소련의 농업은 대부분 솝호스(국영농장)와 콜호스(집단농장)를 통해 이루어졌다. 솝호스는 '소비에트 농장(Sovetskoe khozyaistvo)'의 약칭으로, 거대한 국영농장이었다. 솝호스의 농작물 생산과 수매 가격은 국가 계획에 따라 결정되었다.콜호스는 1928년 이오시프 스탈린의 제1차 5개년 계획에 따라 만들어진 집단농장이다. 콜호스는 국유지를 무료로 사용하고 농기구나 가축 등을 공유했으며, 생산물은 국가에 매각했다. 이 과정에서 부농을 의미하는 쿨라크는 일소되었다.
각 주택에 부속된 소규모 농지에서는 채소 재배나 가축 사육이 가능했고, 개인이 생산한 생산물은 자유롭게 판매할 수 있었다. 이는 생산력 향상이 농민의 수입 증가와 직결되어 국영농장보다 높은 효율성을 보이며 취약한 소련 농업에 도움이 되었다.
소련 농업은 기후 조건이 척박하여 농업에 적합한 지역이 제한적이었다. 각 공화국에 단일 경작적인 생산을 할당한 결과,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러시아의 흑토 지대, 코카서스 지대 등에서는 밀 등의 곡물과 사료 작물(사탕무 등), 감자, 해바라기, 과수, 채소가, 시베리아에서는 곡물이, 극동에서는 대두, 중앙아시아에서는 면화가 중심이었다.[344] 농업 노동자들은 집단농장과 국영농장에서 계획 경제 하에 정해진 임금으로 작업량을 채웠다. 농작물 가격은 국가가 결정하고 보조금으로 가격을 조정했다. 이러한 요인들은 노동 의욕을 저하시키고 농업 생산성을 극도로 낮추어, 1970년대부터는 육류, 곡물의 지속적인 수입국이 되면서 농업은 소련의 아킬레스건이 되었다.
러시아 혁명 당시 농촌 인구는 80%였으며, "전시 공산주의" 등 여러 정책으로 황폐해졌다. 특히 우크라이나에서는 수백만 명이 기아로 사망했다. 1921년 곡물 강제 징발을 폐지한 신경제정책(NEP)으로 농업은 전쟁 이전 수준을 회복했지만 곡물 조달은 어려웠다. 1928년 스탈린은 농업 집단화를 실시하여 저임금에 시달리는 집단농장과 국영농장으로 개편했다. 쿨라크로 분류된 부유한 농민 900만 명은 추방되었고, 절반은 처형, 나머지는 강제 수용소로 보내졌다. 곡물 조달량은 증가했지만 생산은 감소했고, 1931년부터 1933년까지 700만 명이 기아로 사망했다. 저항한 농민들은 산업 노동자로 전환되거나 집단농장에 편입되었다.
1941년 독소전쟁으로 농촌은 큰 타격을 입었고, 전후 복구 과정에서도 1946년부터 1947년까지 100만 명 이상이 기아로 사망하고 많은 사람들이 농촌을 떠났다. 1953년 스탈린 사후, 흐루쇼프는 카자흐스탄과 서시베리아 등의 미개척지 개간 사업을 제안했고, 처녀지에서 곡물 수확을 시도했다. 1955년부터 수년 동안 처녀지의 수확량으로 곡물 부족은 일시적으로 해소되었지만, 라이센코 이론과 농지의 사막화로 흉작이 이어지자 곡물은 다시 부족해져 해외에서 수입하게 되었다. 흐루쇼프 실각 후에도 집단농장의 생산성은 오르지 않았고, 1980년대에는 집단 계약제를 도입했지만, 집단농장 내 극소수 자경지로는 감당할 수 없는 많은 양의 식량을 미국에서 수입했다.
8. 4. 소비재 부족

냉전 체제에서 소련은 군수 산업에 막대한 기술과 자금을 투입했지만, 국민 생활에 필요한 소비재 개발, 생산, 유통은 소홀히 했다. 냉장고, 세탁기, 건전지, 전자레인지와 같은 필수품은 물론, 비누, 세제, 샴푸, 화장지, 연필, 볼펜, 담배, 청량음료 등 일반 소비재와 기호품도 부족했다.[373]
서방 국가들에 비해 기술과 품질이 떨어지는 전자제품조차도 수년을 기다려야 살 수 있을 정도로 상황이 열악했다. 이는 리처드 닉슨과의 '부엌 논쟁'에서 미국이 비판한 내용이기도 하다.
대부분의 전자제품과 자동차 기술은 서방보다 수십 년 뒤떨어져 있었다. 이들 중 상당수는 피아트(트리아치 참조)나 팩커드 등 서방 기업과의 제휴로 구형 기술을 이전받거나, 서방 제품을 무단 복제하거나,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에서 압류, 약탈한 오펠 생산 시설의 기술을 활용한 것이었다.
전자제품, 일반 소비재, 기호품, 자동차는 서방 국가들처럼 신제품 개발, 시장 출시, 개선, 가격 조정과 같은 시장 경쟁이 거의 없었고, 30년 이상 같은 제품이 생산되기도 했다.
자동차 개인 소유는 공산당 간부 등 일부 계층에게만 허용되었고, 일반인이 자동차를 소유하려면 전자제품처럼 수년을 기다려야 했다. 노동자 계급이 질(ZIL), GAZ, 볼가와 같은 고급차나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등이 애용했던 시트로엥 등 서방 수입차를 소유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서방의 전자제품, 화장품, 의류 등 소비재 수입과 유통은 원칙적으로 금지되었지만, 모스크바 등 대도시에 한정된 '굼'과 같은 외화 전용 고급 백화점에서 구입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이를 구입할 수 있었던 사람들은 외국인이나 공산당 상층부와 그 가족뿐이었다. 말보로 담배나 리바이스 청바지 등 많은 서방 제품들은 암시장을 통해 유통되었다.
8. 5. 무역
소련은 서방 국가들과의 무역에서 주로 농산물, 어패류, 원유, 천연가스 등 1차 상품을 수출했다. 루블화의 낮은 가치 때문에 서방과의 무역 수지는 대부분 적자이거나 매우 적었다. 예외적으로 에너지 자원 무역이 활발한 국가와는 흑자를 기록하기도 했다.반면, 동유럽의 소비에트 위성국이나 공산 국가들과는 1차 상품 및 에너지 자원뿐만 아니라 전자제품, 소비재, 공작기계, 자동차, 항공기 등 다양한 품목을 수출했다. 이 물자들은 대부분 사실상 무상 원조 형태로 제공되었다.
서방 국가들은 소련의 기술 및 품질 부족으로 인해 소련산 전자제품, 소비재, 공작기계, 자동차 등을 수입하지 않았다. 따라서 소련은 서방에 주로 1차 산품과 에너지 자원을 수출하고, 보드카와 같은 일부 품목은 물물교환 방식으로 거래했다. 예를 들어, 미국의 펩시코는 소련 내 펩시콜라 농축액 판매 대금을 스트리치나야 보드카의 미국 판매권으로 받았다.[345]
코콤 등의 무역 규제로 인해 외화가 부족했던 위성국가나 사회주의 국가들은 서방 국가로부터 제한된 품목만을 수입할 수 있었다. 이에 따라 소련은 이들 국가에 1차 산품, 에너지 자원뿐만 아니라 서방에서는 거래되지 않던 다양한 제품들을 수출했다. 1975년 소련은 세계 3위의 공작기계 생산국이었다. 이들 제품은 대부분 원조 형태로 제공되거나 상대국의 1차 산품과 교환되었다. 1930년부터 페레스트로이카 이전까지 상업 어음이 폐지되어 유통 및 할인이 이루어지지 않았고, 모든 거래는 고스뱅크(국영은행)에서 집중 결제되었다.[346]
8. 6. 침체와 개혁
니키타 흐루쇼프가 실각한 이후, 소련 경제는 침체되기 시작했다. 1986년 미하일 고르바초프 서기장은 혼합 경제를 받아들였다.1970년대부터 소련 경제는 침체되기 시작했지만, 1985년 GDP는 2.2조달러로 세계 2위의 경제 대국이었다. 1인당 GDP는 약 9,300달러(1990년 기준, 세계 31위)였다.[373] 소련은 생산 노동자에 한하여 주 35시간 근로제를 채택했으며, 농업 노동자는 특별한 경우에만 주 41시간 근로까지 허용했다.[373] 소련은 군수산업, 산업정비기기산업 부문에서 세계 1위였다.[373]
1920년대 러시아 내전으로 소련 경제는 피폐해졌다. 레닌은 신경제정책을 통해 자본주의를 도입하여 경제를 안정시켰다. 이후 소련은 다시 계획 경제로 전환했고, 1930년대 이오시프 스탈린의 5개년 계획이 성공하면서 경제 발전을 이루었다. 대공황 시기에도 소련은 높은 경제 성장률을 기록하며 1938년 세계 2위 경제 대국이 되었다. 그러나 계획 경제는 농민 수탈과 노동자들의 과도한 중노동을 야기했고, 이에 대한 불만을 해결하기 위해 1965년 독립채산제를 시행하여 혼합 경제 체제를 받아들였다.[374]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도 소련 경제는 1950년대와 1960년대에 높은 성장률을 기록했지만, 1970년대부터 침체되기 시작했다.
소련은 넓은 영토와 풍부한 자원을 바탕으로 초강대국의 지위를 유지했다. 미국과 대등한 핵무기를 보유하여 직접적인 군사 충돌을 억제했다. 그러나 국내총생산과 1인당 GDP는 미국의 2/3에서 1/3 수준이었다.
소련은 국민의 삶의 질을 희생하며 중공업 투자와 군사비 지출에 집중했다. 1950년대 15%였던 투자율은 1980년대 30%에 달했고, 1980년대 중반 군사비 비율은 16%로 추정된다. 1970년대 이후 첨단 기술의 중요성이 커졌지만, 중공업 위주였던 소련은 기술 도입에 어려움을 겪었고, 기술 발전 속도가 둔화되어 1980년대에는 마이너스를 기록했다.
소련 경제는 1950년대부터 1960년대 초까지 미국을 빠르게 따라잡았지만, 1960년대부터 성장 속도가 둔화되었다. 1975년 소련의 대미 상대적 국력은 45%로 정점에 달했지만, 이후 쇠퇴하여 미국과의 격차가 커졌다.
소련 붕괴 후 러시아의 군사력과 경제력은 급격히 약화되었고, 미국과의 격차는 더욱 커졌다. 경제 혼란으로 사회보장제도가 붕괴되자, 친미적이고 페레스트로이카를 추진한 고르바초프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높았다.[348]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소련) | 미국 | |
---|---|---|
GDP (구매력평가, 1989년 – 백만 달러) | 26595억달러 | 52333억달러 |
인구 (1990년 7월) | 약 2억 9,093만 명 | 약 2억 5,041만 명 |
1인당 GDP (구매력평가, 달러) | 9211USD | 21082USD |
노동력 (1989년) | 약 1억 5,230만 명 | 약 1억 2,555만 명 |
9. 과학 기술
소련은 1950년대 이후 미국과 국력을 건 우주 개발 경쟁을 벌였다. 1957년 소련은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1호를 쏘아 올렸고, 최초의 우주비행사인 유리 가가린, 최초의 여성 우주비행사인 발렌티나 테레시코바 등을 배출하였다. 소련은 우주 개발 프로그램을 추진하여, 장기간 운용하는 우주 정거장 미르 계획을 성공시켰다. 우주 개발 이외에도 최초의 원자력 발전소인 오브닌스크 원자력 발전소를 건설하는 등 거대과학과 순수과학에 있어서도 소련은 큰 발자취를 남겼다.[127] 현대 로켓 공학과 우주 개발의 기초는 소련의 콘스탄틴 치올코프스키가 닦았다.
항공기 분야에서는 미그, 일류신, 투폴레프 설계국 등에서 독창적인 기술이 개발되어 자국 내 군용기 조달 및 위성국가에 대한 판매에 성공했다. 하지만 경제 효율성이나 품질 향상에는 무관심했고, 국내와 위성국가 이외에서는 거의 채택되지 않았다. 특히, 스탈린 시대에는 과학적 견지보다 이데올로기가 우선되는 경우가 많았고, 트로핌 류센코가 주장한 류센코 이론으로 인해 소련의 농업은 막대한 피해를 보았다.
그러나 소련의 거대과학에 대한 치중은 군사비와 마찬가지로 경제에 상당한 부담을 주었으며, 항공 우주 산업이나 중공업을 우선한 나머지 소비재 제조가 뒷전으로 밀려 민중을 괴롭혔다. 또한 안전과 건강을 고려하지 않은 원자력 개발과 공장 건설로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사고가 일어났다. 일부 지역에서는 공장의 유해 물질과 방사능에 의한 환경 오염도 심각하였다. 아랄해 개발 계획은 20세기 최대의 환경 파괴로 불리는 사태를 초래했다.
원유 등 자원에 의존하는 구조 때문에 중후장대 산업을 중시했기 때문에 "경박단소 산업"에 대응하지 못하고, 반도체와 집적 회로, 액정 기술에서도 크게 뒤처져 서구처럼 컴퓨터의 급속한 발전과 일반 생활 보급을 실현하지 못하고 하이테크 분야에서 결정적으로 뒤처지게 되었다. 군사적 이용 목적으로 도시바와 히타치 제작소 등 일본 민간 기업으로부터 제품과 기술을 도입하기도 했다(도시바 기계 코콤 위반 사건).[342]
소련에서는 연구 개발을 위해 국립 연구 기관이 설립되었지만, 붕괴로 인해 자금 부족에 빠져 특허와 기술을 서구 기업에 매각한 사례도 있다.[343] 또한 과학자와 기술자가 일자리를 찾아 서구로 이주하는 두뇌 유출로 인해 이후 연구 개발에 차질을 빚었다.
9. 1. 우주 개발 경쟁
1950년대 이후 소련은 미국과 국력을 건 우주 개발 경쟁을 벌였다. 1957년 소련은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1호를 쏘아 올렸고, 최초의 우주비행사인 유리 가가린, 최초의 여성 우주비행사인 발렌티나 테레시코바 등을 배출하였다.
소련은 보스토크 계획, 소유즈 등 일련의 우주 개발 프로그램을 추진하였고, 장기간 운용하는 우주 정거장 미르 계획을 성공시켰다.[127] 스푸트니크 5호는 실험용 개들을 우주로 보낸 것으로 유명하다. 1961년 4월 12일, 소련은 보스토크 1호를 발사하여 유리 가가린을 최초로 우주로 보냈고, 그는 우주 여행을 완료한 최초의 인류가 되었다.[128]
9. 2. 원자력 개발
1950년대 이후 미국과 나라의 위신을 걸고 우주 개발 경쟁을 벌였다. 우주 개발 이외에도 세계 최초의 원자력 발전소인 흑연감속 비등경수 압력관형 원자로를 개발하였다.9. 3. 기초 과학 및 응용 과학
1950년대 이후 소련은 미국과 국가적 위신을 걸고 우주 개발 경쟁을 벌였다. 1957년 소련은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1호를 쏘아 올렸고, 최초의 우주비행사인 유리 가가린, 최초의 여성 우주비행사인 발렌티나 테레시코바 등을 배출하였다. 소련은 우주 개발 프로그램을 추진하여, 장기간 운용하는 우주 정거장 미르 계획을 성공시켰다. 우주 개발 이외에도 최초의 원자력 발전소인 흑연감속 비등경수 압력관형 원자로를 개발하였다.항공기 분야에서는 미그, 일류신, 투폴레프 설계국 등에서 독창적인 기술이 개발되었다.
하지만, 소련은 중후장대 산업을 중시했기 때문에 "경박단소 산업"에 대응하지 못하고, 반도체와 집적 회로, 액정 기술에서도 크게 뒤처졌다.
9. 4. 기술 격차와 경제 부담
소련은 1950년대 이후 미국과 우주 개발 경쟁을 벌였다. 1957년 소련은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1호를 쏘아올렸고, 최초의 우주비행사인 유리 가가린, 최초의 여성 우주비행사인 발렌티나 테레시코바 등을 배출하였다. 소련은 보스토크 계획, 소유즈 등 우주 개발 프로그램을 추진하였고, 장기간 운용하는 우주 정거장 미르 계획을 성공시켰다.[343] 우주 개발 이외에도 최초의 원자력 발전소인 흑연감속 비등경수 압력관형 원자로를 개발하는 등 거대과학과 순수과학에 있어서도 소련은 큰 발자취를 남겼다.그러나 소련의 거대과학에 대한 치중은 군사비와 마찬가지로 경제에 상당한 부담을 주었으며, 항공 우주 산업이나 중공업을 우선한 나머지 소비재의 제조가 뒷전으로 밀려 민중을 괴롭히게 되었다. 또한 안전과 건강을 고려하지 않은 원자력 개발과 공장 건설로 인하여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사고가 일어났다. 일부 지역에서는 공장의 유해 물질과 방사능에 의한 환경 오염도 심각하였다.
원유 등 자원에 의존하는 구조 때문에 중후장대 산업을 중시했기 때문에 "경박단소 산업"에 대응하지 못하고, 반도체와 집적 회로, 액정 기술에서도 크게 뒤처져 서구처럼 컴퓨터의 급속한 발전과 일반 생활에 이르는 본격적인 보급을 실현하지 못하고 하이테크 분야에서 결정적으로 뒤처지게 되었다. 군사적 이용 목적으로 도시바와 히타치 제작소 등 일본 민간 기업으로부터 제품과 기술을 도입하기도 했다(도시바 기계 코콤 위반 사건).[342]
10. 사회
소련은 다양한 민족과 문화가 공존하는 다민족 국가였다. 1990년 기준 소련의 인구는 약 2억 9,300만 명으로, 중화인민공화국(중국), 인도에 이어 세계 3위였다. 주요 민족은 러시아인(50.78%), 우크라이나인(15.45%), 우즈베크인(5.84%) 순이었다.
소련 사회는 소련 공산당의 통제 아래 있었으며, 언론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는 제한되었다. 국가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공식 예술 양식으로 장려했고, 다른 예술 경향은 억압되었다.
소련은 세속 국가[392]였지만, 초기에는 종교, 특히 러시아 정교회를 탄압했다. 많은 성직자들이 처형되거나 투옥되었고, 교회 재산은 몰수되었다.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 중 국민들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종교에 대한 탄압이 완화되었고, 페레스트로이카 시기에는 종교의 자유가 회복되었다.
소련의 의료 시스템은 국가가 통제하고 시민들에게 무료로 제공되었지만, 레오니드 브레즈네프 집권 이후 질적으로 저하되었다. 교육은 중앙 집중적이고 모든 시민에게 보편적으로 접근 가능했지만, 반유대주의 정책의 일환으로 유대인 지원자들에게는 더 엄격한 입학 시험이 적용되었다.
소련의 스포츠는 국가의 지원을 받아 발전했으며, 올림픽에서 많은 메달을 획득했다. 그러나 선수들은 국가의 통제 아래 있었고, 도핑 문제가 발생하기도 했다.
소련의 언론은 공산당의 통제하에 있었고, 국가나 당에 불리한 보도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프라우다, 이즈베스티야 등의 신문과 타스통신이 주요 언론 매체였다.
10. 1. 노동 운동
소련은 1989년 말 공산당의 지배력이 약화된 시기를 제외하고는 자유 노조를 허용하지 않았으며, 모든 노조는 당에 소속된 상태로 운영되었다.[375] 산업 노동자들이 패권을 잡은 사회라는 특성 때문에 자본주의 사회에서 나타나는 능동적인 노동운동[375]보다는 정부의 생산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어용 노동운동이 주를 이루었다. 당은 이러한 방침에 따라 공산주의 노동 영웅, 스타하노프 노동자 칭호를 수여하였다. 스타하노프 운동은 알렉세이 스타하노프를 중심으로 한 노동자들의 목표 초과 달성과 노동 생산성 향상을 위한 노동운동이었다.10. 2. 복지

1918년 소련 공산당은 외국인노동자차별금지법, 아동노동금지법, 양성평등고용법 등을 명문화하고, 이러한 법들이 실질적으로 실행될 수 있도록 국가가 책임을 지고 노력해야 한다고 명시했다. 법적으로 지정된 공휴일 외에도 각 산업지마다 연평균 약 25일의 휴일을 부여했다. 1917년 11월 11일 소비에트 러시아 정부는 최초로 일 8시간, 주 48시간 근무제를 채택했는데, 이는 당시 일 10~12시간 근무제를 채택했던 유럽 국가들의 노동 정책에 영향을 주었다. 1927년 우익반대파와 스탈린 계파를 중심으로 일 7시간, 주 42시간 근로제가 확립되었다. 1961년 흐루쇼프 집권기에는 주 41시간 근무제로 노동법이 수정되었으며, 광업과 화학공업에 한해서 35시간 근무제가 시행되었다.[376] 1966년에는 주 35시간 근로제가 제안되었으나 시행되지 못했으며, 니키타 흐루쇼프는 1968년 안에 주 근로시간을 최대 30시간까지 낮춘다는 계획을 발표했지만 달성하지 못했다.[377]
192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소련 경제의 고성장에 힘입어 1950년대 후반부터 본격적인 복지 제도가 실시되었다. 총 소득 중 교육, 의료, 주거 등을 보장하는 사회적 임금의 비중이 높았다. 주거 복지의 경우 1950년대 후반부터 건설된 호당 평균 9평, 5~7층(층당 평균 8호) 규모의 패널형 아파트인 흐루숍카를 통해 해결하고자 했다.[379] 식량의 경우 1918년 러시아 소비에트 시절부터 각 소행정단위의 식량 배급소에서 일정량을 배급했다. 1921년 신경제정책 도입으로 배급제가 폐지되었다가 1929년 다시 부활했다. 1935년 식량 분배 수위를 국가가 조절할 필요가 없어지면서 다시 폐지되었으나, 제2차 세계 대전 발발로 다시 부활하여 1940년대 후반까지 시행되었다. 소련은 1947년부터 공식적으로 배급제를 시행하지 않았지만, 의류, 옥수수, 비누와 같은 생필품은 배급으로 분배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이 정책은 소련 붕괴 시점인 1991년까지 지속되었다.[380]
이러한 복지 시스템은 1989년까지 어느 정도 유지되었으나, 몰타 회담 이후 소련이 혼합경제 제도를 절충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여러 사회적 복지 혜택이 줄어들기 시작했고, 1990년에는 공산주의적 요소를 거의 찾아볼 수 없는 국가가 되었다.[381][382]
10. 2. 1. 교육
아나톨리 루나차르스키는 소비에트 러시아 최초의 인민위원으로 교육을 담당했다. 초기 소비에트 당국은 (Likbez) 문맹 퇴치에 큰 중점을 두었다. 모든 왼손잡이 아이들은 소련 학교 시스템에서 오른손으로 글을 쓰도록 강요받았다.[158][159][160][161] 읽고 쓸 줄 아는 사람들은 자동으로 교사로 채용되었다. 짧은 기간 동안 질보다는 양에 치중되었다. 1940년 스탈린은 문맹이 퇴치되었다고 선언할 수 있었다. 1930년대 내내 사회 이동성이 급격히 증가했는데, 이는 교육 개혁 덕분으로 여겨진다.[162] 2차 세계 대전 이후 국가의 교육 시스템은 극적으로 확장되어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1960년대에는 거의 모든 아이들이 교육을 받을 수 있었고, 오지에 사는 아이들만 예외였다. 니키타 흐루시초프는 교육을 더욱 접근 가능하게 만들려고 노력했으며, 아이들에게 교육이 사회의 필요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음을 분명히 했다. 교육은 신소련인의 출현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163] 직접 노동 시장에 진출하는 시민들은 직업과 무료 (Vocational-technical school) 직업 훈련을 받을 수 있는 헌법적 권리를 가졌다.소련 교육 시스템은 중앙 집중적이고 모든 시민에게 보편적으로 접근 가능했으며, 문화적 후진성과 관련된 국가 출신 지원자들에게는 적극적 차별 철폐 조치가 시행되었다. 그러나 일반적인 반유대주의 정책의 일환으로, 유대인 지원자들에게 더 엄격한 입학 시험을 치르게 함으로써 고등 교육 기관의 비공식적인 유대인 할당제가 적용되었다.[164][165][166][167] 브레즈네프 시대에는 모든 대학 지원자가 지역 코무소몰 당 서기의 추천서를 제출해야 한다는 규칙이 도입되었다.[168] 1986년 통계에 따르면, 인구 1만 명당 고등 교육 학생 수는 소련이 181명인 반면 미국은 517명이었다.[169]

1970년대 소련의 의무교육은 11년제(초등학교 4년, 중학교 7년)를 채택하고 있었으며, 종합대학은 5년제, 단과대학은 4 ~ 6년제였다. 1981년부터 10학년(발트 국가들은 11학년)까지 의무 교육이 실시되었고, 모든 학교는 정부가 관리하였다.
1920년대 후반부터 고성장을 해온 소련 경제로 인해 1950년대 후반에 들어선 본격적인 복지 제도가 실시되었다. 브레즈네프 집권 시기엔 지식·문화·예술에 관련된 복지 정책이 성과를 거두었다. 각 공동체엔 문화예술 시설과 도서 시설이 들어섰다. 이 당시 소련은 서적 출판율이 높았으며, 독서량은 1960년대에 들어서 역대 최고를 기록했다. 빈부의 차 없이 거의 모든 계층이 문화·예술 활동을 하거나 또는 감상할 수 있었다. 소규모 교육 제도도 발달하여, 추가 교육을 받고싶은 노동계급은 여유 시간을 내서 학점을 이수해 추가적인 학력증진활동을 전개할 수 있었으며, 이는 명목상 무상이었으나 실제 기회는 일부 제한되었다. 또한 이러한 복지는 소련이 붕괴하기 직전인 1990년까지 거의 대부분 이어졌다.[378]
10. 2. 2. 의료
1917년 혁명 이전, 소련의 보건 상태는 선진국에 비해 크게 뒤처져 있었다. 레닌은 "이(기생충)가 사회주의를 이길 것이냐, 사회주의가 이(기생충)를 이길 것이냐"라고 언급했다.[175] 소련 의료 시스템은 1918년 인민보건위원회에 의해 구상되었다. 세마슈코 모델에 따라 의료는 국가가 통제하고 시민들에게 무료로 제공되었는데,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개념이었다. 1977년 소련 헌법 제42조는 모든 시민에게 건강 보호 및 소련 내 모든 의료 기관에 대한 무료 접근을 보장했다.[176]
혁명 이후 모든 연령대의 기대 수명이 증가했다. 이 통계는 일부 사람들에게 사회주의 시스템이 자본주의 시스템보다 우월하다는 증거로 여겨졌다. 이러한 개선은 1960년대까지 계속되어 기대 수명이 잠시 미국을 넘어섰다. 그러나 1970년대부터 알코올 남용으로 인해 기대 수명이 감소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유아 사망률이 증가하기 시작했다. 1974년 이후 정부는 이 문제에 대한 통계 발표를 중단했다. 이러한 추세는 유아 사망률이 가장 높았던 아시아 지역의 임신 수가 급격히 증가하고, 소련의 유럽 지역에서는 현저히 감소한 것으로 부분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178]
1964년 러시아 남성의 평균 수명이 64.89세로 정점에 도달한 이후 다시 하락하기 시작하여 1984년 61.7세까지 떨어졌으며, 소련 붕괴 시까지 정점 수준을 회복하지 못했다.[386]
소련에서 시행되는 많은 의료 치료법과 진단법은 표준에 못 미쳤으며, 의료 서비스 제공자가 제공하는 치료 표준이 떨어져 수술로 인한 감염 위험이 높았다. 소련의 보건 의료 시스템은 의료 장비, 의약품 및 진단용 화학 물질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었으며, 서구에서 사용할 수 있는 수많은 의약품 및 의료 기술이 부족했다. 시설은 기술 수준이 낮았고 의료 요원은 보잘것없는 교육을 받았다. 소련 붕괴 직전까지도 소련 의료 시스템의 열악함은 크게 개선되지 못하여, 1989년 조사에서 러시아 병원 중 20%가 온수 공급이 되지 않고 3%는 냉수 공급조차 되지 않았다. 7%는 전화기조차 갖추지 못했고 17%는 적절한 위생 설비를 갖추지 못했다. 비록 특권층인 노멘클라투라를 위한 특수 병원과 진료소는 더 높은 수준의 건강 관리를 제공했지만 여전히 서구 표준 이하였다.[387][388][389]
레오니드 브레즈네프가 서기장이 되기 전까지 소련 의료 시스템은 많은 외국 전문가로부터 높이 평가받았다. 그러나 브레즈네프 집권과 미하일 고르바초프 집권 기간 동안 의료 서비스 질과 제공의 불균형 등 여러 가지 기본적인 결함으로 인해 시스템이 심하게 비판받게 되었다.[176] 소련 보건부 장관 예브게니 차조프는 소련 공산당 제19차 당대회에서 세계에서 가장 많은 의사와 병원을 보유한 성공 사례를 강조하면서도 시스템 개선의 필요성을 인지하고 수십억 루블이 낭비되었다고 언급했다.[177]
10. 3. 인구
소련은 150개 이상의 서로 다른 민족이 국경 내에 살고 있던 다민족 국가였다. 1990년 소련의 인구는 2억 9,100만 명으로 중화인민공화국(중국), 인도에 이어 당시 세계 3위였다. 다수를 이루는 민족은 러시아인(50.78%)이었고, 우크라이나인(15.45%), 우즈베크인(5.84%) 순이었다.
인구 증가율은 지역별로 차이를 보였는데, 러시아와 발트 3국(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그리고 우크라이나에서는 낮았던 반면, 캅카스 3국(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그루지야)과 몰도바에서는 높았다.
소련은 레닌 시대에 소수 민족 언어에 대한 문자 체계 부여 정책을 추진했지만, 스탈린 시대에는 널리 사용되지 않는 언어 교육이 중단되기도 했다. 러시아어는 사실상의 공용어 기능을 수행했으며, 1990년에 법적으로 공식 국가 언어 지위를 얻었다.
10. 3. 1. 민족 구성
소련은 세계에서 가장 다양한 인종 구성을 보였으며, 150개 이상의 서로 다른 민족이 살고 있었다. 1990년 소련의 인구는 291,000,000명으로 중화인민공화국(중국), 인도에 이어 당시 세계 3위였다.[170]
주요 민족은 러시아인(50.78%), 우크라이나인(15.45%), 우즈베크인(5.84%) 순이었다. 그 외에도 벨라루스인(3.51%), 카자흐인(2.85%), 아제르바이잔인(2.38%), 아르메니아인(1.62%), 타지크인(1.48%), 조지아인(1.39%), 몰도바인(1.17%), 리투아니아인(1.07%), 투르크멘인(0.95%), 키르기스인(0.89%), 라트비아인(0.51%), 에스토니아인(0.36%) 등이 있었다. 기타 민족(9.75%)에는 타타르인, 체첸인, 독일인, 야쿠트인, 바슈키르인, 유대인, 헝가리인 등이 포함된다.[170]
인구 증가율은 러시아와 발트 3국(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과 우크라이나에서는 낮았던 반면, 캅카스 3국(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그루지야)과 몰도바에서는 높았다. 이로 인해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러시아인이 소련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점차 감소했다.
모든 소련 시민은 자신의 민족 소속을 가지고 있었으며, 자녀가 16세가 되면 부모에 의해 결정되었다. 부모가 동의하지 않을 경우 자녀는 자동으로 아버지의 민족으로 지정되었다. 소련의 정책으로 인해 일부 소수 민족은 더 큰 민족의 일부로 간주되기도 했다. 예를 들어, 언어적으로 관련된 조지아의 밍그렐리아인은 조지아인으로 분류되었다.[172]
여러 국적의 사람들이 같은 영토에 살면서, 수년에 걸쳐 민족적 적대감이 생겨났다.[173] 다양한 민족 출신의 사람들이 입법 기관에 참여했지만, 폴리트뷰로, 중앙위원회 서기처 등의 권력 기관은 형식적으로는 민족 중립적이었지만 실제로는 러시아계가 과대 대표되었다. 그러나 소련 지도부에는 조세프 스탈린, 그리고리 지노비예프, 니콜라이 포드고르니, 안드레이 그로미코와 같이 러시아계가 아닌 지도자들도 있었다. 소련 시대에 상당수의 러시아인과 우크라이나인이 다른 소비에트 공화국으로 이주하여 정착했으며, 1989년 마지막 인구 조사에 따르면 소비에트 공화국의 러시아계 '디아스포라'는 2,500만 명에 달했다.[174]
10. 3. 2. 언어
공식적인 언어는 없었으나 사실상 러시아어가 공용어 역할을 하면서 주로 사용되었다.레닌 시대, 소련 정부는 소수 언어 집단에 자체 문자 체계를 부여했다. 일부 결점이 발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문자 체계의 개발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소련 후기에는 다언어 사용 상황이 유사한 국가들이 비슷한 정책을 시행했다. 이러한 문자 체계를 만들 때 심각한 문제는 언어들이 서로 방언적으로 크게 달랐다는 점이다. 언어에 문자 체계가 부여되고 주목할 만한 출판물에 등장하면 '공용어' 지위를 얻게 되었다. 자체 문자 체계를 받지 못한 소수 언어가 많았다. 따라서 그 화자들은 제2언어를 사용해야 했다. 정부가 이 정책에서 후퇴한 사례도 있는데,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스탈린 시대에 널리 사용되지 않는 언어로 교육이 중단된 경우이다. 이러한 언어들은 그 후 다른 언어, 대부분 러시아어로 동화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일부 소수 언어가 금지되었고, 그 화자들은 적과의 협력 혐의를 받았다.[181]
소련의 많은 언어 중 가장 널리 사용되는 언어인 러시아어는 사실상 '민족 간 의사소통 언어'()로서 공용어 기능을 했지만, 1990년에야 비로소 법적으로 공식 국가 언어 지위를 얻었다.
소비에트 연방은 150여 개의 민족을 품은 다민족 국가였으며, 각 지역에 기간 민족이 존재했다. 민족 공화국 내부에 자치 공화국이나 자치주가 설치된 것도 이 때문이다. 또한 국민의 대부분은 차이가 있긴 하지만 러시아어를 이해했고, 모스크바나 레닌그라드, 러시아인이 고대부터 정착한 지역을 제외하고는 이 러시아어와 현지어의 병용이 보였다.
10. 4. 종교
소련은 세속 국가[392], 즉 헌법상 종교와 정부의 분리를 선언한 국가였다. 이 원칙은 1918년 1월 20일(교회력) СНК РСФСР의 칙령 "정부와 종교, 학교와 종교의 분리에 관하여"[393]에서 처음으로 선언되었다. 이 법령은 교회가 정부 및 공립학교로부터 분리되어야 하며, 법인으로서의 권리와 소유권이 없고 인민의 개인적인 일로 취급되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소련 공산당은 공개적으로 '종교적 편견'의 소멸을 그 임무로 삼았다.[394] 1939년까지 행정 절차에 따라 정부기관, 특히 NKVD가 '종교적 삶 청산정책'을 실시했다.[395] 이후 종교 정책은 보다 차별적으로 바뀌었다.
1920년대 초반, 소비에트 정권은 많은 정교회 성당을 파괴했다. 특히 모스크바의 구세주 그리스도 성당과 16세기에 세워진 모스크바 크렘린 내 몇몇 수도원, 그리고 러시아 전역의 수십 개 성당이 파괴되었다. 1925년부터 1947년까지 소련에는 대중사회조직 '무신론자 투쟁 연합'(1929년 6월까지는 '무신론자 연합')이 있었다. 또한 출판사 '무신론자', 이후 '국립반종교문학출판사'(ГАИЗ)가 활동했다.
이러한 무신론적 세계관은 당기관과 정부기관에 의해 지지되고 홍보되었으며, 대학에서는 '과학적 무신론'이라는 원칙을 가르쳤다.
1943년 소련에는 총대주교좌가 복원되었으며, 소비에트 정부의 옹호 아래 세르게이 총대주교가 취임했다. 이때부터 모든 합법적 종교활동은 두 정부기관의 직접적이고 공개적인 감독 하에 이루어졌는데, 이는 1965년 12월 소련 장관평의회 산하의 종교평의회로 통합되었다.
소련에서 러시아 정교의 최종적인 복권은 페레스트로이카 시기인 1988년, 정부 차원에서 루스의 세례 1000주년을 기념했을 때 이루어졌다.
공식적으로 무신론을 내세운 소련 정부의 정책과는 달리, 당시 자료에 따르면 소련 국민의 1/3이 종교를 가지고 있었다. 그 중 절대다수는 기독교(대부분 러시아 정교회, 일부는 로마 가톨릭과 침례교, 루터교, 오순절교회 등의 개신교 교파) 및 이슬람교(대부분 수니파, 아제르바이잔인은 시아파)를 신봉하였다. 소수의 유대교, 불교, 라마교, 샤머니즘 신자도 있었다.
10. 4. 1. 종교 탄압
러시아 혁명으로 세속주의, 무신론, 유물론을 신봉하는 소비에트 연방이 성립되자, 러시아 제국의 국교였던 정교회(러시아 정교회, 우크라이나 정교회, 조지아 정교회 등)는 수많은 성당과 수도원이 폐쇄되고 재산이 몰수되었다. 나중에 세계유산이 된 솔로베츠키 제도의 수도원들은 강제 수용소로 전용되었다.
성직자와 신자들은 외국의 스파이 등의 혐의로 체포되어 처형되거나 순교하였다. 초대 키예프 대주교였던 안드로니크 니콜리스키 대주교는 산 채로 묻힌 뒤 총살당했다. 모스크바 총대주교티혼은 처음에는 볼셰비키에 강경하게 반발했지만, 가혹한 탄압에 현실적인 태도로 전환하여 소비에트 정권을 러시아의 정당한 정부로 인정하고 협력하였으나, 교회 활동은 여전히 억압되었다.
1921년부터 1923년까지 주교 28명, 사제 2691명, 수도승 1962명, 수녀 3447명, 기타 신자 다수가 처형되었다.[351] 1918년부터 1930년까지 약 4만 2000명의 성직자가 살해되었고, 1930년대에도 3만 명에서 3만 5000명의 사제가 총살당하거나 투옥되었다.[352] 1937년과 1938년에는 52명의 주교 중 40명이 총살되었다.[353]
정부의 박해로 많은 망명자들이 생겨났다. 세르게이 불가코프, 블라디미르 로스키, 파벨 예프도키모프, 일리아 멜리아(조지아인) 등 세계적으로 유명한 신학자들이 망명하여, 20세기 초까지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정교회의 전통이 해외에 알려졌다.
1931년에는 스탈린의 명령으로 구세주 그리스도 대성당이 폭파되었다.
1940년대 독소전쟁에서 독일의 침략에 대한 국민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스탈린은 정교회에 대한 박해를 완화하여 교회 활동을 회복시키고, 1925년 총대주교 티혼 서거 이후 공석이었던 모스크바 총대주교 선출을 허용하였다(1943년). 제한적이었지만 교회 관련 출판이 허용되었고, 1918년부터 폐쇄되었던 모스크바 신학교가 재개되었다.
하지만 1940년대 중반 소핀 전쟁 이후 발람 수도원이 소련 영토가 되면서 발람 수도원의 수도사들은 핀란드로 망명하였고, 핀란드 정교회에서 신발람 수도원이 설립되는 등, 소련의 정교회 탄압이 완전히 완화된 것은 아니었다.
스탈린의 죽음 후, 흐루쇼프는 다시 정교회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였다. 러시아 정교회는 다시 타격을 입었고, 교회 수는 절반 이하로 감소하였다. 이후 소련 붕괴까지 러시아 정교회의 교세는 회복되지 않았다. 정교회뿐 아니라 가톨릭교회(동방 가톨릭 교회 포함), 성공회, 개신교도 탄압을 받았다.
10. 4. 2. 종교의 자유 회복
소련은 세속 국가[392], 즉 헌법상 종교와 정부의 분리를 선언한 국가였다. 이 원칙은 1918년 1월 20일(교회력) СНК РСФСР의 칙령 "정부와 종교, 학교와 종교의 분리에 관하여"[393]에서 처음으로 선언되었다. 이 법령은 교회가 정부 및 공립학교로부터 분리되어야 하며, 법인으로서의 권리와 소유권이 없고 인민의 개인적인 일로 취급되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소련 공산당은 공개적으로 '종교적 편견'의 소멸을 그 임무로 삼았다.[394] 1939년까지 행정 절차에 따라 정부기관, 특히 NKVD가 '종교적 삶 청산정책'을 실시했다.[395] 이후 종교 정책은 보다 차별적으로 바뀌었다.
1920년대 초반, 소비에트 정권은 많은 정교회 성당을 파괴했다. 특히 모스크바의 구세주 그리스도 성당 (

이러한 무신론적 세계관은 당기관과 정부기관에 의해 지지되고 홍보되었으며, 대학에서는 '과학적 무신론'이라는 원칙을 가르쳤다.
1943년 소련에는 총대주교좌가 복원되었으며, 소비에트 정부의 옹호 아래 세르게이 총대주교가 취임했다. 이때부터 모든 합법적 종교활동은 두 정부기관의 직접적이고 공개적인 감독 하에 이루어졌는데, 이는 1965년 12월 소련 장관평의회 산하의 종교평의회로 통합되었다.
소련에서 러시아 정교의 최종적인 복권은 페레스트로이카 시기인 1988년, 정부 차원에서 루스의 세례 1000주년을 기념했을 때 이루어졌다.
공식적으로 무신론을 내세운 소련 정부의 정책과는 달리, 당시 자료에 따르면 소련 국민의 1/3이 종교를 가지고 있었다. 그 중 절대다수는 기독교(대부분 러시아 정교회, 일부는 로마 가톨릭과 침례교, 루터교, 오순절교회 등의 개신교 교파) 및 이슬람교(대부분 수니파, 아제르바이잔인은 시아파)를 신봉하였다. 소수의 유대교, 불교, 라마교, 샤머니즘 신자도 있었다.
10. 4. 3. 문학
소련에서는 언론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가 없었기 때문에,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처럼 노벨 문학상 수상을 거부해야 했던 문학가도 있었고,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처럼 국외로 추방당한 문학가도 있었다. 이처럼 문화인들에게는 고난이 잇따랐고 언론과 표현의 탄압이 만성화된 상황이 계속되었다.[203],[204],[205]10. 4. 4. 예술
소련의 예술은 소련이 존재하는 동안 여러 단계를 거쳤다. 혁명 이후 처음 10년 동안은 상대적으로 자유로웠고, 예술가들은 독특한 소련 예술 양식을 찾기 위해 여러 가지 다른 스타일을 실험했다. 레닌은 예술이 러시아 국민들에게 접근 가능하기를 원했다. 반면 수많은 지식인, 작가, 예술가들이 망명당하거나 처형되었고, 니콜라이 구밀료프(Nikolay Gumilyov)와 예브게니 자먄틴(Yevgeny Zamyatin)과 같이 볼셰비키에 대한 음모 혐의로 처형된 이들의 작품은 금지되었다.[203]정부는 다양한 경향을 장려했다. 예술과 문학에서 전통적인 것과 급진적으로 실험적인 것들을 포함한 수많은 사조가 확산되었다. 공산주의 작가 막심 고리키(Maxim Gorky)와 블라디미르 마야콥스키(Vladimir Mayakovsky)는 이 시기에 활동했다. 대부분 문맹이었던 사회에 영향을 미치는 수단으로 영화가 국가로부터 장려되었고,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Sergei Eisenstein) 감독의 많은 걸작들이 이 시대에 만들어졌다.
스탈린 통치 기간 동안 소련 문화는 정부가 부과한 사회주의 리얼리즘 양식의 부상과 지배를 특징으로 하였고, 미하일 불가코프(Mikhail Bulgakov)의 작품과 같은 몇몇 예외를 제외하고는 다른 모든 경향은 심하게 억압되었다. 많은 작가들이 투옥되거나 사망했다.[204]
흐루쇼프 해빙 이후 검열이 완화되었다. 이 기간 동안 공공 생활의 순응과 개인 생활에 대한 집중이 특징인 소련 문화의 독특한 시대가 발전했다. 예술 형식에 대한 더 큰 실험이 다시 허용되어 더욱 정교하고 미묘하게 비판적인 작품이 제작되었다. 정부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대한 강조를 완화했고, 예를 들어 유리 트리포노프(Yury Trifonov) 작가의 소설의 많은 주인공들은 사회주의 건설이 아닌 일상생활의 문제에 관심을 가졌다. 이 후기에는 ''사미즈다트''로 알려진 지하 반체제 문학이 발전했다. 건축 분야에서는 흐루쇼프 시대는 스탈린 시대의 화려한 스타일과는 달리 기능적인 디자인에 주로 초점을 맞추었다. 음악에서는 서구의 재즈와 같은 대중 음악의 인기가 높아짐에 따라 소련 전역에서 많은 재즈 오케스트라가 허용되었는데, 특히 소련의 주요 음반 레이블 이름을 딴 멜로디야 앙상블이 대표적이다.
1980년대 후반,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 정책은 언론과 출판에서 전국적으로 표현의 자유를 크게 확대했다.[205] 혁명 직후 소련에서는 혁명적인 전위예술이 유행하여 추상예술과 구성주의가 탄생했고, 러시아 아방가르드는 공산당의 일종의 공인 예술로서 혁명 사상을 선전하는 선전 포스터에 널리 채택되었다. 당시 소련은 세계 최초의 전자 음악 기기인 테르멘보이소가 만들어지고, 몽타주 이론이 탄생하는 등 전위예술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불우했던 많은 외국 출신 전위예술가들이 소비에트 연방 건설에 참여했다. 예를 들어, 앞서 언급한 소비에트 궁전 계획에는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 발터 그로피우스(Walter Gropius), 에리히 멘델스존(Erich Mendelsohn), 오귀스트 페레(Auguste Perret), 한스 펄치히(Hans Poelzig)와 같은 신진 모더니즘 건축가들이 참여했다. 브세볼로드 메이예르홀트가 아지트프롭 연극 기법의 확립, 고전의 혁신적인 해석에 기반한 연출, 코메디아 델라르테, 서커스 등의 움직임과 기계적 이미지를 결합한 신체 훈련법인 "비오메카니카"를 제창하는 등 1920년대 소비에트 러시아 연극은 물론 20세기 전반의 국제 연극에 큰 영향을 주었다.
스탈린 정권하의 1932년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에서 "사회주의 리얼리즘" 방침이 제창된 이후, 1930년대 전반에 걸쳐 문학, 조각, 회화 등 모든 예술 분야의 작가 대회에서 공식적으로 채택되었고, 이에 맞지 않는 것은 제한되어 점차 쇠퇴하게 되었다.
한편 발레 등 러시아의 전통적인 예술은 정부의 풍부한 예산 지원으로 높은 수준을 유지했고, 클래식 음악에서도 당국의 제한을 받으면서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Dmitri Shostakovich) 등이 작품을 남겼고, 예브게니 무라빈(Yevgeny Mravinsky)이 이끄는 레닌그라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등이 연주를 남겼다. 발레단과 오케스트라들은 공산주의 이념을 널리 알리기 위해 해외 공연을 했지만, 실제로는 외화 획득이 주목적이었다고 한다. 소련 붕괴 후에는 존속이 어려워져 오케스트라가 개명하거나 단원들이 독립하는 등 유령 오케스트라가 다수 탄생했다. 아나톨리 벨레르니코프(Anatoly Vedernikov)와 같이 당국에 영합하지 않는 연주자는 해외 공연이 제한되었다.
서구 국가들에서 인기를 끌었던 록 음악과 헤비메탈, 재즈 등의 음악과 할리우드 영화 등의 대중문화는 "상업적이고, 퇴폐를 불러일으키는 유치한 것"으로 규제되었으며, 북유럽 국가들과 서독 등의 대중음악과 위성국가들과 일본, 이탈리아 등의 예술적 요소가 높은 영화만이 상영을 허가받았다. 이에 따라 외국의 라디오 방송을 감청하는 것도 금지되었다.

10. 4. 5. 영화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 감독의 많은 걸작들이 이 시대에 만들어졌을 정도로, 대부분 문맹이었던 사회에 영향을 미치는 수단으로 영화가 국가로부터 장려되었다.[203]사회주의 리얼리즘 양식에 따라 제작된 미하일 불가코프의 작품과 같은 몇몇 예외를 제외하고는 다른 모든 경향은 심하게 억압되었다.[204]
흐루쇼프 해빙 이후 검열이 완화되면서, 예술 형식에 대한 더 큰 실험이 다시 허용되어 더욱 정교하고 미묘하게 비판적인 작품이 제작되었다.
서구 국가들에서 인기를 끌었던 할리우드 영화 등의 대중문화는 "상업적이고, 퇴폐를 불러일으키는 유치한 것"으로 규제되었으며, 북유럽 국가들과 서독, 그리고 위성국가들과 일본, 이탈리아 등의 예술적 요소가 높은 영화만이 상영을 허가받았다.
소련 또는 사회주의 체제가 묘사된 작품은 다음과 같다.
제목 | 연도 | 국가 |
---|---|---|
전함 포템킨 | 1925년 | |
나의 마을은 전쟁터였다 | 1962년 | |
지구 폭파 작전 | 1970년 | |
모스크바는 눈물을 믿지 않는다 | 1979년 | |
파이어폭스 | 1982년 | |
고리키 파크 | 1983년 | |
록키 4/불꽃의 우정 | 1985년 | |
레드독 | 1988년 | |
레드 스콜피온 | 1989년 | |
붉은 10월 | 1990년 | |
터미네이터 2 | 1991년 | |
스타링라드 | 2001년 | |
쿠쿠슈카 라플란드의 요정 | 2002년 | |
K-19 | 2002년 | |
007 시리즈 |
007 시리즈나 골고 13 등 194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의 세계 정세를 배경으로 하는 픽션 작품에서 소비에트 연방은 자주 묘사된다. 특히 첩보 기관 KGB의 활동이나 정부 고관 및 과학자들의 망명 사건 등이 자주 소재로 된다. 제작 국가가 서구 국가였던 점과 소비에트 연방의 내부 사정이 불명확했던 점 때문에 소비에트 연방 관계자는 악역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았다. 미국과 소련의 긴장이 완화된 냉전 종식 전후에는 레드독(1988년)처럼 단순한 악역이 아닌 고지식하고 서구 문화에 어색해하는 캐릭터로 묘사되는 경우도 증가했다.
10. 4. 6. 건축
흐루쇼프 해빙 이후 검열이 완화되면서 건축 분야에서는 스탈린 시대의 화려한 스타일과는 달리 기능적인 디자인에 주로 초점을 맞추었다.[204]10. 4. 7. 음악
소련은 발레와 클래식 음악(쇼스타코비치 등)에서 높은 수준을 유지했다. 정부는 유명한 발레단과 오케스트라를 후원했다. 므라빈스키가 지휘하는 레닌그라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는 명연주를 남겼다.[203] 모스크바의 볼쇼이 극장에 소속된 볼쇼이 발레단과 레닌그라드의 마린스키 극장에 소속된 마린스키 발레단은 세계 최고의 발레단으로 인정받는다. 고르바초프 시대 이후에는 대중문화도 크게 발전했다.흐루쇼프 해빙 이후 검열이 완화되면서, 음악에서는 서구의 재즈와 같은 대중 음악의 인기가 높아짐에 따라 소련 전역에서 많은 재즈 오케스트라가 허용되었는데, 특히 소련의 주요 음반 레이블 이름을 딴 멜로디야 앙상블이 대표적이다.
소련에서는 음악 교육 제도가 설립되어 많은 재능 있는 작곡가와 연주가를 배출했지만, 그 대부분은 러시아인이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인, 벨라루스인, 유대인, 코카서스 지역 출신자들도 음악 분야에서 중요한 공헌을 했으며, 이들은 주로 클래식 음악 분야에서 걸작을 남겼다.
10. 4. 8. 스포츠
소련의 스포츠는 모두 국가에 의해 운영되었고, 자유주의 국가에서 볼 수 있는 운동선수가 프로모터가 기획하는 운동 경기에 참가하여 관객에게 즐거움을 주고 이윤을 얻는 상업적 스포츠(프로 스포츠)는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소련은 국위 선양을 위해 스포츠, 특히 올림픽에서 좋은 성적을 내고자 했다. 그래서 소련은 국가의 선수 육성 프로그램으로 선수를 육성했고, 소련의 운동 선수들은 올림픽에서 많은 금메달을 획득했다. 이에 따라 당이 후원하는 풀타임 아마추어 운동선수의 범람은 올림픽 대회가 과거에 가졌던 순수 아마추어 스포츠맨십의 이상을 쇠퇴시켰다.소련은 축구, 농구, 배구, 하키, 아이스하키, 기계 체조 강국이었다. 소련이 참가한 마지막 올림픽이었던 1988년 하계 올림픽에서 소련은 스포츠 강국 동독과 미국을 크게 앞서며 55개의 금메달로 압도적인 1위를 하였다.
1980년 소련은 1980년 하계 올림픽을 개최하였으나, 미국을 필두로 한 자유 민주주의 진영은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항의해 이 대회를 보이콧했다. 소련과 공산 진영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개최되는 1984년 하계 올림픽을 보이콧하였다(표면상의 불참사유는 '선수단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는 것). 이 두 올림픽을 두고 "반쪽 대회"라고 한다.
1980년 하계 올림픽에서는 핀란드 선수가 당시에는 금지되지 않았던 혈액 도핑을 하고 10,000m와 5,000m 메달리스트가 되었다.[390][391]
소련은 월드컵에 7회 출전했으며, 1966년에는 4위를 차지했다. 또한 1956년과 1988년 올림픽 축구에서 금메달을 차지하였다.
국가의 위신을 건 강화책이 시행되었고, 선수 육성 프로그램을 통해 육성된 선수들이 올림픽에서 많은 메달을 획득했다. 레슬링, 아이스하키, 축구, 배구, 농구, 하키, 체조 강국으로 알려져 있으며, 올림픽과 세계 선수권 대회에서 많은 메달을 획득했다(올림픽 첫 참가 이후 멜버른 올림픽부터). 하지만 소련 붕괴 후 선수들의 많은 수가 인권을 무시한 훈련만을 받았고 불법 도핑을 했다는 것이 당사자들의 고백으로 드러났다. 그 기록들은 현재도 박탈되지 않고 남아 있다.
공산주의 체제 상 모든 스포츠 선수는 국가의 관리 하에 있는 스테이트 아마로 간주되었으며, 자본주의 국가들과 같은 프로 스포츠 및 프로 선수는 존재하지 않았다. 다만, 프로급 선수들은 많이 있었다.
1980년, 소비에트 연방 역사상 유일한 하계 올림픽인 모스크바 올림픽이 개최되었다. 냉전 시대였던 만큼, 국가 총력을 기울여 올림픽의 성공을 목표로 했지만, 전년에 있었던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대한 항의라는 명목으로 일본, 서독, 미국 등 서방 국가들과 소련과 대립 중이었던 중화인민공화국이 보이콧을 실시했다.
크렘린의 시계탑인 스파스카야 탑의 시보와 함께 시작된 개회식에서는 레닌 스타디움 중앙의 매스 게임이 국장과 마스코트 캐릭터인 꼬마곰 미샤, 그리고 소비에트 연방을 구성하는 15개 공화국의 주요 민족의 의상 무늬를 표현하는 등 다채로운 그림을 보여주었다.
1984년에 개최된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서는 1983년 미군의 그레나다 침공에 대한 항의라는 명목으로 소비에트 연방과 동독을 비롯한 소련의 위성국인 동구권 국가들이 대부분 보복이라고 할 만한 일제 보이콧을 선언했다. 그러나 소련은 그 대안이라고 할 수 있는 프렌드십 게임즈(Дружва-84ru) 개최를 결정하고 동구권의 일류 선수들이 참가했다.
마인드 스포츠 중에서도 특히 체스는 전통적으로 성행했고, 국민들에게 공인된 몇 안 되는 오락이었다. 소련 시대에는 국가가 관리하는 체스 학교가 각지에 건설되었고, 체제가 붕괴될 때까지 세계 최고 수준을 유지했다. 국내 선수권 대회 개최와 서적 출판도 활발했다. 컴퓨터 체스 연구도 활발하여, 제1회 세계 컴퓨터 체스 선수권 대회에서도 소련의 프로그램이 우승했고, 인공 지능 권위자 존 매카시(John McCarthy)와 앨런 뉴웰(Allen Newell)이 이끄는 매사추세츠 공과대학교(Massachusetts Institute of Technology)와 소련 모스크바 이론 실험 물리 연구소가 행한 세계 최초의 컴퓨터끼리의 체스 대결에서도 승리했다.
체스계에서는 프로와 아마의 구분이 없었기 때문에, 미하일 탈(Mikhail Tal)과 미하일 보트비닉(Mikhail Botvinnik), 가리 카스파로프(Garry Kasparov) 등 소련 출신 선수들이 세계 챔피언을 장기간 독점했다. 한때 국제 대회에 참가할 수 없었던 그랜드마스터급 국내 선수들을 위해 소련 체스 협회가 "소련 연방 그랜드마스터"라는 독자적인 타이틀을 제정하기도 했지만, 점차 톱 선수라면 시합 여행도 허가받게 되었다. 서방 대회에서 우승하여 국위 선양에 기여할 뿐만 아니라, 대회 상금, 지도 대국 사례, 저술한 기보의 인세 등 적지는 않지만 귀중한 외화를 벌어들였다. 하지만 유력 선수가 이를 이용하여 망명하는 경우도 있었다. 특히 빅토르 코르츠노이(Viktor Korchnoi)는 망명 후 "서방 선수"로서 아나톨리 카르포프(Anatoly Karpov) 등 소련 대표와 국제 대회에서 대결하여 소련으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소련 대표와 서방 선수가 팀으로 대결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특히 보리스 스파스키(Boris Spassky)와 미국인 보비 피셔(Bobby Fischer)가 대결한 1972년 세계 챔피언 결정전은 시합 진행을 둘러싸고 크렘린과 백악관이 개입하는 등 정치적 문제로까지 발전하기도 했다. 패배한 스파스키는 그 후의 처우 악화 등으로 1975년 프랑스로 망명했다.
체제 붕괴 후에는 서방으로 거점을 옮기는 선수도 있었지만, 블라디미르 크람닉(Vladimir Kramnik) 등 소련 시대 체스 학교에서 교육받은 선수들이 다수 활약하고 있다. 구 동독과 인근 동유럽 국가들도 소련과 비슷한 상황이었다.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스포츠 관리에 있어 소련을 본보기로 삼았기 때문에, 반관반민 조직(전국체육총회)에 의한 통할이나 마인드 스포츠를 국가체육총국이 관할하는 등 영향이 크다.
소련에서는 축구가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 중 하나였다. 소련 축구 국가대표팀은 1950년대부터 1960년대에 걸쳐 황금기를 맞이했으며, 아마추어 선수로 구성된 올림픽에서 뛰어난 활약을 보였다. 1956년 멜버른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1972년 뮌헨 올림픽,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에서는 동메달을 획득했다. 1988년 서울 올림픽에서는 프로 선수 출전이 허용된 후에도 금메달을 획득하며 소련 대표팀의 멋진 마무리를 장식했다.
FIFA 월드컵에서는 올림픽만큼 두드러진 활약은 없었지만, 1966 FIFA 월드컵에서 4강에 진출하는 등 종종 상위권에 진출하는 강호로 알려져 있었다. 또한 소련의 전설적인 선수이자 역사상 최고의 골키퍼로 여겨지는 레프 야신은 세계 최고 골키퍼에게 수여되는 야신 트로피의 이름에 그 명성을 남겨 당시의 강력함을 보여준다.
UEFA 유럽 축구 선수권 대회에서도 괄목할 만한 활약을 보였으며, 1960년 제1회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이후 1964년, 1972년, 1988년에도 준우승을 기록했다. 1988년 준우승은 같은 해 올림픽 금메달과 함께 소련 대표팀의 멋진 마무리를 장식했다.
개최국 | 결과 | |
---|---|---|
1958 FIFA 월드컵 | 스웨덴 | 8강 |
1960 유러피언 네이션스컵 | 프랑스 | 우승 |
1962 FIFA 월드컵 | 칠레 | 8강 |
1964 유러피언 네이션스컵 | 스페인 | 준우승 |
1966 FIFA 월드컵 | 잉글랜드 | 4위 |
1970 FIFA 월드컵 | 멕시코 | 8강 |
1974 FIFA 월드컵 | 독일 | 예선 탈락 |
1978 FIFA 월드컵 | 아르헨티나 | 예선 탈락 |
1982 FIFA 월드컵 | 스페인 | 2차 리그 탈락 |
1986 FIFA 월드컵 | 멕시코 | 16강 |
1990 FIFA 월드컵 | 이탈리아 | 조별 리그 탈락 |
1985 FIFA U-16 세계 선수권 대회 | 중국 | 불참 |
1987 FIFA U-16 세계 선수권 대회 | 캐나다 | 우승 |
1989 FIFA U-16 세계 선수권 대회 | 스코틀랜드 | 불참 |
1991 FIFA U-17 세계 선수권 대회 | 이탈리아 | 불참 |
10. 5. 언론
소련에서 텔레비전, 라디오, 신문 등의 매스컴에 의한 보도는 소련 공산당의 통제하에 놓여 있었다. 1986년 글라스노스트가 시작될 때까지 국가나 당에 불리한 보도는 이루어지지 않았다.10. 5. 1. 보도 통제
소련 공산당의 기관지인 프라우다와 정부 기관지인 이즈베스티야, 공산 청년 동맹 기관지인 콤소몰스카야 프라우다 등의 신문이 유명했고 특히 콤소몰스카야 프라우다는 22,000,000부가 넘는 세계 최대의 발행 부수로 기네스 북에 등재되었다. 통신사는 1925년에 창설된 국영 타스통신이 있었다. 대외 방송은 1922년 창설된 모스크바 라디오가 있었다.소련인은 외국의 방송을 듣는 것이 금지되었고, 신문, 라디오, 텔레비전 같은 보도기관에 대해서는 소련 공산당이 완벽하게 보도 관제를 했다. 이것은 외국의 큰 뉴스나 체르노빌 사고, 대한항공기 격추 사건과 같은 큰 사건으로부터 국내의 정치, 경제적인 사건, 당 간부의 숙청이나 지하철 사고, 탄광 사고와 같은 사건에 이르기까지 소련 정부와 공산당에 위해가 되는 보도는 일절 불가능했으며, 만약 보도되어도 정부와 당에 유리하도록 왜곡되었다.
서방 언론의 특파원은 기본적으로 국내를 자유롭게 취재, 보도하는 것이 금지되어 사전에 신청이 필요했다. 또한 취재처의 선택 및 일정은 모두 준비된 것에 따라야 했다. 모스크바 올림픽 등의 국제적 이벤트나, 외국의 수뇌진이 공식 방문을 할 때 소련을 방문한 보도진에게는 준비된 취재 스케줄이 반드시 제공되었다. 서방의 보도기관에서 일하는 소련인 종업원 역시 당국이 선택하였다. 그들은 서방의 보도기관이나 그 특파원의 행동을 당국에 보고해야만 하였다.
이처럼 외국의 방송 도청이 금지되었을 뿐만 아니라, 텔레비전, 라디오, 신문 등의 매스컴에 의한 보도는 공산당의 통제하에 놓여, 국가나 당에 불리한 보도는 1986년 글라스노스트가 시작될 때까지 나가지 않았다.
이러한 규제는 외국의 사건이나 체르노빌 사고, 대한항공 격추 사건과 같은 국제적으로 영향이 있는 사건뿐만 아니라, 국내의 정치, 경제적인 사건, 당 간부의 숙청이나 지하철 사고, 탄광 사고와 같은 사건에 이르기까지, 그것이 국가나 당에 대해 마이너스 영향을 준다고 판단된 것은 거의 보도되지 않았거나, 설령 보도되었다 하더라도 국가나 당에 유리한 내용이 되도록 왜곡되었다. 그 때문에 서방 국가에서 올림픽 등이 열리면, 거기서 처음으로 진실을 알게 된 소련의 선수나 관계자가 그대로 망명을 희망하는 경우가 빈발했다.
니콜라이 2세와 그의 가족을 재판 없이 총살한 진실을 밝히려고, 1979년에 지질 조사대가 황제 일가의 유골 발굴을 실시했지만, KGB에 체포된 사례가 있다. 그러나 소련 붕괴 후 러시아에서는 70년 이상이나 은폐되었던 이 사실이 밝혀지고, 러시아 혁명으로부터 80년이 지난 1998년에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서방 국가 언론사 특파원들은 기본적으로 소련 국내 취재 및 보도가 금지되었으며, 사전 신청이 필요했지만 대부분 거절당했다. 허가를 받더라도 취재 대상 및 일정은 모두 사전에 정해진 것에 따라야 했다. 모스크바 올림픽과 같은 국제 행사나 서방 국가 정상의 공식 방문 시 소련을 방문한 취재진에게는 이러한 사전에 정해진 취재 일정이 반드시 제공되었다.
서방 국가 언론사에서 일하는 소련인 직원들 또한 스스로 선택할 수 없었고, 당국에서 지정한 사람만 받아들여야 했다. 이들 중 다수는 서방 국가 언론사 및 특파원들의 행동을 당국에 보고할 의무를 지고 있었다.
소련에서의 보도 통제의 일환으로, 공산당 서기장 등 당의 요인이 사망했을 경우, 당의 공식 발표에 앞서 텔레비전이나 라디오가 정규 방송을 긴급히 중단하고, 클래식 음악이나 제2차 세계 대전 전사 등 역사 관련 영상으로 전환되고, 크렘린 등 요소에 게양된 국기가 반기로 내려지는 것이 관례였다. 이 때문에 국민(과 서방의 보도 기관)들은 텔레비전이나 라디오 방송이 변경되고, 요소에 게양된 국기가 반기로 내려질 때마다 모스크바 시내의 정부 건물, 병원, 군 시설 등을 방문하여 정보 수집에 힘쓴 후, 이러한 대응을 보고 어느 계층의 요인이 사망했는지 추측했다고 알려져 있다.
또한 당의 요인이 실각(혹은 숙청)했을 경우, 그 사실이 정부로부터 즉각 공식 발표되는 경우는 드물었다. 이 때문에 서방 국가들의 정보 기관원과 보도 기관의 특파원은 메이데이 등 기념일 퍼레이드 시 크렘린 붉은 광장 연단에 서 있는 요인들의 위치 변화나, 신문, 텔레비전, 라디오 뉴스에서의 다루는 횟수와 순서를 관찰하여 실각 등에 의한 당 중앙에서의 요인들의 서열 변화를 추측하고, 이를 "크렘리놀로지"라고 불렀다.
10. 5. 2. 프로파간다
소련의 선전은 국민들의 공산주의적 애국심을 고취하기 위한 수단으로 포스터, 라디오, 책, 미술 등 다양한 매체를 활용했다. 특히 레닌 시대의 프로파간다는 몽타주 이론과 전위파 등 선구적인 기법을 사용하여 주목받았다.소련은 언론과 출판의 자유를 헌법으로 보장했지만, 실제로는 검열을 통해 언론과 표현의 자유를 제약했다. 출판은 공산주의 이념을 선전하는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소련 공산당의 기관지인 프라우다와 정부 기관지인 이즈베스티야, 공산 청년 동맹 기관지인 콤소몰스카야 프라우다 등의 신문이 유명했으며, 특히 콤소몰스카야 프라우다는 2,200만 부 이상의 발행 부수로 기네스 북에 등재되었다. 1925년에는 국영 타스통신이 설립되었고, 1922년에는 모스크바 라디오가 대외 방송을 시작했다.
소련 국민들은 외국의 방송을 청취하는 것이 금지되었고, 신문, 라디오, 텔레비전과 같은 보도 기관은 소련 공산당의 철저한 통제하에 있었다. 체르노빌 사고나 대한항공기 격추 사건과 같이 소련 정부와 공산당에 불리한 사건은 보도되지 않거나 왜곡되었다.
서방 언론 특파원들은 소련 내 자유로운 취재 및 보도가 금지되었고, 사전에 허가를 받아야 했다. 모스크바 올림픽과 같은 국제 행사나 외국 정상의 방문 시에는 준비된 취재 일정에 따라야 했다. 서방 언론사에서 일하는 소련인 직원들은 당국이 선택했으며, 이들은 특파원들의 행동을 당국에 보고해야 했다.
소련의 보도 통제는 당 요인의 사망 시 텔레비전과 라디오 방송이 정규 방송을 중단하고 클래식 음악이나 역사 관련 영상을 방송하고, 크렘린 등의 국기를 반기로 게양하는 관례로 나타났다. 또한, 당 요인의 실각은 즉시 발표되지 않았기 때문에, 서방 정보 기관과 특파원들은 기념일 퍼레이드 시 요인들의 위치 변화나 신문, 텔레비전, 라디오 뉴스의 보도 횟수 및 순서를 관찰하여 당 서열 변화를 추측했다. 이를 "크렘리놀로지"라고 불렀다.
소련의 선전은 현대적인 기법을 선구적으로 보여주었다. 영화에서는 레닌의 "모든 예술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영화다"라는 생각에 따라 세계 최초의 국립 영화학교가 설립되었고, 세르게이 에이젠슈테인이 몽타주 기법을 고안했다. 선전 영화를 지방에서 상영하기 위해 이동 가능한 영사 설비를 갖춘 영화관 열차, 선박, 항공기가 제작 및 활용되었다. 간판과 포스터에서는 러시아 아방가르드에서 발전한 포토몽타주가 사용되었다.
소비에트 궁전은 바벨탑에 비유되기도 하는 초고층 건축물로 계획되었으며, 이탈리아, 독일, 일본 등 여러 나라의 건축에 큰 영향을 주었다. 단게 겐조는 소비에트 궁전 계획을 보고 건축가를 지망하게 되었다. 스탈린 양식의 건물들은 모스크바를 마천루 도시로 만들기 위한 계획의 일환이었다. 소련의 선전은 이반 파블로프와 레프 비고츠키 등의 심리학 이론에 기반했다는 평가도 있다. 보리스 로징은 브라운관을 사용한 텔레비전을 세계 최초로 발명하는 등 텔레비전 연구도 활발했다.
11. 외교
소련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공산 진영의 맹주였으며, 중앙유럽의 위성 국가 이외에도 중남미(쿠바), 중동(남예멘), 아프리카(앙골라, 모잠비크 등), 동아시아 등에서의 공산정권 수립을 지원했다. 따라서 미국, 일본, 대한민국을 비롯한 자유 진영과는 대립 관계에 있었다.[68] 소련은 유엔의 창립 회원국이었으며,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의 상임 이사국이었다.
스탈린 통치 기간 동안 외교 정책의 최종 결정은 항상 스탈린이 내렸다. 스탈린 사후 소련의 외교 정책은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외교위원회 또는 당 최고 기구인 정치국에서 결정했다. 실제 업무는 별도의 외무부가 담당했다. 외무부는 1946년까지 인민 외교위원회(Narkomindel)로 알려져 있었다.
소련 외무부의 주요 대변인으로는 게오르기 치체린, 막심 리트비노프, 뱌체슬라프 몰로토프, 안드레이 비신스키, 안드레이 그로미코 등이 있었다.
소련과 관련된 주요 국제기구는 다음과 같다.
기구명 | 설립년도 | 해체년도 | 설명 |
---|---|---|---|
코민테른 | 1919년 | 1943년 | 크렘린에 본부를 둔 국제 공산주의 조직으로 세계 공산주의를 주장했다. |
코메콘 | 1949년 | 1991년 | 소련의 통제하에 동유럽 국가들과 세계 여러 공산 국가들을 포함하는 경제 조직이었다. |
바르샤바 조약 기구 | 1955년 | 1991년 | 냉전 중 소련과 동유럽 위성국들 사이에 형성된 집단 안보 동맹이었다. |
코민폼 | 1947년 | 1956년 | 국제 마르크스-레닌주의 운동의 첫 번째 공식 기관이었다. |
자세한 내용은 "== 외교 정책 ==" 및 "=== 동유럽 위성 국가 ===", "=== 대한민국과의 관계 ===",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의 관계 ===", "=== 미국과의 관계 ===", "=== 일본과의 관계 ===", "=== 중화인민공화국과의 관계 ===", "=== 출국 제한 ==="을 참조.
11. 1. 외교 정책
소련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공산 진영의 맹주였으며, 미국, 일본, 대한민국을 비롯한 자유 진영과는 대립관계에 있었다.[68] 소련은 유엔의 창립 회원국이었으며,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의 상임 이사국이었다.
스탈린 통치 기간 동안 외교 정책의 최종 결정은 항상 스탈린이 내렸다. 스탈린 사후 소련의 외교 정책은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외교위원회 또는 당 최고 기구인 정치국에서 결정했다. 실제 업무는 별도의 외무부가 담당했다. 외무부는 1946년까지 인민 외교위원회(Narkomindel)로 알려져 있었다.
소련 외무부의 주요 대변인으로는 게오르기 치체린, 막심 리트비노프, 뱌체슬라프 몰로토프, 안드레이 비신스키, 안드레이 그로미코 등이 있었다.
소련과 관련된 주요 국제기구는 다음과 같다.
기구명 | 설립년도 | 해체년도 | 설명 |
---|---|---|---|
코민테른 | 1919년 | 1943년 | 크렘린에 본부를 둔 국제 공산주의 조직으로 세계 공산주의를 주장했다. |
코메콘 | 1949년 | 1991년 | 소련의 통제하에 동유럽 국가들과 세계 여러 공산 국가들을 포함하는 경제 조직이었다. |
바르샤바 조약 기구 | 1955년 | 1991년 | 냉전 중 소련과 동유럽 위성국들 사이에 형성된 집단 안보 동맹이었다. |
코민폼 | 1947년 | 1956년 | 국제 마르크스-레닌주의 운동의 첫 번째 공식 기관이었다. |
11. 2. 동유럽 위성 국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소련은 중앙유럽에 있는 여러 국가들의 정권을 무너뜨리고 이들을 자신의 영향력 아래 두는 위성 국가로 만들었다. 이들 국가는 인민들이 점령하고 소련의 간섭을 받는 국가가 되었다.[94]11. 3. 대한민국과의 관계
1970년대 이후 대한민국과 소련의 관계는 점차 누그러져 갔으나, 1978년 4월 21일 대한항공의 보잉 707기가 무르만스크 인근에 강제 착륙당한 사건과 1983년 9월 1일 대한항공기 격추 사건이 벌어졌다.고르바초프의 등장 이후 대한민국과 소련의 관계는 차츰 해빙되었다. 1988년 하계 올림픽에 소련이 참가하였고, 노태우 정부의 북방정책에 따라 1990년 6월 대한민국-소련 정상 회담이 열렸으며, 1990년 10월 국교가 수립되었다. 이를 계기로 아에로플로트가 대한민국에 취항하였다.
11. 4.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의 관계
1945년 8월 소련군이 한반도 이북에 진주하면서 정치·사회적으로 긴밀한 관계를 맺었으며, 1948년 9월 9일에 공산 정권이 출범하자 가장 먼저 승인하였다. 1949년에는 김일성이 한국 전쟁 지원 요청을 위해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이오시프 스탈린과 만났다. 1950년 한국 전쟁에는 직접 군사를 보내 참전하지는 않았지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소련제 첨단 무기, 탱크, 전투기 등을 지원하면서 대한민국을 간접적으로 침공하는데 일조하였다. 그 해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에서 열렸던 대한(對韓) 지원 결의에서는 유엔 회원국이자 위성국인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 폴란드 등과 함께 불참 및 기권하였다. 또 미국과 서방 국가들이 대한민국에 전투 병력을 지원한 것을 두고 공개적으로 비난하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두둔하였다. 1953년 스탈린이 죽고 후임인 니키타 흐루쇼프 시절부터는 관계가 다소 소원해졌으나, 1960년대 중화인민공화국의 문화대혁명으로 관계가 소원해지면서 관계를 회복하였다. 미국에서 열렸던 1984년 하계 올림픽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함께 불참했다. 그러나 대한민국에서 열렸던 1988년 하계 올림픽에 소련 정부가 자국 선수단을 파견하고 1990년 한국-소련의 국교 수립과 동서독 통일 이후로 관계가 소원해졌으며, 1991년 소련이 해체되고 러시아 연방이 출범하면서 이후에도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11. 5. 미국과의 관계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소련은 공산 진영의 맹주였으며, 중앙유럽의 위성 국가 이외에도 중남미(쿠바), 중동(남예멘), 아프리카(앙골라, 모잠비크 등), 동아시아 등에서의 공산정권 수립을 지원했다. 따라서 미국과 일본, 대한민국을 비롯한 자유 진영과는 대립 관계에 있었다.소련은 유엔의 원년(元年) 회원국이었으며,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의 상임 이사국이었다. 공산 국가들의 맹주였던 소련은 자본주의 진영의 맹주였던 미국과는 냉전이라는 형태로 대립해, 1950년대의 한국 전쟁이나 1960년대의 베트남 전쟁 등, 대리 전쟁이라고 하는 간접적인 형태의 군사적 대립을 하고 있었지만, 전면적인 핵전쟁에 대한 공포가 쌍방의 억제력이 되었기 때문에 전면적인 군사적 대립은 없었다.
그러나 베를린 봉쇄나 쿠바 위기 등에서는 전면적인 군사적 대립의 일보직전까지 갔으며, 영공을 침범한 미군기의 격추 등 한정적인 군사적 대립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이와 같은 대립 관계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식 국교가 끊어진 적은 없고, 쌍방의 수도에 대한 민간 항공기의 노선 연장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대한항공기 격추 사건이나 아프가니스탄 침공 등의 사건이 있었을 때에는, 「제재 조치」로서 민간 항공기의 노선 연장이 시한적으로 제한되거나 스파이 사건 등이 표면화되어, 한쪽의 외교관이 국외 추방되면 그에 대한 「보복 조치」로서, 다른 한쪽 국가의 외교관을 맞받아 국외 추방하는 등의 외교적 술책을 하고 있었다.
11. 6. 일본과의 관계
일본과는 제2차 세계 대전 이전부터 만주국과의 국경에서 종종 군사적 충돌을 일으켰다(노몬한 사건 등). 1941년 4월 소-일 중립 조약이 체결되었지만, 1945년 8월 8일 소련은 이것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일본에 선전 포고를 했다.[341] 또한 일본인 포로를 오랫동안 강제 노동 수용소에 구류했다.1956년 소-일 공동 선언을 통해 국교가 회복되었지만, 쿠릴 열도 분쟁이 해결되지 않았고 일본이 미국의 동맹국이었기 때문에 관계 개선은 진전되지 않은 채 냉전이 종결되었다.
러시아 제국 시대에 추진했던 남하 정책으로 일본, 영국과 충돌하였고, 영국과 일영동맹을 맺은 일본과의 사이에 러일전쟁이 일어나 패배하였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볼셰비키 정권 수립 후 다른 연합국(삼국협상)을 무시하고 독일과 단독으로 강화를 맺어, 독일군의 통과를 허용할 것이라는 우려로 일본과 중화민국(베이징 정부)으로부터 경계를 받았다(일중공동방적군사협정). 독일에 자원을 공급할 것이라는 우려로 영국과 프랑스로부터도 경계를 받았고, 시베리아 출병을 제안받아 실제로 출병한 미국과 일본과 직접 충돌하게 되었다. 이후 연합국이 지지하는 임시 전 러시아 정부를 무너뜨렸지만, 일본으로 망명한 백계 러시아인들에 의해 반소 선전이 확산되었다(반공주의#역사).
일본 제국 의회는 1922년 정변을 받아들여 「러시아 정변 및 시베리아 사변을 당한 자들의 구휼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여 러시아와 시베리아에서 귀환한 사람들에게 국채와 현금을 지급하는 조치를 취했다.[338]
소비에트 연방 성립 후, 코민테른 지부인 중국 공산당에 의해 한구사건이 발생했지만, 이후 반일 운동을 중단하는 방향으로 움직였다. 그러나 중소분쟁 승리 후, 중국 공산당은 조선 공산당에게 만주에 있는 일본 영사관 등에 대한 습격을 지시했고(간도 공산당 폭동), 만주의 소비에트화를 계획했지만, 관동주의 일본 경찰에 의해 계획이 발각되었다.[339][340] 이후 일본에 의해 만주사변이 일어나 만주국이 건국되었고, 만주국과의 국경에서 일본과 여러 번 군사적 충돌을 일으켰다(일소 국경 분쟁). 중국 공산당은 조선 지방의 푸톈바오를 습격하는 등(푸톈바오 전투) 일본에 대해 적색 테러 활동을 계속했다.
얄타 회담에서 연합국 간에 맺은 밀약을 근거로 1945년 8월 소련은 일방적으로 소-일 중립 조약을 파기하고 일본에 선전포고를 했으며(소련 대일 선전포고), 일본이 연합국에 항복했음에도 불구하고 침략을 계속하여 사할린·쿠릴 열도 등을 점령했다. 게다가 많은 일본 포로를 전후 오랫동안 시베리아 등에 구금하여 강제 노역을 시켰고, 전체 수용자의 10% 이상이 질병·사고로 사망했다(시베리아 억류).
이러한 경위로 인한 일본의 반소 감정과 더불어, 제2차 세계 대전 후 요시다 시게루 총리가 미국과의 동맹 관계(일미 동맹)를 중심으로 하는 외교를 채택했기 때문에, 일소 관계는 한동안 진전이 없었다. 그 후, 서방 국가 이외의 국가도 중시한 독자적인 외교를 모색하는 하토야마 이치로로 정권이 교체됨으로써, 일소 간의 국교 정상화 분위기가 조성되었고, 1956년 일소 공동 선언을 발표하여 국교를 회복했으며, 소련이 계속 반대했던 일본의 국제 연합 가입이 실현되었다.
그러나 그 후에도 소련이 북방 영토를 불법 점령한 채 계속했고, 일본 사회당 등 좌익 정당과 반정부 조직에 자금 지원을 하는 등 내정 간섭을 했으며, 일본이 미국의 동맹국이고 연합군에 의한 점령 종료 후에도 미군 주둔이 계속되었기 때문에(주일 미군), 관계 개선은 진전되지 않은 채로 진행되었다. 한편, 여당인 자유민주당 소속 일부 의원은 자주적으로 소련과의 관계를 유지하여 일소 관계가 완전히 단절되는 일은 없었다. 북양 어업과 북양재 수입, 기계와 철강 제품 수출 등 양국의 경제 관계는 소련의 붕괴에 이르기까지 계속되었다.
일본의 창가학회(일련불교계)와 관련해서는, 소련 국내에서의 포교 활동 자체는 인정하지 않았지만, 외교적 및 경제적 관점에서 우호 관계를 유지했다. 특히 이케다 다이사쿠 회장(후에 명예회장)이 1974년 이후 소련을 반복적으로 방문하게 되면서 정부 및 당의 요인들이 접견에 응하는 것이 관례였다. 1974년, 1975년 방소 시에는 알렉세이 코시긴, 1981년 방소 시에는 니콜라이 티호노프, 1987년 방소 시에는 니콜라이 르지코프, 1990년 방소 시에는 미하일 고르바초프와 면담했다. 이케다 명예회장과 최고 지도자와의 면담이 이루어진 것은 고르바초프 정권 시대인 1990년이었다.
11. 7. 중화인민공화국과의 관계
국공 내전에서 소련의 지원으로 중국 공산당은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을 건국하였다. 당초에는 협력 관계에 있었지만, 1950년대 후반부터 서서히 관계가 악화되어 1960년대에는 국경 분쟁이나 사상적인 대립 문제로 말미암아 중화인민공화국과 소련의 대립이 표면화했다.[339] 양국간의 이와 같은 대립관계는 그 후 문화대혁명이 종결되는 1970년대 후반까지 계속되었다. 1980년 소련 모스크바에서 열렸던 하계 올림픽에는 중국이 불참했고 대신 적국이었던 미국 로스엔젤레스에서 열렸던 하계 올림픽에는 소련이 불참하고 중국이 참가했다.소련의 군사 지원으로 장제스(蔣介石)가 이끄는 중국국민당(국민정부)과의 국공내전에서 승리한 마오쩌둥(毛沢東)이 이끄는 중국공산당에 의해 1949년에 건국된 중화인민공화국은 초기에는 ‘소련 일변도’를 내세우며 중소우호동맹상호원조조약에 따라 동맹 관계에 있었다. 그러나 1960년대 후반에는 영토 문제로 인한 군사 충돌(다만스키섬 사건 등의 중소 국경 분쟁)과 지도부의 이념적 차이 문제로 중소 대립이 표면화되었다. 양국 간의 이러한 대립 관계는 그 후 중화인민공화국에서 사실상의 내전이었던 문화대혁명이 종결되는 1970년대 후반까지 이어진다.
이러한 대립 관계를 본 미국은 소련을 견제하려는 의도로 1970년대에 들어 중화인민공화국에 급속히 접근하여 1979년에는 국교를 수립(반면 중화민국과는 국교 단절)하게 된다. 한편, 중화인민공화국도 미국의 접근에 화답하는 형태로, 동구권임에도 불구하고 당시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 보이콧과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참가라는 서구와 보조를 맞추는 행동을 취하게 된다. 캄보디아 내전, 앙골라 내전, 오가덴 전쟁 등과 같이 미·중·소 삼자 간의 대리전쟁도 발생했다.
그 후, 독재 체제를 폈던 소련과 대립했던 마오쩌둥의 사망과 문화대혁명의 종식,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방중 등의 요인에 따라 소련과 중화인민공화국의 관계도 다시 개선되었다.
11. 8. 출국 제한
소련에서 외국으로의 개인적인 여행은 망명과 이에 따른 국가기밀 유출 및 외화 유출 등을 막기 위해 원칙적으로 금지되었으며, 여행 목적지 국가와의 국교 여부와 관계없이 당국의 허가 없이는 불가능했다.[1] 허가가 내려진 경우에도 여러 제약이 있어, 최소한 개인 단위의 자유로운 여행은 불가능했다.[1] 이는 소련 및 동구 사회주의 체제의 폐쇄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서방 자본주의 진영으로부터 비판을 받았다.[1]외국, 특히 서방 국가로의 개인적인 사유를 위한 여행은 망명과 이에 따른 국가기밀 유출 및 외화 유출 등을 방지하는 것을 주요 이유로 원칙적으로 금지되었으며, 여행 목적지 국가와의 국교 여부와 관계없이 당국의 허가 없이는 여행이 불가능했다. 허가가 내려진 경우에도 여러 제약이 있어, 최소한 개인 단위의 자유로운 여행은 불가능했다. 이는 소련 사회 및 동구 사회주의 체제의 폐쇄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서방 자본주의 진영으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외국에서 귀국한 여행자는 거의 예외 없이 첩보부로부터 심문을 받았기 때문에, 본인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외국에서 본 것을 모두 이야기해야 했고, 결과적으로 스파이 역할을 하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1] 그 외에도 아에로플로트와 같은 민간 항공사나 승객이 실제로 스파이 역할을 겸하는 경우도 있었다.[1] 하지만, 경제상호원조회의(COMECON) 가맹국 간의 해외 여행은 비교적 자유롭게 이루어졌으며, 관광, 취업, 유학 등 다양한 목적으로 인적 교류가 있었다.[1]
서방 국가 사람과의 교제나 결혼은 많은 장애가 있었고, 특히 광범위하게 지정된 "국익에 직접 관계되는 자"나 "국가기밀에 관계되는 자"의 결혼은 금지되었다.[1]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혼 자체는 가능했지만, 그 시점에서 소련 사회에서의 출세는 어려워졌고, 배우자의 모국으로 출국하기 위한 여권 발급에도 긴 시간이 걸렸다.[1] 이는 서방 자본주의 국가뿐만 아니라 위성국 사람과의 결혼이라 할지라도 당국으로부터 여러 가지 방해를 받았다고 알려져 있다.[1]
외국 항로를 운항하는 선박이나 외국에서 연주 여행을 하는 악단은 물론, 해군 함정에 이르기까지, 승무원이나 악단원의 망명을 막고, 외국에서의 언론을 감시하기 위해 반드시 소련 공산당의 정치장교가 동행했다.[1]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포츠 대회나 연주회 등에서의 망명은 개인이나 집단을 불문하고 끊이지 않았다.[1] 하지만 운 좋게 이주할 수 있었더라도, 이주 국가나 사회에서는 "소련 스파이"라는 의심을 받는 경우가 많아 결코 안전한 땅이라고 할 수 없었다.[1]
12. 소련의 유산
소련의 유산은 여전히 논란의 여지가 있는 주제이다. 특히 스탈린 시대의 소련과 같은 공산 국가의 사회경제적 성격은 관료적 집산주의, 국가 자본주의, 국가 사회주의, 또는 완전히 독특한 생산 양식의 한 형태로 다양하게 규정되며 많은 논쟁의 대상이 되어왔다.[214]
소련은 장기간에 걸쳐 광범위한 정책을 시행했으며, 서로 다른 지도자들에 의해 상반되는 많은 정책들이 시행되었다. 일부는 소련에 대해 긍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는 반면, 다른 일부는 소련을 억압적인 과두정치라고 비판한다.[215] 소련에 대한 의견은 복잡하며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해왔고, 서로 다른 세대는 소련의 역사 기간 동안 별도의 시대에 해당하는 소련 정책에 대해서도 서로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다.[216]
소련 해체 이후 레바다 센터의 연례 여론 조사 결과, 러시아 인구의 50% 이상이 소련 해체를 후회하고 있으며, 2012년 소련에 대한 지지율이 50% 미만으로 떨어진 해가 유일한 예외이다.[244] 2018년 여론 조사에 따르면 러시아인의 66%가 소련 붕괴를 후회한다고 답했으며, 이는 15년 만에 최고치이며, 대부분의 후회 의견은 55세 이상의 사람들에게서 나왔다.[244][245] 2020년 레바다 센터가 실시한 여론 조사에 따르면 러시아인의 75%가 소련 시대가 자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시대였다는 데 동의했다.[246]
1941년부터 1945년까지의 제2차 세계 대전 기간은 러시아에서 여전히 '대조국전쟁'으로 알려져 있다. 이 전쟁은 영화, 문학, 학교 역사 수업, 대중 매체 및 예술에서 매우 중요한 주제가 되었다. 갈등 중 군인과 민간인이 입은 막대한 손실의 결과로, 5월 9일에 기념되는 승전절은 여전히 러시아에서 가장 중요하고 감정적인 날짜 중 하나이다.[254] 러시아 승전절 퍼레이드는 대부분의 도시에서 매년 개최되며, 중앙 군사 퍼레이드는 (소련 시대와 마찬가지로) 모스크바에서 열린다.[256][257] 또한 최근에 도입된 5월 9일의 불멸의 연대 행사에는 수백만 명의 러시아인들이 전쟁에서 싸운 친척들의 초상화를 들고 참여한다.[258]
12. 1. 긍정적 평가
소련은 사회적, 기술적으로 많은 중요한 성과를 거두었고, 군사력에 있어서도 혁신적인 것을 만들어냈다. 일본, 영국, 서독에 추월당할 때까지 세계 2위의 경제력과 세계 최대의 상비군을 자랑했고, 공식 핵 보유국 5개국 중 하나로 인정받았다.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 창설 상임 이사국이었으며, OSCE, WFTU, 경제 상호 원조 회의, 바르샤바 조약 기구의 주요국이었다.[362]1924년 레닌 사후 요시프 스탈린이 권력을 장악하고[287], 계획 경제 체제를 확립하여 급속한 산업화와 강제적인 집단화를 통해 현저한 경제 성장을 이루었다.[288] 1953년 스탈린 사후 니키타 흐루쇼프의 지도 아래 탈스탈린화 시대가 도래하여 수백만 명의 농민이 산업화된 도시로 이동했고, 국가는 급속도로 발전했다. 소련은 최초의 인공위성과 최초의 유인 우주 비행, 다른 행성인 금성에 대한 최초의 탐사선 착륙 등으로 우주 개발 경쟁에서 일찍부터 주도권을 잡았다.
소련은 미국과 같은 수준의 GDP를 가지고 있지는 않았지만, 미국보다 훨씬 넓은 영토와 풍부한 자원을 바탕으로 초강대국으로서의 지위를 확보하고 있었다. 미국과 맞먹는 수준의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다고 여겨졌기 때문에, 직접적인 대결은 양측 모두에게 막대한 손실을 초래할 수 있었기에, 소련의 군사 행동에 미국이 개입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소련 경제는 1950년대부터 1960년대 초까지 미국 국력을 놀라운 속도로 따라잡았고, "20년 이내에 미국을 추월할 것이다"라는 흐루쇼프의 자신감 넘치는 발언도 믿을 만한 것으로 여겨졌다. 1975년 소련의 대미 상대적 국력은 45%로 정점에 달했다.
다음은 1989년 기준, 1990년 월드 팩트북 자료 기반[347]의 미국과 소련의 경제력 비교이다.
항목 |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소련) | 미국 |
---|---|---|
GDP (구매력평가, 1989년 – 백만 달러) | 26595억달러 | 52333억달러 |
인구 (1990년 7월) | 약 2억 9,093만 명 | 약 2억 5,041만 명 |
1인당 GDP (구매력평가, 달러) | 9211USD | 21082USD |
노동력 (1989년) | 약 1억 5,230만 명 | 약 1억 2,555만 명 |
12. 2. 부정적 평가
소련은 인권이 심각하게 제한된 국가였다. 1927년부터 1953년까지 전체주의 국가였으며,[63][64][65][66] 1990년까지 일당 독재 국가였다.[67] 언론의 자유는 억압되었고 반체제 행위는 처벌받았다. 자유 노동조합, 사기업, 독립 교회 또는 반대 정당 참여를 포함한 독립적인 정치 활동은 허용되지 않았다. 국내 및 특히 국외 이동의 자유는 제한되었다. 국가는 시민의 사유 재산권을 제한했다.좌익의 소련(USSR)에 대한 견해는 복잡하다. 일부 좌파는 소련을 국가 자본주의의 예로 보거나 과두 정치 국가로 간주하지만, 다른 좌파는 블라디미르 레닌과 러시아 혁명을 존경한다.[262] 의회 공산주의자들은 일반적으로 소련이 계급 의식을 창출하지 못하고 엘리트가 사회를 통제하는 부패한 국가로 전락했다고 본다.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스탈린주의 관료주의의 등장이 자본가 엘리트가 책임질 수 없는 관료 엘리트로 대체되고 진정한 민주주의나 산업에 대한 노동자 통제가 없는 퇴행된 또는 변형된 노동자 국가를 보장했다고 믿는다.[263]
반스탈린주의 좌파 계열의 무정부주의자들과 같은 많은 이들은 소련의 권위주의와 탄압을 매우 비판적으로 본다. 소련에 대한 비판은 소련의 학살, 중앙집중식 계층, 대규모 정치 탄압, 정부 비판자와 정치 반체제 인사(다른 좌파 포함)에 대한 폭력에 집중되어 있다. 비판가들은 또한 노동자 협동조합을 이행하거나 노동자 해방을 이행하지 못한 것, 그리고 부패와 소련의 권위주의적 성격을 지적한다.
무정부주의자들 또한 소련 체제를 '붉은 파시즘'으로 규정하며 비판적이다. 소련에 대한 무정부주의자들의 적대감에 기여한 요인으로는 초기 동맹 이후 소련에 의한 마흐노 운동의 파괴, 크론슈타트 반란의 탄압, 스페인 내전 동안 소련이 지원하는 공산주의 세력에 의한 경쟁 무정부주의 세력의 패배가 포함된다.[265]
일부 포스트소비에트 국가에서는 소련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이 존재하지만, 이에 대한 의견 일치는 없다. 홀로도모르로 인해 우크라이나인들은 소련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다.[260]
12. 3. 포스트소비에트 국가들의 상황
소련 붕괴 이후 독립한 포스트소비에트 국가들에서는 소련에 대한 다양한 시각이 존재한다. 홀로도모르를 경험한 우크라이나인들은 소련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다.[260] 반면, 우크라이나 남부와 동부 지역의 러시아어 사용 우크라이나인들은 소련에 대해 더 긍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다. 내전을 겪은 일부 국가, 특히 포스트소비에트 분쟁으로 인해 고향을 떠나 난민이 된 사람들 사이에서는 소련에 대한 향수가 존재한다. 트란스니스트리아와 같이 전 소련 공화국에 있는 많은 러시아계 거주 지역에서는 소련을 일반적으로 긍정적으로 기억하고 있다.[261]스탈린 시대의 정책을 포함한 소련의 사회경제적 성격은 관료적 집산주의, 국가 자본주의, 국가 사회주의, 또는 독특한 생산양식 등으로 다양하게 평가되며, 많은 논쟁의 대상이 되어 왔다.[362] 소련은 장기간에 걸쳐 다양한 정책을 시행했고, 여러 지도자들이 상반된 정책을 펼쳤기 때문에, 긍정적인 시각과 "억압적인 과두정치"라는 비판적인 시각이 공존한다.[363] 현재 소련에 대한 견해는 복잡하며, 시간에 따라 변화하고 있다. 세대와 역사적 시기에 따라 소련과 그 정책에 대한 서로 다른 견해가 나타나고 있다.[364]
12. 4. 소련에 대한 향수
일부 포스트소비에트 국가에서는 소련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이 존재하지만, 이에 대한 의견 일치는 없다. 홀로도모르로 인해 우크라이나인들은 소련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다.[260] 반면, 우크라이나 남부와 동부 지역의 러시아어 사용 우크라이나인들은 소련에 대해 더 긍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다. 내전을 겪고 있는 일부 국가, 특히 포스트소비에트 분쟁으로 인해 고향을 떠나 난민이 된 사람들 사이에서는 소련에 대한 향수가 존재한다. 트란스니스트리아와 같이 전 소련 공화국에 있는 많은 러시아계 거주 지역에서는 소련을 일반적으로 긍정적으로 기억하고 있다.[261]
참조
[1]
웹사이트
Language Policy in the former Soviet Union
http://ccat.sas.upen[...]
University of Pennsylvania
2002-11-19
[2]
서적
Almanaque Mundial 1996
Editorial América/Televisa
1995
[3]
웹사이트
GDP – Million – Flags, Maps, Economy, Geography, Climate, Natural Resources, Current Issues, International Agreements, Population, Social Statistics, Political System
http://www.theodora.[...]
2018-08-29
[4]
간행물
Human Development Report 1990
http://hdr.undp.org/[...]
HDRO (Human Development Report Office), United Nations Development Programme
1990-01-01
[5]
백과사전
Soviet
[6]
백과사전
April Thesis
https://www.britanni[...]
2022-12-27
[7]
백과사전
Soviet Union
https://www.britanni[...]
2022-12-27
[8]
뉴스
The causes of the October Revolution
https://web.archive.[...]
BBC
2022-12-31
[9]
뉴스
How Soviet pollution destroyed the Aral Sea
https://www.bbc.com/[...]
2023-11-19
[10]
비디오
Apocalypse Never-Ending War 1918–1926
CC&C Ideacom Production
2018-10-22
[11]
백과사전
Russia
http://www.britannic[...]
2013-07-29
[12]
웹사이트
The Former Soviet Union: Physical Geography
https://web.archive.[...]
Towson University: Department of Geography & Environmental Planning
2016-03-24
[13]
뉴스
Study Says Pollution in Arctic Could Originate From Soviet
https://www.nytimes.[...]
1982-12-06
[14]
뉴스
The Union of Soviet Socialist Pollution
https://www.washingt[...]
1991-03-22
[15]
뉴스
The Grim Pollution Picture in the Former Soviet Union
https://www.huffpost[...]
2016-02-19
[16]
논문
New data on air pollution in the former Soviet Union
https://dx.doi.org/1[...]
1994-09-01
[17]
웹사이트
Chernobyl disaster facts and information
https://web.archive.[...]
2019-05-17
[18]
웹사이트
Chernobyl Chernobyl Accident Chernobyl Disaster - World Nuclear Association
https://world-nuclea[...]
[19]
뉴스
Unsealed Soviet archives reveal cover-ups at Chernobyl plant before disaster
https://www.reuters.[...]
2021-04-26
[20]
뉴스
Radiation high over Europe after Chernobyl disaster – archive, 1986
https://www.theguard[...]
2021-05-03
[21]
웹사이트
Chernobyl: the true scale of the accident
https://www.who.int/[...]
2005-09-05
[22]
논문
The Chernobyl Accident 20 Years on: An Assessment of the Health Consequences and the International Response
2006
[23]
웹사이트
One of the Murmansk Region's most polluting facilities shuts down after more than seven decades
https://bellona.org/[...]
2021-01-04
[24]
뉴스
How Norilsk, in the Russian Arctic, became one of the most polluted places on Earth
https://www.nbcnews.[...]
2021-12-10
[25]
뉴스
Russians describe extensive dumping of nuclear waste
https://www.nytimes.[...]
1993-04-27
[26]
뉴스
Nuclear Pollution Plagues Former Soviet Union : Environment: A map marking non-military explosions shows scope of 'national disaster.'
https://www.latimes.[...]
1992-03-15
[27]
논문
Implementing Russia's International Environmental Commitments: Federal Prerogative or Regional Concern?
2002-12-01
[28]
웹사이트
Russia's 'slow-motion Chernobyl' at sea
https://www.bbc.com/[...]
2020-09-01
[29]
웹사이트
Armed With Nuke Payload, How Dangerous Is Russia's Nuclear-Armed Submarine Resting In Arctic Ocean?
https://www.eurasian[...]
2023-10-10
[30]
뉴스
Wastes of War: Rotting Nuclear Subs Pose Threat
https://www.washingt[...]
1998-11-16
[31]
웹사이트
The Terrifying History of Russia's Nuclear Submarine Graveyard
https://www.popularm[...]
2021-01-17
[32]
서적
Soviet Politics in Perspective
Routledge
[33]
서적
Russian Civilization
https://books.google[...]
Ardent Media
[34]
서적
Chernenko: The Last Bolshevik: The Soviet Union on the Eve of Perestroika
https://archive.org/[...]
Transaction Publishers
[35]
서적
Beria: Stalin's First Lieutenant
https://books.google[...]
Princeton University Press
[36]
서적
How the Soviet Union is Governed
https://books.google[...]
Harvard University Press
2015-06-20
[37]
서적
History of Modern Russia: From Tsarism to the Twenty-first Century
https://books.google[...]
Penguin Books Ltd
2015-06-20
[38]
서적
Конститутион оф тхе Руссиян Федератион: витх комментариес анд интерпретатион
https://books.google[...]
Brunswick Publishing Corp
2015-06-20
[39]
서적
The Demise of the Soviet Communist Party
https://books.google[...]
Routledge
2015-06-20
[40]
서적
Leadership change in Communist states
https://books.google[...]
Routledge
2015-06-20
[41]
서적
The Theory, Law, and Policy of Soviet Treaties
https://archive.org/[...]
Stanford University Press
2015-06-20
[42]
서적
Soviet Union to Commonwealth: Transformation and Challenges
https://books.google[...]
M.D. Publications Pvt. Ltd
2015-06-20
[43]
서적
The Communist World
https://books.google[...]
Ardent Media
2015-06-20
[44]
서적
Russian Law: The End of the Soviet System and the Role of Law
https://books.google[...]
Martinus Nijhoff Publishers
2015-06-20
[45]
서적
Nikita Khrushchev and the Creation of a Superpower
https://books.google[...]
Penn State University Press
2015-06-20
[46]
서적
The Politics of Transition: Shaping a post-Soviet Future
https://archive.org/[...]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5-06-20
[47]
서적
The Soviet Polity in the Modern Era
https://books.google[...]
Transaction Publishers
2015-06-20
[48]
서적
The Soviet Polity in the Modern Era
https://books.google[...]
Transaction Publishers
2015-06-20
[49]
학술지
The Soviet Polity in the Modern Era
[50]
서적
Soviet Politics in Perspective
https://books.google[...]
Routledge
2015-06-20
[51]
서적
The Organs of Soviet Administration of Justice: Their History and Operation
https://books.google[...]
Brill Publishers|Brill Archive Publishers
2015-06-20
[52]
서적
Lenin and the Russian Revolution
https://books.google[...]
Heinemann
2015-06-20
[53]
백과사전
Union of Soviet Socialist Republics
Encyclopædia Britannica, Inc.
[54]
서적
History of Modern Russia: From Tsarism to the Twenty-first Century
https://books.google[...]
Penguin Books Ltd
2015-06-20
[55]
서적
A–Z of modern Europe since 1789
https://archive.org/[...]
Routledge
2015-06-20
[56]
서적
Memoirs of Nikita Khrushchev, Volume 3: Statesman
Pennsylvania State University Press
[57]
웹사이트
Gorbachev's Reform Dilemma
http://countrystudie[...]
Library of Congress Country Studies
2010-10-16
[58]
서적
The Naval Institute Guide to the Soviet
https://books.google[...]
United States Naval Institute
2015-06-20
[59]
서적
The Rise and Fall of the Soviet Union
https://books.google[...]
Pearson Education
2015-06-20
[60]
웹사이트
http://www.sssr.su/z[...]
sssr.su
1972-03-21
[61]
서적
A Documentary History of Communism in Russia: From Lenin to Gorbachev
https://books.google[...]
University Press of New England (UPNE)
2015-06-20
[62]
웹사이트
Inquisitorial procedure (law) – Britannica Online Encyclopedia
https://www.britanni[...]
Encyclopædia Britannica, Inc.
2010-10-30
[63]
웹사이트
totalitarianism {{!}} Definition, Examples, & Facts
https://www.britanni[...]
2021-01-03
[64]
서적
Rutland, Peter (1993). The Politics of Economic Stagnation in the Soviet Union: The Role of Local Party Organs in Economic Management
Cambridge University Press
[65]
서적
Krupnik, Igor (1995). "4. Soviet Cultural and Ethnic Policies Towards Jews: A Legacy Reassessed". In Ro'i, Yaacov (ed.). Jews and Jewish Life in Russia and the Soviet Union. Routledge. ISBN 978-0-714-64619-0.
[66]
서적
von Beyme, Klaus (2014). On Political Culture, Cultural Policy, Art and Politics
Springer
2013-11-19
[67]
웹사이트
Zakon SSSR ot 14 marta 1990 g. N 1360-I "Ob uchrezhdenii posta Prezidenta SSSR i vnesenii izmeneniy i dopolneniy v Konstitutsiyu (Osnovnoy Zakon) SSSR"
http://constitution.[...]
2021-01-04
[68]
서적
Expansion and coexistence: the history of Soviet foreign policy, 1917–73
1974
[69]
서적
The Communist Revolution: An Outline of Strategy and Tactics
https://books.google[...]
Stanford University Press
[70]
서적
The Comintern: The History of the Third International
[71]
웹사이트
Appendix B: The Council for Mutual Economic Assistance
http://memory.loc.go[...]
[72]
서적
Comecon: Integration problems of the planned economies
Oxford University Press
1967
[73]
서적
Routledge History of International Organizations: From 1815 to the Present Day
https://books.google[...]
Routledge
2016-01-01
[74]
서적
Communism in Transition: The End of the Soviet Empires
https://archive.org/[...]
Taylor & Francis
2016-01-01
[75]
웹사이트
Warsaw Pact ends
https://www.history.[...]
[76]
논문
The Beginnings of the Cominform: The Policy of the Soviet Union towards European Communist Parties in Connection with the Political Initiatives of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in 1947
[77]
논문
The Greek Civil War (1944–1949) and the International Communist System
2013
[78]
논문
The cominform effects on Soviet foreign policy
1985
[79]
서적
Expansion and Coexistence
1974
[80]
논문
Rapallo Reexamined: A New Look at Germany's Secret Military Collaboration with Russia in 1922
[81]
서적
British and American Commercial Relations with Soviet Russia, 1918–1924
UNC Press Books
[82]
논문
American Business and the Recognition of the Soviet Union
[83]
서적
Lasten diktatorischer Vergangenheit – Herausforderungen demokratischer Gegenwart
LIT Verlag
[84]
서적
Stalin's Russia
[85]
서적
St.Petersburg and Moscow: Czarist and Soviet Foreign Policy, 1814–1974
[86]
서적
The Soviet Union and the Struggle for Collective Security in Europe, 1933–1939
St. Martin's Press
[87]
서적
The British Political Elite and the Soviet Union, 1937–1939
https://books.google[...]
Psychology Press
2019-09-17
[88]
서적
How War Came: the Immediate Origins of the Second World War 1938–1939
[89]
서적
The Foreign Policy Of Soviet Russia (1929–1941), Volume Two
Oxford University Press
[90]
웹사이트
The Evolution of Stalin's Foreign Policy during World War Two
https://www.e-ir.inf[...]
2022-02-12
[91]
서적
Russian Republics
https://books.google[...]
Black Rabbit Books
2015-06-20
[92]
서적
Russian Law: The Rnd of the Soviet system and the Role of Law
https://books.google[...]
Martinus Nijhoff Publishers
2015-06-20
[93]
서적
The Great Big Book of Horrible Things
W. W. Norton
[94]
서적
The Armed Forces of the Soviet Union
Westview Press
[95]
서적
[96]
웹사이트
October 30, 1961 – The Tsar Bomba: CTBTO Preparatory Commission
https://www.ctbto.or[...]
CTBTO Preparatory Commission
2018-08-29
[97]
웹사이트
Принят закон "О всеобщей воинской обязанности"
https://www.prlib.ru[...]
prlib.ru
1967-10-12
[98]
서적
Bread and Authority in Russia, 1914–1921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99]
서적
The Political Economy of Stalinism: Evidence from the Soviet Secret Archives
https://books.googl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5-06-20
[100]
서적
The Stalin Years: The Soviet Union, 1929–1953
https://books.google[...]
Manchester University Press
2020-05-25
[101]
논문
Soviet Industrialization Reconsidered: Some Preliminary Conclusions about Economic Development between 1926 and 1941
https://books.google[...]
Economic History Review
2020-05-25
[102]
웹사이트
Reconstruction and Cold War
http://countrystudie[...]
Library of Congress
2010-10-23
[103]
웹사이트
Reconstruction and Cold War
http://rs6.loc.gov/c[...]
Library of Congress Country Studies
2010-10-23
[104]
서적
A Study of the Soviet Economy
https://books.google[...]
International Monetary Fund and Organisation for Economic Co-operation and Development
[105]
웹사이트
Raskhody na oboronu i chislennost' vooruzhennykh sil SSSR
https://su90.ru/defe[...]
[106]
서적
The Rise and Fall of the Soviet Economy: An Economic History of the USSR from 1945
Longman
[107]
논문
How Big was the Soviet GDP?
[108]
논문
Soviet Economic Growth Since 1928: The Alternative Statistics of G. I. Khanin
[109]
서적
The Strange Death of Soviet communism: A Postscript
https://books.google[...]
Transaction Publishers
2020-05-25
[110]
논문
Economic Development, Political-Economic System, and the Physical Quality of Life
1986-06-01
[111]
논문
Stalinism in Post-Communist Perspective: New Evidence on Killings, Forced Labour and Economic Growth in the 1930s
[112]
웹사이트
GDP – Million 1990
http://www.theodora.[...]
2010-06-12
[113]
웹사이트
GDP Per Capita – 1991
http://www.theodora.[...]
2010-06-12
[114]
서적
Farm to Factory: A Reinterpretation of the Soviet Industrial Revoluti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09-07-26
[115]
웹사이트
Human Development Report 1990
http://hdr.undp.org/[...]
2016-10-18
[116]
웹사이트
Soviet Union – Economy
https://web.archive.[...]
2010-10-23
[117]
서적
Russia's Uncertain Economic Future: With a Comprehensive Subject Index
https://books.google[...]
M.E. Sharpe
2015-06-20
[118]
웹사이트
Science and Technology
https://web.archive.[...]
Library of Congress Country Studies
2010-10-23
[119]
웹사이트
The Soviet Union and the United States – Revelations from the Russian Archives
https://www.loc.gov/[...]
1992-06-15
[120]
웹사이트
Economy
https://web.archive.[...]
Library of Congress Country Studies
2010-10-23
[121]
웹사이트
Soviet Russia Had a Better Record of Training Women in STEM Than America Does Today
http://www.smithsoni[...]
2013-12-12
[122]
논문
Stamping Out Science, 1948
https://www.the-scie[...]
2021-09-20
[123]
논문
Fallen Behind: Science, Technology and Soviet Statism
https://ojs.stanford[...]
2015-06-11
[124]
논문
Global Tech Strategies Brought to U.S
1990-05-03
[125]
뉴스
The science of uncovering industrial information
1990-10-10
[126]
뉴스
U.S. Firms Must Trade Short-Term Gains for Long-Term Technology Planning
1991-03-07
[127]
웹사이트
Sputnik
https://www.encyclop[...]
2021-11-27
[128]
웹사이트
Soviet cosmonaut Yuri Gagarin becomes the first man in space
https://www.history.[...]
2021-11-27
[129]
잡지
The Moon Landing through Soviet Eyes: A Q&A with Sergei Khrushchev, son of former premier Nikita Khrushchev
https://www.scientif[...]
2009-07-16
[130]
웹사이트
The Soviet Manned Lunar Program
https://spp.fas.org/[...]
2021-11-27
[131]
웹사이트
Energia, Soviet Launch Vehicle
https://www.britanni[...]
2021-11-27
[132]
위키소스
NASA FACTS/Russian Space Stations
NASA
1997-01-01
[133]
백과사전
Mir
https://www.britanni[...]
2020-01-28
[134]
서적
Russian Aviation and Air Power in the Twentieth Century
https://books.google[...]
Routledge
[135]
서적
A Study of the Soviet Economy
https://books.google[...]
International Monetary Fund and Organisation for Economic Co-operation and Development
[136]
문서
ДОРОГИ И ДВИЖЕНИЕ В СССР И ЦАРСКОЙ РОССИИ: ЧТО БЫ ПЕРЕНЯТЬ?
2016-08-01
[137]
웹사이트
Soviet Union – Communications
https://web.archive.[...]
2010-10-20
[138]
백과사전
War Communism
https://www.britanni[...]
2023-06-08
[139]
서적
Accounting for War: Soviet Production, Employment, and the Defence Burden, 1940–1945
https://books.googl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40]
서적
Russia and the Russians: a history
https://archive.org/[...]
Harvard University Press
[141]
서적
Rulers and victims: the Russians in the Soviet Union
https://archive.org/[...]
Harvard University Press
[142]
서적
War and Remembrance in the Twentieth Century
https://books.googl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0
[143]
서적
State Committee for Publishing
[144]
서적
Growth and Diversity of the Population of the Soviet Union
Annals of the American Academy of Political and Social Sciences
[145]
서적
Recent Developments of Mortality in Europe, English-Speaking Countries and the Soviet Union, 1960–1970
Population Studies
[146]
학술지
Life Expectancy and Mortality Data from the Soviet Union
1988-05-28
[147]
서적
Rising Infant Mortality in the USSR in the 1970s
United States Census Bureau
[148]
서적
The Changing Mortality Patterns in Latvia, Lithuania and Estonia: Experience of the Past Three Decades
1990-12-03
[149]
학술지
Soviet Control of City Size
http://www.jstor.org[...]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50]
서적
Tashkent: Forging a Soviet City, 1930–1966
https://mytashkent.u[...]
University of Pittsburgh Press
2010
[151]
학술지
The Cities of the Soviet Union
1945
[152]
웹사이트
Statistics For Everyone
http://istmat.info/f[...]
2018-02-19
[153]
서적
Women, the State and Revolution: Soviet Family Policy and Social Life, 1917–1936
Cambridge University Press
[154]
서적
The Women's Liberation Movement in Russia: Feminism, Nihilism, and Bolshevism, 1860–1930
[155]
학술지
Mothering Socialist Society: The Wife-Activists' Movement and the Soviet Culture of Daily Life, 1934–1941
1999-07
[156]
웹사이트
From Tsar to U.S.S.R.: Russia's Chaotic Year of Revolution.
https://www.national[...]
National Geographic Society
2017-10-25
[157]
웹사이트
Why the Former USSR Has Far Fewer Men than Women
https://www.pewresea[...]
2015-08-14
[158]
문서
Латеральность населения СССР в конце 70-х и начале 80-х годов. К истории латеральной нейропсихологии и нейропсихиатрии. Хрестоматия.
[159]
문서
Мир леворуких
[160]
웹사이트
In Russia, left isn't quite right Handedness: The official Moscow line is that lefties are OK, but suspicion of those who are different persists from the old Soviet days.
https://www.baltimor[...]
[161]
보고서
Wrong Hand/Wrong Children: Education of Left Handed Children in the Soviet Union
https://eera-ecer.de[...]
2016-08-23
[162]
서적
Education and Social Mobility in the Soviet Union 1921–1934
Cambridge University Press
[163]
서적
Russian Civilization
https://books.google[...]
Ardent Media
[164]
서적
You Failed Your Math Test, Comrade Einstein: Adventures and Misadventures of Young Mathematicians Or Test Your Skills in Almost Recreational Mathematics
https://books.google[...]
World Scientific
2005
[165]
학술지
The Fifth problem: math & anti-Semitism in the Soviet Union
http://www.newcriter[...]
2012-10
[166]
뉴스
More migrants please, especially the clever ones
https://www.independ[...]
2011-10-11
[167]
웹사이트
Biographical
https://www.nobelpri[...]
Nobelprize.org
2010
[168]
서적
Soviet Intellectuals and Political Power: The Post-Stalin Era
https://books.google[...]
I.B. Tauris
[169]
서적
The Economics of Property Rights: Towards a Theory of Comparative Systems
https://books.google[...]
Springer Science+Business Media
[170]
웹사이트
Soviet Union – People
http://www.theodora.[...]
[171]
웹사이트
Демоскоп Weekly – Приложение. Справочник статистических показателей.
http://www.demoscope[...]
[172]
문서
[173]
웹사이트
Rulers and Victims: The Russians in the Soviet Union
http://www.historyto[...]
2006-03-13
[174]
서적
Political construction sites: Nation-building in Russia and the post-Soviet States
Westview press
[175]
문서
[176]
harvard
[177]
harvard
[178]
논문
The Seeming Paradox of Increasing Mortality in a Highly Industrialized Nation: the Example of the Soviet Union
[179]
뉴스
Dentistry in Russia is finally leaving the Dark Ages behind
https://www.chicagot[...]
Chicago Tribune
2007-04-30
[180]
논문
Dental survey of 620 Soviet immigrants
https://jada.ada.org[...]
1979
[181]
웹사이트
ЗАКОН СССР ОТ 24 April 1990 О ЯЗЫКАХ НАРОДОВ СССР
http://legal-ussr.na[...]
Government of the Soviet Union
1990-04-24
[182]
서적
Daily life in the Soviet Union
https://archive.org/[...]
Greenwood Publishing Group
[183]
서적
Law and religion in post-communist Europe
https://books.google[...]
Peeters Pub & Booksellers
[184]
harvard
[185]
harvard
[186]
서적
Always Reforming: A History of Christianity Since 1300
https://archive.org/[...]
Mercer University Press
[187]
웹사이트
Johnson's Russia List #5141 - Why father of glasnost is despised in Russia
http://www.cdi.org/r[...]
2001-03-09
[188]
서적
The Russian Orthodox Church under the Soviet Regime
[189]
서적
A History of Soviet Atheism in Theory, and Practice, and the Believer
St Martin's Press
[190]
웹사이트
ARTICLE 124.
http://www.departmen[...]
[191]
웹사이트
Article 52.
http://www.departmen[...]
[192]
서적
Religion and the State in Russia and China: Suppression, Survival, and Revival
Continuum International Publishing Group
[193]
서적
Inside Central Asia: A Political and Cultural History
Penguin
[194]
서적
Religion and the Cultural Crisis in India and the West
https://books.google[...]
Intercultural Publications
[195]
문서
USGOV1
2023-08-00
[196]
서적
A Short History of Christianity
Viking
[197]
harvard
[198]
서적
Jews and Jewish Life in Russia and the Soviet Union
https://books.google[...]
Frank Cass
[199]
서적
Soviet Disunion: A History of the Nationalities Problem in the USSR
https://books.google[...]
Hamish Hamilton
[200]
서적
Religion, morality, and community in post-Soviet societies
https://books.google[...]
Indiana University Press
2008
[201]
harvard
[202]
서적
Subcultures and New Religious Movements in Russia and East-Central Europe
https://books.google[...]
Peter Lang
[203]
서적
Stalin and His Hangmen
Random House
[204]
harvard
[205]
웹사이트
Mikhail Gorbachev {{!}} Biography, Facts, Cold War, & Significance {{!}} Britannica
https://www.britanni[...]
2023-08-26
[206]
웹사이트
The Role of Sports in the Soviet Union | Guided History
http://blogs.bu.edu/[...]
[207]
뉴스
Soviet Amateur Athlete: A Real Pro
https://www.nytimes.[...]
1974-07-21
[208]
웹사이트
Sports in Soviet Union Only for Elite : There Are Top Athletes, and then There Are Those Who Sunbathe and Watch Drawbridges Go up
https://www.latimes.[...]
1986-07-22
[209]
웹사이트
Info
https://www.cia.gov/[...]
[210]
서적
Drug Games: The International Olympic Committee and the Politics of Doping
https://books.google[...]
University of Texas Press
[211]
웹사이트
The 1980 Olympics Are The 'Cleanest' In History. Athletes Recall How Moscow Cheated The System.
https://www.rferl.or[...]
2020-07-22
[212]
뉴스
The Soviet Doping Plan: Document Reveals Illicit Approach to '84 Olympics
https://www.nytimes.[...]
2016-09-03
[213]
서적
Contemporary World History
https://books.google[...]
Cengage Learning
2020-12-16
[214]
서적
A Short History Of Soviet Socialism
Routledge
2003-09-16
[215]
간행물
The USSR: Oligarchy or Dictatorship?
1972-06-26
[216]
간행물
Integrative Complexity of American and Soviet Foreign Policy Rhetoric: A Time Series Analysis
https://www.research[...]
2020-12-04
[217]
뉴스
Child poverty soars in eastern Europe
http://news.bbc.co.u[...]
BBC News
2000-10-11
[218]
서적
Blackshirts and Reds: Rational Fascism and the Overthrow of Communism
https://archive.org/[...]
City Lights Books
1997
[219]
서적
Russia and the Baltics: Poverty and Poverty Research in a Changing World
http://www.crop.org/[...]
[220]
뉴스
An epidemic of street kids overwhelms Russian cities
https://www.theglobe[...]
[221]
서적
Challenging Late Capitalism, Neoliberal Globalization, & Militarism
2006
[222]
간행물
More Shock than Therapy: Market Transition, Employment, and Income in Russia, 1991–1995
1998-07
[223]
뉴스
Cops for hire
http://www.economist[...]
2010
[224]
웹사이트
Corruption Perceptions Index 2014
http://www.transpare[...]
Transparency International
2014-12-03
[225]
서적
Russia's Uncertain Economic Future: With a Comprehensive Subject Index
M. E. Sharpe
2003
[226]
서적
The Capital Order: How Economists Invented Austerity and Paved the Way to Fascism
https://press.uchica[...]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022
[227]
서적
Urban Life in Post-Soviet Asia
CRC Press
[228]
서적
Encyclopaedia of Contemporary Russian
Routledge
[229]
간행물
Implications of the Diphtheria Epidemic in the Former Soviet Union for Immunization Programs
[230]
웹사이트
Non-communicable Diseases and Former Soviet Union countries
http://www.pitt.edu/[...]
[231]
간행물
Diphtheria in the Former Soviet Union: Reemergence of a Pandemic Disease
[232]
서적
Blackshirts and Reds: Rational Fascism and the Overthrow of Communism
City Lights Books
[233]
뉴스
Latvia provides no magic solution for indebted economies
https://www.theguard[...]
2010-12-20
[234]
간행물
Russian Demographics: The Role of the Collapse of the Soviet Union
http://www.kon.org/u[...]
2011
[235]
서적
The Great Leveler: Violence and the History of Inequality from the Stone Age to the Twenty-First Century
Princeton University Press
[236]
웹사이트
Russian Economy in the Aftermath of the Collapse of the Soviet Union
https://web.archive.[...]
[237]
서적
Taking Stock of Shock: Social Consequences of the 1989 Revolutions
Oxford University Press
2021
[238]
간행물
Mass privatisation and the post-communist mortality crisis: a cross-national analysis
2009
[239]
뉴스
Privatisation 'raised death rate'
http://news.bbc.co.u[...]
BBC
2009-01-15
[240]
서적
Red Hangover: Legacies of Twentieth-Century Communism
https://web.archive.[...]
Duke University Press
2017
[241]
간행물
After the Wall Fell: The Poor Balance Sheet of the Transition to Capitalism
[242]
뉴스
End of the USSR: visualising how the former Soviet countries are doing, 20 years on
https://www.theguard[...]
[243]
문서
harvnb references
[244]
뉴스
Ностальгия по СССР
https://www.levada.r[...]
levada.ru
2018-12-19
[245]
뉴스
Russia vs. Ukraine: More Russians Want the Soviet Union and Communism Back Amid Continued Tensions
https://www.newsweek[...]
2018-12-19
[246]
뉴스
75% of Russians Say Soviet Era Was 'Greatest Time' in Country's History – Poll
https://www.themosco[...]
2020-03-20
[247]
서적
Popular Support for an Undemocratic Regime: The Changing Views of Russians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1
[248]
뉴스
Russian Support for Stalin Surges to Record High, Poll Says
https://www.bloomber[...]
2019-04-16
[249]
뉴스
Former Soviet Countries See More Harm From Breakup
https://news.gallup.[...]
Gallup
2013-12-19
[250]
뉴스
Survey shows Ukrainians most negatively regard Stalin, Lenin and Gorbachev
https://www.kyivpost[...]
2018-11-20
[251]
웹사이트
What Should Russia be in the View of Russians?
https://www.levada.r[...]
2021-11
[252]
뉴스
Why do so many people miss the Soviet Union?
https://www.washingt[...]
2016-12-21
[253]
뉴스
The Fall of the Soviet Union
https://www.levada.r[...]
Levada.ru
2017-01-09
[254]
웹사이트
Celebrations, Commemorative Dates and Related Rituals: Soviet Experience, its Transformation and Contemporary Victory Day Celebrations in Russia and Latvia
https://www.szf.lu.l[...]
Academic Press of the University of Latvia
[255]
서적
Burden of Dreams: History and Identity in Post-Soviet Ukraine
The Pennsylvania State University Press
1998
[256]
뉴스
Russia's Victory Day celebrations take on new importance for the Kremlin this year
https://www.npr.org/[...]
[257]
웹사이트
Victory Parade on Red Square
http://en.kremlin.ru[...]
2022-05-09
[258]
웹사이트
The Immortal Regiment: the pride and prejudice of Russia
https://www.realinst[...]
[259]
웹사이트
U.S. & Russian Holidays in 2022 & 2023
https://ru.usembassy[...]
[260]
논문
Making Sense of Suffering : Holocaust and Holodomor in Ukrainian Historical Culture
http://lup.lub.lu.se[...]
Lund University
2006-10-26
[261]
논문
Nostalgia and discontinuity of life: A multiple case study of older ex-Soviet refugees seeking psychotherapeutic help for immigration-related problems.
https://www.elibrary[...]
2003-10-26
[262]
학술지
'State Capitalism' in the Soviet Union
https://citeseerx.is[...]
[263]
서적
The Rise of Militant
https://www.socialis[...]
Bertrams
1995-10
[264]
서적
In Defense of Leon Trotsky
https://books.google[...]
Mehring Books
2010
[265]
서적
ABC of Anarchism
http://assets.zinedi[...]
Freedom Press
[266]
웹사이트
A Proposal Concerning the General Line of the International Communist Movement
http://www.marxists.[...]
[267]
웹사이트
Seven Letters Exchanged Between the Central Committees of the Communist Party of China and the Communist Party of the Soviet Union
http://www.etext.org[...]
[268]
웹사이트
JCP struggling to become relevant
http://www.yomiuri.c[...]
2012-07-16
[269]
뉴스
Noam Chomsky on Anarchism, Communism and Revolutions
https://truthout.org[...]
2016-07-17
[270]
문서
소련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헌법 (1936년)#공산당의 지도적 역할
[271]
문서
인민위원회 의장
[272]
문서
소비에트 공산당 서기장, 인민위원회 의장→각료회의 의장
[273]
문서
각료회의 의장
[274]
문서
소비에트 공산당 제1서기, 각료회의 의장
[275]
문서
소비에트 공산당 제1서기→서기장, 최고회의 간부회의 의장
[276]
문서
소비에트 공산당 서기장, 최고회의 간부회의 의장
[277]
문서
소비에트 공산당 서기장, 최고회의 간부회의 의장
[278]
문서
소비에트 공산당 서기장, 소비에트 연방 대통령
[279]
문서
중앙집행위원회 의장(러시아 대표)→최고회의 간부회의 의장
[280]
문서
최고회의 간부회의 의장→최고회의 의장→소비에트 연방 대통령
[281]
문서
人民委員会議議長
[282]
문서
国民経済管理委員会委員長
[283]
웹사이트
序文
https://www.mofa.go.[...]
2001-01-16
[284]
백과사전
ソビエト連邦
2024-08-18
[285]
웹사이트
The Soviet Union and the United States – Revelations from the Russian Archives Exhibitions – Library of Congress
https://www.loc.gov/[...]
1992-06-15
[286]
서적
Soviet Industrialization Reconsidered: Some Preliminary Conclusions about Economic Development between 1926 and 1941
https://books.google[...]
Economic History Review
[287]
웹사이트
Joseph Stalin - Biography, World War II & Facts - History
https://www.history.[...]
2021-12-06
[288]
백과사전
Soviet Union
https://www.britanni[...]
2022-12-29
[289]
백과사전
April Thesis
https://www.britanni[...]
2022-12-30
[290]
서적
A History of Modern Russia from Nicholas II to Vladimir Putin
Harvard University Press
[291]
서적
マルクス=エンゲルス全集
大月書店
1959-10-23
[292]
서적
ハルビン商品陳列館パンフレット
露満蒙通信購読会
[293]
서적
終戦記録 議会への報告書並に重要公文書輯
朝日新聞社
1945-11
[294]
서적
ソウエト財政金融論
新京 大学書房
1933-10
[295]
서적
ソウエート政府の聯盟加入問題 : 平和のためか?政治的取引?
国際思想研究会事務室
[296]
서적
ソウエット土地法
国立国会図書館調査立法考査局
[297]
서적
戦旗. 3(4)
戦旗社
[298]
서적
C.C.C.P : サウェート社会主義共和国聯邦
アルス
1930
[299]
서적
サウエート経済の実体
千倉書房
1930
[300]
서적
社会主義サウエット共和國聯邦商工銀行と聯邦の工業
横浜正金銀行
1925-12
[301]
서적
五ケ年計画立往生 : サウィエート・ロシアの革命的実験は成功したか?
カール・カウツキー
1931
[302]
서적
国際聯盟年鑑 1929 昭和4年版
朝日新聞社
[303]
웹사이트
(株)読売新聞社『読売新聞百年史. 資料・年表』(1976.11)
https://shashi.shibu[...]
渋沢栄一記念財団
2020-07-27
[304]
백과사전
ロシア革命
2022-08-14
[305]
백과사전
ロシア革命
2022-08-13
[306]
서적
世界各国史22 ロシア史
[307]
서적
世界各国史22 ロシア史
[308]
서적
世界各国史22 ロシア史
[309]
서적
世界各国史22 ロシア史
[310]
서적
ブラッドランド 上
[311]
서적
ブラッドランド 上
[312]
서적
世界各国史22 ロシア史
[313]
서적
ポーランド・ウクライナ・バルト史
[314]
웹사이트
日本人の目から見たホロドモール
https://web.archive.[...]
[315]
서적
悲しみの収穫
恵雅堂出版
[316]
웹사이트
仏ソ相互援助条約
https://kotobank.jp/[...]
[317]
웹사이트
独ソ不可侵条約
https://kotobank.jp/[...]
[318]
서적
標準世界史年表
吉川弘文館
[319]
문서
1922年連邦結成条約により加盟
[320]
문서
1924年中央アジア領界策定により創設
[321]
문서
自治共和国からの昇進により創設
[322]
문서
ザカフカース社会主義連邦ソビエト共和国の解体に伴い創設
[323]
문서
自発的な加盟とされているが、ソ連離脱後の現在では半ば強制された併合と考えられている。
[324]
논문
Население России за 100 лет
[325]
서적
Cities in the Soviet Union
1970
[326]
문서
1988年12月01日改正
[327]
문서
1990年3月14日改正により
[328]
문서
1990年3月26日改正により
[329]
문서
1946年以前
[330]
문서
1946年以降
[331]
서적
レーニン・セレクション
平凡社
2024-01-10
[332]
서적
Young Stalin
2007
[333]
서적
King of the Mountain:The Nature of Political Leadership
University Press of Kentucky
2002
[334]
서적
ソロビヨフ(1984年)
[335]
서적
ソロビヨフ(1984年)
[336]
서적
An Encyclopedic Dictionary of Conflict and Conflict Resolution, 1945-1996
https://www.questia.[...]
Greenwood Press
1998
[337]
뉴스
ゴルバチョフ氏、どんな人生を歩んだのか
https://www.bbc.com/[...]
2022-09-01
[338]
간행물
シベリア引揚者への「救恤」、1923年 Relief of the Japanese People Retreating from Siberia in 1923
http://www.l.yamaguc[...]
2008
[339]
뉴스
満洲の主要都市を暴動化の大陰謀 : 撫順を中心とする中国共産党二十四名検挙さる
{{新聞記事文庫|url|0100286[...]
京城日報
1931-03-21
[340]
문서
各国共産党関係雑件/中国ノ部 /附属物 第一巻 (I-4-5-2-011)
http://www.jacar.go.[...]
[341]
서적
柴田&原 2003
[342]
뉴스
ロシア、制裁で武器作れずソ連時代の在庫使用 北朝鮮にも供給依存
https://mainichi.jp/[...]
2023-02-28
[343]
뉴스
【START up X】虫テック 世界に羽ばたけ/コオロギ・蚕・ハエ…無視できない栄養価/効率飼育・味もアップ「たんぱく質危機」に福音
日経産業新聞
2020-02-21
[344]
뉴스
ソ連崩壊の一因になった綿
https://jp.rbth.com/[...]
2017-08-09
[345]
뉴스
ペプシコとコカ・コーラがソ連でいかに覇権を争ったか
https://jp.rbth.com/[...]
2019-04-01
[346]
서적
ソ連・東欧の金融ペレストロイカ
東洋経済新報社
1990
[347]
웹사이트
THE WORLD FACTBOOK 1990 ELECTRONIC VERSION
http://www.umsl.edu/[...]
미국 중앙정보국
2010-09-05
[348]
웹사이트
米ソの興亡1947〜1991
https://www.ceodata.[...]
2010-09-05
[349]
웹사이트
ソ連のピオネールが禁止されていたものとは?
https://jp.rbth.com/[...]
2024-01-27
[350]
웹사이트
ベラルーシ・ウクライナニュース 2003年4-6月
http://www.rri.kyoto[...]
2024-01-27
[351]
서적
迫害下のロシア正教会 無神論国家における正教の70年
教文館
[352]
서적
迫害下のロシア正教会 無神論国家における正教の70年
[353]
서적
迫害下のロシア正教会 無神論国家における正教の70年
[354]
웹사이트
ナチスもソ連も恐れたユダヤ難民…「命のビザ」がウクライナ侵攻で再び注目される理由とは:東京新聞 TOKYO Web
https://www.tokyo-np[...]
2023-09-28
[355]
웹사이트
「非ナチ化」を掲げウクライナ侵攻を続けるロシアから、ユダヤ人が逃げ出す背景は 12%のユダヤ系住民が脱出:東京新聞 TOKYO Web
https://www.tokyo-np[...]
2023-09-28
[356]
웹사이트
崩壊前後のソ連からイスラエルにユダヤ人が大移動 {{!}} 取材ノート {{!}} 日本記者クラブ JapanNationalPressClub (JNPC)
https://www.jnpc.or.[...]
2022-04-08
[357]
서적
ロシアとユダヤ人: 苦悩の歴史と現在
ユーラシア研究所
[358]
웹사이트
Soviet Union: Nonpolitical Crime and Punishment
http://www.country-d[...]
country-data.com
2024-02-10
[359]
논문
The Contradiction Between Soviet and American Human Rights Doctrine: Reconciliation Through Perestroika and Pragmatism
[360]
웹사이트
Economic and Social Justice: A Human Rights Perspective
http://www1.umn.edu/[...]
Amnesty International
[361]
서적
世界を変えた6つの飲み物
[362]
서적
A Short History of Soviet Socialism
UCL Press
[363]
논문
The USSR: Oligarchy or Dictatorship?
1972-06-26
[364]
논문
Integrative Complexity of American and Soviet Foreign Policy Rhetoric: A Time Series Analysis
https://www.research[...]
1985-12
[365]
뉴스
외교관으로 온 ‘고르비의 한국어 입’
https://www.sisajour[...]
1991-08-01
[366]
뉴스
주한 소련대사관, 향후사태 관망하며 정상업무
https://imnews.imbc.[...]
1991-08-19
[367]
뉴스
주한소련대사관 정상업무
https://news.kbs.co.[...]
1991-08-20
[368]
서적
Political Power in the U.S.S.R., 1917–1947: The Theory and Structure of Government in the Soviet State
Oxford Univ. Press
[369]
서적
러시아사
대한교과서
[370]
서적
[371]
서적
[372]
서적
소련법률제도
[373]
웹사이트
소련 관련 법
http://www.departmen[...]
[374]
서적
마르크스주의의 역사
[375]
문서
흔히 말하는 노동 복지, 자본주의 사회에서 나타나는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여러 운동
[376]
서적
통합노동법
[377]
서적
Hoeffding (1958–59)
[378]
서적
러시아역사 다이제스트 100
[379]
웹사이트
보관된 사본
http://www.ukraine-o[...]
2007-02-06
[380]
서적
과학 좌파
[381]
서적
경제학강의
[382]
웹사이트
http://www.ajunews.c[...]
[383]
서적
Russia U.S.S.R.: A Complete Handbook
William Farquhar Payson
[384]
서적
Stalin's peasants: resistance and survival in the Russian village after collectivization
Oxford University Press
[385]
서적
The Economics of Property Rights: Towards a Theory of Comparative Systems
Springer Science+Business Media
[386]
논문
https://link.springe[...]
[387]
서적
Models of disequilibrium and shortage in centrally planned economies
https://www.worldcat[...]
Chapman and Hall
[388]
서적
Ukraine: Movement without Change, Change without Movement.
http://public.eblib.[...]
Taylor and Francis
2013
[389]
서적
Daily life in the Soviet Union
https://www.worldcat[...]
Greenwood Press
[390]
문서
1980년 하계 올림픽에서 공식적으로 금지 약물 복용이 적발된 선수는 없지만 동구권 선수들이 도핑을 했다는 의혹이 있다.
[391]
저널
Doping violations at the Olympics
https://www.economis[...]
2016-07-25
[392]
문서
Статья 52-я Конституции 1977 года
s:Конституция СССР ([...]
[393]
문서
Декрет Совета Народных Комиссаров об отделении церкви от государства и школы от церкви
s:ru:Декрет об отдел[...]
[394]
웹사이트
Решения КПСС и Советского государства о религии и церкви
http://istrorijaross[...]
[395]
웹사이트
Церковь и КГБ
http://www.religare.[...]
[396]
뉴스
소련 치안 문제
http://newslibrary.n[...]
1990-11-15
[397]
뉴스
http://newslibrary.n[...]
1989-09-28
관련 사건 타임라인
( 최근 20개의 뉴스만 표기 됩니다. )
[책과 삶] 죽임보다 죽음이 쉬웠던 테러리스트
Will Kim Jong-un’s attempt to revive ties with China, Russia stand the test of time?
“우리는 공산주의 저항운동에 빚졌다” [.txt]
[책과 삶] 폭력이여, 그들 침묵의 저항을 들어라
Kim Jong-un embraces Russia while giving China the cold shoulder
“붉은 군대 공적” 김정은…‘김일성 항일투쟁’ 흔들면서까지 러시아와 밀착
우크라이나 무국적 고려인, 체류자격 변경으로 안정찾아
감독이 올림픽에서 제자를 채점…황당한 금메달 작전
[속보] 러 여객기 추락 46명 전원 사망…‘인민의 무덤’ 악명 노후 기종
[Column] Is this the advent of the age of US imperialism?
‘미제국주의’ 시대는 이제서야 활짝 열리나 [아침햇발]
[별별스포츠 130편] 감독이 올림픽에서 제자를 채점? 황당한 금메달 밀어주기
‘X세대의 선망’ 미국도 맛이 간 세상에서 [.txt]
MI6 최초 여성 국장의 할아버지는 나치 스파이…“만난 적도 없다”
키르기스스탄 오슈시 레닌 동상 철거…공산당 “역사 경멸 행위”
“우린 ‘인생해방문학’이나 하자던 농담…꼭 그렇게 됐죠”
Are Kim Jong-un’s dreams of modernizing conventional firepower becoming a reality?
한국, 북극항로 개척해 新패권 올라타야
금성에 못 간 소련 우주선, 결국 지구로 추락한다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