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일본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1998년 일본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는 1998년 7월에 치러졌으며, 오부치 게이조, 가지야마 세이로쿠, 고이즈미 준이치로가 후보로 출마했다. 참의원 선거 패배로 하시모토 류타로 총재가 사퇴 의사를 표명하면서 실시되었으며, 자민당 최대 파벌인 헤이세이 연구회의 분열과 제3의 후보 추대 과정을 거쳤다. 선거 결과, 오부치 게이조가 225표를 얻어 과반수로 총재에 당선되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1998년 일본의 선거 - 제18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
1998년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는 소선거구제와 비례대표제로 실시되었으며, 장기 불황 속에서 자민당의 참패와 야당의 약진을 가져와 하시모토 총리 사퇴 및 일본 정계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 1998년 7월 - 국제형사재판소에 관한 로마 규정
국제형사재판소에 관한 로마 규정은 국제형사재판소의 설립과 운영에 관한 국제 조약으로, 집단살해죄, 인도에 반한 죄, 전쟁범죄, 침략범죄 등 가장 심각한 범죄에 대한 ICC의 관할권을 규정하며, 1998년 로마에서 채택되어 2002년에 발효되었다. - 1998년 7월 - 1998년 FIFA 월드컵
1998년 FIFA 월드컵은 프랑스에서 개최되어 32개국이 참가, 골든골 제도가 도입되었으며 프랑스가 브라질을 꺾고 우승, 지네딘 지단 활약, 다보르 슈케르가 득점왕에 올랐으나 개최국 선정 과정에서 부정부패 의혹이 제기된 대회이다. - 일본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 - 시나 재정
시이나 재정은 1974년 일본 자유민주당 총재 선출 과정에서 시이나 에쓰사부로 부총재가 미키 다케오를 총재로 추천하여 당내 갈등을 중재하고 미키 다케오를 총리로 선출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정치적 결정이다. - 일본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 - 5인조 (자유민주당)
5인조는 2000년 오부치 게이조 총리 뇌경색 입원 후 자민당 주요 인사 5명이 모리 요시로를 후임 총리로 추대하고 아오키 간오를 총리 대리로 결정한 사건을 지칭하며, 밀실 협의라는 비판과 함께 일본 정치에 큰 영향을 미쳤다.
1998년 일본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 | |
---|---|
선거 정보 | |
선거 이름 | 1998년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 |
유형 | 총재 선거 |
진행 여부 | 아니오 |
이전 선거 | 1997년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 |
이전 선거 연도 | 1997년 |
다음 선거 | 1999년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 |
다음 선거 연도 | 1999년 |
선거 날짜 | 1998년 7월 24일 |
선거 제도 | 양원 의원 총회에 의한 선출 |
유권자 수 | 당 소속 중의원 의원: 263 |
유권자 수 | 당 소속 참의원 의원: 104 |
유권자 수 | 지방 대의원 표: 47 |
유권자 수 | 합계: 414 |
후보 1 | |
![]() | |
후보 1 | 오부치 게이조 |
후보 1 득표수 | 225 |
후보 2 | |
![]() | |
후보 2 | 가지야마 세이로쿠 |
후보 2 득표수 | 102 |
후보 3 | |
![]() | |
후보 3 | 고이즈미 준이치로 |
후보 3 득표수 | 84 |
총재 | |
선거 전 총재 | 하시모토 류타로 |
선거 후 총재 | 오부치 게이조 |
2. 역사적 배경
1993년 총선에서 자민당은 과반수 의석 확보에 실패하여 야당으로 전락했다. 이후 일본사회당, 신당 사키가케와 연립하여 자사사 연립 정권을 수립, 1994년에 여당으로 복귀했다. 무라야마 도미이치 총리 (일본사회당 위원장) 퇴진 후, 하시모토 류타로 (자민당 총재)가 총리직을 승계하며 자민당 중심의 내각이 부활했다.[7]
1998년 일본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는 하시모토 류타로 총리의 사임으로 인해 치러지게 되었다. 하시모토 총리는 제18회 참의원 선거에서 자민당이 패배한 것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임했다.
1998년 7월 24일에 실시된 총재 선거에서 오부치 게이조는 225표를 얻어 당선되었다. 가지야마 세이로쿠는 102표, 고이즈미 준이치로는 84표를 얻었다. 2명이 기권, 1명이 무효표를 던졌다.[1]
이 시기 자민당 내에는 두 가지 흐름이 존재했다. 하나는 사회당과의 관계를 중시하며 자사사 연립을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세력으로, 가토 고이치 간사장과 노나카 히로무 간사장 대리가 중심이었다. 다른 하나는 사회당과 거리를 두고 오자와 이치로를 중심으로 한 세력과 제휴하여 보보 연합 구상을 내세우는 세력이었다. 이들은 나카소네 야스히로, 가메이 시즈카, 가지야마 세이로쿠가 중심이었다.[7]
1998년 7월에 예정된 참의원 선거는 자민당의 열세가 예상되었다. 실제로 선거 분위기가 자민당에게 불리하게 돌아가자 가토는 "자민당이 패배하면 가지야마 대망론이 나올 거다"라며 불안감을 감추지 못했다. 개표가 끝나기 직전인 7월 12일 심야에 하시모토는 총리직 사퇴를 표명했다. 자민당이 얻은 개선 의석은 16석이 줄어든 44석이었고, 가토 역시 하시모토의 뒤를 이어 퇴진을 표명해야 했다. 이로써 하시모토와 가토는 차기 총재 선거에 출마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고, 남은 유력 후보는 오부치 게이조와 가지야마 정도였다.[7]
3. 후보자
오부치 게이조 가지야마 세이로쿠 고이즈미 준이치로 -- -- -- 중의원 의원(12선, 군마현 제5구)
외무대신(1997-현직)중의원 의원(9선, 이바라키현 제4구)
내각관방장관(1996-1997)중의원 의원(9선, 가나가와현 제11구)
후생대신(1996-현직)헤이세이 연구회(오부치파) 무소속 세이와 정책연구회(미쓰즈카파) 도쿄도 출신 이바라키현 출신 가나가와현 출신
4. 선거 과정
당시 자민당 내에서는 일본사회당, 신당 사키가케와 연립 정권(자사사 연립)을 유지하려는 세력과, 오자와 이치로를 중심으로 한 세력과 연대하여 보보 연합을 추진하려는 세력이 대립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자민당 최대 파벌인 헤이세이 연구회는 하시모토의 후임으로 오부치 게이조를 추대하기로 결정했다.[7] 그러나 가지야마 세이로쿠는 이에 반발하여 파벌을 탈퇴하고 독자 출마를 선언하면서 헤이세이 연구회는 분열되었다.
자민당은 두 후보 간의 정면충돌을 피하고자 세이와 정책연구회 소속의 고이즈미 준이치로를 제3의 후보로 추대했다. 고이즈미는 파벌 내 갈등(가메이 시즈카 등의 가지야마 지지)에 반발하여 출마를 결심했고, 세이와 정책연구회 역시 분열되었다.
다나카 마키코는 후보들을 각각 범인(凡人, 오부치), 군인(軍人, 가지야마), 변인(変人, 고이즈미)으로 묘사하여 화제를 모았다.[8]오부치 게이조 가지야마 세이로쿠 고이즈미 준이치로 -- -- -- 중의원 의원(12기 · 군마 5구)
외무대신중의원 의원(9기 · 이바라키 4구)
내각관방장관중의원 의원(9기 · 가나가와 11구)
후생대신헤이세이 연구회
(오부치 게이조 파벌)무파벌 세이와 정책 연구회
(미쓰즈카 히로시 파벌)군마현 이바라키현 가나가와현 1998년 7월 17일 출마 표명 1998년 7월 17일 출마 표명 1998년 7월 17일 출마 표명
5. 선거 결과
5. 1. 상세 결과
후보자 | 득표수 | 득표율 |
---|---|---|
오부치 게이조 | 225표 | 54.74% |
가지야마 세이로쿠 | 102표 | 24.82% |
고이즈미 준이치로 | 84표 | 20.44% |
합계 | 411표 | 100% |
유효 투표수 | 411표 | 99.76% |
무효표·백표 | 1표 | 0.24% |
투표자 수 | 412표 | 99.52% |
기권자 수 | 2표 | 0.48% |
유권자 수 | 414표 | 100% |
6. 파벌 간 역학 관계 변화
1993년 총선 이후 자민당은 일본사회당, 신당 사키가케와 연립 정권(자사사 연립 정권)을 구성하여 여당으로 복귀했다. 무라야마 도미이치 총리 사임 후, 자민당 총재 하시모토 류타로가 총리가 되면서 자민당 중심의 내각이 수립되었다. 이 시기 자민당 내에는 두 가지 흐름이 있었다. 하나는 가토 고이치 간사장과 노나카 히로무 간사장 대리를 중심으로 사회당과의 협력을 중시하는 세력이었고, 다른 하나는 나카소네 야스히로, 가메이 시즈카, 가지야마 세이로쿠를 중심으로 오자와 이치로와의 연대를 통해 보보 연합 구상을 추진하는 세력이었다.
1998년 참의원 선거에서 자민당의 패배가 예상되자, 가토는 "자민당이 패배하면 가지야마 대망론이 나올 것이다"라며 불안감을 드러냈다. 선거 결과 자민당은 참패했고, 하시모토는 총재직에서 사임했다. 유력한 총재 후보는 오부치 게이조와 가지야마 세이로쿠 두 명으로 좁혀졌다.
자민당 최대 파벌인 헤이세이 연구회(오부치파)는 비밀리에 간부 회의를 열어 오부치를 후임 총재로 추대하기로 합의했다. 이는 다케시타 노보루의 의향에 따른 것이었다.[7] 7월 14일, 와타누키 다미스케, 가지야마, 무라오카 가네조, 노나카, 니시다 마모루 등이 모여 오부치 지지를 재확인했다. 같은 날 밤, 야마사키 다쿠는 정책과학연구소(와타나베파)를 탈퇴하고 근미래정치연구회(야마사키파)를 결성하여 오부치를 지지하겠다고 밝혔다.
7월 15일, 헤이세이 연구회 총회 직전 가지야마가 총재 선거 출마를 선언하고 파벌을 이탈하면서(사토 신지, 스가 요시히데도 함께 이탈) 헤이세이 연구회는 분열되었다. 자민당은 두 사람의 정면 충돌을 피하기 위해 세이와 정책연구회 소속의 고이즈미 준이치로를 제3후보로 옹립했다. 노나카는 고이즈미에게 추천인을 빌려주겠다고 할 정도로 적극적이었다. 고이즈미 역시 가메이 시즈카 등이 가지야마 지지를 주장하며 파벌 주도권을 쥐려는 것에 반발하여 출마를 결심했다.
결국, 헤이세이 연구회에 이어 세이와 정책연구회도 사실상 분열되었고, 선거 후 가메이는 파벌을 이탈하여 지수회를 결성했다.
7. 영향 및 평가
1998년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는 일본 정치에 여러 측면에서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오부치 게이조는 총리로 선출된 후 안정적인 국정 운영과 경제 회복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7] 그는 강력한 리더십을 바탕으로 여러 정책을 추진했다.
당시 자민당 내에서는 파벌 간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이번 총재 선거는 헤이세이 연구회와 21세기를 생각하는 모임·신정책연구회 등 주요 파벌이 분열된 상태에서 치러졌다.[7] 이는 파벌의 영향력이 약화되고 개인의 역량이 중요해지는 경향으로 이어졌다.
고이즈미 준이치로는 비록 총재 선거에서는 패배했지만, 개혁적인 이미지를 구축하며 주목을 받았다. 다나카 마키코는 이 선거에 출마한 사람들을 가리켜 오부치는 범인(凡人), 가지야마 세이로쿠는 군인(軍人), 고이즈미는 변인(変人)이라 표현하여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8] 고이즈미는 이후 차기 총리 후보로서의 입지를 다져나갔다.
1990년대 후반, 일본 정치는 새로운 세대의 정치인들이 등장하며 변화의 시기를 맞이했다. 1998년 자민당 총재 선거는 이러한 세대교체의 흐름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건 중 하나였다.
참조
[1]
뉴스
金融危機、白熱の政策論争 98年(平成10)自民総裁選 平成Politics30
https://archive.is/3[...]
日本経済新聞社
2018-08-30
[2]
서적
平成政権史
日本経済新聞出版社
[3]
웹사이트
ごまめの歯ぎしり ハードコピー版 号外 『敗軍の兵、将を語る~1998.8~』敗軍の兵、将を語る
https://www.taro.org[...]
[4]
뉴스
野田聖子氏「小渕人事のすさまじさ、だんだん伝わる」 (5月4日付朝刊政界面関連インタビュー)
https://www.nikkei.c[...]
2018-12-30
[5]
문서
衆議院議長就任で党籍離脱している伊藤宗一郎を除く。
[6]
문서
参議院議長就任で党籍離脱している斎藤十朗を除く。
[7]
뉴스
金融危機、白熱の政策論争 98年(平成10)自民総裁選 平成Politics30
http://senkyo.mainic[...]
日本経済新聞社
2024-06-30
[8]
서적
平成政権史
日本経済新聞出版社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