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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참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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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5·3 참변은 1928년 5월 3일, 중국 지난에서 국민혁명군과 일본군 간에 발생한 무력 충돌 사건이다. 당시 중국은 군벌 할거와 내전으로 혼란스러운 상황이었고, 일본은 자국민 보호와 경제적 이권을 명분으로 제2차 산둥 출병을 단행했다. 국민혁명군의 지난 진입 이후 일본군과 충돌이 발생했고, 이 과정에서 중국 외교관 차이궁스가 살해되는 등 양측의 피해가 커졌다. 일본군은 지난을 점령하고, 이 사건은 장제스의 대일 정책 변화와 일본 군부의 만주 침략을 위한 도발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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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참변 - [전쟁]에 관한 문서
사건 개요
이름지난 사건 / 5·3 참변
다른 이름지난 참안 (济南惨案), 오삼참안 (五三慘案)
일본어 이름済南事件 (지난지켄)
시기1928년 5월 3일 - 1928년 5월 11일
위치중화민국 산둥성 지난시
결과일본군의 승리; 일본군, 1929년 3월까지 지난 점령
교전 세력
교전국 1국민정부
교전국 2일본 제국
지휘관 및 지도자
국민정부장제스
국민정부 부지휘관펑위샹
일본 제국후쿠다 히코스케
일본 제국 부지휘관사이토 류
병력 규모
국민혁명군국민혁명군 제1집단군
국민혁명군 제2집단군 (국민군)
일본 제국 육군관동군
제6사단
사상자 및 피해
국민정부 및 중국 민간인사망 6,123명, 부상 수천 명
일본군사망 26명, 부상 157명, 일본인 거류민 사망 13-16명

2. 배경

1920년대 중국은 군벌 할거와 내전으로 혼란스러웠고, 국민당은 북벌을 통해 중국 통일을 목표로 했다.

일본은 산둥성에 대한 경제적 이권과 자국민 보호를 명분으로 군대를 파견했다. (第一山東出兵|제1차 산둥 출병일본어) 1927년 난징 사건, 한커우 사건 등 외국인과 중국 군대 간의 충돌이 발생하면서, 일본은 중국 내 자국민 안전에 대한 우려를 표명했다.[54]

장제스는 일본과의 충돌을 피하고자 했으나, 일본은 장쭤린을 지원하며 북벌을 견제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당시 지난(济南)은 주요 상업 도시였으며 많은 외국인이 거주하고 있었다. 1927년 말 일본 외무성 조사에 따르면, 산둥성 내 일본인 거류민 수는 총 16,940명이었고 투자 총액은 약 1.5억에 달했다.[11]

제1차 국공 합작이 종료되고, 1928년 1월 장제스가 국민혁명군 총사령관에 취임하면서 북벌이 재개되었다. 4월 7일, 중국 국민당은 북벌을 선언했고, 전란은 다시 산둥성으로 확대되었다.

2. 1. 제1차 산둥 출병

국민정부북벌을 진행하던 중, 1927년 3월 난징 사건과 4월 한커우 사건으로 외국인과 외국의 재산이 공격받는 사건이 발생했다.[54] 일본을 포함한 외세는 중국 내 자국의 경제적, 정치적 이익의 안전에 대해 우려하며 난징 사건의 재발을 막고자 했다.[1]

1927년 5월부터 6월까지 국민혁명군이 북양정부와 연합한 "안국군"을 산둥성으로 후퇴시키자, 일본 정부는 산둥성 일대를 일본의 영향권으로 판단하고 국민혁명군의 진격을 예상하여 일본 민간인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관동군 4천 명을 칭다오와 지난에 배치했다. 이를 제1차 산둥 출병이라고 부른다.

1927년 7월 상업 지구에 주둔한 일본군. 배경에는 지난역이 보인다.


국민혁명군 사령관 장제스는 일본군과의 충돌을 피하고자 했고, 일본 총리 다나카 기이치 역시 군대 파견이 일본인과 일본의 경제적 이익을 보장하기보다는 중국군과의 충돌을 야기할 수 있음을 인지하고 있었다. 국민당 내 우한과 난징 파벌 간의 분열을 해결하기 위해 장제스는 국민혁명군 사령관직을 사임하고 북벌을 잠시 중단하여 분쟁을 피했다. 국민혁명군의 위협이 사라지자 일본은 1927년 9월 지난에서 철수했다.

2. 2. 장제스와 다나카 기이치의 회담

난징 사건과 같은 분쟁이 재발하는 것을 막고 일본의 추가 개입을 방지하기 위해, 1927년 11월 5일 장제스는 일본 총리 다나카 기이치를 만났다.[54] 회담은 뚜렷한 성과 없이 끝났지만, 장제스는 일본과 협력하여 양측이 조정할 수 있는 해결책을 모색하는 방식을 유지했다.[54] 장제스는 외세의 지배를 끝내고 국가를 통일하겠다는 약속을 통해 자신의 정당성을 강화하고자 했다.[54]

3. 사건의 전개

1928년 4월, 장제스북벌을 재개하자 일본은 '제2차 산둥 출병'을 통해 군대를 파견했다. 이는 국민당과 북양 정부 모두에게 주권 침해로 비판받았다. 일본은 난징 사건과 같이 중국 병사나 민중의 약탈, 폭행이 지난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는 불안감을 이유로 내세웠지만,[12] 실제로는 장쭤린을 지원하고 만주와 화북에서의 일본 이권을 유지하려는 목적도 있었다.[12]

마쓰이 이와네는 산둥 출병의 이유로 장제스의 지위 변동, 남군(국민혁명군) 내부 문제, 남군의 질 저하, 남군 내 공산주의 세력의 존재 등을 들었다.[13]

일본군은 지나 주둔군 톈진 부대와 제6사단 일부를 파견하여 4월 20일 지난에 도착했다.[14] 이후 증원군이 도착하여 5월 2일에는 총 3539명의 병력이 집결되었다.[14] 일본군은 거류민 보호를 명목으로 경비 계획을 수립하고, 4월 29일에는 경비 구역에 소요 공사를 시작했다. 궁민이나 도주하는 북군 병사에 의한 약탈이 있었지만, 일본 경비 지구 내에서는 거의 발생하지 않았다.[14][16]

1928년 4월부터 5월 사이 국민혁명군, 일본군 및 북양군의 이동 경로.


1928년 4월, 장제스는 북벌을 재개하여 쑨촨팡 군대를 격퇴하고 산둥성으로 진격했다. 쑨촨팡은 4월 17일부터 18일까지 철도를 통해 지난에서 퇴각했다.[14] 일본은 다나카 기이치 총리의 결정으로 4월 19일 제6사단을 지난에 배치했다. (제2차 산둥 출병)[14][15] 4월 20일부터 4,000명 이상의 일본군 병력이 지난에 도착했고, 국민당 정부는 이를 주권 침해로 비난했다.[15]

국민혁명군은 지난을 협공하며 철도를 파괴했고, 일본군과 충돌하게 되었다. 1928년 4월 29일 북양 군벌군이 루커우 황하 철교를 건너 지난을 버리고 도망치면서 혼란이 가중되었으나, 일본인 거주 지역은 일본군의 보호를 받았다.[17] 국민혁명군은 4월 30일과 5월 1일에 걸쳐 지난을 점령했다.[17] 5월 2일, 장제스는 일본군과 협상하여 사이토 류 장군에게 지난에서 혼란이 없을 것이라고 보장하고, 국민혁명군에게 지난 북쪽으로 빠르게 전진하라고 명령했다.[18][19] 사이토는 일본군 철수 준비를 시작했고, 후쿠다 히코스케 장군도 이를 승인하여 일본군은 5월 2일에서 3일 사이에 철수를 시작했다.[18]

1928년 5월 3일, 지난에서 일본군국민혁명군 사이에 충돌이 발생했다. 일본 측은 허야오주 장군 휘하의 중국군이 만주일일신문사를 습격하고 일본군에게 발포하여 전투가 시작되었다고 주장한다.[6][19][20][21] 반면, 장제스는 아픈 중국 군인이 치료를 받으려다 일본군에게 저지당하고 살해당했다고 기록했다.[6][22]

후지타 에이스케 칭다오 총영사는 국민혁명군의 조직적인 충돌이라고 주장했고,[21] 장제스는 일본군에 의한 북벌 방해라고 비난했다.[23] 이 충돌은 국민혁명군과 일본군 간의 전면적인 분쟁으로 확대되었다.

5월 3일 밤, 일본군은 중국 외교관 차이궁스와 직원들을 살해했다.[42] 일본 측은 외교 공관에서 먼저 공격을 받았다고 주장하며, 차이궁스가 외교관인지 몰랐고 총검으로 신체를 훼손할 수 없다고 반박했다.[28][45] 반면, 중국 측은 일본군이 차이궁스 등을 고문하고 잔혹하게 살해했다고 주장한다. 중국 측 주장에 따르면, 차이궁스는 코, 귀, 혀가 잘리고 눈이 도려내진 채 처형되었으며,[44] 다른 직원들은 옷이 벗겨진 채 채찍질을 당하고 뒷마당으로 끌려나가 기관총에 맞아 살해되었다.[44]

일본은 한국만주에서 증원군을 파견하여(제3차 산둥 출병) 1928년 5월 7일부터 일본군이 지난에 도착하기 시작했다.[9] 일본은 국민혁명군에게 폭력 행위 관련자 처형, 무장 해제, 반일 선전 금지 등 굴욕적인 요구 조건을 제시했다.[16][41]

5월 8일, 일본군은 지난에 대한 전면 공격을 개시했다.[46][6][12][23] 5월 9일부터 5월 10일까지 일본군은 포병을 동원하여 옛 성벽 도시를 폭격했다.[9] 지난 구시가지 민간인들은 경고를 받지 못해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41] 일본군은 성 안에 들어가 방화하고 사람들을 무차별 살상했다고 전해진다.[47][48][49] 5월 11일 아침, 일본군은 지난을 완전히 점령했다.[50]

3. 1. 제2차 산둥 출병

1928년 4월, 장제스북벌을 재개하자 일본은 '제2차 산둥 출병'을 통해 다시 군대를 파견했다. 일본군의 파병은 북양 군벌의 요청에 의한 것이 아니었음에도, 국민당과 북양 정부 모두 일본의 주권 침해를 비판했다. 국민혁명군이 지난에 접근하면서 일본군과의 긴장이 고조되었다.

장제스의 북벌 재개로 약 1년 전의 난징 사건과 한커우 사건과 같이 중국 병사나 민중의 약탈, 폭행이 지난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는 불안감이 일본 거류민들 사이에 생겼다. 일본 측은 불상사 발생 방지와 거류민 보호를 이유로 4월 하순에 출병했다(제2차 산둥 출병).[12] 진정한 목적은 장제스의 북벌이 진전되면 일본이 지원하는 장쭤린이 궁지에 몰리고, 만주와 화북에서의 일본 이권도 재검토 압력이 가해질 것이라고 보고, 일본의 권익 유지를 목적으로 북벌을 견제하기 위한 것이었다고도 한다.[12]

마쓰이 이와네 (당시 참모본부 제2부장)에 따르면, 산둥 출병의 이유는 다음과 같다.[13]

# 남군(국민혁명군) 총사령관 장제스의 지위 변동. 남군은 작년과 상당히 조직이 달라졌고, 남군 내부에 객군이 많아 장제스의 명령은 객군 무장에게 저지되어 철저히 이행되지 않는다.

# 남군의 소질이 나빠지고, 이에 따른 위험이 증가했다. 오늘의 남군은 대부분 속성 병사로, 이른바 병적과 다를 바 없는 군대이므로 위험하다.

# 남군 내부에 공산계가 잔존해 있다. 작년의 난징 사건으로 남군 간부에서도 극좌 공산당계의 도태를 꾀했지만,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공산당이 스며들어 손 쓸 수 없는 상태이며, 어떤 군대와 같은 곳은 실제로 공공연히 러시아인 교관 또는 지휘관을 두고, 맹렬히 공산주의를 선전하며, "제국주의 타도"를 외치며 항상 일본을 적시하고 있다.[13]

당시 주요 신문의 사설은 내정 간섭이 되지 않도록 우려를 표명했지만, 대부분 출병을 부득이하다는 내용이었다.

지나 주둔군의 톈진 부대 3개 중대(임시 지난 파견대)와 내지에서 제6사단의 일부가 파견되어, 4월 20일 오후 8시 20분, 임시 지난 파견대가 지난에 도착했다.[14] 4월 26일 오전 2시 반, 제6사단의 선발 부대인 사이토 토시유키 소장 지휘 하의 혼성 제11여단이 지난에 도착했다. 북군 지원의 오해를 피하기 위해, 제6사단 (사단장 후쿠다 히코스케)의 주력은 칭다오에 머물렀지만, 4월 29일 남군에 의해 교제철도와 전선이 파괴되었기 때문에 칭다오를 출발하여, 철도 파괴 지점을 수리하면서 진격하여, 5월 2일 오전 11시 반에 지난에 도착했다. 이 결과, 지난에 집결된 병력은 3539명이 되었다.[14]

4월 21일, 임시 지난 파견대는 "임시 지난 파견대 경비 계획"[15]을 작성하여, 이 경비 계획에 기초하여 거류민 보호에 임했다. 4월 27일, 사이토 토시유키 경비 사령관은 전 경비 계획을 수정하여 "혼성 제11여단 경비 계획"을 작성했다. 수정점은 경비 구역을 상업 지대 전체의 약 8할로 축소하고, 초병선을 수비 구역으로 확대하여, 수비 구역으로의 중국군 병사의 진입을 금지한 것이었다. 4월 29일, 북군 퇴각 부대의 상업 지대 안팎을 통과하는 횟수가 증가하고, 북군과 경찰의 경비력이 급속히 쇠퇴했기 때문에 사이토 경비 사령관은 29일 오후 1시에 각지 수비대를 제1기 경비의 부서에 배치하고, 오후 9시 반에 수비 구역의 소요 공사(모래주머니, 입사 산병호, 방마, 철조망 등의 설치)를 시작했다. 궁민이나 도주하는 북군 병사에 의한 것으로 보이는 약탈이 일어났지만, 일본의 경비 지구 내에서는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14][16]

3. 2. 국민혁명군의 지난 진입



1928년 4월, 장제스가 다시 권력을 잡으면서 북벌을 재개했다. 국민혁명군은 쑨촨팡의 군대를 빠르게 격퇴하고 산둥성으로 진격했다. 쑨촨팡은 4월 17일부터 18일까지 철도를 통해 지난에서 퇴각하여 국민혁명군에게 길을 열어주었다.[14] 일본은 쑨촨팡이 산둥성 방어에 실패했다는 것을 알고, 다나카 기이치 총리는 군사 고문들의 조언에 따라 4월 19일 제6사단을 지난에 배치하기로 결정했다. 일본에서는 이를 "제2차 산둥 출병"이라고 불렀다.[14][15] 이는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군이 명령 없이 일방적으로 행동한 첫 번째 심각한 사례였다.[16] 4월 20일 칭다오에서 출발한 475명의 일본군을 시작으로, 4,000명 이상의 일본군 병력이 지난에 도착했다. 국민당 정부는 일본의 지난 출병을 중국의 주권을 침해한 것이라고 비난했다.[15]

국민혁명군은 지난을 협공하면서 칭다오와 베이징으로 가는 철도를 파괴했고, 이로 인해 일본군과 충돌하게 되었다. 1928년 4월 29일 북양 군벌군이 루커우 황하 철교를 건너 지난을 버리고 도망치면서 혼란이 가중되었다. 군벌들은 지난을 떠나면서 약탈을 자행했지만, 일본인 거주 지역은 일본군의 보호를 받았다.[17] 산둥성에 일본 제국 육군이 주둔하는 것에 대한 중국 민중의 불만은 점점 뚜렷해졌고, 일본군의 주둔은 1914년 칭다오 전투와 마찬가지로 일본이 산둥성을 장악하려는 새로운 시도로 간주되었다. 국민혁명군은 4월 30일과 5월 1일에 걸쳐 지난으로 진군하여 무사히 점령했다.[17] 5월 2일, 장제스는 일본군과 협상을 시작하여 사이토 류 장군에게 지난에서 어떠한 혼란도 없을 것이라고 보장하고, 잠재적인 충돌을 피하기 위해 국민혁명군에게 지난에서 북쪽으로 빠르게 전진하라고 명령했다.[18][19] 협상 이후 사이토는 일본군을 철수시키기 위한 준비를 시작하기로 결정하고 지난의 모든 안전 문제는 장제스에게 맡겨질 것이라고 말했다. 후쿠다 히코스케 장군은 이 결정을 승인했고, 일본군은 5월 2일에서 3일 사이에 철수를 시작했다.[18]

3. 3. 5월 3일 충돌

1928년 5월 3일, 지난에서 일본군국민혁명군 사이에 충돌이 발생했다. 이 충돌의 발단에 대해서는 양측의 주장이 서로 다르다.

일본 측은 허야오주 장군 휘하의 중국군이 만주일일신문사를 습격하여 소유주를 폭행했고, 이를 저지하려던 구메카와 요시하루 대위의 일본군에게 중국군이 발포하여 전투가 시작되었다고 주장한다.[6][19][20][21] 반면, 장제스의 기록에 따르면, 아픈 중국 군인이 현지 기독교 병원에서 치료를 받으려다 일본군에게 저지당했고, 이 과정에서 일본군이 중국 군인과 노동자를 사살했다고 한다.[6][22]

다른 중국 측 자료에서는 여러 가지 다른 주장이 나오는데, 이는 중국 측이 자신들의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이야기를 꾸며냈다는 인상을 주기도 한다.[22] 그러나 일본 측의 기록 역시 황구둔 사건과 만주사변에서 관동군이 사용했던 허위 정보 전술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평가되기도 한다.[14]

후지타 에이스케 칭다오 총영사는 국민혁명군에 의한 조직적이고 계획된 충돌이라고 진술했다.[21] 장제스는 이 사건을 일본군에 의한 북벌 방해라고 비난했다.[23]

제6사단의 전투상세보고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 이 학살 행위가 계획적인 것이었는지 여부는 아직 불분명하지만, 장제스와 영사의 문답 및 장제스 등 고위 장교들의 언명으로 미루어 보아, 일본군과의 충돌을 가능한 한 피하려는 방침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 사건은 상급 장교의 계획적인 폭거가 아니라, 계획적이라고 하더라도 하급 일부 부대의 기도에 기초한 것으로 판단된다.


장제스가 국민혁명군은 군기가 엄정하여 사건을 일으킬 만한 일이 결코 없을 것이라고 재삼 언명했던 점, 난징 국민 정부 내부에서는 중국 공산당을 배제했지만 공산당 혐의가 짙은 분자들이 은밀히 중국 국민당 붕괴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고, 광둥파는 실수를 틈타 다시 광둥 좌파의 지도권을 회복하려 했으며, 난징 국민 정부와 혁명군 안에서 펑위샹이 세력을 키워 군비 부족으로 인한 전비 불충분을 이유로 주저하는 장제스를 억지로 북벌에 나서게 했으며, 사건을 일으킨 군대가 대부분 공산주의적 색채가 강했던 지휘관 허야오주와 그의 휘하, 그리고 펑위샹의 측근 부하인 팡전우와 그의 휘하 부대였으며, 사건 해결을 기다리지 않고 산둥 관할을 두고 장제스와 펑위샹의 다툼이 벌어졌다는 점 등에서, 장제스를 궁지에 몰아넣으려는 펑위샹의 의도가 작용했을 가능성이 적지 않다. 또한, 남방 선전원과 함께 중국 공산당 당원들이 산둥성에 다수 침투하여 책동했다. 가토 텐신 총영사의 보고에 따르면, 그들은 최근 국민당으로부터 극심한 압박을 받은 관계상 국민당을 혐오하는 것이 뱀과 전갈과 같았고, 또한 전란을 최대한 길게 끌어 자파의 책동 기회를 얻으려는 동기에서 모든 수단을 강구하여 북벌을 방해하려 했다는 것이다.[14]

누가 충돌을 시작했는지와 관계없이, 이 충돌은 국민혁명군과 일본군 간의 전면적인 분쟁으로 확대되었다.

3. 4. 차이궁스 등 외교관 피살 사건

5월 3일 밤, 일본군은 중국 외교관 차이궁스와 그의 직원들을 살해했다.[42] 이 사건은 5·3 참변의 주요 사건 중 하나로, 일본 측과 중국 측의 주장이 크게 엇갈린다.

일본 측은 차이궁스 등이 소속된 외교 공관에서 먼저 공격을 받았다고 주장한다. 일본군 측 주장에 따르면, 건물 3층에서 일본군에게 총격을 가해 일본군 2명이 사망했기 때문에 응사하여 이들을 사살했다.[28] 또한, 차이궁스가 외교관이라는 사실을 몰랐으며, 총검으로는 그의 코와 귀를 자를 수 없다고 반박했다.[45]

반면, 중국 측은 일본군이 차이궁스 등을 고문하고 잔혹하게 살해했다고 주장한다. 중국 측 주장에 따르면, 차이궁스는 코, 귀, 혀가 잘리고 눈이 도려내진 채 처형되었으며,[44] 다른 직원들은 옷이 벗겨진 채 채찍질을 당하고 뒷마당으로 끌려나가 기관총에 맞아 살해되었다.[44]

사이토 류 소장은 중국 측의 주장이 "선전"이며, 차이궁스는 일본군과 중국군 사이의 전투 중에 총살되었을 뿐이라고 반박했다.[45]

3. 5. 일본군의 공세와 지난 점령

일본은 한국만주에서 증원군을 파견하여(제3차 산둥 출병) 1928년 5월 7일부터 일본군이 지난에 도착하기 시작했다.[9] 일본은 국민혁명군에게 다음과 같은 굴욕적인 요구 조건을 제시했다.[16][41]

  • 폭력 행위에 관련된 고급 무관 처형
  • 일본군 앞에서 일본군과 항쟁한 군대의 무장 해제
  • 12시간 이내에 신좡(辛荘)・장자좡(張家荘)의 군대 철수
  • 일체의 반일적 선전 엄금
  • 남군은 지난 및 자오저우-지난 철도 양쪽 연선 10킬로미터 이내의 지역에 주둔하지 말 것


일본은 중국이 정해진 시간 내에 요구 사항을 충족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러한 요구는 일본군의 사기를 높이고, 중국을 위협하며, 외국인들에게 일본 군대의 "결의"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6][22][41] 예상대로 이 요구는 중국 측에 굴욕적이고 수용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졌다.[13][14][27][28]

5월 8일, 일본군은 지난에 대한 전면 공격을 개시했다.[46][6][12][23] 5월 9일부터 5월 10일까지 일본군은 포병을 동원하여 국민혁명군의 잔존 병력이 있던 옛 성벽 도시를 폭격했다.[9] 지난 구시가지의 민간인들은 일본의 폭격에 대한 경고를 사전에 받지 못했고, 이로 인해 많은 사상자가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41] 일본군은 성 안에 들어가 주거·건물에 방화하고, 길거리에 있는 사람들을 무차별적으로 살상했다고 전해진다.[47][48][49] 5월 11일 아침, 일본군은 지난을 완전히 점령했다.[50] 중국 측에서는 일본군이 병원의 남군 부상병 200명과 민간인 2000명 이상을 살해했다고 주장한다.[51]

4. 사건의 여파

장제스는 1928년 5월 10일에 일본에 사과하고 허야오주를 해임했다. 그 후, 장제스는 매일 일기에 "일본인을 죽이는 방법"을 쓰기로 결심했고, 일본을 중국의 가장 큰 적으로 간주했다. 지난에서의 갈등에서 물러난 것을 정당화하면서, "원수를 갚기 위해서는, 사람은 강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그는 중국 육군 사관생도에게 강의할 때, 지난의 수치를 씻는 데 힘쓸 것을 촉구했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일본에 대한 증오는 감추었다.

일본의 다나카 기이치 수상 역시 분쟁을 피하고자 장제스와 협상을 시작했다. 1929년 3월, 양측은 지난 사건에 대한 책임을 분담하고 분쟁을 해결하며, 산둥성에서 일본군을 모두 철수시키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일본 군부의 독단적인 행동과 민간 정부의 통제력 부족을 드러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5·3 참변과 이후 일본의 지난 점령에도 불구하고, 장제스의 군대는 중국 북부에서 통제력을 계속 확장했고, 중국 민족주의 세력에 대한 일본군의 불신은 커져만 갔다. 이 사건은 이후 만주사변 등 일본의 침략 확대로 이어지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4. 1. 대한민국에의 영향

지난시에는 5·3 참변을 기리기 위한 기념비가 세워져 있으며, 2000년부터 매년 5월 3일 오전 10시에 사이렌을 울리고 있다.[49]

5. 논란

5·3 참변과 관련하여, 당시 희생자들의 사진이 잘못 사용된 사례들이 있다.

일본 연구원 하라 마사요시에 따르면, 병원에서 부검을 받는 학살당한 일본 시민들의 시신 사진이 중국 신화통신 등에서 731 부대가 중국인을 대상으로 생물학 무기 실험을 하는 사진으로 잘못 사용되었다.[53] 이 사진은 일본에서도 유사하게 잘못 사용된 적이 있다.[53]

5. 1. 사진 오용 문제

일본 연구원 하라 마사요시에 따르면, 지난 병원에서 부검을 받는 학살당한 일본 시민들의 시신 사진이 중국 신화통신 등 중국 출판사에 의해 일본 731 부대가 중국인을 대상으로 생물학 무기 실험을 하는 사진으로 잘못 사용되었다.[53] 이 사진들은 지린성 박물관과 중학교 교과서에도 등장했다.[53]

이와 유사한 사진은 일본에서도 잘못 사용된 적이 있다. 아와야 겐타로가 『아사히 저널』에 발표한 논문 「도쿄 재판으로의 길」[52]에서는 이 사진을 일본군이 진행한 세균에 의한 인체 실험의 한 장면으로 소개했다.[53] 1992년 11월 21일 TV 아사히의 「전쟁이란 이렇게 비인간적인 행위를 낳는 것인가」라는 프로그램에서는 전직 군의관과 위생병이 지린성 박물관에 걸려있는 사진(실제로는 지난 사건 희생자들의 검시 사진)을 731부대의 세균전 인체 실험 사진으로 오인하고 사죄하기도 했다.[53] 이러한 사진 오용 문제는 하라 마사요시의 조사로 밝혀졌다.[53]

6. 분석

역사학자 아키라 이리에는 지난 사건이 일본군의 지휘 체계 취약성과 민간 정부의 무력함을 보여준다고 지적했다.[54] 군부의 독단적인 행동은 장제스의 민족주의적 대응을 유발했고, 만주에서의 일본 이익을 위협할 것이라는 두려움을 야기했다.[54] 지난 사건은 황고둔 사건, 만주사변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사건들의 전조였다.[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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