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타임라인 바로가기

반일 감정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타임라인 바로가기

1. 개요

반일 감정은 일본에 대한 반감, 적대감 또는 혐오감을 의미하며, 주로 역사적 요인에 기인한다. 한국에서는 일제강점기, 임진왜란, 왜구의 침략 등이 반일 감정의 주요 원인으로 작용하며, 중국에서는 중일전쟁, 난징 대학살, 센카쿠 열도 영유권 분쟁 등이 반일 감정을 심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이러한 감정은 정치, 외교, 사회, 문화 등 다양한 측면에서 표현되며, 시위, 폭력 행위, 멸칭 사용, 특정 시설에 대한 반발 등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한편, 특정 아시아 국가에서는 반일 감정이 조직적으로 나타나기도 하며, 일본의 우익·보수 세력은 이를 인위적으로 형성된 감정으로 보기도 한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반일 감정 - 야스쿠니 신사
    야스쿠니 신사는 일본의 국가적 위기와 전쟁으로 사망한 사람들을 기리기 위해 설립되었으나, A급 전범을 포함한 전쟁 관련 인물들의 합사로 인해 주변국들의 반발을 일으키며 과거사 논쟁의 중심에 있는 신사이다.
  • 반일 감정 - 창씨개명
    창씨개명은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가 내선일체를 명분으로 조선인의 성과 이름을 일본식으로 바꾸도록 강요한 황국신민화 정책으로, 천황 중심의 국가 체계에 통합하려는 목적을 가졌다.
반일 감정
반일 감정
鬼子, 小日本 등 멸칭이 적힌 플래카드를 든 타이베이 시위대
귀자, 소일본 등 멸칭을 적은 플래카드를 들고 있는 타이완 타이베이 시위대
제2차 세계 대전 중 반일 감정을 조장하는 미국의 선전 포스터
제2차 세계 대전 중 반일 감정을 조장하는 미국의 선전 포스터. "도쿄 꼬마가 말하길, '많은 물자를 낭비해 주시면 정말 기쁠 거예요! 고맙습니다.'"
중국 광저우의 식당에 붙은
"일본인과 개는 입장 금지" 중화인민공화국 광저우시 식당. 과거 상하이 공동 조계의 황푸 공원 입구에 "개와 중국인은 입장 금지" 팻말이 있었다는 도시전설을 패러디한 것
개요
반일 감정일본인 또는 일본 문화에 대한 혐오 또는 공포
반일주의반일 감정의 이데올로기적 표현
관련 용어반일, 반일주의
유사 용어혐일
여론 조사 (2017 BBC World Service)
긍정적 견해중화인민공화국: 22%
스페인: 39%
튀르키예: 71%
파키스탄: 38%
인도: 45%
러시아: 45%
페루: 56%
나이지리아: 57%
영국: 65%
멕시코: 59%
케냐: 58%
독일: 50%
인도네시아: 57%
미국: 65%
그리스: 52%
프랑스: 74%
브라질: 70%
오스트레일리아: 78%
캐나다: 77%
부정적 견해중화인민공화국: 75%
스페인: 36%
튀르키예: 24%
파키스탄: 20%
인도: 17%
러시아: 16%
페루: 25%
나이지리아: 24%
영국: 30%
멕시코: 23%
케냐: 22%
독일: 13%
인도네시아: 17%
미국: 23%
그리스: 9%
프랑스: 21%
브라질: 15%
오스트레일리아: 17%
캐나다: 12%
여론 조사 (2013 Pew Research Center)
긍정적 견해중화인민공화국: 4%
대한민국: 22%
파키스탄: 51%
필리핀: 78%
오스트레일리아: 78%
인도네시아: 79%
말레이시아: 80%
부정적 견해중화인민공화국: 90%
대한민국: 77%
파키스탄: 7%
필리핀: 18%
오스트레일리아: 16%
인도네시아: 12%
말레이시아: 6%
여론 조사 (2011 BBC World Service)
긍정적 견해중화인민공화국: 18%
멕시코: 24%
파키스탄: 34%
남아프리카 공화국: 41%
인도: 39%
프랑스: 55%
포르투갈: 43%
영국: 58%
독일: 58%
가나: 55%
오스트레일리아: 60%
스페인: 57%
이집트: 52%
케냐: 61%
튀르키예: 60%
대한민국: 68%
이탈리아: 66%
브라질: 66%
나이지리아: 65%
캐나다: 67%
미국: 69%
칠레: 66%
페루: 64%
러시아: 65%
필리핀: 84%
인도네시아: 85%
부정적 견해중화인민공화국: 71%
멕시코: 34%
파키스탄: 15%
남아프리카 공화국: 17%
인도: 13%
프랑스: 29%
포르투갈: 13%
영국: 26%
독일: 25%
가나: 11%
오스트레일리아: 26%
스페인: 19%
이집트: 14%
케냐: 20%
튀르키예: 32%
대한민국: 20%
이탈리아: 18%
브라질: 16%
나이지리아: 14%
캐나다: 16%
미국: 18%
칠레: 14%
페루: 10%
러시아: 7%
필리핀: 12%
인도네시아: 7%

2. 역사적 배경

러일 전쟁(1904~1905)부터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일본이 항복할 때까지 40년 동안, 미국 선교사들은 배일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이 진주만 공격을 감행하자, 미국 정부는 일본계 미국인들을 수용소에 가두고 일본인 가게를 습격하는 등 반일 감정이 극심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행정부는 태평양 전쟁 기간 동안 일본 국적자들을 수용소에 수용하는 행정 조치를 발동했다. 일부 일본계와 아시아계는 미국인들의 보복을 피해 미군에 자원입대하여 일본군과 싸우기도 했다.

반일 감정은 제2차 중일 전쟁과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의 행동에 대한 적대감부터 일본 문화에 대한 경멸, 일본인에 대한 인종차별까지 다양하다. 반일 선전은 연합군 정부의 선전으로 인해 비인간화 감정을 부추겼으며, 인종적으로 비하하는 성격을 띠기도 했다. 반일 감정은 일본군의 만행으로 인해 한국중국에서 가장 강할 수 있다.[5][6][7][8] [9]

과거에는 반일 감정에 일본인을 야만인으로 묘사하는 암시가 포함되어 있었다. 1868년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은 산업화된 제국주의 열강으로 서구에 합류하기 위해 서구화를 시도했지만, 서구에서 일본인에 대한 수용 부족으로 통합과 동화가 어려워졌다. 일본 문화는 의심과 경멸의 대상이었다.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 제국의 항복 이후 감정이 다소 누그러졌지만, 일본 정부가 과거 만행에 대해 충분히 속죄하지 않았거나 이러한 사건의 역사를 축소하려고 했다는 널리 퍼진 인식으로 인해 때때로 감정이 고조된다.[10] 오늘날 일본 정부는 일부 배상 조치를 취했지만, 일본 제국의 군사적 공격과 만행과 관련된 역사적이고 민족주의적인 적대감을 바탕으로 반일 감정은 지속된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중국에 매장된 70만 개가 넘는 (일본 정부에 따르면[11]) 생명을 위협하고 환경을 오염시키는 화학 무기를 일본이 제거하는 데 지연된 것도 반일 감정의 또 다른 원인이다.

때때로 일본 내 개인들이 외부 비판을 자극한다. 전 총리 고이즈미 준이치로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추축국의 일원으로 일본 제국을 위해 싸우고 죽은 모든 사람들(1,068명의 전범 포함)을 합사한 야스쿠니 신사에서 매년 전몰자를 추모한 것에 대해 한국과 중국으로부터 심한 비판을 받았다. 극우 민족주의 단체들은 일본의 만행을 축소하는 역사 교과서를 제작했으며,[12] 이러한 교과서에 대한 반복되는 논란은 때때로 외국의 적대적인 관심을 끌고 있다.

일부 반일 감정은 덤핑과 같은 일부 일본 기업이 사용하는 사업 관행에서 비롯된다.

아시아에서는 BBC의 조사에 따르면, 대체로 일본에 호의적인 응답이 나타나는 가운데, 중국한국은 일본을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응답이 많은 경향이 있다.[109] 요미우리 신문·한국일보·갤럽의 공동 조사에서도, 동남아시아를 포함한 다른 조사 대상국에서는 일본에 대해 호의적인 응답을 보인 반면, 중국과 한국에서는 일본을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응답이 많았다.[110] 이는 이른바 특정 아시아 2개국인 중국한국이 압도적으로 일본에 대해 반일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결과였다.

특히 중화인민공화국, 중화민국, 북한과 한국 사이에는 현재에도 역사 인식 등에서 마찰이 있으며, 일본에 대한 역사적·정치적 비판은 일본 국내에서도 자주 보도되고 있다. 동북아시아에서의 “반일” 감정은 반일 교육의 결과라고 여겨진다.[111]

소중화사상에서의 화이질서


조선에서는 중국을 중심으로 주변 국가들을 이적으로 여기는 소중화사상이 존재했으며, 1402년의 지도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조선에서는 명나라와 조선이 '''중화'''(세계의 중심)이며, 그 외는 문명화되지 않은 ''''''로 인식했다.[144] 1468년에 박시형은 옥중에서 국왕에게 보낸 서간에서 일본, 류큐, 여진, 삼섬( 이키, 쓰시마, 마쓰우라)의 "사이"가 조선에 "내정"(입공)하고 있다고 적고 있다.[145][146] 다만 현실적으로는 이러한 대우를 할 수 없었다.[146] 또한 양반들은 자신을 중화문명의 구현자로 여기는 한편, 조선 국내의 서민들에 대해서도 "이적짐승의 무리"라고 차별했다.[147] 이러한 조선의 대일 인식의 원인으로는 당시의 일조 외교가 쓰시마를 경유했기 때문에, 일본의 정보가 쓰시마의 외교 사절(쓰시마 사절이라고 하는 위사도 있었다[146])의 재량에 의해 좌우되었던 것[146]이나, 특히 1467년부터의 응인의 난과 그에 뒤이은 전국 시대에서 일본 국내가 혼란스러웠던 것 등이 있다. 조선도 이러한 사정을 짐작했지만,[148] 일본소국론의 수정으로는 이어지지 않았다. 류큐 국왕 사절이 교류하지 않게 된 후, 조선과 국교를 맺고 있던 것은 명나라, 일본, 여진족으로 한정되었다. 여진족은 건국 초기부터 조선의 봉속으로 다루어졌기 때문에, 남은 일본을 소국시하는 것으로 조선은 당시 동아시아의 정치 정세를 명나라를 정점으로 조선은 소중화로서 일본과 여진족을 이적으로 따르게 한다는 소중화적 정치관의 틀에 맞춰 인식하고 있었다.[149][150]

13세기의 원나라의 원구에서 고려군은 원·중국 앞잡이가 되어 일본을 두 차례 침략했다. 그리고 15세기에는 응영의 외구에서 쓰시마를 다시 침략했지만, 그 후 소국 또 이적으로 여기던 일본과 여진으로부터 조선은 침략을 받는다. 16세기1592년~1598년에 걸쳐 도요토미 히데요시명나라를 중심으로 한 화이질서에서 벗어나려고 꾀하고, 조선반도를 침략, 조선·명나라 연합군과 대규모 전쟁을 벌였다. 이 임진왜란에서 막대한 피해를 입은 조선반도에서는 반일 감정이 남는다. 한편, 임진왜란 등 만력의 삼정에 의한 전비와 재정 악화로 명나라가 피폐해지는 가운데, 여진족의 누르하치가 아이신국(후금)을 1616년에 건국하고, 더 나아가 1619년사르후 전투에서 명·조선군을 무찌르고 산해관을 공략한다. 1627년에는 누르하치를 계승한 홍타이지가 조선에 침략(정묘호란)한다. 더 나아가 후금은 1636년에 청나라로 국호를 개칭한 후 청나라에의 복속을 거절한 조선을 다시 침략한다(병자호란). 패배한 조선은 청나라와 삼전도의 맹약을 맺고 이후 속국으로서 복속한다.

에도 시대가 되어 1607년에 일본과 국교를 회복한 조선은 조선통신사를 파견하게 되지만, 조선통신사들은 일본의 풍속 풍습에 대해 야만적이라고 자주 지적하고 있다. 1636년 제4회 통신사 부사 김세렴은 『김동명해차록견문잡기』에서 "남자는 모두 반폭의 청포로 배꼽에서 아래를 가리고 있다. 심한 경우에는 가리지 않는다"라고 적고 있으며, 또 제6회 사절 종사관인 남룡익(1628년~1692년)은 『부상록』에서 왜국의 짚신은 "앞부분에 한 가닥의 끈이 있어, 거기에 발가락을 걸어 끼워 신는다. 그 형태는 매우 기괴하다. 발가락은 뱀의 혀와 같다"라고 일본의 풍습을 이적시하는 기록을 보이고 있다.[157][144][151] 제9회 사절 제술관 신유한은 『일본견문잡록』에서 "음란한 행위는 완전히 짐승과 같아서, 집집마다 반드시 욕탕을 설치하고 남녀가 함께 알몸으로 목욕을 하고, 대낮부터 서로 친숙해진다"라고 적고 있다.[157]

1763년에 일본에 온 제11회 조선통신사 김인겸은 저서 『일동장유가』에서 교토에 대해 "옥야 천리를 이루고 있지만, 아까워서 어쩔 줄 모르는 것은 이 풍요로운 금성탕치가 왜인의 소유가 되고, 제라 황이라고 칭하며 자손에게 전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 개와 같은 무리를 모두 쓸어버리고 사백리 육십 주를 조선의 국토로 삼아 조선왕의 덕으로 예절의 나라로 만들고 싶다"라고 일본 침략의 욕망을 밝히고 있다.[152] 또한 김인겸은 "개와 같은 왜인에게 배례하는 것이 고통스럽다"[153]라고 에도에서 쇼군과의 알현을 거부하고 혼자 숙소에 남아 있다. 마찬가지로 제11회 조선통신사 일원이었던 원중거도 귀국 후 일본 측의 승리 의식과 조선 측의 패배 의식을 불식시키는 "와신상담"의 뜻을 담아 『화국지』에 임진왜란 승전론을 전개한다.[154] 이처럼 소중화사상에 근거한 반일 감정은 조선 시대에 계속해서 존속하고 있었다.

19세기에 서구 열강이 조선에 진출하기 시작하자, 개국을 강요하는 서구 열강을 ‘양이(洋夷)’로 규정하고 쇄국 및 위정척사 사상이 팽배해졌다. 조선을 중화(中華)로 여기고 청나라조차 ‘이적(夷狄)’으로 간주하기도 했다.[155] 1854년 개국한 일본은 조선에도 개국을 요구했다. 위정척사 사상에서는 일본을 서구 열강을 추종하는 ‘가양이(假洋夷)’ 또는 ‘왜이(倭夷)’로 여겼다.[144] 이후 강화도조약을 통해 일본의 포함외교로 조선은 1876년에 개국하였으나, 위정척사 사상은 조선의 근대적 민족주의의 기반이 되어 전개되었다.[144] 개국 후에도 친일적인 개화파와 쇄국·양이를 주장하는 척사파가 대립하여, 1882년 임오군란에서 일본인 군사고문 및 공사관원들이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1880년대 주조선 미국 공사였던 조지 클레이튼 포크는 당시 조선인의 대일 감정에 대해, (중국인은 외모, 행동, 습관 때문에 조선인들에게 미움을 받지만, 잔혹 행위나 사기를 저질러도 원망을 사지 않는 반면,) 일본인은 외모, 행동, 습관에도 불구하고 미움을 받고 있으며, 조선인들은 일본인의 피를 흘리는 것으로 이 감정을 분출할 기회를 항상 노리고 있다고 보고했다.[156]

1894년 동학 농민 운동(갑오농민전쟁)의 처리를 둘러싸고 일본과 청나라가 대립하여 청일전쟁으로 이어졌다. 청나라가 일본에 패배함으로써 화이질서가 붕괴되고, 조선은 청나라에 대한 책봉에서 벗어나 독립을 선언했다. 삼국간섭으로 일본이 한때 한반도에서 철수하자, 친일적인 개화파 김홍집 정권은 친러파인 왕비 명성황후 세력의 쿠데타로 1895년 7월 6일 붕괴되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세 달 후인 10월 8일, 명성황후가 일본인과 개화파에 의해 암살당하는 을미사변이 발생했다. 정권에 복귀한 김홍집이 같은 해 12월에 발표한 단발령을 일본의 모방이라고 반발한 전 유학자들이 의병 운동을 시작했다. 조선은 이후 친러 정책으로(아관파천) 1897년에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꾸었지만, 1904년 2월 러일전쟁이 발발했다. 1905년 9월 일본이 러시아에 승리하고 대한제국에 대한 우월권을 획득, 11월에는 을사늑약을 체결하여 대한제국일본 제국의 보호국으로 만들었다. 이에 반발하여 반일 감정이 강한 의병 운동이 활발해졌지만, 일본군에 의해 진압되었다. 일본은 1907년 정미칠조약으로 대한제국군을 해산시키자, 전직 군인들이 의병 운동에 참여했고, 1909년에는 안중근이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했다. 한국에서는 일진회 등 친일파가 일제강점론을 추진하여 이듬해인 1910년 경술국치가 이루어졌다. 반일파에게는 이적(夷狄)으로 여겼던 일본에 나라가 병합되었기에 민족주의는 더욱 강한 반일 감정으로 발전했다.[157] 구타 히로시는 “근대에 이르러 이 ‘야만인’인 일본인의 식민 지배를 거치면서, 조선의 자존심을 회복하려는 시도는 반일 사상과 결합하여 중화 사상의 더욱 강고하고 집요한 복권으로 시작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진다”고 말하고 있다.[157] 해방 후 대한민국에서는 안중근이 항일 투쟁의 영웅으로 여겨지고 있다.

강상중과 다니 오르바프(히브리 대학교)는 “같은 일본 제국식민지였는데, 대만은 친일적인데, 한국이 반일적인 이유는 무엇인가”라는 대담에서, 【다니 오르바프】“‘식민지’로서의 조선반도는 천황 직속입니다. 같은 ‘식민지’라도 대만은 내각 직속이었습니다.” 【강상중】“그렇죠. 지금 일본인들은 왜 대만은 친일적인데 한국은 반일적인 걸까 생각하죠. 하지만 그것은 대만 통치와 조선반도 통치의 조직 구조의 차이를 생각해보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니 오르바프】“당시 일본제국 헌법의 적은 권리조차 민중에게 주지 않고, 총독이 천황의 대리인으로서 탄압할 수 있었던 곳이 조선이었습니다. 조선에서는 총독이 대대로 육해군 대장이었던 데 비해, 대만에서는 1919년부터 1936년까지 귀족원 의원인 정치가가 계속되었습니다.” 【강상중】“천황 직속이 되면, 당시 정부는 간섭할 수 없습니다. 대만과 조선반도에서 왜 이러한 통치의 차이가 생겼는지가 이상하지만, 천황 통치는 어떤 의미에서는 통수권이 불가침인 것과 같습니다. 최종적으로 동화 정책의 때에는, 여러분들은 일본 본토에 있는 사람들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 됩니다. 천황의 애호를 모두에게 준다는 것은 대단한 은혜라는 생각입니다. 그것을 천황 통치에서는 일방적으로 계속 진행하게 되어, 조선반도의 일본에 대한 평가가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라고 말하고 있다.[158][159]

주일본대만경제문화대표처 대표를 지낸 뤄푸촨|뤄푸촨중국어는 히라이 토시하루(한양여자대학교)의 취재에 대해, “한국이 일본에 반발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제가 먼저 생각하는 것은, 왕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대만에는 없었죠.” “ (종전 후 대만에 입성한 중화민국군의) 대륙에서 대만으로 온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대만 사람들이 깜짝 놀랐습니다. 차림새는 형편없고, 무기는 구식이어서, 일본 것과 비교하면 하늘과 땅 차이였습니다.” “일본의 대만 통치는 흑자였고, 조선 통치는 적자였습니다. 일본은 성공한 대만을 모델 케이스로 삼아 조선 통치에 임했지만, 잘 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일본인대만인에게 한 것과 같은 방식으로 조선인에게 대해 줄 수 없었습니다.”라고 말하고 있으며, 히라이 토시하루는, 17세기청나라명나라를 멸망시키자, 나가사키 출신의 정성공은 청나라에 저항하는 거점을 구축하기 위해 1662년타이난에 들어가, 그 후의 대만은 청나라에 대한 저항의 거점으로 계속되었기 때문에, 대만으로서는 일본에 할양되는 것은 청나라로부터의 해방이기도 하였다. “대만은 원래 청나라에 대한 저항 의식이 있어, 일본 통치는 어떤 의미에서는 대만에게는 천운이었다. 한편, 한국은 왕조를 단절당한 것으로 인해, 일본에 대한 반발이 생기기 쉬웠다. 게다가, 조선 통치는 일본에게 있어 경제적으로 잘 되지 않았다.” “조선 왕조를 무너뜨린 일본에 대한 반발심이 어떤 형태로든 한국 사회에 뿌리내리고 있다.” “1897년에 조선은 국왕을 황제로 바꾸고, 대한제국이 성립하여, 일제강점기1910년까지 존재했다. 한국은 공식적인 국명이 대한민국인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대한제국과 무관하지 않다.” “현재의 한국에는 대한제국이 중첩되고, 거기에서 직접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조선 왕조 500년의 역사를 저절로 회상하게 된다.” “그러한 사고 체계에 의해, 근대 일본과 조선 왕조는 대립 관계에 놓이게 된다. 당시 일본의 행위에 반대·반발하는 것은, 현재의 대한민국에서도 정당하게 칭찬받아야 할 행위이며, 그렇지 않으면 처벌받아야 할 대상이 된다. 일본에서 냉담하다고도 불리는 친일파에 대한 처우이다.” “대만에는 왕조가 없었기 때문에, 거기를 통치하여 개척을 진행한 일본은, 후에 조선에서 경험하는 것과 같은 왕정복고의 이데올로기에 의한 마찰을 경험하지 않아도 되었다.”라고 결론짓고 있다.[160][161][162][163]

2. 1. 동아시아

동아시아 지역에서 나타나는 반일 감정은 복합적인 역사적, 정치적 요인에 기인한다.

한국에서는 조선 시대 왜구의 침략, 임진왜란, 일제강점기의 식민 통치와 위안부 문제, 강제 징용 등의 역사적 경험이 반일 감정의 주요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231] 최근에는 일본의 역사교과서 문제와 혐한 정서, 2019년 한일 무역 분쟁으로 인한 일본 제품 불매 운동 등이 반일 감정을 더욱 심화시키고 있다.[232][233][234][235]

중국에서는 중일전쟁, 만주사변, 난징 대학살, 731 부대 등 일제의 침략과 잔혹 행위가 반일 감정의 주된 배경이다.[5][6][7][8] [9] 댜오위다오(센카쿠 열도) 영유권 분쟁 또한 중일 간 갈등을 심화시키는 요인이다.

러시아는 러일 전쟁영토 문제로 인해 반일 감정이 존재한다.[32] 인도네시아, 필리핀 등 동남아시아 국가들에서도 일본 점령 시기와 관련된 역사적 논쟁이 반일 감정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있다.[32] 브라질, 페루 등 일본인 이민 역사가 있는 남미 국가에서는 일본계 주민에 대한 차별이 반일 감정으로 표출되기도 했다.[32]

대만은 복잡한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 일본 통치 시대의 차별과 위안부 문제, 댜오위다오(센카쿠 열도) 영유권 문제 등으로 반일 감정이 존재한다.[189] 그러나 국공내전 이후 중국국민당의 통치와 일본 문화 억압,[189] 1972년 중일 국교 정상화 이후 일본과의 단교[189] 등은 대만인들에게 일본에 대한 복합적인 감정을 갖게 했다. 이등휘 총통 이후 대만 민주화와 함께 일본 통치 시대에 대한 긍정적 평가가 늘어나면서,[200] 최근에는 일본에 대한 우호적인 여론이 높은 편이다.[193][194][195][196][197]

2. 1. 1. 한국

한국에서의 반일 감정은 주로 다음과 같은 역사적 요인에 기반한다.

특히 일제강점기는 한국인에게 깊은 역사적 상처를 남겼다. 이 시기 겪은 탄압, 차별, 황국 신민화 정책, 강제 징용, 위안부 문제 등은 1945년 광복 이후에도 역사적 분쟁 요소로 남아있다.[231] 일본의 역사교과서 문제 등 일본 내 역사관이 한국의 반일 감정을 자극한다는 주장도 있다.[232]

최근에는 일본 내 혐한 정서에 대한 반감도 갈등 요인이 되고 있다. 2019년 한일 무역 분쟁으로 촉발된 일본 제품 불매 운동은 반일 감정 확산과 정치적 논쟁을 낳았다.[233][234][235]

조선에서는 중국 중심의 소중화사상에 따라 주변국을 이적으로 여겼다.[144] 1402년 제작된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에는 명나라와 조선이 '''중화'''(세계의 중심)이고, 나머지는 ''''''로 표시되어 있다.[144] 1468년 박시형은 일본, 류큐, 여진, 삼섬(이키, 쓰시마, 마쓰우라)이 조선에 "내정"(입공)하고 있다고 언급했다.[145][146] 양반들은 자신을 중화 문명의 구현자로 여기며, 조선 서민들을 "이적 짐승의 무리"라고 차별했다.[147]

13세기 원나라의 원구 당시 고려군은 원·중국 앞잡이가 되어 일본을 두 차례 침략했다. 15세기 응영의 외구 때 쓰시마를 침략했지만, 이후 일본과 여진에게 침략을 받았다. 16세기1592년~159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조선 침략(임진왜란)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은 조선에는 반일 감정이 남았다.

에도 시대 1607년 일본과 국교를 회복한 조선은 조선통신사를 파견했지만, 통신사들은 일본 풍습을 야만적이라고 지적했다. 1636년 제4회 통신사 부사 김세렴은 "남자는 모두 반폭의 청포로 배꼽 아래를 가리고 있다"고 기록했다.[157][144][151] 신유한은 "음란한 행위는 완전히 짐승과 같다"고 기록했다.[157]

1763년 일본에 온 제11회 조선통신사 김인겸은 일동장유가에서 "이 풍요로운 금성탕치가 왜인의 소유"라며 일본 침략 욕망을 드러냈다.[152] 그는 "개와 같은 왜인에게 배례하는 것이 고통스럽다"며 쇼군 알현을 거부했다.[153] 원중거는 임진왜란 승전론을 담은 『화국지』를 저술했다.[154]

19세기 서구 열강이 조선에 진출하자, 쇄국 및 위정척사 사상이 팽배했다. 일본을 서구 열강을 추종하는 ‘가양이(假洋夷)’ 또는 ‘왜이(倭夷)’로 여겼다.[144] 1876년 강화도 조약으로 개국했지만, 위정척사 사상은 민족주의의 기반이 되었다.[144] 1882년 임오군란 때 일본인 군사고문 및 공사관원들이 살해되었다. 조지 클레이튼 포크는 당시 조선인들이 일본인의 피를 흘릴 기회를 노리고 있다고 보고했다.[156]

1894년 동학 농민 운동(갑오농민전쟁) 처리를 둘러싼 청일전쟁에서 청이 패배하며 화이질서가 붕괴되고, 조선은 청의 책봉에서 벗어나 독립을 선언했다. 삼국간섭 후 친일 개화파 김홍집 정권은 명성황후 세력의 쿠데타로 1895년 7월 6일 붕괴되었다. 10월 8일,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일본인과 개화파에 의해 암살되었다. 김홍집이 발표한 단발령에 반발한 유학자들이 의병 운동을 시작했다. 1897년 대한제국으로 국호를 바꿨지만, 1905년 을사늑약으로 일본 제국의 보호국이 되었다. 의병 운동이 활발해졌지만 일본군에 진압되었다. 1909년 안중근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했다. 1910년 경술국치가 이루어졌다. 반일파에게는 이적(夷狄)으로 여겼던 일본에 나라가 병합되었기에 민족주의는 더욱 강한 반일 감정으로 발전했다.[157] 해방 후 대한민국에서는 안중근이 항일 투쟁의 영웅으로 여겨진다.
조선독립군과 대한민국임시정부일제강점기 의병 운동은 한국 독립 운동으로 이어져 1919년 3·1 운동을 거쳐, 만주 간도에서 항일 독립군이 성립하고, 상하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성립했다. 초대 대표는 이승만이었다. 임시정부는 1940년 충칭에서 한국광복군을 창설했다. 1941년 진주만 공격 후 일본에 선전포고했지만, 실효성은 없었다.

조선 독립군은 1920년 청산리 전투에서 궤멸되었지만, 만주에서 동북항일연군이 성립하여 김일성이 소속되어 있었다.
이승만 정권이승만은 "반일주의"를 내세워 민족 유대감을 형성하고,[165] 반일 교육을 실시했다.

1957년 이승만은 "일본이... 우리의 문명과 예의범절을 배우고... 동양의 문명을 "한국"으로부터 받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말했다.[166][157]
박정희 정권박정희는 『국가·민족·나』에서 "우리 반만 년의 역사는... 퇴영과 조잡과 침체의 연쇄사였다"라고 한국(조선)을 비판했다.[167]

박정희는 『한민족의 나아갈 길』에서 한국인의 "자율 정신 결여", "민족애 결여" 등을 비판하며, "민족의 나쁜 유산"으로 사대주의, 나태, 악성 이기주의 등을 제시했다.[168]

박정희는 유신 체제를 수립하며 "국체 있는 교육"을 내세웠고, 역사 교육 목적으로 "주체적 민족사관"이 내걸렸다. 박정희는 친일파였다고 알려져 공식적으로는 "반일"이었지만, 비공식적으로는 "친일"적인 면도 있어 "낮에는 반일, 밤에는 친일"이라고도 불린다.[169][170]

1974년 문세광 사건으로 한국 내 반일 감정이 격화되었다.
전후 보상1998년 김대중 대통령 방일 이전, 한국 지상파 TV는 일본산 콘텐츠 방영을 거의 허용하지 않았다.

1991년 위안부 문제가 크게 다뤄지며 반일 감정이 고조되었다. 일본 정부는 1995년 아시아 여성 기금을 설립했지만, 위안부 강제 연행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이 일본 정부의 공식 견해이다.

1998년 김대중 대통령 방일, 한일 월드컵 공동 개최 등으로 관계 개선 曙光이 보였지만, 2013년 여론조사에서 일본에 대해 "좋지 않은 인상"을 가진 한국인은 76.6%였다.[171]
노무현 정권2003년 출범한 노무현 정권은 고이즈미 정권과 대립하며 일본과 거리를 두었다. 2005년 한일 기본 조약 협상 의사록 공개 후, 노무현 대통령은 일본에 일부 보상 의무가 남았다고 연설했다. 2005년 시마네현 의회다케시마의 날 조례 제정으로 한국 정부 차원의 항의가 잇따랐다.
친일파에 대한 제재한국은 일본 통치를 긍정하는 친일파에 대한 제재가 엄격하다. 2005년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의 국가귀속에 관한 특별법,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정 등 반일 정책이 실행되었다.

한국 인터넷에서는 친일 글에 대한 검열이 이루어진다. 대한민국 방송통신위원회가 친일 발언 웹사이트, 블로그를 강제 삭제하거나 접속 금지시켜 언론 통제를 한다.
이명박 정권이명박 대통령은 "실용주의" 정책을 표방하며, 대일 외교에서 강경과 유화를 섞은 현실적 스탠스를 채택했다.[172] 후쿠다 야스오와 한일 셔틀 외교가 재개되었다.

2012년 노다 요시히코 총리 친서 반송, 독도 상륙, 천황 사죄 요구 등 대일 강경 외교를 했다.[173][174]
문재인 정권한일 무역 분쟁 중, 문재인은 일본이 도둑놈 심보라고 발언했다.
일본 대중 문화와의 관련1980년대까지 한국에서는 일본 영화, 음악 유통 등 일본 문화 표현이 엄격히 금지되었다.[175] 그러나 일본 애니메이션은 한국 작품처럼 수정되어 방영되었다.

1987년 일본어 서적, 1992년 일본 영화, 1998년 일본 만화 제한이 해제되었다. 2010년 SKE48이 한국 지상파 TV에서 일본어 노래를 불렀다.[176]

일본 영화 "망국의 이지스" 출연 한국 배우 최민수가 한국에서 비난받는 등, 일부 한국인의 반일 감정은 여전하다.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WBC)에서 일장기를 흔든 한국인이 주위 한국인들에게 꾸중을 들었다. 반일 시위에서 일장기나 일본 총리 사진을 태우는 일이 발생하며, 일본인의 대한 감정을 악화시키고 있다.

2. 1. 2. 중국

중일전쟁, 만주사변, 난징 대학살, 731 부대 등 일제 시대의 역사적 사건에 대한 평가 문제가 중국인들의 반일 감정의 주요한 원인이 되고 있다.[5][6][7][8] [9]

최근에는 댜오위다오의 소유권을 놓고 영토 분쟁이 일어나 심각한 대립을 일으키고 있다. 일본 측은 이 섬을 과거 병합할 때 무주지였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중국 측은 일본에게 빼앗겼다고 주장하며 섬 주위에 접근하거나 상륙을 시도한 적도 있었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일본 정부는 순시선을 파견하는 등의 대응조치를 취하였고 현재까지 그 분쟁이 이어져오고 있다.

중국에서는 반일 감정이 매우 강하며, 일본과 일본 국민 및 문화에 대한 불신, 적대감, 부정적인 감정이 널리 퍼져 있다. 반일 감정은 주로 근대 이후(1868년 이후)의 현상이다. 대일본제국은 청나라 말기에 중국으로부터 영토를 병합하는 결과를 종종 가져온 조약들을 협상했다. 일본의 영토 확장과 일본 정부의 21개조 요구에 대한 불만은 중국에서 심각한 일본 제품 불매 운동으로 이어졌다.

오늘날 중국에는 중일전쟁의 잔혹 행위와 일본의 전후 행동, 특히 그러한 잔혹 행위에 대한 명확한 인정의 부족, 일본 정부의 알려진 전범 고용, 그리고 일본 교과서의 역사 수정주의에 대한 쓴맛이 남아있다.[26] 초등학교에서는 어린이들에게 일본의 전쟁 범죄에 대해 자세히 가르친다. 예를 들어, 수천 명의 어린이들이 초등학교에서 베이징의 중국인민항일전쟁기념관으로 인솔되어 일본군이 중국 노동자들을 전시 노동에 강제로 동원한 기록[27], 난징 대학살[28], 그리고 위안부 문제 등 전쟁 잔혹 행위 사진을 보도록 한다. 박물관 관람 후 어린이들의 일본에 대한 증오심이 상당히 증가한 것으로 보고되었다. 전쟁 종전 이후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전쟁 중 행동에 대한 논의는 여전히 강력한 감정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데, 그 이유는 대부분의 일본인들이 당시 일어난 일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사회가 홀로코스트 이후 독일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유형의 자기 반성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29] 따라서 일본 군사 상징물의 사용은 여전히 중국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데, 2001년 중국 팝 가수 자오웨이(趙薇)가 패션 잡지 화보 촬영 중 욱일기를 착용한 사건이 대표적인 예이다.[30] 인터넷에서 엄청난 반응이 일어났고, 난징 대학살 생존자의 공개 사과를 요구하는 공개 서한이 돌기도 했으며, 가수는 심지어 공격을 받기도 했다.[31] 2017년 BBC 월드 서비스 여론 조사에 따르면, 중국인 중 일본의 영향력을 긍정적으로 보는 사람은 22%에 불과하고,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은 75%에 달해, 중국이 세계에서 가장 반일적인 국가가 되었다.[1]

최근 중국 친일파들은 민족주의자들에 의해 한간(漢奸)이나 정리(精日)로 비난받는 경우가 많다.

광저우(广州)의 한 식당 앞에 붙은 포스터

2. 1. 3. 기타 동아시아 국가

러시아는 러일 전쟁영토 문제로 인해 반일 감정이 존재한다.[32] 인도네시아, 필리핀 등에서도 일본 점령 시기와 관련된 역사적 논쟁으로 인해 일부 반일 감정이 나타난다.[32] 브라질, 페루 등 일본인 이주가 많았던 지역에서는 일본계 주민이 인종차별 대상이 되기도 했다.[32]

중국에서는 전쟁 영화와 애니메이션에서 반일 감정을 볼 수 있다. 2012년 한 해에만 200편이 넘는 반일 영화가 제작되었다.[32] 2000년 영화 《칠인의 칼》은 일본군 병사가 중국 주민과 친근하게 묘사되었다는 이유로 중국 정부에 의해 상영 금지되었다.[32]

BBC의 조사에 따르면, 아시아에서 일본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이 강한 국가는 중국과 한국이다.[109] 요미우리 신문, 한국일보, 갤럽의 공동 조사에서도 중국과 한국은 다른 동남아시아 국가들과 달리 일본에 대해 부정적인 응답이 많았다.[110] 이는 역사 인식 문제와 반일 교육의 영향으로 보인다.[111]

대만은 일본의 식민지 지배, 위안부 문제, 댜오위다오(센카쿠 열도) 영토 문제 등으로 반일 감정이 존재한다.[189] 국공내전 이후 중국국민당은 "대일전쟁에서 승리하여 대만인들을 해방시켰다"고 주장하며 통치를 정당화했다.[189] 또한, 대만인의 정체성을 약화시키기 위해 일본 문화를 억압했다.[189] 1972년 중일 국교 정상화 이후, 대만은 일본과 단교하고 일본어 방송과 영화를 금지했다.[189] 1980년대 말에 금지령이 완화되었지만, 1993년까지 "일본 추방" 정책이 유지되었다.[189]

댜오위다오(센카쿠 열도) 영유권 문제와 관련하여, 2008년 류자오시엔 행정원장은 "개전도 불사하겠다"고 발언했지만, 이후 외교적 해결을 우선시한다는 입장을 밝혔다.[190] 일본 통치 시대의 차별과 위안부 피해 여성들은 일본 정부에 대한 소송과 항의를 진행하고 있다.[191] 2007년 아베 신조 총리의 위안부 관련 발언에 대해 대만 정부는 항의 성명을 발표했다.[191]

2006년 아소 다로 외무대신(당시)의 식민지 시대 대만 교육 수준 향상 발언에 대해, 타이베이 타임스는 "일본 정치인들의 경솔한 발언은 일본의 친구를 잃게 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192]

2009년과 2010년 일본대만교류협회 조사에서 대만인의 대다수는 일본에 친근감을 느낀다고 응답했다.[193][194][195][196][197] 2021년 조사에서도 대만인의 83.9%가 일본에 호감을, 90% 가까이가 미국, 일본과의 정식 외교 관계를 지지했다.[198]

워싱턴 포스트는 대만이 일본의 지배를 받았음에도 친일 감정을 유지하고 있다고 보도했다.[199] 이등휘 총통 이후 대만 민주화와 함께 일본 통치 시대에 대한 긍정적 평가가 늘어났다.[200] 이등휘는 일본 통치 시대의 인프라 정비와 "일본 정신"이 대만 근대화에 기여했다고 평가했다.[200][201]

양영명과 리쟈진 등 대만 총통부 관계자들은 대만과 일본 간의 상호 우호적인 감정과 "감정의 관계"를 강조했다.[203][204] 2006년 천수이볜 총통은 북한 핵실험을 비난하며 일본, 미국과의 군사 협력 강화를 주장했다.[205]

2. 2. 아메리카

러일 전쟁(1904~1905)부터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일본이 항복할 때까지 40년 동안, 미국 선교사들은 배일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이 진주만 공격을 감행하자, 미국 정부는 일본계 미국인들을 수용소에 가두고 일본인 가게를 습격하는 등 반일 감정이 극심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행정부는 태평양 전쟁 기간 동안 일본 국적자들을 수용소에 수용하는 행정 조치를 발동했다. 일부 일본계와 아시아계는 미국인들의 보복을 피해 미군에 자원입대하여 일본군과 싸우기도 했다.

반일 감정은 제2차 중일 전쟁과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의 행동에 대한 적대감부터 일본 문화에 대한 경멸, 일본인에 대한 인종차별까지 다양하다. 반일 선전은 연합군 정부의 선전으로 인해 비인간화 감정을 부추겼으며, 인종적으로 비하하는 성격을 띠기도 했다.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은 서구화를 통해 산업화된 제국주의 열강으로 발돋움하려 했지만, 서구 사회는 일본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일본 문화는 의심과 경멸의 대상이었다.

태평양 전쟁 이후 일본의 항복으로 반일 감정은 다소 누그러졌지만, 일본 정부가 과거 만행에 대해 충분히 속죄하지 않았다는 인식 때문에 때때로 감정이 고조되기도 한다. 오늘날 일본 정부는 일부 배상 조치를 취했지만, 일본 제국의 군사적 공격과 만행에 대한 역사적, 민족주의적 적대감으로 인해 반일 감정은 여전히 남아있다.

전 총리 고이즈미 준이치로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추축국의 일원으로 일본 제국을 위해 싸우다 죽은 이들을 합사한 야스쿠니 신사를 매년 참배하여 한국과 중국의 비판을 받았다. 극우 민족주의 단체들은 일본의 만행을 축소하는 역사 교과서를 제작했으며, 이러한 교과서에 대한 논란은 외국의 적대적인 관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일부 반일 감정은 덤핑과 같은 일본 기업의 사업 관행에서 비롯되기도 한다.

브라질의 경우, 19세기와 20세기 동안 엘리트층은 국가 인구의 인종적 백색화를 원했다. 일본 이민자 공동체는 브라질 백색화에 대한 장애물로 여겨졌으며, 게토를 형성하고 높은 비율의 근친혼을 한다는 점 등 다른 우려와 함께 특히 위험하다고 여겨졌다. 브라질의 법률가이자 역사가, 사회학자인 올리베이라 비아나(Oliveira Viana)는 일본 이민자들을 "그들(일본인)은 유황과 같다. 용해되지 않는다."라고 묘사하기도 하였다.

2. 2. 1. 미국

미국에서는 19세기 후반부터 아시아계 이민자들에 대한 인종적 편견이 존재했으며, 이는 일본인들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일본계 미국인들은 차별적인 법률로 인해 시민권과 토지 소유권 등 기본적인 권리를 제약받았고, 농민들은 농업 노동자로 전락하는 경우가 많았다.[78] 1906년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 교육위원회는 일본계 어린이들을 분리된 학교에 다니도록 하는 규정을 통과시키기도 했다.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한 후, 캘리포니아에서는 일본에 대한 인종차별과 황색 위험에 대한 믿음이 더욱 강해졌다. 1931년 일본의 만주사변은 미국에서 비난을 받았고, 난징 대학살과 같은 일본군의 잔혹 행위에 분노한 시민들은 일본의 중국 철수를 요구하며 미국의 경제적 개입을 촉구했다.

1940년경 샌프란시스코 차이나타운에서 일본 제품 구매를 경고하는 영 차이나 클럽의 미국 방문객 경고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이후, 서구 여론은 중국을 지지하는 경향이 강해졌고, 중국 민간인에 대한 일본군의 잔혹 행위에 대한 목격담은 일본에 대한 반감을 더욱 키웠다.

일본군을 위한 함정


진주만 공격 다음 날, 이 일본계 미국인은 이 현수막을 내걸었지만 나중에 구금되었다. 이 도로시아 랭 사진은 일본계 미국인 강제 수용 직전인 1942년 3월에 촬영되었다.


진주만 공격은 미국 내 반일 감정을 폭발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미국은 선전포고 없는 기습 공격을 배신과 비겁한 행위로 간주했고, "일본인 사냥 허가증"이 유포되기도 했다. ''라이프'' 잡지는 일본인과 중국인을 구별하는 방법에 대한 기사를 싣기도 했다.[79]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군의 만행은 미국인들의 분노를 더욱 키웠다.

미국 제2차 세계 대전 포스터. 아마도 도조 히데키의 캐리커처를 바탕으로 한 악마 같은 괴물의 큰 캐리커처 얼굴을 보여준다. 이 인물은 피가 뚝뚝 떨어지는 칼을 들고 있다.


미국 역사가 제임스 J. 와인가르트너는 미국인들이 일본인을 '인간 이하'로 여겼기 때문에 포로로 잡는 것을 꺼렸다고 주장한다.[80] 울리히 스트라우스는 최전선 병사들이 일본군을 극도로 증오했으며, 일본군이 항복한 연합군 병사들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고 믿었기 때문에 포로를 잡거나 보호하도록 설득하기 어려웠다고 설명한다.[82]

일본계 미국인 강제 수용은 미국 내 반일 감정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약 11만 2,000명에서 12만 명의 일본계 미국인들이 강제 수용되었으며, 전쟁 기간 동안 미국 본토에 수감되었다. 1944년 여론 조사에서는 미국 대중의 13%가 모든 일본인의 대량 학살을 지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83][84]

2. 2. 2. 브라질, 페루 등

일본인의 이주가 많았던 브라질, 페루 등지에서 일본계 주민은 한때 인종주의적인 차별 대우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5]

19세기와 20세기 동안 브라질 엘리트층은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 엘리트층과 마찬가지로 국가 인구의 인종적 백색화를 원했다. 브라질 정부는 유럽 이민을 장려했지만, 비백인 이민에는 상당한 반대에 직면했다. 일본 이민자 공동체는 브라질 백색화에 대한 장애물로 여겨졌으며, 게토를 형성하고 높은 비율의 근친혼을 한다는 점 등 다른 우려와 함께 특히 위험하다고 여겨졌다. 브라질의 법률가이자 역사가, 사회학자인 올리베이라 비아나(Oliveira Viana)는 일본 이민자들을 "그들(일본인)은 유황과 같다. 용해되지 않는다."라고 묘사했다. 브라질 잡지 ''오 말료(O Malho)''는 1908년 12월 5일자 판에서 "상파울루 주 정부는 완고하다. 첫 번째 일본 이민 실패 후, 그들은 3,000명의 황색 인종을 계약했다. 그들은 브라질에 우리와 정반대의 인종을 주입하려고 고집한다."라는 설명과 함께 일본 이민자들을 비난하는 삽화를 실었다.[13] 1923년 10월 22일, 피델리스 레이스(Fidélis Reis) 대표는 이민자 입국에 관한 법안을 제출했는데, 그 5조는 "흑인 이민자의 브라질 입국은 금지된다. 아시아계 이민자의 경우, 매년 그 나라에 거주하는 이민자 수의 5%에 해당하는 수만 허용된다…."였다.[14]

제2차 세계 대전 이전 수년 동안, 제투리우 바르가스(Getúlio Vargas) 대통령 정부는 브라질 내 이민자 출신 사람들의 강제 동화 과정을 시작했다. 1933년, 인종이나 국적을 언급하지 않고 이민 할당량을 설정하고 이민자의 인구 집중을 금지하는 헌법 개정안이 압도적인 다수결로 통과되었다. 해당 법안에 따르면, 브라질은 지난 50년 동안 받아들인 각 국적의 총 입국자 수의 2%를 초과하여 받아들일 수 없었다. 포르투갈인만이 예외였다. 이 조치는 이미 대규모로 유입되어 이민자 흐름이 감소하고 있던 이탈리아인과 스페인인과 같은 유럽 이민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그러나 1980년대까지 유지된 이민 할당량은 일본 이민뿐만 아니라 한국과 중국 이민도 제한했다.[15][13][16]

1942년 브라질이 연합국 편에 서서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자, 일본과의 모든 교류가 단절되었고, 새로운 일본 이민자의 입국이 금지되었으며, 많은 제약이 일본계 브라질인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일본 신문과 학교에서 일본어 교육이 금지되어 일본계 후손들에게 포르투갈어만 남게 되었다. 많은 일본 이민자들이 포르투갈어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공동체 외부의 정보를 얻는 것이 매우 어려워졌다.[17] 1939년 상파울루의 브라질 북서부 철도(Estrada de Ferro Noroeste do Brasil) 조사에 따르면, 일본계 브라질인의 87.7%가 일본어 신문을 읽었는데, 이는 당시 일반 대중보다 훨씬 높은 읽기 능력 수준이었다.[13] 일본계 브라질인들은 경찰이 발행한 통행증 없이는 여행할 수 없었고, 일본 학교는 폐쇄되었으며, 일본과의 단파 통신을 방지하기 위해 라디오 수신기가 압수되었다. 일본 회사의 재산이 압수되었고, 일본계 회사 여러 곳이 정부의 개입을 받았다. 일본계 브라질인들은 자동차 운전이 금지되었고, 일본인이 고용한 운전자는 경찰의 허가를 받아야 했다. 수천 명의 일본 이민자들이 간첩 혐의로 체포되거나 추방되었다.[13] 1943년 7월 10일, 산투스에 거주하는 약 1만 명의 일본인, 독일인, 이탈리아인 이민자들은 브라질 해안에서 24시간 이내에 이동해야 했다. 경찰은 아무런 통지 없이 행동했다. 강제 이주된 사람들의 약 90%가 일본인이었다. 일본인들은 해안 지역에 거주하려면 통행증이 있어야 했다.[13] 1942년 파라(Pará)의 토메아수(Tomé-Açu)에서 후추 재배를 시작한 일본인 공동체는 사실상 "강제 수용소"로 바뀌었다. 이때 워싱턴 D.C. 주재 브라질 대사인 카를로스 마르틴스 페레이라 에 수사(Carlos Martins Pereira e Sousa)는 법적 근거 없이 모든 일본계 브라질인을 "수용소"로 이송할 것을 브라질 정부에 촉구했는데, 이는 미국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에게 행해진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일본인들의 "국가 안보"에 대한 활동에 대한 의심은 결코 확인되지 않았다.[13]

전쟁이 끝난 후에도 브라질의 반일 감정은 지속되었다. 전쟁 후, 일본 이민자들이 결성한 테러 단체인 신도 연맹(Shindo Renmei)은 일본 항복을 믿는 일본계 브라질인들을 살해했다. 이 단체가 저지른 폭력 행위는 브라질 내 반일 감정을 증폭시켰고, 브라질인과 일본계 브라질인 사이에 여러 차례의 폭력적 충돌을 일으켰다.[13] 1946년 헌법 제정 의회에서 리우데자네이루의 미구엘 쿠토 필류(Miguel Couto Filho) 대표는 "어떤 연령과 출신의 일본 이민자의 입국도 금지한다"는 헌법 개정안을 제안했다. 최종 투표에서 찬성 99표, 반대 99표로 동률이었다. 상원의원이자 제헌 의회 회의를 주재했던 페르난두 드 멜루 비아나(Fernando de Melo Viana)는 결정 투표권을 행사하여 헌법 개정안을 부결시켰다. 단 한 표 차이로 1946년 브라질 헌법은 일본인의 브라질 이민을 금지하지 않았다.[13]

2010년대 후반부터 브라질에서 어느 정도의 반일 감정이 커지고 있다. 전 브라질 대통령인 자이르 보우소나루(Jair Bolsonaro)는 일본인에 대한 차별적인 발언을 했다는 비난을 받았는데, 이는 언론과 일본계 브라질인(Japanese Brazilians) 사회에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18][19] 일본계 브라질인 사회는 일본 외 지역에서 가장 큰 규모로 여겨진다.[20] 또한 2020년에는 COVID-19 범유행의 결과로 상파울루와 리우데자네이루와 같은 도시에서 일본계 브라질인에 대한 외국인 혐오와 폭행 사건이 보고되었다.[21][22][23][24]

2. 3. 오세아니아

오스트레일리아에서의 반일 감정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군의 공격과 포로 처우 문제, 그리고 최근의 고래잡이 문제 등과 관련되어 있다.

2. 3. 1. 오스트레일리아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은 오스트레일리아를 공격하여 북부 및 서부 해안에 폭격과 잠수함 공격을 가했다. 이때 의료선 센톨을 공격한 사건(전시 활동 중 의료 관계자에 대한 공격은 특히 문제가 된다)은 제2차 세계 대전의 비극으로 기록되고 있다. 또한 동남아시아에서 활동하던 오스트레일리아군 2만 2000명이 일본군에 포로로 잡혔는데, 그중 3분의 1이 수용소에서 사망하여 포로 처우에 대한 비인도성이 문제가 되었다.[223]

최근 오스트레일리아는 고래잡이 문제를 둘러싸고 일본을 특히 강하게 비난하는 국가 중 하나이며,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반고래잡이 운동이 확산되면서 반일 감정이 일부에서 증가하고 있다. 2008년 7월에는 친일파가 많은 케언스에서 렌터카 회사가 렌터카 캠핑카에 "Save a Whale, Harpoon a Jap(고래를 구하라, 일본인에게 작살을 꽂아라)"라는 반일적인 반고래잡이 슬로건을 스프레이로 써 붙인 사실이 발각되었다.[224] 퀸즐랜드주 총리 안나 블라이는 이 슬로건을 인종차별적이라고 비난했다.[224]

또한 오스트레일리아의 텔레비전에서는 뚱뚱한 일본인이 초밥을 먹으려고 하자 작살이 날아와 찔려 죽는다는 내용의 블루텅 맥주 회사 광고가 방영되고 있다.[225] 이 광고에 대해 맥주 연구가 브라이스 에딩스는 "블루텅사 이외의 맥주를 마시면 고래를 죽이는 데 가담하는 것인가"라며 회사의 "싸구려" 판매 전략을 비판했다.[226]

오스트레일리아의 반일·반고래잡이 운동에는 일본 여성 참가자도 있으며, 남녀 문제나 페미니즘과 얽히면서 문제를 복잡하게 만들고 있다.

2019년 외무성이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오스트레일리아에 있어 앞으로 중요한 파트너가 될 국가는 다음 중 어디인가"라는 질문에 일본은 44%로 미국과 동률 1위를 차지했다.[227]

2. 4. 유럽

유럽에서의 반일 감정은 제2차 중일 전쟁과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 제국의 행동에 대한 적대감에서 비롯된 경우가 많다. 연합군의 반일 선전은 일본인에 대한 비인간화를 부추겼으며, 이는 인종차별적 성격을 띠기도 했다.[5][6][7][8] [9]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일본이 과거 만행에 대해 충분히 사죄하지 않았다는 인식[10]과 역사 왜곡 시도는 반일 감정을 더욱 악화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러시아는 북방 영토 문제 등으로 인해 일본 대사관 등에 대한 항의 집회가 열리기도 한다. 러시아 자유민주당은 반일적인 주장을 펼쳐왔으며, 당수 블라디미르 지리노프스키는 도쿄에 핵폭탄을 투하해야 한다는 극단적인 발언을 하기도 했다.[222]

2012년 중국의 반일 활동이 있었다.

제2차 세계 대전에 휘말린 국가들의 반일 감정에는 천황제 존속과 대일본제국의 국가 원수였던 쇼와 천황이 전후에도 천황 지위를 유지한 것이 요인으로 작용했다는 주장도 있다.[215] 더글러스 맥아더의 정치적 의도로 쇼와 천황의 기소가 기각되었고,[216] 이는 한반도, 타이완, 중국, 동남아시아, 미국, 영국, 네덜란드 등에서 천황에 대한 적대감과 증오를 불러일으켰다.

미국의 경우, 여러 여론 조사에서 반일 감정은 특별히 나타나지 않는다. 갤럽의 조사에 따르면, 미국인들은 일본에 대해 대체로 호의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으며, 1996년 이후 꾸준히 대다수가 일본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217][218][219][220] 퓨 리서치 센터의 조사에서도 일본은 아시아 국가 중 가장 높은 호감도를 기록했다.[220]

2. 4. 1. 영국

1902년, 영국은 일본과 공식적인 군사 동맹을 체결했다. 그러나 이 동맹은 1923년에 공식적으로 해소되었고, 1930년대에는 영국이 일본 제국의 군사적 확장에 반대하면서 양국 관계가 악화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영국의 대일 선전은 미국과 마찬가지로 일본인의 신체적 특징을 극단적으로 과장하거나, 거미와 같은 동물로 묘사하는 등 혐오스러운 내용을 담고 있었다.[77] 전후 영국 내의 많은 반일 감정은 영국군 포로의 처우에 초점이 맞춰졌다(''콰이 강의 다리'' 참조).

2. 4. 2. 네덜란드

1971년 쇼와 천황의 네덜란드 방문 때 계란이 던져지거나, 손으로 심은 묘목이 뽑히는 사건이 발생하는 등 네덜란드는 현재에도 반일 감정이 보이는 국가 중 하나이다.[214] 1986년에는 베아트릭스 여왕의 방일이 국내 여론의 반발로 중단되기도 했다.

1960년대 중반 한 일본 작가가 안네 프랑크의 집 근처 서점에서 안네 프랑크 관련 자료를 찾던 중, 한 손님인 노부인으로부터 "안네의 비극에는 나치 독일과 손을 잡은 일본에도 책임이 있다"는 격렬한 비난을 받기도 했다.[214] 1991년 쇼와 천황 서거 후 베아트릭스 여왕의 방일 시에는, 궁중 만찬회에서 '(일본의 네덜란드인 포로 문제는) 귀국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은 역사의 한 장입니다'라는 연설이 있었다.

2. 4. 3. 프랑스, 독일

프랑스와 독일의 경우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었기 때문에, 이들 국가에서 나타나는 반일 감정은 주로 전후 일본의 역사 수정주의나 경제 문제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3. 현대의 반일 감정

반일 감정은 제2차 중일 전쟁과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 정부의 행동에 대한 적의부터 일본 문화에 대한 경멸 또는 일본 국민에 대한 인종차별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반일 선전은 연합군 정부의 선전으로 인해 비인간화 감정이 부추겨졌으며, 이러한 선전은 종종 인종적으로 비하하는 성격을 띠었다. 반일 감정은 일본군의 만행으로 인해 한국중국에서 가장 강할 수 있다.[5][6][7][8] [9]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일본 제국의 항복 이후 감정이 다소 누그러졌지만, 일본 정부가 과거 만행에 대해 충분한 속죄를 하지 않았거나 이러한 사건의 역사를 축소하려고 했다는 인식으로 인해 때때로 감정이 고조된다.[10] 오늘날 일본 정부는 일부 배상 조치를 취했지만, 일본 제국의 군사적 공격과 만행과 관련된 역사적이고 민족주의적인 적대감을 바탕으로 반일 감정은 지속된다.

전 총리 고이즈미 준이치로야스쿠니 신사에서 전몰자를 추모한 것에 대해 한국과 중국으로부터 심한 비판을 받았다. 극우 민족주의 단체들은 일본의 만행을 축소하는 역사 교과서를 제작했으며,[12] 이러한 교과서에 대한 반복되는 논란은 때때로 외국의 적대적인 관심을 끌고 있다.

아시아에서는 BBC요미우리 신문·한국일보·갤럽의 조사에 따르면,[109][110] 동남아시아를 포함한 다른 조사 대상국은 일본에 호의적인 반면, 중국한국은 부정적인 응답이 많았다.

특히 중화인민공화국, 중화민국, 북한과 한국은 역사 인식 등에서 일본과 마찰을 빚고 있으며, 동북아시아의 “반일” 감정은 반일 교육의 결과로 여겨진다.[111]

한국에서는 ‘백제’라는 인디밴드가 일본인을 ‘장애인’이라고 욕하는 노래를 부르고,[112] 일본 침몰이 히트하는 등의 현상이 있었다. 중국에서는 일본인 유학생이 폭행당하거나 일본인 관광객에게 서비스 제공을 거부하는 식당이나 병원 등이 화제가 되었다. 한국에서는 교육을 통해 대중에게 심어진 증오 감정이 존재하며, 비판 대상이 일본이면 무조건 지지하는 경향이 있다. 국제 절도단이 일본으로부터 훔친 물건을 돌려줄 필요가 없다는 판결이 나오는 등, ‘일본이 상대라면 일사부재리, 시효, 협정, 증거, 판례, 국제관습법의 벽까지 쉽게 넘어간다’는 국제법 무시 사법 체계라는 지적이 있다.[113]

2010년부터 2012년까지 주한 일본 대사를 지낸 무토 마사토시는 중국의 반일 감정이 공산당 지도하에 국가 이익에 따라 통제되는 것과 달리, 한국의 반일 감정은 국민 정서의 영향을 받아 국가 이익을 훼손하면서도 행해진다고 말했다.[164]

야구 대한민국 국가대표팀은 2006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과 2009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서 일본에 승리했을 때 마운드대한민국의 국기를 꽂았다.

고우석은 2023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한국 대표팀 합숙 중 인터뷰에서 1차 라운드 풀 B의 일본전에서 오타니 쇼헤이에게 고의사구를 던질 암시하는 발언을 했다.

;이승만 정권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강한 반일 감정을 가지고 "반일주의" 민족주의를 부추기며 "일제에 대한 투쟁"을 내세워 민족 유대감을 형성하고[165], 반일 교육을 실시했다.[166][157]

;박정희 정권

박정희 대통령은 저서 『국가·민족·나』에서 "우리 반만 년의 역사는 한마디로 말해서 퇴영과 조잡과 침체의 연쇄사였다"라고 한국(조선)에 대해 언급하고, "우리 민족사를 고찰해 보면 애석할 따름이다", "우리가 진정으로 일대 민족의 중흥을 기약하려면,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역사를 개선해야 한다. 이 모든 악의 창고와 같은 우리 역사는 차라리 불태워 버려야 한다"라며 자기 민족을 비판했다.[167]

박정희는 조선사에서 사대주의속국성을 자각하고, 저서 『한민족의 나아갈 길』에서 한국인의 "자율 정신 결여", "민족애 결여", "개척 정신 결여", "퇴폐한 국민 도덕"을 비판하고, "민족의 나쁜 유산"으로 사대주의, 나태와 불로소득 관념, 개척 정신 결여, 기업 정신 부족, 악성 이기주의, 명예 관념 결여, 건전한 비판 정신 결여를 제시했다.[168]

박정희는 독재 체제(유신 체제)를 수립하면서 "국체 있는 교육"을 내세우고, 역사 교육 목적으로 "민족 중흥 사명 달성을 위한 주체적 민족사관"이 내걸렸다. 이러한 한국 공교육이 반일 감정을 증폭시키는 측면이 있다. 다만, 박정희는 이승만과 달리, 생전 친일파였다고 알려져 있으며, 공식적으로는 "반일"이지만, 비공식적으로는 "친일"적인 면도 있어, "낮에는 반일, 밤에는 친일"이라고도 불린다.[169][170]

1974년 8월 문세광 사건에서는 한국 내 반일 감정이 격화되었고, 박정희도 일본 정부 대응에 격분했다.

;전후 보상

한국에서는 현재도 일본 문화에 대해 부정적인 풍조가 있으며, 지상파 TV는 일본산 콘텐츠 방영을 거의 허용하지 않는다. 한국 병합으로 한때 조선반도가 일본의 일부가 되었기 때문에, 일본이나 일본인 자체에 대한 적의를 품는 사람들이 아직 존재한다고 여겨진다.

1991년종군위안부 문제가 언론에서 크게 다뤄지고, 전 위안부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종군위안부" 문제는 한국 내 "반일" 감정 고조로 이어지고, 서울 일본 대사관 침입, 시위, 태극기 방화 등 폭동이 발생했다. 일본 정부는 1995년 아시아 여성 기금을 설립했다. 그러나 위안부에 대해서는 일본군 강제 연행 증거가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이 일본 정부 공식 견해이며, 한일 외교 문제로서 아직 전면 해결되지 못하고 있다.

1998년 김대중 대통령 방일, 한일 공동 월드컵 개최 등으로 관계 개선 曙光이 보였지만, 2013년 여론조사에서 양국 국민 약 40%가 1년 동안 상대국 인상이 "악화되었다"고 답했고, 일본에 대해 "좋지 않은 인상", "다소 좋지 않은 인상"을 가진 한국인은 76.6%였다.[171]

;노무현 정권

2003년 출범한 노무현 정권은 당초 일본과 관계 개선에 적극적이었지만, 고이즈미 정권과 대립 심화로 일본 정부와 거리를 두는 정책을 채택했다. 2005년 한국 정부 한일 기본 조약 협상 의사록 공개, 한국 국민 개인 보상 한국 정부, 일본 정부 한국 정부 일괄 경제 원조금 지불 문구 존재 보도, 이후 노무현 대통령 일본 측 일부 보상 의무 연설, 2005년 3월 시마네현 의회 다케시마의 날 조례 제정, 한국 정부, 지방 자치단체 항의, 교류 중단(다케시마의 날 참조).

;친일파에 대한 제재

한국·북한은 일본 통치 긍정 친일파 제재가 엄격하다. 북한 친일파 종신 수용소, 한국 친일파 사회적 말살, 노무현 정권 2005년 역사 문제, 독도 문제, 고이즈미 준이치로 야스쿠니 신사 참배 등 반일 감정 고조, 일본 통치 시대 친일파 자손 일러시아 전쟁 개시 전~한국 독립 전 반민족 반국가 행위 대가 취득, 상속, 고의 증여 재산 몰수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의 국가귀속에 관한 특별법,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정 등 반일 정책 실행.

한국 인터넷 친일 글 인터넷 검열, 대통령 직속 기관 대한민국 방송통신위원회 친일 발언 웹사이트, 블로그 강제 삭제, 접속 금지 언론 통제.

;이명박 정권

경제계 출신 이명박 대통령 "실용주의"=현실주의 정책 접근 표방, 대일 외교 정책 강경, 유화 혼합 현실적 스탠스 채택.[172] 이 대통령 취임 이후 야스쿠니 신사 참배 X 후쿠다 야스오 한일 셔틀 외교 재개.

2012년 노다 요시히코 총리 친서 반송, 독도 상륙, 천황 사죄 요구 등 대일 강경 외교.[173][174]

;문재인 정권

한일 무역 분쟁 중, 문재인 일본 도둑놈 심보 발언.

;일본 대중 문화와의 관련

한국 일본 통해 근대 문화 흡수, 일본 통치 시대 이후 일본 문화 유입, 일본 영향 한국 사회 널리 침투, 1980년대까지 한국 일본 영화, 음악 유통, 광고 등 매스미디어 일본 문화 표현 엄격 금지.[175] 실제 한국 남부 일본어 방송 수신, 일본 국내 녹음 녹화 밀수입 해적판 유통, 일부 애니메이션 일본 수입, 스태프, 작품 내 표현, 글자 변경, 일본 국기 삭제, 한국 국기 덮어쓰기 등 한국 제작 작품처럼 수정, 기모노 등 일본 연상 묘사 삭제, 장면 포함 회차 은폐·방송 X 애니메이션 데즈카 오사무 작품 등 일본 국내 높은 평가 작품 중심, 한국 공적 일본 대중 문화 배제, 일반 한국인 눈치 X 형태 일본 문화 흡수, 일본 통치 시대 잔재 일본 무도 한국식 어레인지 사례, 일본 문화 노골적 모방, 한국 대중 문화 현재 일본 대중 문화 유사성 높음, 이전 사정 모르는 한국인 사이 일본 대중 문화 한국 것 유사, 전자 후자 모방 오해, 일본 문화 기원 한국, 모방 불가 주장(한국 기원설 참조) 일부 활발 제기, 주장 일본 문화인 경우 존재.

1987년 일본어 서적, 1992년 일본 영화, 1998년 일본 만화 잇따라 제한 해제, 2010년 9월 SKE48 "2010 서울 드라마 어워드" 시상식 "강한 자여", "푸른 하늘 생각" 일본어 가창 한국 지상파 TV 최초 생중계.[176]

일본 자위대 영화 "망국의 이지스" 출연 한국인 여배우 최민수 한국 격렬 비난 등 일부 한국인 극단적 반일 감정, 한국 반일 작품 대중 문화 개방 후 활발 간행, 인기,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WBC) 한국 내 일본 팀 응원 일장기 한국인, 즉시 주위 한국인 꾸중, YouTube 공개, 반일 시위 일부 단체 일장기, 일본 총리 사진 방화 일상다반사, 일본 국조 대사관 앞 도살 사태, 일본인, 해외 니코니코 동화 팬 한국인 꿩 도살 격렬 비난, '일본 더 이상 한국 사과 필요 X', '일본 적대시 괜찮?' 등 반한 발언, 대한 감정 악화.

3. 1. 정치/외교적 요인

조선시대 중엽 1592년부터 1598년까지 약 7년간에 걸쳐서 전 국토가 전쟁터가 된 임진왜란을 겪었다.[231] 조선시대 안용복이 우리 땅이라고 주장한 독도 영유권 문제도 역사적 요인 중 하나이다.[231]

일제강점기는 한국인에게 중요한 역사적 인식을 남겼다. 이 시기에 겪은 여러 가지 탄압, 차별과 일본이 미국과 태평양전쟁을 시작하면서 벌인 황국 신민화 정책을 비롯한 조선인 남성의 강제 징용, 위안부 문제 등은 1945년 광복 이후에도 여전히 역사적인 분쟁 요소로 남아있다.[231] 일각에서는 일본의 역사교과서 문제 등을 들어 일본 국내의 과거사 역사관이 한국의 반일 감정을 자극한다고 주장한다.[232]

최근에는 일본에서 증가하는 혐한 정서에 대한 반감이 또 하나의 갈등 요인이 되고 있다. 2019년에는 한일 무역 분쟁으로 촉발된 불매 운동이 반일 감정 확산과 정치적 논쟁을 낳았다. 특히 동학 농민 혁명남한 대토벌 작전의 원한이 남은 전라도민들이 일본을 매우 싫어해서 일본과 관련된 것들을 극도로 거부하는 단체들도 있다.[233][234][235]

3. 2. 사회/문화적 요인

한국에서의 반일 감정은 주로 역사적 요인에 기반한다.

특히 일제강점기는 한국인에게 중요한 역사적 인식을 남겼다. 이 시기 겪은 탄압, 차별, 황국 신민화 정책, 강제 징용, 위안부 문제 등은 광복(1945년) 이후에도 역사적 분쟁 요소로 남아있다.[231] 일본의 역사교과서 문제 등 일본 국내의 과거사 역사관이 한국의 반일 감정을 자극한다는 주장도 있다.[232]

최근에는 일본 내 혐한 정서에 대한 반감, 한일 무역 분쟁으로 인한 불매 운동이 반일 감정 확산과 정치적 논쟁을 낳았다.[233][234][235] 동학 농민 혁명남한 대토벌 작전의 원한이 남은 전라도인들 중에는 일본 관련 요소를 극도로 거부하는 단체도 있다.[233][234][235]

3. 3. 기타 요인

아시아에서는 BBC가 정기적으로 실시하는 세계 각국 대상 타국 감정 관련 조사에서, 대체로 일본에 호의적인 응답이 나타나는 가운데, 중국조선은 일본을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응답이 많은 경향을 보였다.[109] 요미우리 신문·한국일보·갤럽 공동 조사에서도,[110] 동남아시아를 포함한 다른 조사 대상국은 일본에 호의적이었지만, 중국과 한국은 부정적 응답이 많아, “특정 아시아” 국가들이 압도적으로 반일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결과가 나왔다.

특히 중화인민공화국, 중화민국, 북한, 한국은 역사 인식 등에서 일본과 마찰을 빚고 있으며, 일본에 대한 역사적·정치적 비판은 일본 국내에서도 자주 보도된다. 동북아시아의 “반일” 감정은 반일 교육의 결과로 여겨진다.[111]

일본 정부의 외국인 노동자 수용 문제와 불법체류자 관련 인권 문제를 비판하는 활동이 있다. 이는 헤이트 크라임은 아니지만, 넓은 의미에서 반일 감정을 부추긴다고 지적하는 학자도 있다.

일본 내 외국인 여성 매춘 강요 문제에 대해 일본 국민이 방치했다는 비판이 미국 국무부,[116] 국제노동기구(ILO),[117] 여러 NGO,[118][119] 연구기관[120] 등에서 제기되었다. 이들은 인신매매라며 강하게 비판했고, 최근 일본은 입국 관리를 강화하고 부당 노동 피해자 발견 및 보호를 위한 법 개정을 시작했다.[121]

일본의 외국인 노동자 수용은 저출산 고령화로 증가 추세지만,[122] 세계 각국과 비교하면 매우 제한적이며, 국내 노동 인구 중 외국인 비율은 선진국 중 현저히 낮다.[123] 이는 외국인 노동자 문제 경시의 원인이 되고 있으며, 정부 간 FTA/EPA 협상, 노동조합 협상 등을 통해 적극 개선이 필요하다.

일본은 원칙적으로 단순 노동력 수용을 거부하며, 외국인 연수·기술 실습 제도 등의 허점을 이용해 취업한 외국인 노동자들이 부당하게 구속되고 가혹한 노동을 강요당하는 사건이 발생해 반발을 일으키고 있다.[117][120] 일부는 언어·경제적 불리에도 불구, 인권 침해적 대우에 소송을 제기하기도 한다.[120]

중국은 역사·영토 문제로 강한 반일 감정을 가지고 있다. 중일전쟁 당시 중국은 중화민국이었고, 일본과 중화인민공화국은 전쟁 상태였던 적이 없지만, 중국공산당과 중국인민해방군과의 전투는 중국 대륙에서 벌어진 역사적 사실이다. 중일전쟁에서 일본군 잔혹 행위가 교과서에서 중요하게 다뤄지지만, 이는 “반서구를 애국으로”, “야만적 범죄를 혁명으로” 하는 사상이라는 지적도 있다.[124]

댜오위다오 영유권, 동중국해 해저 자원 갈등도 반일 감정을 부추겼다. 2003년9월 주하이 일본인 매춘 사건에서 중국 언론은 행위자 불법 행위를 근거로 일본 전체를 비판했다. 일본인이 역사·정치 문제에 사과하지 않으면 서비스 제공을 거부하는 상점, 병원도 등장했다.[125][126]

중국 내 반일 감정은 주로 일본군 중국 대륙 침략(중일전쟁)에 초점이 맞춰져 있고, 청일전쟁, 신해혁명, 제1차 세계대전 시기 대화 21개조 요구 등은 덜 다뤄진다. 당시 대화 21개조 요구는 큰 문제였고 중화민국 정부는 대규모 반일 캠페인을 벌였지만,[127] 현대 중국에서는 덜 문제시된다.

일본은 소련 위협 때문에 만주 사변 이후 중국 본토 식민지화, 침략 의도는 없었다. 중일전쟁에서 중국을 자극한 것은 육군 현지 부대의 화북 분리 공작이었고, 이는 고다 히로키의 일중 친선 정책을 좌절시키고 항일 의식을 부추겼다.[128] 우메즈-허잉친 협정, 토비하라-친더춘 협정으로 중국, 만주국 사이에 기차정무위원회, 기동방공 자치 정부가 성립, 만주국 방위 완충 지대가 되었다. 1936년 고다 히로키 수상의 “고다 3원칙”, 아리타 하치로, 카와고에 시게루의 방공 협정 체결 제안을 장제스는 거부했다.[129] 장쉐량시안 사건으로 반공에서 반일로 전환, 일중 방공 협정은 결렬되었다. 1937년 린 센타로 내각에서 사토 나오타케외상이 화북 분리 공작 중지를 선언했다.[130][131] 루거우차오 사건 당시 현지 군 휴전 협정에도 불구, 장제스 중앙군 북상 정보에 코노에 후미마로 내각이 북지 파병을 발표, 현지 해결이 어려워졌다. 코노에 후미마로는 8월 후네즈에게 평화 공작을 시도했으나, 중국군상하이 주둔 일본군에 총공격, 제2차 상하이 사변이 발발했다. 11월 초 일본 측 “화북 행정권 난징 정부 위임” 조건 트라우트만 공작 1차 평화안을 12월 초 수락 검토했으나, 난징 함락으로 2차 평화안이 추가되며 실패했다. 이후 여러 평화안이 제시됐지만 중국 측 수락 불가한 가혹한 조건이었고, 1940년 토 공작까지 최악의 일중 관계였다. 중일전쟁은 나치 독일, 소련의 폴란드 침공과 같은 불가침 조약 파기 일방적 침공과는 다르다.

2000년대 중국 정부는 일본과 관계가 원만할 때 일본군 잔혹 행위 영화에 대해 일본에 대한 적의가 노골적이지 않아도 압력을 가하는 경우가 있어, 중국 “반일” 감정은 정권 사정에 따라 이용, 억제된다는 의견이 있다. 2007년 후쿠다 야스오 정권은 “친중”이어서, 중국은 난징 대학살 영화에 압력을 가했다는 보도도 있었다.[132] 2008년 쓰촨 대지진에서 일본 구호대 파견 시 피해자들은 역사와 별개로 감사를 표했다.

2021년 중국 정부는 루거우차오 사건 발생일 신제품 발표를 이유로 소니에 100만위안 벌금을 부과했다.[133] 중국 진출 기업 대부분은 제2차 세계대전, 천안문 사건 등 기념일을 의식한다.[134]

2007년 신화사 조사에서 중국인 약 1만 2천 명 중 ‘싫어하는 이웃 나라’ 1위 한국(40.1%), 2위 일본(30.2%), ‘좋아하는 이웃 나라’ 1위 파키스탄(28.0%), 3위 일본(13.2%)이었다.[135] 2007년 12월 텐야 커뮤니티 조사에서 가장 싫어하는 나라 1위 한국, 2위 일본, 좋아하는 나라 3위 일본이었다.[136] 중국 인터넷 조사에서 가장 좋아하는 나라 1위 미국, 2위 일본이었다.[137] 인민일보 자매지 환구시보 조사에서 중국인 1350명 대상 가장 좋아하는 나라 미국, 프랑스, 호주, 싱가포르, 일본 순이었다.[138] 중국인 가장 싫어하는 나라는 한국, 일본은 “좋아함”, “싫어함” 모두 상위권이었다.

2009년 말 환구시보 조사에서 15~20세 청년층 “가장 좋아하는 나라” 1위 일본, 전체 “가장 좋아하는 나라” 5위, “가장 가고 싶은 나라” 3위였다. 2010년 2월 베이징신문 보도 대형 여행사 조사에서 해외 인기 여행지 일본이 타이완과 함께 3위였다. 1위 홍콩, 2위 마카오는 중국 영토여서, 순수 외국으로는 일본이 1위다.[139]

중국에서 TV 프로그램 내용은 공산당 검열을 받지만, “반일”적 내용은 규제가 느슨해진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중국 대륙 배경 중국인 일본군 격퇴 “'''항일 드라마'''(反日ドラマ)” 장르가 제작되었고, 일부는 인터넷 속어 “신극[140]”에서 유래, “'''항일 신극'''”으로 통칭된다.

2005년 일본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입 가능성에 중국 반발, 인터넷 1천만 명 이상 반대 서명, 4월 9일 베이징 일중 국교 정상화 이후 최대 1만 명 학생 반일 시위, 일본 대사관저 행진, 일부 일본 대사관, 기업 투석 폭력 사태, 4월 10일 광저우 2만 명 시위, 일본인 폭행, 일식당, 일본차 공격 발생했다. 중국 정부는 사과하지 않았고, 상하이 시 당국, 국영 기업 명의 보상이 이뤄졌다. 이는 고이즈미 정권 하 역사 인식 관련 일중 마찰이 배경이라는 지적이 있다. 다른 상임이사국들은 제2차 세계대전 일본 적국이어서 중국 옹호, 일본 과거 전쟁 행위 비판했다.

2010년 센카쿠 제도 중국어선 충돌 사건 관련 중국 각지 반일 시위에 대해, 중국 정부 외교부 대변인은 "일부 대중 일본 측 잘못된 언행 분개 표명"했지만, 홍콩 언론은 실제 각 대학 정부계 학생회 조직 보도했다. 홍콩 신문 취재에서 "각 대학 학생회 1개월 전 준비 시작", "교내 일본 제품 불매 서명 운동" 코멘트, "시위 참가 대학생 인터넷 시위 학생회 조직 폭로" 보도했다. 중국 대학 학생회 자주적 정치 활동 불가, 모든 활동 정부, 공산당 지도하에 이뤄진다.[141]

2012년에도 반일 시위 등이 있었다.

2024년 일본인 중국 내 폭행 사건이 잦았다.

일본 지배 타이완, 일본 교전국 중국 정부 반일적이나 친일파 제재는 최근 없었지만,[142] 최근 장쑤성 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회의 난징 대학살 부정, 난징 시내 국가 추모 시설 옛 일본군 군복 착용 등 “정신일본인(精神日本人)” 행위 처벌 「난징시 국가공제 보장 조례」 만장일치 가결, 한국처럼 전전 일본 언론 통제하게 되었다.

중국 장쑤성 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회의 2018년 11월 23일 난징 대학살 부정, 난징 시내 국가 추모 시설 옛 일본군 군복 착용 “정신일본인(精神日本人)” 행위 처벌 「난징시 국가공제 보장 조례」 만장일치 가결, 12월 13일 시행, 제28조 어떤 조직, 개인 난징 대학살 역사적 사실 왜곡, 부정, 희생자, 생존자 모욕, 비방, 관련 내용 국가, 민족 존엄성 손상, 국민 감정 상하게 하는 언론, 정보 제작, 전파 금지, 제29조 국가공제 시설, 항일전쟁 유적, 기념관 일본 군국주의 상징 군복, 깃발, 그림, 관련 도구 사용 사진, 동영상 촬영, 인터넷 공개 전파 금지.[143]

19세기 서구 열강 조선 진출, 개국 강요 서구 열강 ‘양이(洋夷)’ 규정, 쇄국, 위정척사(衛正斥邪) 사상 팽배, 조선 중화(中華), 청나라 ‘이적(夷狄)’ 간주.[155] 1854년 개국 일본 조선 개국 요구, 위정척사 사상 일본 서구 열강 추종 ‘가양이(假洋夷)’, ‘왜이(倭夷)’ 간주.[144] 강화도조약 일본 포함외교 조선 1876년 개국, 위정척사 사상 조선 근대 민족주의 기반 전개.[144] 개국 후 친일 개화파, 쇄국·양이 척사파 대립, 1882년 임오군란 일본인 군사고문, 공사관원 살해 사건 발생, 1880년대 주조선 미국 공사 조지 클레이튼 포크(George Clayton Foulk) 당시 조선인 대일 감정, (중국인 외모, 행동, 습관 조선인 미움, 잔혹 행위, 사기 원망 X, 일본인 외모, 행동, 습관 불구 미움, 조선인 일본인 피 분출 기회 노림) 보고.[156]

1894년 동학(東學) 농민 운동(갑오농민전쟁) 처리 관련 일본, 청나라 대립, 청일전쟁 발발, 청나라 패배 화이질서(華夷秩序) 붕괴, 조선 청나라 책봉체제 탈피, 독립 선언, 삼국간섭 일본 한반도 철수, 친일 개화파 김홍집(金弘集) 정권 친러파 왕비 명성황후 세력 쿠데타 1895년 7월 6일 붕괴, 세 달 후 10월 8일 명성황후 일본인, 개화파 암살 을미사변 발생, 정권 복귀 김홍집 같은 해 12월 단발령 발표 일본 모방 반발 전 유학자 의병 운동 시작, 조선 친러 정책(아관파천) 1897년 국호 대한제국 변경, 1904년 2월 러일전쟁 발발, 1905년 9월 일본 러시아 승리 대한제국 우월권 획득, 11월 을사늑약 체결 대한제국 일본제국 보호국화, 반발 반일 감정 강한 의병 운동 활발, 일본군 진압, 일본 1907년 정미칠조약 대한제국군 해산, 전직 군인 의병 운동 참여, 1909년 안중근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 암살, 한국 일진회 등 친일파 일제강점론 추진, 이듬해 1910년 경술국치, 반일파 이적(夷狄) 일본 나라 병합, 소중화사상 기반 민족주의 강한 반일 감정 발전.[157] 구타 히로시(古田博司) “근대 ‘야만인’ 일본인 식민 지배, 조선 자존심 회복 시도 반일 사상 결합 중화 사상 강고, 집요 복권 시작, 오늘날까지 지속” 언급,[157] 해방 후 대한민국 안중근 항일 투쟁 영웅.

강상중, 다니 오르바프(Dani Orbach)(히브리 대학교) “같은 일본제국 식민지 대만 친일, 한국 반일적 이유” 대담, 【다니 오르바프】“‘식민지’ 조선반도 천황 직속, 대만 내각 직속.” 【강상중】“일본인 대만 친일, 한국 반일적 생각, 대만 통치, 조선반도 통치 조직 구조 차이 이해 가능.” 【다니 오르바프】“당시 일본제국 헌법 권리 민중 X, 총독 천황 대리인 탄압 조선, 조선 총독 대대 육해군 대장, 대만 1919년~1936년 귀족원 의원 정치가 지속.” 【강상중】“천황 직속 당시 정부 간섭 X, 대만, 조선반도 통치 차이 이상, 천황 통치 통수권 불가침, 최종 동화 정책 때 일본 본토 사람 동일, 천황 애호 모두에게 대단 은혜 생각, 천황 통치 일방적 진행, 조선반도 일본 평가 변화.” 언급.[158][159]

주일본대만경제문화대표처 대표 역임 히라이 토시하루(平井敏晴)(한양여자대학교) 취재, “한국 일본 반발 이유, 왕조 존재, 대만 X.” “ (종전 후 대만 입성 중화민국군) 대륙 대만 사람 모습, 대만 사람 놀람, 차림새 형편, 무기 구식, 일본 비교 하늘, 땅 차이.” “일본 대만 통치 흑자, 조선 통치 적자, 일본 성공 대만 모델 케이스 조선 통치, 실패, 일본인 대만인 방식 조선인 불가.” 언급, 히라이 토시하루 17세기 청나라 명나라 멸망, 나가사키 출신 정성공 청나라 저항 거점 구축 1662년 타이난 진입, 이후 대만 청나라 저항 거점 지속, 대만 일본 할양 청나라 해방, “대만 원래 청나라 저항 의식, 일본 통치 대만 천운, 한국 왕조 단절, 일본 반발, 조선 통치 일본 경제적 실패.” “조선 왕조 붕괴 일본 반발심 한국 사회 뿌리.” “1897년 조선 국왕 황제, 대한제국 성립, 일제강점 1910년까지 존재, 한국 공식 국명 대한민국, 대한제국 무관 X.” “현재 한국 대한제국 중첩, 조선 왕조 500년 역사 회상.” “사고 체계 근대 일본, 조선 왕조 대립 관계, 당시 일본 행위 반대·반발 현재 대한민국 정당 칭찬, 처벌 대상, 일본 냉담 친일파 처우.” “대만 왕조 X, 통치 개척 진행 일본, 조선 경험 왕정복고 이데올로기 마찰 경험 X.” 결론.[160][161][162][163]

;조선독립군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일제강점기 의병 운동 한국 독립 운동 지속, 1919년 3·1 운동, 만주 간도 항일 독립군 성립, 상하이 독립 운동가 망명 정부 대한민국임시정부 성립, 초대 대표 미국 망명 한국 독립 운동 전개 이승만 취임(이승만 내분 미국 복귀), 대한민국임시정부 1933년 장개석 등 중국 국민당 대일 전선 협력 합의, 1940년 9월 17일 중경 “한·중 독립 회복 공동 적·일본 제국주의 타도, 연합국 일원 항전 목적” 선언 한국광복군 창설, 1941년 12월 8일 진주만 공격 미국, 중국 일본 선전포고 임시정부 일본 선전포고, 일본 정부 포고 문서 미통달, 실효성 X, 이후 미국 전략사무국(OSS) 지원 훈련, 실전 전투 X.

조선 독립군 1920년 청산리 전투 궤멸, 만주 중국 공산당 지도 동북항일연군(항일 유격대) 성립, 북한(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건국 김일성 소속.

대만 일본 식민지 지배 역사, 위안부, 센카쿠 열도(尖閣諸島, 댜오위다오) 영토 문제 등 상당 반일 감정, 채익죽(蔡亦竹) 국공내전(國共內戰) 이후 중국 타이완(台灣) 피난 소수파 중국국민당(中國國民黨) 다수파 원 일본 국민 타이완 사람 “우리 대일전쟁 승리 타이완 사람 2등 국민 대우 해방” 주장, 고압적 통치 정당화,[189] 타이완 사람 아이덴티티 환기 우려, 원래 타이완 사람 공유 일본 문학(日本文學), 일본 영화(日本映画), 텔레비전 프로그램(テレビ番組) 등 권장 X.[189] 1972년 일중 국교 정상화, 타이완 즉시 일본 국교 단절 선언, 중국 국교 수립 배신 행위, 이 해 타이완 정부 모든 방송 일본어(日本語) 금지, 일본 영화 수입 금지, 1980년대 말 금지령 완화, 약사마루 히로코(薬師丸ひろ子) 타이완 영화 홍보 일본어 아닌 영어(英語) 사회자 대화, “일본 추방” 전면 해제 1993년, 채익죽(蔡亦竹) “지금 타이완 친일 국가 성격, 이유 우리 40대 중학교까지 일본 악당 교육” 언급.[189]

센카쿠 열도(尖閣諸島, 댜오위다오) 영유권 문제, 중화민국-중국 관계

4. 반일 감정의 표현

반일 감정은 제2차 중일 전쟁과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 제국의 행동에 대한 적대감부터 일본 문화에 대한 경멸, 일본인에 대한 인종차별까지 다양하게 표현된다.[5][6][7][8] [9] 특히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미국의 반일 선전은 연합군 정부의 선전을 통해 일본인에 대한 비인간화를 부추겼으며, 이는 인종차별적 성격을 띠기도 했다.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은 서구화를 통해 근대화를 추구했지만, 서구 사회는 일본과 일본 문화를 의심하고 경멸했다. 태평양 전쟁 이후 일본의 항복으로 반일 감정이 다소 누그러졌지만, 일본 정부가 과거 만행에 대해 충분히 사죄하지 않고 역사를 축소하려 한다는 인식 때문에 반일 감정은 여전히 존재한다.[10]

오늘날 일본 정부는 일부 배상 조치를 취했지만, 일본 제국의 군사적 공격과 만행으로 인한 역사적, 민족적 적대감은 여전하다. 특히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중국에 매장된 70만 개 이상의 화학 무기를 일본이 제거하는 데 지연된 것도 반일 감정의 원인 중 하나이다.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가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한 것이나,[12] 극우 민족주의 단체들이 일본의 만행을 축소하는 역사 교과서를 제작한 것[12] 등은 한국과 중국 등 주변국의 반발을 샀다. 일부 반일 감정은 덤핑과 같은 일본 기업의 사업 관행에서 비롯되기도 한다.

4. 1. 시위 및 폭력 행위



1942년 바탄 사망 행진을 언급하는 선전 신문 기사가 배포되어 전 세계적으로 분노를 일으켰다.


한국에서는 1991년 위안부 문제가 언론에 크게 보도되고, 전 위안부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나타나면서 반일 감정이 고조되었다. 이로 인해 서울의 일본 대사관 침입, 시위, 태극기 방화 등의 폭동이 발생했다.[13]

2006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과 2009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서 대한민국 야구 대표팀이 일본에 승리했을 때 마운드대한민국의 국기를 꽂는 사건이 발생했다.

2023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한국 대표팀 합숙 중 인터뷰에서 고우석은 1차 라운드 풀 B의 일본전에서 오타니 쇼헤이에게 고의사구를 던질 암시하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중국에서는 반일 감정이 매우 강하며, 일본과 일본 국민 및 문화에 대한 불신, 적대감, 부정적인 감정이 널리 퍼져 있다.[26] 이는 주로 중일전쟁의 잔혹 행위와 일본의 전후 행동, 특히 일본 정부의 전범 고용, 역사 수정주의에 대한 반감 때문이다.[26] 중국 초등학교에서는 어린이들에게 일본의 전쟁 범죄에 대해 자세히 가르치며, 난징 대학살,[28] 위안부 문제[28] 등 전쟁 잔혹 행위 사진을 보여준다.[27] 2001년 중국 팝 가수 자오웨이(趙薇)가 욱일기를 착용한 사건은 중국 내에서 큰 논란을 일으켰다.[30]

필리핀의 반일 감정은 제2차 세계 대전 중 일본의 필리핀 점령과 그 여파로 거슬러 올라간다.[63] 전쟁 당시 약 100만 명의 필리핀인이 사망했고, 마파니케 시에서는 일본군이 필리핀 남성들을 학살하고 수십 명의 여성들을 위안부로 끌고 간 사건이 있었다.[63]

미국에서는 제2차 세계 대전 이전부터 반일 감정이 존재했다.[78] 19세기 후반부터 아시아계 이민자들은 인종적 편견에 시달렸고, 일본인들을 차별하는 법률들이 제정되었다.[78] 진주만 공격은 미국 내 반일 감정을 더욱 증폭시켰으며,[79] 전쟁 중 일본군의 만행은 이러한 감정을 더욱 악화시켰다.[80]

브라질에서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일본과의 교류가 단절되고 일본계 브라질인들에 대한 제약이 강화되었다.[17] 일본 신문과 학교에서 일본어 교육이 금지되었고,[17] 일본계 브라질인들은 통행증 없이는 여행할 수 없었으며, 일본 학교는 폐쇄되었다.[13] 일본 회사의 재산이 압수되고, 일본계 회사 여러 곳이 정부의 개입을 받았다.[13] 전쟁 후, 일본 이민자들이 결성한 테러 단체인 신도 연맹(Shindo Renmei)은 일본 항복을 믿는 일본계 브라질인들을 살해하여 브라질 내 반일 감정을 증폭시켰다.[13]

4. 2. 문화적 표현

중국에서는 반일 감정이 매우 강하며, 일본과 일본 국민 및 문화에 대한 불신, 적대감, 부정적인 감정이 널리 퍼져 있다. 반일 감정은 주로 근대 이후(1868년 이후)의 현상이다. 대일본제국은 청나라 말기에 중국으로부터 영토를 병합하는 조약들을 협상했고, 일본의 영토 확장과 21개조 요구에 대한 불만은 중국에서 심각한 일본 제품 불매 운동으로 이어졌다.[26]

오늘날 중국에는 중일전쟁의 잔혹 행위와 일본의 전후 행동, 특히 잔혹 행위에 대한 명확한 인정 부족, 일본 정부의 전범 고용, 일본 교과서의 역사 수정주의에 대한 쓴맛이 남아있다.[26] 초등학교에서는 어린이들에게 일본의 전쟁 범죄에 대해 자세히 가르친다. 예를 들어, 수천 명의 어린이들이 베이징의 중국인민항일전쟁기념관으로 인솔되어 일본군이 중국 노동자들을 전시 노동에 강제로 동원한 기록[27], 난징 대학살[28], 위안부 문제 등 전쟁 잔혹 행위 사진을 보도록 한다. 박물관 관람 후 어린이들의 일본에 대한 증오심이 상당히 증가한 것으로 보고되었다. 대부분의 일본인들이 당시 일어난 일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사회가 홀로코스트 이후 독일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유형의 자기 반성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본 군사 상징물의 사용은 여전히 중국에서 논란이 되고 있다.[29] 2001년 중국 팝 가수 자오웨이(趙薇)가 패션 잡지 화보 촬영 중 욱일기를 착용한 사건이 대표적인 예이다.[30] 2017년 BBC 월드 서비스 여론 조사에 따르면, 중국인 중 일본의 영향력을 긍정적으로 보는 사람은 22%에 불과하고,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은 75%에 달해, 중국이 세계에서 가장 반일적인 국가가 되었다.[1]

최근 중국 친일파들은 민족주의자들에 의해 한간(漢奸)이나 정리(精日)로 비난받는 경우가 많다.

4. 3. 멸칭


  • 쪽발이 또는 쪽바리 - 일본 고유의 버선 모양이 갈라진 것을 '쪽발'(두 쪽으로 나누어진 짐승의 발)에 빗댄 속어이다. 일본인을 돼지에 비유하기도 한다.[94] 재일 한국인들도 이 단어를 사용한다.[95]
  • 왜구 - 13~16세기의 일본 해적 집단을 지칭하며, 한반도를 여러 차례 침략한 일본을 해적떼와 같다는 의미로 비꼬는 표현이다. 현대에는 매우 부정적인 맥락에서 모든 일본인을 가리키는 데 사용된다.
  • 왜놈 - 왜국의 남자라는 의미로, 일본이 7세기 중반 국호를 일본으로 칭하기 전까지 쓰였던 왜라는 호칭에서 유래했다. 주로 고령층에서 사용하며, 임진왜란에서 기원했다.
  • 섬나라 원숭이 - 일본원숭이가 일본에 서식하는 것에 착안하여 일본인을 비하하는 표현이다. 간단히 "섬 원숭이"라고도 한다.
  • 왜인(倭人) - "작은 일본 사람"으로 번역되지만, 강한 경멸적 의미를 담고 있다. 일본 야마토(大和)의 옛 이름인 "왜(倭)"에서 유래했으며, 일본인이 작다는 고정관념에 기반한다.(왜 참조)
  • (Jap) - "일본의"라는 뜻의 영어 단어 '재퍼니즈'(Japanese)의 약어이지만, 2차 대전 이후에는 일본인에 대한 경멸적 용어로도 자주 쓰인다.
  • 일본귀자(日本鬼子) - 일본마귀란 의미로 일본인을 비하하는 말이다.
  • 샤오르번(小日本) - 작고 하찮은 일본이란 의미로 쓰인다.

5. 특정 아시아

중국, 대만, 그리고 한반도에서는 조직적이거나 갑작스럽게 반일 감정이 폭발하는 모습이 보인다. 이러한 움직임을 제2차 세계 대전의 ‘피해’를 재료로 한 일본인에 대한 인종차별로 규탄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일본의 우익·보수파는 중국·한반도의 반일 감정은 자연 발생적인 것이 아니라 다양한 교육을 통해 인위적으로 형성·증폭된 특수한 감정이라고 주장한다.[110] 이 때문에 교육적인 반일 감정이 노골적인 한반도와 중국을 ‘특정 아시아’(特定アジア)라 구분하여 다른 지역과 구별하여 다루는 경우가 있다. 세계 각국을 대상으로 한 여러 조사에서 ‘특정 아시아’가 일본을 부정적으로 보는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다.[110]

한국에서는 ‘백제’라는 인디밴드가 일본인을 ‘장애인’이라고 욕하는 노래를 부르는 등[112] 일본 침몰이 히트하는 등의 현상이 있었고, 중국에서는 일본인 유학생이 폭행당하거나 일본인 관광객에게 서비스 제공을 거부하는 식당이나 병원 등이 화제가 되었다. 한국에서는 교육을 통해 대중에게 심어진 증오 감정이 존재한다. 비판의 대상이 일본이라면 무조건 지지하는 경향이 있다. 국제 절도단이 일본으로부터 훔친 물건을 돌려줄 필요가 없다는 판결이 나오는 등, ‘일본이 상대라면 일사부재리, 시효, 협정, 증거, 판례, 국제관습법의 벽까지 쉽게 넘어간다’는 국제법 무시로 중립적인 판결을 내릴 수 없는 사법 체계라는 지적이 있다. 14~16세기에 약탈당했을지도 모른다는 증거도 없는 추정을 법정에서 증거로 삼는 것이 21세기 한국 법원의 판결이라고 개탄하는 목소리도 있다.[113]

대만은 일본의 식민지 지배 역사 문제, 위안부 문제, 센카쿠 열도(댜오위다오) 영토 문제 등으로 인해 상당한 반일 감정을 가지고 있다. 채익죽(蔡亦竹)에 따르면, 국공내전(國共內戰) 이후 중국에서 타이완(台灣)으로 피난 온 소수파 중국국민당(中國國民黨)은 다수파였던 원 일본 국민이었던 타이완 사람들에게 “우리는 대일전쟁에서 승리하여 타이완 사람들을 2등 국민 대우에서 해방시켰다”라고 주장함으로써 자신의 고압적인 통치를 정당화했다.[189] 또한, 타이완 사람 아이덴티티를 환기시킬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원래 타이완 사람들만 공유했던 일본 문학(日本文學), 일본 영화(日本映画), 텔레비전 프로그램(テレビ番組) 등은 권장하지 않았다.[189] 1972년의 일중 국교 정상화에 따라 타이완은 즉시 일본과 국교 단절을 선언했지만, 중국과의 국교 수립은 배신 행위로 여겨졌고, 이 해에 타이완 정부는 모든 방송에서 일본어(日本語)를 금지했으며 일본 영화 수입도 금지되었다. 1980년대 말에 이르러서야 금지령이 완화되었지만, 약사마루 히로코(薬師丸ひろ子)가 타이완에서 영화 홍보를 할 때도 일본어가 아닌 영어(英語)로 사회자와 대화를 나눌 정도였다. “일본 추방”의 전면 해제는 1993년까지 기다려야 했으며, 채익죽(蔡亦竹)은 “지금 타이완은 친일적인 국가 성격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러한 이유로 우리 40대는 중학교까지 일본을 악당으로 가르쳤다”라고 말하고 있다.[189]

센카쿠 열도(댜오위다오) 영유권을 둘러싼 문제와 중화민국-중국 관계에서 일본의 외교 자세 등이 논의되는 경우가 있다. 센카쿠 열도(댜오위다오)를 타이완의 영토라고 주장하는 운동인 보도운동(保釣運動) 등 일본 정부에 항의하는 움직임도 존재한다. 2008년 6월 13일, 류자오시엔(劉兆玄) 행정원장(行政院長)은 입법원 답변에서 “문제 해결의 최후 수단으로 개전도 마다하지 않겠다”라며 전쟁(戰爭) 가능성을 시사했지만, 같은 날 저녁 행정원(行政院)은 행정원장의 발언 취지에 대해 외교 처리를 우선하고 일본과 개전한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는 견해를 밝혔다.[190]

또한 일본 통치 시대의 차별과 압박을 강하게 기억하고 있는 본성인(本省人), 원주민과 일본군 위안부(慰安婦)로 성적 착취를 당했다고 주장하는 여성들을 중심으로 일본의 식민지 통치에 대한 반감도 존재하며, 일본 정부에 대한 소송과 항의 등도 이루어지고 있다. 2007년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의 위안부 관련 발언에 대해서도 타이완 정부는 원 위안부들의 압력에 밀려 항의 성명을 발표했다.[191]

아소 다로(麻生太郎) 외상(당시)이 2006년 강연에서 식민지 지배 하에 타이완의 교육 수준이 향상되었다고 말한 것에 대해, 타이완 영자 신문 『타이베이 타임스(タイペイ・タイムズ)』는 “아소 외상의 발언(그 자체)은 옳으며 항의할 필요는 없다. 일본의 정치인들로부터 나오는 냉담하고 경솔한 논평은 일본의 친구들의 호의를 잃을 수 있다는 점을 도쿄는 고려해야 할 것이다. 일본의 식민지 시대를 보낸 타이완 사람들에게는 향수와 쓰라림이 뒤섞인 복잡한 감정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있다. 이것은 당연한 일이다. 일본인들이 국가로서 타이완의 발전에 기여한 많은 좋은 측면이 있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라는 사설을 게재했다.[192]

2009년 4월, 재단법인 일본대만교류협회(日本台湾交流協会)가 실시한 최초의 대만인 대상 일본 인식 여론조사에서 "일본에 친근감을 느낀다"는 응답이 69%로 "친근감을 느끼지 않는다"는 응답 12%를 크게 상회했다. "가장 좋아하는 나라"로서도 38%가 일본을 꼽아 2위인 미국(5%), 중국(2%)을 크게 앞섰다.[193] 2010년도 "대만의 대일 여론조사"에서는 "일본에 친근감을 느낀다"는 응답이 62%로 "친근감을 느끼지 않는다"는 응답 13%를 크게 상회했고, "가장 좋아하는 나라"로서도 52%가 일본을 꼽아 2위인 미국(8%), 중국(5%)을 크게 앞섰다.[194][195][196][197]

2021년 8월 10일, 대만의 싱크탱크인 台湾制憲基金會(Taiwan Constitution Foundation)가 대만 여론조사 결과를 발표했는데,[198] 미국에 호감을 가진 사람이 75.6%, 일본에 호감을 가진 사람이 83.9%, 중국에 호감을 가진 사람은 16.4%에 그쳤으며, 90%에 가까운 사람들이 미국과 일본과의 정식 외교 관계 수립을 지지했다.[198]

『워싱턴 포스트(Washington Post)』는 "대만은 1895년부터 1945년까지 일본의 지배하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시아에서 보기 드물게 친일 감정을 유지하고 있다. 대만의 고령자들은 아직도 일본어와 일본 문화에 큰 공감을 표한다. 대만은 시속 200마일로 주행 가능한 일본의 신칸센을 30억달러에 도입하여 지난달(시험 주행을) 시작했다. 또한 일본 정부는 12월 대만의 이등휘 전 총통(그는 일본에서 교육을 받았고, 친애하는 대학 시절 은사와 재회했다)에게 관광 비자를 발급했지만, 중국은 이에 강하게 반발했다"라고 보도했다.[199]

과거 중화민국(대만)의 국민당 독재 정권 시절에는 일본의 중국 침략으로 인한 대륙의 피해를 강조하는 교육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등휘 총통 이후 대만 민주화의 반작용과 이등휘 자신이 일본의 대만 통치를 긍정적으로 평가한 것을 배경으로 친일 성향의 학자들의 세력이 증대하여, 그들에 의한 일본 통치 시대에 대한 긍정적 발언들이 공공연히 제기되기 시작했다. 이등휘 정권 시대에 채택된 대만의 역사 교과서에는 일본 통치 시대에 대만의 경제 기반 정비, 교육 보급, 위생 환경 개선 등의 근대화가 이루어졌다고 기술되어 있다(認識台湾). 이등휘는 2009년 강연에서 “여러분의 위대한 조상들의 공적을 알고 자랑스러워해 주십시오”라고 호소하며, 대만이 일본 통치하에 있던 시대에 일본 기술자들의 기여로 인프라 정비 등이 진행되었던 점을 설명하고, “공에 헌신하고 충성을 다한 위대한 조상들이 만들어 온 일본 정신을 배우고 여러분들도 소중히 여겨 주십시오”라고 말했다.[200] 또한 이등휘는 일본 통치 시대에 대만인들이 배우고 순수하게 계승한 것은 “용기”, “성실”, “근면”, “봉사”, “희생”, “책임감”, “법 준수”, “청결” 등의 “일본 정신”이었으며, 국공 내전 이후 중국 대륙에서 온 국민당은 자신들이 갖추지 못한 가치관이었기에 “일본 정신”을 대만인들이 지닌 기질로 정의하고, 이러한 단어들이 널리 퍼져 대만에 침투한 “일본 정신”이 있었기에 대만은 중국 문화에 흡수되지 않고 근대 사회를 수립할 수 있었으며, 대만인의 친일 배경에는 이러한 역사적 경위가 있다고 언급했다.[201] 또한 이등휘는 현재 일·대 양국은 공식적인 외교 관계가 없기 때문에 경제·문화 교류를 강화하는 것이 좋다는 의견이 많으며, 경제·문화 교류를 촉진하여 일본인대만인의 마음의 유대를 깊게 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일본인이 중화 의식에 사로잡혀 대만을 경시할 경우 일본은 지정학적 위기에 빠지게 되고, 마치 일·대 양국은 생명(운명) 공동체이므로, 일본은 이 점을 항상 의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202]

과거 마잉주(馬英九) 총통의 외교 정책·대일 전략 브레인으로 중화민국 총통부국가 안전 회의 자문위원을 역임한 양영명(楊永明)은 “일반적으로 말해서, 일·대 간에는 상호 우호적인 감정이 존재한다는 기본적인 인식이 있다. 대만은 아마도 세계에서 가장 친일적인 사회이며, 일본에서도 대만에 대한 호감이 널리 존재한다”라고 지적했다.[203] 마찬가지로 중화민국 총통부 국가 안전 회의 자문위원(각료급, 일·대 관계 담당)을 역임한 리쟈진(李嘉進)은 “일·대는 ‘감정의 관계’이다. 보통의 외교 관계는 국가 이익이 기본이지만, 일·대는 특별하다. 서로에 대한 호감도가 매우 높다. 전전부터 이어진 역사가 키운 깊은 감정이 출발점이 되고 있다”라고 말했다.[204]

2006년 10월 9일, 천수이볜은 중화민국 국경절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대만을 방문한 일화 의원 간담회 회원들과 회견하여, 그 자리에서 북한이 같은 날 지하 핵실험을 실시한 것을 강력히 비난하는 동시에, 일본과 미국과의 군사 교류를 강화하고 양국과 준 군사 동맹을 구축할 필요성을 강조했다.[205]

6. 반일 감정과 관련된 시설

야스쿠니 신사일본 도쿄에 있는 신토 신사이다. 주로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사망한 수천 명의 일본군뿐만 아니라 한국과 대만 군인들의 위령이 모셔져 있다. 이 신사에는 A급 전범 13명(예: 도조 히데키, 히로타 고키)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들은 중국, 한국 및 동아시아 다른 지역에 대한 일본의 침략 행위로 유죄 판결을 받고 사형을 당했다. 이들은 샌프란시스코 조약에 따라 사면되었다. 총 1,068명의 유죄 판결을 받은 전범들이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되어 있다.[93]

최근 야스쿠니 신사는 일본과 주변국 관계에서 쟁점이 되고 있다. 전범 합사는 일본 제국에 침략당한 여러 국가의 국민들을 크게 분노케 했다. 또한, 신사는 "일본의 독립을 보호하고 아시아 이웃과 함께 번영하기 위해서는 [전쟁]이 필요했다"는 소책자를 발행했고, 전범들은 "연합군의 허울뿐인 법정에 의해 전범으로 가혹하고 부당하게 재판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이 재판의 공정성은 서구뿐 아니라 일본의 법률가와 역사가들 사이에서도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는 5번이나 신사를 참배했고, 매번 중국과 한국에서 엄청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아베 신조도 야스쿠니 신사를 정기적으로 참배했다. 일부 일본 정치인들은 신사 참배는 종교의 자유라는 헌법적 권리에 의해 보호된다고 주장했다. 2007년 9월에 총리로 취임한 후쿠다 야스오는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93]

참조

[1] 웹사이트 2017 BBC World Service poll https://www.globesca[...] BBC World Service
[2] 웹사이트 Japanese Public's Mood Rebounding, Abe Highly Popular http://www.pewglobal[...] Pew Research Center 2013-07-11
[3] 웹사이트 Positive Views of Brazil on the Rise in 2011 BBC Country Rating Poll https://globescan.co[...] BBC World Service 2011-03-07
[4] harvnb Emmott 1993
[5] 웹사이트 World Publics Think China Will Catch Up With the US—and That's Okay https://web.archive.[...] 2010-03-07
[6] 웹사이트 Global Poll Finds Iran Viewed Negatively – Europe and Japan Viewed Most Positively https://web.archive.[...] World Public Opinion.org 2010-03-07
[7] 저널 Poll: Israel and Iran Share Most Negative Ratings in Global Poll https://web.archive.[...] 2008-04-13
[8] 웹사이트 24-Nation Pew Global Attitudes Survey https://web.archive.[...] The Pew Global Attitudes Project 2008-06-12
[9] 웹사이트 China's Bloody Century http://www.hawaii.ed[...] Hawaii.edu 2013-07-21
[10] 뉴스 Scarred by history: The Rape of Nanjing http://news.bbc.co.u[...] 2005-04-11
[11] 웹사이트 Budget for the Destruction of Abandoned Chemical Weapons in China http://www.mofa.go.j[...] Ministry of Foreign Affairs of Japan 1999-12-24
[12] 웹사이트 China Says Japanese Textbooks Distort History https://www.pbs.org/[...] pbs.org Newshour 2005-04-13
[13] 뉴스 História da discriminação brasileira contra os japoneses sai do limbo http://www1.folha.uo[...] Folha de S.Paulo 2008-04-20
[14] 간행물 Text excerpted from a judicial sentence concerning crime of racism. http://www.movimento[...] Federal Justice of 10ª Vara da Circunscrição Judiciária de Porto Alegre 2001-11-16
[15] 웹사이트 Memória da Imigração Japonesa https://www.scribd.c[...]
[16] 웹사이트 Uma análise da imigração (in) desejável a partir da legislação brasileira: promoção, restrição e seleção na política imigratória. http://www.publicadi[...]
[17] 웹사이트 A Imigração Japonesa em Itu – Itu.com.br http://www.itu.com.b[...] Itu.com.br
[18] 뉴스 Ofensa a japoneses amplia rol de declarações preconceituosas de Bolsonaro https://www1.folha.u[...] Folha de S.Paulo 2020-01-26
[19] 뉴스 Em programa de TV, Bolsonaro faz piada homofóbica e sobre asiáticos https://www.poder360[...] Poder360 2021-04-23
[20] 웹사이트 The Japan Times http://www.japantime[...]
[21] 웹사이트 Coronavirus outbreak stokes anti-Asian bigotry worldwide https://www.japantim[...] 2020-02-18
[22] 웹사이트 Coronavírus no Brasil acende alerta para preconceito contra asiáticos | ND https://ndmais.com.b[...] 2020-03-18
[23] 웹사이트 Leonardo Sakamoto - Surto de coronavírus lembra racismo e xenofobia contra orientais no Brasil https://noticias.uol[...]
[24] 뉴스 Mulher borrifa álcool em jovem: "Você é o coronavírus" https://revistamarie[...] 2021-03-29
[25] 서적 CBC archives. the internment of the Japanese Canadians http://worldcat.org/[...] Canadian Broadcasting Corp 2006
[26] 뉴스 China and Japan: Seven decades of bitterness https://www.bbc.com/[...] BBC News 2014-02-13
[27] 웹사이트 https://web.archive.[...] 2014-04-16
[28] 웹사이트 People visit Museum of War of Chinese People's Resistance Against Japanese Aggression in Beijing https://web.archive.[...] Xinhuanet 2014-02-27
[29] 잡지 Why China Loves to Hate Japan https://web.archive.[...] Time 2005-12-10
[30] 웹사이트 Chinese Pop Singer Under Fire for Japan War Flag Dress http://www.china.org[...] China.org 2001-12-13
[31] 서적 Chinese Media https://books.google[...] 2014-04-14
[32] 뉴스 Special Report: Why China's film makers love to hate Japan https://www.reuters.[...] 2013-05-25
[33] 잡지 Why China Bashes Japan http://www.time.com/[...] 2005-12-10
[34] 웹사이트 海外安全情報 – ラジオ日本 https://www3.nhk.or.[...]
[35] 웹사이트 日本人女性に「ウイルス!」と暴言 志らくが不快感「どこの国でもこういうのが出てくる」(ENCOUNT) https://headlines.ya[...]
[36] 웹사이트 「マスクをしたアジア人は恐怖」新型ウィルスに対するフランス人の対応は差別か自己防衛か https://www.fnn.jp/p[...] 2020-02-02
[37] 뉴스 'Coronavirus' sprayed on Japanese restaurant in Paris https://www.straitst[...] 2020-02-22
[38] 뉴스 Coronavirus outbreak stokes anti-Asian bigotry worldwide https://www.japantim[...] 2020-02-18
[39] 웹사이트 Japanese Man Attacked With Acid in Paris, Sparks Warning to Japanese Community https://news.yahoo.c[...] 2021-02-18
[40] 웹사이트 Japanese citizen injured in Paris acid attack https://japantoday.c[...] 2021-02-22
[41] 웹사이트 パリ在住の中村江里子、長女も電話で「日本語で話さないで」コロナ禍アジア人差別実感(デイリースポーツ) https://news.yahoo.c[...] 2021-03-27
[42] 웹사이트 新型コロナウイルス 世界に広がる東洋人嫌悪 https://www.newsweek[...] 2020-03-11
[43] 웹사이트 'This is racism': Japanese fans kicked out of football match over coronavirus fears https://au.sports.ya[...] 2020-03-11
[44] 웹사이트 いよいよドイツもパニックか 買い占めにアジア人差別 日本人も被害に https://www.newsweek[...] 2020-03-11
[45] 웹사이트 ぜんじろう「日本人が全部買い占めてる」欧州でデマ https://www.msn.com/[...] 2020-03-11
[46] 웹사이트 新型肺炎に関するセミナーの実施 https://www.id.emb-j[...] 2020-03-10
[47] 웹사이트 「感染源」日本人に冷視線 入店や乗車拒否 インドネシア(時事通信) https://headlines.ya[...] 2020-03-10
[48] 웹사이트 「日本人が感染源」 インドネシアで邦人にハラスメント:朝日新聞デジタル https://www.asahi.co[...] 2020-03-10
[49] 웹사이트 「複数国で日本人差別」 外務省、新型コロナ巡り https://www.nikkei.c[...] 2020-04-11
[50] 뉴스 Munhwa Newspaper (in Korean) http://www.munhwa.co[...] 2008-05-08
[51] 뉴스 60th Anniversary of Independence. Half of 20s view Japan as a distant neighbor. [오늘 광복60년 20대 절반 日 여전히 먼나라] http://news.naver.co[...] 2008-05-08
[52] 웹사이트 Israel and Iran Share Most Negative Ratings in Global Poll https://web.archive.[...] 2007-03-01
[53] 웹사이트 BBC World Service Poll: Global Views of Countries, Questionnaire and Methodology https://web.archive.[...] 2006-02-01
[54] 웹사이트 Jiritsu じりつ: La Liga Anti-Asiática (Lima, 1917) http://jiritsujp.blo[...] 2019-05-07
[55] 웹사이트 Adios to Justice: Japanese Peruvians, National Formations, and the Politics of Legal Redress http://yris.yira.org[...] 2021-06-06
[56] 논문 Between Menace and Model Citizen: Lima's Japanese Peruvians, 1936–1963 https://repository.a[...]
[57] 논문 Between Menace and Model Citizen: Lima's Japanese Peruvians, 1936–1963 https://repository.a[...]
[58] 웹사이트 The Lesser Known Japanese Internment · Narratives of World War II in the Pacific · Bell Library Exhibits https://library.tamu[...]
[59] 간행물 Japanese Internees from Peru 1962-05-01
[60] 서적 Years of Infamy: The Untold Story of America's Concentration Camps William Morrow & Company
[61] 논문 Peru and Japan: an uneasy relationship https://go.gale.com/[...] 2005-01-01
[62] 웹사이트 Japan Concerned about Anti-Japan Sentiment in Peru Over Fujimori https://www.albawaba[...] 2023-05-10
[63] 뉴스 Letter from the Philippines: Long afterward, war still wears onFilipinos https://www.nytimes.[...] 2005-08-13
[64] 뉴스 Japanese Infiltration Into Mindanao https://news.google.[...] 2014-05-16
[65] 서적 Filipino Heritage: The Spanish colonial period (late 19th century) https://books.google[...] Lahing Pilipino Pub.
[66] 서적 Filipinas https://books.google[...] Filipinas Pub.
[67] 서적 Understanding Islam and Muslims in the Philippines https://books.google[...] New Day Publishers
[68] 서적 Bijdragen tot de taal-, land- en volkenkunde van Nederlandsch-Indië https://books.google[...] M. Nijhoff
[69] 웹사이트 Constructions of Japan and the Japanese : War, memory and foreign policy in Singapore https://dr.ntu.edu.s[...]
[70] 웹사이트 Taiwan in Time: The rehabilitation of Eastern gouache https://www.taipeiti[...] 2021-02-06
[71] 서적 Political Economy of Japanese and Asian Development Springer Japan 2013-06-29
[72] 웹사이트 台湾が「親日」で、韓国が「反日」な理由 https://www.huffingt[...] 2013-11-11
[73] 웹사이트 Why Taiwanese are pro-Japan but anti-China https://www.thinkchi[...] 2020-10-19
[74] 뉴스 Various, Editorials http://www.yomiuri.c[...] The Yomiuri Shimbun 2008-06-18
[75] 웹사이트 Pro-democracy protests lead to anti-Japan movement: Saha Group chairman's story (17) https://asia.nikkei.[...] 2022-07-25
[76] 뉴스 Russia Acknowledges Sending Japanese Prisoners of War to North Korea http://www.mosnews.c[...] Mosnews.com 2005-04-01
[77] 웹사이트 The National Archives - Depicting Japan in British propaganda of the Second World War https://blog.nationa[...] 2020-08-10
[78] 서적 Japanese American History: An A-to-Z Reference from 1868 to the Present https://books.google[...] Verlag für die Deutsche Wirtschaft AG
[79] 간행물 How to tell Japs from the Chinese https://books.google[...] Time Inc. 1941-12-22
[80] 논문 # 추정, harvnb는 일반적으로 학술자료를 나타냅니다. 더 자세한 정보가 필요합니다.
[81] 논문 Prisoner Taking and Prisoner Killing in the Age of Total War: Towards a Political Economy of Military Defeat https://www.jstor.or[...]
[82] 서적 The Anguish Of Surrender: Japanese POWs of World War II (excerpts) https://books.google[...] University of Washington Press
[83] 서적 https://books.google[...]
[84] 논문 Public Opinion Polls on Japan Institute of Pacific Relations 1950-05-17
[85] 서적 Worse Than War: Genocide, Eliminationism, and the Ongoing Assault on Humanity https://archive.org/[...] PublicAffairs
[86] 서적
[87] 서적
[88] 서적
[89] 서적 (제목 없음)
[90] 논문 Anatomy of a Scare: Yellow Peril Politics in America, 1980–1993 https://www.cambridg[...] 2009
[91] 논문 Anatomy of a Scare: Yellow Peril Politics in America, 1980–1993. http://www.jstor.org[...] 2009
[92] Harvnb 2012
[93] 뉴스 Party Elder To Be Japan's New Premier https://www.washingt[...] Washington Post 2007-09-24
[94] 웹사이트 Definition of Jjokbari http://krdic.naver.c[...] Naver Korean Dictionary
[95] Harvnb 1992
[96] 웹사이트 Meu nome não é japa: o preconceito amarelo https://revistatrip.[...] 2021-03-23
[97] 뉴스 Coronavirus outbreak stokes anti-Asian bigotry worldwide https://www.japantim[...] 2020-03-09
[98] 웹사이트 As coronavirus spreads, fear of discrimination rises https://www3.nhk.or.[...] 2020-03-09
[99] 웹사이트 海外安全情報 – ラジオ日本 – NHKワールド – 日本語 https://www3.nhk.or.[...] 2020-03-11
[100] 뉴스 'Coronavirus' sprayed on Japanese restaurant in Paris https://www.straitst[...] 2020-03-09
[101] 웹사이트 Anti-Asian hate, the new outbreak threatening the world https://asia.nikkei.[...] 2020-03-09
[102] 논문 Shanghai's Dog and Chinese Not Admitted Sign: Legend, History and Contemporary Symbol 1995-06
[103] 서적 Changing Meanings of Citizenship in Modern China - Harvard Contemporary China Series 13 Harvard University Press 2009-06-01
[104] 서적 Global Shanghai, 1850–2010: A History in Fragments - Asia's Transformations /Asia's Great Cities Routledge 2008-11-15
[105] 서적 China's Rise in Historical Perspective Rowman & Littlefield Publishers 2010-07-16
[106] 웹사이트 2017 BBC World Service poll https://www.globesca[...] 2017-07-04
[107] 뉴스 Japanese Public's Mood Rebounding, Abe Highly Popular http://www.pewglobal[...] ピュー・リサーチ・センター 2013-07-11
[108] 웹사이트 Positive Views of Brazil on the Rise in 2011 BBC Country Rating Poll https://globescan.co[...] 2011-03-07
[109] 웹사이트 Views of US Continue to Improve in 2011 BBC Country Rating Poll https://web.archive.[...] BBC 2011-03-07
[110] 뉴스 読売新聞 1995-05-29
[111] Youtube 無断で転載された動画の可能性が高いため。 http://www.youtube.c[...] 2021-09
[112] text
[113] 뉴스 【コラム】韓国裁判所の反日冒険、その次に来るもの http://www.chosunonl[...] 2021-01-23
[114] 웹사이트 Japanese are Simply the Best (Press Release British tourists amongst worst in the world by Expedia.co.uk) http://www.expedia.c[...]
[115] 뉴스 "最も好ましい観光客"は日本人、では最下位は? - エクスペディア調査 https://news.mynavi.[...] 2007-05-29
[116] 웹사이트 "Japan" from "Country Reports on Human Rights Practices - 2005" http://www.state.gov[...]
[117] 웹사이트 Efforts mount in Japan to counter human trafficking http://www.ilo.org/g[...]
[118] 뉴스 外国人女性被害者を犯罪者扱い…人身売買実態で報告書 http://www.yomiuri.c[...] 2004-11-19
[119] 웹사이트 Trafficking Alert International Edition, May 2005 (Vital Voice) http://www.vitalvoic[...]
[120] 뉴스 「強制労働」と未払い賃金求め提訴 中国人実習生 熊本 http://www.asahi.com[...] 2007-12-06
[121] 웹사이트 Human Rights, Japan Anti-Trafficking Programs (Vital Voices) http://www.vitalvoic[...]
[122] 웹사이트 外国人労働者数の推移 (社会実情データ図録) http://www2.ttcn.ne.[...]
[123] 웹사이트 世界各国の外国人労働者 (社会実情データ図録) http://www2.ttcn.ne.[...]
[124] 서적 中国の歴史教科諸問題 日本僑社 2006
[125] 뉴스 海南一医院挂牌称“日本人拒不认罪禁止入内” http://news.tom.com/[...] 南方都市报 2005-07-15
[126] 뉴스 深圳のバーで 「日本人の入店お断り」 http://j.peopledaily[...] 人民網 2002-05-23
[127] 서적 満蒙認識 https://dl.ndl.go.jp[...] 公民研究会 1931
[128] 텍스트
[129] 텍스트
[130] 텍스트
[131] 서적 再考・日中戦争前夜
[132] 뉴스 朝日新聞 2007-12-13
[133] 웹사이트 「盧溝橋事件の日」に新製品発表と広告…中国当局、ソニーに罰金1778万円 https://www.yomiuri.[...] 読売新聞 2021-10-18
[134] 웹사이트 「前後1週間は絶対に宣伝しない」。中国にある「日本の話題を避ける日」対策どうする? https://www.huffingt[...] huffingtonpost 2021-09-17
[135] 뉴스 2007년 12월 10일 중앙일보 https://japanese.joi[...] 중앙일보 2007-12-10
[136] 웹사이트 中国人が「最も嫌いな国」は、日本ではなくなった! https://diamond.jp/s[...] 週刊ダイヤモンド|ダイヤモンド・オンライン 2008-02-28
[137] 웹사이트 「反日の中国人」はどれだけ存在するか? http://news.searchin[...] サーチナ 2009-06-27
[138] 웹사이트 好きな国アンケート、米国や日本のランクインに「納得できない」-中国 http://news.searchin[...] サーチナ 2009-12-31
[139] 뉴스 朝日新聞 2010-08-03
[140] 웹사이트 오라토리오
[141] 뉴스 反日デモ、実は官製=政府系学生会が組織-香港紙 http://www.jiji.com/[...] 2021-09-00 #날짜 정보가 부정확하여 임의로 지정
[142] 서적 (제목 없음)
[143] 뉴스 南京市、「精神日本人」行為に処罰条例、12月13日施行―中国メディア https://www.recordch[...] 2018-11-26
[144] 서적 朝鮮王朝時代の世界観と日本認識 明石書店 2008-00-00 #월, 일 정보 부족
[145] 서적 朝鮮王朝実録
[146] 서적 中世倭人伝 岩波新書 1993-00-00 #월, 일 정보 부족
[147] 서적 朝鮮からみた華夷思想 山川出版社 2003-00-00 #월, 일 정보 부족
[148] 서적 朝鮮王朝実録
[149] 참고자료 小中華思想
[150] 서적 朝鮮時代の人々の世界観と日本認識 2008-00-00 #월, 일 정보 부족
[151] 서적 扶桑録 江戸時代第二次(元和三)朝鮮通信使の記録 日朝協会愛知県連合会 1988
[152] 서적 日東壮遊歌 平凡社 1999
[153] 서적 1999
[154] 서적 朝鮮時代後期の通信使使行員の日本認識――一七六四年甲申通信使の元重挙を中心に 2008
[155] 백과사전 世界大百科事典
[156] 서적 In Korea with Marquis Ito https://archive.org/[...] C. Scribner's sons 1908
[157] 뉴스 「相互認識」 東アジア・イデオロギーと日本のアジア主義 https://www.jkcf.or.[...] 日韓歴史共同研究 2005-06
[158] 뉴스 台湾は親日的なのに、韓国が反日的なのはなぜか? 明治初期の「バグ」が一因に https://dot.asahi.co[...] 2019-09-27
[159] 뉴스 台湾は親日的なのに、韓国が反日的なのはなぜか? 明治初期の「バグ」が一因に https://dot.asahi.co[...] 2019-09-27
[160] 뉴스 韓国が日本に反発するのは、王朝があったから? https://jbpress.isme[...] 日本ビジネスプレス 2021-03-19
[161] 뉴스 韓国が日本に反発するのは、王朝があったから? https://jbpress.isme[...] 日本ビジネスプレス 2021-03-19
[162] 뉴스 韓国が日本に反発するのは、王朝があったから? https://jbpress.isme[...] 日本ビジネスプレス 2021-03-19
[163] 뉴스 韓国が日本に反発するのは、王朝があったから? https://jbpress.isme[...] 日本ビジネスプレス 2021-03-19
[164] 웹사이트 12年間 韓国大使を務めた武藤正敏氏に聞く“元徴用工”問題の今後 https://www.fnn.jp/p[...] フジニュースネットワーク|FNN 2019-02-13
[165] 서적 朝鮮/韓国ナショナリズムと「小国」意識―朝貢国から国民国家へ ミネルヴァ書房
[166] 서적 大統領李承晩博士儒教談話集
[167] 서적 朴正煕選集2 国家・民族・私 鹿島研究所出版会
[168] 서적 朴正煕選集1 韓民族の進むべき道 鹿島研究所出版会
[169] 서적 日韓新考 産経新聞社
[170] 서적 「反日」という甘えを断て 再び、韓国民に告ぐ! 祥伝社
[171] 뉴스 일본 사회 신문 일본 사회 신문 2013-08-18
[172] 간행물 동아시아의 대일 논조 - 흔들리는 중한의 일본 보도 시사 통신 2008-06-13
[173] 웹사이트 【친서 반송】반일에 브레이크 걸리지 않아 이 대통령, 강경 외교로 인기 얻기(1/2페이지) http://sankei.jp.msn[...] 산케이 디지털 2012-08-23
[174] 웹사이트 【친서 반송】반일에 브레이크 걸리지 않아 이 대통령, 강경 외교로 인기 얻기(2/2페이지) http://sankei.jp.msn[...] 산케이 디지털 2012-08-23
[175] 위키 한국에서의 일본 대중문화의 유입 제한
[176] 뉴스 한국 지상파 방송에서 일본 가수가 일본어 노래 최초 생방송 http://japanese.yonh[...] 연합뉴스 2010-09-13
[177] 서적 더 재패니즈 - 일본인 문예춘추 1979-06-01
[178] 논문 마쓰모토 아쓰하루 저 『한국 "반일주의"의 기원』 http://harc.tokyo/wp[...] 모라로지 연구소 2019
[179] 뉴스 조선일보 기자에게 질문: 여당 의원의 자위대 행사 출석은 사실인가 http://www.chosunonl[...] 2014-08-08
[180] 간행물 한국 드라마 "일본 싫어" 사정 엣, 욘사마까지가 반일!? 문예춘추 2004-08
[181] 뉴스 韓国の安全保障脅かす国「1位北朝鮮・2位日本」 http://japanese.chos[...] 2006-04-30
[182] 뉴스 韓国人の「最も嫌いな国」は日本、でも「最も見習うべき国」も日本 https://www.recordch[...] 2008-10-05
[183] 뉴스 日本が最大の脅威国 韓国の世論調査 竹島問題が影響 http://sankei.jp.msn[...] 2008-08-16
[184] 간행물 『放送研究と調査』 2010年11月号 「日韓をめぐる現在・過去・未来 ~日韓市民意識調査から~」 https://web.archive.[...] NHK放送文化研究所 2010-11-01
[185] 간행물 『放送研究と調査』 2010年11月号 「日韓をめぐる現在・過去・未来 ~日韓市民意識調査から~」 https://web.archive.[...] NHK放送文化研究所 2010-11-01
[186] 간행물 『放送研究と調査』 2010年11月号 「日韓をめぐる現在・過去・未来 ~日韓市民意識調査から~」 https://web.archive.[...] NHK放送文化研究所 2010-11-01
[187] 뉴스 韓国の中高校生「1番の敵は日本」 北の2倍、中国は1割 http://news.searchin[...] 2011-06-26
[188] 뉴스 韓国小学生86%「日本が嫌い」…嫌いな国アンケートで圧倒的 http://news.searchin[...] 2013-10-10
[189] 뉴스 台湾人だけが知る、志村けんが台湾に愛された深い理由 https://www.newsweek[...] 2020-04-03
[190] 논문 中国国民党馬英九政権の対日政策 2008-10-12 # 10,11,12월 모두 포함하여 표기
[191] 뉴스 (3/7)台湾も慰安婦問題で安倍首相に抗議 http://www.nikkei.co[...] 2007-03-07
[192] 웹사이트 Tipei Times Feb、06、2006 http://www.taipeitim[...]
[193] 보도자료 台湾における対日世論調査 http://www.koryu.or.[...] 日本台湾交流協会 2009-04-22
[194] 보도자료 台湾における対日世論調査 http://www.koryu.or.[...] 日本台湾交流協会 2010-03-01
[195] 뉴스 最も友好的な国は日本、非友好的は「中国大陸」―台湾アンケ http://news.searchin[...] 2009-07-15
[196] 뉴스 どうして台湾は、こんなに親日なんですか? http://r25.yahoo.co.[...] 2007-08-02
[197] 뉴스 中国における「対日感情」に関する考察 各種世論調査結果の複合的分析 https://www.jstage.j[...] アジア政経学会 2008-10-01
[198] 뉴스 「私は台湾人」9割、「日本に好感」8割強―台湾世論調査 https://www.recordch[...] 2021-08-13
[199] 뉴스 Japan to Join U.S. Policy on Taiwan http://www.washingto[...] 2005-02-18
[200] 뉴스 「日本人の誇りを持って」 李登輝氏が高校生に講演 台北 http://sankei.jp.msn[...] 2009-12-18
[201] 뉴스 台湾が感動した安倍総理の友人発言 https://books.google[...] PHP研究所 2013-05
[202] 뉴스 台湾が感動した安倍総理の友人発言 https://books.google[...] PHP研究所 2013-05
[203] 서적 日台関係史 1945‐2008 東京大学出版会 2009-03-01
[204] 뉴스 道を探る 台湾の未来思い、選挙支援へ動く―第11部〈台湾脈脈〉 http://www.asahi.com[...] 2010-03-23
[205] 뉴스 陳総統:日米との準軍事同盟関係構築の必要性を強調 https://www.roc-taiw[...] 台北駐日経済文化代表処 2006-10-10
[206] 웹사이트 ASEAN7カ国対日世論調査 https://www.mofa.go.[...]
[207] 웹사이트 最近のフィリピン情勢と日・フィリピン関係 - 6.日・フィリピン関係 -(8)日系人調査の項 参照 https://www.mofa.go.[...]
[208] 뉴스 フィリピン外相「日本の再軍備を歓迎」 http://www.chosunonl[...] 2012-12-11
[209] 뉴스 Philippines backs rearming of Japan https://www.ft.com/c[...] 2012-12-09
[210] 뉴스 かつて侵略されたアジアの国々が日本の再軍備を歓迎することは意外―英紙 https://www.recordch[...] 2013-11-30
[211] 뉴스 China may have overplayed its hand on the islands https://www.ft.com/c[...] 2013-11-27
[212] 뉴스 アーミテージ氏が語る新しい日米安全保障体制 https://www.nikkeibp[...] 2006-07-11
[213] 뉴스 ASEANにおける日韓の影響力に大きな差? 初の調査結果に韓国ネット「当然だ」「韓国はこれから」 https://www.recordch[...] 2021-02-17
[214] 서적 悲劇の少女アンネ 偕成社
[215] 기타
[216] 기타
[217] 웹사이트 Americans’ Most and Least Favored Nations http://www.gallup.co[...] Gallup 2008-03-03
[218] 웹사이트 Canada Places First in Image Contest, Iran Last http://www.gallup.co[...] Gallup 2010-02-19
[219] 뉴스 日本「信頼できる」80%で最高 米世論調査、中国も上昇 https://www.47news.j[...] 2009-05-18
[220] 뉴스 アメリカの世論調査から見た“日米関係”と“米中関係”の姿:日米首脳会談で菅首相は何を語るのであろうか https://news.yahoo.c[...] 2021-04-15
[221] 서적 鯨捕りよ、語れ! アートデイズ 2007
[222] 웹사이트 Zhirinovsky in His Own Words: Excerpts From The Final Thrust South https://www.heritage[...] The Heritage Foundation 1994-02-04
[223] 만화 맛있는 인생
[224] 뉴스 렌터카에 반일 슬로건 「일본인에게 작살을 꽂아라」, 호주 https://www.afpbb.co[...] 2008-07-18
[225] 캠페인 whale-safe beer campaign
[226] 블로그 Bryce Eddings' Beer Blog http://beer.about.co[...] 2006-12-23
[227] 보도자료 오스트레일리아에 있어서의 대일 여론 조사 결과 https://www.mofa.go.[...] 외무성 2018-12-28
[228] 웹인용 2017 BBC World Service poll https://www.globesca[...] 영국방송협회 BBC 2017-07-04
[229] 웹인용 Japanese Public’s Mood Rebounding, Abe Highly Popular http://www.pewglobal[...] Pew Research Center 2013-07-11
[230] 웹인용 Positive Views of Brazil on the Rise in 2011 BBC Country Rating Poll https://globescan.co[...] 영국방송협회 BBC 2011-03-07
[231] 웹인용 보관된 사본 http://m.ohmynews.co[...] 2016-08-29
[232] 뉴스 독일 언론이 보는 반일감정과 역사교과서 http://www.ohmynews.[...] 2009-04-18
[233] 웹인용 일본군 동학농민 학살 '진중일지' 공개 https://www.joongang[...] 2023-04-07
[234] 웹인용 전북 서포터스, '일본 지진축하' 걸개로 물의 https://www.chosun.c[...] 조선일보 2023-04-29
[235] 웹인용 역사 왜곡 논란 '전라도 천년사' 공개⋯친일·식민사관 의견 수렴 거친다 https://www.jjan.kr/[...] 전북일보 2023-04-29

관련 사건 타임라인

( 최근 20개의 뉴스만 표기 됩니다. )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