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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개조 요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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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1개조 요구는 1915년 일본 제국이 중화민국에 제출한 일련의 요구 사항을 의미한다. 1차 세계 대전 중 일본은 중국 내 세력 확대를 꾀하며 산둥성, 남만주, 동부 몽골 등에서의 특수 권익, 한야평공사의 중일 합변, 중국 연안 불할양, 중국 정부 고문 채용 등을 요구했다. 위안스카이 정부는 처음에는 거부했으나, 일본의 최후 통첩에 굴복하여 5월 9일 요구를 승인했다. 이로 인해 중국에서는 반일 감정이 고조되었고, 5.4 운동의 배경이 되었으며, 국제 사회의 비판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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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개조 요구
개요
명칭21개조 요구
원어 명칭ja: 対華21ヶ条要求 (Taika Nijūikkajō Yōkyū)
zh: 二十一条 (Èrshíyī tiáo)
별칭21개 조항
배경
시기1915년
주요 내용일본이 제1차 세계 대전 중 위안 스카이 정부에 제시한 중국에서의 권익 확대를 위한 요구
일본의 의도극동 지역에서의 권익 확대
국제적 발언권 강화
일본의 참전 이유영일동맹을 이유로 연합국 측에 가담
전쟁 참여 목적가토 다카아키 외상의 발언에서 알 수 있듯이, 영일동맹의 약속
독일의 근거지를 아시아로부터 일소하여 일본의 지위를 높임
일본의 점령 지역중국 산둥 성의 독일 이권 지역
독일령 남양 군도
요구 내용
주요 조항제1호: 산둥 성에 대한 일본의 권리 승인 요구
제2호: 만주와 내몽골에서의 일본의 특수 권익 인정 요구
제3호: 한예핑 공사 공동 경영 요구
제4호: 중국 연안의 항구, 섬 할양 금지 요구
제5호: 중국 정부의 정치, 재정, 군사 고문에 일본인 초빙 요구
요구 사항 상세 내용중국 정부의 승인 하에 일본인의 토지 소유, 거주 및 상업 활동의 자유화 요구
경과
일본의 태도중국 측의 미온적인 반응에 최후 통첩을 보내 강압적으로 요구
중국의 반응쉽게 용인하지 않음
격렬한 배일 운동 발생
열강의 반응일본의 행동에 의심을 품음
결과일본의 요구 대부분을 중국이 승인
영향
5.4 운동파리 강화 회의가 열리던 1919년에 격렬한 배일 운동 발생

2. 배경

우치다 료헤이를 영수로 둔 일본 우익 단체 흑룡회는 중국으로 세력을 확대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중국 혁명과 공화제를 지지했다. 1914년 10월, 흑룡회는 "중국 문제 해결에 관한 의견서"에서 일본과 중국 간 비밀군사동맹조약 체결을 제안하며, 일본이 중국의 남만주·내몽고·산동·복건 등에서 특수 권익을 확보하고, 중국의 군사, 재정, 교육 등을 일본에 위탁하도록 요구했다. 이는 사실상 중국을 일본의 식민지로 만드는 것이었으며, 이 의견서는 21개조 요구의 토대가 되었다.

신해혁명 이후 중화민국은 군벌 시대로 이어져 각지의 군벌들이 세력 다툼을 벌이는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유럽 열강들이 중국에 대한 영향력을 줄이면서 이러한 혼란은 더욱 심화되었다.

2. 1. 제1차 세계 대전과 일본의 팽창

일본은 청일 전쟁러일 전쟁에서 승리하여 중국 북부와 남부, 만주에서 광대한 세력권을 확보했다.[3]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멸망하고 중화민국이 수립되자, 일본은 이를 중국 내 입지를 확대할 기회로 여겼다.[3]

제1차 세계 대전유럽에서 발발하자, 일본은 영일 동맹에 따라 1914년 8월 23일 독일 제국에 선전 포고를 하고 연합국의 일원으로 참전했다. 일본은 칭다오 전투를 통해 독일의 자오저우만 조차지를 점령하고, 산둥성의 독일 이권을 차지하려 했다.

중화민국은 처음에는 중립을 지켰으나, 일본의 선전 포고에 대해 산둥 반도에 교전 구역을 설정했다. 일본군은 이 교전 구역 밖에서 군사 행동을 벌였고, 중화민국은 이를 유효하게 막지 못했다. 일본군은 칭다오 전투 당시 "교전 구역" 밖으로 진출하여 교제 철도를 점령하고, 1914년 10월 7일에는 지난까지 진출했다.

중화민국 정부는 교전 구역 철폐와 일본군의 철수를 요구했지만, 일본은 전시 국제법상의 군사 점령을 이유로 이를 거부했다. 일본은 독일과의 강화 조건에 따라 산둥 반도의 독일 조차권을 계승한 후 중화민국에 반환할 의향을 밝혔으나, 중화민국은 직접 반환을 요구했다.

일본 정부는 위안스카이 대총통과 직접 교섭하여 사태를 타개하려 했다. 1915년 1월 18일, 오쿠마 시게노부 내각 (가토 다카아키 외무 대신)은 위안스카이에게 5호 21개 조의 요구를 제시했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제1호 산둥성에 관하여
  • * 독일산둥성에 가지고 있던 권익을 일본이 계승할 것
  • * 산둥성 내 및 그 연안 도서를 타국에 양도·대여하지 않을 것
  • * 즈푸 또는 룽커우와 교주만에서 지난에 이르는 철도 (교제 철도)를 연락하는 철도 부설권을 일본에 허가할 것
  • * 산둥성의 항만 도시를 외국인의 거주·무역을 위해 새롭게 개방할 것
  • 제2호 남만주 및 동부 내몽골에 관하여
  • * 뤼순·다롄 (관동주)의 조차 기한, 만철·안펑 철도의 권익 기한을 99년으로 연장할 것 (뤼순·다롄은 1997년까지, 만철·안펑 철도는 2002년까지)
  • * 일본인에게 각종 상공업상의 건물 건설, 경작에 필요한 토지의 대차·소유권을 부여할 것
  • * 일본인이 남만주·동부 내몽골에서 자유롭게 거주·왕래하거나, 각종 상공업 등의 업무에 종사하는 것을 허가할 것
  • * 일본인에게 지정하는 광산의 채굴권을 부여할 것
  • * 타국인에게 철도 부설권을 부여할 때, 철도 부설을 위해 타국으로부터 자금 원조를 받을 때, 또한 제세를 담보로 차관을 받을 때는 일본 정부의 동의를 얻을 것
  • * 정치·재정·군사에 관한 고문 교관이 필요한 경우에는 일본 정부에 협의할 것
  • * 지린-창춘 철도의 관리·경영을 99년간 일본에 위임할 것
  • 제3호 한예핑 공사 (중화민국 최대의 제철 회사)에 관하여
  • * 한예핑 공사를 일중 합작화할 것. 또한, 중국 정부는 일본 정부의 동의 없이 동 공사의 권리·재산 등을 처분하지 않도록 할 것.
  • * 한예핑 공사에 속하는 제 광산 부근의 광산에 대해, 동 공사의 승낙 없이 타자에게 채굴을 허가하지 않을 것. 또한, 동 공사에 직접적·간접적으로 영향이 미칠 우려가 있는 조치를 취하는 경우에는, 먼저 동 공사의 동의를 얻을 것
  • 제4호 중국의 영토 보전에 관하여
  • * 연안의 항만·도서를 외국에 양도·대여하지 않을 것 (※주, 불할양 조약 및 세력 범위를 참조)
  • 제5호 중국 정부의 고문으로서 일본인을 고용할 것, 기타
  • * 중국 정부에 정치 고문, 경제 고문, 군사 고문으로서 유력한 일본인을 고용할 것
  • * 중국 내지의 일본 병원·사원·학교에 대해, 그 토지 소유권을 인정할 것
  • * 지금까지는 일중 간에 경찰 사고가 발생하는 경우가 많아, 불쾌한 논쟁을 야기한 것도 적지 않았으므로, 필요성이 있는 지방의 경찰을 일중 합동으로 하거나, 또는 그 지방의 중국 경찰에 다수의 일본인을 고용하는 것으로 하여, 중국 경찰 기관의 쇄신 확립을 도모할 것
  • * 일정 수량 (중국 정부 소유의 반수) 이상의 병기를 일본으로부터 공급하고, 혹은 중국 국내에 일중 합작의 병기창을 설립하여, 일본으로부터 기술자·재료의 공급을 받을 것
  • * 우창장시를 연락하는 철도, 및 난창·항저우 간, 난창·차오저우 간의 철도 부설권을 일본에 부여할 것
  • * 푸젠성에 있어서의 철도·광산·항만의 설비 (조선소 포함)에 관해, 건설에 외국 자본이 필요한 경우에는 먼저 일본에 협의할 것
  • * 중국에서 일본인의 포교권을 인정할 것


일본은 제2호, 특히 뤼순·다롄의 조차지 기한 연장과 만철·안펑 철도의 기한 연장을 중시했다.

2. 2. 중국의 상황

신해혁명 이후 중화민국은 혼란스러운 상황에 놓였으며, 이는 군벌 시대로 이어져 각지의 군벌들이 세력 다툼을 벌이는 원인이 되었다. 이러한 혼란은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유럽 열강들이 중국에 대한 영향력을 줄이면서 더욱 심화되었다. 당시 위안스카이 정부는 취약한 상황에서 외세에 의존하는 경향을 보였다.

2. 3. 흑룡회의 역할

우치다 료헤이를 영수로 둔 일본 우익 단체 흑룡회는 중국으로 세력을 확대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중국 혁명과 공화제를 지지했다. 1914년 10월, 흑룡회는 "중국 문제 해결에 관한 의견서"를 통해 중국을 멸망시키려는 의도를 드러냈다.

이 의견서에서 흑룡회는 일본과 중국이 비밀군사동맹조약을 체결하되, 일본이 중국의 남만주·내몽고·산동·복건 등에서 특수한 권리를 누리고, 중국의 군대·군수공장·해군·재정·교육 등을 모두 일본에게 위탁 처리하며, 중국이 타국에 차관이나 영토 할양을 할 경우 반드시 일본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는 조건을 제시했다. 이는 사실상 중국을 일본의 식민지로 만드는 것이었으며, 이 의견서는 21개조 요구의 토대가 되었다.

3. 21개조 요구의 내용

흑룡회 영수 우치다 료헤이는 중국 혁명과 공화제를 지지했지만, 그 이면에는 중국으로 세력을 확대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그는 1914년 "중국 문제 해결에 관한 의견서"에서 일본과 중국의 비밀 군사 동맹 조약 체결을 제안하며, 중국의 군사, 경제, 재정 등을 일본에 위탁하도록 요구했다. 이는 사실상 중국을 일본의 식민지로 만들려는 의도였으며, 21개조 요구의 토대가 되었다.

1915년 1월, 일본 외무 대신 가토 다카아키위안스카이 중국 총통에게 21개조 요구를 제출했다. 주요 내용은 산둥성, 남만주, 동부 몽골에서 일본의 특수 권익 승인, 한야핑 공사의 중·일 합작, 중국 연안 불할양, 중국 정부 각 기관 및 군대에 일본인 고문 고용 등이었다.

히오키 에키


21개조 요구는 다음과 같이 5개 그룹으로 나눌 수 있다.[8]

21개조 요구의 5개 그룹
그룹주요 내용
제1호산둥성에서 독일의 권익을 일본이 계승, 산둥성 내 및 연안 도서 불할양, 철도 부설권 및 항만 도시 개방
제2호남만주 및 동부 내몽골에서 일본의 조차권 연장, 일본인의 거주, 사업, 토지 소유권, 광산 채굴권 허용, 철도 부설 및 차관 제공 시 일본 동의, 고문 초빙 시 일본과 협의, 지린-창춘 철도 관리 위임
제3호한야핑 공사의 중·일 합작, 일본 동의 없는 권리 및 재산 처분 금지, 광산 채굴 허가 시 한야핑 공사 동의
제4호중국 연안 항만 및 도시 불할양
제5호중국 정부에 일본인 고문 초빙, 일본 병원·학교·사찰 토지 소유권 인정, 경찰 합동 또는 일본인 초빙, 병기 공급 또는 합작 병기창 설립, 철도 부설권 부여, 푸젠성 관련 협의, 일본인 포교권 인정



오쿠마 시게노부 내각의 가토 다카아키 외무대신은 21개조 요구 초안을 작성했고, 이는 원로와 다이쇼 천황에 의해 검토되어 제국의회에서 승인되었다. 주중 일본 대사 히오키 에키는 1915년 1월 18일, 중국이 이 요구를 거부할 경우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는 경고와 함께, 베이양 정부의 위안스카이 총통에게 이 목록을 비공개로 전달했다.[4][5][6][7]

이는 중국인들의 반대와 구미 열강의 반발을 불러일으켜 국제 문제로 번졌다. 중국 정부는 처음에는 거부했으나, 일본의 최후 통첩에 굴복하여 5월 9일 요구를 승인했다.[44]

3. 1. 제1호: 산둥성

일본은 제1차 세계 대전으로 다른 열강들이 중국에 대한 세력을 후퇴시킨 틈을 타 산둥성에서 독일이 차지했던 항구와 이권, 운영을 확인하고 영향력을 확대하려 했다.[8]

1915년 1월 18일, 일본 제국오쿠마 시게노부 내각 (가토 다카아키 외무 대신)은 위안스카이에게 5호 21개조 요구를 제시했는데, 그중 제1호는 다음과 같았다.

  • 독일산둥성에 가지고 있던 권익을 일본이 계승할 것
  • 산둥성 내 및 그 연안 도서를 타국에 양도·대여하지 않을 것
  • 즈푸 또는 룽커우와 교주만에서 지난에 이르는 철도 (교제 철도)를 연락하는 철도 부설권을 일본에 허가할 것
  • 산둥성의 항만 도시를 외국인의 거주·무역을 위해 새롭게 개방할 것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중국 정부는 독일군이 산둥성에 관한 조약 등에 의해 중국에 대해 소유하는 일체의 권리·이익·양여 등의 처분에 대해 일본 정부가 독일 정부와 협의할 일체의 사항을 승인한다.

# 중국 정부는 산둥성 내 또는 그 연해 일대의 토지 또는 도서를 어떠한 명목으로도 타국에 양여하거나 대여하지 않는다.

# 중국 정부는 지부(연대의 옛 이름.) 또는 용구교주만으로부터 제남에 이르는 철도와 연결하는 철도의 부설을 일본국에 허가한다.

# 중국 정부는 외국인의 거주 및 무역을 위하여 자진해서 산둥성에 있어서의 주요 도시를 개항할 것을 약속한다. 그 지점은 별도로 협정한다.

일본은 칭다오 전투 이후 교제선 부속 지역 점령을 지속했다. 중화민국 정부는 독일 권익이 중화민국 정부의 관리 하에 놓여야 한다고 요구했지만, 일본은 전시 국제법상의 군사 점령으로서 일본군이 관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협상 결과, 1915년 5월 25일에 체결된 조약 및 교환 공문에는 다음 내용이 포함되었다.

  • 산둥성에 관한 조약
  • 산둥성 불할양에 관한 교환 공문
  • 산둥성에서의 도시 개방에 관한 교환 공문
  • 교주만 조차지에 관한 교환 공문

3. 2. 제2호: 남만주 및 동부 내몽골

南滿洲及東部內蒙古|남만주 및 동부 내몽골중국어에서 일본의 특수 권익과 관련된 요구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여순, 대련 조차 기한 및 남만주 및 안봉 양 철도의 기한을 99개년으로 연장한다.[23]
  • 일본 국민은 남만주 및 동부 내몽골에서 각종 상공업 건물의 건설 및 경작을 위해 필요한 토지의 임차권 또는 소유권을 취득할 수 있다.[23]
  • 일본 국민은 남만주 및 동부 내몽골에서 자유로이 거주, 왕래하며 각종 상공업 및 기타 업무에 종사할 수 있다.[23]
  • 중국 정부는 남만주 및 동부 내몽골에 있는 광산 채굴권을 일본 국민에게 부여한다. 채굴할 광산은 별도로 협정한다.[23]
  • 중국 정부는 다음 사항에 관하여 일본 정부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23]
  • * 남만주 및 동부 내몽골에서 타국인에게 철도 부설권을 부여하거나 또는 철도 부설을 위하여 타국인으로부터 자금을 공급받는 경우.
  • * 남만주 및 동부 내몽골에 있어서의 제세를 담보로 하여 타국으로부터 차관을 얻는 경우.
  • 중국 정부는 남만주 및 동부 내몽골에 있어서 정치, 재정, 군사에 관한 고문, 교관을 필요로 할 경우, 반드시 먼저 일본과 협의해야 한다.[23]
  • 중국 정부는 길장철도의 관리 경영을 99개년간 일본에 위임한다.[23]


일본은 1915년 5월 9일 위안스카이 정부에 이 요구를 수락하도록 했다.[44]

3. 3. 제3호: 한야핑 공사

한야핑 공사는 중화민국 최대의 제철 회사였는데, 일본은 이 회사를 일중 합작화하고, 중국 정부가 일본의 동의 없이 회사의 권리, 재산 등을 처분하지 못하도록 요구했다.[23] 양 체약국은 장래 적당한 시기에 한야핑 공사를 양국의 합판(合辦)으로 할 것과 중국 정부는 일본국 정부의 동의 없이 동 공사에 속하는 일체의 권리와 재산을 스스로 처분하거나 또는 동 공사가 처분하지 아니하겠다는 것을 약정하였다.[23]

일본국 자본가측 채권 보호의 필요상 중국 정부는 한야핑 공사에 속하는 광산 부근에 있어서의 광산에 대하여는 동 공사의 승인 없이는 그것의 채굴을 동 공사 이외에 허가하지 않겠다는 것과 기타 직접으로나 간접으로 동 공사에 영향을 줄 우려가 있는 조치를 실시하고자 하는 경우에는 먼저 동 공사의 동의를 얻을 것을 약정하였다.[23]

3. 4. 제4호: 영토 불할양

중국 정부는 중국 연안의 항만 및 도시를 타국에 양여하거나 대여하지 않을 것을 약정했다.[23]

3. 5. 제5호: 희망 조항

다음은 일본이 중국에 요구한 제5호 희망 조항의 내용이다.

  • 중국 중앙 정부는 정치, 재정, 군사 고문으로 유력한 일본인을 초빙해야 했다.[23]
  • 중국 내 일본 병원, 학교, 사찰은 토지 소유권을 인정받아야 했다.[23]
  • 중·일 간 경찰 사고가 빈번한 지역은 중·일 합동 경찰제를 실시하거나, 해당 지역 경찰 관청에 일본인을 초빙하여 중국 경찰 기관을 쇄신해야 했다.[23][24]
  • 일본으로부터 일정량의 병기를 공급받거나, 중국에 중일 합작 병기창을 설립하고 일본으로부터 기술자와 재료를 공급받아야 했다.[23]
  • 우창장시를 연결하는 철도, 난창-항저우 간, 난창-차오저우 간 철도 부설권을 일본에 부여해야 했다.[23]
  • 푸젠성의 철도, 광산, 항만 설비(조선소 포함)에 외국 자본이 필요한 경우, 먼저 일본과 협의해야 했다.[23]
  • 중국 내 일본인의 포교권을 인정해야 했다.[23]


일본은 이러한 제5호 조항이 야기할 부정적인 반응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그 내용을 비밀로 하려 했다.

4. 협상 과정

우치다 료헤이는 신해혁명 기간에 "중국개조론"을 통해 일본이 중국을 개조하는 주도권을 장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14년 10월에는 "중국 문제 해결에 관한 의견서"를 통해 일본과 중국 간 비밀군사동맹조약 체결을 제안하며, 중국의 여러 지역에 대한 특수 권리, 군대, 재정 등을 일본에 위탁하는 등 사실상 중국을 일본의 식민지로 만들려는 의도를 드러냈다. 이 의견서는 21개조 요구의 토대가 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유럽 열강의 세력이 약화되고 군벌 시대로 중국이 혼란한 틈을 타, 1915년 1월 가토 다카아키 일본 외무 대신위안스카이 중국 총통에게 21개조 요구를 제출했다. 주요 내용은 산둥성, 남만주, 동부 몽골에서의 일본 특수권익 승인, 한야평공사의 중·일 합변화, 중국 연안 불할양, 중국 정부 기관 및 군대에 일본인 고문 고용 등이었다.

21개조 요구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요구내용
제1호 산둥성에 관하여
제2호 남만주 및 동부 내몽골에 관하여
제3호 한예핑 공사 (중화민국 최대의 제철 회사)에 관하여
제4호 중국의 영토 보전에 관하여
제5호 중국 정부의 고문으로서 일본인을 고용할 것, 기타



이는 중국인들의 반대를 불러일으켰고, 구미 열강을 자극하여 국제문제로 번졌다. 중국 정부는 당초 이를 거부했으나, 일본은 1915년 5월 7일 최후 통첩을 보냈고, 5월 9일 중국은 요구를 승인했다.[44]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후, 일본은 영일 동맹에 따라 독일 제국에 선전 포고하고 연합국의 일원으로 참전했다. 일본은 교주만 조차지를 중국에 반환할 목적으로 무조건 일본에 넘길 것을 요구했으나, 실제로는 조차지 해소 후 일본인 거류지를 설치하고 독일의 상권 및 철도 운행권을 계승하려 했다.

중화민국은 제1차 세계 대전 초기에는 중립을 지켰으나, 일본의 대독 선전 포고에 대해 산둥 반도에 교전 구역을 설정했다. 그러나 일본군은 칭다오 전투 당시 교전 구역 밖으로 진출하여 교제선을 점령하고, 지난까지 진출했다. 중화민국은 이에 항의하며 일본군의 철수를 요구했지만, 일본은 전시 국제법상의 군사 점령을 주장하며 거부했다.

일본은 뤼순, 다롄 조차지 기한 연장과 남만주 철도, 안봉철도 기한 연장을 중시했다.

영국은 일본의 요구를 지지하며 동맹 관계를 유지하려 했고, 러시아프랑스도 일본의 요구에 이의가 없음을 밝혔다. 반면, 미국은 제1, 2, 3호에 대해서는 반대하지 않았지만, 제4, 5호에 대해서는 명확히 반대했다.

쑨원은 3월 중순, 외무성의 코이케 조조에게 서한을 보내 일중 동맹안을 제안했는데, 이는 제5호의 일부 내용과 부합하는 것이었다. 요시노 사쿠조는 최후 통첩 외에는 다른 수단이 없다고 단정했다.

코이케 조조(1873-1921) 메이지-다이쇼 시대의 외교관. 가토 다카아키 외상 비서관 등을 거쳐, 뉴욕·봉천 등의 총영사를 지낸다. 다이쇼 2년 외무성 정무국장이 되어, 가토 외상 밑에서 대중 21개 조 요구의 원안 작성에 임했다. 이후 구하라 본점 이사. 후쿠시마현 출신. 도쿄 제국 대학 졸업.

4. 1. 초기 협상

1915년 1월 18일, 가토 다카아키 일본 외무 대신위안스카이 대총통에게 5호 21개조의 요구를 했다. 히오키 에키 주중 일본 대사가 위안스카이에게 요구를 전달하고 압박했으며, 중국이 요구를 거부할 경우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경고했다.[4][5][6][7]

21개조 요구는 다섯 그룹으로 나뉘었다.[8]

  • 제1호(4개 요구): 일본산둥성에서 독일의 항구와 운영을 점령한 것을 확인하고, 산둥성의 철도, 해안 및 주요 도시로 일본의 영향력을 확대했다.
  • 제2호(7개 요구): 일본의 만주 남부 철도 지역과 관련하여, 해당 지역의 조차권을 99년으로 연장하고, 정착 및 치외 법권의 권리를 포함하여 남만주 및 동부 내몽골에서 일본의 영향력을 확대했으며, 해당 지역에 정부와 일본 투자를 우선시하는 재정 및 행정 관리 임명권을 포함했다.
  • 제3호(2개 요구): 중국 중부의 한예핑(한양구, 다예, 핑샹) 광산 및 야금 단지에 대한 통제권을 일본에 부여했다.
  • 제4호(1개 요구): 중국이 외국 열강에 추가적인 해안 또는 섬 양보를 제공하는 것을 금지했다.
  • 제5호(7개 요구): 중국은 일본 고문을 고용하여 중국의 재정과 경찰을 효과적으로 통제하도록 해야 했다.


일본은 '제5조'가 야기할 부정적인 반응을 알고 비밀로 하려 했다. 중국 정부는 시간을 끌면서, 유럽 열강에 21개조 요구의 전체 내용을 유출하여, 그들의 정치적, 경제적 이익에 대한 위협으로 인식되어 일본을 억제하는 데 도움을 주기를 희망했다.

4. 2. 일본의 최후통첩

중국 정부는 일본의 수정 제안을 initially 거부했다. 그러나 일본 원로들의 개입으로 '제5조'가 삭제되었다.[10] 이 조항들은 중국 정부에게 가장 불쾌감을 주는 내용이었다. 축소된 "13개 조항"은 1915년 5월 7일 최후 통첩 형태로 전달되었으며, 응답 기한은 이틀이었다.[10] 위안스카이는 일본과의 전쟁을 감수할 입장이 아니었고, 그의 후임자들도 따랐던 유화 정책을 수용했다. 최종 조약은 1915년 5월 25일 양측에 의해 서명되었다.[10]

위안스카이가 서명한 "중국의 21개 조항 수락"


가토 다카아키는 이 최후 통첩이 요구에 굴복하는 상황에서 중국 국민들에게 체면을 세우기 위해 위안스카이가 요청한 것이라고 공개적으로 인정했다. 미국 공사 폴 라인쉬는 미국 국무부에 중국이 최후 통첩의 관대함에 놀랐다고 보고했는데, 이는 이미 양보하기로 한 것보다 훨씬 적은 내용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4. 3. 중국의 굴복

위안스카이 정부는 일본과의 전쟁을 감수할 입장이 아니었고, 그의 후임자들도 따랐던 유화 정책을 수용했다. 1915년 5월 25일 최종 조약이 양측에 의해 서명되었다.[10]

가토 다카아키는 이 최후 통첩이 요구에 굴복하는 상황에서 중국 국민들에게 체면을 세우기 위해 위안스카이가 요청한 것이라고 공개적으로 인정했다. 폴 라인쉬 미국 공사는 미국 국무부에 중국이 최후 통첩의 관대함에 놀랐다고 보고했는데, 이는 이미 양보하기로 한 것보다 훨씬 적은 내용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위안스카이는 당초 비밀 협상에 위임되었던 제5호의 7개 조항(일본인 정치·재정·경찰 고문 초빙, 일본 무기 수급 등의 요구)을 국제 사회에 폭로하여 국제 사회의 반발을 유도하려 했다. 그러나 일본 측은 4월 26일에 요구를 19개 조항으로 줄이고, 5월 7일에는 제5호의 요구를 삭제한 13개 조항으로 5월 9일을 기한으로 하는 "최후 통첩문"을 보냈다. 결국 같은 날 위안스카이는 최후 통첩문을 승인했다.[15][16]

이 결정은 중국 국내에서 격렬한 반대 운동과 폭동을 야기했고,[16] 중일 관계를 악화시켰다. 또한, 외국의 의구심을 불러일으켜 워싱턴 회의에서는 10개 조항으로 축소되었다.

비밀 조항이었던 제5호는 곧 누설되었고, 중국 측은 21개 조 요구를 제시받았다고 선전하며 국제적(주로 미국) 비판을 받았다. 일본은 결국 제5호 조항을 철회했다.[30] 중국 내 반대 운동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을 실력으로 배제할 힘이 없었던 위안 정권은 5월 7일 일본의 최종 통고를 5월 9일에 수락했다. 위안스카이는 자신의 지위를 공고히 하기 위해 일본의 횡포를 내외에 선전하며 중국 국민의 단결을 호소했고, 중국 국민은 요구 수락일(5월 9일)을 "국치 기념일"로 부르며 비난했다.

5. 21개조 요구의 결과 및 영향

21개조 요구는 일본에게 긍정적인 면보다 부정적인 면이 많았다. 특히 "제5조"가 삭제되면서, 일본이 이미 중국에서 확보한 것 이상을 제공하지 못했다.

이 외교 교섭으로 2개 조약, 13개 교환 공문이 정리되었는데, 이 중 남만주 및 동부 내몽골에 관한 조약 등 만몽 문제에 관한 중요한 약정이 이루어졌다. 만주 선후 조약, 만주 조약, 베이징 의정서, 청일 추가 통상 항해 조약 등을 포함하여 일본의 중국 특수 권익이 조약상 고정되었다. 일본과 중화민국 간의 이들 조약의 유효 여부를 둘러싼 다툼은 선전포고 없는 전쟁으로 이어졌다.

이후, 2차 북벌을 시작한 중화민국 장제스 정부는 1928년 7월 19일에 청일 통상 항해 조약의 일방적 파기를 선언했고, 일본 정부는 그 무효를 주장했다. 1915년의 징벌 국적 조례는 1929년에 강화되어 "토지 도매 엄금 조례", "상업 임대 금지령" 등 약 59개의 추가 법령이 되었고, 일본인에 대한 토지·가옥의 상업 임대 금지와 종전에 대여하고 있는 토지·가옥의 회수가 이루어졌다.[36] 간도와 만주 각지의 조선인 중심의 일본인 거주자는 퇴거를 강요당하거나 박해를 받았다. 이는 만주 사변의 큰 요인이 된다.

5. 1. 중국 내 반일 감정 고조

위안스카이가 21개조 요구를 수락하면서, 중국에서는 5월 9일을 국치기념일로 지정하고 항일·배일 운동이 전개되었다. 이러한 반일 감정과 반봉건 감정의 고조는 1919년 5.4 운동의 배경이 되었다.

21개조 요구는 중국에서 일본에 대한 대중적 반일 감정을 불러일으켰고, 5·4 운동과 중국 민족주의의 고조에 크게 기여했다.

5. 2. 국제 사회의 비판

미국은 일본의 문호 개방 정책 거부에 대해 강력하게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1915년 3월 13일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 국무장관이 발표한 브라이언 각서에서 미국은 만주, 몽골, 산둥에서의 일본의 "특별한 이익"을 확인하면서도 중국 주권에 대한 추가 침해에 대한 우려를 표명했다.[3]

영일 동맹에 따라 일본의 가장 가까운 동맹국이었던 영국은 일본의 과도하고 횡포한 외교 방식에 대해 우려를 표명했으며, 특히 영국 외무성은 일본이 사실상 중국 전체에 대한 일본의 보호령을 구축하려는 시도에 불만을 품었다.[3]

5. 3. 워싱턴 회의와 산둥 문제 해결

1919년 5.4 운동의 배경 중 하나였던 산둥반도 문제는 워싱턴 해군 군축 조약 회의에서 다시 논의되었다. 워싱턴 회의에서 양자 간 협의를 통해 산둥 반도 문제 해결에 관한 조약이 체결되면서, 일본은 자오저우 만 조차지와 자오저우 철도 등을 반환하고 수비병을 철수하였다.[32][33] 그러나 자오저우 철도는 일본의 차관 철도가 되고, 철도 연선의 광산은 일중 합작 회사의 경영이 되는 등, 산둥성에서 일본은 명목상 일정 권익을 확보하였다. 하지만 중국 관헌의 권익 침해와 민중의 항일 운동으로 인해 이러한 권익은 제대로 실시되지 못했다.[32][33]

1922년, 미국은 해결책을 중재하여 중국은 산둥 전체에 대한 명목상의 주권을 부여받았지만, 실제로는 일본의 경제적 지배가 계속되었다.

5. 4. 쑨원과 요시노 사쿠조의 입장

쑨원은 21개조 요구가 위안스카이 자신이 기안하고 요구한 책략이며, 황제가 되는 것을 인정받기 위해 위안이 일본에 지불한 대가라고 단언했다.[34] 가토 다카아키 외상은 최후 통첩이 양보할 때 중국 국민들에게 위안의 체면을 세워주기 위해 위안에게 간청받은 것이라고 공공연하게 인정했다.

6. 21개조 요구와 한국

(원문 소스가 제공되지 않았으므로, 내용을 작성할 수 없습니다.)

7. 평가 및 비판

21개조 요구는 중화민국위안스카이 정부에 대한 일본 제국의 과도한 내정 간섭 시도로 평가된다. 이는 단순한 외교적 요구를 넘어, 중국의 주권을 심각하게 침해하는 내용들을 담고 있었다.[1] 특히, 제5호 요구는 중국 정부에 일본인 고문을 두고, 일본제 무기를 채용하며, 일본 불교 포교권을 인정하는 등 사실상 중국을 일본의 보호국으로 만들려는 의도를 드러냈다는 비판을 받는다.[2]

이러한 요구는 중국 내에서 강력한 반발을 불러일으켰으며, 5.4 운동의 주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3] 또한, 국제 사회에서도 일본의 팽창주의적 정책에 대한 비판 여론이 높아졌다.

그러나 일본은 21개조 요구를 통해 중국 내에서의 영향력을 확대하려 했으며, 이는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으로 이어지는 일본 제국주의 팽창의 발판이 되었다는 평가도 존재한다.[4]

21개조 요구는 당시 열강들의 제국주의적 침탈 경쟁 속에서, 약소국이었던 중화민국의 주권이 어떻게 유린되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또한, 이 사건은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국가들에게 제국주의의 위협을 다시 한번 상기시키는 계기가 되었다.[5]

8. 명칭에 대하여

이른바 "대중국 21개조 요구"라고 불리는 외교 교섭은 정식 명칭이 존재하지 않는다. 1915년 당시 언론에서는 "대지(나) 교섭", "산둥 문제", "산둥(선후) 처분"[27], "요구 21개조", "중요 조건 21개조"[37], "5개조 21개조"[38] 등으로 다양하게 표현했다.

따라서 "대중국", "대지", "대중"을 포함하거나, "5호"를 포함하거나, "21"을 숫자로 또는 한자로 표기하거나, "개조" 또는 "조"를 사용하거나, "의 요구"를 붙이거나 생략하는 등 다양한 표현이 모두 통칭으로 사용되며, 어느 것이 정식 표기라고 단정할 수 없다.

이와나미 서점에서 출판된 연표들을 보더라도 "5호 21개조의 요구", "대중국 21개조 요구", "대중국 21개조의 요구", "대중 21개조 요구"와 같이 표현이 다르다. 하라 다카시는 자서전 『하라 다카시 일기』에서 "일지 조약"으로 표기했다.

2000년대 중학교 문부과학성 검정 완료 교과서에서는 『21개조의 요구』, 『21개조 요구』 등으로 표기되는 경우가 많다.

참조

[1] 서적 Wilson, Volume III: The Struggle for Neutrality, 1914–1915 https://archive.org/[...] 1960
[2] 문서 1971
[3] 서적 Japan Foreign Relations 1542–1936 1936
[4] 서적 The Decade of the Great War: Japan and the Wider World in the 1910s https://books.google[...] Brill 2021-01-16
[5] 서적 China: A Modern History https://books.google[...] Bloomsbury Publishing 2021-01-16
[6] 서적 Japan and the Great War https://books.google[...] Springer 2021-01-17
[7] 서적 The rise of modern China https://archive.org/[...] Oxford University Press 2021-01-17
[8] 문서 1977
[9] 간행물 Japanese Geopolitics and the Mongol Lands, 1915–1945 2004
[10] 서적 Turbulence in the Pacific: Japanese-U.S. Relations During World War I https://books.google[...] Greenwood
[11] 서적 The Clash: US-Japanese Relations Throughout History 1998
[12] 간행물 Great Britain and the Twenty-One Demands of 1915: Cooperation versus Effacement 1971
[13] 간행물 National humiliation and national assertion-The Chinese response to the twenty-one demands 1993
[14] 서적 The Far Eastern Policy of the United States 1938
[15] 서적 1910-30年代の日本 アジア支配への途 岩波書店 1994-07-28
[16] 학술지 近代日中関係の担い手に関する研究(中清派遣隊) ―漢口駐屯の日本陸軍派遣隊と国際政治― https://doi.org/10.1[...] 麗澤大学経済社会総合研究センター
[17] 문서 山東問題ニ関スル条約公文書集 https://www.jacar.ar[...] 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
[18] 서적 日本と中国-大正時代 原書房 1972
[19] 학술지 武力紛争時の第三国領域使用の帰結--武力攻撃への該当性の観点から https://dl.ndl.go.jp[...] 防衛研究所
[20] 학술지 国際的中立の一考察 https://hue.repo.nii[...] 広島経済大学 1971-01
[21] 웹사이트 占領後の山東鉄道(その1) http://www.takahashi[...] 日独戦争と俘虜郵便の時代39
[22] 문서 胆紅2007.03、PDF-P.3
[23] 뉴스 日本に気をつけろ タイムズ 1922-04-19
[24] 문서 日支共同防敵軍事協定
[25] 문서 加藤高明
[26] 서적 満洲事変の国際的背景 https://dl.ndl.go.jp[...] 国書刊行会
[27] 뉴스 対支交渉は速決を要す : (社説) http://dl.ndl.go.jp/[...] 大阪朝日新聞 1915-01-28
[28] 뉴스 山東の対日問題 (上・下) 大阪朝日新聞 1915-01-21
[29] 문서 1965
[30] 서적 第一次世界大戦 : 忘れられた戦争 講談社 2010
[31] 서적 満洲問題の歴史 https://ndlsearch.nd[...] 原書房
[32] 학술지 「満洲国」の法と政治―序説 https://hdl.handle.n[...] 京都大学人文科学研究所
[33] 학술지 「満蒙」問題と貴族院 : 第46議会の議論を中心に https://aska-r.repo.[...] 愛知淑徳大学交流文化学部
[34] 문서 米国人の観たる満洲問題 太平洋問題調査会 1929
[35] 학술지 経済封鎖から見た太平洋戦争開戦の経緯--経済制裁との相違を中心にして https://dl.ndl.go.jp[...] 防衛省防衛研究所
[36] 논문 「満洲国」の法と政治―序説 https://doi.org/10.1[...] 京都大学人文科学研究所
[37] 뉴스 日支交渉顛末 : 支那政府発表=北京日報所載 https://www.lib.kobe[...] 満洲日日新聞 1915-05-18
[38] 뉴스 日支交渉側面観(一) [その一] https://www.lib.kobe[...] 大阪朝日新聞 1915-04-24
[39] 서적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도서출판 범한
[40] 서적 일본역사 보고사
[41] 서적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도서출판 범한
[42] 서적 일본역사 보고사
[43] 서적 일본역사 보고사
[44] 서적 중국:외교관의 눈으로 보다 늘품플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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