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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궁 (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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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궁은 중국 황제의 적법한 배우자인 황후 외에 황제를 보좌하고 자손을 생산하기 위해 궁궐에 거주하던 여성들을 의미한다. 후궁 제도는 중국 고대부터 시작되어 각 왕조의 특성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발전했다.

고대에는 왕비와 소수의 후궁으로 시작하여 주나라 때 위계가 정해졌으나 실제 시행 여부는 불분명했다. 한나라 때 후궁의 등급이 정비되었고, 위진남북조 시대에는 여러 국가에서 다양한 후궁 제도가 운영되었다. 수나라와 당나라를 거치며 후궁의 품계와 역할이 체계화되었고, 송나라 때는 후궁의 수가 증가했다. 원나라는 몽골의 영향으로 일부다처제의 후궁 제도를 유지했으며, 명나라는 황후를 중심으로 한 5등급의 후궁 제도를 운영했다. 청나라는 8등급의 후궁 제도를 갖추었으며, 이는 중국 역사상 가장 단순한 형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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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의 후궁 - 탄위링
    탄위링은 1920년 베이징에서 태어나 만주국 황제 푸이의 총애를 받았으나 방광염 치료 중 사망했으며, 푸이는 그녀에게 명현귀비 시호를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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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궁 (중국)
중국 황실 후궁
청나라 시대의 후궁들
청나라 시대의 후궁들
개요
유형첩 제도
목적황족의 번성, 정치적 연대, 황제의 사생활 보장
관련 용어황후

궁녀
환관
역사
기원춘추전국시대 이전
제도화주나라
절정기명나라, 청나라
폐지신해혁명 이후
계급
최고위황후 (황제의 정실 부인)
정1품황귀비
귀비
종1품
정2품첩여
종2품미인
정3품재인
종3품
정4품충의
종4품유휘
정5품순성
종5품수용
정6품공인
종6품보림
정7품어녀
종7품채녀
정8품선시
종8품무견
그 외궁녀 (계급에 포함되지 않음)
역할 및 생활
주된 역할황제의 자녀 출산 및 양육, 황실 행사 참여, 황실의 안녕 기원
생활 환경자금성 내 별도의 궁궐 (일정 공간 제한)
교육예절, 학문, 예술 등 (출신 배경에 따라 다름)
식사황실 규정에 따른 식사 제공 (계급에 따라 차등)
의복계급에 따른 의복 착용 (색상, 문양 등 차별화)
궁녀 및 환관후궁의 시중을 드는 궁녀와 환관 존재
정치적 영향력
가능성황제의 총애를 얻어 황자 생산 시 영향력 확대 가능
제한원칙적으로 정치 참여 불가 (외척 세력 견제 목적)
예외서태후 등 일부 후궁은 막강한 권력 행사
기타
관련 문화궁중 암투
황실 로맨스
역사 드라마 및 영화의 주요 소재
참고 서적《여사서》
《궁녀담》
《후궁견환전》

2. 고대

고대 중국의 후궁 제도는 하나라와 은나라(상나라) 시기 왕비(王妃)와 소수의 후궁(말희, 달기 등)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주나라 시대에는 제왕의 적실을 왕후(王后)라 칭하고, 《주례》에 따라 왕후 1명, 부인 3원, 빈 9원, 세부 27원, 어처 81원 등의 위계질서가 규정되었으나,[47] 실제 시행 여부는 불분명하다.[49]

춘추 전국 시대부터 전한 개국 전까지 제왕의 여인은 후(后)·비(妃)·부인(夫人)·희(姬)·미인(美人) 등으로 호칭했는데, 같은 인물의 호칭이 혼용되어 있고 기준이 없어 적·첩을 정확히 구분할 수 없었다.

2. 1. 대표 인물

3. [[한나라]]

한나라고제 유방이 기원전 202년에 건국한 전한과 기원후 25년에 광무제 유수가 건국한 후한으로 구별한다. 전한을 서한, 후한을 동한으로 칭하기도 한다.

전한 시대에는 황제의 적실을 황후(皇后)로, 생모를 왕후(王后)로 칭하는 제도가 정착되었다. 유방은 황후 1인을 두는 주나라의 제도를 답습하였으나, 후궁의 작호와 위계는 달리 정하지 않고 전국시대 제왕의 처첩을 상징하는 호칭인 부인(夫人), 미인(美人), 희(姬)를 썼다. 한무제 때 황후 아래 여관직(후궁+시녀)인 첩여(婕妤), 형아(娙娥), 용화(傛華), 충의(充依)가 증설되었고, 한 원제때 소의(昭儀)가 추가되어 황후 아래에 놓였다. 이후 전한의 후비 제도는 황후 1인 아래 빈어 14등급으로 나뉘었다.

;전한 무제 이전

1등급2등급3등급4등급5등급6등급
부인(夫人), (姬)
미인(美人)팔자(八子)칠자(七子)양인(良人)장사(長使)소사(少使)



;전한 무제 이후(부분은 원제가 추가함)

1등급2등급3등급4등급5등급6등급7등급8등급9등급10등급11등급12등급13등급14등급
소의(昭儀)첩여(婕妤)형아(娙娥)용화(傛華)미인(美人)팔자(八子)충의(充依)칠자(七子)양인(良人)장사(長使)소사(少使)오관(五官)순상(順常)공화(共和)·오령(娛靈)·
보림(保林)·양사(良使) 등



황태자의 처는 비(妃)로 삼았으며 첩은 양제(良娣)와 유자(孺子)로 삼았다. 황손의 처는 부인으로 삼았고 첩에겐 정식 작호가 없었다.

후한에서는 전한의 제도를 세습하되, 14등급으로 세분했던 후궁의 작위를 4등급으로 축소했다.[50] 이에 귀인(貴人), 미인(美人), 궁인(宮人), 채녀(采女)만 존재했다.

3. 1. 대표 인물


  • 달기 - 은나라 마지막 제왕인 주왕 제신의 총희이다.
  • 서시 - 춘추 전국시대 월나라 사람으로 오나라부차의 후궁이 되었다. 중국 4대 미인 중 한 명으로 꼽힌다.
  • 조희(자초부인) - 진시황제의 생모로, 여불위의 애첩이었으나 조나라에 인질로 와 있던 진 장양왕의 첩으로 주어졌다.
  • 우미인(우희) - 고제 유방의 라이벌이었던 초왕 항우의 총희이다.
  • 척부인(척희) - 고제 유방의 후궁이다. 고제의 사후에 그의 황후였던 여태후의 보복을 받아 사망했다.
  • 구익부인(조첩여) - 무제의 후궁이다. 무제의 여관직 개설로 첩여(婕妤)에 봉작되었고 사후 아들인 전한 소제에 의해 효소태후로 추증되었다.
  • 왕소군 - 원제의 후궁에 있었으나 승은을 입진 못한 것으로 알려진다. 흉노의 호한야 선우의 처가 되었다. 중국 4대 미인 중 한 명으로 꼽힌다.
  • 조비연 - 무기(舞妓) 출신으로 성제의 후궁이 되었다가 황후에 올랐다. 중국 가냘픈 미인의 대명사다. 여동생 조합덕 역시 성제의 후궁이 되어 소의(昭儀)가 됐다.

4. 위진남북조

위진남북조 시대에는 황제의 첩에게 비(妃)라는 작위를 사용하기 시작했으며, 빈(嬪)이 비보다 서열이 높았다.[45] 각 국가별로 다양한 후궁 제도를 운영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조위'''


명제 재위 기간에는 다음과 같은 후궁 등급을 사용했다.

등급명칭
황후황후(皇后)
부인부인(夫人)
귀빈귀빈(貴嬪)
숙비숙비(淑妃)
숙원숙원(淑媛)
소의소의(昭儀)
소화소화(昭華)
수용수용(修容)
수의수의(修儀)
절여절여(婕妤)
용화용화(傛華)
미인미인(美人)
양인양인(良人)
착인착인(鹺人)


  • '''진(晉)'''


진나라 시대의 후궁 품계는 다음과 같았다.

등급명칭
황후황후(皇后) (1명)
3부인귀빈(貴嬪), 부인(夫人), 귀인(貴人)
9빈숙비(淑妃), 숙원(淑媛), 숙의(淑儀), 수화(修華), 수용(修容), 수의(修儀), 절여(婕妤), 용화(容華), 충화(充華)
기타미인(美人), 재인(才人), 중재인(中才人)


  • '''유송'''


유송 효무제 시대부터 후궁 제도는 다음과 같았다.

등급명칭
황후황후(皇后)
3부인귀비(貴妃), 귀빈(貴嬪), 귀인(貴人)
9빈숙비(淑妃), 숙원(淑媛), 숙의(淑儀), 소의(昭儀), 소용(昭容), 소화(昭華), 절여(婕妤), 용화(容華), 충화(充華)
기타미인(美人), 중재인(中才人), 충의(充衣)



고제 재위 시기부터 후궁 제도는 다음과 같았다.

등급명칭
황후황후(皇后) (1명)
3부인귀빈(貴嬪), 부인(夫人), 귀인(貴人)
9빈수화(修華), 수의(修儀), 수용(修容), 숙비(淑妃), 숙원(淑媛), 숙의(淑儀), 절여(婕妤), 용화(容華), 충화(充華)
기타미인(美人), 중재인(中才人), 재인(才人)



483년 무제가 즉위하면서 귀비(貴妃)와 숙비(淑妃)의 직위가 황후 바로 아래의 독립된 등급으로 격상되었다. 489년에는 숙비(淑妃)의 격상으로 생긴 공백을 메우기 위해 소용(昭容)의 직위가 추가되었다.


  • '''양(梁)'''


양 무제 통치 기간 동안 후궁 제도는 다음과 같았다.

등급명칭
황후황후(皇后) (1명)
3부인귀비(貴妃), 귀빈(貴嬪), 귀희(貴姬)
9빈숙원(淑媛), 숙의(淑儀), 숙용(淑容), 소화(昭華), 소용(昭容), 소의(昭儀), 수화(修華), 수의(修儀), 수용(修容)
5직절여(婕妤), 용화(容華), 충화(充華), 승휘(承徽), 열영(列榮)
기타미인(美人), 양인(良人), 재인(才人)


  • '''진(陳)'''


문제 시대에 이르러 후궁 제도가 생겨났으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등급명칭
황후황후(皇后)
3부인귀비(貴妃), 귀빈(貴嬪), 귀희(貴姬)
9빈숙원(淑媛), 숙의(淑儀), 숙용(淑容), 소화(昭華), 소용(昭容), 소의(昭儀), 수화(修華), 수의(修儀), 수용(修容)
5직절여(婕妤), 용화(容華), 충화(充華), 승휘(承徽), 열영(列榮)
기타미인(美人), 재인(才人), 양인(良人)



효문제는 북위의 한화 기간 동안 후궁 제도를 개혁했다.

등급명칭
황후황후(皇后)
소의소의(左昭儀), 우소의(右昭儀)
3부인부인(夫人)
3빈 & 6빈삼빈(三嬪), 육빈(六嬪)
기타세부(世婦), 어처(御妻)



무성제 치세부터 후궁 제도는 다음과 같았다.

등급명칭
황후황후(皇后) (1명)
아영좌아영(左娥英) (1명), 우아영(右娥英) (1명)
숙비숙비(淑妃) (1명)
소의소의(左昭儀) (1명), 우소의(右昭儀) (1명)
3부인홍덕부인(弘德), 정덕부인(正德), 숭덕부인(崇德)
상빈융휘상빈(隆徽), 광유상빈(光猷), 소훈상빈(昭訓)
하빈선휘하빈(宣徽), 선명하빈(宣明), 응휘하빈(凝暉), 응화하빈(凝華), 순화하빈(順華), 광훈하빈(光訓)
기타세부(世婦) (27명), 재인(才人), 채녀(採女)


등급명칭
3부인 (이후 3비)귀비(貴妃), 장귀비(長貴妃), 덕비(德妃)
3읍3읍(㚤)
6빈소화(昭化)
어원상원(上媛), 중원(中媛), 하원(下媛)
어완상완(上婉), 중완(中婉), 하완(下婉)



선제 재위 기간 동안에는 중국 역사상 전례 없이 다섯 명의 황후가 책봉되었다.


  • 양려화, 천원대황후(天元大皇后)
  • 주만월, 천대황후(天大皇后)
  • 진월의, 천중대황후(天中大皇后)
  • 위지치번, 천좌대황후(天左大皇后)
  • 원락상, 천우대황후(天右大皇后)

5. 수나라

수나라 초기에는 嬪|빈중국어(''pín'') 4명, 세부(世婦, ''shìfù'') 9명, 어녀(禦女, ''yùnǚ'') 38명 등으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내궁의 의례를 관리하는 여관(女官, ''nǚguān'') 제도에 의해 관리되었다.[45]

문제는 독고황후가 사망한 후, 귀인(貴人, ''guìrén'') 3명을 추가하고, 빈(嬪)의 정원을 9명, 세부(世婦)는 27명, 어녀(禦女)는 81명으로 늘렸다.

양제는 후궁 제도를 다시 확장하여 귀비(貴妃, ''guìfēi''), 숙비(淑妃, ''shūfēi''), 덕비(德妃, ''défēi'')의 비(妃, ''fēi'') 3명, 순의(順儀, ''shùnyí''), 순용(順容, ''shùnróng''), 순화(順華, ''shùnhuá''), 수의(修儀, ''xiūyí''), 수용(修容, ''xiūróng''), 수화(修華, ''xiūhuá''), 충의(充儀, ''chōngyī''), 충용(充容, ''chōngróng''), 충화(充華, ''chōnghuá'')의 빈(嬪, ''pín'') 9명, 절여(婕妤, ''jiéyú'') 12명, 미인(美人, ''měirén'')과 재인(才人, ''cáirén'')으로 구성된 세부(世婦, ''shìfù'') 15명, 보림(寶林, ''bǎolín'') 24명, 어녀(禦女, ''yùnǚ'') 24명, 채녀(採女, ''cǎinǚ'') 37명을 두었다.

6. 당나라

당나라의 후궁 제도는 황후 외에 4부인(귀비, 숙비, 덕비, 현비), 9빈(소의, 소용, 소원 등), 27세부(첩여, 미인, 재인), 81어처(보림, 어녀, 채녀)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내관"(內官)이라고도 불렸다.[4]

구분품계작호정원
4부인정1품귀비(貴妃), 숙비(淑妃), 덕비(德妃), 현비(賢妃)각 1인
9빈정2품소의(昭儀), 소용(昭容), 소원(昭媛), 수의(修儀), 수용(修容), 수원(修媛), 충의(充儀), 충용(充容), 충원(充媛)각 1인
27세부정3품, 정4품, 정5품첩여(婕妤), 미인(美人), 재인(才人)각 9인
81어처정6품, 정7품, 정8품보림(寶林), 어녀(御女), 채녀(采女)각 27인



당 고종은 소의였던 측천무후를 총애하여 宸妃 (chēnfei|천비중국어)로 승진시키려 했으나, 조정 대신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4] 662년에는 후궁 품계명이 잠시 변경되었다가 670년에 원래대로 복구되었는데, 이는 측천무후의 영향으로 추측된다.[5]

당 현종 시기에는 3후궁(혜비, 여비, 화비), 6의(숙의, 덕의, 현의, 순의, 완의, 방의), 4미인, 7재인 등으로 구성되었다.

무후태종고종의 후궁이자 중국 역사상 유일한 여성 황제였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당 태종당 고종의 후궁이자 중국 역사상 유일한 여성 황제였던 측천무후가 있다.

6. 1. 대표 인물


  • 달기 - 은나라 마지막 제왕인 주왕 제신의 총희이다.
  • 서시 - 춘추 전국시대 월나라 사람으로 오나라부차의 후궁이 되었다. 중국 4대 미인 중 한 명으로 꼽힌다.
  • 조희(자초부인) - 진 시황제의 생모로, 여불위의 애첩이었으나 조나라의 인질로 와 있던 진 장양왕의 첩으로 주어졌다.
  • 우미인(우희) - 고제 유방의 라이벌이었던 초왕 항우의 총희이다.
  • 측천무후 - 당 태종의 후궁 재인(才人: 정5품)이었다. 당 태종의 사후 관례대로 비구니가 되었다가 당 고종의 황후인 왕씨가 정적인 숙비 소씨를 견제할 목적에 당 고종이 황태자 시절에 마음에 두었었던 서모 측천무후를 입궁시켜 당 고종의 소의로 삼고 숙비를 축출했다. 이로 비(妃)로 승격한 측천무후는 왕황후 역시 축출하고 황후에 올랐으며, 당 고종의 사후 황위에 오른 아들 당 예종을 폐하고 스스로 황제에 올랐다.
  • 한국부인 무씨 - 본명은 무순(武順)이다. 측천무후의 언니로서 황궁에 드나들다 당 고종과 통간하는 사이가 됐다고 전한다. 사후 특별히 국부인(國夫人: 정1품 관원의 모친과 아내의 작위)으로 추증되었다. 《구당서》에는 당 고종의 6남인 노왕 이현이 측천무후의 소생이 아닌 한국부인의 소생이라 전하고 있다.
  • 위국부인 하란씨 - 한국부인 무씨의 딸로, 측천무후의 이질녀이다. 당 고종과 추문 관계에 있던 어머니 한국부인의 사후에 특별히 국부인으로 봉작됐다. 이모부인 당 고종과 통간하여 측천무후에게 살해됐다고 전한다.
  • 양귀비 - 당 현종의 후궁으로 본래는 당 현종의 아들 수왕 이모의 왕비였다. 중국의 4대 미인 중 한 명으로, 풍만한 미인의 대명사로 꼽힌다.
  • 정순황후 무씨 - 당 현종의 후궁이자 추존 황후로, 그녀의 생전 작위였던 무혜비로 더욱 유명하다. 당 현종의 극진한 총애를 받아 사후 정순황후로 추존됐으나 당 숙종이 즉위한 뒤 생모 귀빈 양씨(원헌황후)의 정적이었던 무씨의 황후로서의 예우를 일절 폐했다.

7. 송나라

송나라의 후비 제도는 초기에는 당나라의 제도를 따랐다. 황후 1명, 부인 3명, 빈 9명, 그리고 세부(世婦)를 두었다. 그러나 진종과 인종 시대를 거치면서 9빈이 18인으로 크게 늘었다. 소의(昭儀), 소용(昭容), 소원(昭媛), 수의(修儀), 수용(修容), 수원(修媛), 충의(充儀), 충용(充容), 충원(充媛) 외에 태의(太儀), 귀의(貴儀), 숙의(淑儀), 숙용(淑容), 순의(順儀), 완의(婉儀), 완용(婉容) 등이 추가되었다.[51]

진종 때는 귀비(貴妃), 숙비(淑妃), 덕비(德妃) 외에 송 인종의 생모인 신비(宸妃)가 추가되었고, 인종 때는 현비(賢妃), 정비(净妃)가 추가되어 부인이 5명이 되었다.

세부에는 정3품 첩여(婕妤), 정4품 미인(美人), 정5품 재인(才人), 귀인(貴人) 등이 있었다. 이외에도 국부인(國夫人), 군부인(郡夫人) 등의 외명부 작위를 사용하기도 했다.

7. 1. 대표 인물


  • 달기 - 은나라 마지막 왕인 주왕 제신이 총애하던 후궁이다.
  • 서시 - 춘추 전국시대 월나라 사람으로 오나라부차의 후궁이 되었다. 중국 4대 미인 중 한 명으로 꼽힌다.
  • 조희(자초부인) - 진 시황제의 생모로, 여불위의 애첩이었으나 조나라에 인질로 와 있던 진 장양왕의 첩이 되었다.
  • 우미인(우희) - 고제 유방의 라이벌이었던 초왕 항우가 총애하던 후궁이다.
  • 이사사 - 정식 후궁은 아니지만 송 휘종의 사랑을 차지했던 명기(名妓)이다. 휘종의 정궁인 정황후의 반대로 입궁하지 못해 휘종이 황궁에서 그녀의 집까지 이어지는 지하도를 뚫어 수시로 은밀히 다니며 그녀와 지냈다. 송나라가 금나라에 의해 짓밟힌 후, 그녀의 명성을 듣고 군대를 돌려 달려온 금나라 군사들 앞에서 절개를 지키기 위해 비녀로 목을 찔렀으나 실패하고 비녀를 부러뜨려 삼키고 죽었다. 이후 송나라 사람이 두 사람의 사랑을 기려 지은 《이사사외전(李師師外傳)》이 전해진다.

8. 금나라

금나라 초기에는 당나라의 후비 제도를 받아들여 황후 아래 원비(元妃)[52], 귀비(貴妃), 숙비(淑妃), 덕비(德妃), 현비(賢妃)의 4부인과 9빈, 27세부, 81어처를 두었다. 원비는 황후에 오르지 못한 원배(元配)의 작위로 사용되었으나, 이후 1등 후궁의 작위로 정착되었다.

구분품계작호정원
부인정1품원비(元妃), 귀비(貴妃)
숙비(淑妃), 덕비(德妃), 현비(賢妃)
각 1인
9빈정2품소의(昭儀), 소용(昭容), 소원(昭媛)
수의(修儀), 수용(修容), 수원(修媛)
충의(充儀), 충용(充容), 충원(充媛)
각 1인
27세부정3품
정4품
정5품
첩여(婕妤)
미인(美人)
재인(才人)
각 9인
81어처정6품
정7품
정8품
보림(寶林)
어녀(御女)
채녀(采女)
각 27인



4대 황제인 금 해릉왕 때에는 후궁의 수가 12비(妃)로 크게 늘었다. 8대 황제 금 선종 때에는 후비 제도가 다시 정비되어 귀비(貴妃), 진비(真妃), 숙비(淑妃), 여비(麗妃), 유비(柔妃)의 5부인으로 축소되었고,[53] 9빈은 그대로 유지되었으나 첩여(婕妤)가 추가되고 정3품에 여인(麗人)과 재인(才人), 정4품에 순의(順儀), 숙화(淑華), 숙의(淑儀)를 두었다.[54]

9. 원나라

원나라를 세운 몽골인은 유목민족의 특성대로 일부다처제의 혼인 형태를 가졌다. 금나라를 세운 여진족과 마찬가지이나, 당나라의 후비제도를 수용하여 오직 1명의 황후를 두었던 금나라와는 달리 원나라 황제는 다수의 황후를 두어 고유의 일부다처제 결혼 문화를 고수했다. 이로 인해 원나라의 후비제도는 황후·비(妃·妃子)·빈(嬪)의 3등급으로만 구성되었으며 정원엔 제한이 없었다. 예외적으로 원 혜종 때 비(妃)·빈(嬪)을 모두 두었을 뿐만 아니라 재인(才人)도 썼다.[55]

원나라의 후궁 서열은 황후, 후궁, 빈(嬪)으로만 구성되어 매우 단순했다. 한 번에 한 명의 황후만 있었지만, 후궁이나 빈의 수에는 제한이 없었다. 서열의 수는 적었지만, 원나라 후궁 안에는 위신에 따른 하위 서열 체계가 존재했다. 황실 후궁의 천막(중국어: 宮帳, 병음: gōngzhàng; 몽골어유르트를 뜻하는 단어: 斡兒垜, 병음: wòérkàng)은 그녀의 지위를 결정했으며, 여러 여성이 같은 천막에서 살기도 했다. 존재하는 많은 천막 중에서 첫 번째 천막의 황실 후궁이 가장 높은 지위를 가진 여성으로 여겨졌다.

고려는 원나라에 여성을 제공했다.[7][8] 충렬왕쿠빌라이 칸의 딸의 결혼으로 시작하여 총 9명의 원나라 황실 공주가 고려 왕실과 결혼했다.[10]

송나라 공종은 1276년 몽골에 항복했고 보르지긴 씨족의 원나라 공주와 결혼했는데, 그들은 아들 자오완푸를 두었으며, 그는 공종의 죽음 이후 그의 어머니의 혈통 때문에 추방되었다.[11]

9. 1. 대표 인물

10. 명나라

명나라의 후궁 제도는 황후(皇后) 아래 황귀비(皇貴妃), 귀비(貴妃), 비(妃), 빈(嬪), 귀인(貴人), 미인(美人) 등으로 구성되었다. 7대 황제 경태제 때 황귀비가 처음 등장했고, 가정제 때 빈(嬪)이 정식 작위로 추가되었다.

초기에는 비(妃) 중 귀비(貴妃)를 으뜸으로 두었으며, 그 외의 비는 숙비, 영비, 현비, 공비 등 임의로 호칭을 정하여 차등을 두지 않았다. 비(妃)의 하위 등급으로는 첩여(婕妤), 소의(昭儀), 귀인(貴人), 미인(美人) 등이 있었고, 이들을 서비(庶妃)라 총칭했다.[6]

경태제 시기 황후(皇后)와 귀비(貴妃)를 합친 황귀비(皇貴妃)라는 작위가 처음 등장하여 황후에 준하는 등급으로 귀비 위에 놓였다. 이후 가정제 때 빈(嬪)이 정식 작위로 추가되어 비(妃) 아래, 귀인(貴人) 위에 놓이게 되었다.[56][57] 빈(嬪)까지를 정비(正妃: 정식 후궁)[58], 귀인 이하를 서비(庶妃)로 구분했다.

태자의 후궁 작위로는 본래 빈(嬪)이 있었으나, 빈(嬪)은 황제의 후궁 작위로 옮겨지고 재인(才人)·선시(选侍)·숙녀(淑女)를 두었다. 재인은 태자비 바로 아래 서열이고, 숙녀가 가장 낮았다. 친왕의 후궁은 시첩(侍妾)이었다.

명나라는 적후(嫡后)와 서후(庶后)를 구별하여, 적처로서 황후가 된 경우 홀수(기본 13자)[59], 후궁으로 황후에 추존된 경우 짝수(기본 12자) 시호를 주었다.[60] 황제의 생모나 조모가 일찍 사망하여 황태후로도 존봉되지 못한 경우, 황후가 아닌 황태후나 태황태후로 추존했는데, 이는 황후보다 낮은 작위였다.[61]

순황후(효공장황후)는 선덕제의 두 번째 황후였다.


환관과 처녀를 포함한 인신 공물은 몽골, 조선, 베트남,[12][13] 등 다양한 곳에서 왔다.[14] 조선은 명나라에 총 114명의 여성을 보냈는데, 처녀 16명(여종 48명 동반), 요리사 42명, 공연자 8명이 포함되었다.[15][16] 이들은 1408년부터 1433년까지 7차례 사절단을 통해 영락제선덕제에게 보내졌다.[16] 영락제의 어머니가 조선인[19][20][21][22][23][24][25][26][27] 혹은 몽골 출신[28] 후궁이라는 추측도 있었다.[29][30][31] 명나라와 조선의 관계는 영락제 통치 기간 동안 우호적으로 개선되었다.[23]

10. 1. 대표 인물


  • 달기 - 은나라 마지막 제왕인 주왕 제신의 총희이다.
  • 서시 - 춘추 전국시대 월나라 사람으로 오나라부차의 후궁이 되었다. 중국 4대 미인 중 한 명으로 꼽힌다.
  • 조희(자초부인) - 진 시황제의 생모로, 여불위의 애첩이었으나 진 장양왕의 첩으로 주어졌다.
  • 우미인(우희) - 고제 유방의 라이벌이었던 초왕 항우의 총희이다.
  • 만귀비 - 8대 황제 헌종 성화제의 유모로, 황제로 즉위한 성화제의 후궁이 되었다. 사후 황귀비로 추봉됐다.
  • 강혜장숙여비 - 조선 출신 공녀로, 인수대비의 고모이자 한확의 누이이다. 영락제의 비였으며 황후의 역할을 했고 영락제 사후 순장되었다.
  • 공신여비한씨 - 강혜장숙여비의 동생으로 선덕제의 후궁이었다. 선덕제 사후에도 순장당하지 않고 8대 황제 성화제 때까지 살다가 82세의 나이로 죽었다.
  • 순황후(효공장황후) - 선덕제의 두 번째 황후였다.

11. 청나라

청나라의 후궁 제도는 중국 역사상 비교적 단순한 편으로, 공식적으로 8등급으로 나뉘었다.

구분작호정원비고
정비(正妃)황귀비(皇貴妃)1인책립식(冊立式) 거행, 금책(金冊)과 금보(金寶) 받음
귀비(貴妃)2인금책(金冊)과 금보(金寶) 받음
비(妃)4인금책(金冊)과 금인(金印) 받음
빈(嬪)6인금책(金冊) 받음
서비(庶妃)귀인(貴人)무제한금책·금인 X
봉작되지 못한 관녀(官女)와 함께 서비(庶妃)로 통칭
상재(常在)
답응(答應)



가장 낮은 세 품계(귀인, 상재, 답응)는 정해진 인원수가 없었다. 시녀(官女子)는 황제의 총애를 받아 시중을 들었지만 정식 품계가 없는 궁녀를 지칭했다.[41]

이 제도는 엄격했지만, 실제 후궁의 수는 황제에 따라 달랐다. 강희제는 79명으로 가장 많은 후궁을 두었고, 광서제는 황후, 진비, 근비를 포함하여 3명으로 가장 적었다.[42]

빈(嬪) 이상의 품계를 받은 후궁은 자금성 내정의 주요 구역에 거처를 배정받고, 하위 품계의 후궁과 시종들에게 존칭을 받았다. 황후는 황제의 유일한 적법한 아내였고, 다른 여성들은 황실 후궁으로 여겨졌다. 황후의 자녀는 적자(嫡子)로 불리며 황위 계승 가능성이 높았고, 다른 후궁의 자녀는 서자(庶子)로 불렸다.

태자가 즉위하면 죽은 아내나 선황제의 후궁에게 사후 품계를 올릴 수 있었다. 정실 부인은 황후로 추존될 수 있었고, 측실과 첩은 답응에서 황귀비까지 다른 일곱 품계 중 하나로 승격될 수 있었다.

황후와 황귀비는 죽은 후에 시호(谥号)를 받았다. 황후의 시호는 16자로 구성되었고, 황귀비의 시호는 2자였다. 황후의 시호는 "효(孝)"로 시작하여 황제의 이름으로 끝났다. 황귀비의 시호는 봉호(封号)를 사용하고 한 글자를 추가했다.[43] 황제는 후궁을 황귀비로 승진시킬 때 신중했는데, 이는 부황후(副后)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남편보다 오래 산 황후는 황태후(皇太后)가 되고 '어머니, 황태후(母后皇太后)'로 불렸다. 새 황제의 생모가 전 황제의 후궁이면, 그녀도 황태후가 되어 '성모, 황태후(聖母皇太后)'로 불리고 사후에 황후로 추존되었다. 두 명 이상의 후임 황제의 치세를 거친 황태후는 태황태후(太皇太后)라고 불렸다. 전 황제의 다른 후궁들은 품계에 따라 '태(太)'라는 존칭으로 불렸지만, 반드시 그래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낮은 품계의 후궁은 '선제 궁녀(先帝宮女)'라고 불렸다.

왕자의 후궁은 적복진(嫡福晋), 측복진(侧福晋), 격격(格格)의 세 품계로 구성되었다.[44]

효의황후(령비), 건륭제의 세 번째 황후.


진비(경선황귀비), 광서제의 후궁.

11. 1. 참고: 후궁과 관련된 한국사

고려원나라에 여성을 공물로 바쳤는데[7][8], 그 중 한 명이 기황후이다. 기황후는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한국 여성과 환관을 궁정에 들여 한국의 의복, 음식, 생활 방식을 원나라 수도에 전파했다.[9] 충렬왕쿠빌라이 칸의 딸의 결혼으로 시작된 고려 여성의 원나라 궁정 진출에 대한 답례로, 총 9명의 원나라 황실 공주가 고려 왕실과 결혼했다.[10]

명나라 시기에도 조선은 명나라에 총 114명의 여성을 보냈는데, 여기에는 처녀 16명(여종 48명 동반), 요리사 42명, 공연자 8명이 포함되었다.[15][16] 이들은 1408년부터 1433년까지 총 7차례의 사절단을 통해 영락제선덕제에게 보내졌다.[16] 선덕제는 조선으로부터 인신 공물을 받은 마지막 명나라 황제였다.[17] 1435년 그의 죽음으로 53명의 조선 여성이 본국으로 송환되었다.[18] 영락제의 실제 어머니가 조선인[19][20][21][22][23][24][25][26][27] 혹은 몽골 출신[28] 후궁이라는 추측이 많았다.[29][30][31] 명나라와 조선 사이의 관계는 영락제 통치 기간 동안 극적으로 개선되어 훨씬 더 우호적이고 상호 이익이 되었다.[23] 영락제와 선덕제는 모두 조선 요리와 여성을 좋아했다고 한다.[23][32][33]

참조

[1] 간행물 "Empresses and Consorts: Selections from Chen Shou's ''Records of the Three States'' with Pei Songzhi's Commentary" China Review International 2001-Fall
[2] 서적 Women Shall Not Rule: Imperial Wives and Concubines in China from Han to Liao https://books.google[...] Rowman & Littlefield
[3] 서적 Concubinage and Servitude in Late Imperial China https://books.google[...] Lexington Books
[4] 문서 Zizhi Tongjian 1084
[5] 문서 "The table is after Wu Jo-shui's "Empress Wu and Proto-Feminist Sentiments in T'ang China," in ''Imperial Rulership and Cultural Change in Traditional China''" University of Washington press
[6] 웹사이트 nüguan 女官 (www.chinaknowledge.de) http://www.chinaknow[...]
[7] 서적 Empire's Twilight: Northeast Asia Under the Mongols https://books.google[...] Harvard University Press 2019-06-08
[8] 서적 Eurasian Influences on Yuan China https://books.google[...] Institute of Southeast Asian Studies 2019-06-08
[9] 웹사이트 기황후(奇皇后) http://encykorea.aks[...] Academy of Korean Studies 2019-06-18
[10] 서적 Marriage as Political Strategy and Cultural Expression: Mongolian Royal Marriages from World Empire to Yuan Dynasty https://books.google[...] Peter Lang 2019-06-18
[11] 서적 Buddhist Encounters and Identities Across East Asia BRILL 2018
[12] 서적 East Asia: A New History https://books.google[...] AuthorHouse 2012-11-20
[13] 웹사이트 ScholarBank@NUS: Terms of Use http://scholarbank.n[...]
[14] 서적 The eunuchs in the Ming dynasty https://books.google[...] SUNY Press 2010-06-28
[15] 서적 조선 사람의 세계여행 (규장각 교양총서05) https://books.google[...] 글항아리 2019-03-12
[16] 서적 몽골은 왜 고려를 멸망시키지 않았나 https://books.google[...] 역사의아침 2019-03-12
[17] 서적 Harmony and War: Confucian Culture and Chinese Power Politics https://books.google[...] Columbia University Press 2019-07-01
[18] 서적 Ming China, 1368-1644: A Concise History of a Resilient Empire https://books.google[...] Rowman & Littlefield 2019-07-01
[19] 서적 Concubinage and Servitude in Late Imperial China https://books.google[...] Lexington Books 2014-06-18
[20] 서적 Defining Yongle: Imperial Art in Early Fifteenth-century China https://books.google[...] Metropolitan Museum of Art 2016-09-13
[21] 서적 Imperial China 900-1800 https://books.google[...] Harvard University Press 2016-09-13
[22] 서적 The Taiping Rebellion https://books.google[...] M.E. Sharpe 2016-09-13
[23] 서적 A Dragon's Head and a Serpent's Tail: Ming China and the First Great East Asian War, 1592-1598 https://books.google[...] University of Oklahoma Press 2016-09-13
[24] 서적 The Asian World, 600-1500 https://books.google[...] Oxford University Press 2016-09-13
[25] 학술지 Arts of Asia https://books.google[...] Arts of Asia Publications. 2016-09-13
[26] 서적 The Teleology of the Modern Nation-state: Japan and China https://books.google[...] University of Pennsylvania Press 2016-09-13
[27] 서적 Power and glory: court arts of China's Ming dynasty https://books.google[...] Asian Art Museum--Chong-Moon Lee Center for Asian Art and Culture 2016-09-13
[28] 서적 Firearms: A Global History to 1700 https://books.googl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6-09-13
[29] 서적 Perpetual Happiness: The Ming Emperor Yongle https://books.google[...] University of Washington Press 2016-09-13
[30] 서적 Latter Days of the Law: Images of Chinese Buddhism, 850 - 1850; [exhibition, August 27 - October 9 1994 ...] https://books.google[...] University of Hawaii Press 2016-09-13
[31] 서적 Ming China, 1368-1644: A Concise History of a Resilient Empire https://books.google[...] Rowman & Littlefield 2016-09-13
[32] 서적 Ming China, 1368-1644: A Concise History of a Resilient Empire https://books.google[...] Rowman & Littlefield 2016-09-13
[33] 서적 A Brief History of Chinese Civilization https://books.google[...] Cengage Learning 2016-09-13
[34] 서적 Peking: Temples and City Life, 1400-1900 https://books.google[...]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2000-12-16
[35] 서적 Dictionary of Ming Biography, 1368-1644 https://books.google[...] Columbia University Press
[36] 서적 Telling Stories: Witchcraft And Scapegoating in Chinese History https://books.google[...] BRILL
[37] 서적 The Oxford Handbook of the History of Consumption https://books.google[...] OUP Oxford 2012-03-22
[38] 서적 Ming China, 1368-1644: A Concise History of a Resilient Empire https://books.google[...] Rowman & Littlefield
[39] 서적 China Marches West: The Qing Conquest of Central Eurasia https://books.google[...] Harvard University Press 2009-06-30
[40] 서적 Imperial China 900-1800 https://books.google[...] Harvard University Press
[41] 서적 新清史 (New Qing History) GGKEY:ZFQWEX019E4
[42] 웹사이트 https://ctext.org/wi[...]
[43] 간행물 欽定大清會典 (嘉慶朝) (Official Code of the Great Qing) (Jiaqing Era)
[44] 웹사이트 https://www.tumblr.c[...]
[45] 문서 수나라 양제 이후로 원나라 이전까지 작위로서의 빈(嬪)은 쓰여지지 않는다. 9빈의 빈(嬪)이란 부인과 마찬가지로 아내를 뜻하는 단어로 쓴 것일 뿐, 빈(嬪)의 작위를 가진 9명의 여인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46] 웹사이트 국대부인 http://sjw.history.g[...]
[47] 서적 환관과 궁녀 웅진지식하우스
[48] 기록 조선왕조실록 세종 50권, 12년(1430 경술 / 명 선덕(宣德) 5년) 12월 14일(경진) 5번째기사
[49] 사서 사기(史記)
[50] 서적 중국을 뒤흔든 여인들 시그마북스
[51] 문서 송나라에서 정비(净妃)가 쓰여진 것은 단 한 차례로써, [[송 인종|인종]]의 폐황후 곽씨가 강봉되어 받은 작위이다. 따라서 송의 5부인에 정비는 포함되지 않고 귀비(貴妃), 숙비(淑妃), 덕비(德妃), 현비(賢妃), 신비(宸妃) 만을 인정한다. 4부인을 칭할 경우엔 신비를 빼고 귀비, 숙비, 덕비, 현비 만을 인정하는데, 이는 신비가 현비보다 먼저 등장했지만 이후 현비는 여럿 존재하였으되 신비로 봉작된 여성은 [[송 인종]]의 생모 [[장의황후]] 이씨가 유일하기 때문이다.
[52] 문서 조선의 원비(元妃)는 조선 임금의 첫 왕후의 지칭이다.
[53] 문서 금 선종 역시 원비(元妃)를 두었지만 즉위 원년(1213년)과 2년(1214년)에 이뤄진 것이다. [[금 선종]]이 익왕으로 있던 시절 한꺼번에 세 여인을 아내로 맞이했는데 그 중 두 명이 왕씨 자매이며, 나머지 한 명이 방씨(훗날 진비)이다. 1213년에 황제로 즉위한 선종은 왕씨 자매 중 동생을 일단 원비(元妃)로 삼았다가 다음 해 정식 황후(인경황후)로 봉작했고, 이때 숙비로 있던 언니 왕씨를 원비로 올렸다. 훗날 이 원비 왕씨(언니)의 아들(1198년 生)이 황위에 올라 [[금 애종]]이 되어 원비 왕씨 역시 사후에 황후로 추존돼 명혜황후가 된다. 후비 작위의 재정비 후 원비 왕씨를 귀비로 개칭한 기록은 없다.
[54] 문서 [[금 선종]]은 후궁의 작위로 원비(인경황후의 첫 봉작, 명혜황후의 두 번째 봉작), 숙비(명혜황후의 첫 봉작), 진비(방씨), 여비(사씨)를 썼고, 사실 상 [[금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금 애종]]은 황후 1인 외 가까이 한 궁인이 있었으나 정식 후궁으로 봉작하지 않았다. 이에 실제로 이 제도는 실현되지 못했다.
[55] 사서 원사(元史)
[56] 기록 명 세종실록
[57] 사서 명사(明史)
[58] 문서 중국의 비(妃)는 작위이기도 하지만, 작위와 상관없이 후궁을 모두 아우르는 통칭이기도 하다.
[59] 문서 시호의 마지막에 남편의 시호 마지막 글자를 따서 더한다.
[60] 문서 현재 중국에선 명·청의 적후는 3글자의 시호에 황후를 붙여 소개하고, 서후는 2글자의 시호에 황후(혹은 황태후·태황태후)를 붙여 구별한다. 한국에서는 모두 3글자 시호에 황후를 붙여 소개하고 있는데 이는 조선의 왕후(2글자 시호+왕후)를 기준한 탓이다.
[61] 문서 고려와 조선 초의 사후 추증된 작위로서의 왕태후는 왕후보다 격이 높다.
[62] 서적 后宮的金枝玉叶(=後宮的金枝玉葉. 한역본: 관능으로 천하를 지배한 구중궁궐 여인들) The Forbidden City Publishing House/미다스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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