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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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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쿠류는 제2차 세계 대전 말기 일본 제국 해군이 개발한 특공 병기로, 잠수 장비를 착용하고 적 함선에 접근하여 자폭 공격을 감행하는 방식이었다. B-29 폭격기의 자기 기뢰 공격에 대응하기 위해 개발이 시작되었으나, 곧 특공 병기로 전환되어 본토 결전에 대비하여 훈련이 진행되었다. 그러나 기술적 결함, 비인도적인 운용 방식, 전략적 무가치함으로 인해 실전 투입 전에 종전을 맞이했다. 후쿠류는 1945년 8월 15일까지 1,000벌의 잠수복이 준비되었고, 훈련 중 사고와 미군기의 공습으로 많은 사망자가 발생했다. 현재 야스쿠니 신사, 이나무라가사키, 노비 해안 등에 관련 유적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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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류
개요
후쿠류 대원들
후쿠류 대원들
유형자살 공격 부대
역할침략 함선 공격
창설1945년
해체1945년 8월
국가일본 제국
훈련 및 장비
훈련일본 해군 기지
주로 규슈의 사세보 해군 기지
장비잠수복
수중 호흡 장치
5호 기뢰 (폭뢰)
죽창
상세 정보
목표상륙정 공격
연합군 함선 파괴
전술해저에서 적 함선 밑바닥에 기뢰 부착 후 자폭
훈련병 수약 6,000명
실전 투입투입되지 않음
생존자대다수 생존
관련 계획결7호 작전

2. 역사

후쿠류는 제2차 세계 대전 말기 일본 제국이 연합군의 일본 열도 침공에 대비하여 조직한 특공대의 일종이다. "웅크린 일본 용"을 의미하며, 영어권에서는 "자살 공격 잠수" 또는 "가미카제 수중 폭파대" 등으로 불렸다.[1]

1945년 3월 1일 '해군 돌격 부대 편성령'에 따라 편성되었으며,[12] 자세한 개발 배경, 훈련 과정, 실전 투입 여부는 하위 섹션에서 다룬다.

훈련 중 사망 사고가 빈번했고, 일부 지역에서는 유사한 전술을 사용한 공격 보고가 있었다. 스즈키 간타로 해군 대장조차 실용성에 부정적이었을 정도로,[5] 후쿠류는 당시 일본의 절박한 상황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2. 1. 개발 배경

1945년 초, B-29 폭격기가 투하한 자기 기뢰로 인해 일본 연안 항로가 위협받자, 일본 해군은 이를 소해하기 위한 잠수 장비 개발을 시작했다.[11] 해군 공작 학교의 교장 미하라 타이조 소장은 '세토 내해 항로 100m 항로 개척 대책'을 구체화하라는 지시를 받았다.[11]

그러나 1945년 3월 1일 '해군 돌격 부대 편성령'에 따라 이 잠수 장비는 특공 병기로 전용되게 된다.[12] 5월에는 소해 잠수구를 이용해 특공대를 편성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11] 요코스카 방비대에서는 사령관 이시카와 시게루 중장으로부터 '간이 잠수복을 사용한 특공 병기'를 포함한 연구, 양산, 양성이 명령되었다.[13] 4월의 간이 잠수기 실험에서는 '특공용으로 이용 가치가 크다'는 보고가 있었다.[12]

2. 2. 훈련 및 배치

1945년 6월부터 요코스카 대잠 학교에서 후쿠류 부대원 480명에 대한 훈련이 시작되었다.[5] 이후 잠수 훈련은 가나가와현 요코스카 진수부의 노비 해안, 히로시마현 구레 진수부의 조지마, 나가사키현 사세보 진수부의 가와타나 등에서 이루어졌으며, 총 3,000명 가까이 훈련을 받았다.[5]

후쿠류 부대는 진수부에 소속되었으며, 요코스카 5개 대대, 구레 2개 대대, 사세보 2개 대대, 마이즈루 1개 대대가 정비될 예정이었다. 제71아라시는 요코스카에 본부를 두고 2개 훈련 대대와 4개 훈련 대대를 두었다. 구레의 제81아라시는 요코스카에서 온 250명의 병력으로 1,000명의 병력을 훈련시키는 것을 목표로 했다. 비슷한 1,000명 규모의 가와타나 부대가 사세보에도 계획되었다.[2]

대원들은 각 진수부에서 모여든 인원들이었다. 교육 중단으로 본토 결전에 대비해 방공호를 파고 있던 10대 후반의 예과 연습생 출신과, 초전에 활약한 해군 육전대의 베테랑 병사도 투입되었다. 일반 병사들은 호흡 요령을 터득하지 못해 사고가 빈번했기 때문에, 항공기 탑승원으로서 신체 능력이 뛰어난 예과 연습생이 선발되었다고 한다.[5] 선발 조건에는 '고독을 견딜 수 있는 자'가 중요시되었고, 원래는 집안을 이어야 할 장남이 많이 선발되었다.[5] 지원제가 아닌 명령이었다.[5]

일본 제국 본토 침공 전에 일본이 항복했을 때 훈련을 받은 사람은 1,200명에 불과했다. 1945년 8월 15일까지 1,000벌의 잠수복이 준비되었고, 8,000벌이 더 주문되었다. 요코스카에는 450벌, 구레와 사세보에는 각각 60벌의 잠수복이 있었다. 계획된 10,000개의 5식 공격 기뢰는 완성되지 못했지만, 훈련용 모의 기뢰 400개가 생산되었다.[2] 훈련 중 오작동으로 인해 몇몇 사망자가 발생했다.[2] 1945년 6월 10일에는 쓰치우라 해군 항공대에서 훈련 중이던 훈련생과 교관이 미군기의 공습을 받아 그중 281명이 사망하기도 했다.

미군의 본토 상륙은 9~10월로 예상되었으며, 작전은 미군의 상륙 작전 정면으로 예상된 구주쿠리 해안 등을 상정하고 있었다. 부대 전개 시기는 10월 말로 목표하고 있었지만, 도중에 종전을 맞이했기 때문에 후쿠류가 실전에 투입되는 일은 없었다.

2. 3. 실전 투입

일본 제국이 항복하면서 후쿠류는 실전에 투입되지 않았다.[2] 미군의 본토 상륙이 예상보다 늦어져 부대 전개 시기를 10월 말로 목표하고 있었으나, 종전을 맞이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팔라우 제도 등 일부 지역에서는 자살 공격 잠수부에 의한 공격 보고가 있었다.

  • 1945년 1월 8일, 팔라우 제도 유 패서지에서 보병 상륙정 (포함) LCI(G)-404가 자살 잠수부에 의해 손상되었다.
  • 1945년 2월 10일, 팔라우 그룹 쇼니안 항에서 일부 일본 자살 잠수부들이 측량선을 공격하려 했다.


스즈키 간타로 해군 대장은 그 실용성에 부정적이었고, 실전 사용에 반대했다.[5]

3. 운용

후쿠류는 일본 특공대의 일종으로, 제2차 세계 대전일본 제국연합국의 일본 본토 침공에 대비하여 운용한 수중 특공대이다. 자살 공격 잠수 또는 가미카제 수중 폭파대라고도 불렸다.[1]

후쿠류 부대는 6명으로 구성된 분대 단위로 편성되었으며, 5개 분대가 1개 소대, 5개 소대와 정비 소대가 1개 중대, 3개 중대가 1개 대대를 이루어 총 540명 규모였다.[2] 요코스카에 본부를 둔 제71아라시는 2개 훈련 대대와 4개 작전 대대를, 구레의 제81아라시는 1,000명 규모의 병력을 훈련시키는 것을 목표로 했다. 사세보에도 비슷한 규모의 가와타나 부대가 계획되었다.[2]

후쿠류 대원들은 5m에서 7m 깊이에서 최대 10시간 동안 해저를 걸을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되었다.[2] 이들은 미리 해저에 설치된 밧줄을 따라 5명 1조로 이동하며, 적 상륙정이 접근하면 대나무 막대에 부착된 5식 공격 기뢰선체에 접촉시켜 폭파하는 방식으로 공격했다.[2]

연합국의 잠수부 방어 대책을 피하기 위해 기습 공격은 필수적이었다. 콘크리트 파이프와 강철 문으로 만들어진 수중 참호를 이용한 실험 결과, 인근 폭발의 영향을 줄일 수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6명에서 18명의 병력을 수용할 수 있는 더 큰 철근 콘크리트 구조물도 계획되었으며, 해안에서 제작 후 수심 15m 미만의 해저에 설치될 예정이었다.[2]

1945년 8월 15일까지 1,000벌의 잠수복이 준비되었고, 8,000벌이 추가 주문되었다. 요코스카에 450벌, 구레와 사세보에 각각 60벌이 있었다. 10,000개의 5식 공격 기뢰는 완성되지 못했지만, 훈련용 모의 기뢰 400개가 생산되었다.[2]

본토 결전에서 후쿠류는 가이텐, 신요 등과 함께 일본 해군의 주요 특공 전력 중 하나였다. 육군의 육박 공격에서 힌트를 얻었으며, 오키나와 전투에서 잉여 인력이 된 해군 비행 예과 연습생(예과련) 생도들을 활용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3. 1. 잠수 장비

후쿠류 대원은 고무 잠수복, 잠수 헬멧, 산소통, 흡수 캔, 납 밴드 등으로 구성된 잠수 장비를 착용했다. 잠수 헬멧은 4개의 볼트로 고정되었고, 9kg의 납으로 무게를 더했다. 액체 음식과 3.5L 산소통 2개를 갖춘 공기 정화 시스템으로 생존할 수 있었다.[2] 잠수 헬멧에는 유리창이 있었지만, 발 아래밖에 보이지 않아 시야가 매우 제한적이었고, 장비 전체 무게는 68kg에 달했다.

미국 해군 병력에 의한 후쿠류 슈트 스케치(1946)


잠수 캔은 후쿠류 장비의 가장 큰 결함이었다. 이것은 장시간 잠수를 가능하게 하기 위해 고안된 반순환식 산소 공급기였다. 호흡으로 발생하는 이산화탄소를 가성 소다를 이용한 흡수 캔으로 제거하고 다시 흡입하는 방식이었다. 흡수 캔은 잠수함용이 전용되었다. 실험에서는 5시간 잠수가 가능했고, 다른 잠수 장비와 달리 호흡(배기)으로 인한 기포가 발생하지 않는 장점이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3, 4번 호흡하면 탄산 가스 중독으로 실신하기 쉬웠다. 게다가 흡수 캔이 파열되거나 주름관이 벗겨져 호흡 회로에 해수가 들어가면, 흡수 캔 내의 수산화 나트륨(가성 소다)은 해수에 용해되어 큰 용해열 때문에 고온이 된 강알칼리성 해수가 잠수 헬멧 내로 분출되어 폐를 태우는 치명적인 결함이 있었다. 이 때문에 훈련 중 요코스카에서만 10명의 순직자가 발생했다.

3. 2. 무장

후쿠류의 주무기는 5식 공격 기뢰(봉뢰)였으며, 15kg의 폭약을 탑재한 성형 작약탄이었다.[2] 이 기뢰는 5m 길이의 대나무 막대 끝에 부착되었다.[2] 잠수부는 이 막대를 사용하여 머리 위로 지나가는 상륙정의 선체에 접촉시켜 신관식 폭약을 밀어 넣어 폭발시키는 방식이었다.[2] 기뢰가 폭발하면 발생하는 폭압으로 인해 잠수부는 거의 확실하게 사망할 수 있었다.[3]

해중에서는 시야가 나빠지고 움직임이 둔해져 상륙용 주정을 향해 이동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오식 격뢰는 긴 자루를 갖고 있었지만, 물의 저항 때문에 해중에서 자유롭게 휘두를 수 없었고, 초기 5m였던 길이는 2m로 짧아졌다.[5]

3. 3. 작전 방식

후쿠류 대원은 해저에 매설된 밧줄을 따라 이동하며, 5명 1조로 작전을 수행했다.[7] 해저에서 대기하다가 적 상륙정이 접근하면 대나무 막대에 부착된 5식 공격 기뢰를 이용하여 상륙정 선체에 접촉-신관식 폭약을 밀어 넣어 공격했다.[2]

수중 통신 수단은 제한적이었다. 훈련에서는 지도 및 구조용 작은 배에 생명줄을 연결하여 모스 부호로 육상과 간단히 연락했지만,[7] 실전에서는 육상과의 통신 수단이 없었다. 훈련 중에는 수신호나 접촉 대화를 사용했지만, 의사소통은 어려웠다.[7] 일단 해중에 전개하면 진지 변경은 거의 불가능했다.[7]

기뢰가 폭발하면 발생하는 폭압 때문에 대원 자신도 사망할 위험이 매우 컸고,[3] 유폭 가능성도 존재했다.[5]

4. 문제점 및 비판

후쿠류는 기술적 결함, 비인도적 운용, 전략적 무가치함 등 여러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기술적 결함 측면에서, 후쿠류 잠수 장비는 잦은 고장과 낮은 신뢰성으로 훈련 중 사망 사고가 빈번했다. 잠수 헬멧은 시야가 극도로 제한되었고,[4] 부력 조절 스위치는 정밀도가 낮아 잠수 시 해저로 추락하여 중상을 입거나 사망할 위험이 있었다. 잠수 캔은 가장 큰 결함으로, 흡수 캔 파열 또는 주름관이 벗겨져 해수가 유입되면 고온의 강알칼리성 해수가 헬멧 내로 분출되어 폐를 손상시켰다.[6]

무기로 사용된 오식 격뢰(봉뢰)는 성형 탄두 15kg을 사용했으나 위력이 부족하고 운용 방식이 비효율적이었다.[3] 물의 저항 때문에 해중에서 자유롭게 휘두르기 어려웠고, 상륙용 주정이 대원 바로 위를 지나가지 않으면 공격 기회조차 얻기 힘들었다.[5] 기뢰 폭발 시 폭압으로 인해 주변 대원들까지 피해를 보거나 유폭될 위험성도 컸다.[5]
비인도적 운용 측면에서, 후쿠류는 사실상 자살 공격이었으며, 대원의 생존 가능성은 거의 고려되지 않았다. 훈련 중에도 많은 사망자가 발생했으며, 오식 격뢰는 자돌 기뢰로, 적 주정이 대원 머리 위를 통과하지 않으면 효과가 없었고, 기뢰 폭발 시 대원은 거의 확실히 사망했다. 이는 당시 일본 군부의 인명 경시 사상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전략적 무가치 측면에서, 후쿠류는 미군의 압도적인 화력과 상륙 능력에 맞서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오식 격뢰는 물의 저항 때문에 해중에서 자유롭게 휘두를 수 없었고, 화약량(15kg)으로는 주정에 직격해야만 피해를 줄 수 있었다.[5] 부대 밀집도를 높이면 유폭 위험이 있었고,[5] 해중 폭발로 인한 강렬한 수압은 대원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주었다.[5]

4. 1. 기술적 결함

후쿠류 잠수 장비는 잦은 고장과 낮은 신뢰성으로 인해 훈련 중 사망 사고가 빈번하게 발생했다. 잠수 헬멧에는 유리창이 달려 있었지만, 발 아래밖에 보이지 않아 시야가 극도로 제한되어 작전 수행에 큰 어려움이 있었다.[4] 부력 조절 스위치의 정밀도가 낮아 잠수 시 실수로 스위치를 세게 누르면 장비 무게 때문에 해저로 추락하여 중상을 입거나 사망할 수 있었다.

잠수 캔은 후쿠류의 가장 큰 결함이었다. 호흡 중 발생하는 이산화탄소를 제거하기 위해 가성 소다를 사용했는데, 흡수 캔이 파열되거나 주름관이 벗겨져 해수가 유입되면 고온의 강알칼리성 해수가 헬멧 내로 분출되어 폐를 손상시키는 치명적인 문제가 있었다.[6] 이로 인해 훈련 중 요코스카에서만 10명의 순직자가 발생했다.[6]

무기로 사용된 오식 격뢰(일명 봉뢰)는 성형 탄두 15kg을 사용했으나, 위력이 부족하고 운용 방식이 비효율적이었다.[3] 긴 자루를 가졌음에도 물의 저항 때문에 해중에서 자유롭게 휘두르기 어려웠고, 상륙용 주정이 대원의 바로 위를 지나가지 않으면 공격 기회조차 얻기 힘들었다.[5] 또한, 기뢰 폭발 시 발생하는 폭압으로 인해 주변 대원들까지 피해를 입거나 유폭될 위험성이 컸다.[5]

4. 2. 비인도적 운용

후쿠류는 사실상 자살 공격이었으며, 대원의 생존 가능성은 거의 고려되지 않았다. 사용된 장비는 여러 결함을 가지고 있었고, 훈련 중에도 많은 사망자가 발생했다.

오식 격뢰(봉뢰)는 자돌 기뢰로, 적의 주정이 대원의 머리 위를 통과하지 않으면 효과가 없었고, 기뢰가 폭발하면 발생하는 폭압으로 대원은 거의 확실히 사망했다. 해중에서는 시야가 나쁘고 움직임이 둔해져 상륙용 주정으로 이동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오식 격뢰는 긴 자루를 가졌지만 물의 저항 때문에 자유롭게 휘두를 수 없었고, 길이는 5m에서 2m로 짧아졌다. 또한, 봉뢰의 폭약량(15kg)으로는 주정에 직격해야 피해를 줄 수 있었고, 대원 바로 위를 주정이 우연히 지나가야만 공격 기회가 주어졌다. 부대 전개 밀도를 높이면 봉뢰 폭발 시 주변 대원까지 휘말려 유폭할 위험이 있었다.

잠수 헬멧에는 부력 조절 스위치가 있었지만, 정밀도가 낮아 실수로 스위치를 세게 누르면 부력이 완전히 빠져 해저로 추락해 중상 또는 사망할 위험이 있었다. 잠수 캔은 후쿠류의 가장 큰 결함이었다. 흡수 캔은 장시간 잠수를 위해 고안되었지만, 실제로는 몇 번 호흡하면 탄산 가스 중독으로 실신하기 쉬웠다. 흡수 캔이 파열되거나 주름관이 벗겨져 해수가 들어가면, 흡수 캔 내의 가성 소다가 해수에 용해되어 고온의 강알칼리성 해수가 잠수 헬멧 내로 분출되어 폐를 태우는 치명적인 결함이 있었다.

해저를 걸어 이동하도록 설계되었기 때문에, 개별 대원은 수중에서 방향을 찾기 어려웠다. 작전 해면 해저에 밧줄을 설치하여 이동할 예정이었지만, 해안과의 거리는 밧줄 매듭 수로 측정해야 했다. 5명 1조로 행동할 때 선임자만 나침반을 소지했지만, 실전 투입 시 육상과의 통신 수단은 없었다. 훈련에서는 수신호나 접촉 대화를 했지만 의사소통은 어려웠다.

이는 당시 일본 군부의 인명 경시 사상과 비인간적인 전쟁 수행 방식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특히, 해군 비행 예과 연습생(예과련) 학생들을 "활용"하기 위해 고안된 병기라는 점에서 비판받아 마땅하다.

4. 3. 전략적 무가치

후쿠류는 미군의 압도적인 화력과 상륙 능력에 맞서기에는 역부족인, 전략적으로 무가치한 병기였다. 오식 격뢰는 긴 자루를 가지고 있었지만, 물의 저항 때문에 해중에서 자유롭게 휘두를 수 없었고, 화약량(15kg)으로는 주정에 직격해야만 피해를 줄 수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수 미터 떨어진 곳을 통과하는 주정은 공격할 수 없었고, 대원 바로 위를 주정이 우연히 지나가야만 공격 기회가 주어졌다.[5]

또한, 부대 밀집도를 높이면 오식 격뢰 폭발 시 발생하는 폭압으로 인해 주변 대원들까지 휘말려 연쇄적인 유폭을 일으킬 위험이 있었다.[5] 해중 폭발로 인한 강렬한 수압은 대원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주었기 때문에, 상륙 전 준비 포격이 부근 해중에 떨어지기만 해도 후쿠류 부대 대부분은 몰살될 가능성이 높았다.[5] 병사들을 대피시킬 콘크리트제 방어 갱도 계획은 있었으나, 종전 시까지 건설되지 못했다.

5. 전후 평가 및 유적

후쿠류는 실전에서 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종전을 맞이했기 때문에, 전후 평가는 대체로 부정적이다. 특공 병기라는 비인도적인 측면과 더불어, 기술적인 미성숙함과 비효율성으로 인해 무모한 시도였다는 비판이 많다.

야스쿠니 신사에는 특별 공격대 현창비와 함께 후쿠류 대원의 미니어처상이 전시되어 있으며,[5] 가나가와현 가마쿠라시 이나무라가사키와 요코스카시 노비 해안에는 관련 시설이 남아있다.[5]

5. 1. 유적

도쿄 구단시타의 야스쿠니 신사에는 특별 공격대 현창비가 있으며, 병설된 역사 박물관 유슈칸에는 기뢰를 장비한, 즉 공격 자세를 취한 후쿠류 대원의 미니어처상이 전시되어 있다.[5] 가나가와현 가마쿠라시 이나무라가사키에는 후쿠류 대기 진지가 남아있으나, 낙석 위험으로 출입이 금지되어 있다.[5] 가나가와현 요코스카시 노비 해안에는 제71아라시 부대 본부와 훈련장 관련 시설로 보이는 방공호와 토치카가 남아있다.[5] 강습 훈련생들은 페리 상륙 기념비 앞의 만에서 훈련을 실시했다.

6. 관련 작품


  • 쿠마가이 타츠야의 소설 『군청에 가라앉아 〜우리들의 특공〜』 (카도카와 쇼텐)
  • 오오츠키 켄지의 소설 『이매진 특공대』 (『로코! 생각대로』 수록) (카도카와 쇼텐)

참조

[1] 서적 Kamikaze: Japanese Special Attack Weapons 1944–45 https://archive.org/[...] Osprey Publishing
[2] 간행물 Underwater Guerrillas United States Naval Institute
[3] 서적 決定版 世界の秘密兵器FILE 学習研究社
[4] 웹사이트 第一編 特別攻撃隊の戦闘 第6章 待ちうける水中特攻隊 2.伏龍 https://tokkotai.or.[...] 公益財団法人 特攻隊戦没者慰霊顕彰会 2024-11-30
[5] 서적 TOKYO軍事遺跡 交通新聞社
[6] 웹사이트 水中特攻「伏龍」88歳の証言|戦跡 薄れる戦争の記憶 NHK| https://www3.nhk.or.[...] 2021-08-22
[7] 뉴스 【語り継ぐ戦争45】本土決戦、空飛べず海底へ:人間機雷「伏龍」の元特攻兵・片山惣次郎さん(88) 朝日新聞 2017-08-11
[8] 서적 海軍伏龍特攻隊 光人社NF文庫
[9] 서적 海軍伏龍特攻隊 光人社NF文庫
[10] 서적 海軍伏龍特攻隊 光人社NF文庫
[11] 서적 海軍伏龍特攻隊 光人社NF文庫
[12] 서적 海軍伏龍特攻隊 光人社NF文庫
[13] 서적 海軍伏龍特攻隊 光人社NF文庫
[14] 서적 Kamikaze: Japanese Special Attack Weapons 1944–45 Osprey Publishing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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