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종도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조종도는 조선 시대의 문신이자 의병장으로, 1558년 생원시에 합격하여 안기도찰방을 거쳐 양지 현감, 안음 현감, 함양 군수를 역임했다. 정여립 모반 사건으로 투옥되었으나 풀려났으며,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시기에 의병으로 활약했다. 특히 정유재란 때 곽준과 함께 황석산성 전투에서 가토 기요마사 군과 싸우다 전사했다. 이조판서로 추증되었으며, 저서로 《대소헌집》이 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1537년 출생 - 권율
조선 중기의 문관이자 무장인 권율은 안동 권씨 출신으로, 늦은 나이에 문과에 급제하여 관료 생활을 시작, 임진왜란 때 행주대첩에서 승리하는 등 활약하여 도원수에 올랐으며 이몽학의 난을 진압하는 데에도 기여, 사후 영의정에 추증되고 선무공신 1등에 녹훈된 인물이다. - 1537년 출생 - 사나다 노부쓰나
사나다 노부쓰나는 센고쿠 시대 다케다 가문을 섬긴 사나다 유키타카의 아들로, 다케다 신겐을 섬기며 공을 세우고 가독을 계승했으나 나가시노 전투에서 전사했다. - 1597년 사망 - 정기원 (1559년)
정기원은 조선 중기 문신으로, 1585년 문과 급제 후 임진왜란 때 사은사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정유재란 남원성 전투에서 순절하여 예조판서에 추증되고 충렬사에 배향, 시호는 충의이며 저서로 《현산집》, 《현산실기》가 있다. - 1597년 사망 - 원균
원균은 조선 중기 무장으로, 여진족 토벌에 참여했으며 임진왜란 때 경상우도 수군절도사를 지냈으나 이순신과의 갈등 속에 칠천량 해전에서 패전 후 전사(또는 생존)한 인물이다. - 함안 조씨 - 조영래
조영래는 한국의 인권변호사이자 민주화운동가, 문필가로서, 사회 정의 실현을 위해 변호사 활동과 민주화 운동에 헌신했으며, 글쓰기를 통해 사회적 목소리를 내는 등 한국 민주주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 함안 조씨 - 조윤선
조윤선은 대한민국의 변호사이자 정치인으로, 박근혜 정부에서 여성가족부 장관, 대통령비서실 정무수석,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을 역임하고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건에 연루되었으며, 김앤장 변호사, 한나라당 대변인, 제18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조종도 | |
---|---|
기본 정보 | |
![]() | |
호 | 남악(南岳) |
본관 | 풍양 조씨(豊壤 趙氏) |
생몰년 | 1593년 ~ 1654년 |
자 | 명중(明仲) |
관력 | |
주요 관직 | 병조판서(兵曹判書) 대사헌(大司憲) 강화부 유수(江華府留守) |
2. 생애
조종도는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의병장이다. 경사(經史)에 밝았으며, 해학을 즐겼다. 사후 이조판서에 추증되었고, 함안 덕암서원, 안의 황암사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대소헌집》이 있다.[2]
2. 1. 초기 생애와 관직 생활
1558년 생원시에 합격하여 안기도찰방이 되었고 1585년 양지 현감으로 선정되었다.[2] 1589년 정여립의 모반 사건 때 투옥되었으나 풀려났다.[2]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안음 현감이 되고 함양 군수를 지내다가 병으로 물러났다.[2] 하지만 곽준과 함께 의병장 김면의 휘하로 들어가 우척현 전투 등에서 활약하였다.[2] 1597년 정유재란 때에는 곽준과 함께 직접 의병을 일으켜 황석산성 전투에서 왜장 가토 기요마사와 싸우다가 전사했다.[2]아버지 조언(趙堰)은 참봉이었고, 어머니는 대사성 강로(姜老)의 딸이었다.[2] 어려서 정두(鄭斗)의 문하에서 수학했으며, 조식의 문하생이기도 했다.[2] 1558년 생원시에 합격했으며, 천거로 안기도 찰방이 되었다.[2] 이때 이황의 문하생 유성룡, 김성일 등과 교류했다.[2] 이후 사섬시 직장, 상서원 직장, 통례원 인의, 장례원 사평 등을 역임했다.[2] 1585년 양지현감이 되어 선정을 베풀어 표리를 하사받았다.[2] 1587년 김구현령이 되었다.[2] 1589년 정여립 모반 사건으로 투옥되었으나 석방되었고,[2]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영남으로 돌아와 초유사 김성일과 의병 모집에 힘썼으며, 그해 가을 단성현감이 되었다.[2] 1596년에는 함양 군수였으며, 도중에 병으로 물러났다.[2] 그러나 안음현감 곽준과 함께 의병장 김면의 휘하에서 우척현 전투 등에서 활약했다.[2] 저서로는 《대소헌집(大笑軒集)》이 있다.[2]
2. 2. 정여립 사건과 임진왜란
1589년 정여립 모반 사건으로 투옥되었으나 석방되었다.[1]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영남으로 돌아와 초유사 김성일과 의병 모집에 힘썼으며, 그해 가을 단성현감이 되었다.[1] 1596년 함양 군수를 지내다가 병으로 물러났다.[1] 그러나 안음현감 곽준과 함께 의병장 김면의 휘하에서 우척현 전투 등에서 활약했다.[1] 1597년 정유재란 때는 곽준과 함께 직접 의병을 일으켜 황석산성 전투에서 가토 기요마사와 싸우다 전사했다.[1]2. 3. 정유재란과 황석산성 전투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안음 현감으로 곽준과 함께 의병장 김면(金沔)의 휘하로 들어가 우척현 전투 등에서 활약하였다.[1] 1597년 정유재란 때는 곽준과 함께 직접 의병을 일으켜 황석산성에서 왜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와 싸우다 전사했다.[1]3. 저서
저서로 《대소헌집》이 있다.
참조
[1]
웹사이트
조종도 - 한국학중앙연구원
http://encykorea.aks[...]
[2]
한국학중앙연구원 인물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