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야스 도쿠가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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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다야스 도쿠가와가는 에도 막부 8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무네의 차남 도쿠가와 무네타케를 시조로 하는 가문이다. 고산쿄 중 하나로, 쇼군가의 혈통 유지를 담당했다. 에도 시대에는 에도성 내에 거주하며 쇼군의 가족으로 취급되었고, 메이지 유신 이후에는 다야스번을 거쳐 백작 가문이 되었다. 11대 당주 도쿠가와 무네후사까지 가계가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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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야스 도쿠가와가 - 마쓰다이라 슌가쿠
마쓰다이라 슌가쿠는 에도 막부 말기의 다이묘이자 정치가로서, 다야스 도쿠가와 가문 출신으로 후쿠이 번주를 역임하며 개혁적인 정책과 공무합체 운동을 추진했고, 쇼군 계승 문제와 미일수호통상조약 체결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으며, 메이지 유신 이후 신정부에서 활약하며 메이지 시대의 기틀을 다지는 데 기여했다. - 다야스 도쿠가와가 - 마쓰다이라 사다노부 (1759년)
마쓰다이라 사다노부는 다야스 가문 출신으로 간세이 개혁을 주도하고 덴메이 대기근 당시 백성 구휼과 번정 재건 능력을 인정받아 로주 수좌가 되어 막부 재정을 흑자로 전환하는 등 활약한 인물이다. - 도쿠가와 고산쿄 - 히토쓰바시 도쿠가와가
히토쓰바시 도쿠가와가는 도쿠가와 요시무네의 아들 도쿠가와 무네타다를 가조로 하며 쇼군가의 후사를 잇기 위해 고산쿄와 함께 자격을 부여받았고, 도쿠가와 이에나리와 도쿠가와 요시노부를 배출한 가문이다. - 도쿠가와 고산쿄 - 시미즈 도쿠가와가
시미즈 도쿠가와가는 도쿠가와 이에시게의 차남 시게요시를 시조로 하는 가문으로, 쇼군 후계자 배출 자격을 가진 고산쿄 중 하나였으나 쇼군을 배출하지 못했고, 메이지 유신 이후 남작 작위를 받았다. - 일본의 백작가 - 시마즈씨
시마즈씨는 가마쿠라 시대부터 에도 시대까지 사쓰마, 오스미, 휴가 지역을 다스린 다이묘 가문으로, 미나모토 씨의 후손이며, 규슈 지역을 장악하고 임진왜란에 참전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 일본의 백작가 - 우에스기씨
우에스기씨는 가마쿠라 시대부터 무로마치 시대, 센고쿠 시대를 거쳐 에도 시대까지 번영하며 간토 간령, 슈고 다이묘, 요네자와 번주 등을 역임했고, 메이지 시대에는 화족으로 서임되었다.
다야스 도쿠가와가 | |
---|---|
기본 정보 | |
가명 | 다야스 도쿠가와가 |
가문 | 도쿠가와씨 (다야스 도쿠가와가) |
가문 문양 | 마루니 미쓰바아오이 |
본성 | 자칭 세이와 겐지 |
시조 | 도쿠가와 무네타케 |
종별 | 무가, 화족 (백작) |
출신지 | 무사시국에도 |
근거지 | 무사시국 에도, 도쿄시시바구 미타 쓰나마치 |
주요 인물 | 도쿠가와 사토타카, 도쿠가와 무네마사 |
기타 | 도쿠가와씨 (다야스 도쿠가와가) |
역사 | |
창설 | 도쿠가와 요시무네가 차남 도쿠가와 무네타케를 위해 창설 |
폐지 | 메이지 유신 이후 |
이후 | 화족에 편입, 백작 작위 수여 |
역대 당주 | |
초대 | 도쿠가와 무네타케 |
2대 | 도쿠가와 하루사다 |
3대 | 도쿠가와 나리마사 |
4대 | 도쿠가와 나리타카 |
5대 | 도쿠가와 요시요리 |
6대 | 도쿠가와 다쓰타카 |
7대 | 도쿠가와 무네마사 |
8대 | 도쿠가와 무네타케 |
2. 역사
에도 막부 8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무네의 차남 도쿠가와 무네타케를 시조로 하는 다야스 도쿠가와 가문은 도쿠가와 쇼군가에 후사가 없을 때 고산쿄의 다른 두 가문과 함께 후사를 배출할 수 있는 자격을 가졌다. 가격은 도쿠가와 고산케 다음이며, 고쿠다카는 10만 석이었다. 가문의 이름은 에도성 타야스몬 안, 현재 키타노마루 공원ㆍ일본 무도관 부근에 있던 저택에서 유래했으며, 이 땅은 타야스메이노카미 (현 츠쿠도 신사)의 옛 땅이었다.[1]
무네타케는 1729년에 원복하여 우에몬 감독이라 칭하고, 오마모리 (가로)라는 이름을 받으며 쿠라마이 3만 섬을 받았다. 이듬해 1730년에는 타야스몬 내에 저택 부지를 받았고, 1731년에 옮겼다. 1746년에는 영지 10만 석을 무사시ㆍ코즈케ㆍ카이ㆍ이즈미ㆍ셋츠ㆍ하리마 등 6개 국에 받았다.
무네타케는 뛰어난 인물로 국학과 와카를 즐겼으나, 적자 하루사토가 병약하여 요절하였다. 동생 마사마루 (마쓰다이라 사다노부)는 시라카와번 히사마츠 마츠다이라가의 양자로 결정되어 가독 상속이 허락되지 않았다. 무네타케의 혈통은 사다노부를 통해 히사마츠 마츠다이라가에 전해졌다. 다야스 가는 십수 년간 당주 부재 상태였다가 히토츠바시가 출신 나리마사가 상속했다.
이후 히토츠바시 무네타다의 혈통이 이어져, 고산쿄 중 유일하게 요시무네의 후손이 막부 말기까지 당주가 되었다.
에도 시대에 다야스 가문에서 쇼군은 배출되지 않았지만, 15대 쇼군 요시노부 근신 후 1868년 윤4월에 7대 당주 카메노스케가 도쿠가와 종가를 상속받았다(16대 당주 도쿠가와 이에사토). 이듬해 5월, 아버지 요시요리가 다시 당주가 되어 다야스 번으로 유신입번했고, 1869년 판적봉환 때 지번사로 임명되지 않고 폐번, 1870년 3월에 가록 3148석을 받았다. 메이지 유신 후에는 화족에 올라 백작 작위를 받았다.
2. 1. 성립 배경
도쿠가와 요시무네는 차남 도쿠가와 무네타케에게 다야스 가문을 창설하게 했는데, 그 배경은 다음과 같다.교호 14년(1729년), 무네타케는 원복 후 구라마이 3만 섬을 받았다. 이듬해인 1730년에는 타야스몬 안에 저택 부지를 받았고, 1731년에 거처를 옮겼다. 엔쿄 3년(1746년)에는 무사시, 코즈케, 카이, 이즈미, 셋츠, 하리마 등 6개 국에 10만 석의 영지를 받았다.[1]
도쿠가와 쇼군가에 후사가 없을 때, 고산쿄의 다른 두 가문과 함께 후사를 배출할 수 있는 자격을 갖게 하기 위함이었다. 다야스 가문의 가격은 도쿠가와 고산케 다음이며, 고쿠다카는 10만 석이었다. 가문의 이름은 에도 성 타야스몬 안, 현재 키타노마루 공원·일본 무도관 부근에 있던 저택에서 유래했다. 이 땅은 타야스메이노카미의 옛 땅이었다.[1]

무네타케는 뛰어난 인재로 알려져 국학을 배우고 와카를 즐겨 지었으나, 적자인 2대 하루사토가 병약하여 요절하였다. 당시 집에 남아있던 동생 마사마루 (마쓰다이라 사다노부)는 이미 시라카와번 히사마츠 마츠다이라가의 양자로 결정되어, 3대 가독 상속이 허락되지 않았다. 무네타케의 혈통은 이후 다야스 가문에 전해지지 않았으나, 사다노부를 통해 히사마츠 마츠다이라가에 전해졌다. 다야스 가는 십수 년에 걸쳐 당주 부재 상태가 된 후, 히토츠바시가 출신인 나리마사가 상속받았다.
이후, 히토츠바시 무네타다의 혈통이 이어져, 고산쿄 중 유일하게 요시무네의 후손이 막부 말기까지 당주가 되었다.
2. 2. 에도 시대
도쿠가와 요시무네의 차남 도쿠가와 무네타케를 시조로 하는 다야스 가문은 도쿠가와 쇼군가에 후사가 없을 때를 대비해 고산쿄의 다른 두 가문과 함께 후사를 배출할 수 있는 자격을 가졌다. 가격은 도쿠가와 고산케 다음이며, 고쿠다카는 10만 석이었다. 가문의 이름은 에도 성 타야스몬 안, 현재 키타노마루 공원·일본 무도관 부근에 있던 저택에서 유래했다.교호 14년(1729년), 무네타케는 쿠라마이 3만 섬을 받았다. 이듬해 타야스몬 안에 저택 부지를 받았고, 1731년에 저택으로 옮겼다. 엔쿄 3년(1746년)에는 무사시, 코즈케, 카이, 이즈미, 셋츠, 하리마 등 6개 국에 10만 석의 영지를 받았다.
무네타케는 국학과 와카에 능통한 인물이었으나, 적자인 2대 하루사토는 병약하여 요절하였다. 마쓰다이라 사다노부는 시라카와번 히사마츠 마쓰다이라가에 양자로 가게 되어, 다야스 가문은 십수 년간 당주가 없는 상태가 되었다. 이후 히토츠바시가 출신인 나리마사가 가문을 상속받았다.
이후, 히토츠바시 무네타다의 혈통이 이어져, 고산쿄 중 유일하게 요시무네의 후손이 막부 말기까지 당주가 되었다.
에도 시대 동안 다야스 가문에서 쇼군은 배출되지 않았지만, 15대 쇼군 요시노부의 근신 이후, 게이오 4년(1868년) 윤4월에 7대 당주 카메노스케가 도쿠가와 종가를 상속받았다(16대 당주 도쿠가와 이에사토). 이듬해 5월, 아버지 요시요리가 다시 당주가 되어 다야스 번으로 유신입번하기도 했으며, 메이지 2년(1869년) 판적봉환 때 지번사로 임명되지 않고 폐번되었다. 메이지 3년 3월에 가록 3148석을 지급받았다.
간세이 개혁을 추진한 로주 마쓰다이라 사다노부(히사마쓰 마쓰다이라 가문으로 양자 입적)는 무네타케의 아들이며, 막말의 후쿠이 번주로 유신에 공이 있었던 마쓰다이라 슌가쿠(에치젠 마쓰다이라 가문으로 양자 입적)는 나리타다의 아들이다.
2. 3. 메이지 유신과 그 이후
게이오 4년(1868년) 윤4월, 15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근신하면서, 7대 당주 카메노스케가 도쿠가와 종가를 상속받아 16대 당주 도쿠가와 이에사토가 되었다. 이듬해 5월, 아버지 요시요리가 다시 당주가 되어 다야스번으로 유신입번했으나, 메이지 2년(1869년) 판적봉환 때 지번사로 임명되지 않고 폐번되었다.[2] 메이지 3년(1870년) 3월에는 가록 3148석을 지급받았다.[3] 메이지 유신 이후에는 화족에 올라 백작 작위를 받았다.도바·후시미 전투에서 구 막부군이 패배한 후, 게이오 4년(1868년) 1월 10일, 막부 대관 지배지, 타야스·히토츠바시 도쿠가와령 등이 몰수되었고, 타야스 도쿠가와가의 영지도 가장 가까운 관군 번의 예탁지가 되었다.[1]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우에노 간에이사에서 근신하자, 전 당주이자 도쿠가와 이에사토의 아버지인 요시요리가 에도성주가 되었다. 요시요리는 메이지 천황의 칙사 하시모토 사네야나기와 관군 참모들을 맞이했고, 에도성을 관군에게 넘겨주었다.
에도성 개성 이후, 도쿠가와 이에사토는 시즈오카번 번주로 임명되었다. 이에 따라 당주가 부재하게 된 타야스가는 요시요리가 다시 가독했다.
메이지 2년(1869년), 카이의 소령에서는 가혹한 수탈에 대한 불만으로 일규가 발생했고, 이는 천령(고후현)으로의 편입 요구로 이어졌다. 메이지 3년(1870년) 1월, 판적봉환 결정이 포고되었고, 같은 해 4월 27일 타야스번은 폐번되었다.[3] 요시요리는 지번사로 임명되지 않았지만, 화족의 지위는 인정받았다.
요시요리 사후, 그의 넷째 아들 다쓰타카가 가독을 상속했다. 1884년 7월 7일 화족령 시행으로 다쓰타카는 백작에 서임되었다. 다쓰타카는 귀족원 의원, 시종장, 일본홍도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다쓰타카 사후, 적남 닷세이가 작위와 가독을 상속했다. 닷세이는 해군 기술 대령이었다.
3. 영지
엔쿄 3년에 배령받은 10만 석은 막부 직할령으로부터 분할되어 어료(御料) 취급을 받았다. 영지의 내역은 다음과 같다.
카이국 3만 석은 야마나시군, 야츠시로군의 63개 마을이었으며, 야마나시군 이치마치 타나카촌에 진야(타나카 진야, 야마나시시)가 설치되었다. 덴포 3년 (1832년)에는 무사시국의 영지로, 야마나시군, 야츠시로군 두 군에서 41개 마을이 추가되었다.
카이국의 다야스 영지에서는 대소절세법 등 카이 지역 고유의 세금 제도는 유지되었지만, 자주 수탈 강화가 이루어져 영민과의 대립을 초래했다. 간세이 4년 (1792년)에는 다야스 영지에서 후토마스 소동이 일어났다. 막부 말기에는 상지가 검토되었지만, 메이지 유신까지 존속했다. 메이지 2년 (1869년)에 다야스 가문의 지배에 반대하는 영민들이 현청 측의 주도로 신정부에 편입을 요구하여 다야스 영지는 소멸했다(다야스령 잇키).[1]
4. 역대 당주
1868년 윤4월, 15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근신 이후, 7대 당주 카메노스케가 도쿠가와 종가를 상속받아 16대 당주 도쿠가와 이에사토가 되었다. 이듬해 5월, 아버지 요시요리가 다시 당주가 되어 타야스 번으로 유신입번했으나, 1869년 판적봉환 때 지번사로 임명되지 않고 폐번되었다. 1870년 3월에는 가록 3148석을 지급받았으며, 메이지 유신 후에는 화족에 올라 백작 작위를 받았다.
- 10대 당주 도쿠가와 다쓰나리 백작
- 11대 당주 도쿠가와 무네히데 (현 당주)
4. 1. 에도 시대 당주
도쿠가와 요시무네의 차남 도쿠가와 무네타케를 시조로 하며, 1729년 무네타케는 에도 막부로부터 도쿠가와 성을 사용하는 것을 허락받고 3만 석을 받았다. 1731년에는 에도성 타야스몬 안에 저택을 하사받아, '타야스 가문'으로 불리게 되었다. 1746년에는 10만 석의 영지를 받았다.타야스 도쿠가와 가문은 히토쓰바시 도쿠가와 가문, 시미즈 도쿠가와 가문과 함께 "고산쿄"라 불리며, 도쿠가와 고산케에 준하는 가문의 지위를 부여받고 쇼군가의 혈통을 유지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그러나 고산케와 달리 독립된 번을 갖지 않고 '쇼군의 가족'으로 취급받았다.[1]
2대 도쿠가와 하루사토 이후 15년 정도 당주가 없는 기간이 있었으나, 히토쓰바시 가문에서 도쿠가와 나리마사가 양자로 들어와 가문을 이었다. 이후 도쿠가와 요시무네의 직계 후손들이 당주를 이었으며, 메이지 유신을 맞이했다.
간세이 개혁을 추진한 마쓰다이라 사다노부는 무네타케의 아들이며, 막부 말기 후쿠이번 번주였던 마쓰다이라 슌가쿠는 나리마사의 아들이다.
역대 타야스 도쿠가와 가문 당주는 다음과 같다.
대수 | 이름 | 재임 기간 | 비고 |
---|---|---|---|
1 | 도쿠가와 무네타케 | 1731년 - 1771년 | |
2 | 도쿠가와 하루사토 | 1771년 - 1774년 | 하루사토 사후 당주 대행은 호렌인 (초대 당주 도쿠가와 무네타케의 정실) |
- | 마쓰다이라 사다쿠니 | - | 히사마츠가 (마츠야마)에 양자로 감. 이요 마쓰야마번 9대 번주 |
- | 마쓰다이라 사다노부 | - | 히사마츠 마츠다이라가 (쿠와나)에 양자로 감. 무츠 시라카와번 3대 번주 |
3 | 도쿠가와 나리마사 | 1787년 - 1836년 | 히토츠바시 도쿠가와가에서 양자 입양 |
- | 도쿠가와 나리쿠라 | - | 히토츠바시 도쿠가와가 5대 당주 |
- | 도쿠가와 요시히사 | - | 히토츠바시 도쿠가와가 7대 당주 |
5, 8 | 도쿠가와 요시요리 | 1839년- 1863년 | |
- | 마쓰다이라 요시나가 | - | 에치젠 마츠다이라가에 양자로 감. 에치젠 후쿠이번 14대 번주 |
- | 도쿠가와 요시츠구 | - | 오와리 도쿠가와가에 양자로 감. 오와리번 13대 번주 |
4 | 도쿠가와 나리타카 | 1836년 - 1839년 | 도쿠가와 쇼군가에서 양자 입양. 11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나리의 아들, 1839년, 오와리번 12대 번주로써 오와리 도쿠가와가에 감. |
6 | 도쿠가와 히사치요 | 1863년- 1865년 | |
7 | 가메노스케 | 1865년 - 1868년 | 메이지 유신 이후 도쿠가와 종가 제16대 당주 도쿠가와 이에사토 |
9 | 도쿠가와 사토타카 | - | |
- | 도쿠가와 요리미치 | - | 키슈 도쿠가와가에 양자로 감. 키슈 도쿠가와가 13대 당주, 후작 |
4. 2. 메이지 유신 이후 당주
메이지 유신 이후, 7대 당주 카메노스케(후의 도쿠가와 종가 16대 당주)가 도쿠가와 종가를 상속받았다. 이듬해 5월, 아버지 요시요리가 다시 당주가 되어 타야스 번으로 유신입번했으나, 1869년 판적봉환 때 지번사로 임명되지 않고 폐번되었다. 1870년 3월에는 가록 3148석을 지급받았다. 메이지 유신 후에는 화족에 올라 백작 작위를 받았다.[4]요시요리는 지번사로는 인정받지 못했지만 화족의 지위는 다른 다이묘와 마찬가지로 인정받았다. 1870년 3월에 다른 다이묘와 마찬가지로 번의 현미 1할(다야스 가문의 경우는 3148석)을 가록으로 지급받았다. 1876년 금록 공채 증서 발행 조례에 의거하여 가록 대신 지급된 금록 공채 액수는 123592.937JPY이었다. 요시요리는 같은 해에 사망하여 정2위를 추증받았다.
요시요리 사후에는 그의 넷째 아들 다쓰타카(종가를 이은 이에사토의 동생)가 가독을 상속했다. 메이지 전기 다쓰타카의 본저택은 도쿄부 시바구 미타 쓰나마치에 있었다.
1884년 7월 7일 화족령이 시행되어 화족이 5작제가 되면서, 다쓰타카도 백작에 서임되었다. 다쓰타카는 귀족원 백작 의원으로 당선되어 역임한 외에 시종장, 일본홍도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도쿄부 다액 납세자이기도 했다. 훈위는 훈1등이다.
다야스 도쿠가와 백작가의 저택은 쇼와 전기에도 도쿄시 시바구 미타 쓰나마치에 있었다.
다쓰타카가 1941년 사망한 후에는 적남 닷세이가 작위와 가독을 상속했다. 닷세이는 해군 기술 대령이었다.
- 8대 당주 요시요리 (5대 요시요리가 재취임)
- 9대 당주 (백작) 사토타카 (시종장)
위의 내용은 중복되므로 제거함.
4. 3. 전후 당주
도쿠가와 종가를 상속받은 7대 당주 가메노스케(16대 당주 도쿠가와 이에사토)의 뒤를 이어, 아버지 요시요리가 다시 당주가 되었다.[3] 메이지 유신 이후에는 화족에 올라 백작 작위를 받았다.[3]현대 다야스 도쿠가와 가문의 당주와 그 가계는 다음과 같다.
5. 가계도
범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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굵은 선은 친자, 점선은 양자, 굵은 글씨는 당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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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1]
문서
宝塚市史 二巻 田安徳川氏領の成立事情
https://adeac.jp/tak[...]
[2]
문서
宝塚市史 二巻 一橋・田安両徳川氏領の消滅
https://adeac.jp/tak[...]
[3]
논문
維新前後の領主支配と農民諸階層 甲州田安領について
https://repository.k[...]
[4]
서적
明治華族名鑑
{{NDLDC|994441/42}} [...]
深沢堅二
188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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