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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전성황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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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효전성황후는 청나라 도광제의 황후이자 함풍제의 생모이다. 1820년 입궁하여 전빈, 전비, 전귀비, 전황귀비를 거쳐 1833년 효신성황후의 사망 이후 황후가 되었다. 도광제보다 26세 연하로, 1840년 원명원에서 사망했다. 함풍제 즉위 후 효전성황후로 추존되었으며, 도광제와의 사이에서 1남 2녀를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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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전성황후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효전성황후의 조복 초상
효전성황후의 조복 초상
흔교(昕膠)
씨족니오후루(鈕祜禄) 씨
작위
정식 배우자 칭호청조 황후
재위 기간1834년 11월 18일 ~ 1840년 2월 13일
전임자효신성황후 동가 씨(孝愼成皇后 佟佳氏)
후임자효정성황후 박이제길특 씨(孝靜成皇后)(추존)
생애
출생1808년 3월 24일
사망1840년 2월 13일
사망 장소순천부, 자금성 종수이궁
매장지서청 묘릉
가족
배우자도광제
자녀함풍제
단순고륜공주
수안고륜공주
아버지이령(頤齡)
어머니오야 씨(烏雅氏)
시호
시호효전자경관인단각안혜성민부천독성성황후(孝全慈敬寬仁端慤安惠誠敏符天篤聖成皇后)

2. 생애

1821년 후궁 선발 시험인 '선수녀(選秀女)'에 합격하여 입궁한 후[2] 빠르게 승격하여 전빈(全嬪), 전비(全妃), 전귀비(全貴妃)를 거쳤다.[1] 두 딸과 아들(훗날 함풍제)을 낳았으며,[1] 함풍제를 낳은 후 황귀비(皇貴妃)가 되었다.[1]

1833년 효신성황후가 사망하자 육궁(六宮)의 사무를 관장하게 되었고,[1] 이듬해인 1834년 황후로 책봉되었다.[2][1] 아름답고 총명하여 도광제의 깊은 총애를 받았으나, 시어머니인 효화황태후와는 불화가 있었다고 전해진다.[2]

1840년 원명원에서 갑작스럽게 사망하였는데,[2][1] 병석에 있던 중 황태후가 보낸 술을 마시고 급사했다는 설이 있어 독살 의혹이 제기되기도 한다.[1] 사후 '효전(孝全)'이라는 시호를 받았고,[2] 아들 함풍제가 즉위한 후 최종적으로 '효전자경관인단각안혜성민부천독성성황후(孝全慈敬寬仁端愨安惠誠敏符天篤聖成皇后)'라는 시호를 받았다.[2]

2. 1. 가문 배경 및 초기 생애

효전성황후(孝全成皇后)의 이름은 역사 기록에 남아있지 않다. 청나라 가경제(嘉慶帝) 13년(1808년) 2월 28일(음력)에 태어났으며, 양력으로는 3월 24일이다. 어린 시절은 아버지가 지부(知府)로 근무하던 쑤저우(蘇州)에서 보냈다.

그녀의 가문인 뉴호록씨(鈕祜祿氏)는 본래 만주 팔기군의 정홍기(正紅旗) 소속이었다.

'''효전성황후의 가계'''
관계이름비고
아버지이령(頤齡)쑤저우에서 주방장군(駐防將軍, 종1품 무관) 및 소주부 지부(知府) 역임, 삼등공(三等公) 작위 소유
어머니우야(烏雅)씨
외조부목격등부(穆克登布)1803년 사망
형제은서(恩緒)



도광제(道光帝)보다 26세 연하였으며, 도광 원년(1821년)에 열린 후궁 선발 시험인 ‘선수녀(選秀女)’에 합격하여 입궁하였다. 처음에는 ‘전귀인(全貴人)’에 책봉되었고, 같은 해 ‘전빈(全嬪)’으로 승격되었다.[1]

2. 2. 도광제 시기

소주부 지부(知府) 이령(頤齡)의 딸로, 도광제보다 26세 연하였다.[2] 도광 원년(1821년)에 열린 후궁 간택 심사인 "선수녀(選秀女)"에 참여하여[2] 처음 도광제의 눈에 띄었고,[1] 그해 입궁하여 '전귀인(全貴人)'으로 책봉되었다.[2]

입궁 후 빠르게 승격하여, 1822년 12월 28일에는 '전빈(全嬪)'으로,[1] 1823년 12월 26일에는 '전비(全妃)'로 진봉되었다.[1] 1825년 4월 8일, 도광제의 세 번째 딸인 단순고륜공주(端顺固伦公主)를 낳았고 (이 공주는 1835년 12월 27일 요절하였다[1]),[1] 출산 약 두 달 후인 1825년 5월 30일 '전귀비(全貴妃)'로 승격되었다.[1] 이듬해인 1826년 5월 12일에는 네 번째 딸인 수안고륜공주(壽安固倫公主)를 낳았다.[1]

1831년 7월 17일에는 훗날 함풍제가 되는 네 번째 아들 이주(奕詝)를 낳았다.[1] 당시 기록에 따르면, 출산이 임박한 마지막 5주 동안 의원과 산파가 끊임없이 대기하며 출산을 도왔다고 전해진다.[1]

1833년 6월 16일 도광제의 첫 번째 황후인 효신성황후가 사망하자,[1] 당시 후궁 중 가장 서열이 높았던 전귀비가 육궁(六宮)의 사무를 관장하게 되었다.[1] 같은 해 9월 28일 추석에 '황귀비(皇貴妃)'로 승격되었고,[1] 1834년 10월[2] (혹은 11월 18일[1]) 정식으로 황후에 책봉되었다.[1]

황후 뉴호록씨는 아름답고 총명하여 도광제의 깊은 총애를 받았다. 그러나 황제의 총애를 독점하다시피 하여 다른 후궁들을 소홀히 대하게 만들었다는 비판도 있다.[1] 황후로서 황제가 여러 후궁을 만나도록 권해야 했으나 그러지 않았고, 종종 다른 후궁들을 트집 잡아 벌하여 좋지 않은 평판을 얻기도 했다.[1] 특히 여러 황자녀를 낳고 총애를 받았던 효정성황후는 그녀에게 위협적인 존재로 여겨졌다.[1] 또한 시어머니인 효화황태후와의 관계도 원만하지 못했다. 효화황태후는 뉴호록씨의 재능을 탐탁지 않게 여겼으며, 황태후의 60세 생일에 뉴호록씨가 축시(祝詩)를 지어 바치자 이를 크게 꾸짖었다는 일화도 있다.

1840년 1월 11일[2] (혹은 2월 13일[1]), 황후는 원명원에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2] 정확한 사인은 역사에 기록되지 않았으나,[1] 병을 앓던 황후에게 효화황태후가 보낸 술을 마시고 급사했다는 설이 있으며, 이 때문에 황태후에 의한 독살설이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1] 도광제는 황후의 죽음을 매우 비통해했지만, 사건의 진상을 적극적으로 조사하지는 않았다.

사후 '효전(孝全)'이라는 시호를 받았고,[2] 1840년 5월 2일 '효전황후(孝全皇后)'로 추존되었다.[1] 같은 해 11월 20일, 청서릉의 무릉(慕陵)에 안장되었다.[1] 이후 남편 도광제의 시호 '성(成)'과 존호를 더하여 최종 시호는 '효전자경관인단각안혜성민부천독성성황후(孝全慈敬寬仁端愨安惠誠敏符天篤聖成皇后)'로 가시(加諡)되었다.[2]

2. 3. 죽음

도광 20년(1840년) 정월 11일, 원명원에서 붕어하였다. 시호(諡)는 “효전(孝全)”을 받았으며, 이후 남편 도광제의 시호를 덧붙여 “효전자경관인단숙안혜성민부천독성성황후(孝全慈敬寬仁端愨安惠誠敏符天篤聖成皇后)”로 가시(加諡)되었다.

효전성황후는 시어머니인 효화황태후(도광제의 계모)와 불화했다고 전해진다. 효화황태후는 효전성황후가 기예에 능한 것을 탐탁지 않게 여겼으며, 효전성황후가 황태후의 60세 생일을 맞아 시를 지어 바치자 이를 크게 꾸짖었다는 일화가 있다. 효전성황후가 병석에 있을 때 황태후가 보낸 술을 마시고 급사하였다는 설이 있으며, 도광제는 그녀의 죽음을 매우 비통하게 여겼으나 사건의 진상을 자세히 조사하지는 못하였다.

2. 4. 함풍제 시기

1850년 2월 26일 도광제가 사망하자 그의 아들 奕詝|이주중국어함풍제로 즉위하였다. 함풍제는 같은 해 10월 26일, 자신의 어머니에게 孝全成皇后|효전성황후중국어라는 시호를 추존하였다.

3. 자녀

4. 대중문화에서의 등장


  • 청나라의 흥망 (1988년) - 최신우(崔信宇중국어)
  • 황제의 여자 (2006년) - 다이춘룽
  • 궁중잔혹사: 꽃들의 전쟁 (2011년) - 쉬안위엔

5. 갤러리

조복 차림


일상복 차림, 의주와 함께


일상복 차림


도교 의상 차림

참조

[1] 문서 道光二年 十一月 十六月 null
[2] 문서 道光三年 十一月 二十五日 null
[3] 문서 道光五年 四月 十三日 null
[4] 문서 道光十三年 八月 十五日 null
[5] 문서 道光十四年 十月 十八日 null
[6] 문서 道光二十年 四月 一日 null
[7] 문서 道光三十年 九月 二十二日 nu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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