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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안 네그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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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안 네그린은 카나리아 제도 출신의 스페인 의사이자 정치인으로, 스페인 제2공화국에서 재무부 장관과 총리를 역임했다. 그는 독일에서 의학을 전공하고 생리학 연구 조교수를 지냈으며, 스페인으로 돌아와 마드리드 콤플루텐세 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며 학문적 명성을 쌓았다. 1929년 스페인 사회노동자당에 입당하여 정치 활동을 시작했으며, 스페인 내전 중에는 공화파 정부의 주요 인물로 활동했다. 그는 스페인 금 보유량을 소련으로 이전하는 등 논란이 되는 정책을 추진했으며, 총리로서 전쟁 지속을 위한 노력을 기울였으나, 카사도 쿠데타 이후 프랑스로 망명했다. 망명 생활 중에도 공화국 정부의 총리로 활동했으나, 프랑코 정권의 탄압을 받았고, 1956년 파리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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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안 네그린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1938년 바르셀로나의 네그린
1938년의 네그린
직책스페인의 총리
임기 시작1937년 5월 17일
임기 종료1939년 3월 31일
대통령마누엘 아사냐
이전 총리프란시스코 라르고 카바예로
다음 총리프란시스코 프랑코
국방부 장관국방부 장관
임기 시작1938년 4월 5일
임기 종료1939년 3월 31일
총리본인
이전 장관인달레시오 프리에토
다음 장관피델 다빌라 아론도
재무부 장관재무부 장관
임기 시작1938년 4월 5일
임기 종료1939년 3월 31일
이전 총리프란시스코 라르고 카바예로
본인
이전 장관엔리케 라모스 라모스
다음 장관프란시스코 멘데스 아스페
하원 의원하원 의회 의원
임기 시작1936년 3월 16일
임기 종료1939년 3월 31일
선거구라스팔마스
임기 시작1933년 12월 8일
임기 종료1936년 1월 7일
선거구마드리드
임기 시작1931년 7월 14일
임기 종료1933년 10월 9일
선거구라스팔마스
출생 이름후안 네그린 로페스
출생일1892년 2월 3일
출생지그란카나리아 라스팔마스
사망일1956년 11월 12일
사망지프랑스, 파리
정당스페인 사회노동당 (1929–1946)
국적스페인
배우자마리아 피델만 브로드스키
개인 정보
로마자 표기hwan negeurin

2. 초기 생애 및 교육

카나리아 제도 라스 팔마스 출신으로, 어린 시절 과학과 의학에 재능을 보여 1906년, 15세의 나이로 독일에서 의학 공부를 시작했다.

2. 1. 출생 및 가족 배경

카나리아 제도 라스 팔마스에서 태어났다. 독실한 가톨릭 중산층 가정 출신이었다. 그의 아버지 후안 네그린 카브레라는 섬에서 성공한 평판 좋은 상인이자 사업가였으며, 마리아 돌로레스 로페스 마레로와 결혼했다. 후안은 장남이었고, 클라레티안에 속한 동생 에리베르토와 누이 돌로레스가 있었다.

후안은 과학 과목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의학에 대한 관심을 보이자, 그의 아버지는 1906년 당시 독일 대학교의 명성에 이끌려 그를 15세의 나이에 독일에서 공부하도록 결정했다.

2. 2. 독일 유학

네그린은 킬 의과대학에서 2년 동안 공부했다. 1908년에는 의학 생리학을 전공하기 위해 당시 독일과 유럽 최고의 생리학 연구소가 있던 라이프치히로 옮겼다. 그는 거의 10년 동안 독일에 머물면서 의학을 시작으로 화학, 그리고 경제학까지 공부했다. 그는 과학 연구에 뛰어난 재능을 보인 우수한 학생이었다. 1912년, 불과 20세의 나이에 테오도어 폰 브뤼케의 지도를 받아 의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곧바로 라이프치히 생리학 연구소의 연구 조교로 채용된 후 조교수로 임명되었다.

1914년 7월 21일, 그는 네덜란드에 거주하던 부유한 러시아 망명가 집안 출신의 피아노 학생 마리아 피델만 브로드스키와 결혼했다. 부부는 후안, 로물로, 미겔 등 5명의 자녀를 두었으나, 이 중 3명만이 성인이 될 때까지 생존했다. 네그린은 모국어인 스페인어 외에도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그리고 러시아어까지 구사할 수 있었다.

3. 스페인 귀국 및 학문 활동

제1차 세계 대전 중 독일에서의 연구 활동에 어려움을 겪자 스페인으로 돌아왔다. 귀국 후 스페인에서 의학 학위를 취득하였으며, 곧 마드리드 콤플루텐세 대학교 의과대학 생리학과 교수로 임용되어 학문 활동을 이어갔다. 마드리드에 설립한 그의 생리학 연구소는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연구 중심지로 발전했으며, 많은 우수한 과학 인재를 배출하는 데 기여했다.

3. 1. 스페인으로의 귀환

1915년 말, 제1차 세계 대전이 한창일 때, 독일에서 연구 활동을 이어가기 어려워진 네그린은 스페인으로 돌아왔다. 그는 이미 부신과 중추 신경계에 대한 연구와 유럽 최고의 과학 저널에 발표한 뛰어난 논문들로 탄탄한 전문가로서의 명성을 쌓은 상태였다. 그는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인 산티아고 라몬 이 카할의 제자이기도 했다. 1919년 스페인에서 의학 학위를 취득했고, 1922년에는 29세의 나이로 마드리드 콤플루텐세 대학교 의과대학 생리학과 교수가 되었다. 마드리드에 세운 그의 생리학 연구소는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연구 센터이자 뛰어난 과학 인재를 양성하는 곳으로 자리 잡았다. 그에게 영감을 받은 많은 제자 중에는 1959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한 세베로 오초아도 있었다.

: 네그린은 강의와 실험실 수업을 통해서뿐만 아니라, 스페인어 외 다른 언어로 된 과학 단행본과 교과서를 읽도록 조언하고 격려하며 자극함으로써 내 상상력에 넓고 매혹적인 시야를 열어주었다.

오초아에 따르면 네그린은 엄격한 스승이었으며, 그의 시험에서 많은 학생이 낙제했다. 그는 또한 매우 성공적인 개인 연구소를 운영했다. 1923년, 네그린이 직접 출산을 도왔던 막내딸이 출산 중 사망하는 비극을 겪었다. 2년 후에는 또 다른 딸이 발진티푸스 유행으로 열 살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이러한 불행은 부부 관계를 멀어지게 했고, 1926년에는 그의 실험 조수 중 한 명인 펠리시아나 로페스 데 돔 파블로가 네그린의 삶에 들어와 그의 사망까지 동반자가 되었다. 그의 아내는 이 관계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를 지속적으로 불륜으로 비난했다.[2]

3. 2. 마드리드 대학교 교수 임용

1915년 말, 제1차 세계 대전이 한창일 때, 독일에서 연구 활동을 지속하기 어려워지자 네그린은 스페인으로 돌아왔다. 그는 이미 부신과 중추 신경계에 대한 연구와 유럽 유수의 과학 저널에 발표한 뛰어난 논문들을 통해 탄탄한 전문적 명성을 쌓은 상태였다. 또한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인 산티아고 라몬 이 카할의 제자이기도 했다. 1919년 스페인에서 의학 학위를 취득했으며, 1922년에는 29세의 젊은 나이로 마드리드 콤플루텐세 대학교 의과대학 생리학과 교수로 임용되었다.

마드리드에 설립한 그의 생리학 연구소는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연구 센터이자 우수한 과학 인재를 양성하는 학교로 자리매김했다. 그에게 영감을 받은 많은 제자 중에는 훗날 1959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하게 되는 세베로 오초아도 있었다.

네그린은 강의와 실험실 수업을 통해서뿐만 아니라, 스페인어를 제외한 다른 언어로 된 과학 단행본과 교과서를 읽도록 조언하고 격려하며 자극함으로써 내 상상력에 넓고 매혹적인 시야를 열어주었다.


오초아의 회고에 따르면 네그린은 매우 엄격한 스승이었고, 그의 시험에서 낙제하는 학생들도 상당수였다고 한다. 그는 대학에서의 활동 외에도 성공적인 개인 연구소를 운영했다. 1923년, 그의 막내딸이 출산 중 사망했는데, 네그린이 직접 출산을 도왔다. 2년 후, 그의 또 다른 딸이 발진티푸스 유행으로 열 살의 나이로 사망했다. 이러한 불행은 부부 관계의 소원함으로 이어졌고, 1926년 그의 사망까지 동반자가 된 그의 실험 조수 중 한 명인 펠리시아나 로페스 데 돔 파블로가 네그린의 삶에 들어오게 되었다. 그의 아내는 이 관계를 용납하지 못했고, 그에게 지속적인 불륜을 씌웠다.[2]

4. 정치 입문

1920년대의 후안 네그린


후안 네그린은 독일 유학 시절 독일 사회민주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이는 그의 보수적인 가족 배경과는 다른 길이었으나, 당시 독일 사회민주주의는 정치적, 문화적으로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미겔 프리모 데 리베라 장군의 독재와 알폰소 13세 군주제의 위기가 고조되던 1929년 봄, 스페인 사회노동자당(PSOE)에 입당하며 본격적인 정치 활동을 시작했다.

PSOE 입당 초기부터 네그린은 인다레시오 프리에토가 이끄는 온건 개혁 파벌에 속했으며, 프란시스코 라르고 카바예로가 이끄는 당내 좌파 혁명 노선과는 거리를 두었다. 1930년대 들어 그는 정치 활동에 더욱 집중하며 학문 활동을 점차 줄였고, 1931년 스페인 총선에서 처음으로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의정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네그린은 스페인 제2공화국의 격동기 속에서 사회주의 운동 내 온건 노선을 대표하는 주요 인물로 활동하게 된다.

4. 1. 스페인 사회노동당 입당



네그린은 독일 유학 시절 독일 사회민주주의와 가까워졌는데, 이는 당시 독일 사회민주주의가 정치적, 문화적으로 큰 영향력을 행사하던 시기였지만 그의 보수적인 가족 배경과는 거리가 있었다. 그는 미겔 프리모 데 리베라 장군의 독재와 알폰소 13세 군주제의 위기가 심화되던 1929년 봄, 스페인 사회노동자당(PSOE)에 입당했다. 입당 초기부터 인다레시오 프리에토가 이끄는 온건 개혁 파벌에 속했으며, 스페인 내전으로 관계가 틀어지기 전까지 프리에토와 긴밀한 우정을 유지했다. 반면, 노동자 총동맹(UGT) 노조와 PSOE 내 좌익(마르크스주의 및 혁명적) 세력을 대표하는 프란시스코 라르고 카바예로 파벌과는 대립각을 세웠다.

1930년부터 네그린은 정치 활동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기 위해 학문 활동을 줄였고, 1934년에는 교수직 휴직을 신청했다. 1931년 스페인 총선에서 카나리아 제도라스팔마스 선거구 대표로 처음 선출되었고, 이후 1933년 스페인 총선과 1936년 스페인 총선에서도 연이어 당선되었다.

1931년 4월 스페인 제2공화국 수립 이후 1936년 7월 내전 발발 직전까지, 스페인 사회는 극심한 정치적 긴장과 사회적 양극화를 겪었다. 이 시기 네그린은 사회주의 운동 내에서 프리에토의 온건 노선을 견지하며 라르고 카바예로가 이끄는 급진 노선에 명확히 반대했다. PSOE 온건파는 마누엘 아사냐 총리가 이끄는 공화주의자들과의 연립 정부를 유지하며, 1931년부터 1933년까지 좌파 정부가 추진했던 국가 세속화, 농지 개혁, 행정 분권화, 군 개혁, 진보적 노동법 제정 등 광범위한 사회 민주주의적 개혁 프로그램을 완수하고자 했다. 프리에토와 네그린을 비롯한 온건파는 이러한 공화주의-사회주의 연합이 개혁을 성공적으로 이끌고, 군부의 지지를 받는 우익 반동 세력과 아나코 생디칼리스트 및 공산주의 좌파의 혁명 시도 모두에 효과적으로 대처하는 데 필수적이라고 판단했다.

스페인 사회주의 내에서 네그린은 친구 인다레시오 프리에토와 함께 공화주의와 중도 노선을 분명히 지지했다. 1934년 혁명적 총파업 당시, 그는 라르고 카바예로가 주도한 혁명 노선에 반대하고 프리에토가 내세운 공화주의적 단결을 지지했다. 이 총파업은 보수 가톨릭 단체인 스페인 자율 우익 연맹( Confederación Española de Derechas Autónomas|콘페데라시온 에스파뇰라 데 데레차스 아우토노마스es, CEDA) 소속 장관 3명이 알레한드로 레루의 우익 정부에 입각한 것에 대한 반발로 일어난 사건이었다. 이러한 입장 차이로 인해 네그린은 루이스 아라키스타인과도 결별하게 되었고, 스페인 사회주의 내부의 분열은 더욱 심화되었다. 특히 아스투리아스 봉기를 포함한 1934년의 사건들은 스페인 내전의 전조로 여겨진다.

4. 2. 국회의원 활동



네그린은 독일 체류 시절 독일 사회민주주의에 깊이 공감하게 되었다. 이는 당시 독일 사회민주주의가 정치적, 문화적으로 큰 영향력을 행사하던 시기였으나, 그의 보수적인 집안 배경과는 거리가 있었다. 그는 미겔 프리모 데 리베라 장군의 독재와 알폰소 13세 군주제의 위기가 심화되던 1929년 봄, 스페인 사회노동자당(PSOE)에 입당했다. 입당 초기부터 그는 인다레시오 프리에토가 이끄는 온건 개혁파에 속했으며, 내전 발발 전까지 프리에토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이는 노동자 총동맹(UGT)과 PSOE 내 좌익(마르크스주의 및 혁명 노선)을 대표하던 프란시스코 라르고 카바예로 파벌과는 대립하는 입장이었다.

1930년부터 네그린은 정치 활동에 집중하며 학문 활동을 줄였고, 1934년에는 교수직 휴직을 신청했다. 그는 1931년 스페인 총선에서 카나리아 제도의 라스 팔마스 선거구 대표로 선출되어 국회의원 활동을 시작했으며, 이후 1933년 스페인 총선과 1936년 스페인 총선에서도 연이어 당선되었다.

1931년 4월부터 1936년 7월까지 스페인 내 정치적 긴장과 사회적 양극화가 심화되는 가운데, 네그린은 사회주의 운동 내에서 프리에토의 온건 노선을 일관되게 지지하며 라르고 카바예로가 주도하는 급진적 경향에 반대했다. PSOE 온건파는 당 집행위원회 다수를 점하고 있었으며, 마누엘 아사냐 총리가 이끄는 공화주의자들과의 연립 정부를 유지하여 1931년부터 1933년까지 좌파 정부가 추진했던 국가 세속화, 농지 개혁, 행정 분권화, 군 개혁, 진보적 노동법 제정 등 야심찬 사회민주주의 개혁 프로그램을 완수하고자 했다. 프리에토와 네그린 등 온건파는 이러한 공화주의-사회주의 연합이 개혁을 성공시키고, 군부의 지원을 받는 우익 세력의 반동과 아나코 생디칼리스트나 공산주의 노선의 좌익 혁명 시도를 모두 막아내는 데 필수적이라고 보았다.

스페인 사회주의 내에서 그는 친구인 인다레시오 프리에토와 마찬가지로 공화주의와 중도 노선을 명확히 지지했다. 알레한드로 레루가 이끄는 우익 정부에 보수 가톨릭 단체인 스페인 자율 우익 연맹(Confederación Española de Derechas Autónomas|스페인 자율 우익 연맹es, CEDA) 소속 장관 세 명이 입각한 것에 반발하여 라르고 카바예로가 주도한 1934년 혁명적 총파업 당시, 네그린은 프리에토가 주장한 공화주의적 단결을 지지하며 라르고 카바예로의 혁명 노선에 반대했다. 이 사건으로 그는 루이스 아라키스타인과도 거리를 두게 되었고, 스페인 사회주의 내 분열은 더욱 깊어졌다. 특히 아스투리아스 봉기를 포함한 1934년의 사건들은 스페인 내전의 전주곡으로 평가받는다.

5. 스페인 내전

1936년 7월 17일 모로코에서 군사 반란이 일어나면서 스페인스페인 제2공화국을 지지하는 "공화파"와 반란군을 중심으로 한 "국민파"로 나뉘어 스페인 내전에 돌입했다.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이끄는 국민파는 이탈리아독일의 지원을 받은 반면, 공화파는 소련의 지원을 받았으나 프랑스영국이 주도한 불개입 협정으로 인해 국제적 고립과 무역 금수 조치에 가까운 어려움을 겪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후안 네그린은 국회의원으로서 공화파 진영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5. 1. 발발과 초기 활동

1936년 7월 17일 모로코에서 일어난 군사 반란을 계기로 스페인은 빠르게 양분되었다. 한쪽은 스페인 제2공화국을 중심으로 한 "공화파" 또는 "충성파"였고, 다른 한쪽은 반란군 장군들, 최종적으로는 프란시스코 프랑코 장군의 지휘 아래 놓인 "국민파"였다. 공화국 정부는 전쟁 초기부터 국민파의 군사적 우위, 내부 분열, 그리고 유럽 열강들의 소극적인 태도 등 여러 어려움에 직면했다.

특히 프랑스영국 정부가 주도하여 1936년 8월에 체결된 불개입 협정은 심각한 문제였다. 이 협정은 유럽 국가들이 스페인 내전에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군수 물자 거래를 중단하도록 규정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공화국 정부만 국제적 고립과 사실상의 무역 금수 조치 상태에 놓이게 만들어, 전쟁 내내 극심한 물자 부족에 시달리게 했다. 반면, 이탈리아독일은 내전 초기부터 국민파를 적극적으로 지원했으며, 소련은 4개월이 지나서야 공화파를 지원하기 시작했다.

전쟁이 시작되자 네그린은 국회의원이자 이후 장관으로서 활동하는 동시에, 개인 차량을 이용해 마드리드 전선의 여러 곳을 자주 방문했다. 그는 전투원들을 격려하고 식량과 필요 물품을 전달하는 등 적극적인 지원 활동을 펼쳤다. 또한, 1936년 7월과 8월에는 혼란 속에서 활동하던 혁명적 조직인 ''checases''로부터 많은 사람들을 구출하는 데 힘썼다. 그의 친구는 네그린이 "스스로 상당한 위험을 감수하면서... 마드리드의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고 증언하며 그의 개인적인 용기를 높이 평가했다. 이러한 활동 과정에서 네그린은 아나키스트들에게 목숨을 위협받기도 했으나, 재무부 경비대의 도움으로 위기를 넘겼다.

5. 2. 재무장관 임명

1936년 라르고 카바예로 내각 회의


1936년 9월, 후안 네그린은 라르고 카바예로 정부에서 재무부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당의 규율 때문에 이 직책을 수락했지만, 라르고 카바예로 총리가 공화국에 지나치게 급진적인 이미지를 부여하여 프랑스영국으로부터 절실히 필요한 지원을 얻기 어렵게 만드는 심각한 정치적, 외교적 실수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재무부 장관으로서 네그린은 2만 명 규모의 ''카라비네로스''(Carabineros, 세관 경비대)를 창설했다. 이 부대는 나중에 "네그린의 10만 아들"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게 되었는데, 이는 과거 프랑스의 생 루이의 10만 아들을 연상시키는 표현이었다. 카라비네로스는 아나키스트 성향의 전국노동연맹(CNT)이 장악하고 있던 프랑스와의 국경 초소를 통제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또한 네그린은 전쟁 수행에 필요한 무기와 장비를 확보하기 위해 스페인의 금 보유고를 소련으로 이전하는 중요한 결정을 내렸다(1936년 10월). 이 결정은 아사냐 대통령, 라르고 카바예로 총리, 그리고 프리에토를 포함한 다른 주요 장관들의 승인을 받았다. 당시 금 보유고의 가치는 5억달러에 달했으며(같은 해 7월에는 2.4억달러 상당의 금이 프랑스로 보내졌다), 이는 스페인 금 보유량 소련 이전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 조치는 공화국 정부가 이오시프 스탈린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되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5. 3. 스페인 금 보유고 이전



후안 네그린은 1936년 9월 라르고 카바예로 정부에서 재무부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재무부 장관으로서 2만 명 규모의 ''카라비네로스''(세관 경비대)를 창설했는데, 이는 아나키스트 성향의 전국노동연맹(CNT)이 장악하고 있던 프랑스 국경 초소를 통제하기 위한 조치였다. 이 부대는 나중에 "네그린의 10만 아들"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이는 생 루이의 10만 아들을 연상시키는 표현이다)

재무부 장관으로서 네그린은 전쟁 수행에 필요한 무기와 장비를 확보하기 위해 스페인 국립은행의 금 보유고를 소련으로 이전하는 논쟁적인 결정을 내렸다. 이 결정은 1936년 10월에 실행되었으며, 아사냐 대통령과 라르고 카바예로 총리, 그리고 프리에토를 포함한 다른 주요 장관들의 승인을 받았다. 당시 이전된 금의 가치는 약 5억달러에 달했으며, 이는 전쟁 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조치였다. (같은 해 7월에는 이미 2.4억달러 상당의 금이 프랑스로 보내진 바 있다.) 그러나 일부 비평가들은 이 결정으로 인해 스페인 제2공화국 정부가 이오시프 스탈린이 이끄는 소련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6. 스페인 총리 (1937-1939)

1937년 바르셀로나 5월 사건 이후 라르고 카바예로 총리가 사임하자, 마누엘 아사냐 대통령은 5월 17일 후안 네그린을 제135대 스페인 총리로 임명하여 후방의 혼란을 수습하고자 했다. 네그린은 "resistir es vencer|저항은 승리다es"라는 구호 아래 정력적인 통치를 펼치며, 침체된 공화파 후방에 희망을 불어넣고 스페인 공화국 무장군의 전력 회복을 도모했다.

6. 1. 총리 취임

1937년 바르셀로나 5월 사건스페인 내전 중 공화파 내부 파벌 간의 시가전으로 번졌다. 아나키스트와 공산주의자 병사들이 바르셀로나의 전략적 요충지를 두고 싸우면서 정치적 위기가 발생했고, 결국 라르고 카바예로 총리가 사임하게 되었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1937년 5월 17일, 마누엘 아사냐 대통령은 후방의 무질서를 종식시키기 위해 네그린을 제135대 스페인 총리로 임명했다. 네그린 정부의 주요 각료는 다음과 같다.

직책이름정당/성향
전쟁·해군·공군 장관인다레시오 프리토사회주의자
내무부 장관훌리안 수가사고이티아사회주의자
교육부 장관헤수스 에르난데스 토마스공산주의자
농업부 장관비센테 우리베공산주의자
외무부 장관호세 히랄공화파
공공사업부 장관베르나르도 히네르 데 로스 리오스공화파
법무부 장관마누엘 이루호바스크 민족주의자
노동부 장관자우메 아이과데르카탈루냐 민족주의자



네그린은 "저항은 승리다"(resistir es vencer|레시스티르 에스 벤세르es)라는 구호 아래 정력적이고 의지력 있는 통치를 펼쳤다. 이는 당시 침체되고 절망적인 분위기였던 후방에 희망과 열정을 불어넣었으며, 스페인 공화국 무장군의 약화된 전력을 회복시키는 데 기여했다.

6. 2. 내각 구성

1937년 바르셀로나 5월 사건스페인 내전 중 공화파 내부 파벌 간의 시가전으로 이어졌다. 이 사건은 아나키스트공산주의 성향의 공화군 병사들이 바르셀로나의 주요 거점을 장악하기 위해 싸우면서 발생했으며, 결국 라르고 카바예로 총리가 사임하는 정부 위기를 초래했다.

1937년 5월 17일, 마누엘 아사냐 대통령은 후방의 무질서와 혼란을 종식시키기 위해 후안 네그린을 제135대 스페인 총리로 임명했다. 네그린 정부의 주요 구성원은 다음과 같다.

직책이름정당/성향
전쟁, 해군 및 공군 장관인다레시오 프리토사회주의자
내무부 장관훌리안 수가사고이티아사회주의자
교육부 장관헤수스 에르난데스 토마스공산주의자
농업부 장관비센테 우리베공산주의자
외무부 장관호세 히랄공화파
공공사업부 장관베르나르도 히네르 데 로스 리오스공화파
법무부 장관마누엘 이루호바스크 민족주의자
노동부 장관자우메 아이과데르카탈루냐 민족주의자



네그린은 정력적이고 강한 의지를 바탕으로 통치했으며, 그의 캠페인 슬로건 "resistir es vencer|레시스티르 에스 벤세르es" (저항은 승리다)는 침체되고 절망적인 상황에 놓여 있던 후방에 희망과 열망을 불어넣었다. 또한 그의 리더십 아래 스페인 공화국군은 약화되었던 전력을 일부 회복할 수 있었다.

6. 3. 정책 목표

1937년 바르셀로나 5월 사건스페인 내전 중 공화파 내부 파벌 간의 시가전으로 이어졌고, 결국 라르고 카바예로 총리가 사임하는 정부 위기를 초래했다. 1937년 5월 17일, 마누엘 아사냐 대통령은 후방의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후안 네그린을 제135대 스페인 총리로 임명했다.

네그린 정부의 주요 구성원은 다음과 같다.

직책이름정당
전쟁, 해군 및 공군 장관인다레시오 프리토사회주의자
내무부 장관훌리안 수가사고이티아사회주의자
교육부 장관헤수스 에르난데스 토마스공산주의자
농업부 장관비센테 우리베공산주의자
외무부 장관호세 히랄공화파
공공사업부 장관베르나르도 히네르 데 로스 리오스공화파
법무부 장관마누엘 이루호바스크 민족주의자
노동부 장관자우메 아이과데르카탈루냐 민족주의자



네그린은 "resistir es venceres"라는 슬로건 아래 강력한 의지를 바탕으로 정부를 이끌었으며, 이는 침체되었던 후방에 희망을 불어넣고 스페인 공화국 무장군의 전력을 회복시키는 데 기여했다.

네그린의 주요 정책 목표는 다음과 같았다.


  • 중앙 정부 강화: 아라곤카탈루냐 등 아나키스트의 영향력이 강한 지역에서 진행되던 사회 혁명을 억제하고 중앙 정부의 통제력을 회복하고자 했다. 노동자와 농민들은 이 지역에서 토지와 산업을 집단화하고 독자적인 의회를 설립하는 등 공화국 정부와 별개의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 공화국군 재편 및 강화: 분열된 군대를 통합하고 효율적인 지휘 체계를 확립하여 군사력을 증강시키려 했다.
  • 법과 질서 확립: CNT와 같은 노동조합이나 각 정당이 운영하는 독립적인 민병대를 통제하고, 공화국이 점령한 지역 전체에 정부의 법치를 확립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 국제적 고립 탈피: 스페인 내전 불개입 위원회가 부과한 무기 금수 조치를 해제하여 국제 사회로부터 무기 및 지원을 확보하고자 노력했다.
  • 국제 중재 모색: 1938년부터는 전쟁을 평화적으로 종결시키기 위해 국제 사회의 중재를 얻으려 했다.
  • 가톨릭 교회 지위 정상화: 공화국 내에서 가톨릭교회의 지위를 안정시켜 사회 통합을 도모하고자 했다.


궁극적으로 네그린은 스페인 내전을 임박했다고 여겨진 제2차 세계 대전과 연결시켜 국제적인 지원을 얻어내려 했으나, 1938년 9월 30일 히틀러와 영국의 네빌 체임벌린 사이에 뮌헨 협정이 체결되면서 이러한 희망은 좌절되었다.

6. 4. 공산당과의 관계

후안 네그린은 PSOE 내에서 중도주의자로 평가받았지만, 당시 인민 전선 노선을 지지하던 스페인 공산당(PCE, Partido Comunista de España|파르티도 코무니스타 데 에스파냐es)과 관계를 유지했다. 이는 1937년 바르셀로나 5월 사건 이후 라르고 카바예로 총리가 사임하고 네그린이 총리로 임명된 상황과 관련이 깊다. 당시 스페인 공화국은 내부적으로 아나키스트 세력과의 갈등을 겪고 있었으며, 국제적인 무기 금수 조치로 인해 스탈린이 이끌던 소련의 무기 및 장비 지원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네그린 정부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 스페인 좌파의 아나키스트 분파를 통제하고 전쟁 수행 능력을 강화하기 위해 공산당과의 협력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공산당은 소련과의 외교 및 군사적 연결 통로 역할을 했으며, 이를 통해 정부는 전쟁 노력을 중앙에서 통제하고 정부의 권위를 회복하고자 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연합 민병대 형태의 아나키스트 민병대와 마르크스주의 통일 노동자당(POUM, Partido Obrero de Unificación Marxista|파르티도 오브레로 데 우니피카시온 마르크시스타es) 민병대는 정부의 통제하에 있는 정규군으로 통합되었다. 특히 트로츠키주의 성향의 POUM은 소련과 연계된 공산당에 의해 파시스트의 도구로 비난받으며 불법화되는 등 탄압을 받았다.

스페인 공화국이 소련의 지원에 의존하게 된 근본적인 이유는 스페인 내전에 부과된 불개입 협정 때문이었다. 이 협정으로 인해 민주적으로 선출된 공화국 정부는 국제 사회의 공개 시장에서 합법적으로 무기나 전쟁 물자를 구매할 수 없었으며, 이는 결과적으로 소련의 영향력을 증대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6. 5. 군사적 상황

1937년 11월 바르셀로나 외곽 공화국 전선을 방문한 마누엘 아사냐 대통령과 후안 네그린(가운데 밝은색 코트). 비센테 로호 루치와 호세 미아하 등 주요 군사 지도자들이 동행했다.


1937년 5월 후안 네그린이 총리로 임명된 후, 그는 "resistir es vencer|저항은 승리다es"라는 구호 아래 공화파의 사기를 높이고 군사력을 회복시키려 노력했다. 그러나 군사적 상황은 지속적으로 악화되었다.

1937년 한 해 동안 네그린 정부는 북부 전선에서 국민파의 공세를 막기 위해 여러 차례 공세를 감행했다. 6월에는 우에스카와 세고비아, 7월에는 부루네테, 8월에는 벨치테에서 공세를 펼쳤으나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결국 10월까지 국민파는 북부 지역 전체를 장악했다. 12월에는 테루엘을 탈환하기 위한 공세를 시작했지만, 이마저도 1938년 2월 공화군이 막대한 손실을 입고 후퇴하면서 실패했다.

국민파는 아라곤에서 반격을 개시하여 공화국이 점령하고 있던 지역을 둘로 갈라놓았다. 1938년 7월, 네그린은 분단된 공화국 지역을 다시 연결하기 위해 에브로 강 도하 작전을 명령했다. 공화군은 에브로 강을 건너는 데 성공했지만, 넉 달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11월 막대한 사상자를 내고 대부분의 군수 물자를 잃은 채 철수해야만 했다. 1939년 2월, 국민파의 카탈루냐 공세에 맞서 네그린은 에스트레마두라에서 반격을 명령했으나, 이 공세는 며칠 만에 중단되었고 결국 카탈루냐는 국민파에게 함락되었다.

네그린 정부 하에서 공화국의 군사적 상황이 지속적으로 악화된 데에는 여러 요인이 있었다. 국민파 장교 다수는 리프 전쟁 참전 경험이 있는 베테랑들로 구성되어 공화파에 비해 군사적 역량이 뛰어났다. 또한, 1938년부터는 독일이탈리아가 제공한 병력, 항공기, 포병 지원이 압도적으로 국민파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국제 정세 역시 공화국에 불리하게 돌아갔다. 1938년 뮌헨 협정은 영국과 프랑스 등 서방 민주주의 국가들과의 반파시스트 동맹 가능성에 대한 희망을 꺾어버렸고, 이는 공화파의 사기를 크게 저하시켰다. 계속되는 군사적 패배와 외부 원조 확보 실패는 후방의 물자 부족, 특히 식량난을 심화시켰다. 1938년 말 포위된 마드리드의 시민들은 하루 100g의 빵과 렌틸콩(당시 "네그린 박사의 알약"이라 불림) 배급에 의존하며 극심한 영양실조에 시달렸다.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 전쟁 피로감과 패배주의가 공화국 진영 내부에 만연하게 되었다.

6. 6. 국내 전선

1937년 바르셀로나 5월 사건스페인 내전 중 공화파 내부 파벌 간의 시가전으로 번졌다. 이 사건으로 아나키스트와 공산주의 계열 공화군 병사들이 바르셀로나의 주요 거점을 두고 다투면서, 당시 총리였던 라르고 카바예로가 사임하는 정부 위기가 발생했다. 1937년 5월 17일, 마누엘 아사냐 대통령은 후방의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후안 네그린을 제135대 스페인 총리로 임명했다.

네그린 정부의 주요 각료는 다음과 같다.

직책이름정당/성향
전쟁, 해군, 공군 장관인다레시오 프리토사회주의자
내무부 장관훌리안 수가사고이티아사회주의자
교육부 장관헤수스 에르난데스 토마스공산주의자
농업부 장관비센테 우리베공산주의자
외무부 장관호세 히랄공화파
공공사업부 장관베르나르도 히네르 데 로스 리오스공화파
법무부 장관마누엘 이루호바스크 민족주의자
노동부 장관자우메 아이과데르카탈루냐 민족주의자



네그린은 "resistir es vencer|저항은 승리다es"라는 슬로건 아래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하며, 침체되었던 후방에 희망을 불어넣고 스페인 공화국 무장군의 전력을 회복시키려 노력했다.

그러나 네그린 정부 하에서도 공화국의 군사 상황은 계속 악화되었다. 이는 반란군 측 장교들의 경험(리프 전쟁 참전 등)과 나치 독일이탈리아의 압도적인 군사 지원(병력 20%, 항공기, 포병 등) 때문이었다. 특히 1938년 뮌헨 협정은 서방 민주주의 국가들과의 반파시스트 동맹 가능성을 없애버리면서 공화파의 사기를 크게 꺾었다.

1938년 내내 계속된 군사적 패배와 외부 지원 확보 실패는 후방의 생활고를 심화시켰다. 특히 식량 부족 문제는 심각하여 공화파의 저항 의지에 큰 영향을 미쳤다. 1938년 말, 마드리드 포위전 당시 시민들은 극심한 영양실조에 시달렸으며, 하루 배급량은 빵 100g과 렌즈콩(일명 '네그린 박사의 알약')뿐이었다. 내통자들의 활동과 전쟁 피로감으로 인해 마드리드에는 패배주의가 널리 퍼졌다.

6. 7. 평화 협상 시도

1938년 5월, 네그린은 스페인의 절대적 독립, 양심의 자유 보장, 지역 자치권 보호, 보통 선거 실시, 모든 스페인인에 대한 사면, 농지 개혁 등을 포함하는 평화 협상안인 "Trece Puntos|13개 조항es"을 발표했다. 그러나 프랑코는 어떠한 평화 협상도 거부했다.

카탈루냐 공세로 카탈루냐가 함락되고 1939년 1월 26일 국민파 군대가 바르셀로나를 점령하기 직전, 네그린은 피게레스에서 열린 코르테스 회의에 참석했다. 그는 이 자리에서 승자의 생명을 존중하고 스페인 국민이 스스로 정부 형태를 결정할 국민 투표를 실시한다는 두 가지 조건만으로 항복할 것을 제안했다. 하지만 프랑코는 이 새로운 평화 제안 역시 거부했다.

1939년 2월 9일, 네그린은 스페인 공화국에 남은 영토(스페인 전체의 약 30%)인 중앙 지역으로 이동했다. 그의 목표는 유럽에서 전면적인 전쟁이 발발할 때까지 공화국 영토를 방어하고, 가장 위험에 처한 사람들의 대피를 조직하는 것이었다. 네그린은 프랑코가 어떤 평화 협상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저항 외에는 다른 선택지가 없다고 판단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싸우는 것 외에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기는 것이 불가능하더라도,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구제하고, 마지막에는 우리 스스로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왜 계속 저항해야 하는가? 간단히 말해서, 우리는 항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1938년은 PSOE 내 분열이 심화되고 네그린과 프리토 사이의 정치적, 개인적 우정이 깨진 해이기도 했다. 프리토는 패배주의적인 태도로 인해 국방부 장관직에서 해임되었고, 이후 라르고 카바예로 및 훌리안 베스테이로(PSOE 우파 지도자)와 함께 네그린 정부의 정책이 공산주의자들에게 유리하며 국제 중재에 반대한다고 비판했다. 네그린은 자신의 친구이자 측근인 후안 시메온 비다르테에게 자신의 어려운 입장을 설명했다.

이 끔찍한 노예 상태가 다른 누구보다 나에게 더 큰 고통을 주지 않는다고 생각하는가? 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다. 프랑스의 친구들에게 말하면, 모두 약속과 좋은 말뿐이다. 그러다가 불편함이 생기기 시작하고, 약속했던 것은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약속했던 것은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우리가 아무리 고통스러워하더라도, 유일한 현실은 소련의 도움을 받아들이거나 무조건 항복하는 것이다. (...) 내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협상된 평화는 항상, 50만 명의 스페인인이 총살당하는 무조건적인 항복은 결코.

6. 8. 카사도 쿠데타와 망명

바르셀로나가 함락된 후, 마누엘 아사냐 대통령은 프랑스로 피신하여 1939년 3월 3일 공화국 대통령직에서 물러났다. 세히스문도 카사도 대령은 훌리안 베스테이로, 호세 미아하 장군, 시프리아노 메라, 그리고 계속되는 싸움에 지쳐 희망이 없다고 판단한 아나키스트 지도자들과 함께 쿠데타를 계획했다. 더 나은 항복 조건을 얻기 위해, 그들은 1939년 3월 5일 마드리드에서 권력을 장악하고 국방 평의회(Consejo Nacional de Defensa)를 창설하여 네그린을 폐위시켰다. 다음 날인 3월 6일, 네그린은 프랑스로 망명했다. 스페인 공산당(PCE)이 이끄는 군대가 마드리드에서 이 쿠데타에 반발했지만, 시프리아노 메라가 이끄는 군대에 의해 패배했다. 네그린 정부에 대한 봉기는 약 2,000명의 희생을 치르고 성공했다. 국방 평의회는 민족주의자들과 평화 협정을 맺으려 했지만, 프랑코는 공화국의 무조건적인 항복만 받아들였다. 마침내 베스테이로를 제외한 국방 평의회의 모든 구성원이 도망쳤고, 1939년 3월 31일까지 민족주의자들은 스페인 영토 전체를 장악했다.

7. 망명 생활 및 사망

아사냐 대통령과는 달리 네그린은 공화국 전선이 최종적으로 붕괴하고 1939년 3월 실각할 때까지 스페인에 머물렀다. 이후 프랑스영국 등지에서 망명 생활을 시작했으며,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연합국을 지지하고 스페인 망명자들을 돕기 위한 활동을 펼쳤다. 그는 1945년까지 망명 중인 스페인 공화국 정부의 총리직을 유지했으나, 망명 정치 세력 내에서 실질적인 영향력은 크지 않았다.

한편, 스페인의 프랑코 정권은 네그린의 학문적 지위를 박탈하고 재산을 몰수했으며, 거액의 벌금과 장기 징역형을 선고하는 등 혹독한 탄압을 가했다. 이러한 탄압은 그의 가족에게까지 이어져 아버지가 수감 후 재산을 몰수당하고 빈곤 속에서 사망하는 비극을 겪기도 했다. 네그린은 망명 생활 중이던 1956년 11월 12일, 파리에서 심장 마비로 사망했다.[4]

7. 1. 망명 생활

후안 네그린 기념패, 파리 16구 앙리 마르탱 거리 78번지


아사냐 대통령과는 달리 네그린은 공화국 전선이 최종적으로 붕괴하고 1939년 3월 실각할 때까지 스페인에 머물렀다. 이후 망명길에 오른 그는 독일이탈리아에 맞서는 프랑스-영국의 전쟁 노력을 공개적으로 지지하기로 결정했다. 프랑스가 함락된 1940년 6월까지 파리에 머물다가 런던으로 이주했다. 그는 제2차 세계 대전 기간 내내 런던에 거주했으며, 많은 공화당 지도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유럽을 떠나 멕시코에서 안전한 피난처를 찾으라는 권유를 반복적으로 거부했다. 그는 공화국 망명자들을 돕기 위해 S.E.R.E.(Servicio de Evacuación de Refugiados Españoles|스페인 망명 난민 대피 서비스es)를 조직했다. 그는 1939년부터 1945년까지 망명 중인 스페인 공화국 정부의 총리직을 유지했지만, 실제로는 대부분의 망명 정치 세력들에게 인정받지 못했다.

한편, 스페인의 프랑코 정권은 네그린의 학문적 지위를 박탈하고 그의 재산을 몰수하는 등 탄압을 가했다. 1941년 7월에는 정치적 책임법 특별 법원에 의해 (페세타)라는 과도한 벌금을 선고받았고, 같은 해 9월에는 프리메이슨과 공산주의 억압 특별 법원에서 30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네그린은 프리메이슨공산주의자도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최고 형량이 선고된 것이다. 프랑코 정권의 탄압은 가족에게까지 미쳤다. 그의 아버지는 단지 네그린의 아버지라는 이유만으로 라스팔마스에 수감되었고, 1941년에 석방되었으나 불법적으로 모든 재산을 몰수당한 뒤 가난 속에서 곧 사망했다.

7. 2. 프랑코 정권과의 갈등



아사냐 대통령과는 달리 네그린은 공화국 전선의 최종 붕괴와 1939년 3월 실각할 때까지 스페인에 머물렀다. 네그린은 독일이탈리아에 대항하는 프랑스-영국의 전쟁 노력을 공개적으로 지원하기로 결정하고, 프랑스가 함락된 1940년 6월까지 파리에 머물다가 런던으로 이주했다. 그는 제2차 세계 대전 기간 동안 런던에 거주하며, 많은 공화파 지도자들처럼 유럽을 떠나 멕시코에서 안전한 피난처를 찾으라는 권유를 거듭 거부했다. 네그린은 공화국 망명자들을 돕기 위해 S.E.R.E.(Servicio de Evacuación de Refugiados Españoles|세르비시오 데 에바쿠아시온 데 레푸히아도스 에스파뇰레스es, 스페인 망명 난민 대피 서비스)를 조직했다. 그는 1939년부터 1945년까지 망명 중인 스페인 공화국 정부의 총리로 활동했지만, 대부분의 망명 정치 세력들에게는 인정받지 못했다.

한편, 프랑코 정권은 네그린에 대한 탄압을 가했다. 그의 학문적 지위를 박탈하고 재산을 몰수했다. 1941년 7월, 정치적 책임법 특별 법원은 네그린에게 이라는 과도한 벌금을 선고했고, 같은 해 9월에는 프리메이슨공산주의 억압 특별 법원에서 네그린이 프리메이슨도 공산주의자도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최대 형량인 30년의 징역형을 선고했다. 그의 아버지는 아들이라는 이유만으로 라스팔마스에 수감되었고, 1941년에 석방되었으나 모든 재산을 불법적으로 몰수당한 뒤 가난 속에서 곧 사망하는 비극을 겪었다.

7. 3. 망명 공동체와의 불화



아사냐 대통령과는 달리 네그린은 공화국 전선의 최종 붕괴와 1939년 3월 실각할 때까지 스페인에 머물렀다. 이후 프랑스로 망명하여 제2차 세계 대전독일이탈리아에 대항하는 프랑스-영국의 전쟁 노력을 공개적으로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1940년 6월 프랑스가 함락되자 런던으로 이동하여 전쟁 기간 내내 그곳에 머물렀다. 많은 공화당 지도자들이 유럽을 떠나 멕시코에서 안전한 피난처를 찾았지만, 네그린은 이러한 권유를 반복적으로 거부했다. 그는 공화국 망명자들을 돕기 위해 S.E.R.E.(Servicio de Evacuación de Refugiados Españoles|세르비시오 데 에바쿠아시온 데 레푸히아도스 에스파뇰레스spa, 스페인 망명 난민 대피 서비스)를 조직했다. 1939년부터 1945년까지 망명 중인 스페인 공화국 정부의 총리직을 유지했으나, 대부분의 망명 정치 세력들에게는 실질적인 영향력을 인정받지 못했다.

한편, 스페인의 프랑코 정권은 네그린에 대한 탄압을 가했다. 그의 학문적 지위를 박탈하고 재산을 몰수했으며, 1941년 7월에는 정치적 책임법 특별 법원에 의해 의 과도한 벌금을 선고받았다. 같은 해 9월에는 프리메이슨과 공산주의 억압 특별 법원에서 30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이는 네그린이 프리메이슨도 공산주의자도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내려진 최대 형량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단지 네그린의 아버지라는 이유만으로 라스 팔마스에 수감되었고, 1941년 석방되었으나 불법적으로 모든 재산을 몰수당한 후 가난 속에서 곧 사망했다.

1945년 8월, 추축국의 패배로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자 네그린은 프랑코 독재에 맞서 연합국 정부의 지지를 얻기 위해 망명 중인 모든 정치 세력의 만장일치된 지지를 바탕으로 단일 공화주의 전선을 구축하고자 했다. 그는 프랑코 정권이 국제 사회에서 불신받고 있으며, 전쟁 중 이탈리아와 독일을 지지했던 행위가 강한 반발을 사고 있다는 점을 이용하려 했다. 네그린은 이러한 단결된 전선만이 워싱턴과 런던에 내전 재발의 위험 없이 프랑코 정권을 대체할 수 있다는 확신을 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모든 망명 정치 세력의 지지를 얻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1945년 8월 멕시코에서 열린 망명 코르테스 전체 회의 전에 망명 공화국 정부 수반직에서 사임했다. 이후 PSOE는 1946년 4월 23일 ''엘 소시알리스타''에 공고를 내어 네그린과 다수의 당원들을 제명했다.

1948년, 네그린은 전후 마셜 플랜에 프랑코 정권 하의 스페인이 참여하는 것을 지지했지만, 이는 스페인 망명 공화국 정부의 반대에 부딪혔다. 네그린은 스페인에 대한 경제적 지원이 유럽 경제 회복에 필수적이며, 스페인을 배제하는 것은 스페인 국민의 고통만 가중시킬 뿐이라고 주장했다.[3] 그는 굶주림과 빈곤을 통해 공화국을 재건하려는 생각은 잘못된 희망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7. 4. 사망



스페인 내전 이후 망명 생활을 하던 네그린은 1956년 11월 12일, 파리에서 64세의 나이로 심장 마비로 사망했으며,[4] 페르 라셰즈 묘지에 묻혔다.[5]

네그린의 사망 후, 그의 아들 로물로 네그린은 아버지의 지시에 따라 소위 "네그린 자료"를 프랑코 정권 스페인 정부에 넘겼다. 이 자료는 소비에트 연방에 예치된 스페인 금의 관리에 관련된 불완전한 문서들로, 네그린은 이를 통해 금이 공화파의 전쟁 노력에 완전히 사용되었음을 증명하고자 했다. 네그린은 생전에 15년 넘게 망명 중인 공화파 정부에 이 서류들의 인도를 거부했었다. 아들이 자발적으로 프랑코 정권 당국에 문서를 넘겨준 것은 망명 공동체에 깊은 고통을 안겨주었다. 프랑코 정권 당국은 문서를 받았지만, 공화파가 모스크바의 금을 훔쳐 낭비했다는 자신들의 선전 내용을 유지하기 위해 그 내용을 공개적으로 함구했다.

8. 유산 및 평가

역사가 스탠리 G. 페인에 따르면, 스페인 내전 종식 후 네그린만큼 미움을 받은 인물은 없었다. 프랑코 측은 그를 "붉은 반역자"로 여겼고, 공화국 진영 내에서도 그의 옛 동료들은 그가 "쓸모없는" 전쟁을 연장하고 소련의 계획에 "봉사"했다며 비난했다. 그러나 그가 사망했을 당시 뉴욕 타임스 사설은 네그린을 다음과 같이 긍정적으로 평가했다.[6]

: 돈 후안 네그린의 모습이 역사 앞에 명확하게 드러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릴 것입니다. 그는 살아생전에 큰 열정을 불러일으켰고, 많은 원수와 헌신적인 친구들을 만들었습니다. 프랑코 정권은 네그린 박사를 "빨갱이"로 거짓 낙인 찍었습니다. 그는 결코 그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총리로서 네그린 박사는 공화국 스페인을 지원하거나 국제 연맹에서 그를 지지하는 유일한 국가인 러시아의 지원을 받아들였습니다. 그의 정부는 결코 공산주의자들에게 지배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후안 네그린이 지배하는 인민 전선이었습니다. 스페인 안팎의 많은 사람들에게 네그린 박사는 공화국 스페인과 파시즘에 맞서 용감하고 처절하게 싸운 스페인인들의 가장 훌륭한 점을 나타냈습니다. 그는 역사에 대해 두려워할 것이 전혀 없었습니다.

가브리엘 잭슨은 그의 전기에서 네그린을 "국가를 재앙으로부터 구하려는 실패한 시도로 자신의 건강, 명성, 학문적 경력을 희생한 근본적으로 정직하고 훌륭한 인간"이자, "정상적인 상황에서는 정치인이 될 필요가 전혀 없었을, 하물며 긴 역사의 가장 어려운 시기에 조국의 고삐를 잡았어야 할 코스모폴리탄 지식인이자 뛰어난 과학자"로 묘사하며 높이 평가했다. 잭슨은 네그린의 확고한 옹호자로서 "네그린은 인격을 갖춘, 희귀하게 준비된 정치인 중 한 명이었고, 그의 시대에 매우 가치 있었다"고 말했다.[7] 잭슨은 또한 네그린의 정책이 옳았다고 주장했다.[8]

: 네그린의 저항 정책과 끊임없는 외교적 노력은 올바른 것이었다. 그는 전쟁 중 프랑스가 다음 희생자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기 위해 여러 차례 비밀리에 파리를 방문했다. 나는 또한 영국과 프랑스가 공화국을 지원하고 히틀러에게 맞섰다면 역사가 다른 방향으로 흘렀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네그린은 스페인 내전에서 가장 논란이 많은 인물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스페인 역사가 앙헬 바아몬데 마그로와 하비에르 세르베라 길은 네그린이 "악마화되거나 칭찬받기도 한" 인물이며, "모스크바의 돈을 받고 있는 영구적인 공산주의 음모의 충실한 하인", "최종 승리에 대한 그의 믿음 때문에 공화주의 대의에 가장 충실한 정치인", 또는 "제2차 세계 대전의 불가피성을 예측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던 일종의 예언자" 등으로 다양하게 정의된다고 설명한다. 그의 저항 정책('저항은 승리한다', '저항하는 것이 이긴다')이 스페인 전쟁을 5개월 더 지속시켰다면 공화국의 승리로 이어졌을 것이라는 시각도 존재한다. 네그린은 2008년 스페인 사회노동당(PSOE)에 의해 사후 복권되었다.

2010년에는 시그프리드 몬레온, 이마놀 우리베, 카를로스 알바레스 페레즈가 감독한 스페인 다큐멘터리 영화, ''Ciudadano Negrín'' (시민 네그린)이 개봉되었다. 이 다큐멘터리는 손자녀 카르멘과 후안을 포함한 다양한 출처와 가브리엘 잭슨, 앙헬 비냐스와 같은 역사가들의 도움을 받아 후안 네그린의 삶을 재구성한다. 영화는 그의 글, 연설, 편지를 통해 네그린 자신의 목소리를 담아내려 했으며, 네그린이 망명 중에 직접 촬영한 홈 비디오 자료도 활용되었다.[9] 2013년, 네그린의 손녀 카르멘 네그린은 파괴를 피해 여러 차례 프랑스로 옮겨 보관했던 그의 원본 문서 15만 점을 기증했다. 이 유산은 1992년 그의 고향인 그란 카나리아 섬의 라스팔마스에 설립된 비영리 단체인 [https://www.fundacionjuannegrin.com/ 후안 네그린 재단]에서 관리하고 있다.[10]

참조

[1] 웹사이트 Relación cronológica de los presidentes del Consejo de Ministros y del Gobierno https://www.lamonclo[...] Gobierno de España - Presidencia del Gobierno 2023-01-18
[2] 뉴스 50 años de la muerte del energético defensor de la República https://elpais.com/d[...] El País 2006-11-12
[3] 뉴스 Le docteur Negrin se prononce pour la participation de l'Espagne franquiste au plan Marshall https://www.lemonde.[...] Le Monde 1948-04-02
[4] 뉴스 Dr. Juan Negrin of Loyalists Dies https://timesmachine[...] The New York Times 1956-11-15
[5] 웹사이트 Les Brigades Internationales et la guerre d’Espagne au cimetière du Père Lachaise http://acer-aver.com[...]
[6] 뉴스 Juan Negrin https://timesmachine[...] The New York Times (Editorial) 1956-11-15
[7] 뉴스 Hablando de Negrín con Gabriel Jackson http://www.cronicapo[...] Crónica Popular 2012-05-25
[8] 웹사이트 “Negrín was right.” An interview with Gabriel Jackson https://albavoluntee[...] 2010-08-31
[9] 웹사이트 Ciudadano Negrín https://mdc.ulpgc.es[...]
[10] 뉴스 End to exile for a key political archive https://english.elpa[...] El País 2013-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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