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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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비의는 후한 말기부터 촉한 시대까지 활약한 인물로, 유비, 제갈량, 유선을 섬기며 촉한의 주요 관료로 활약했다. 유비가 익주를 점령한 후 익주에 남아 동윤과 함께 명성을 떨쳤으며, 제갈량의 신임을 받아 오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뛰어난 언변을 보여주었다. 제갈량 사후에는 장완과 함께 촉한을 지탱하며 대장군과 익주 자사를 역임했으나, 253년 곽순에게 암살당했다. 비의는 타인에게 관대하고 겸손하며 청렴한 인품으로 평가받았으며, 《삼국지》와 《삼국지연의》 등 다양한 기록과 매체에서 다루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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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의 - [인물]에 관한 문서 | |
|---|---|
| 기본 정보 | |
| 이름 | 비의 |
| 원어 이름 | 費禕 |
| 로마자 표기 | Fei Yi |
![]() | |
| 설명 | 촉한의 정치가 |
| 다른 이름 | 문위(文偉) |
| 시호 | 경후(敬侯) |
| 생애 | |
| 출생 | 생년 미상 |
| 출생지 | 허난성뤄산현 |
| 사망일 | 253년 2월 16일 |
| 사망지 | 쓰촨성검각현 |
| 묻힌 곳 | 쓰촨성광위안시자오화구 |
| 관직 | |
| 대장군 | 역임 |
| 녹상서사 | 역임 |
| 익주자사 | 역임 |
| 상서령 | 역임 |
| 작위 | 성향후(成鄉侯) |
| 가족 관계 | |
| 친척 | 비백인(費伯仁) 비관(費觀) |
| 자녀 | 비승(費承) 비공(費恭) 유선의 아내 |
| 경력 | |
| 소속 국가 | 촉한 |
| 주군 | 유비, 유선 |
| 직업 | 외교관, 군사 장군, 정치인, 섭정 |
| 기타 정보 | |
| 관련된 인물 | 강유 |
2. 생애
비의는 후한 말기 강하군 江夏郡중국어 멍현(현재의 허난성 뤄산현 북서쪽)에서 태어났다.[3]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익주목 유장 어머니의 조카인 족부 비백인에게 의탁했다. 유장은 비백인에게 사신을 보내 영접했고, 비백인은 비의를 촉으로 유학보냈다.[82]
유비가 촉을 평정하면서 그곳에 남았고, 여남의 허숙룡과 남군의 동윤과 명성을 나란히 했다. 허정의 아들 장례식에 동윤과 함께 참석했을 때, 동윤은 아버지 동화에게 수레를 요청했으나 좋지 않은 수레를 받아 어렵다는 기색을 보였지만, 비의는 태연하게 먼저 올라탔다. 이를 통해 동화는 비의의 인품을 높이 평가했다.[8]
221년 유비가 황제에 즉위하고 유선을 태자로 세우자, 비의는 동윤과 함께 태자사인이 되었으며, 서자로 승진했다.[82] 223년 유비 사후 유선이 즉위하자 황문시랑에 임명되었다.[82]
225년 제갈량의 남정 이후 소신교위에 임명되어 손권에게 사신으로 파견되었다. 손권과 막료들은 비의를 말로 굴복시키려 했으나, 논리적인 답변으로 응대하여 실패했다. 손권은 그를 칭찬하며 촉의 신하가 될 것이라 했다.[82] 귀국 후 시중으로 승진, 제갈량이 한중에 주둔했을 때 참군이 되었고, 오나라에 사신으로 자주 파견되었다.[82]
230년 북벌에 참가하여 중호군, 사마로 임명되었다. 위연과 양의의 갈등을 중재하며 두 사람이 능력을 발휘하도록 도왔다.[82] 제갈량 사후 후군사로 승진했다. 양의가 장완을 질투하여 위나라에 투항하려 하자 유선에게 보고했다.[82] 장완의 뒤를 이어 상서령이 되었고,[82] 한중에서 부현으로 돌아가자 대장군, 녹상서사가 되었다.[82]
244년 위나라 조상의 한중 침공 때 왕평을 도와 흥세산 전투에서 격파하고 성향후에 봉해졌다.[82] 장완이 익주자사 직을 사양하여 겸임하게 되었다.[82] 245년 장완 사후 병권을 이어받고 248년 왕평 사후 한중에 주둔했다.[82]
251년 성도로 돌아왔으나 점쟁이가 재상의 자리가 없다고 하자 한수에 주둔했다.[82] 252년 유선의 명으로 부서를 개설했다.[82] 253년 대연회에서 위나라 항장 곽순에게 암살당했다.[83] 장억에게 경계에 소홀하다는 경고를 받았었다.[84] 시호는 경후(敬侯)이다. 아들 비승이 작위를 이었고, 동생 비공은 공주와 결혼했으며, 맏딸은 유선의 비가 되었다.
2. 1. 어린 시절과 유비와의 만남
유비가 익주를 평정하면서 비의는 촉한에 남게 되었고, 여남의 허숙룡과 남군의 동윤과 함께 명성을 얻었다.[82] 허정의 아들 장례식에 동윤과 함께 참석했을 때, 동윤은 제공받은 수레가 좋지 않아 부끄러워했지만, 비의는 태연한 모습을 보였다.[6] 이를 통해 동윤의 아버지 동화는 비의의 인품을 높이 평가했다.[8]2. 2. 유비와 유선 시대의 활약
221년, 유비가 황제에 즉위하고 유선을 태자로 세우자, 비의는 동윤과 함께 태자사인이 되었으며, 이후 서자로 승진했다.[82],[9] 223년, 유비 사후 유선이 즉위하자 황문시랑에 임명되었다.[10],[70]225년, 제갈량의 남정 이후 비의는 소신교위에 임명되어 동오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다.[12] 이때 손권은 비의를 조롱하려 했으나, 비의는 침착하고 논리적인 답변으로 응대하여 손권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13],[14] 제갈각 등 오나라 관료들과의 논쟁에서도 웅변으로 맞서며 굴복하지 않았다.[16] 손권은 비의를 칭찬하며 "그대는 천하의 미덕을 갖춘 사람으로, 틀림없이 촉에서 중요한 신하가 될 것"이라 말했다.[17]
2. 3. 제갈량 사후, 촉한의 기둥
제갈량이 한중에 주둔했을 때 비의는 참군으로 임명되었고, 오나라에 사신으로 자주 파견되었다.[82] 230년, 제갈량의 북벌에 참가하여 중호군, 사마로 임명되었다.[23] 위연과 양의의 갈등을 중재하며 두 사람이 능력을 발휘하도록 도왔다.[82]제갈량 사후 비의는 후군사로 승진했다.[35] 양의가 장완을 질투하여 위나라에 투항하려 하자 이를 유선에게 보고했다.[82] 장완의 뒤를 이어 상서령이 되었고,[35] 장완이 한중에서 부현으로 돌아가자 비의는 대장군, 녹상서사가 되었다.[37]
2. 4. 위나라 격퇴와 익주자사 겸임
244년, 위나라 조상이 한중을 침공하자 왕평을 도와 흥세산 전투에서 위나라 군대를 격파했다.[39][41] 이 공으로 비의는 성향후(成鄕侯)에 봉해졌다.[42] 장완이 익주자사 직을 사양하여 비의가 익주자사를 겸임하게 되었다.[43] 장완 사후에는 병권을 이어받고 한중에 주둔했다.2. 5. 암살과 최후
251년 여름, 비의는 성도로 돌아왔으나, 점쟁이가 성도에는 재상의 자리가 없다고 말하자 겨울에 다시 북쪽 한수에 주둔했다.[82] 252년, 유선은 비의에게 부서 개설을 명했다.[50] 253년 정월, 촉한의 대연회에서 위나라에서 항복한 곽순에게 암살당했다.[83] 비의는 장억에게 경계에 소홀하다는 경고를 받을 정도로, 귀순한 자에게도 허물이 없었다.[84] 시호는 경후(敬侯)이다. 아들 비승이 작위를 이었고, 동생 비공은 공주와 결혼했으며, 맏딸은 유선의 비가 되었다.3. 평가
진수는 『삼국지』에서 비의가 타인에게 자비롭고 관대하며 자선심이 있다고 칭찬했다. 그는 비의와 장완이 제갈량의 발자취를 따라 촉한의 국경을 확보하고 촉한 내에 평화와 화합을 유지하는 데 성공했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그는 또한 촉한과 같은 작은 나라를 안전하게 다스리는 데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고 비판했다.[62]
배송지는 『삼국지』에 주석을 달면서 진수의 관점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는 비의와 장완이 촉한의 미래를 위태롭게 할 수 있는 위험한 행동을 삼가고 위나라의 침략에 성공적으로 대응하여 촉한의 국경 내에 평화를 유지했을 때 섭정으로서 훌륭하게 해냈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한 독자들이 진수의 결론적인 언급에 혼란을 느낄 수 있다고 지적했는데, 이는 진수가 비의와 장완이 촉한을 다스리고 안전하게 지키는 데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는 주장을 뒷받침할 증거를 제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63]
비의는 권력과 명성을 누리고 있었음에도 겸손함을 유지하며 항상 타인에게 존경심을 보였다. 그는 자신과 가족을 위해 과도한 부를 소유하지 않았다. 그의 아들들은 평범한 디자인의 옷을 입고, 소박한 식사를 하며, 걸어서 여행했고, 여행 시 호위병을 동반하지 않아 평민과 같이 살았다.[64]
촉한의 장군 장니는 비의가 너무 선량하고 주변 사람들을 지나치게 신뢰하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한때 비의에게 경고했다. "과거에 잠팽은 군대를 지휘했고 래희는 황제의 권한을 행사했지만, 둘 다 암살당했습니다. 지금, 장군께서는 매우 중요한 지위와 권력을 차지하고 있으니, 이러한 역사적 사례를 배우고 더욱 경계해야 합니다." 장니가 예견한 바와 같이, 비의는 실제로 자객 곽순에게 죽임을 당했다.[65]
4세기의 역사가 유희는 자신의 저서 『지림』(志林중국어)에서 비의의 긍정적인 특성들이 그의 몰락을 초래한 것은 비극적인 아이러니라고 언급했다. 비의는 너무 개방적이고 관대했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에 대한 경계를 늦추고 적대 국가에서 온 반역자 곽수로부터 자신을 지키지 못했다.[66]
상거는 『화양국지』에서 사천 지역의 역사에 대해 광범위하게 썼으며, 강완과 비의가 제갈량의 원칙을 따르고 두 개의 더 큰 국가에 포위된 상태에서도 약한 촉한의 땅을 안전하게 지키며 강하게 만들었다고 평가했다.[67] 그는 또한 촉한 사람들이 제갈량, 강완, 비의, 동윤을 자국의 4명의 영웅적인 재상으로 칭했다고 기록했다.[68]
《비의전》에 인용된 《비의별전》에 따르면, 상서령 시대의 비의는 매일의 방대한 정사를 실수 없이 처리하면서도, 연회나 바둑 등에도 빠져 놀았다. 그러나, 같은 직책을 이어받은 동윤이 이를 따라 하려 하자, 며칠 만에 일이 크게 지체되었다. 동윤은 "사람의 능력 차이는 이 정도인가. 나의 힘은 (비의에게) 전혀 미치지 못한다. 하루 종일 일을 해도, 전혀 여유가 없지 않은가"라고 탄식했다. 한편, 사생활에서의 비의는 신중하고 검소했으며, 집에 재산을 축적하지 않았다.
배송지는 '유선은 평범한 군주이고, 비의는 그저 그런 재능의 재상이라, 이 두 사람이 살든 죽든, 위나라 왕조의 흥망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라고 하여 곽순이 암살이라는 수단에 의존한 것을 비판하고 있다.
4. 《삼국지연의》 속 비의
유장의 막료로 있다가 유비에게 귀순했다. 유비 사후 제갈량의 남정에 동행했고, 북벌에서는 성도에서 동윤과 함께 내정을 담당했다. 제갈량 사후에는 위연의 반란을 수습하고 서경령에 올라 대장군 장완을 보좌했다.[32]
사마의가 정권을 잡고 조상이 처형당하자, 강유가 이를 틈타 북벌을 하려 했으나 비의는 반대했다. 《삼국지연의》에서는 비의의 죽음에 대해 명확히 언급하지 않지만, 일반적으로 암살로 생을 마감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5. 비의? 비위?
진수가 편찬한 《삼국지》와 사마광의 《자치통감》에는 비의(費禕)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나관중의 《삼국지연의》에서는 비위(費褘)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나관중이 ‘의(禕)’를 ‘위(褘)’로 잘못 보아 오기한 것이다. 《삼국지연의》가 대중에게 더 많이 읽히고, 코에이 삼국지 한글화에서도 비위로 오역되면서 비위로 더 잘 알려지게 되었다.[69]
6. 기타
무한의 대표적인 명소인 황학루는 223년(오의 황무 2년)에 세워졌다고 전해지는데, 이곳에는 비위가 노란 학을 타고 날아와 쉬었다는 전설이 있다.[80] 당의 염백근은 『황학루기』에서 『도경』을 인용하여 비위가 날아왔다는 것을 전하고 있다.
북송의 『태평환우기』와 하주의 시 『황학루』에도 비위의 전설이 기록되어 있다. 반면 호자의 『소계어음은총화』와 남송 장식도의 『남헌집』 권18의 『황학루설』에서는 이를 강하게 부정하며, 비위 등선설은 북송, 남송, 명 시대에 황학루에 관한 시와 논의의 대상이 되었다. 황학루는 삼국 시대에 관한 시, 사서, 지리서에서도 명소로 자주 등장하는데, 예를 들어 『삼국지평화』의 "현덕 황학루 사도"나 잡극 "유현덕 취주 황학루"에도 나온다.
청두의 명소이자 금강에 걸린 만리교에도 비위의 전설이 남아 있다. 비위가 오나라로 사신으로 갈 때, 제갈량의 송별 연회에서 비위가 "만 리의 길은 이 다리에서 시작됩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오에서 촉으로 가는 사자인 장온이 말했다는 설도 있다).[81]
7. 가계
비의는 최소한 아들 둘과 딸 하나를 두었다. 첫째 아들 비승(費承)은 성향후(成鄉侯) 작위를 물려받았고, 촉나라 황궁에서 황문시랑(黃門侍郎)을 지냈다.[58] 둘째 아들 비공(費恭)은 촉 공주(유선의 딸 중 한 명)와 결혼하여 명성이 높았으며, 촉나라 황실 비서실에서 관료로 일했다. 비공은 비교적 젊은 나이에 사망했지만, 268년 4월 사마염에게 낙현이 잔치 중에 그를 재능있는 인물로 추천할 때까지는 살아있었다.[59][60] 비의의 딸은 유선의 장남이자 후계자인 유현과 결혼했다.[61]
참조
[1]
Sanguozhi
([延熙]十六年歲首大會,魏降人郭循在坐。禕歡飲沈醉,為循手刃所害,謚曰敬侯。) ''Sanguozhi'' vol. 44.
[2]
Sanguozhi
([延熙]十六年春正月,大將軍費禕為魏降人郭循所殺于漢壽。) ''Sanguozhi'' vol. 33.
[3]
Sanguozhi
(費禕字文偉,江夏鄳人也。) ''Sanguozhi'' vol. 44.
[4]
Sanguozhi
(少孤,依族父伯仁。伯仁姑,益州牧劉璋之母也。璋遣使迎仁,仁將禕遊學入蜀。) ''Sanguozhi'' vol. 44.
[5]
Sanguozhi
(會先主定蜀,禕遂留益土,與汝南許叔龍、南郡董允齊名。) ''Sanguozhi'' vol. 44.
[6]
Sanguozhi
(時許靖喪子,允與禕欲共會其葬所。允白父和請車,和遣開後鹿車給之。允有難載之色,禕便從前先上。) ''Sanguozhi'' vol. 44.
[7]
Sanguozhi
(及至喪所,諸葛亮及諸貴人悉集,車乘甚鮮,允猶神色未泰,而禕晏然自若。) ''Sanguozhi'' vol. 44.
[8]
Sanguozhi
(持車人還,和問之,知其如此,乃謂允曰:「吾常疑汝於文偉優劣未別也,而今而後,吾意了矣。」) ''Sanguozhi'' vol. 44.
[9]
Sanguozhi
(先主立太子,禕與允俱為舍人,遷庶子。) ''Sanguozhi'' vol. 44.
[10]
Sanguozhi
(後主踐位,為黃門侍郎。) ''Sanguozhi'' vol. 44.
[11]
Sanguozhi
(丞相亮南征還,羣寮於數十里逢迎,年位多在禕右,而亮特命禕同載,由是衆人莫不易觀。) ''Sanguozhi'' vol. 44.
[12]
Sanguozhi
(亮以初從南歸,以禕為昭信校尉使吳。) ''Sanguozhi'' vol. 44.
[13]
Fei Yi Biezhuan
(禕別傳曰:孫權每別酌好酒以飲禕,視其已醉,然後問以國事,并論當世之務,辭難累至。禕輙辭以醉,退而撰次所問,事事條荅,無所遺失。) ''Fei Yi Biezhuan'' annotation in ''Sanguozhi'' vol. 44.
[14]
Sanguozhi
(孫權性旣滑稽,嘲啁無方,諸葛恪、羊衜等才愽果辯,論難鋒至,禕辭順義篤,據理以荅,終不能屈。) ''Sanguozhi'' vol. 44.
[15]
Xiangyang Qijiu Ji
(襄陽記曰:董恢字休緒, ... 以宣信中郎副費禕使吳。孫權甞大醉問禕曰:「楊儀、魏延,牧豎小人也。雖甞有鳴吠之益於時務,然旣已任之,勢不得輕,若一朝無諸葛亮,必為禍亂矣。諸君憒憒,曾不知防慮於此,豈所謂貽厥孫謀乎?」禕愕然四顧視,不能即荅。恢目禕曰:「可速言儀、延之不協起於私忿耳,而無黥、韓難御之心也。今方歸除彊賊,混一函夏,功以才成,業由才廣,若捨此不任,防其後患,是猶備有風波而逆廢舟檝,非長計也。」權大笑樂。) ''Xiangyang Qijiu Ji'' annotation in ''Sanguozhi'' vol. 39.
[16]
Zhuge Ke Biezhuan
(恪別傳曰:權甞饗蜀使費禕,先逆勑羣臣:「使至,伏食勿起。」禕至,權為輟食,而羣下不起。禕啁之曰:「鳳皇來翔,騏驎吐哺,驢騾無知,伏食如故。」恪荅曰:「爰植梧桐,以待鳳皇,有何燕雀,自稱來翔?何不彈射,使還故鄉!」禕停食餅,索筆作麥賦,恪亦請筆作磨賦,咸稱善焉。) ''Zhuge Ke Biezhuan'' annotation in ''Sanguozhi'' vol. 64.
[17]
Sanguozhi
(權甚器之,謂禕曰:「君天下淑德,必當股肱蜀朝,恐不能數來也。」) ''Sanguozhi'' vol. 44.
[18]
Fei Yi Biezhuan
(禕別傳曰:權乃以手中常所執寶刀贈之,禕荅曰:「臣以不才,何以堪明命?然刀所以討不庭、禁暴亂者也,但願大王勉建功業,同獎漢室,臣雖闇弱,終不負東顧。」) ''Fei Yi Biezhuan'' annotation in ''Sanguozhi'' vol. 44.
[19]
Sanguozhi
(還,遷為侍中。) ''Sanguozhi'' vol. 44.
[20]
Sanguozhi
(亮北住漢中,請禕為參軍。) ''Sanguozhi'' vol. 44.
[21]
Sanguozhi
(上疏曰:「侍中郭攸之、費禕、侍郎董允等,先帝簡拔以遺陛下,至於斟酌規益,進盡忠言,則其任也。愚以為宮中之事,事無大小,悉以咨之,必能裨補闕漏,有所廣益。若無興德之言,則戮允等以彰其慢。」) ''Sanguozhi'' vol. 39.
[22]
Sanguozhi
(以奉使稱旨,頻煩至吳。) ''Sanguozhi'' vol. 44.
[23]
Sanguozhi
(建興八年,轉為中護軍,後又為司馬。) ''Sanguozhi'' vol. 44.
[24]
Sanguozhi
(延旣善養士卒,勇猛過人,又性矜高,當時皆避下之。唯楊儀不假借延,延以為至忿,有如水火。) ''Sanguozhi'' vol. 40.
[25]
Sanguozhi
(亮深惜儀之才幹,憑魏延之驍勇,常恨二人之不平,不忍有所偏廢也。) ''Sanguozhi'' vol. 40.
[26]
Sanguozhi
(值軍師魏延與長史楊儀相憎惡,每至並坐爭論,延或舉刃擬儀,儀泣涕橫集。禕常入其坐間,諫喻分別,終亮之世,各盡延、儀之用者,禕匡救之力也。) ''Sanguozhi'' vol. 44.
[27]
Yi Bu Qijiu Zaji
([李]福謝:「前實失不諮請公,如公百年後,誰可任大事者?故輒還耳。乞復請,蔣琬之後,誰可任者?」亮曰:「文偉可以繼之。」又復問其次,亮不荅。福還,奉使稱旨。) ''Yi Bu Qijiu Zaji'' annotation in ''Sanguozhi'' vol. 45.
[28]
Sanguozhi
(秋,亮病困,密與長史楊儀、司馬費禕、護軍姜維等作身歿之後退軍節度,令延斷後,姜維次之;若延或不從命,軍便自發。亮適卒,祕不發喪,儀令禕往揣延意指。) ''Sanguozhi'' vol. 40.
[29]
Sanguozhi
(延曰:「丞相雖亡,吾自見在。府親官屬便可將喪還葬,吾自當率諸軍擊賊,云何以一人死廢天下之事邪?且魏延何人,當為楊儀所部勒,作斷後將乎!」) ''Sanguozhi'' vol. 40.
[30]
Sanguozhi
(因與禕共作行留部分,令禕手書與己連名,告下諸將。禕紿延曰:「當為君還解楊長史,長史文吏,稀更軍事,必不違命也。」) ''Sanguozhi'' vol. 40.
[31]
Sanguozhi
(禕出門馳馬而去,延尋悔,追之已不及矣。延遣人覘儀等,遂使欲案亮成規,諸營相次引軍還。延大怒,纔儀未發,率所領徑先南歸,所過燒絕閣道。) ''Sanguozhi'' vol. 40.
[32]
Sanguozhi
(儀旣領軍還,又誅討延,自以為功勳至大,宜當代亮秉政, ... 而亮平生宓指,以儀性狷狹,意在蔣琬,琬遂為尚書令、益州刺史。儀至,拜為中軍師,無所統領,從容而已。) ''Sanguozhi'' vol. 40.
[33]
Sanguozhi
(初,儀為先主尚書,琬為尚書郎,後雖俱為丞相參軍長史,儀每從行,當其勞劇,自為年宦先琬,才能踰之,於是怨憤形于聲色,歎咤之音發於五內。時人畏其言語不節,莫敢從也,惟後軍師費禕往慰省之。) ''Sanguozhi'' vol. 40.
[34]
Sanguozhi
(儀對禕恨望,前後云云,又語禕曰:「往者丞相亡沒之際,吾若舉軍以就魏氏,處世寧當落度如此邪!令人追悔不可復及。」禕密表其言。[建興]十三年,廢儀為民,徙漢嘉郡. ... 儀自殺,其妻子還蜀。) ''Sanguozhi'' vol. 40.
[35]
Sanguozhi
(亮卒,禕為後軍師。頃之,代蔣琬為尚書令。) ''Sanguozhi'' vol. 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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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ctionary definition of 羽檄
http://www.zdic.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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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i Yi Tomb
https://www.meet99.c[...]
2018-0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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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
인용
[69]
문서
許靖の子の葬儀での逸話については董允を参照。
[70]
문서
『華陽国志』「劉後主志」によれば224年。
[71]
문서
後の南征からの帰還後、低い序列であったにもかかわらず、特別に車への同乗を許したという逸話がある。
[72]
문서
『費禕別伝』に詳しい。
[73]
문서
建興9年(231年)に諸葛亮が李厳を罷免する際の上奏では、行中護軍・偏将軍として名を連ねている。
[74]
문서
魏延伝、楊儀伝参照。
[75]
문서
尚書令としての仕事ぶりについては、『費禕別伝』に詳細がある。
[76]
문서
蔣琬伝参照。なお後主伝の延熙 (蜀)|延熙4年(241年)の記録には、漢中で蔣琬と費禕が数カ月協議していたとある。
[77]
문서
姜維伝の引く『漢晋春秋』に掲載。
[78]
문서
魏側の記録によると「郭脩」とある。当初は劉禅を狙っていたが、果たせなかったため、費禕が標的になった(郭循自身も直後に殺害されている)。8月になって、魏帝曹芳は詔を下し、郭脩に「長楽郷侯」の爵位を授け、「威侯」と諡した。このため、初めから刺客として蜀に送り込まれた可能性が高い。なお、詔で「偽大将軍費禕」と呼んでいる。魏は蜀漢の存在自体を認めていない以上、蜀漢の官職は当然偽物になるからである。
[79]
웹사이트
三国志遺跡-葭萌関
https://www.arachina[...]
[80]
문서
黄鶴楼在県西二百八十歩。昔費文禕登仙,毎乗黄鶴於此楼憩駕,故号為黄鶴楼(『太平寰宇記』鄂州・江夏県)
[81]
문서
唐『元和郡県図志』
[82]
서적
《삼국지》권44 촉서14 장완비의강유전(蔣琬費禕姜維傳) 중 비의전
[83]
서적
《위씨춘추》 ; 배송지 주석, 《삼국지》4권 위서 제4 조방|제왕방 가평 (위)|가평 5년에서 인용
[84]
문서
삼국지43권 촉서 제13 장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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