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7년 선거법 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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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867년 선거법 개정은 1832년 선거법 개정의 한계를 보완하고, 노동자 계층의 참정권 요구를 수용하기 위해 이루어진 영국의 선거 제도 개혁이다. 1865년 미국 남북 전쟁 이후 민주주의 확대에 대한 여론이 높아지자, 보수당 내각은 벤저민 디즈레일리의 주도로 선거법 개정안을 하원에 제출했다. 이 법안은 도시 지역의 대부분의 남성에게 투표권을 부여하는 급진적인 내용을 담았으며, 하이드 파크 시위 등 여론의 압력 속에 통과되었다. 개정안은 부패 혐의로 선거권을 박탈당한 자치구와 의석이 축소된 자치구를 포함하여, 새로운 의석 배분과 선거구 분할을 가져왔다. 이로 인해 유권자 수가 크게 증가하고, 지방의 정서를 반영하는 후보가 당선되는 등 정치적 변화가 일어났으며, 정당의 자금 조달 방식에도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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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7년 선거법 개정 | |
---|---|
법률 정보 | |
약칭 | 1867년 인민 대표법 |
유형 | 법률 |
의회 | 영국 의회 |
정식 명칭 | 잉글랜드와 웨일즈의 인민 대표에 관한 법률 추가 수정안 |
제정 연도 | 1867년 |
인용 | 30 & 31 Vict. c. 102 |
영역 | 영국 |
승인일 | 1867년 8월 15일 |
개정 | 1875년 법률 개정법 |
관련 법률 | 1884년 선거법 |
상태 | 부분 폐지 |
주요 내용 | |
목적 | 잉글랜드와 웨일즈의 선거 제도 개혁 |
영향 | 도시 지역의 남성에게 투표권 확대 선거구 재조정 |
2. 배경
1832년 선거법 개정은 영국의 선거 제도를 크게 바꾸었으나, 도시 노동자 계층 등 많은 이들이 여전히 투표권을 갖지 못하는 한계를 지녔다.[3] 이에 따라 참정권 확대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꾸준히 제기되었으며, 차티스트 운동과 같은 사회 운동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여러 차례 추가적인 선거법 개정 시도가 있었으나 정치적 반대 등으로 번번이 무산되면서, 선거권 확대 문제는 영국 정치의 주요 쟁점으로 남아 있었다.
2. 1. 차티스트 운동의 쇠퇴와 선거법 개정 요구
1832년 선거법 개정은 영국의 선거 제도를 크게 혁신했지만, 여전히 투표권을 가지지 못한 노동자 계층의 불만을 남겼다. 이들은 차티스트 운동을 통해 참정권을 요구했으나, 1848년을 기점으로 운동의 동력은 점차 약화되었다.[3]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정치인들은 추가적인 선거법 개정의 필요성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1859년 벤자민 디즈레일리가 개혁 법안을 시도했으나 실패했고, 1832년 개정 당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존 러셀 경 역시 1860년에 개혁을 시도했지만, 당시 총리이자 같은 자유당 소속이었던 헨리 존 템플의 반대로 무산되었다.1865년 미국 남북 전쟁에서 북부 연방이 승리하자, 영국 내에서는 더 많은 민주주의와 대중의 정치 참여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이는 남부 농장주들에게 동조하며 자신들의 영향력 축소와 급진적인 대중 운동을 우려하던 영국의 상류 지주 계층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월터 배젓, 토머스 칼라일, 앤서니 트롤럽, 카를 마르크스, 존 스튜어트 밀 등 영향력 있는 지식인들은 개혁을 지지했다.[4] 이들은 헌법의 균형과 "도덕적 권리"를 내세우며, 자격을 갖추고 숙련되었으며 절제하고 검소하며 존경받을 만한 장인(匠人)들이 투표권을 가질 충분한 자격이 있다고 주장했다. 자유당의 윌리엄 글래드스턴은 노동자들이 도덕적으로 성숙했으며, "자신들의 상사에게 충성을 증명할" 기회를 가져야 한다고 역설했다. 반면, 보수당을 비롯한 반대론자들은 미국과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낮은 계층이 민주주의를 누리는 상황을 부정적으로 언급하며 개혁에 반대했다.
1865년 헨리 존 템플이 사망하면서 선거 개혁 논의는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1866년, 다시 총리가 된 존 러셀은 노동자에게 투표권을 부여하는 것을 골자로 한 선거법 개정안을 의회에 제출했다. 그러나 이 법안은 매우 신중한 접근을 취했는데, 러셀은 비숙련 노동자나 소위 "잔여물"(무책임하고 범죄적인 빈곤층으로 묘사됨)을 제외하고 "존경받을 만한" 숙련 노동자에게만 투표권을 부여하고자 했다. 구체적으로는 연간 7GBP의 임대료를 납부할 능력이 있거나 주당 0.1375GBP 이상의 임금을 받는 노동자에게 투표권을 확대하는 내용이었다. 또한 자치구에서는 10GBP의 하숙인 자격, 카운티에서는 50GBP의 저축 자격을 추가하는 내용도 포함되었다. 자유당 내 개혁 지지자들은 이를 통해 "최고의 장인들로 강화된 중산층이 여전히 권력의 우위를 점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 개혁안은 자유당 내부의 분열을 초래했다. 벤자민 디즈레일리는 개혁에 반대하는 세력을 선동하여 이러한 분열을 부추겼다. 아둘람파로 불리는 보수적인 자유당 의원들은 토리당과 손잡고 개혁에 반대했고, 휘그당 계열의 개혁파 자유당 의원들은 정부안을 지지했다. 결국 개혁 법안은 하원을 통과하지 못했고, 러셀은 총리직에서 사임했다.
2. 2. 선거법 개정 시도와 좌절
1832년 선거법 개정은 영국의 선거 제도를 크게 바꾸었지만, 여전히 투표권이 없는 노동자 계층은 차티스트 운동을 통해 불만을 표출했다. 1848년 이후 차티스트 운동은 약화되었으나, 일부 정치인들 사이에서 추가적인 선거법 개정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3]1859년 벤자민 디즈레일리가 개혁 법안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1832년 개혁을 이끌었던 존 러셀 경 역시 1860년에 개혁을 추진했지만, 당시 총리이자 같은 자유당 소속이었던 팜스턴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팜스턴은 더 이상의 선거 개혁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1865년 미국 남북 전쟁에서 북부 연방이 승리하자, 영국 내에서도 민주주의 확대와 대중의 정치 참여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졌다.[4] 이는 미국의 남부 농장주에 동조하며 기존 질서 유지를 원했던 영국의 상류 지주 계층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반면, 월터 배젓, 토머스 칼라일, 앤서니 트롤럽, 카를 마르크스, 존 스튜어트 밀 등 영향력 있는 지식인들은 개혁을 지지했다.[4] 이들은 자격 있고, 숙련되고, 절제하며, 검소하고, 공손한 장인들이 투표권을 가질 도덕적 권리가 있다고 강조했다. 자유당의 글래드스턴은 노동자들의 도덕적 개선을 강조하며, 그들이 상사에게 충성을 증명할 기회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반대 세력은 미국과 오스트레일리아의 사례를 들며 하층민에게 민주주의가 확대되는 것에 대한 우려를 표했다.
1865년 팜스턴이 사망하면서 선거 개혁 논의가 다시 활발해졌다. 1866년, 다시 총리가 된 러셀은 노동자 계층 일부에게 투표권을 부여하는 새로운 개혁 법안을 제출했다. 하지만 이 법안은 매우 신중하게 접근하여, 소위 '존경할 만한' 숙련 노동자에게만 자격을 한정하고 비숙련 노동자나 빈곤층은 제외하려 했다. 이는 연간 7GBP의 임대료를 내거나 주당 2실링 9펜스 이상의 임금을 받는 노동자에게 투표권을 확대하는 것을 골자로 했다. 자유당 내 개혁 지지자들은 이를 통해 중산층의 정치적 기반이 강화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법안은 자유당 내에서도 분열을 일으켰다. 디즈레일리가 법안에 반대하는 세력을 부추겼고, 결국 아둘람파로 불리는 자유당 내 보수파가 토리당과 손잡고 개혁에 강력히 반대했다. 반면 휘그당 계열과 급진파, 개혁파 자유당 의원들은 정부의 법안을 지지했다. 결국 법안은 하원을 통과하지 못했고, 이에 책임을 지고 러셀의 자유당 정부는 사임했다.
2. 3. 미국 남북전쟁의 영향과 여론 변화
1865년 미국에서 벌어진 남북 전쟁이 북부 연방의 승리로 끝나자, 미국 남부의 농장주 세력과 동일시하며 자신들의 영향력 상실과 대중 운동의 급진화를 두려워했던 영국의 상류층 지주 계급은 큰 충격을 받았다.[4]하지만 이러한 상류층의 우려와는 달리, 북부의 승리는 영국 내에서 더 많은 민주주의와 대중의 정치 참여를 요구하는 목소리를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월터 배젓, 토머스 칼라일, 앤서니 트롤럽, 카를 마르크스, 존 스튜어트 밀 등 영향력 있는 지식인들이 이러한 흐름을 지지했다.[4] 이들은 헌법의 균형과 "도덕적 권리"를 근거로 들며, 자격 있고, 숙련되고, 절제하며, 검소하고, 존경받는 장인(匠人)들이 투표권을 가질 충분한 자격이 있다고 강조했다. 자유당의 윌리엄 글래드스턴 역시 노동 계급의 "도덕적" 개선을 강조하며, 그들이 "자신들의 상사에게 충성을 증명"할 기회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보수당을 비롯한 반대 세력은 미국과 오스트레일리아의 하층 계급 민주주의에 대해 경고하며 선거권 확대에 반대했다.
2. 4. 파머스턴 사망과 선거 개혁 논의 본격화
1832년 선거법 개정 이후에도 선거권 확대 요구는 계속되었으나, 파머스턴 총리와 같은 보수적인 정치인들의 반대로 추가적인 개혁은 지지부진했다. 벤자민 디즈레일리가 1859년에, 존 러셀 경이 1860년에 각각 개혁을 시도했지만, 특히 파머스턴의 반대로 인해 번번이 실패했다.1865년 미국 남북 전쟁에서 북부 연방이 승리하자, 영국 내에서도 민주주의 확대와 대중의 정치 참여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졌다.[4] 이는 미국의 남부 농장주들과 자신들을 동일시하며 영향력 상실을 두려워했던 영국 상류층 지주 계급에게는 당혹스러운 일이었다. 월터 배젓, 토머스 칼라일, 앤서니 트롤럽, 카를 마르크스, 존 스튜어트 밀 등 영향력 있는 지식인들은 이러한 변화를 지지하며, 숙련되고 절제하며 존경받는 장인(匠人)들이 투표권을 가질 자격이 충분하다고 주장했다.[4] 자유당의 윌리엄 글래드스턴은 노동자들이 도덕적으로 성장했으며, "상사에게 충성을 증명"할 기회를 가져야 한다고 역설하며 투표권 확대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반면, 보수당을 비롯한 반대론자들은 미국과 오스트레일리아의 사례를 들며 하층민에게 민주주의가 확대되는 것에 대해 경고하며 반대했다.
1865년, 오랫동안 선거 개혁에 반대해 온 파머스턴 총리가 사망하면서 개혁 논의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3] 1866년, 다시 총리가 된 존 러셀은 노동자 계층 일부에게 투표권을 부여하는 새로운 선거법 개정안을 의회에 제출했다. 하지만 이 개정안은 매우 조심스러운 것으로, 모든 노동자가 아닌 소위 '존경받을 만한' 숙련 노동자에게만 투표권을 제한적으로 확대하는 내용이었다. 구체적으로는 연간 7파운드의 임대료를 내거나 주당 2실링 9펜스 이상의 임금을 받는 노동자에게 자격을 부여하는 것이었다. 자유당 개혁파는 이를 통해 최고의 장인들로 강화된 중산층이 여전히 정치적 우위를 유지하면서 사회 안정을 도모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개혁안은 자유당 내부의 극심한 분열을 초래했다. 벤자민 디즈레일리가 이끄는 보수당은 개혁에 반대하는 자유당 내 보수파를 부추겼다. 로버트 로우 등이 주도한 반개혁 성향의 자유당 의원들, 이른바 아둘람파는 보수당과 연합하여 개혁안에 강력히 반대했다. 반면, 휘그당 계열과 급진적인 자유당 의원들은 개혁안을 지지했다. 결국 아둘람파와 보수당의 연합 공세로 개혁안은 하원에서 부결되었고, 이에 책임을 지고 존 러셀 총리는 사임했다.
2. 5. 러셀의 선거법 개정안과 좌절
1832년 선거법 개정 이후에도 투표권을 갖지 못한 노동자 계층의 불만은 계속되었고, 차티스트 운동 등으로 표출되었다. 1848년 이후 차티스트 운동은 약화되었지만, 일부 정치인들은 추가적인 선거법 개정의 필요성을 인지하고 있었다.[3] 벤저민 디즈레일리의 1859년 개혁 시도와 존 러셀의 1860년 시도는 당시 총리였던 팜스턴의 반대 등으로 실패했다.1865년 미국 남북 전쟁에서 북부 연방이 승리하자, 영국 내에서도 민주주의 확대와 대중 참여 요구가 거세졌다. 이는 남부 농장주에 동조하며 대중 운동을 두려워하던 영국 상류층을 당황하게 했다. 월터 배젓, 토머스 칼라일, 앤서니 트롤럽, 카를 마르크스, 존 스튜어트 밀 등 영향력 있는 지식인들은 숙련되고 절제하며 존경받는 장인들이 투표권을 가질 도덕적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다.[4] 자유당의 윌리엄 글래드스턴 역시 노동자들의 도덕적 성숙을 강조하며 투표권 부여를 지지했다. 반면 보수 진영은 미국과 오스트레일리아의 사례를 들며 하층 계급 민주주의의 위험성을 경고했다.
1865년 개혁에 반대하던 팜스턴 총리가 사망하면서 선거법 개정 논의가 본격화되었다. 1866년, 다시 총리가 된 존 러셀은 노동자에게 투표권을 부여하는 개정안을 의회에 제출했다. 그러나 이 법안은 매우 신중하게 설계되어, 소위 '무책임하고 범죄적인 빈곤층'으로 여겨지던 비숙련 노동자를 제외하고 '존경받는' 숙련 노동자에게만 투표권을 제한적으로 확대하는 내용이었다. 구체적으로는 연간 임대료 7파운드를 내거나 주당 2실링 9펜스 이상의 임금을 받는 노동자에게 자격을 부여했다. 자유당은 이를 통해 최고의 장인들로 강화된 중산층이 여전히 정치적 우위를 유지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 개정안은 자유당 내부의 분열을 초래했다. 벤저민 디즈레일리는 개혁에 불안감을 느끼는 의원들을 부추겨 반대 여론을 형성했다. 자유당 내 반개혁파인 '아둘람파'(Adullamites)는 보수당과 손잡고 개정안에 강력히 반대했다. 반면, 휘그당 세력과 급진파, 개혁파 의원들은 정부의 개정안을 지지했다.
결국, 아둘람파와 보수당의 반대로 러셀의 선거법 개정안은 하원에서 부결되었고, 이에 책임을 지고 존 러셀은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3. 입법 경위
러셀의 자유당 내각이 물러난 후, 1866년 6월 더비 백작을 총리로, 디즈레일리를 재무장관으로 하는 보수당 내각이 들어섰다.[5] 그러나 이는 팜스턴 자작 사후 분열된 자유당의 상황에 따른 반사이익이었고, 하원의 다수 의석은 여전히 자유당이 차지하고 있어 보수당 내각의 기반은 불안정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디즈레일리는 정국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1867년 2월, 이전 자유당의 개혁안을 저지했음에도 불구하고 독자적인 선거법 개정안을 하원에 제출했다. 하지만 노동계급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가진 보수당 내에서는 개혁에 대한 반발이 있었고, 솔즈베리 경과 같은 인물은 장관직을 사임하며 반대 의사를 표명했다. 또한 개혁에 반대하는 아둘람파는 보수당과 협력하면서도 독자적인 노선을 유지했다.
하원에서 개혁 논의가 지지부진하자, 개혁 동맹을 중심으로 선거법 개정을 요구하는 대중의 목소리가 커졌다. 맨체스터, 글래스고 등 주요 도시에서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고, 특히 1867년 5월 정부의 금지 조치에도 불구하고 강행된 하이드 파크 시위는 정부에 큰 압박을 가했다. 이 사건으로 내무 장관 스펜서 월폴이 사임하는 등 정치적 파장이 일었다.
거센 여론과 대중 운동의 압력 속에서 디즈레일리 내각은 기존 안보다 훨씬 더 많은 유권자에게 선거권을 부여하는 방향으로 개정안을 급진적으로 수정했다. 이 수정안은 도시 지역에 거주하는 대부분의 남성에게 투표권을 부여했으며, 연간 10GBP 이상의 임대료를 지불하는 남성, 대학 졸업자, 전문직 종사자, 50GBP 이상의 저축을 가진 사람 등이 포함되었다.[5] 이 과정에서 디즈레일리는 글래드스턴과의 치열한 토론을 벌이며 오히려 개혁의 폭을 넓히는 유연성을 보였다. 그는 새롭게 선거권을 얻는 유권자들이 보수당에 표를 줄 것이라는 정치적 계산을 바탕으로 당내 반대파를 설득하여 법안 통과를 이끌어냈다.
디즈레일리의 노력으로 개정안은 하원과 상원을 모두 통과했지만, 그의 기대와 달리 1868년 영국 총선에서는 새로 선거권을 얻은 유권자들이 자유당을 지지하면서 글래드스턴이 이끄는 자유당이 승리했다. 결국 보수당의 선거법 개정 시도는 정권 유지에 실패하고 오히려 경쟁자인 자유당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는 예상치 못한 결과를 낳았다. 이 법은 이후 선거구 경계를 조정하는 여러 추가 법률로 보완되었다.
3. 1. 보수당 내각의 출범과 한계
러셀 자유당 내각이 붕괴한 후, 1866년 6월 26일 더비 백작을 총리로, 디즈레일리를 재무장관으로 하는 보수당 내각이 출범했다.[5] 이는 팜스턴 자작 사후 분열된 자유당의 상황에 따른 반사이익이었으며, 하원의 다수당은 여전히 자유당이었기에 보수당 내각은 불안정한 기반 위에 있었다.로버트 로가 이끄는 아둘람파는 선거법 개정에 반대하여 보수당과 협력했지만, 독립적인 위치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정부 참여는 거부했다. 보수당 내에서도 노동자에 대한 부정적 인식으로 개혁에 미온적이었고, 디즈레일리가 1867년 2월 독자적인 개정안을 제출했을 때 솔즈베리 경은 이에 반발하여 장관직을 사임하기도 했다.
하원에서 논의가 지지부진하자 개혁 동맹을 중심으로 맨체스터, 글래스고 등 주요 도시에서 수십만 명이 참여하는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 정부는 시위를 금지했으나, 1867년 5월 하이드 파크 시위는 강행되었고 정부는 압도적인 군중 규모에 개입하지 못했다. 이 사태로 내무 장관 스펜서 월폴이 책임을 지고 사임했다.
거센 여론에 밀린 내각은 기존 안보다 훨씬 급진적인 방향으로 개정안을 수정했다. 디즈레일리는 글래드스턴의 제안이 아닌 한 대부분의 개혁 요구를 수용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고, 야당의 수정안을 받아들여 투표 자격 대상자를 크게 늘렸다. 최종안은 도시 지역에 거주하는 대부분의 남성 가구주에게 투표권을 부여했으며, 구체적으로는 직접 세금을 납부하는 남성, 연간 10GBP 이상의 임대료를 지불하는 남성, 대학 졸업자, 전문직 종사자, 50GBP 이상의 저축 보유자 등이 포함되었다.[5]
글래드스턴은 이 개정안을 비판했지만, 디즈레일리는 토론 과정에서 오히려 법안을 더욱 급진적으로 만들었다. 그는 새로 투표권을 얻게 될 유권자들이 보수당에 감사하며 표를 줄 것이라고 기대하며 당내 반대파를 설득했다.
디즈레일리의 설득으로 개정안은 하원과 상원을 통과했다. 그러나 그의 기대와 달리, 1868년 영국 총선에서는 새로 투표권을 얻은 유권자들이 자유당을 지지하면서 글래드스턴과 자유당 급진파가 승리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보수당의 선거법 개정 시도는 결국 정권 유지에 실패하고 오히려 경쟁자인 자유당의 입지를 강화시켜주는 한계를 드러냈다.
3. 2. 아둘람파의 입장
로버트 로가 이끄는 아둘람파는 1867년 선거법 개정에 반대하는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5] 이러한 입장은 당시 벤저민 디즈레일리가 이끄는 보수당과 같았기 때문에, 아둘람파는 보수당과 긴밀히 협력했다. 그러나 로버트 로는 보수당 내각에 참여하라는 제안을 거절했는데, 이는 아둘람파가 보수당과 자유당 사이에서 독립적인 위치를 유지하며 더 큰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5]3. 3. 디즈레일리의 선거법 개정안 제출과 보수당의 미온적 태도
로버트 로가 이끄는 아둘람파는 선거법 개정에 반대한다는 점에서 보수당과 긴밀히 협력하고 있었다. 아둘람파는 보수당과 마찬가지로 개혁에 반대했지만, 독립적인 위치에서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고 판단하여 보수당 내각 참여 제안을 거절했다. 1867년 2월 디즈레일리는 자신이 구상한 선거법 개정안을 하원에 제출했다. 하지만 노동자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가졌던 보수당은 여전히 개혁에 미온적인 태도를 보였고, 솔즈베리 경은 법안 도입을 강하게 반대하며 인도부 장관직에서 사임하기까지 했다.[5]3. 4. 하원 논의 지연과 여론의 압력
1867년 2월, 디즈레일리 재무장관은 자신이 구상한 선거법 개정안을 하원에 제출했다. 그러나 노동자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가진 보수당은 여전히 개혁에 미온적인 태도를 보였고, 솔즈베리 경은 법안 도입에 혐오감을 느껴 인도부 장관직에서 사임하기까지 했다. 또한, 로버트 로가 이끄는 아둘람파는 개혁에 반대하며 보수당과 협력했지만, 독자적인 영향력을 유지하려 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하원의 선거법 개정 논의는 진척되지 못했다.하원의 지지부진한 논의와 달리, 여론은 더 이상 침묵하지 않고 선거법 개정의 필요성을 강력하게 주장하기 시작했다. 특히 1866년 하이드 파크 시위와 같은 대규모 집회와 숙련 노동자 계급에 대한 긍정적 인식 변화는 개혁의 필요성을 더욱 부각시켰다. 보편적 선거권을 주장하는 개혁 동맹은 더욱 활발하게 움직이며 맨체스터, 글래스고 등 여러 도시에서 수십만 명이 참여하는 대규모 시위를 조직했다. 이들의 요구는 1840년대 차티스트처럼 혁명적인 언어를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정부에 상당한 압박을 가했다.
시위 열기가 고조되자 정부는 1867년 5월 하이드 파크에서의 시위를 금지했다. 하지만 시위대는 이를 무시하고 집회를 강행했고, 수천 명의 군인과 경찰이 동원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압도적인 군중에 밀려 정부는 감히 시위대를 해산시키지 못했다. 이 사태에 대한 책임을 지고 내무 장관이었던 스펜서 월폴은 결국 사임했다. 이처럼 거세지는 여론의 압력은 결국 보수당 정부가 기존의 입장을 바꿔 더 급진적인 개혁안을 고려하게 만드는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3. 5. 하이드 파크 시위와 정부의 대응
하원에서 선거법 개정에 대한 논의가 지지부진해지자, 선거법 개정을 요구하는 여론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특히 숙련 노동자 계층의 정치 참여 요구와 맞물려, 보편적 선거권을 주장하는 개혁 동맹을 중심으로 맨체스터, 글래스고 등 여러 도시에서 수십만 명이 참여하는 대규모 시위가 조직되었다. 이러한 움직임은 과거 차티스트처럼 혁명적인 언어를 사용하지는 않았으나, 정부에 상당한 압박으로 작용했다.이에 정부는 시위를 금지하는 조치를 취했다. 그러나 1867년 5월, 시위 금지령에도 불구하고 하이드 파크에서 대규모 시위가 강행되었다. 정부는 수천 명의 군인과 경찰을 동원하여 시위를 막으려 했으나, 엄청난 규모의 시위대에 압도되어 감히 무력 진압을 시도하지 못했다. 결국 내무 장관이었던 스펜서 월폴은 이 사태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임했다.
하이드 파크 시위에서 드러난 대중의 강력한 의지와 확산되는 불안감에 직면한 정부는 더 이상 개혁 요구를 외면할 수 없었다. 결국 정부는 기존의 소극적인 태도를 바꿔, 더 많은 사람들에게 선거권을 부여하는 방향으로 선거법 개정안을 서둘러 수정하게 되었다.
3. 6. 개정안 수정과 급진화
하원에서 선거법 개정에 대한 논의가 지지부진하자, 개혁 동맹을 중심으로 여론은 더 이상 침묵하지 않고 개혁의 필요성을 강력히 주장하기 시작했다. 맨체스터와 글래스고를 비롯한 여러 도시에서 수십만 명의 시민들이 시위에 참여했다. 이들은 차티스트와 같은 혁명적인 언어를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정부에게는 상당한 압박으로 작용했다. 정부는 시위를 금지했지만, 1867년 5월 하이드 파크에서 시위가 강행되었을 때, 모인 군중의 규모에 압도된 군과 경찰은 시위대를 해산시키지 못했다. 이 사태에 책임을 지고 내무 장관이었던 스펜서 월폴은 사임했다.시위의 규모와 심상치 않은 여론의 분위기, 그리고 대중 봉기의 가능성에 직면한 더비 경 내각은 기존의 개정안을 수정하여 더 많은 사람들에게 투표권을 부여하기로 결정했다. 벤저민 디즈레일리 재무장관은 윌리엄 유어트 글래드스턴의 제안이 아닌 한, 야당의 수정안을 포함한 대부분의 개혁 요구를 수용하는 유연한 태도를 보였다. 그 결과, 개정안은 애초 구상보다 훨씬 더 급진적인 내용을 담게 되었는데, 특히 도시 지역에 거주하는 대부분의 남성에게 선거권을 부여하는 획기적인 변화를 포함했다. 최종적으로 확정된 투표 자격은 다음과 같았다.
이러한 급진적인 개정안에 대해 자유당의 글래드스턴은 비판을 제기했다. 그러나 디즈레일리는 글래드스턴과의 치열한 의회 토론 과정에서 오히려 개정안을 더욱 급진적인 방향으로 밀고 나갔다. 이는 1866년 글래드스턴의 개혁안이 너무 과하다고 비판했던 디즈레일리 자신의 이전 입장과는 상반되는 행보였다.
디즈레일리는 새롭게 투표권을 얻게 될 유권자들이 자신들에게 권리를 부여한 보수당에게 감사하며 다음 선거에서 표를 줄 것이라고 계산했다. 그는 이러한 기대를 바탕으로 당내 반대파를 설득하여 개정안에 찬성하도록 이끌었다. 디즈레일리의 설득에 힘입어 개정안은 하원을 통과했고, 이후 상원에서도 큰 반대 없이 통과되었다. 그러나 디즈레일리의 예측과 달리, 1868년 영국 총선에서는 자유당 내 급진파가 부상하며 글래드스턴이 최종적인 정치적 승리를 거두게 된다. 이 법은 이후 선거구 경계를 조정하는 여러 추가 입법으로 보완되었다.
3. 7. 글래드스턴의 반대와 디즈레일리의 대응
대규모 시위와 여론의 압박 속에서 디즈레일리 내각은 기존 개혁안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에게 투표권을 주는 방향으로 수정했다.[5] 이 수정안은 도시 지역에 사는 남성 대부분에게 투표권을 부여하는 등 이전의 어떤 개혁안보다 급진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 구체적으로는 연간 10GBP 이상의 임대료를 내는 남성뿐 아니라, 대학 졸업자, 전문직 종사자, 50GBP 이상의 저축을 보유한 사람들에게도 투표권을 주기로 했다.[5] 보수당은 이러한 추가 투표권("화려한 선거권")이 대중 유권자를 견제하는 수단이 될 것으로 기대했다.[5]그러나 자유당의 글래드스턴은 이 개정안을 강하게 공격했다. 디즈레일리는 글래드스턴과의 치열한 의회 토론을 거치며 오히려 법안을 더욱 급진적인 방향으로 이끌었다. 그는 글래드스턴 본인이 제안한 것이 아니라면, 야당(자유당)이 제출한 대부분의 개혁 제안을 수용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심지어 야당이 제출한 수정안 중 투표 자격이 생기는 새로운 유권자 수를 3배로 늘리는 내용까지 받아들였다. 이는 1866년 글래드스턴의 법안이 너무 급진적이라고 비판하며 기회를 잡았던 디즈레일리가 오히려 더 나아간 것이었다.
디즈레일리는 새로 투표권을 얻게 된 유권자들이 자신들에게 권리를 부여한 보수당에 감사하며 다음 선거에서 지지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는 이러한 기대를 바탕으로 당내 의원들을 설득하여 개정안 찬성을 이끌어냈다.
디즈레일리의 설득으로 개정안은 하원과 상원을 무난히 통과했다. 하지만 그의 정치적 계산은 빗나갔다. 1868년에 치러진 총선에서는 디즈레일리의 예상과 달리 자유당 내 급진파가 부상했으며, 최종적인 정치적 승리는 글래드스턴에게 돌아갔다. 이 법은 이후 선거구 경계를 조정하는 여러 추가 법률로 보완되었다.
3. 8. 디즈레일리의 설득과 법률안 통과
디즈레일리는 자신이 구상한 선거법 개정안을 1867년 2월 하원에 제출했지만, 노동자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가진 보수당은 여전히 개혁에 미온적이었다. 솔즈베리 경은 법안 도입에 대한 혐오감으로 인도부 장관직에서 사임하기까지 했다.하원에서 선거법 개정 논의가 지지부진하자, 개혁 동맹을 중심으로 한 대중 운동은 더욱 거세졌다. 맨체스터, 글래스고 등 여러 도시에서 수십만 명이 참여하는 시위가 벌어졌고, 1867년 5월 정부의 금지 조치에도 불구하고 하이드 파크에서 대규모 시위가 강행되었다. 정부는 군대와 경찰을 동원했지만 압도적인 군중 규모에 결국 강경 진압을 포기했고, 이 사태에 대한 책임으로 내무 장관 스펜서 월폴이 사임했다.
격화되는 시위와 여론의 압박 속에서 디즈레일리 내각은 기존 개정안보다 훨씬 더 급진적인 방향으로 선회했다. 수정된 법안은 도시 지역에 거주하는 대부분의 남성에게 투표권을 부여하는 내용을 담았다. 구체적으로는 직접 세금을 납부하는 모든 남성, 연간 10GBP 이상의 임대료를 지불하는 남성에게 선거권을 부여했으며, 추가적으로 대학 졸업자, 전문직 종사자, 50GBP 이상의 저축을 보유한 사람들에게도 투표권을 인정했다.[5]
글래드스턴은 이 개정안을 공격했고, 디즈레일리는 글래드스턴과의 토론 과정에서 오히려 더욱 급진적인 내용을 수용하며 법안을 다듬었다. 디즈레일리는 새롭게 투표권을 얻게 될 유권자들이 자신들에게 선거권을 부여한 보수당에 감사하며 다음 선거에서 보수당을 지지할 것이라고 계산했다. 그는 이러한 논리로 보수당 의원들을 설득하여 개정안에 대한 지지를 확보하고자 했다.
디즈레일리의 설득 끝에 개정안은 하원을 통과했고, 이후 상원에서도 큰 반대 없이 통과되었다. 그러나 디즈레일리의 정치적 계산과 기대는 빗나갔다. 1868년에 치러진 총선에서는 새롭게 선거권을 얻은 유권자들이 자유당 내 급진파를 지지하는 결과로 이어졌고, 최종적으로 글래드스턴이 승리하며 정권을 잡게 되었다. 이 법은 이후 선거구 경계를 조정하는 여러 추가 입법을 통해 보완되었다.
4. 법률 조항
(내용 없음)
4. 1. 대표 의석 축소
1867년 선거법 개정으로 인해 부패 혐의가 있던 4개 자치구가 선거권을 박탈당했다.
이듬해인 1868년 1868년 인민 대표 (스코틀랜드) 법에 따라 추가로 7개의 잉글랜드 자치구가 선거권을 박탈당했다.
자치구 | 지역 | 비고 |
---|---|---|
아룬델 | 서식스주 | 1868년 선거권 박탈 |
애쉬버튼 | 데번주 | 1868년 선거권 박탈 |
다트머스 | 데번주 | 1868년 선거권 박탈 |
호니턴 | 데번주 | 1868년 선거권 박탈 (이전 2석) |
라임 레지스 | 도싯주 | 1868년 선거권 박탈 |
테트퍼드 | 노퍽주 | 1868년 선거권 박탈 (이전 2석) |
웰스 | 서머싯주 | 1868년 선거권 박탈 (이전 2석) |
또한, 다음 38개 자치구는 선출 의원 수가 2명에서 1명으로 감소했다.
자치구 | 지역 |
---|---|
앤도버 | 햄프셔주 |
보드민 | 콘월주 |
브리지노스 | 슈롭셔주 |
브리포트 | 도싯주 |
버킹엄 | 버킹엄셔주 |
치체스터 | 서식스주 |
치펜햄 | 윌트셔주 |
사이렌세스터 | 글로스터셔주 |
코커머스 | 컴벌랜드주 |
데바이즈 | 윌트셔주 |
도체스터 | 도싯주 |
이브셤 | 우스터셔주 |
길드포드 | 서리주 |
하위치 | 에식스주 |
헤트퍼드 | 허트퍼드셔주 |
헌팅던 | 헌팅던셔주 |
네즈버러 | 요크셔주 |
레오민스터 | 헤리퍼드셔주 |
루이스 | 서식스주 |
리치필드 | 스터퍼드셔주 |
러들로 | 슈롭셔주 |
리밍턴 | 햄프셔주 |
몰든 | 에식스주 |
말로우 | 버킹엄셔주 |
말턴 | 요크셔주 |
말버러 | 윌트셔주 |
뉴포트 | 와이트 섬 |
풀 | 도싯주 |
리치먼드 | 요크셔주 |
리폰 | 요크셔주 |
스탬퍼드 | 링컨셔주 |
태비스톡 | 데번주 |
테우크스버리 | 글로스터셔주 |
윈저 | 버크셔주 |
하위컴 | 버킹엄셔주 |
원래 1867년 개정안에서는 호니턴, 테트퍼드, 웰스 3개 자치구도 의석 수를 절반(2석에서 1석)으로 줄이도록 규정했으나, 이 조치가 실제로 시행되기 전인 1868년 1868년 인민 대표 (스코틀랜드) 법에 의해 완전히 선거권을 박탈당했다.
4. 2. 대표 의석 확대
1867년 선거법 개정으로 9개의 새로운 단독 의석 자치구가 만들어졌다.
다음 두 자치구는 2명의 의원을 갖게 되었다.
자치구 | 소속 주 |
---|---|
첼시 | 미들섹스 |
해크니 | 미들섹스 |
다음 자치구들은 의석 수가 다음과 같이 확대되었다.
4. 3. 기타 변경 사항
- 요크셔 웨스트 라이딩은 각 지역구에서 2명의 의원을 선출하는 3개의 지역구로 분할되었다.
- 체셔, 더비셔, 데번, 에식스, 켄트, 링컨셔, 노퍽, 서머싯, 스태퍼드셔, 서리는 각 지역구에서 2명의 의원을 선출하는 3개의 지역구로 분할되었다.
- 랭커셔는 기존에 3명의 의원을 선출하는 지역구와 2명의 의원을 선출하는 지역구가 있었으나, 이를 폐지하고 각 지역구에서 2명의 의원을 선출하는 4개의 지역구로 분할되었다.
- 런던 대학교에 1석의 의석이 부여되었다.
- 군주가 사망하더라도 의회는 계속 회기를 이어갈 수 있게 되었다.
- 의원들이 직책을 변경할 경우 재선거를 치를 필요가 없도록 면제되었다.
5.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의 개혁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에 대한 개혁은 각각 1868년 인민 대표법 (스코틀랜드)와 1868년 인민 대표법 (아일랜드)라는 별도의 법률을 통해 시행되었다.
스코틀랜드에서는 기존 5개 선거구가 의원을 추가로 확보했고, 3개의 새로운 선거구가 형성되었다. 또한 기존의 2개 자치구 선거구가 하나로 통합되어 전체적으로 7명의 의원이 증가했다. 이렇게 늘어난 스코틀랜드 의석은 잉글랜드의 7개 자치구가 선거권을 박탈당하면서 상쇄되어, 하원 전체 의원 수는 동일하게 유지되었다.
아일랜드의 대표성에는 변동이 없었다.
6. 영향
1867년 선거법 개정은 영국 정치 지형에 상당한 변화를 가져왔다. 당시 펀지의 만평은 보수당 소속 더비 경과 벤자민 디즈레일리가 자신들이 본래 의도했던 것보다 더 자유주의적인 개혁을 단행하여 정적인 휘그당을 견제하려는 모습을 풍자적으로 묘사하기도 했다. 이는 개혁의 정치적 배경과 예상치 못한 파급 효과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6. 1. 직접적인 영향
1867년 선거법 개정은 많은 노동자와 모든 세대주에게 선거권을 부여한 중요한 변화였다. 이러한 규모의 선거권 확대는 전례가 없었으며, 역사가 조나단 패리는 이를 "투표권 혁명" 또는 "자치구 선거 혁명"이라고 평가했다.[6] 이 개혁으로 인해 지주 계층이나 매우 부유한 사람들이 돈, 뇌물, 개인적인 인기를 통해 하원 의석을 쉽게 확보하는 것이 더 이상 보장되지 않게 되었다. 대신, 지역 주민들의 여론을 더 잘 반영하는 인물들이 당선될 가능성이 커졌다.
하지만 개혁에는 한계도 있었다. 각 정당의 조직위원회는 여전히 선거인 명부를 조작하여 반대파를 누락시키거나 지지층을 유리하게 등록할 가능성이 남아 있었다. 또한 유권자 수가 크게 늘어나면서 정당들은 선거 운동에 더 많은 자금을 필요로 하게 되었고, 이는 자본가 계층이 정당에 자금을 지원하는 방식으로 선거에 대한 영향력을 높일 수 있는 여지를 만들었다.
개혁 논의 과정에서 지역의 뇌물 수수와 부패 문제가 끊임없이 제기되었으나, 의회 지도부는 이 문제를 주요 개혁법안의 통과를 위해 분리하여 1868년 선거 청원법으로 별도 처리하기로 결정했다.
새로운 선거권 조항은 세금을 대신 내주는 '정산'(compounding) 문제와 세대주가 아닌 사람들의 투표권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지 못했다는 단점도 지녔다. 특히, 자유당 소속 그로스베너 호지킨슨이 발의한 법안에 따라 정산 제도가 폐지되면서, 모든 남성 세입자는 직접 지방세를 납부해야만 투표 자격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한편, 2022년 연구에 따르면 이 선거법 개정은 영국 내 정치 폭력을 감소시키는 긍정적인 효과도 가져온 것으로 분석되었다.[7]
6. 2. 의도하지 않은 영향
선거법 개정으로 유권자 수가 크게 늘어나면서 각 정당은 선거 운동에 더 많은 자금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또한 비밀 투표가 아직 도입되지 않았기 때문에, 늘어난 유권자에게 혜택을 주거나 매수하려는 시도가 증가하며 정당의 지출과 조직 규모가 커졌다. 이로 인해 자본가 계층은 자금이 필요한 정당에 돈을 빌려주는 방식으로 선거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한편, 선거구 재분할은 의도와 달리 영국 하원에서 상류층의 지배력을 오히려 강화하는 결과를 낳았다. 막대한 선거 운동 비용을 감당할 수 있는 상류층에게 유리해졌고, 기존의 부패 선거구 폐지로 인해 의석을 얻을 수 있었던 일부 중산층 상인들이 정치에서 배제되었기 때문이다.[4]
정치 지형에도 변화가 생겼다. 자유당은 새롭게 투표권을 얻은 노동계급 유권자들이 사회주의 정당으로 향할 것을 우려하여 좌파적인 정책으로 이동하는 모습을 보였다. 반면, 경쟁 정당인 보수당은 자유당을 견제하기 위해 사회주의 후보가 자유당에 맞서도록 뒤에서 지원하기도 했다.
또한, 개혁에도 불구하고 각 정당의 지역 조직위원회는 여전히 선거인 명부를 조작하여 반대파를 누락시키거나 지지층을 임의로 추가하는 등 선거에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할 여지가 남아 있었다.
7. 문학에서의 묘사
토머스 칼라일의 에세이 "나이아가라 폭포를 향해 쏘다: 그리고 그 다음?"은 제2차 선거법 개혁과 민주주의 전반을 나이아가라 폭포에서 떨어지는 것에 비유한다.[8] 그의 에세이는 마크 트웨인의 "나이아가라에서의 하루" (1869)라는 응답을 촉발했다.[9] 앤서니 트롤로프의 소설 ''피니어스 핀''은 제2차 선거법 개혁의 국회 통과 과정을 주요하게 다루며, 주인공 핀은 선거권을 박탈당할 예정인 7개의 가상의 자치구 중 한 곳의 의원으로 활동한다.[10]
참조
[1]
문서
short title
https://books.google[...]
[2]
서적
"Notes Upon 'the Representation of the People Act, 1867' (30 & 31 Vict. C. 102.): With Appendices Concerning the Antient Rights, the Rights Conferred by the 2 & 3 Will. IV C. 45, Population, Rental, Rating, and the Operation of the Repealed Enactments as to Compound Householders"
https://books.google[...]
[3]
서적
Encyclopedia of the Romantic Era, 1760–1850, Volume 1: A–K
[4]
서적
The American Civil War in the Shaping of British Democracy
Ashgate
[5]
웹사이트
Second Reform Act 1867 - UK Parliament
https://www.parliame[...]
[6]
간행물
The Rise and Fall of Liberal Government in Victorian Britain
[7]
논문
Ballot or Bullet: The Impact of the UK's Representation of the People Act on Peace and Prosperity
http://dx.doi.org/10[...]
2023
[8]
서적
The Carlyle Encyclopedia
https://books.google[...]
Fairleigh Dickinson University Press
[9]
웹사이트
Thomas Carlyle
https://www.oxfordbi[...]
2018-01-11
[10]
논문
Trollope's Phineas Finn and H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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