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세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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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흥세 전투는 244년 위나라와 촉나라 사이에서 벌어진 전투로, 위나라의 조상이 촉나라를 공격했으나 촉나라의 왕평이 흥세산에서 방어에 성공하여 위나라가 패배한 전투이다. 조상은 권력 강화를 위해 촉나라 정벌을 시도했으나, 사마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무리하게 공격을 감행했다. 촉나라는 지형을 이용하여 방어선을 구축했고, 위나라 군대는 보급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결국 위나라는 철수했고, 이 전투의 패배는 조상의 권력 약화와 사마의의 권력 장악에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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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세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 |
---|---|
전투 개요 | |
전투명 | 흥세 전투 |
일부 | 삼국 시대의 전쟁 |
시기 | 244년 4월 – 244년 7월 |
위치 | 흥세산 (섬서성 한중시 양현 북쪽) |
원인 | 불명 |
결과 | 촉한의 승리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조위 |
교전국 2 | 촉한 |
지휘관 | |
조위 지휘관 | 조상 하후현 |
촉한 지휘관 | 비의 왕평 |
병력 규모 | |
조위 병력 | 총 10만 명 이상 장안에서 출발한 주력군 6만 ~ 7만 명 |
촉한 병력 | 왕평과 유민 휘하 3만 명 미만 비의 휘하 병력은 알려지지 않음 |
피해 규모 | |
조위 피해 | 불명 |
촉한 피해 | 불명 |
2. 배경
한중은 촉한과 위나라 사이의 요충지로, 군사적, 지리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다. 한중에서 관중 평원으로 이어지는 주요 통로는 친링 산맥의 험준한 계곡에 있는 자오도(330km), 포사도(235km, 도로 상태 양호), 탕락도(210km, 도로 상태 불량, 물 부족)였다.
2. 1. 조상의 권력욕과 촉한 정벌 계획
239년 1월, 위나라 명제 조예가 붕어하자, 대장군 조상은 사마의와 함께 후계자인 조방을 보좌하게 되었다. 조상은 하안 등 신하들의 제안에 따라 권력을 독점하려 했지만, 사마의의 그간의 공적이 컸고 여전히 대촉한(對蜀漢) 최전선을 맡고 있었기에 군권을 빼앗을 수는 없었다. 241년에는 번성(樊城)을 구원하러 가서 오나라 군대를 철수시키는 등 실적을 올렸다[23](작파의 전투).243년 10월, 촉나라의 사령관이었던 장완은 북벌 계획을 위해 주둔하고 있던 한중에서 주력 군대를 철수시켜 부현에 주둔시켰다. 조상은 위 조정에서 강한 반대에 직면했음에도 불구하고, 특히 이때 촉의 지휘관 장완이 주력 부대를 한중에서 부현()으로 철수시켰을 때, 이 원정이 성공할 수 있다고 믿었다. 조상과 그의 측근들은 수적으로 우세한 그들의 군대가 촉의 증원군이 도착하기 전에 한중을 쉽게 정복할 수 있다고 결론지었다. 촉을 멸망시키지 못하더라도, 한중의 함락은 조상의 위 조정 내 명성과 영향력을 증가시키기에 충분할 것이었다.[4] 위나라의 조상은 촉한을 정벌할 절호의 기회라고 판단하여, 정밀, 등양, 이승 등의 진언에 따라 촉나라 토벌을 결의하고, 이승과 정서장군 하후현을 서쪽으로 파견하여 원정 준비를 시켰다. 그러나 사마의는 실패를 예견하고 강력하게 이를 간했다.
2. 2. 한중의 전략적 중요성과 지형
한중은 촉한과 위나라 사이의 요충지로, 군사적, 지리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다. 한중에서 관중 평원으로 이어지는 주요 통로는 친링 산맥의 험준한 계곡에 있는 자오도(330km), 포사도(235km, 도로 상태 양호), 탕락도(210km, 도로 상태 불량, 물 부족)였다.조상은 가장 짧은 탕락도를 선택했지만, 이는 심각한 전략적 실수였다. 탕락도는 도로 상태가 가장 열악했고, 물이 없는 구간이 길어 보급에 어려움을 겪었다. 짐을 싣는 동물과 징집병 대부분이 갈증으로 죽어 사기가 급락했고, 조상에 대한 불만은 군대와 위나라 본토에서 급격히 증가했다.
3. 전투
興勢之戰중국어는 244년 4월, 조상이 촉한을 공격하면서 시작되었다. 조상은 하후현을 정서장군으로, 곽회를 선봉장으로 임명하고 10만 대군을 이끌고 한중으로 진격했다. 당시 한중을 지키던 왕평의 군대는 3만 명에 불과했다.[6][7]
왕평은 험준한 지형을 이용해 적을 막는 전략을 세웠다. 유민에게 흥세산에 진지를 구축하고 100리가 넘는 거리에 깃발을 꽂아 군세가 많은 것처럼 보이게 했다.[10] 또한, 황금곡(흥세산 동쪽)에서 위군의 별동대를 막기 위해 군대를 이끌었다.[11]
244년 5월, 위군의 진격은 흥세산에서 저지되었다.[12] 위군은 보급 문제로 큰 어려움을 겪었다.[13] 촉한의 대장군 비의는 성도에서 증원군을 이끌고 한중으로 향했다.[14] 사마의는 하후현에게 편지를 보내 퇴각을 설득했고, 결국 조상은 철수 명령을 내렸다.[16]
곽회는 미리 군대를 철수시켜 큰 손실을 막았다.[17][18] 그러나 비의는 군대를 이끌고 위군을 측면 공격하여 퇴로를 차단하려 했다. 촉군은 낙곡(羅谷)의 세 능선, 심령(沈嶺), 아령(衙嶺), 분수령(分水嶺)에 방어선을 구축했다.[19] 조상의 군대는 곽회의 분전 덕분에 간신히 관중으로 도망칠 수 있었다.[20] 하지만 조상이 징발한 소와 말, 민간인들은 대부분 죽거나 잃었고, 관중 지역은 황폐해졌다.[21]
3. 1. 위군의 공격과 촉군의 방어
244년 4월, 조상은 하후현을 정서장군으로, 옹주자사 곽회를 선봉장으로 임명하고, 10만 대군을 이끌고 탕락도를 통해 한중으로 진격했다. 이때 왕평은 한중 방어를 맡았으나, 그의 군대는 3만 명 미만으로 수적으로 매우 열세였다.[6][7]몇몇 촉 지휘관들은 한성(현재 면현 동쪽)과 낙성(현재 성고현 동쪽)을 중심으로 방어할 것을 제안했으나,[8] 왕평은 증원군이 멀리 떨어져 있고, 적이 양평관(현재 면현 산시성 무후진 서쪽)을 통과하게 되면 큰 위협이 될 것이라 판단하여 이 제안을 거부했다. 그는 험준한 지형을 이용해 적을 막는 전략을 선택했다.[9]
왕평은 유민에게 흥세산에 진지를 구축하고 100리가 넘는 거리에 깃발을 꽂아 군세가 많은 것처럼 보이게 했다.[10] 또한, 왕평은 황금곡(흥세산 동쪽)에서 위군의 별동대를 막기 위해 군대를 이끌었다.[11]
왕평의 예측대로, 244년 5월 위군의 진격은 흥세산에서 저지되었다.[12] 위군은 보급선이 길어져 물자 부족에 시달렸고, 운송에 동원된 동물들도 거의 모두 죽는 등 큰 어려움을 겪었다.[13]
3. 2. 비의의 증원과 위군의 퇴각
촉한의 대장군 비의는 성도에서 증원군을 이끌고 한중으로 향하고 있었다.[14] 위나라 참모 양위는 조상에게 즉시 퇴각할 것을 건의했으나, 등양은 반대했다. 양위는 등양과 이승이 수십만 명의 생명과 국가의 운명을 무시하고 있다고 분노하며 그들을 처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5] 사마의는 하후현에게 편지를 보내 위험을 알리고, 조조가 유비와 한중을 놓고 싸울 때 거의 전멸할 뻔했던 것을 언급하며 퇴각을 설득했다. 하후현은 사마의의 편지를 읽고 조상에게 철수 명령을 내리도록 설득했고, 조상은 마지못해 따랐다.[16]곽회는 상황의 위험을 깨닫고 미리 군대를 철수시켜 큰 손실을 막았고, 이 공로로 위나라 정부로부터 황제의 권위를 받았다.[17][18] 그러나 비의는 군대를 이끌고 위군을 측면 공격하여 퇴로를 차단하려 했다. 촉군은 낙곡(羅谷)의 세 능선, 심령(沈嶺), 아령(衙嶺), 분수령(分水嶺)에 방어선을 구축했다.[19] 조상의 군대는 필사적인 전투를 벌였고, 곽회의 분전 덕분에 간신히 관중으로 도망칠 수 있었다.[20] 하지만 조상이 징발한 소와 말, 민간인들은 대부분 죽거나 잃었고, 북부 민족들은 조상을 원망했으며, 관중 지역은 황폐해졌다.[21]
4. 결과
촉한은 이 전투에서 승리하여 위나라의 침공을 막아냈다. 비의는 승리의 공로로 성향후에 봉해졌으며, 244년 7월까지 한중에 머무른 후 성도로 귀환했다.[1] 왕평은 이 전투에서 큰 활약을 펼쳐 등지, 마충과 함께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2]
조상은 위신과 명성이 크게 떨어져 사마의와의 권력 투쟁에서 불리한 위치에 놓이게 되었다.[2] 이는 사마의가 권력을 장악하는 데 영향을 주었다.[2] 위나라는 이 전투에서의 패배 이후 20년 동안 촉을 공격하지 못하고, 훗날 촉 정벌을 다시 시도하게 된다.[1]
또한 위는 강족으로부터 물자와 우마를 징발하여 그 대부분을 잃게 되자, 강족의 원한을 샀다.[3] 이는 훗날 247년 양주 사군에 걸쳐 대규모 반란을 야기하는 원인이 되었다.[3]
4. 1. 촉한의 승리와 위나라의 패배
비의는 승리의 공로로 성향후에 봉해졌으며, 244년 7월까지 한중에 머무른 후 성도로 귀환했다.[1] 이 전투의 활약으로 왕평의 명성은 크게 높아져, 등지, 마충과 함께 "북쪽의 왕평", "동쪽의 등지", "남쪽의 마충"으로 불리며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었다.[2]반면, 조상은 위신과 명성이 크게 떨어져 사마의와의 권력 투쟁에서 큰 타격을 입었다.[2] 이는 결과적으로 사마의가 권력을 장악하는 원인이 되었다.[2] 이 패배 이후, 위나라는 20년을 기다려 또 다른 촉 정벌을 감행하게 된다.[1]
또한 강족으로부터 물자와 우마를 징발하여 그 대부분을 잃게 되자, 강족의 원한을 샀고, 247년에는 양주 사군에 걸쳐 대규모 반란이 일어났다.[3]
4. 2. 민족 갈등 심화
위는 강족, 저족 등 북방 민족을 동원하고 막대한 피해를 입혀 민족 갈등이 심화되었다.[3] 247년, 양주 사군에서 대규모 반란이 일어났다.[3]5. 분석
유백온은 저서 《백전기략》에서 흥세 전투를 "퇴각전"의 전형으로 평가했다. 촉한은 지리적 이점과 왕평, 유민 등의 뛰어난 지휘관을 활용하여 승리했다. 반면 위군은 조상의 무리한 공격과 보급 문제로 패배했다.
흥세 전투의 패배는 조상의 위신을 크게 떨어뜨려 사마의와의 권력 투쟁에서 불리한 위치에 놓이게 했다. 또한, 강족의 물자를 징발하고 잃으면서 강족의 원한을 사, 247년 양주 사군에 걸쳐 대규모 반란을 초래했다.[1]
5. 1. 군사 전략적 분석
유백온은 그의 저서 《백전기략》(百戰奇略)에서 흥세 전투를 "퇴각전"(退戰)의 전형적인 사례로 분류했다. 이는 적이 유리한 지형을 점하고 있고, 싸움을 계속하기 어려울 때, 신속한 퇴각이 유일한 선택임을 의미한다.촉한은 지리적 이점과 뛰어난 지휘관을 활용하여 열세에도 불구하고 승리했다. 왕평은 과감하게 군대를 흥세산에 배치하고, 유민과 두기에게 수많은 깃발을 세워 군세가 많은 것처럼 보이게 했다. 보급 문제와 촉군의 원군 도착으로 인해 위군은 불리한 상황에 놓였다.
반면, 조상은 무리하게 공격을 감행하고 보급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여 패배했다. 양위는 철수를 건의했지만, 등양과 이승 등은 계속 공격할 것을 주장했다. 결국 조상은 철수를 결정했지만, 촉군의 공격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5. 2. 정치적, 사회적 영향
조상은 흥세 전투의 패배로 위신과 명성이 크게 떨어졌고, 사마의와의 권력 투쟁에서 불리한 위치에 놓이게 되었다. 이는 결국 사마의가 권력을 장악하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1]또한, 조상이 강족으로부터 물자와 우마를 징발하고 그 대부분을 잃으면서 강족의 원한을 샀다. 247년에는 양주 사군에 걸쳐 강족의 대규모 반란이 일어났다.[1]
6. 전투 서열
6. 1. 위군
6. 2. 촉군
참조
[1]
서적
Sanguozhi vol. 43
[2]
서적
Sanguozhi vol. 9
[3]
서적
Sanguozhi vol. 43
[4]
서적
Sanguozhi vol. 9
[5]
서적
Sanguozhi vol. 44
[6]
서적
Sanguozhi vol. 9
[7]
서적
Sanguozhi vol. 43
[8]
서적
Sanguozhi vol. 43
[9]
서적
Sanguozhi vol. 43
[10]
서적
Sanguozhi vol. 44
[11]
서적
Sanguozhi vol. 43
[12]
서적
Sanguozhi vol. 9
[13]
서적
Sanguozhi vol. 9
[14]
서적
Sanguozhi vol. 44
[15]
서적
Sanguozhi vol. 9
[16]
서적
Han Jin Chunqiu annotation in Sanguozhi vol. 9
[17]
서적
Sanguozhi vol. 26
[18]
서적
Sanguozhi vol. 26
[19]
서적
Han Jin Chunqiu annotation in Sanguozhi vol. 9
[20]
서적
Han Jin Chunqiu annotation in Sanguozhi vol. 9
[21]
서적
Han Jin Chunqiu annotation in Sanguozhi vol. 9
[22]
서적
Sanguozhi vol. 9
[23]
문서
呉の皇太子の死に伴う全面撤退説もあ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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