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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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곽회는 위나라의 무장으로, 건안 연간에 효렴으로 천거되어 조조를 섬기며 병조의령사로 활동했다. 219년 정군산 전투에서 하후연 사후 장합을 옹립하여 유비군을 방어했고, 조비가 즉위한 후 관내후에 봉해져 조진 휘하에서 서북 지역의 정감과 노수호 토벌에 참여했다. 옹주 자사를 거쳐 228년 제갈량의 북벌을 막아냈으며, 이후 강유의 침공을 막고 강족 반란을 평정하는 등 서북 지역 방어에 크게 기여했다. 최종적으로 거기장군, 의동삼사에 이르렀으며, 255년에 사망하여 대장군으로 추증되었다.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제갈량의 북벌에 맞서는 인물로 묘사되며, 강유와의 전투에서 사망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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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회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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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곽회 |
원어 이름 | 郭淮 |
자(字) | 백제(伯濟) |
시호 | 정후(貞侯) |
작위 | 양곡후(陽曲侯) |
생애 | |
출생지 | 병주태원군양곡현 |
사망일 | 255년 2월 23일 |
사인 | 병사 (노환) |
관직 및 경력 | |
초기 관직 | 평원부승 |
주요 경력 | 문하적조 승상병조의령사 정서장군사마 진서장군장사 |
지방관 | 옹주자사 |
군사 | 겸 건위장군 양무장군 좌장군 (240년) 전장군 (240년 ~ 249년) 정서장군 (249년 ~ 250년 6월 또는 7월) 거기장군 (250년 6월 또는 7월 ~ 255년 2월 23일) |
사후 | 대장군 (추증) |
가계 | |
아버지 | 곽윤 |
형제 | 곽배 곽진 곽량 |
친척 | 곽회 (조카딸) |
배우자 | 왕릉의 여동생 |
자녀 | 곽통 4명 이상의 아들 |
기타 | |
주요 활동 | 약 40년 동안 관서 방위, 도독옹양주제군사 |
적수 | 강유 |
2. 생애
태원군 양곡현(지금의 산시성 양취안현 남서쪽) 출신으로, 후한 시대에 대사농과 태수를 지낸 곽권(郭全)과 곽운(郭縕)을 각각 조부와 부친으로 두었다.[2] 곽회는 헌제의 건안 연간(196~220) 중반에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4] 효렴으로 천거되었고, 이후 평원군의 속관으로 임명되었다.[4]
2. 1. 조조 섬김
건안 연간에 효렴으로 천거되었고 평원부승(平原府丞)을 지냈다. 이후 오관중랑장(五官中郞將) 조비가 기용해 그 밑에서 문하적조(門下賊曹)로 일하다가 승상 조조의 병조의령사(兵曹議令史)로 전임되었다.[60] 215년, 조조의 한중군 정벌에 종군하였고,[7] 한중에 남아 정서장군(征西將軍) 하후연의 사마(司馬)로 근무하였다.[8]219년, 질병으로 인해 출전하지 못한 사이 하후연이 촉장 황충에게[82] 해를 당해 군중이 뒤숭숭하였다. 곽회는 흩어진 병사들을 수습하고 탕구장군(盪寇將軍) 장합을 총대장으로 추대하니 각 부대가 안정되었다.[10] 다음 날, 유비가 한수를 건너려 하였다. 장수들은 중과부적에 유비군이 기세를 타고 있으므로 강을 따라 진을 짜자고 하였다.[11] 곽회는 “이는 약한 꼴을 보여 적을 꺾기 어렵게 합니다. 물에서 떨어진 채 진을 쳐 유비군을 유인하는 것만 못합니다. 반쯤 건넜을 때 습격하면 격파할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12] 유비는 의심하여 넘어오지 않았으며 곽회는 굳게 지킬 뿐 귀향할 마음이 없음을 표시하였다.[13] 조조가 훌륭히 여겨 장합에겐 가절(假節)을 수여하고 곽회는 그 사마로서 계속 종사하게 하였다.[14]
220년(연강 원년), 조비가 조조의 왕위를 계승하였다. 곽회는 관내후(關內侯)를 받고 진서장사(鎭西長史)로서 조진에[83] 소속되었다. 정강호군(征羌護軍)을 대행해 좌장군 장합과 관군장군(冠軍將軍) 양추를 도와 정감(鄭甘)과 노수호(盧水胡) 토벌에 기여하였다.[63] 조비의 위나라 황제 즉위를 경하하러 갔을 때는 도중에 병이 걸려 늦고 말았다. 조비가 정색하고 꾸짖기를, “옛날 우임금이 도산(塗山)에 제후들을 모이게 했을 적에 방풍씨(防風氏)가 늦게 와 처형하였소. 지금 온 천하가 같이 기뻐하는데[溥天同慶, 普天同慶, 보천동경] 경은 가장 지체하였소. 어째서인가?”라고 하였다. 곽회는 “신이 듣건대 오제 시절엔 원래 덕으로써 사람들을 이끌었으나 하후(夏后)에선 정치가 쇠미해져 비로소 형벽(刑辟)을 썼다고 합니다. 지금은 당우시대(요순시대)가 도래했으니 신은 방풍씨의 일을 면할 줄로 압니다.”라고 하였다.[64] 조비는 기뻐하며 영옹주자사(領雍州刺史)로 발탁하고 사양정후(射陽亭侯)에 봉하였다.
2. 2. 조비 섬김
220년(연강 원년), 조비가 조조의 왕위를 계승하였다. 곽회는 관내후 작위를 받고 진서장사(鎭西長史)로서 조진에[83] 소속되었다. 정강호군(征羌護軍)을 대행해 좌장군 장합과 관군장군(冠軍將軍) 양추를 도와 정감(鄭甘)과 노수호(盧水胡) 토벌에 기여하였다.[16][17][63] 조비가 위나라 황제로 즉위함을 경하하러 갔을 때는 도중에 병이 걸려 늦었다.[18] 조비가 정색하고 꾸짖기를, “옛날 우임금이 도산(塗山)에 제후들을 모이게 했을 적에 방풍씨(防風氏)가 늦게 와 처형되었소. 지금 온 천하가 같이 기뻐하는데[溥天同慶, 普天同慶, 보천동경] 경은 가장 늦었소. 어째서인가?”라 하였다.[19] 곽회가 답하길, “신이 듣건대 오제 시절엔 원래 덕으로써 사람들을 이끌었으나 하후(夏后)에선 정치가 쇠미해져 비로소 형벌을 썼다고 합니다. 지금은 당우시대(요순시대)가 도래했으니 신은 방풍씨의 일을 면할 줄로 압니다.”라 하였다.[20] 조비는 이 대답에 기뻐하며 그를 영옹주자사(領雍州刺史)로 발탁하고 사양정후(射陽亭侯)에 봉하였다. 224년(황초 5년), 정식 옹주자사에 올랐다.[21]2. 3. 조예 섬김과 제갈량 방어
220년(연강 원년), 조비가 조조의 왕위를 계승하였다. 곽회는 관내후를 받고 진서장사(鎭西長史)로서 조진에[83] 소속되었다. 정강호군(征羌護軍)을 대행해 좌장군 장합과 관군장군(冠軍將軍) 양추를 도와 정감(鄭甘)과 노수호(盧水胡) 토벌에 기여하였다. 조비의 위나라 황제 즉위를 축하하러 갔을 때는 도중에 병이 걸려 늦었다. 조비가 정색하고 꾸짖기를, “옛날 우임금이 도산(塗山)에 제후들을 모이게 했을 적에 방풍씨(防風氏)가 늦게 와 처형하였소. 지금 온 천하가 같이 기뻐하는데[보천동경(溥天同慶)] 경은 가장 지체하였소. 어째서인가?”라 하였다. 곽회가 답하길, “신이 듣건대 오제 시절엔 원래 덕으로써 사람들을 이끌었으나 하후(夏后)에선 정치가 쇠미해져 비로소 형벽(刑辟)을 썼다고 합니다. 지금은 당우시대(요순시대)가 도래했으니 신은 방풍씨의 일을 면할 줄로 압니다.”라 하였다. 조비가 기뻐하며 영옹주자사(領雍州刺史)로 발탁하고 사양정후(射陽亭侯)에 봉하였다. 224년(황초 5년), 정식 옹주자사에 올랐다.[64]안정군 일대에서 반항하던 강인(羌人) 두령 벽제(辟蹏)를 공격하여 항복시켰다. 강인과 호인(胡人)들이 귀부해올 때마다 인구 등 각종 정보를 치밀하게 수집하여 그 속사정까지 낱낱이 알았다. 다들 곽회가 신명하다고 칭찬하였다. 228년(태화 2년), 촉상 제갈량이 기산(祁山)으로 쳐들어왔다. 천수군을 순찰하고 있던 곽회는 급히 상규현(上邽縣)으로 달려갔다.[84] 제갈량이 마속을 가정(街亭)에, 고상을 열류성(列柳城)에 배치하였다. 장합이 마속을, 곽회가 고상을 물리쳤다. 또한 농서군의 유명 강인 당제(唐蹏)를 부한현(枹罕縣)[85]에서 무찔러 옹주자사에 건위장군(建威將軍)을 더하였다.[65]
229년, 촉장 진식이 무도군과 음평군을 공략하였다. 응전하려 했으나 제갈량까지 건위(建威)로 오기에 물러났다.[86] 230년, 촉장 위연과 오의가 강족이 있는 남안군께로 들어왔다.[87] 후장군 비요와 함께 양계(陽谿)에서 맞붙었다가 패하였다.[88] 231년, 제갈량이 또 노성(鹵城) 방면으로 침입해 상규에서 사마의를 요격하려 하였다. 곽회가 비요와 함께 막아섰다가 패퇴하였다.[89] 당시 농우(隴右)엔 곡식이 없어 관중으로부터의 대량 수송 얘기마저 나올 정도였다. 곽회가 강인과 호인들을 위엄과 은혜로 어루만져 곡식을 조달받으니 군량이 충족해졌다. 양무장군(揚武將軍)으로 옮겼다.[69]
234년(청룡 2년), 제갈량이 제5차 북벌을 일으켜 야곡(斜谷)을 나와 둔전을 운영하였다. 사마의도 위수 남쪽에서 대치하였다. 곽회가 진언하기를, ‘제갈량이 반드시 북원(北原)을 쟁탈하려 할 것이므로 마땅히 선점해야 한다’고 하였다. 많은 이들이 그렇지 않다고 하자 ‘만약 제갈량이 위수 건너 북원에 오른 후 북쪽의 산까지 아우른다면 농(隴)으로 가는 길이 끊어져 백성과 이민족들이 동요할 것’이라 예견하였다. 사마의가 옳다 여겨 곽회로 하여금 북원을 방비하게 하였다. 해자와 보루가 채 완비되기 전에 촉의 대병이 닥쳐와 곽회가 역격하였다. 며칠 후 제갈량군이 서쪽으로 움직였다. 다수가 서쪽 진영을 칠 모양이라고 하니 곽회 혼자 이는 서쪽으로 관심을 쏠리게 후 양수(陽遂)를 공취할 심산이라고 내다보았다. 과연 그날 밤에 제갈량이 양수로 전진했는데 미리 대비하고 있던 호준과 곽회가 적석(積石)에서 싸워 몰아냈다.[90]
2. 4. 제갈량 사후의 분쟁
238년(경초 2년), 수선강후(守善羌侯) 탕심(宕蕈)이 촉의 음평태수 요화에게 공격당했다. 곽회는 광위태수 왕윤(王贇) 및 남안태수 유혁(游奕)에게 요화 토벌을 지시하였다. 얼마 뒤 조예에게 상서하여 ‘왕윤과 유혁 등이 산을 사이에 두고 동서로 갈라져 압박하고 있으며 곧 완파할 것 같다’고 하였다. 조예는 병력이 너무 분산되었다며 곽회에게 유혁에게 요충지에 있지 않은 병영은 더 좋은 곳으로 옮기라고 전하게 하였다. 그러나 조서가 미처 도달하기 전에 유혁군은 패배하고 왕윤은 유시(流矢)에 맞아 사망하였다.[91]240년(정시 원년), 촉장 강유가 농서군을 침범하자 곽회는 강중(彊中)[92]까지 추격했다. 강유가 철수하자 강인 미당 등을 토벌하고 저인 부락 3,000여 가를 안무하여 관중으로 이주시켰다. 이후 좌장군이 되었다.
양주의 휴저호(休屠胡)인 양원벽(梁元碧) 등이 2,000여 가를 이끌고 옹주로 귀부하였다. 곽회는 이들을 안정군 고평현(高平縣)의 주민으로 받아들일 것을 주청하였다. 그 후 이로 인해 서주도위(西州都尉) 혹은 서천도위(西川都尉)가 설치되었다. 이후 전장군에 임명되었으며 옹주자사직은 그대로 유지하였다.
244년, 정서장군이자 도독옹양주제군사(都督雍涼州諸軍事)인 하후현이[93] 촉나라 정벌을 개시했을 때, 곽회가 선두를 담당했다. 그러나 형세가 불리함을 파악하고 철수하여 대패를 면했으며, 돌아와 가절(假節)을 받았다.
247년부터 248년까지, 농서·남안·금성·서평의 강족 수장들이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다. 강유는 아차새·치무대 등 강족과 연합하여 위나라를 침공했다. 강유가 위시에 주둔하던 하후패를 공격하려 하자, 곽회가 이를 알고 구원하여 강유는 즉시 철수했다. 이후 곽회는 여러 군대를 이끌고 강족을 격파하여 반란군을 진압했다. 패배한 치무대, 백호문 등은 촉나라에 항복을 요청했고, 강유와 요화 등이 이들을 맞이하기 위해 다시 출격했다. 여러 장수들은 곽회에게 군대를 나누어 요화를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곽회는 반대하고 요화를 공격했으며, 하후패에게는 강유를 상대하게 했다. 곽회의 예상대로 강유는 요화 구원을 위해 군대를 돌렸으나, 곽회와 하후패의 군대에게 격파당했다(화양국지·유후주지). 결국 강유 등은 치무대 등을 맞이한 후 촉으로 귀환했다.[74] 곽회는 이 공로로 도향후로 승진했다.[75]
249년, 하후현을 대신하여 정서장군·'''도독 옹량주 제군사'''가 되어 촉 전선의 총사령관이 되었다. 이 때문에 사이가 좋지 않았던 하후패는 불안감을 느껴 촉으로 망명했다(「제하후조전」이 인용하는 『위략』). 곽회는 진태와 협력하여 촉의 구안 등을 항복시켰다.[76]
2. 5. 강족의 대규모 반란 평정
247년,[94] 농서군, 남안군, 금성군, 서평군 일대의 강족 아하소과(餓何燒戈),[95] 벌동(伐同), 아차새(蛾遮塞) 등이 연합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은 성읍을 공격하고 촉한의 군대를 불러들였으며, 양주의 유력 호족인 치무대(治無戴)도 이에 호응하였다. 토촉호군(討蜀護軍) 하후패는 위시(爲翅)에 주둔하고 있었다. 곽회는 농서군 적도현(狄道縣)에 도착했으나, 부하들은 부한현(枹罕縣)부터 평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곽회는 강유가 하후패를 공격할 것이라 예측하고 풍중(渢中)을 거쳐 남쪽의 하후패에게 향했다. 예상대로 강유는 위시를 공격했다가 곽회 군이 도착하자 퇴각하였다. 곽회는 아하소과를 죽이고 만여 부락을 항복시켰다.248년, 아차새 등은 농서군 하관현(河關縣)과 금성군의 백토고성(白土故城)에서 황하를 끼고 저항하였다. 곽회는 상류에서 공격하는 척하면서 은밀히 하류에서 강을 건너 백토성을 점령하고 습격하여 크게 이겼다. 치무대는 무위군을 공격하고 있었는데, 그의 가족은 서해군에 있었다. 곽회는 서해군으로 빠르게 진격했고, 마침 돌아오던 치무대를 용이(龍夷) 이북에서 만나 격파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석두산(石頭山) 서쪽에서 소란을 일으키던 금성군 영거현(令居縣)의 이민족 무리도 격파하였다.
강유는 석영(石營)에서 강천(彊川)으로 이동하여 치무대를 맞이하고, 요화는 성중산(成重山)에 진지를 구축하여 패배한 강족들을 거두었다. 곽회는 이에 대응하여 병력을 나누려 하였다. 장수들은 강유 군은 서쪽으로 호족과 접하고 요화 군은 험한 곳에 자리 잡았으니 군을 나누면 오히려 약해져 강유를 제압할 수도 없고 요화를 무너뜨릴 수도 없다고 하였다. 이들은 한데 뭉쳐 서쪽으로 진격하여 호족과 촉나라의 관계를 끊는 것이 '벌교(伐交)'의 병법이라고 주장하였다. 곽회는 “요화를 기습하면 강유는 불안하여 뒤를 돌아볼 수밖에 없을 것이오. 강유가 전력을 다해 올 것을 감안하더라도 요화를 쓰러뜨리기에 충분하며, 강유를 분주히 움직여 피폐하게 만들 수 있소. 서쪽으로 멀리 가지 않아도 호족과의 관계는 저절로 끊어질 것이니 이야말로 일거양전(一擧兩全)의 책략이오.”라고 답하였다. 곽회는 하후패 등에게 답중(沓中)의 강유를 쫓게 하고 자신은 요화를 기습하였다. 강유는 요화를 구원하러 달려왔고, 모든 것이 곽회의 계획대로 되었다. 곽회는 도향후(都鄕侯)로 봉해졌다.[40]
2. 6. 관서 최고 책임자
249년(가평 원년), 곽회는 정서장군과 도독옹양제군사를 맡았고, 후임 옹주자사로는 진태가 부임하였다. 강유가 국산(麴山)에 성 두 개를 축조하고 구안과 이흠(李歆) 등을 배치하여 여러 군을 압박하자, 진태는 국성을 포위하면 칼에 피를 묻히지 않고 함락할 수 있다고 건의하였다. 곽회는 이를 받아들여 진태에게 보급로를 끊게 하였다. 강유가 구원을 위해 우두산(牛頭山)에서 나오자, 진태는 곽회에게 백수(白水)를 건너 동쪽으로 가는 동안 우두산으로 질주해 강유의 퇴로를 차단하자고 제안하였다. 곽회는 이를 승낙하고 조수(洮水)로 이동하였고, 강유는 포위망이 완성되기 전에 달아났으며, 고립된 구안 등은 투항하였다.[96]250년, 곽회는 관우(關右)에서 30여 년간 밖으로는 적을 응징하고 안으로는 백성과 이민족을 편안히 하였다. 그 공로로 거기장군, 의동삼사(儀同三司)에 오르고 지절(持節)을 받았으며, 도독 권한은 그대로였다. 작위는 양곡후(陽曲侯)로 올랐고 식읍은 2,780호였으며, 300호를 분할해 아들 한 명이 정후(亭侯)에 봉해졌다.
251년,[97] 왕릉 일당이 사마의에게 주살되자, 곽회의 아내는 왕릉의 누이였기에 연좌되어 잡혀갈 위기에 처했다. 부하들과 강(羌)·호(胡)의 수령 수천 명이 만류하는 표를 올리라고 곽회에게 청하였고, 부인이 호송길에 오르자 백성들이 울고 분노하며 강제로 막으려 하였다. 다섯 아들도 피가 흐를 정도로 머리를 찧으며 간청하자, 곽회는 수천 기(騎)로 쫓아가 아내를 데려왔다. 곽회는 사마의에게 편지해 아내를 되찾아온 것이 법에 어긋난다면 자신이 모든 책임을 지고 황제 앞에서 죄를 받겠다고 하였고, 사마의는 이를 용서하였다.[98]
255년(정원 2년), 곽회는 세상을 떠났고, 대장군으로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정후(貞侯)라 하였다.
3. 가계
곽회 가계도 | |
---|---|
대사농 | 곽전 (할아버지) [99] |
안문태수 | 곽온 (아버지) [99] |
부인 | 왕릉의 누이 |
형주자사 | 곽통 (아들) [52] |
분양자(汾陽子) | 곽정 (손자) [53] |
(그 외 아들 4명) | |
성양태수 | 곽배 (동생) [100] |
태복 | 곽전 (조카) [99] |
상국참군 | 곽예 (조카, 요절) [99] |
왕연에게 시집간 조카딸 [99] | |
배수의 처 (조카딸) [99] | |
곽괴 (조카딸) - 가충의 처 [99] | |
알자복야 | 곽진 (동생) [99] |
옹주자사, 상서 | 곽혁 (조카) [99] |
곽량 (동생) - 후손으로 북위의 곽조가 있다. [101] |
4. 삼국지연의에서의 곽회
소설 《삼국지연의》에서 곽회는 조홍군의 행군사마(行軍司馬)로 처음 등장한다. 장합이 과실로 조홍에게 처형당할 위기에 처하자 두 번이나 구해준다.
제갈량의 북벌 때 사마의의 지휘하에 손례와 함께 음평, 무도 두 군을 구하려다 왕평과 강유에게 패한다. 제갈량의 밀 수확을 저지하려다 실패하고, 검각(劍閣) 급습도 성공하지 못한다.
위수 전투에서 곽회는 북원을 방비하며 위연과 마대를 물리친다. 목우유마 탈취를 시도하다 강유 등에게 패하고, 괴이한 병사들을 보고 신이 돕는다고 여겨 추격을 포기한다.
고평릉 사변 이후, 곽회는 진태와 함께 하후패를 축출하고, 구안과 이흠을 격파한다. 강유의 군량 수송로를 차단하여 승리한다.
사마소가 강유에게 포위되자, 곽회는 진태의 계책으로 미당을 회유하고 강유를 공격한다. 강유를 추격 중 화살을 맞고 피가 멈추지 않아 사망한다.[59]
참조
[1]
서적
Sanguozhi vol. 4
[2]
서적
Sanguozhi vol.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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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서적
Jin Shu vol. 40
[55]
서적
Jin Zhugong Zan annotation in Sanguozhi vol. 26
[56]
웹사이트
Wang Yan 王衍
http://www.chinaknow[...]
2013-02-28
[57]
서적
Jin Zhugong Zan annotation in Sanguozhi vol. 26
[58]
서적
Wei Shu vol. 64
[59]
서적
Sanguo Yanyi ch. 109
[60]
Wikisource
삼국지/권26#곽회
[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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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권26#곽회
[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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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권26#곽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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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권26#곽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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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권26#곽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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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권26#곽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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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권35#제갈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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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권40#위연
[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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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권35#제갈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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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권26#곽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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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권26#곽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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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國志/卷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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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國志/卷26#郭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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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國志/卷26#郭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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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三国志にはどちらが戦勝したという記載はなく、姜維が白虎文や治無戴らを救援して帰還したことのみ書かれてい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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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國志/卷26#郭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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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國志/卷26#郭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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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國志/卷26#郭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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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國志/卷26#郭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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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國志/卷26#郭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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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source
三國志/卷26#郭淮
[81]
서적
三国志演義事典
株式会社[[大修館書店]]
2019-07-20
[82]
문서
《삼국지》36권 촉서 제6 황충
[83]
문서
《삼국지》9권 위서 제9 조진
[84]
문서
어환(魚豢), 《[[위략]]》 ; [[배송지]] 주석, 《삼국지》44권 촉서 제14 강유에서 인용
[85]
문서
포한현이 아닌 부한현이라 발음한다. [[이현 (당)|이현]] 주석, 《[[후한서]]》87권 열전 제77 서강 무익원검(無弋爰劒)
[86]
문서
《삼국지》35권 촉서 제5 제갈량
[87]
문서
《삼국지》45권 촉서 제15 [[양희 (촉한)|양희]]
[88]
문서
《삼국지》40권 촉서 제10 위연
[89]
문서
[[습착치]], 《[[한진춘추]]》 ; 배송지 주석, 《삼국지》35권 촉서 제5 제갈량에서 인용
[90]
문서
《[[진서]]》1권 제기 제1 고조선제 사마의
[91]
문서
왕침(王沈), 《위서》 ; 배송지 주석, 《삼국지》3권 위서 제3 명제 조예에서 인용
[92]
문서
《삼국지집해》에 따르면 강천(彊川)
[93]
문서
《삼국지》9권 위서 제9 [[하후상]] 자현
[94]
문서
《[[화양국지]]》7권 유후주지의 [[연희 (촉한)|연희]] 9년은 오기이다. 《삼국지》 곽회전과 강유전을 따른다.
[95]
문서
아하, 그리고 소과라는 별개의 인물일 수도 있다.
[96]
문서
《삼국지》22권 위서 제22 [[진군]] 자태
[97]
문서
《삼국지》28권 위서 제26 왕릉
[98]
문서
《세어》(世語) ; 배송지 주석, 《삼국지》26권 위서 제26 곽회에서 인용
[99]
문서
《곽씨보》(郭氏譜) ; 배송지 주석, 《삼국지》26권 위서 제26 곽회에서 인용
[100]
문서
《진제공찬》(晉諸公贊) ; 배송지 주석, 《삼국지》26권 위서 제26 곽회에서 인용
[101]
문서
《[[위서 (역사서)|위서]]》64권 열전 제52 곽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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